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하지만, 피해자분을 찾을 확률은 아주 낮습니다. 오늘 파도가 강해서 먼 곳까지 쓸려갔을 가능성이 높아요. 생존율도 낮을 것으로 예상됩니다.”이런 대답을 들은 여이현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마치 비수에 심장이 찔린 듯한 느낌이었다.그는 구조대원을 꽉 잡으며 외쳤다.“아니에요! 지유는 살아있어요!”구조대원은 여이현을 붙잡은 채 위로했다.“급한 마음은 알겠지만 진정하셔야 합니다. 저희가 못 찾은 대신 다른 곳에서 구조됐을 가능성도 있어요. 이렇게 생각하시면서 잠시 진정하세요. 아직 구조는 진행 중이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임해야 합니다.”“그래요... 구조됐을 수도 있어요...”여이현은 감히 안 좋은 생각을 할 엄두가 안 났다. 온지유가 이런 식으로 자신을 떠날 줄은 단 한 번도 상상한 적 없었다.“오늘 바다에 나간 어선이 바다에 빠진 사람을 몇 명이나 구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중에 피해자분이 있을 수도 있어서 확인하는 중입니다.”구조대원도 확신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여이현은 이토록 작은 희망이라도 필요해 보였다.지금은 어떻게든 좋은 쪽으로 생각해야 할 때이다. 온지유를 찾지 못했더라도 시체를 보기 전에는 함부로 판단할 수 없었다.여이현은 말없이 바다를 바라봤다. 해가 진 하늘을 따라 바다도 무서울 정도로 어두워 보였다.‘다른 사람도 아닌 온지유잖아. 무조건 구조됐을 거야. 무조건 무사할 거야.’이렇게 생각하면서 그는 잠시 이성을 되찾았다.“어선에 구조됐다는 사람들은 어느 병원에 있어요?”“그건 제가 물어봤는데 다들 모르는 눈치였어요. 아무래도 가장 가까운 병원에 보내지 않았을까요?”송서연이 말했다.마음이 급해서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던 여이현은 조사를 지시한 동시에 근처에 병원을 일일이 돌아다녔다.온지유의 물건은 전부 차 안에 있었다. 바다에 빠질 때 몸에 지니고 있었던 건 없었다. 그러니 무작정 돌아다니며 찾을 수밖에 없었다.구조는 저녁까지 계속되었다.“입원한 사람도 있고, 이미 병원을 떠난 사람도 있습니다. 그
강성훈과 정연은 황급히 병실 안에 들어갔다. 강하임이 창백한 안색으로 잠들어 있는 것을 보고, 정연은 눈물을 흘리며 털썩 주저앉았다.“아이고, 하임아. 어쩌다가 이런 일을 당한 거야. 이럴 줄 알았으면 혼자 다른 나라에 보내지 않았지. 흑흑흑... 하임아...”강성훈은 정연을 부축하며 말했다.“하임이는 괜찮을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우리는 하임이를 괴롭힌 사람한테 책임부터 물어야지. 다시는 같은 짓을 할 사람이 없도록!”이 말을 듣고 정연은 금세 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굳건한 눈빛으로 말했다.“하임이는 사고로 바다에 빠진 게 아니에요. 분명히 누가 뒤에서 밀었을 거예요!”병실 밖에는 금강그룹의 직원과 이윤정이 있었다.강하임을 발견한 사람은 이윤정이었다. 온지유와 강하임이 시선에서 사라지자 걱정됐던 그녀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찾으러 갔다.온지유와 강하임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 바닷속에서 소리를 지르던 강하임을 발견하게 되었다.그녀는 사람들을 불러서 강하임을 구조했다. 금방이라도 죽어갈 것 같은 모습의 강하임은 심폐소생술을 한 다음에야 가까스로 살아났다. 그러나 온지유는 끝까지 찾지 못했다.강하임을 병원에 보낸 후 그녀는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금강그룹은 여진그룹과 협력하는 상황이기에 그냥 내칠 수는 없었다.강하임의 부모는 사건의 자초지종을 알아보지도 않고 자신들의 딸만 가엽게 느껴졌다. 전 세상이 가해자고, 그들의 딸만 피해자라는 기세였다.“여진그룹 사람들은 어디에 있어? 내 딸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말도 한마디 안 해?”금강그룹의 직원은 이윤정을 바라봤다. 이윤정은 강하임이 일어나기도 전에 섣불리 판단하는 정연이 어이없기만 했다.“책임이 어느 쪽에 있는지는 아직 모르는 일입니다. 저희는 금강의 말에 따라 화물을 확인하러 갔을 뿐이니까요. 증거도 없이 이러는 건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년이 따박따박 말대답하기는!”화가 치밀어 오른 정연은 울 새도 없이 이윤정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이윤정은 이토록 막무가내인 부모를 처음 봤다. 오자마자 증거도 없이 온지유를 살인자 취급하지 않는가? 만약 반대의 상황이었다면 온지유의 부모는 절대 이러지 못할 것이다.이런 생각에 이윤정은 더욱 속상했다. 온지유는 그녀의 사수였다. 그녀가 아는 온지유는 절대 이런 일을 저지를 리 없다.그러나 강하임은 누가 봐도 심기가 바르지 않았다. 증거가 없더라도 그녀가 저지른 짓인 게 뻔했다. 그 과정에 어쩌다가 바다에 빠지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인과응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그쪽은 입 다물고 있어요.”이윤정이 끼어드는 것을 보고 강성훈이 차가운 목소리로 호통쳤다.“여진은 직원 교육을 안 하나 봐요. 일개 직원 따위가 나한테 말을 섞는 걸 보면.”여이현은 싸늘한 눈빛으로 강성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모든 제스쳐가 불쾌함을 드러내고 있었다.“민주주의 나라에서 살아왔다고는 믿을 수 없는 발언이군요. 요즘은 언론 자유라는 게 있답니다. 말 정도는 아무나 할 수 있어요.”여이현이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것을 보고 이윤정은 더욱 눈물이 났다. 그녀는 혼자서 온지유를 지켜줘야 할 줄 알았다. 오만한 자본가를 어떻게 이겨야 할지 안 그래도 고민하던 참이었다.그녀 혼자서는 정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기껏해야 인터넷에 글이나 쓸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한들 온지유를 방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지 않는가?이윤정은 곧바로 여이현의 곁으로 달려가 고자질을 시작했다.“대표님, 우리 온 비서님 좀 도와주세요. 저 여자가 온 비서님을 해친 게 틀림없어요. 저랑 송 비서를 일부러 떼어낼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닥쳐! 헛소리하지 마! 그 입 확 찢어버리려니까!”정연은 정말 이윤정을 때릴 기세였다. 그러나 이윤정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똑바로 뜨고 말했다.“찢을 테면 찢어 봐요! 내가 무서워할 것 같아요? 돈 있으면 억울한 사람을 모함해도 되는 줄 알아요? 우리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당하고만 있지 않는다고요!”“너.
멀지 않은 곳에서 온지유가 여이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는 백지희가 함께 서 있었다. 시름이 놓이지 않아서 따라온 것이다.백지희의 걱정은 정확했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것은 이와 같은 막장 드라마였다.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여이현은 먼저 멈칫했다. 고개를 돌려보자 온지유가 멀쩡하게 서 있었다.그 순간 그의 마음속에는 기쁨밖에 없었다. 잃은 줄 알았던 사람이 멀쩡하게 돌아온 기쁨은 처음 겪는 것이었다.그는 빠른 걸음으로 달려가 온지유를 품에 안았다.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일 줄은 모른 온지유는 어쩔 바를 몰랐다.여이현은 있는 힘껏 그녀를 끌어안았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였다. 이제야 그녀를 잃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깨달았다.‘다시는 잃지 않을 거야. 다시는!’온지유가 만질 수 있는 곳에 있어야만 그는 안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한껏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어디 간 거야? 내가 걱정했잖아.”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들은 온지유가 평범한 비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비서는 회사의 이익을 위해 언제든지 해고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귀찮게 이것저것 따질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런 비서라면 여이현이 다정하게 끌어안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강성훈과 정연은 넋이 나가버렸다. 반대로 이윤정은 온지유가 바로 여이현의 아내라는 가설에 더욱 확신을 가했다.전에는 추측만 했었다. 온지유의 회피 때문에 추측도 별로 설득력이 없었다. 그러나 여이현이 오늘 보여준 모습으로 예상하건대 그녀의 촉은 정확했다.여이현은 한 번도 오늘처럼 긴장한 모습을 보여준 적 없었다. 한결같이 온지유의 편에 서는 것도 이상했다. 만약 온지유가 아니었다면 그녀를 대변해 주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온지유는 뒤늦게 그를 밀어내며 말했다.“지나가던 어부가 저를 구해줬어요. 병원에 가기는 했는데 몸에 아무것도 없어서, 간호사한테 부탁해서 지희한테 연락했고요. 저는 운이 좋았어요. 어부가 빨리 구해준 덕분에 다친
“지유가 한 말 못 들었어요? 지유도 바다에 빠졌어요. 당신 딸만 피해자인 척 말하지 마요. 방귀 낀 놈이 성내는 격만 되니까요.”백지희는 어이없는 듯 먼저 반박했다.정연은 여전히 고집스럽게 받아쳤다.“내 딸이 그럴 리가 없어. 누가 더 심하게 다쳤는지만 봐도 피해자가 알리잖아. 저 여자가 내 딸을 해친 게 틀림없어! 실수로 바다에 빠졌다는 말은 통하지 않아. 애초에 저 여자도 바다에 빠졌다는 걸 누가 증명해? 그냥 거짓으로 하는 말이야!”정연은 온지유가 질투로 강하임을 죽이려고 했다고 생각했다. 온지유의 말도 증인이 없기에 할 수 있는 거짓말로 여겼다.“말이 통하지 않네요. 그냥 신고해요. 그게 낫겠어요.”“그래! 신고해! 언제까지 거짓말을 할지 두고 보겠어!”백지희의 말에 정연이 귀청을 찌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온지유는 여전히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신고는 제가 이미 했어요. 경찰이 도착하면 진실이 밝혀질 거예요.”정연은 전혀 두려울 게 없었다. 온지유의 당당한 태도에 그녀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증거가 없을 줄 알고 당당하게 말하는 거지? 그 지역 CCTV는 며칠 전부터 고장 나 있었어. 경찰은 아무것도 찾지 못할 거야.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아? 너 하나 감옥 보낼 명분은 벌써 차고 넘쳐!”이 말을 듣고 여이현은 미간을 찌푸렸다.“지유가 감옥에 가는 게 먼저인지, 금강이 파산하는 게 먼저인지, 두고 봐요.”“여 대표, 우리 금강이 그렇게 만만해? 우리가 여진 하나 이기지 못할 정도로 호락호락하지는 않아.”여이현은 강성훈을 향해 시선을 돌리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그것 역시 두고 보면 알겠죠.”두 집안 사람은 누구도 양보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때 병실에서 간병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가씨, 정신이 들어요?”이 말을 듣자 강성훈과 정연은 부리나케 병실에 돌아갔다.허약한 모양새로 침대에 누워있는 강하임을 보자, 정연은 한없이 속상했다. 침대 가로 걸어간 그녀는 또다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하임아,
말을 하면서 강하임은 눈물까지 흘렸다. 그리고 정연의 손을 꼭 잡고 온지유를 두려워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 모습에 정연은 보호 본능이 발동하여 강하임을 끌어안고 온지유를 향해 증오의 눈길을 보냈다.“이제 더 이상 변명할 것도 없어. 내 딸이 널 지목했잖니. 넌 살인미수범이야. 잔인한 년, 내 딸이 너무 부러워서 질투하고 있었던 거겠지.”강성훈은 자신만만하게 여이현을 바라보며 비웃듯 말했다.“내 딸이 깨어났으니 이제 빠져나갈 길이 없지 않아? 저런 여자를 곁에 둔 대가, 여 대표도 톡톡히 치르게 될 거야.”때마침 경찰이 병원에 도착했다.정연은 경찰을 보자마자 구세주를 만난 듯이 달려가 옷깃을 붙잡고 말했다.“드디어 오셨군요! 이 여자가 내 딸을 해치려고 했어요. 빨리 데려가 감옥에 넣으세요. 다른 사람을 더 해치지 않도록 해야 해요!”경찰은 상황을 전혀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현장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물었다.“방금 어느 분이 신고하셨죠?”온지유가 손을 들며 대답했다.“제가 했습니다.”경찰은 펜을 들고 기록하며 말했다.“통화로 말씀해 주신 건 이미 기록했습니다. 더 구체적인 상황을 말씀해 주시면 저희가 조사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저랑 강하임 씨는 두 회사의 대표로 항구에서 만났습니다. 저희는 화물을 확인하러 간 것인데, 어느샌가 강하임 씨가 제 부하 직원을 다른 곳에 보내놓고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 저를 바다로 밀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죽더라도 자신에게는 아무런 위협이 없을 것이라고, 대신 죄를 뒤집어쓸 사람을 찾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온지유는 강하임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상황을 설명했다.“거짓말이에요!”강하임은 도우미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화를 내며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곧바로 다시 침대에 쓰러졌다. 그녀는 힘겹게 온지류를 가리키며 말했다.“날 해친 사람은 너잖아! 난 거의 죽을 뻔했어. 너는 멀쩡한데, 어떻게 내가 너를 밀었다는 거야. 미친년, 모함을 해도 정도가 있어야지.”정연은 서둘러
강하임의 부탁에 따라 강성훈이 말했다.“경찰관님, 저희 나가서 얘기하죠. 너도 나가. 여기는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온지유는 강하임을 힐끗 봤다. 노승아 못지않은 발연기였다.강하임은 약한 척 연기해서 동정심을 사려고 했다. 그러면 피해자로 보일 줄 알았던 모양이다.“무서운 거 확실해요? 찔리는 건 아니고요? 강 대표님이 침대에 누워서 피해자인 척 코스프레하면 제가 가만히 당하고 있을 줄 알았어요?”온지유의 말이 맞았다. 강하임은 정말 이대로 넘길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녀는 온지유보다 심하게 다쳤기 때문이다.동시에 찔리는 것도 맞았다. 그래서 말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온지유가 감옥에 가는 것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는 한 걱정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엄마, 빨리 저 여자를 내쫓아요!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요!”강하임은 정연의 손을 흔들었다. 그녀가 사라져야 긴장감이 줄어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그러고 보니 우리 참 보기 드문 악연이에요. 온 비서가 존재하는 한 나는 원하는 걸 얻지 못할 것 같아요. 온 비서가 사라져야만 시름을 놓을 수 있겠어요...”강하임이 말을 마친 순간 녹음기 소리가 들려왔다.“여긴 CCTV도 없는 곳이에요. 온 비서가 실수로 바다에 빠진 게 나랑 무슨 상관이겠어요? 내가 조사받는 일이 있더라도 돈으로 덮으면 그만이에요. 억울한 사람 한 명 범죄자로 만드는 거, 생각보다 저렴하거든요. 온 비서, 현실 세계는 동화랑 달라요.”녹음을 들은 강하임은 눈을 크게 떴다. 안색은 하얗게 질렸고, 몸도 주체가 되지 않고 벌벌 떨렸다.온지유의 손에 들린 녹음기는 그녀가 항구에서 했던 말을 그대로 재생했다. 한 글자도 빠짐없이 말이다.온지유는 핸드폰이나 지갑을 가지고 오지 않았지만, 녹음기는 항상 가지고 다니는 습관이 있었다. 이건 여이현의 곁에서 회의록을 준비하는 데 꼭 필요한 물건이었다. 그러다 보니 일할 때는 녹음기를 가지고 다니는 습관이 생겼다.그 습관이 누명을 벗는 데 쓰일 줄은 그녀도 몰랐다.강하임의
여이현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온지유를 바라봤다. 그녀가 강하임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까 봐 걱정하던 눈빛과는 사뭇 달랐다.온지유가 강하임을 밀었든 밀지 않았든, 그는 계속 그녀의 편에 섰을 것이다. 금강그룹에서 그녀를 감옥에 보내려고 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구해낼 생각이었다.그러나 온지유가 그에게 말을 하지 말라고 했기에, 그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참았다. 그녀가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 나가자 그는 드디어 안심할 수 있었다.경찰은 녹음기를 받아 들고 강하임과 정연을 바라보았다.“이 정황이 사실이라면, 살인미수죄에 해당합니다. 피해자분이 다치지 않았다고 해도, 결국에는 법적 책임을 피할 수 없어요.”이 말을 듣고 정연은 경찰이 온지유의 편을 든다고 생각했다.“아직 조사는 끝나지 않았어요. 저 여자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하다니까요? 내 딸은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저 여자를 감싸고 돌지 마세요. 우리가 외국인이라고 무시하는 거예요? 그러는 법이 어디 있어요!”정연은 말도 안 되는 것을 호소하고 있었다. 경찰은 얼굴을 굳히며 단호하게 말했다.“저희를 의심하시는 겁니까?”강성훈은 상황이 역전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녹음이 아무리 정교하게 합성되었다 해도 차이가 있을 것이고, 온지유가 직접 자신 있게 내민 녹음은 십중팔구 진실일 것이다.지금은 온지유를 자극해서도 경찰에 맞서서도 안 된다. 그는 즉시 부드러운 표정으로 정연을 뒤로 물리며 말했다.“제 아내의 말실수를 마음에 두지 마세요. 저희는 경찰관님의 조사 결과를 믿겠습니다. 만약 하임이한테 문제가 있다면 당연히 필요한 보상도 하겠습니다.”그는 이렇게 하면 강하임이 최악의 결과를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강하임이 저지른 잘못은 온지유에게 적당한 보상을 하는 것으로 잠재울 계획이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세상 건방지던 강성훈이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것을 보고, 백지희는 피식 웃었다.“아까는 그렇게도 당당하더니, 표정 바꾸는 속도가 책 넘기는 속도보다 빠르네.”그녀는 진심으로
그리고 엄마가 아프다는 시점도 너무 절묘했다. 설마 아픈 척하는 건가?이럴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배진호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떴다. 반드시 철저히 조사해야 했다.그가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배진호의 어머니는 잠에서 깨어났다.아들의 의심을 불러일으킨 것도 모른 채 여전히 의사와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내 아들 앞에서 꼭 내 병이 심각한 것처럼 말해줘야 해. 안 그러면 걔 마음이 여전히 그 여자한테 기울어 있을 거야.”“걱정 마. 동창끼리 네 계획을 망치기라도 하겠어?”의사는 가슴을 두드리며 장담했다.“내가 다 맡을 테니 신경 쓰지 마. 그런데 사실 나도 부탁이 하나 있는데 우리 아들이 유학을 가야 하는데 돈이 조금 모자라거든. 좀 도와줄 수 있어? 올해 보너스 나오면 바로 갚을게.”정미진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흔쾌히 승낙했다.어차피 그녀는 돈에 쪼들리지 않았으니.배진호가 비서로 일할 때부터 매달 월급 일부를 그녀에게 보내왔고 이후 그가 회사를 차려 독립하면서 더 많은 돈을 보내왔다.그녀는 사고 싶은 것을 마음껏 사면서 이제는 좋은 며느리를 얻는 데만 집착하고 있었다.“돈은 천천히 갚아도 돼. 여유가 생기면 갚아. 동창 사이인데 내가 너를 믿지 않겠어?”그녀의 말에 의사는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병실을 나선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사람이 참 복에 겨워 사는 줄 모르네. 배진호 같은 아들에, 그토록 훌륭한 며느리까지 얻었는데 뭐가 불만이야? 게다가 그 집안의 돈은 몇 대가 써도 부족함이 없는데 굳이 문제를 만들 필요가 있나? 나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거야. 그냥 일도 때려치우고 집에서 술이나 한잔하면서 낚시도 하고 가끔은 카드놀이도 하면서 살겠지. 생각만 해도 얼마나 여유롭겠어?”하지만 그는 정미진이 아니었고 방관자로서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다음 날 아침, 권다솔은 간단히 짐을 챙긴 후 캐리어를 끌고 여행사로 향했다.그곳에는 대형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고 모든 인원이 모이자 운전기사는 공항으로
지금 그의 모습이 헌신짝이랑 다를 게 뭐가 있지?권다솔 때문에 이렇게까지 할 가치가 있을까?배진호는 전혀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그는 여전히 석규리를 등진 채 그녀를 무시했다.석규리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다른 사람의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한 통의 메시지를 보낸 뒤 불과 30분도 채 되지 않아 배진호의 어머니가 직접 나타났다.정미진을 본 순간 배진호는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엄마! 몸도 안 좋으신데, 게다가 이제 막 수술을 끝내셨잖아요. 퇴원하시면 어떡해요?”“내가 와서 다행이지! 아니면 네가 여기서 얼마나 더 멍청하게 서 있었을지 몰라. 진호야, 엄마가 곧 죽게 생겼는데 너 정말 엄마를 좀 편하게 보내줄 수 없는 거니?”정미진은 배진호의 이마를 꾹 눌러가며 안타까워했다.권다솔의 가정환경이 조금이라도 평범했다면 돈으로 해결했을 것이다.하지만 권다솔은 권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정미진이 아무리 손을 뻗어도 권씨 가문까지 닿을 수 없었기에 결국 배진호에게만 압박을 넣을 수밖에 없었다.“엄마가 부탁할게. 죽기 전에 몇 날이라도 좀 조용히 지낼 수 있게 해줘. 더 이상 문제 일으키지 말고 권다솔과 깨끗이 끝내. 네가 꼭 여기에 남아 있겠다면 엄마도 너랑 같이 있을 거야.”정미진은 외투를 벗어 석규리의 손에 건넸다.그녀는 안에 얇은 옷만 입고 있었다.석규리가 옷을 다시 정미진의 어깨에 덮어주려고 했지만 정미진은 단호하게 거절했다.“엄마가 아들 교육을 제대로 못 시킨 탓에 내 아들이 한밤중에 여기서 바람 맞고 있잖아. 나만 병실에서 잘 먹고 편히 있을 수는 없지 않겠어?”“엄마, 정말 제가 무릎이라도 꿇어야 멈추시겠어요?”배진호의 눈에는 이미 생기가 없어진 채 허망한 표정으로 바라봤다.역시나 자신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는 사람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진호야, 엄마는 네가 무릎 꿇으라고 이러는 게 아니야. 엄마가 원하는 건 네가 권다솔과 완전히 끝내는 거야. 이게 엄마의 마지막 소
“있어요! 내일 아침 출발하는 건데, 초원에서 말을 타고 마유주를 마시는 일정이에요. 총 7박 8일이고 모든 비용은 전부 저희가 책임집니다!” 여대생은 너무 기쁜 나머지 말까지 더듬었다.아르바이트 첫날 만에 벌써 계약을 성사시키다니!급여를 받으면 바로 외할머니 치료비에 보탤 수 있었다.“그럼 그걸로 할게요.”어차피 어디든 상관없었다.여기를 떠나기만 하면 됐다. 더 이상 배진호와 남태건을 마주치지 않는 걸로 충분했다.권다솔은 가이드의 연락처를 추가한 뒤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출발지 근처의 호텔에 묵기로 했다.그리고 방으로 돌아온 뒤 부모님께 영상 통화를 걸었다.“저 내일 여행사 패키지로 여행 가려 해요. 다음 주쯤 돌아올게요.”“좋지! 네 나이에는 이곳저곳 다니며 세상을 봐야 해. 만 권의 책을 읽으려면 만 리를 걸어야 한다잖니. 짐은 다 챙겼니?”김영은은 딸이 여행 가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다만 여행길이 불편할까 걱정될 뿐이었다.권다솔은 고개를 저었다. 비록 아무것도 챙기지 못했지만 괜찮았다.“요즘 세상이 얼마나 편한데요. 필요한 건 현지에서 사면 돼요.”“다른 건 밖에서 사도 되지만 침구류는 우리가 보내줄게. 네 피부가 워낙 예민해서 호텔 이불 덮었다가 알레르기라도 나면 어쩌려고.”권용민이 덧붙였다.아무리 좋은 호텔이라도 집의 침구와 비길 순 없었다.그는 아직도 권다솔이 어릴 적 피부 알레르기로 한밤중에 병원에 가서 약을 사고 주사를 맞으며 한바탕 난리를 겪었던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저 지금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요. 굳이 여기까지 오실 필요 없어요. 너무 번거롭잖아요.”권다솔은 부모님이 늦은 시간까지 자신을 위해 고생하는 게 마음에 걸렸다.그러나 딸을 걱정하는 부모의 마음은 그녀의 마음보다 더 깊었다.권용민은 끝내 직접 가겠다고 고집했고 권다솔은 결국 그들을 이기지 못해 승낙했다.전화를 끊고 나서 그녀는 문득 배진호를 떠올렸다.‘지금쯤 석규리와 단둘이 집에서 다정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다만
할머니는 갑자기 진지하게 말했다.“아이고, 보아하니 꽤 오랫동안 여기 서 있었던 것 같은데 여자 친구가 아직도 너를 만나주지 않니? 이 할미가 한 가지 충고를 해주고 싶은데 들어볼 생각 있니?”배진호는 당연히 할머니가 그만 포기하라고 할 줄 알았다.만약 여기 서 있는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면 배진호 역시 같은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건 당사자만 알 수 있는 법이다. 사랑은 보잘것없는 먼지가 아니기에 바람에 날려 사라질 수 없었다.다만 할머니는 전혀 다른 말을 꺼냈다.“나도 젊었을 때 우리 집 할아버지를 엄청 쫓아다녔단다. 그때 할아버지는 나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집안 사람들 또한 나를 못마땅하게 여겼지. 내가 시골 출신이라 배운 게 없다고 말이야. 하지만 그게 어쨌단 말이니? 나는 그저 그 사람 자체가 좋았어. 그렇게 오랫동안 쫓아다녔고 결국 내 사람으로 만들었단다.”할머니는 눈꼬리를 휘어 올리며 말했다.배진호는 본능적으로 물었다.“그러면 두 분이 함께하신 후에도 할아버지 집안 사람들은 여전히 할머니를 예전처럼 대하셨나요?”“그럴 리가 있겠니? 부모는 그저 자식이 좋은 짝을 만나길 바라는 것뿐이야. 일부러 방해하려는 건 아니지. 결혼 후엔 날 친딸처럼 대했단다. 집안의 돈까지 전부 나한테 맡겼으니. 설령 그 집안에서 나를 못마땅하게 여겨도 두려울 게 없었어. 어차피 내가 그들보다 오래 살 텐데.”할머니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당당하게 말했다.“적어도 99살까지는 살 거 같아.”배진호는 할머니의 말에 크게 동요했다.그는 권다솔의 부모님이 인품이 훌륭한 분들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비록 결혼 전에는 반대했지만 결혼 후에는 축복해 줄 사람들이었다. 그의 어머니처럼 계속해서 방해할 분들이 아니었다.그의 어머니 역시 할머니가 말한 것처럼 몸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아서 이미 수술을 한 번 받은 적이 있었다. 지금 강력히 반대한다고 해도 과연 얼마나 갈 수 있을까?결국 병문안 갈 때 적당히 연기하면 되는 것이었다.“할머니,
왜 아침에 눈을 뜨고 나니 권다솔의 태도가 다시 이전처럼 차가워진 걸까?“저를 때리든 욕하든 심지어 문밖에서 밤새 무릎 꿇고 있으라 해도 전 한 마디 불평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다솔 씨, 제발 절 무시하지는 말아줘요.”배진호는 간절히 애원했다.그는 누구에게도 이렇게까지 비굴하게 군 적이 없었다.아무리 까다로운 고객이라도 그는 이런 식으로 자세를 낮춘 적이 없었다. 하지만 유독 권다솔 앞에서는 모든 것을 잃어도 상관없었다. 오직 그녀만은 잃을 수 없었다.권다솔은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었다.그러나 배진호의 목소리에 그녀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발이 마치 바닥에 붙은 것처럼 한 발짝도 떼지 못했다.그녀는 고개를 저을 뿐 차마 뒤돌아볼 수 없었다. 뒤돌아봤다가는 다시는 떠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진호 씨, 우린 이미 끝났어요. 만약 다시 만나더라도 여긴 아니에요.”둘의 마지막은 구청이어야 했다.이혼 절차를 밟고 나서야 비로소 각자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우리가 끝났다고 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잖아요. 다솔 씨 마음속에 제가 없다는 걸 믿을 수 없어요.”배진호는 집착했고 고집스러웠다.권다솔이 그를 뻔뻔하다 욕하든 귀찮다 욕하든 전혀 상관없었다. 사랑하는 여자를 잡을 수만 있다면 무슨 말을 들어도 괜찮았다.“우리가 어떻게 다시 돌아가요? 돌아갈 수 없어요. 아이도 없고... 그리고 며칠 전 술을 마시다가...”권다솔은 사실을 그에게 알리고 싶었다.이미 남태건과 관계를 맺은 사실이 그녀의 마음속 깊이 박힌 가시가 되어버렸다.하지만 정작 입을 열려는 순간 그녀는 망설였다.이혼까지 가는 마당에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게다가 이 사실을 배진호가 알게 되면 그는 분명히 그녀를 경멸할 것이다. 천한 여자라고 생각할 테니.그녀는 한편으로 선을 긋고 싶어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가 자신을 경멸할까 봐 두려웠다.‘사랑’이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었다.“그날 다솔 씨가 취했을 때 저도 같은 술집에 있었어요. 그리고 다솔 씨가...”“그
김영은도 이번 일로 남태건이 막무가내로 느껴졌다.하지만 남태건의 인성에 문제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태건이는 마음이 급해서 그런 걸 거야. 그래서 실수를 하게 되는 거지.”“마음이 급하든 말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쨌든 전 태건 씨랑 결혼할 수 없어요. 그날은 제가 술에 잔뜩 취해서 실수한 거예요. 누군가 제 술잔에 약을 탔거든요. 그래서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이 일어난 것뿐이에요. 전 절대 하룻밤의 실수로 제 평생을 누군가에게 보상으로 주려는 생각은 없어요.”권다솔은 계속 자기 생각을 말했다.아무리 김영은이 설득한다고 해도 그녀는 절대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 생각이 없었다.뛰어드는 건 쉬웠지만 빠져나오는 건 어려웠으니까.더구나 남태건이 이토록 일러바치는 것을 좋아하니 그녀는 더더욱 그와 결혼 할 수 없다. 다 큰 어른이 어린이집 다니는 아이들처럼 유치하게 굴고 있기 때문이다.“다솔아, 네가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우린 그냥 네가 태건이랑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이 꼭 결혼하라는 뜻은 아니었어.”뜻밖에도 김영은은 그녀의 편을 들어주었다.권용민은 옆에서 줄담배를 피우다가 꺼버린 후 김영은의 옆으로 다가왔다.“설령 네가 평생 혼자 산다고 해도 괜찮다. 너 하나쯤은 평생 먹고 살게 해줄 돈은 있으니까. 나랑 네 엄마는 네가 행복한 게 더 중요해. 행복할 방법은 아주 많지. 그중에서 네가 좋아하는 일만 해.”권다솔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눈물이 흘러나왔다.그녀는 이렇게나 좋은 부모님을 만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를 이해해줄 뿐만 아니라 그녀의 편을 들어주니까.동시에 그녀는 두렵기도 했다.만약 이렇게 좋은 부모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정말로 억지로 남태건과 결혼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정말로 그렇게 된다면 그녀는 아마 더는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정말 고마워요, 엄마, 아빠. 역시 저한테는 두 분밖에 없네요.”권다솔은 분명 웃고 있었지만, 눈물은 계속
결혼은 장난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김영은은 딸 대신 함부로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권용민에게 눈짓했다. 권용민은 얼른 차를 따라주었다.“태건아, 아직 차 한잔도 못 마셨지? 얼른 한잔하면서 좀 쉬어.”“아버님, 어머님. 전 진심으로 다솔이랑 결혼하고 싶어요. 저희는 급도 맞잖아요. 다솔이와 결혼하게 해주신다면 평생 잘해줄 거예요. 저희 부모님께서도 다솔이를 딸처럼 예뻐하고 계시는 거 잘 아시잖아요. 그러니까 허락해주세요.”남태건은 찻잔을 받았지만 마시지 않았다.기대하는 얼굴로 권용민과 김영은을 보았다.권용민은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태건아, 난 이 일을 우리가 함부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단다. 결혼 전에 먼저 약혼부터 해야 하잖니. 약혼 전에 상견례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모든 걸 절차대로 마쳐야 결혼을 할 수 있는 거란다. 일단 이 물건들을 가져가. 그리고 다음에 내가 집사람과 함께 찾아가마.”남태건은 그의 말에서 거절의 의미를 눈치챘다.하지만 이미 이렇게까지 말한 이상 그는 더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권다솔을 억지로 끌고 가서 혼인신고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그는 일단 물러설 수밖에 없었지만 이미 가져온 예물과 금붙이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남기고 가려고 했다.“태건아, 네가 우리한테 준 선물은 사양하지 않고 받을게. 하지만 예물은 도로 가져가는 게 좋겠구나.”권용민이 허리를 굽혀 짐을 정리하는 순간 남태건은 이미 현관까지 가버렸다.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권용민은 손에 든 쇼핑백을 내려놓았다.“일단 다솔이한테 연락해서 무슨 일인지 물어봐.”김영은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권다솔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권다솔은 전화를 받기 전 특별히 거울을 보며 차림새와 머리를 정리했다. 그리고 혈색 없는 입술에 립스틱을 바른 후에야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두 사람을 웃는 얼굴로 맞이했다.“아빠, 엄마. 전 혼자 잘 지내고 있어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너랑 태
남태건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그는 권다솔의 손도 제대로 잡아보지 못했기에 당연히 사이즈를 알 리가 없었다.“크기 조절 가능한 팔찌는 없어요?”“있긴 한데요. 디자인이 몇 개뿐이라서요. 인기 많은 제품들은 전부 사이즈가 정해져 있어요.”직원은 그를 힐끗보다가 속으로 중얼거렸다.‘예비 신부한테 관심이 없다고 하기엔 예물을 전부 최고급을 골랐잖아. 그렇다고 해서 또 예비 신부한테 잘해준다고 하기엔 애매해. 어떻게 여자친구 팔목 사이즈도 모를 수가 있는 거지?'‘꼭 결혼까지 앞뒀는데 동거는커녕 손도 한번 못 잡아본 것 같네. 서로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을 것 같네.'“괜찮아요. 그걸로 주세요.”남태건은 제일 무거운 팔찌를 골라 쟁반에 올려두었다.“그리고 이거, 봉황이 있는 금목걸이도 주세요.”남씨 가문에 남아도는 것이 돈이었다. 권다솔의 부모님 앞에서 자신의 성의를 보여주기 위해서라면 얼마가 되었든 상관없었다.그가 가게에서 나왔을 때 직원의 입은 귀에 걸려 있었다. 남태건 덕분에 한 달 업적을 하루 만에 달성했기 때문이다.곧이어 남태건은 권용민이 좋아할 만한 비싼 술과 담배를 산 후 권씨 가문 본가로 운전했다. 쇼핑백을 바리바리 들고 오는 남태건의 모습에 김영은은 어안이 벙벙했다.“태건아, 우리 집으로 오는 게 처음도 아니고 이게 다 뭐니? 그냥 내 집이다 생각하면서 오면 되는 건데 뭘 이렇게 많이 사 왔어?”“아버님, 어머님. 전 오늘 손님으로 찾아온 게 아니에요. 다솔이랑 결혼하고 싶어서 온 거예요. 이건 제가 드리는 선물이에요.”남태건은 자신이 사 온 것을 하나씩 열어 보여주었다.그는 물건만 사 온 것이 아니었다. 한 가방의 현금과 예물까지 준비해왔다.창문으로 비쳐 들어오는 햇볕에 금붙이들은 반짝반짝 빛났다.권용민과 김영은은 서로 마주 보았다. 두 사람은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남태건은 아주 신경 써서 선물을 준비해온 것이 그들의 눈에도 보였다. 정말로 권다솔을 좋아하고 있는 것 같았고 앞으로 두 사람이
“다솔아... 너 정말로 나한테 아무런 감정이 없는 거야?”남태건은 여전히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조금이라도, 단 한 번이라도 나한테 설렌 적 없어?”그는 그동안 아주 많은 노력을 했었다. 할 수 있는 건 전부 했다. 그러나 여전히 권다솔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게다가 우린 함께 밤까지 보냈잖아. 난 정말로 진심으로 널 책임지고 싶어. 그냥 잠만 자고 버리는 나쁜 놈이 되고 싶지 않다고. 다솔아, 다시 한번 생각해줘. 우린 이미 밤까지 보냈다고!”“지금이 어떤 시대인데요. 전 태건 씨를 이해할 수 없네요.”권다솔은 머리가 지끈거렸다.그가 질척이면 질척일수록 그녀의 생각은 점점 더 확고해졌다. 앞으로 친구로도 지낼 수 없겠다고 말이다.그녀는 인내심 있게 마지막으로 말했다.“그날 밤 일은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 더는 제 앞에서 언급하지 말아요. 만약 태건 씨의 말대로 함께 한번 잤다고 해서 무조건 함께 살아야 한다는 거라면, 이미 아이까지 한 번 있었던 저와 진호 씨는 영원히 떨어지지 말고 함께 살아야 하는 거겠네요?”남태건은 주먹을 꽉 쥐었다. 저도 모르게 이도 빠득 달았다.“권다솔, 그딴 말로 날 자극하지 마.”두 사람이 다시 잘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니 남태건은 기분이 불쾌해졌다.권다솔은 말을 이었다.“전 태건 씨를 자극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냥 예시를 들어 알려준 거죠. 그러니까 나가요. 앞으로 더는 찾아와 문도 두드리지 말고요. 방금 같은 일 또 일어나기를 바라지 않으니까.”“다솔아! 네가 나한테 어떻게 매정할 수가 있어! 차 한잔도 내어주지 않고 지금 날 쫓아내는 거야? 적어도 물 한 잔 마시게는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밖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서 있었는데. 나 힘들어 죽겠다고.”남태건은 꼬리를 내렸다.물 한잔쯤 대접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권다솔은 그에게 희망 고문하고 싶지 않았다.그녀가 예의상 했던 행동이 남태건에겐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게다가 이번 한 번 타협한다면 두 번째도 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