여이현은 여진그룹의 파티에서 한 번 밝힌 적 있었다. 그러나 일반인은 아직 모르는 상태였다. 오늘 갑자기 계획 없이 밝힌 건 그와 노승아의 스캔들을 보기 싫었기 때문이다.“장난 아니시죠? 대표님의 결혼 소식이 어떻게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을 수가 있죠? 오늘이 만우절도 아닌데...”“저 결혼했어요. 이런 일로 장난칠 일도 없고요. 저는 아내와 만난 지 7년 됐고, 결혼은 3년 전에 했어요. 이상한 기사 때문에 제 아내가 오해하는 일은 없었으면 해요.”노승아의 표정은 아주 부자연스러웠다. 여이현이 갑자기 결혼 사실을 밝힐 줄은 몰랐던 것이다.‘일이 왜 이렇게 된 거야? 예정에 없었던 일이잖아.’그녀는 속으로 아무리 화가 나도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를 지어야 했다. 손은 불안감을 애써 참아보려는 듯 꽉 움켜쥐었다.그녀가 원하는 것이라면, 여이현은 모든 것을 들어줬다. 연예계에서도 모자람 없이 띄워줬다. 하지만 딱 감정 문제에서만 번마다 회피했다.오늘 그녀가 계획한 대로 기사가 나가면 여진그룹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싫다면 후에 기사를 막으면 그만인 일이었다. 그러나 대놓고 사실을 밝히는 건 그녀를 우습게 만드는 것이었다.여이현은 오늘 직접 시상식에 참석했다. 물론 회사 대표로서 참석한 것이다. 다른 건 말할 필요 없었다. 이미 충분히 많은 것을 말하기도 했다.인터뷰를 그만해야겠다는 것을 눈치껏 느낀 배진호는 앞으로 나가서 말했다.“죄송합니다. 대표님께 중요한 일정이 있으셔서 이만 가보셔야 합니다.”노승아는 묵묵히 두 사람을 뒤따라 함께 떠났다.“아내분과 만난 지 7년 되었다고 하셨죠? 이에 관해 조금만 더 말해주실 수 없을까요?”기자들은 포기하지 않고 달려들었다. 7년이라는 단서만으로도 조사는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더 많은 단서를 원했다.여이현이 멀어져가는데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달려들었다. 다행히 경호원이 막아선 덕분에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여이현 등은 밖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던 차에 올라타서 카메라를 막았다. 멀
“언니...”“내가 이 자리에 오기까지 겪은 풍파가 어디 한둘이야? 내가 찍은 드라마가 망했다고 해도, 내 인기가 떨어졌다고 해도, 그건 다 내 문제야. 이 큰 연예계에서 나보다 잘난 모든 사람을 시기 질투할 수는 없잖아?”“그게 아니라, 노승아는 스폰서 덕분에...”“그런 말 함부로 하면 안 돼. 다시는 내 귀에 들어오게 하지 마. 내가 어떤 사람인지 네가 더 잘 알잖아. 잘못된 길에 들어서서는 안 돼. 자신을 소중히 여겨야지.”장다희는 자신의 미래를 아주 소중히 여겼다.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다른 사람의 성과를 시기해서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다.그녀는 노승아와 달랐다. 그녀는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온 사람으로서 많은 것을 경험했다. 그러나 노승아는 부잣집에서 태어났다. 태초부터 특권층이었다는 말이다.그래도 그녀는 상관없었다. 자신의 노력으로도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언젠가 꼭 정상에 오를 것이라고 믿었다....차 안의 분위기는 가는 길 내내 아주 무거웠다.여이현은 냉랭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노승아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섣불리 말을 걸지 못하고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회사에 도착하자, 여이현은 바로 차 문을 열고 내렸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 얇고 뾰족한 하이힐을 신은 노승아는 아무리 빨리 걸어도 그를 쫓아갈 수 없었다.“오빠, 아...!”노승아는 황급히 쫓아가다 결국 발을 삐끗하고 말았다. 여이현은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서러운 표정으로 다리를 움켜잡고 눈물을 글썽였다.“나 발목이 삐었어요.”여이현은 가만히 서서 그녀를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기자들 앞에서 그런 말을 하기 전에, 어떤 의미로 들릴지 생각 안 해봤어?”“나는 그냥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했을 뿐이에요. 오빠는 원래도 나한테 중요한 사람이니까요.”“넌 아직도 연예계를 몰라? 아니면 내가 모를 줄 알았던 건가?”여이현은 눈을 가늘게 뜨며 진지하게 말했다.“네가 한 말
바닷속에서 온지유는 숨을 쉴 수 없었다. 어떻게든 올라가려고 발버둥 쳤지만, 커다란 돌이 누르고 있어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녀를 기다리는 건 죽음뿐이었다.아니, 그녀는 죽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시체조차 찾을 수 없는 곳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했다.“난 죽고 싶지 않아!”온지유는 큰 소리로 외치면서 벌떡 일어났다.“어, 일어나셨네요.”그녀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꿈이라는 것을 깨닫고 머리를 돌려보니 베개까지 흠뻑 젖었다.‘아... 나 병원에 있구나.’뒤늦게 정신 차린 그녀는 아랫배를 만지며 물었다.“선생님, 애는... 제 애는...”“아이는 괜찮아요, 환자분.”간호사가 부드럽게 말했다.“구급차에서 내렸을 때 온몸이 흠뻑 젖어 있어서 걱정했는데, 다행히 아이는 무사해요.”“하아... 다행이에요.”온지유는 시름을 놓은 듯 한숨을 쉬었다.“핸드폰이 없으셔서 저희가 보호자께 연락하지 못했어요. 번호를 알려주시면 제가 대신 해줄게요.”온지유는 먼저 주변을 빙 둘러봤다. 다행히 지난번의 그 병원은 아닌 것 같았다. 그곳에는 여이현의 친구가 있어서 무슨 일이 일어나면 숨기기 어려웠다.“네, 그럼 부탁드릴게요.”30분도 채 되지 않아서 백지희가 병원에 도착했다. 그녀는 잔뜩 긴장한 기색으로 물었다.“이게 무슨 일이야? 유산 징조가 있었다는 건 또 무슨 말이고?!”“오늘 회사 일로 항구에 갔다가 강하임 대표랑 만났어. 강하임 기억하지? 지난번 이현 씨를 보는 눈빛이 이상하다고 했던... 아무튼 오늘에는 날 죽이려고 하더라.”그녀는 자초지종을 천천히 설명했다. 전부 듣고 난 백지희는 화가 치밀어 올라서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신고해! 당장 신고해! 이게 살인 미수가 아니고 뭐야! 내가 그 여자 감옥에 보내고 말 거야!”“강 대표도 나랑 같이 바다에 빠졌어. 지금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네. 혹시 죽으면 내 책임이 되는 건 아니겠지?”온지유는 살짝 걱정되는 마음이 있었다. 괜히 그녀가 감옥에 가는 일이 생길까 봐서 말
온지유의 말을 들은 백지희는 눈시울을 붉혔다. 그녀가 다 속상해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무심한 남편이 도와주지 않으니, 온지유는 스스로 모든 것을 이겨내야 했다. 도대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일이 있는지 모르겠다.백지희는 그녀를 꼭 끌어안으며 등을 토닥였다.“내가 같이 있어 줄게. 다 괜찮아질 거야.”온지유는 백지희의 어깨에 기댔다. 함께 해주는 친구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그녀의 편에는 아직 많은 것이 있었다. 그저 여이현이 없달 뿐이다.링거를 맞고 난 온지유는 바로 퇴원했다. 과로와 운동을 조심해야 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백지희는 그녀와 함께 걸어 나가면서 물었다.“이젠... 거기로 돌아갈 거야?”온지유는 잠깐 고민하다가 준비할 것이 있다는 생각에 머리를 끄덕였다.“응, 돌아가야지.”백지희는 온지유를 차에 태우면서 말했다.“알았어. 가서도 계속 연락해.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면 무조건 도울게.”“나 F국으로 가는 항공권 두 장 구해줘.”‘F국?’백지희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설마 여이현이랑 해외여행이라도 가게?”“후에 다시 알려줄게.”...여이현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퇴근할 시간은 아니었다. 그는 회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엘리베이터 입구는 아주 소란스러웠다. 여이현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송서연은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여이현을 본 순간 그녀는 구세주라도 본 것처럼 달려왔다.“대표님! 왜 이제야 돌아오셨어요!”“무슨 일인데요?”여이현은 무덤덤하게 물었다. 송서연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절규하다시피 말했다.“온 비서님이 실종했대요! 온 비서님이... 온 비서님이... 금강의 대표랑 같이 바다에 빠졌어요!”이윤정은 병원에 있었다. 그녀도 온지유의 상황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이 말을 듣고 여이현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손도 덜덜 떨면서 다시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그걸 왜 이제야
“죄송하지만, 피해자분을 찾을 확률은 아주 낮습니다. 오늘 파도가 강해서 먼 곳까지 쓸려갔을 가능성이 높아요. 생존율도 낮을 것으로 예상됩니다.”이런 대답을 들은 여이현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마치 비수에 심장이 찔린 듯한 느낌이었다.그는 구조대원을 꽉 잡으며 외쳤다.“아니에요! 지유는 살아있어요!”구조대원은 여이현을 붙잡은 채 위로했다.“급한 마음은 알겠지만 진정하셔야 합니다. 저희가 못 찾은 대신 다른 곳에서 구조됐을 가능성도 있어요. 이렇게 생각하시면서 잠시 진정하세요. 아직 구조는 진행 중이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임해야 합니다.”“그래요... 구조됐을 수도 있어요...”여이현은 감히 안 좋은 생각을 할 엄두가 안 났다. 온지유가 이런 식으로 자신을 떠날 줄은 단 한 번도 상상한 적 없었다.“오늘 바다에 나간 어선이 바다에 빠진 사람을 몇 명이나 구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중에 피해자분이 있을 수도 있어서 확인하는 중입니다.”구조대원도 확신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여이현은 이토록 작은 희망이라도 필요해 보였다.지금은 어떻게든 좋은 쪽으로 생각해야 할 때이다. 온지유를 찾지 못했더라도 시체를 보기 전에는 함부로 판단할 수 없었다.여이현은 말없이 바다를 바라봤다. 해가 진 하늘을 따라 바다도 무서울 정도로 어두워 보였다.‘다른 사람도 아닌 온지유잖아. 무조건 구조됐을 거야. 무조건 무사할 거야.’이렇게 생각하면서 그는 잠시 이성을 되찾았다.“어선에 구조됐다는 사람들은 어느 병원에 있어요?”“그건 제가 물어봤는데 다들 모르는 눈치였어요. 아무래도 가장 가까운 병원에 보내지 않았을까요?”송서연이 말했다.마음이 급해서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던 여이현은 조사를 지시한 동시에 근처에 병원을 일일이 돌아다녔다.온지유의 물건은 전부 차 안에 있었다. 바다에 빠질 때 몸에 지니고 있었던 건 없었다. 그러니 무작정 돌아다니며 찾을 수밖에 없었다.구조는 저녁까지 계속되었다.“입원한 사람도 있고, 이미 병원을 떠난 사람도 있습니다. 그
강성훈과 정연은 황급히 병실 안에 들어갔다. 강하임이 창백한 안색으로 잠들어 있는 것을 보고, 정연은 눈물을 흘리며 털썩 주저앉았다.“아이고, 하임아. 어쩌다가 이런 일을 당한 거야. 이럴 줄 알았으면 혼자 다른 나라에 보내지 않았지. 흑흑흑... 하임아...”강성훈은 정연을 부축하며 말했다.“하임이는 괜찮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리는 하임이를 괴롭힌 사람한테 책임부터 물어야지. 다시는 같은 짓을 할 사람이 없도록!”이 말을 듣고 정연은 금세 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굳건한 눈빛으로 말했다.“하임이는 사고로 바다에 빠진 게 아니에요. 분명히 누가 뒤에서 밀었을 거예요!”병실 밖에는 금강그룹의 직원과 이윤정이 있었다.강하임을 발견한 사람은 이윤정이었다. 온지유와 강하임이 시선에서 사라지자 걱정됐던 그녀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찾으러 갔다.온지유와 강하임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 바닷속에서 소리를 지르던 강하임을 발견하게 되었다.그녀는 사람들을 불러서 강하임을 구조했다. 금방이라도 죽어갈 것 같은 모습의 강하임은 심폐소생술을 한 다음에야 가까스로 살아났다. 그러나 온지유는 끝까지 찾지 못했다.강하임을 병원에 보낸 후 그녀는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금강그룹은 여진그룹과 협력하는 상황이기에 그냥 내칠 수는 없었다.강하임의 부모는 사건의 자초지종을 알아보지도 않고 자신들의 딸만 가엽게 느껴졌다. 전 세상이 가해자고, 그들의 딸만 피해자라는 기세였다.“여진그룹 사람들은 어디에 있어? 내 딸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말도 한마디 안 해?”금강그룹의 직원은 이윤정을 바라봤다. 이윤정은 강하임이 일어나기도 전에 섣불리 판단하는 정연이 어이없기만 했다.“책임이 어느 쪽에 있는지는 아직 모르는 일입니다. 저희는 금강의 말에 따라 화물을 확인하러 갔을 뿐이니까요. 증거도 없이 이러는 건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년이 따박따박 말대답하기는!”화가 치밀어 오른 정연은 울 새도 없이 이윤정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이윤정은 이토록 막무가내인 부모를 처음 봤다. 오자마자 증거도 없이 온지유를 살인자 취급하지 않는가? 만약 반대의 상황이었다면 온지유의 부모는 절대 이러지 못할 것이다.이런 생각에 이윤정은 더욱 속상했다. 온지유는 그녀의 사수였다. 그녀가 아는 온지유는 절대 이런 일을 저지를 리 없다.그러나 강하임은 누가 봐도 심기가 바르지 않았다. 증거가 없더라도 그녀가 저지른 짓인 게 뻔했다. 그 과정에 어쩌다가 바다에 빠지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인과응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그쪽은 입 다물고 있어요.”이윤정이 끼어드는 것을 보고 강성훈이 차가운 목소리로 호통쳤다.“여진은 직원 교육을 안 하나 봐요. 일개 직원 따위가 나한테 말을 섞는 걸 보면.”여이현은 싸늘한 눈빛으로 강성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모든 제스쳐가 불쾌함을 드러내고 있었다.“민주주의 나라에서 살아왔다고는 믿을 수 없는 발언이군요. 요즘은 언론 자유라는 게 있답니다. 말 정도는 아무나 할 수 있어요.”여이현이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것을 보고 이윤정은 더욱 눈물이 났다. 그녀는 혼자서 온지유를 지켜줘야 할 줄 알았다. 오만한 자본가를 어떻게 이겨야 할지 안 그래도 고민하던 참이었다.그녀 혼자서는 정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기껏해야 인터넷에 글이나 쓸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한들 온지유를 방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지 않는가?이윤정은 곧바로 여이현의 곁으로 달려가 고자질을 시작했다.“대표님, 우리 온 비서님 좀 도와주세요. 저 여자가 온 비서님을 해친 게 틀림없어요. 저랑 송 비서를 일부러 떼어낼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닥쳐! 헛소리하지 마! 그 입 확 찢어버리려니까!”정연은 정말 이윤정을 때릴 기세였다. 그러나 이윤정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똑바로 뜨고 말했다.“찢을 테면 찢어 봐요! 내가 무서워할 것 같아요? 돈 있으면 억울한 사람을 모함해도 되는 줄 알아요? 우리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당하고만 있지 않는다고요!”“너.
멀지 않은 곳에서 온지유가 여이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는 백지희가 함께 서 있었다. 시름이 놓이지 않아서 따라온 것이다.백지희의 걱정은 정확했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것은 이와 같은 막장 드라마였다.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여이현은 먼저 멈칫했다. 고개를 돌려보자 온지유가 멀쩡하게 서 있었다.그 순간 그의 마음속에는 기쁨밖에 없었다. 잃은 줄 알았던 사람이 멀쩡하게 돌아온 기쁨은 처음 겪는 것이었다.그는 빠른 걸음으로 달려가 온지유를 품에 안았다.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일 줄은 모른 온지유는 어쩔 바를 몰랐다.여이현은 있는 힘껏 그녀를 끌어안았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였다. 이제야 그녀를 잃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깨달았다.‘다시는 잃지 않을 거야. 다시는!’온지유가 만질 수 있는 곳에 있어야만 그는 안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한껏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어디 간 거야? 내가 걱정했잖아.”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들은 온지유가 평범한 비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비서는 회사의 이익을 위해 언제든지 해고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귀찮게 이것저것 따질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런 비서라면 여이현이 다정하게 끌어안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강성훈과 정연은 넋이 나가버렸다. 반대로 이윤정은 온지유가 바로 여이현의 아내라는 가설에 더욱 확신을 가했다.전에는 추측만 했었다. 온지유의 회피 때문에 추측도 별로 설득력이 없었다. 그러나 여이현이 오늘 보여준 모습으로 예상하건대 그녀의 촉은 정확했다.여이현은 한 번도 오늘처럼 긴장한 모습을 보여준 적 없었다. 한결같이 온지유의 편에 서는 것도 이상했다. 만약 온지유가 아니었다면 그녀를 대변해 주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온지유는 뒤늦게 그를 밀어내며 말했다.“지나가던 어부가 저를 구해줬어요. 병원에 가기는 했는데 몸에 아무것도 없어서, 간호사한테 부탁해서 지희한테 연락했고요. 저는 운이 좋았어요. 어부가 빨리 구해준 덕분에 다친
어둠이 내려앉자 경성은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냈다. 특히 오늘은 밸런타인데이였던지라 곳곳의 가게에서 행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밸런타인데이를 삼켜버릴 것처럼 말이다.온지유는 여희영이 알려준 호텔로 왔으나 바로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커다란 창가로 여희영이 알려준 파란 장미를 든 남자를 찾아보고 있었다.테이블마다 한 쌍씩 앉아 있었지만 여희영이 말한 남자는 없었다.전화를 들어 여희영에게 상대가 기다리다가 지쳐 먼저 돌아간 것은 아닌지 물어보려고 한순간 익숙한 형체를 발견하게 되었다.여이현이 코너를 돌며 2층의 룸으로 올라갔다.밸런타인데이에 귀가하지 않고 이곳에 와서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것일까.온지유의 머릿속에 순간 여러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대부분은 여이현이 바람을 피웠다는 가능성이었다.그녀는 씩씩대며 호텔 안으로 들어간 뒤 바로 2층으로 올라갔다.“어서 오세요, 몇 분이실까요?”직원이 그녀를 붙잡았다.온지유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이 안에 몇 분이 예약되었는지 알려주시면 이 돈을 전부 드리죠.”그녀는 통 크게 돈뭉치를 꺼내 직원에게 주었다. 직원은 눈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을 두 개 펼쳐 보였다.밸런타인데이에 호텔에 혼자 오는 사람은 없었다.그녀는 바로 발을 들어 문을 차버리곤 코웃음을 쳤다.“이현 씨, 즐거운가 봐. 나한테 들켰다고...”뒷말을 이을 수 없었다. 룸 안에 여이현 혼자 있었기 때문이다.온지유는 바로 고개를 돌려 직원에게 따져 물었다.“안에 둘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대표님께선 두 명으로 예약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직 아내 분이 도착하지 않으셨다고...”“이제 가도 됩니다. 여긴 제가 설명하죠.”여이현은 직원에게 물러나라고 하곤 문을 닫으려 했으나 그제야 문이 뜯겨 나갔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내 빙긋 웃었다.“룸을 바꿔야 할 것 같네.”직원은 눈치껏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온지유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했다. 바람 피우는 현장을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직원은 그녀에게 여이현의 아내가 아직 도착하지 않
“얼른 여이현한테 전화해서 여진을 나한테 넘기라고 말해. 그리고 여씨 가문의 모든 재산도 전부 나한테 주라고 해. 안 그러면 지금 이곳이 곧 너의 무덤이 될 테니까.”여재호는 뒤를 돌아보라는 턱짓을 했다.온지유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이현 씨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거니까 헛된 망상은 그만하시죠.”“여이현이 그러지 않겠다고 하면 널 죽여버리면 돼. 그리고 네 아들을 여기로 잡아 오는 거지. 여이현이 그럼에도 넘기지 않겠다고 하면 어쩔 수 없이 네 아들도 죽이는 거지 뭐.”여재호는 칼을 꺼낸 후 온지유의 앞으로 갔다. 그녀의 턱을 꽉 잡으며 뺨을 때렸다.“가능한 어떻게든 여이현을 설득해야 할 거야. 안 그러면...”서늘한 칼날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온지유는 눈을 가늘게 떴다.여재호는 돈을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런 그가 계속 이 세상에 남는다면 세상은 앞으로 불안만 가득해질 것이다.무언가 떠오른 온지유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래요. 제가 이현 씨를 설득해볼게요. 그런데 저한테 핸드폰이라도 줘야 설득해보는 거 아닌가요? 핸드폰도 없이 제가 어떻게 말을 해보죠?”여재호는 머릿수가 많다는 이유로 방심하면서 온지유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어차피 산 아래에도 그의 사람들이 깔려 있었으니까.바로 옆 사람에게 지시를 내려 온지유에게 핸드폰을 주었다.자유를 되찾은 온지유는 뻐근한 손목을 돌리며 여이현에게 전화를 거는 척했다.“이현 씨, 나 지금 사방이 무덤인 산에 있어. 얼른 와줘...”“씨X, 지금 날 속여?”여재호는 갑자기 그녀에게 다가가 핸드폰을 확 빼앗았다. 온지유는 그를 꽉 끌어안더니 벼랑 끝으로 뛰어내렸다.“야!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여재호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차정혁이 얼른 사람들과 함께 벼랑 끝으로 달려와 내려다보았지만 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온지유는 죽지 않았다. 이미 전에 더 험한 일을 당했었던지라 여재호를 상대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여재호가 그 말을 하자마자 그녀는
두 사람은 익숙하게 별장으로 들어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여희영을 부축하면서 나왔다.온지유는 여희영이 입원한 병원으로 왔다.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여희영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여희영은 그런 온지유의 손등을 토닥이며 달랬다.“괜찮아. 정말이야.”“저희가 너무 소홀했어요.”“너희 탓이 아니야. 이것도 다 내 운명인 거지. 이런 오빠의 동생으로 태어난 게 잘못이지.”여희영은 말을 마친 후 여이현을 보았다.“여재호가 회사를 엉망으로 만들어 놨어. 얼른 다시 원상복구 해야 해. 절대 다른 사람이 빈틈을 노리게 해서는 안 돼. 그리고 여재호는 고민할 것 없어. 그냥 너희들이 하고 싶은 대로 처리해.”여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계획이 있었다. 이번 일을 겪은 후 이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회사 쪽은 여희영이 입원해 있는 동안 전부 깔끔하게 정리했다.속도는 빠르게 진행도이었다. 아무리 여재호가 업소녀에게 돈을 주며 입막음을 했다고 해도 늦었다. 경찰이 너무도 빠르게 도착했기 때문이다.여재호의 사람들을 전부 해고했다. 그리고 그가 매수한 거래처들과도 전부 거래를 끊어버렸다.여재호에게 처음으로 매수당한 고객은 차정혁이었다.그는 가짜를 진품처럼 팔고 품질이 안 좋은 물건을 대놓고 팔았다. 여재호에게 매수당하지 않았어도 여이현은 그와 거래를 끊을 생각이었다.두 사람은 차에 올라탔다. 차정혁은 바로 여재호에게 자료 한 부를 건넸다. 그 자료에는 여진 그룹 서류뿐만 아니라 온지유가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시간도 적혀 있었다.여재호는 미간을 찌푸렸다.“여이현의 여자를 건들라고? 죽고 싶어?”“대표님, 정말로 판을 뒤엎고 싶다면 이것이 마지막으로 남은 기횝니다. 아니면 정말로 새파랗게 어린놈한테 밟히고 싶은 겁니까. 잊지 마세요, 여진 그룹을 물려받아야 할 사람은 응당 대표님이십니다.”차정혁은 목소리를 낮게 깔며 말했다.“이 일은 제가 다 준비를 해뒀으니 대표님께선 지시만 내리시면 됩니다. 그러면 제 사람들이 바로
“날 조롱할 것 없어. 여이현, 네가 날 찾아왔다는 건 내가 여진을 조정하는 중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 찾아왔다는 의미겠지. 그래, 여진은 내가 반드시 손에 넣을 거야. 여진뿐만 아니라 여씨 가문 모든 재산을 손에 넣을 거라고.”여재호는 고개를 빳빳이 들며 말했다. 꼭 반항기가 흘러넘치는 청소년처럼 말이다.여이현은 술을 한잔 마시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고모는 어디에 있어요.”그는 회사 때문에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여재호에게 고모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서 찾아왔다.오는 길에 이미 여희영의 집으로 사람을 보냈으나 여희영을 찾을 수 없었고 그의 추측이 거의 확신이 되어갔다.여재호의 표정이 부자연스럽게 굳어지더니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웃음을 멈추었다.“여희영을 데려가도 돼. 하지만 내일 회사로 가서 계약서에 사인해. 여진의 모든 지분과 운영할 권리는 내게 넘긴다고.”“제가 싫다고 하면요?”“그럼 여희영을 만날 생각은 하지 마. 희영이가 걱정되지? 그래, 당연히 그렇겠지. 여희영한테 그렇게 네 편에 서지 말라고 말했는데 말이야. 오빠인 내 말을 안 듣더라고.”여재호는 음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여이현은 그와 쓸데없는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차 키를 들고 일어나며 싸늘한 시선으로 여재호를 보았다.“그동안 꽤나 많은 돈을 빼돌리고 계셨나 봐요. 집까지 업소녀를 부르고 말이에요. 지금 신경 써야 할 게 명성이 아닌가요? 이미지 나락으로 빠지고 싶은 거 아니라면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을 거예요.”여재호는 코웃음을 쳤다.“저의 일 처리 방식이 어떤지 그동안 봐서 잘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해요. 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도 않고 자비도 베풀지 않는 사람이죠.”말을 마친 여이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렸다.여재호는 여이현의 말에 순간 겁을 먹게 되었다. 그리곤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방으로 올라간 여자에게 화풀이했다.여재호에게서 단서를 알아내지 못한 여이현은 다시 회사로 돌아와 모든 CCTV를 돌려보았다.여희영이
“날 오빠 취급하든 말든 상관없어. 어차피 돈 생기고 권력이 생기면 내가 원하는 걸 전부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니까.”여재호는 결국 여희영이 정신을 잃을 때까지 폭행한 후 작은 다락방에 가둬버렸다.밤이 되니 온지유와 여이현이 탑승한 비행기도 도착했다.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보이는 커다란 광고판에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공항에 설치된 가장 큰 광고판에는 여진 그룹에서 출시하여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화장품 영상을 틀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음식 밀키트 광고로 바뀌었다.여이현의 동의도 없이 광고를 바꿨다는 건 너무도 이상했다.두 사람의 생각은 같았다. 서로 마주 본 두 사람은 경성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바로 눈치챘다.온지유가 입을 열려던 순간 여이현의 핸드폰이 울렸다.전화를 건 사람은 기획부 부장이었고 여진 그룹의 원로라고 할 수도 있는 존재였고 여진을 향한 충성이 아주 높았다..“서 부장님, 마침 연락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공항 광고판 광고가 왜 바뀐 거죠?”“대표님, 안 그래도 이 일로 연락드렸습니다. 얼른 저의 집으로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다들 대표님만 기다리고 계십니다.”서철민은 다급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이현과 온지유는 더는 묻지 않고 바로 서철민의 집으로 출발했다.서철민의 집 서재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여이현을 보자마자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대표님.”모든 사람들이 입을 열었다.여이현은 그들에게 앉으라는 제스처를 한 뒤 입을 열었다.“저를 찾으신 이유를 말해보세요.”그는 대충 짐작하고 있었으나 증거가 없었기에 함부로 말을 꺼낼 수 없었다.“여재호가 저희 회사 재무부장과 구매부 부장, 그리고 일부 고객들을 매수했습니다. 현재 여진이 여재호 쪽으로 기울었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하...”서철민과 일부 사람들이 까발린 여재호의 만행은 그들의 예상을 뛰어넘었다.온지유는 미간을 찌푸렸다. 경성으로 돌아오면 평화로운 일상을 보낼 줄 알았으나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꿈에도
많은 사람들이 여이현에게 연락하며 상황을 알렸다.하지만 그는 배진호와 함께 비행기에 있어 전화를 받지 못했다.여재호는 오직 하나의 목표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돈과 지위를 얻는 것이었다.과거에 자신이 손에 넣지 못했던 재산을 이번에는 반드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결심이었다.그가 여진그룹에서 큰 소동을 일으키자 결국 여희영도 나서게 되었다.여희영은 직접 찾아와 그를 말렸다.“할 말은 이미 다 했어. 그날 결혼식에서 이현이의 태도가 얼마나 분명했는지 오빠도 직접 봤잖아. 그런데 왜 또 이러는 거야?”“이현이는 너를 홀대한 적이 없잖아?”여진 그룹이 위태로웠던 시절 여이현의 뛰어난 능력 덕분에 그룹은 조금씩 번창하며 오늘날의 위치에 올랐다.하지만 지금...여재호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이현이 여진 그룹을 이 정도로 키운 건 맞아. 그런데 문제는 나도 빈손으로 남을 수는 없다는 거야.”“네가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면 아버지가 너를 불러들였을 때엔 왜 거절하지 않았대? 지금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위선적이라는 생각은 안 들어?”여희영는 직설적인 성격이었다.그녀는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일에 대해서는 거침없이 말하는 성격이었다.게다가 그녀의 오빠는 지금까지 제대로 한 일이 없었을뿐더러 지금은 더 악랄하게 굴고 있었다.“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어이가 없어서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네.”“할 말이 없으면 하지 마. 내가 하는 일이 네게 방해가 되는 것도 아니잖아. 뭘 걱정하는 건데? 여희영, 너도 알잖아. 이현이는 가문의 사람이 아니야. 왜 네 팔은 밖으로만 굽는 거야?”여재호는 돈을 받지 못하고 여이현에게 문전박대를 당한 것만으로도 이미 인내심이 폭발할 지경이었다.여기에 여희영의 말까지 더해지자 그는 더 이상 화를 참을 수 없었다.여희영도 화가 치밀었다.“내 팔이 밖으로 굽는다고? 오빠가 가문을 내팽개쳤을 때 나는 가문을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알아? 아버지와 이현이에게 일을 다 떠넘기고는 이제 와서
“전 무열 씨의 의지력을 믿어요. 당신이라면 분명히 이겨낼 수 있을 거예요. 앞으로는 제가 계속 상태를 관리할게요.”인명진은 부드럽게 말했다.그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약물 금단 증상은 고통스러웠지만 신무열의 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특히 김혜연은 늘 그의 주변에 함께 있어 주었다.덕분에 신무열은 일주일 만에 약물 의존을 끊어냈다.이는 모두에게 기쁜 소식이었고, 특히 김혜연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었다.“무열 씨, 우리 현장에도 내려가 봐요. 현장에는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을 거예요.”김혜연의 생각은 간단했다. 함께 일에 몰두하면 그는 아린의 죽음을 떠올릴 시간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동안 신무열은 막 결혼한 상태에서 그녀에게 미안함을 느껴 곁을 떠나지 않았지만, 그로 인해 더 큰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신무열은 김혜연을 품에 안으며 말했다.“좋은 생각이야. 현장으로 가자. 이쪽의 일은 내가 처리해 둘게. 요한도 있으니까 걱정 마.”“좋아요.”그들의 결정을 들은 법로는 남아서 Y국의 상황을 관리하기로 했다.그는 별이를 떠나보내는 것이 유일한 아쉬움이었다.경성에서 별이와 함께 보낸 시간은 매우 따뜻하고 행복한 순간들이었다.이번은 신무열과 김혜연의 결혼식에 참석하려 Y국에 온것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일이 벌어져 버렸다.“별아, 이번에 엄마랑 아빠랑 같이 돌아가면 말 잘 들어야 한다. 외할아버지가 나중에 보러 갈게.”법로는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고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외할아버지, 걱정 마세요. 아빠랑 엄마 말씀 잘 듣고 공부도 열심히 할게요. 돌아오시면 꼭 다시 만나요!”“그래.”법로는 그들을 공항까지 직접 배웅했다.업무적으로는 배진호가 있었지만 온지유와 관련된 부분은 온지유의 결정을 존중했다.배진호는 먼저 제안했다.“대표님, 아드님을 제가 먼저 데려가서 학교에 보내겠습니다. 두 분은 Y국에서 조금 더 머무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사모님의 양부모님들과
신무열은 김혜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걱정 끼쳐서 미안해.”“무열 씨, 제발 꼭 좋아져야 해요. 이렇게 날 떠나면 안 돼요. 우리... 우리 아직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고 다 아쉬움으로 남았잖아요.”김혜연은 신무열을 꼭 끌어안으며 목소리가 갈라질 정도로 간절히 말했다.그녀는 정말로 두려웠다.만약 신무열의 마음속에 모든 분야에 출중한 완벽한 존재가 있었다면 그녀는 이렇게까지 고통스럽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아린의 경우는 달랐다. 모든 조건을 떼어 놓고 보면 말이다.김혜연에게는 선택지가 주어졌지만 선택을 하지 않은 건 그녀 자신이었다.김혜연은 신무열의 남은 생이 죄책감 속에서 허비되지 않기를 바랐다.신무열은 김헤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네가 하려는 말 다 알아. 걱정하지 마. 나도 최선을 다해 이전의 일들에서 벗어나려고 할게.”김혜연은 그런 문제들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신무열은 그녀의 진심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원망하지 않았다.이때, 인명진이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신무열의 약물 의존은 법로가 책임지고 있었고, 인명진은 그의 심리 치료를 맡게 되었다.신무열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그러나 아린이 자신의 품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본 그는 마음의 상처를 도저히 치유할 수 없었다.인명진은 그의 마음을 이해했다.그는 최면을 통해 신무열의 내면을 하나씩 풀어가며 그의 마음을 안정시키려 노력했다.신무열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저는 누구도 죽이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저 때문에 죽어가요. 죽음이 이렇게도 불공평하고 아무 소리도 없이 다가온다는 걸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신무열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씩 흘러나왔다.인명진은 낮은 목소리로 그를 위로했다.“모든 일에는 아쉬움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무열 씨는 최선을 다했고 아린을 방치한 것도 아니었잖아요. 현실은 잔혹해요. 무열 씨에게는 방법이 없었고, 아린에게는 죽음이 오히려 해방이었을지도 모르죠.”“노예 수용소에 있던 사람들은 수천, 수만 명이었어요
신무열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고통스럽게 절규했다.그의 이런 모습을 본 온지유는 가슴이 찢어졌다. 매일 곁에서 지켜보는 김혜연에게는 더 큰 고통이었다.온지유는 신무열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부드럽게 말했다.“오빠, 그건 오빠 잘못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너무 자신을 몰아붙이지 말아요...”하지만 신무열은 그녀의 말을 끊으며 힘겹게 말했다.“아니, 내 잘못이야. 만약 내가 더 잘했다면 아린은 희생하지 않았을 거야. 죽음을 많이 봐왔지만 이번처럼 고통스러운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지유야, 너도 알잖아? 난 아린이 눈앞에서 죽는 걸 직접 봤어...”그의 목소리는 쉰 듯한 낮은 톤으로 하나하나 쏟아져 나왔고, 온지유는 처음으로 신무열이 이렇게 절망하는 모습을 보게됐다.도와주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그녀는 무력감을 느꼈다.신무열이 감정을 통제하지 못해 스스로를 해칠까 두려웠던 온지유는 급히 법로에게 전화를 걸었다.곧 법로는 실험실 사람들과 함께 그들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신무열의 상태를 본 법로는 마음이 아팠다.신무열은 그의 하나뿐인 아들이다!상태를 점검한 법로는 신무열이 몰래 페노바르비탈을 복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더욱 심각한 것은, 이 약물은 한때 법로거 개량했던 중독성을 유발하는 형태였다는 점이었다.신무열의 방금 전 감정 폭발은 약을 제때 복용하지 못해 나타난 금단 증상이었다.법로는 즉시 실험실의 약물 사용 규정을 엄격히 강화했다.앞으로는 모든 약물 사용이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명령했다.또한, 신무열이 약물을 복용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을 철저히 관리했다.신무열은 Y국의 수령으로, 많은 이들이 그를 끌어내리고 새 인물을 세우고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만약 그의 약물 복용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면 반드시 정치적으로 이용될 것이 분명했다.김혜연은 신무열의 곁을 지키고 싶었지만 법로가 이를 막아섰다.“신무열이 자리를 비우는 건 공적인 이유로는 가능하다. 하지만 네가 자리를 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