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죠, 강하임 씨.”경찰도 강하임이 책임지기 싫어서 이런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그들은 절차에 따라 조사를 진행할 것이다.여경이 다가가서 강하임을 끌어당겼다. 그러자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외쳤다.“안 돼요! 싫어요! 엄마, 저 좀 도와줘요! 경찰서 가기 싫단 말이에요!”“내 딸 건드리지 말아요!”정연은 어떻게든 강하임을 지켜주려고 했다. 그러자 경찰이 나서서 정연을 밀어냈다.그렇게 강하임은 침대 아래로 끌려 나게 되었다. 정연이 말리는 것은 소용이 없자, 그녀는 또 강성훈을 바라보며 말했다.“아빠, 도와줘요! 저 감옥 가기 싫어요! 제발 도와줘요!”경찰은 결국 그녀를 끌어갔다.강성훈도 답답하기는 하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경찰은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온지유도 마찬가지였다. 할 수 있는 일 없이 화만 치밀어 오르는 상황이었다.그는 냉랭한 표정으로 온지유를 바라보며 말했다.“온 비서, 정말 내 체면을 안 봐줄 생각이에요?”“강 대표님을 아끼는 마음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자식이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이렇게 감싸고 돈다면 역효과만 날 것입니다. 오히려 해치는 것이라고요. 강 대표님은 평생 가도 무엇을 잘못했는지,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깨닫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언젠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른 다음에야 후회하겠죠. 설마 이 큰 세상을 영원히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온지유가 대답했다. 그녀는 강하임이 정말 살인범이 되었을 때는 아무리 많은 돈을 써도 감싸주지 못하고 후회만 할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다.“온지유 씨도 함께 가주셔야 합니다.”경찰이 말했다.“네.”온지유는 경찰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강성훈은 차가운 얼굴로 주먹을 꽉 쥐었다. 온지유의 말을 듣기는 했지만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가장 신경 쓰는 것은 온지유가 그의 체면을 살려주지 않았고, 여이현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그는 또 여이현을 바라보며 협박했다.“여 대표, 금강과 여진은 아직 협력 관계야. 만약 오늘
“예전은 예전이고, 지금은 지금이야. 당신이 기억하는 건 예전의 여이현이고, 지금의 여이현은 여진그룹의 대표라고. 우리는 해외에 있어서 몰랐지만, 국내에 여이현 눈치 안 보는 사람이 없어. 여이현의 여진의 실세라는 말, 못 들어 봤나?”정연은 말문이 막혀 울기 시작했다.“그럼 하임이가 감옥 가는 걸 두고만 볼 건가요? 차라리 내가 대신해서 가는 게 낫겠어요!”강하임은 그들의 딸이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러나 강성훈에게는 금강그룹도 중요했다. 많은 사람이 그의 회사에 의지하고 있기에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강성훈은 상황을 좀 더 깊이 고민할 필요가 있었다.경찰서에서 온지유는 이미 진술을 마쳤다. 녹음기 역시 조작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세상에 완벽한 범죄는 없다.강하임은 CCTV를 고장 내고 아무도 모르게 하려고 했지만, 손을 댄 증거는 언제나 남아있다. 조사 결과 강하임의 기사가 CCTV를 고장 낸 것으로 드러났다.기사를 데려와서 묻자, 모든 진실이 드러났다. 강하임은 취조실에서 거의 정신이 나갈 지경에 이르렀다. 그녀는 변호사를 부르겠다고 소리치고 부모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할 일을 마친 온지유는 그녀가 어떻게 되든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마땅한 처벌을 받을 것이다.여이현은 온지유가 모든 과정을 끝마칠 때까지 계속 곁에 있었다. 그 사이에 온지유는 그에게 하루 종일 피곤했을 텐데 늦게까지 자신과 함께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내일 또 출근해야 하지 않는가.온지유는 그에게 배려를 보여줬고, 그는 그녀의 세심한 배려에 감동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온지유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싸우기만 하던 두 사람인데 갑자기 분위기가 잠재워진 것이 이상했다.하지만 그는 깊게 파고들고 싶지 않았다. 대신 그녀를 잘 보살펴주면 된다고 생각했다.경찰서에서 나온 시간은 새벽 2시였다. 백지희 등은 온지유의 요구로 먼저 돌아갔다. 여이현만 곁에 있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긴장이
온지유는 생각이 많았다. 어떤 면에서는 그녀와 강하임은 매우 비슷했다.둘 다 여이현의 도움을 받고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강하임처럼 극단적이지 않았다. 만약 여이현이 그녀를 선택해 주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아마 진작 포기했을 것이다.누가 한 우물만 파고 싶겠는가?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지금의 수많은 일이 두 사람의 결혼을 전제로 일어난 것이었다.“난 의무적으로 사람들을 구해줬을 뿐이야. 내 개인과는 큰 상관이 없어. 누가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싶겠어? 그때 했던 일은 단지 신념과 의무 때문이야. 만약 그 일이 없었다면, 난 아마 군대에 가지도 않았을 거야. 그러면 그렇게 많은 일들이 생기지도 않았을 테고.”여이현은 스스로 생각했다. 만약 그가 여씨 가문에 남아 있었다면, 위험한 일을 할 가능성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더군다나 그 시기는 영광과 거리가 먼 가장 암울한 시기였다.“알아요.”온지유는 그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모두 지나간 일이에요. 저도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일찍이 알고 있었다. 여이현이 그녀를 구해준 것은 명령과 의무 때문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것이 그가 그녀를 전혀 기억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여이현은 조용히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모든 것이 평온해 보였다. 그런데도 그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의 반응이 자꾸만 위험하게 보였다.“너 오늘 정말 이상해.”“그래요?”온지유는 그와 팔짱을 꼈다.“죽었다가 살아나니 정신을 차린 게 아닐까요?”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여이현은 깜짝 놀랐다. 이토록 적극적인 태도 역시 놀라웠지만, 딱히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그래서 대신 설명이나 했다.“오늘 시상식에 참석했어. 원래는 어제 말하려고 했는데 시간이 없었어. 앞으로 내 핸드폰은 24시간 켜져 있을 거야. 다시는 너를 찾지 못하는 일은 없을 거야.”“이해해요. 우리 집에 돌아가요. 맞다, 전에 F국에 가고 싶다고 했잖아요? 요즘 시간 있어요?
여이현의 품에 안긴 온지유는 잠깐 멈칫했다. 잠시 후 그녀는 요리 중인 프라이팬을 내려놓으며 물었다.“왜 그래요? 야식은 곧 먹을 수 있어요.”여이현은 그녀를 더욱 꽉 끌어안으며 머리카락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익숙한 향기가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켜 주었다.“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너랑 같이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아.”온지유는 담담한 눈빛으로 프라이팬을 뒤적였다. “부엌은 기름 냄새가 심해서 이현 씨한테 안 좋아요.”“너와 함께라면 어디든 괜찮아.”예전의 온지유라면 무조건 가슴이 떨려서 어쩔 줄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마음이 잔잔한 호수처럼 고요했다. 여이현의 달콤한 말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기대했다가 실망한 날이 많아서인지, 그녀의 마음은 점점 무뎌지기 시작했다.온지유는 그를 밀어내지도, 거부하지도 않으며 말없이 함께 있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앞으로 이런 기회는 절대 없으리라는 것을 말이다.음식이 준비되자 온지유는 살짝 몸을 틀어 그를 돌아보았다. “이제 나가요. 예쁘게 담기만 하면 바로 먹을 수 있어요.”“그렇게 신경 쓸 필요 없어. 대충 담아서 같이 나가자.”“싫어요. 전 예쁘게 하고 먹을래요.”온지유는 그를 서둘러 밖으로 밀어내며 말했다. “나가서 앉아 있어요. 누가 보고 있으면 민망하단 말이에요!”여이현은 마지못해 밖으로 나갔다. 머리를 돌려보니 온지유는 부엌문을 닫아서 그가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다.바쁘게 움직이는 그녀의 그림자 보면서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피어올랐다. 플레이팅까지 신경 쓰는 모습에 그녀가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는 호의를 거절하지 않고 식탁에 앉아서 가만히 기다렸다. 깊은 밤의 은은한 조명 분위기를 더했다. 그는 손가락으로 식탁을 두드리며 부엌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느 순간 어둠 속에서 온지유가 천천히 다가왔다.그녀는 평소 입던 딱딱한 정장이 아닌, 흰색 스웨터와 넉넉한 바지를 입고 있었다. 뽀얀 피부는 스웨터 덕분에 더욱 빛나 보였다.온지
그 말을 들은 여이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다시 생각해 봐도 자신을 비꼬고 있는 말로 들렸다.식탁은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맞은편에 앉은 온지유와의 거리감이 왠지 마음 한편을 허전하게 만들었다.여이현이 말을 걸었다."좀 더 가까이 앉아."온지유는 그 말에 거절하지 않고, 의자를 끌어 그의 옆자리로 왔다. 그리고는 여이현에게 반찬을 덜어주며 말했다."시간이 꽤 지났는데 왜 아무것도 안 먹고 있어요? 요리가 입에 안 맞아요?"여이현은 온지유가 자기 그릇에 음식을 덜어주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젓가락을 집었다."요리하기 전에도 말했잖아. 네가 만든 거라면 뭐든 다 먹겠다고."그는 온지유가 덜어 준 음식을 입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음, 맛있네. 요리에도 재능이 있나 봐?"그리고는 같은 반찬을 몇 번 더 집었다.여이현이 진심으로 요리를 즐기는 모습에 온지유는 마음속이 크게 요동쳤다.그러나 티 내지 않고 그저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말했다."어머, 진짜요? 저도 먹어봐야겠어요, 정말 그렇게 맛있는지."그리고 다른 접시에 젓가락을 뻗어 맛보고는 말했다."음... 그냥 평범한데요. 도우미가 해준 요리가 더 맛있는 것 같은데."몇 끼를 굶기라도 했는지, 여이현은 가볍게 웃으며 요리를 집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난 네가 만든 게 더 맛있는 것 같은데."여이현이 자신의 요리 솜씨를 계속 칭찬해 주는 모습에 온지유는 기분이 좋아졌다.그 순간, 온지유는 두 사람이 진정한 부부로서 함께 생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여이현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잘생긴 얼굴은 그저 국물을 마시는 모습조차도 남들과 사뭇 달라 보였다. 온지유의 얼굴에는 자연스레 미소가 떠올랐고, 여이현을 바라보는 눈빛에도 저도 모르게 따뜻한 감정이 실렸다."요즘 밥은 잘 챙겨 먹고 있는 거죠?"온지유가 당부했다."아무리 바빠도 끼니는 거르면 안 돼요. 돈은 천천히 벌 수 있지만, 몸은 하나뿐이잖아요. 한번 무너지면 다시 회복하는 데 돈도 시간도 더
온지유가 계속 온 비서로 남았다면 분명히 아무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그러나 그녀는 욕심이 생겨버렸다. 여이현의 사랑을 갖기를 원했다.이대로 계속 함께 있으면, 둘은 점점 더 불행해질 것이고, 아름다웠던 추억은 결국 그림자조차 남지 않을 것이다."온지유..."여이현의 감정이 격해질수록 약효는 점점 강해졌다.여이현은 온지유를 뚫어져라 응시했다."설마 날 떠나는 이유가... 석이한테 가기 위해서야?"온지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의 날카로운 시선을 이겨내며 여이현의 얼굴을 어루만질 뿐이었다.온지유는 그에게서 석이의 흔적을 찾으려 했다.하지만 눈앞의 그는 여이현이었다. 더 이상 그 젊고 패기 넘치던 소년이 아니었다.온지유는 강도의 손에서 자신을 구하려다 심하게 다쳤던 정의감 넘치던 그를 떠올렸다. 그에게 목숨을 빚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석이는 온지유를 위해 피를 흘렸고, 온지유도 여이현의 생명을 구하면서 그 빚을 갚았다.온지유는 석이와의 일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중학교 졸업 이후, 온지유의 시선은 항상 그를 따라다녔다. 그가 다니던 고등학교, 그가 다니던 대학교에 따라갔다. 여이현에게 온지유는 7년 동안 존재 한 사람이지만, 온지유의 삶에 여이현은 14년 동안 존재했다.어느 한 무더운 오후였다.특별한 날을 맞아, 학교에서는 단체로 연극을 준비 하기로 했었다. 어떤 일이든 정성을 다하던 온지유는 다른 학생들보다 30분 일찍 강당에 도착했다. 가장 먼저 와서 대사를 연습하곤 했던 온지유는 그날도 평소처럼 강당에 들어섰고, 동시에 코를 찌르는 심한 피비린내를 맡았다.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낀 온지유는 냄새를 따라 대기실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학교에서 사용하던 공연 의상들로 가득했다. 어딘가에서 무거운 숨소리가 들려왔다. 온지유는 도둑일 것이라 생각하며 두려운 마음에 문 뒤에 있던 야구 배트를 잡고 다가갔다.걸쳐있던 옷을 밀어내었을 때, 손에서 놓친 야구 배트가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여이현의 얼굴이 먼저 눈
온지유는 마지막 한 모금 남은 잔을 여이현의 술잔에 가볍게 부딪혔다.나름 깔끔한 작별 인사였지 않을까.그 전에 함께 즐겁게 식사도 했으니 말이다.온지유는 떠나기 전에 이혼 서류를 다시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 옆에는 두 장의 프랑스행 항공권도 있었다. 티켓의 주인은 여이현과 노승아였다.온지유는 이를 통해 여이현을 완전히 놓아주었다는 뜻을 전하고 싶었다.프랑스같이 로맨틱한 여행지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는 것이 더 어울릴 것이니.모든 일을 마친 온지유는 짐을 챙겨 집을 나섰다.이날 밤은 아무도 저택을 지키고 있지 않았다.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다음 날."대표님!""대표님, 정신 차리세요!"여이현은 서서히 깨어났으나, 머리는 여전히 묵직한 돌에 짓눌린 듯 무거웠다.밀려오는 두통에 이마를 짚으며, 엊저녁 온지유가 요리해 주던 장면을 떠올렸다.여이현은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텅 빈 주위에 온지유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대표님, 괜찮습니까? 병원에 가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배진호는 그의 안색이 좋지 않음을 보고 걱정하며 물었다.이른 아침, 도우미가 여이현이 바닥에 잠들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아무리 불러도 깨어나지 않자, 배진호에게 전화를 건 것이었다.여이현은 온지유의 단호하던 그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온지유는 여이현에게서 떠나기 위해서라면 약물을 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여이현은 자리에 앉으며 허탈한 듯 웃었다."나에게서 떠나려고 이런 태도를 보였던 거야."“사모님 말씀인가요? 정말 떠나신 건가요?”배진호는 이미 눈치를 채고, 여이현을 보며 말했다.“바로 사람을 보내 데려오겠습니다!”“됐어!”여이현이 바로 그를 제지했다.배진호는 발걸음을 돌려 다시 여이현의 곁으로 돌아왔다.의자에 걸터앉은 채 이미 다 포기한 듯 공허한 여이현의 모습에 배진호가 다시 물었다."사모님이 갑자기 달라지셨을 때 이미 눈치채셨던 것 아닌가요? 어제는 일부러 사모님의 함정에 빠지신 거죠?"온지유는 떠나기 위
그 말을 듣고 여이현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어떤 비밀인데?"상대방은 여이현이 여전히 관심이 있음을 확인하고 말했다."온지유씨는 여러 번 병원에 다녀왔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온지유씨에 대해서 철저히 함구하고 있었지만, 저희 노력 끝에 온지유씨가 간 곳이 산부인과라는 것을 밝혀냈습니다."여이현은 충격스러운 사실에 한동안 정신 차릴 수 없었다.그는 병원에서 온지유와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온지유는 생리주기가 불규칙하다며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아야 한다고 했었다.여이현이 데려다주려 할 때마다 온지유는 매번 거절했었다.일부러 숨기려 한 것이었다.여이현은 온지유의 사생활에 거의 관심이 없었고, 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아니, 생각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었다.여이현은 온지유와의 지난 3년 동안 항상 거리를 두었었다.그동안 온지유를 한 번도 건드린 적이 없었다.그가 원한다고 해도 온지유가 원치 않으면 강요하지 않았다.두 사람의 혼인에는 넘을 수 없는 울타리가 있었고, 여이현은 온지유에게 최대한의 존중을 보이고자 했다.지금도 여이현은 함부로 짐작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생각이 많아질수록 마음은 더욱 복잡해졌다. 보이지 않는 그물에 꽉 묶여 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확실해?"여이현이 여전히 침착하게 물었다."확실합니다. 온지유 씨의 병원 행적을 녹화한 것을 복사해 두었습니다. 곧 대표님께도 보내드리겠습니다.""그래."여이현은 전화를 끊었다.이윽고, 휴대폰 화면이 밝아졌다.영상이 벌써 여이현의 휴대폰으로 전송된 것이었다.그러나 여이현은 바로 열어 보지 않고, 사무실 의자에 앉은 대로 깊이 고민했다.해가 지고 밤이 되어, 회사 사람들은 이미 퇴근했지만, 그의 사무실의 불은 여전히 켜져 있었고, 그는 쭉 같은 자세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여이현은 용기가 없었다. 온지유가 산부인과에 간 것이 단순한 검진이 아니었을까 봐 두려웠고, 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 있을까 봐 두려웠다. 언제부터 이
서우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난 진짜 괜찮아. 너희끼리 가.”혜성은 아쉬운 표정을 거두며 말했다. “그럼 어쩔 수 없지.”사람들이 다 떠난 후, 서우는 마음을 가다듬고 일을 시작하려 자료를 꺼내 놓았지만 한참이 지나도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계속해서 넋 놓고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밖에서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를 듣고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서우는 방금전의 실수를 떠올리며 혼잣말했다. “혼자 김칫국 마시긴. 착각하고 난리야.”서우는 잠깐이지만 인명진도 자신에게 관심 있다고 생각했다.그나마 이제라도 빨리 깨달았기에 너무 깊이 빠져드는 것을 막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연애란 감정에 빠지는 건 서우에게 어울리지 않았고 지금은 커리어에만 집중해야 할 때였다.보통 사람이라면 실연의 아픔을 먹거나 놀러 다니며 풀지만 서우는 가장 고문인 일에 몰두하는 방법을 택했다. 고통스럽기는 했으나 효과만큼은 대단했다.서우는 첫날 강연에 가지 않고 그 대신 메디컬 플랜을 완성했다. 밤샘 작업이었지만 지친 기색 없이 일에 몰두할 수 있었다.완성 후, 서우는 무의식간에 인명진에게 전화를 걸어 플랜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통화가 끝난 후, 인명진에게서 돌아온 건 한마디 뿐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밤샘 작업을 했단 말이죠?”인명진의 말투는 아무런 감정 기복 없이 담담했지만 서우는 오히려 자신이 사냥감이 된 듯한 위압감을 느꼈고 긴장하기 시작했다.“빨리 끝내고 싶어서요. 오늘 다른 일이 없으니까 하루 휴가 내고 쉬면 돼요.”“그럼 오늘의 강연은 미루는 걸로 해요.”전화기 너머로 낮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낮은 소리라 서우는 자신이 착각한 게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왜요? 왜 연기해요? 삼 일 동안 하기로 했잖아요.”인명진은 평소 다망한 사람이었고 이번 병원 강연에 특별히 삼일 정도의 일정을 비워 두었다. 강연이 끝난 후, 바로 경성으로 돌아가야 하는 일정이었으나 인명진은 스케줄을 바꾸려고 했다. “그렇긴 하지만, 어제 강연에 서우 씨는 참
인명진의 대답을 들은 원장은 씰룩이는 입꼬리를 감출 수가 없었다.곧바로 계약서에 서명을 마친 원장은 감개무량한 듯 말을 이었다.“역시 제가 사람 보는 눈 하난 타고났단 말이죠. 처음부터 저는 인원장님이 우리 병원의 귀인이 될 분이라고 느꼈는데 지금 보니 역시 제 생각이 맞았어요.”인명진은 담담하게 받아쳤다.“원장님께서도 제 큰 골칫거리를 해결해 줬으니 이건 보답이라고 생각해 주세요."원장은 당황했다.그가 언제 인명진을 도운 적이 있다는 말인가?문득 은서우의 당혹스러운 표정과 어쩔 줄 몰라 하는 눈빛이 눈에 들어오자 원장은 단번에 상황을 파악하고는 크게 웃으며 말했다.“하하, 인원장님도 참, 너무 겸손하시네요! 은 선생님도 전문가이신데 골칫거리라니요. 오히려 저희가 득을 본 셈이죠.”은서우는 두 사람의 대화가 귀에 들어오지 않고 그저 전혀 예상치 못한 인명진의 담담한 한마디가 머릿속을 맴돌 뿐이었다.정말 그녀 때문일까?서우의 가슴은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다. 너무나 달콤한 설렘이었지만 그녀는 이성의 끈을 꼭 붙잡고 있었다.간신히 감정을 추스른 은서우는 원장실을 나서서야 조심스럽게 물었다.“원장님, 진짜 저 때문인가요?”말을 끝내자마자 후회가 밀려온 서우는 곧바로 덧붙였다.“아, 죄송해요. 제가 깜빡하고 실수했네요. 이젠 원장님이 아니신데...”인명진은 역시나 담담히 대답했다.“원장이라고 부르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좋아요. 하지만... 다른 호칭이 더 좋을 것 같군요. 그리고 방금 서우 씨가 한 질문에 대한 답은 맞다고 생각해도 좋아요.”여전히 차가워 보이는 그였지만 그 속에 감춰진 부드러움을 서우는 느낄 수가 있었다.은은하게 다가오는 그의 온기가 은서우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그녀가 낮은 소리로 물었다.“근데... 왜죠?”그 순간 인명진도 멈칫했다.왜일까?인명진 자신도 모르고 있다가 은서우의 그 한마디 물음이 그를 깨닫게 한 것이었다.서우 혼자만의 혼란스러움이 두 사람의 것이 되어버린 순간이
서우가 정신없어하는 사이, 인명진이 인파를 뚫고 걸어오고 있었다.카키색 목폴라, 긴 바지, 의사 가운이 아닌 사복 차림을 한 인명진은 한층 부드럽고 신사적인 모습이었지만 다가가기 어려운 차가운 분위기는 여전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그런 시크함에 더 열광하는 듯했다.인명진은 원장과 악수를 나눴다.“원장님, 바쁘신데 직접 나와주셔서 고맙습니다.”“아닙니다. 인 박사가 우리 병원까지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십니다. 원장으로서 당연히 나와야죠.”원장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인사를 몇 마디 나눴다.서우는 눈을 피하며 인명진과 친한 내색을 하지 않았다. 인명진도 그러기를 바랄 것으로 생각했다.역시나 인명진도 그저 눈 한번 마주치고는 서우를 그냥 지나쳐 원장과 함께 떠났다.경성 중심병원 몇몇 의사들도 동행해서 왔는데 그들은 나이가 든 중년 의사들이었고 학계에서도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었다.사십이 넘은 중년남성들 사이에서 아직 이십 대인 인명진은 더욱 빛날 수밖에 없었다.그가 떠난 후에도 사람들은 여운을 만끽했다.“너무 멋있어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에요.”“고작 스물일곱 살이라니, 정말 대단해요. 그 와중에 박사학위가 두 개라니, 저는 꿈도 못 꾸는데 저분은 해낸 거잖아요. 아직 싱글이라는 소문도 있어요.”싱글이라는 말이 나오자 현장에 있던 여자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서우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누군가 어디 가는지를 물었다.“원장님한테요. 프로젝트 방향성에 대해서 의논하려고요.”사람들은 아무 의심이 없었다. 그것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서우의 경력을 아는 사람은 원장뿐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서우와 인명진이 아는 사이인지도 몰랐다.서우는 원장실의 문을 두드렸다.“원장님, 들어가도 될까요? 프로젝트에 관해 드릴 말이 있어서요.”원장은 바로 문을 열고 서우를 들어오게 말했다.“얼른 들어와요, 노크 안 해도 돼요. 다음부터는 그냥 들어와요.”인명진은 소파에 앉아 있었고 앞에는 차 한 잔이 놓여있었다.깔끔한 짧은 머리에
그녀는 그렇게 공부가 하고 싶으면 학원을 다니는 것을 추천하고 싶었지만 서우의 망연자실한 표정을 보고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밥 먹을 시간이에요. 건강 잘 챙겨요. 며칠 전에 위약 먹는 것을 봤어요.”휴대폰 스피커를 막으려고 했지만 이미 전화 저편에서 두 사람의 얘기를 들은 인명진은 아무 말 없이 한동안 침묵했다.은서우는 그 여의사가 떠난 뒤 밥을 잘 챙겨 먹는다고 해명하려고 하자 인명진이 말을 끊었다.“서우 씨네 구내식당 카드 충전할 수 있어요? 내꺼로 하나 만들어요.”인명진 명의로 충전하면 사용 내역이 실시간으로 명진한테로 전송되기에 서우가 밥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를 체크 할 수가 있었다.인명진의 단호함을 느낀 은서우는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구내식당 카드를 충전한 후 은서우는 시시각각 식사 여부를 체크하는 인명진이 있으니 밥을 제때 챙겨 먹었다. 혹시나 까먹으면 인명진은 전화로 알려주곤 했다.주변 사람들은 그런 은서우의 모습을 지켜보며 남자 친구가 챙겨 주는 건지 다들 궁금해 했다.“은 선생님, 혹시 남자 친구세요? 아주 세심한 분인 것 같아요.”“그러게요, 저도 맨날 제 끼니 걱정해 주는 남자 친구가 있으면 좋겠어요. 저희 같은 사람들은 바쁠 때면 밥은커녕 물 마실 겨를도 없잖아요. 이러다 위병 날 것 같아요.”“은 선생님, 어떻게 만난 남자 친구예요? 너무 궁금해요. 말해주세요.”다들 눈에서 반짝반짝 빛이 나며 서우의 대답을 기대하고 있었다.“남자 친구 아니에요, 예전에 병원 원장님이세요.”“원장님이라고요? 여자분이세요? 남자분이세요?”그중 한 분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며 믿지 않는 눈치였다. 어느 원장이 매일 같이 직원 끼니를 챙긴단 말인가? 분명 다른 이유가 있는것이 분명했다.더는 변명할 여지가 없던 서우는 결국 도시락을 안고 사무실로 피했다.그런데 예상 밖의 일이 발생했다. 인명진이 은서우의 병원으로 온 것이었다.그날, 서우는 금방 수술을 마치고 힘들어하고 있을 때 누군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말 그대로예요, 이 프로젝트가 실패하면 인명진이 사퇴한다고요.”이게 무슨 소리야?은서우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아무 말 못 하고 있다가 다시 정신이 번쩍 들자 분노가 차올랐다.인명진이 자기 일을 얼마나 사랑하고 열정적으로 대하는지 잘 아는 서우는 인명진 스스로 그런 제의를 했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어떤 누구라도 인명진이 먼저 본인이 커리어를 포기하겠다는 말할 정도로 그에게 큰 영향을 줄 수 없다고 생각한 서우는 인명진이 협박을 받은 것이 틀림없다고 짐작했다.“오해하지 마세요. 사실이에요. 인명진이 먼저 자기 입으로 제의했어요.”은서우의 흔들리는 눈빛을 본 준서는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어갔다.“인명진은 당신을 소중하게 생각해요.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원칙을 깰 이유가 없잖아요. 그것도 몇 번씩이나.”서우는 준서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들을 하는지 파악할 겨를도 없이 머릿속에는 온통 인명진이 자신을 소중히 생각한다는 말뿐이었다.생각만으로도 가슴이 타오를 것 같았지만 서우는 인명진에게 직접 물어볼 용기가 없어 혼자 속으로 삭혀야만 했다.그렇게 거의 한 주일이 지나도록 서우에게서 아무 연락이 없자 인명진은 참다못해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서우 씨가 보낸 꽃 받았어요. 그런데 꽃병에 꽂아 넣고 길렀더니 아쉽게도 죽었네요. 꽃을 기르는 방식이 틀긴 건가요?” 고뇌하면서 뱉는 인명진의 말에 서우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원래 그래요. 꽃병에 넣어 기른다고 해도 금방 시들어요. 명진 씨가 좋다면 제가 더 보내드릴게요.”인명진은 좋다고 대답하고는 말길을 돌려 물었다.“요즘 프로젝트가 아주 바쁜가봐요?”며칠 동안 연락을 안 한 이유를 고민하던 서우는 인명진이 먼저 물어보자 이내 프로젝트가 어려운 점이 있다고 대답했다.인명진이 어떤 점이 어려운지에 대해 묻자 은서우는 돌 들어 자기 발등을 찍었다고 생각하며 머리를 쥐어짜며 겨우 문제 몇 개를 생각해냈다.인명진은 박사 학위를 몇 개나 딴 교수답게 쉽게 해답을 알려주었다.은서우가 아무
서우는 충동적인 마음으로 한 선택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결정한 일이었으나 예기치 못한 사고로 인해 늦어졌을 뿐이었다.소태훈의 사고가 없었더라면 서우는 지금쯤 수술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이었다.인명진은 은서우를 잠시 바라보고는 진짜로 해보고 싶은 모습인 것 같으니 해보라고 말했다.이에 은서우는 오히려 당황했는지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왜? 내가 동의하지 않을 것 같았어요?”인명진의 물음에 서우는 자신의 속마음이 들켰다고 생각해 얼굴이 상기되었다.“네, 저는 명진 씨가 반대할 줄 알았어요.”인명진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흐뭇한 눈으로 서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서우 씨가 성취욕이 있는 건 좋은 일이죠. 저는 서우 씨가 성장하고 발전할 기회를 막지 않을 거예요.”누군가는 꽃을 키울 때 자신이 원하는 모습대로 자라기를 바라며 키운다고 한다. 많은 부모님이 자식을 대하는 방식과 비슷하게 말이다.하지만 그런 방식으로 키운 꽃은 왕왕 비뚤게 자라 다른 가지에 막혀 시들거나 기형적으로 자라게 된다. 이런 결과는 인명진의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그는 꽃이 자라고 싶은 대로 자연스럽게 자라게 놔두고 단지 가끔 바람과 비를 가려주는 정도였다.하지만 인명진도 은서우에게 되도록 준서와 접촉하지 말고 겁내지도 말도록 당부를 전했고 서우도 그런 명진의 말들을 가슴속에 새겼다.며칠 후, 서우는 다시 연구소로 왔다. 하지만 이번엔 그전과는 달리 인명진과 함께 들어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임시 연구원 신분으로 당당하게 들어왔다.병동에는 전에 보았던 백색증 환자가 책을 보고 있다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당신이군요.”그는 서우를 보고 반갑게 인사를 건네며 미소를 띠었다. 새하얀 속눈썹은 마치 흰 눈이 내려앉은 것만 같았다.서우도 반갑게 웃으며 인사했다.“오랜만이에요, 반달만이죠?”“스물세 날 열일곱 시간만이요.” 서우의 표정을 본 그는 옅은 미소와 함께 자신이 기록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답했다. 안 그러면 심심하다고 말이다.그 짧은 한마디에 얼마나
프로젝트를 본 은서우의 얼굴에는 의문스러움이 가득했다.“아니, 이게 왜?”원장은 서우의 표정을 보고 바로 물었다.“서우 씨, 진짜로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었어요?”“네, 하지만 중간에 퇴출했었어요.”은서우는 뒤늦게 표정 관리를 하며 자신의 놀라움을 감추려고 애썼다. 서우의 말을 들은 준서는 피식 웃었다. 원장은 두 사람이 오래전부터 서로 알던 사이라고 생각하고 잠시 고민하더니 결국에는 마음이 내키는 내로 프로젝트를 수락하며 은서우에게 당부했다.“서우 씨, 이 박사가 서우 씨를 콕 찍어서 프로젝트에 참여시키려고 했어요. 최선을 다해서 해 봐요, 알겠죠?”원장의 격려에 서우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내키지 않았다.이 박사는 서우의 표정 변화를 지켜보고는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표정을 보아하니 내키지 않는가 봐요? 이런 외딴곳까지 파견 나온 상황에 제가 이렇게 큰 프로젝트를 가져다주는데 오히려 저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은서우가 억지로 웃어 보이며 고맙다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자 준서는 더 크게 웃으며 말했다.“누가 인명진 제자 아니랄까 봐, 성깔이 똑같네! 아주 그냥.”은서우는 길게 숨을 한번 들이쉬고는 말했다. “지금 뭐 하려는 속셈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이미 그 프로젝트에서 빠졌어요. 그리고 인원장님은 저한테 은인이니 말씀 함부로 하지 마세요.”준서는 편한 사복 차림에 회색 코트를 입었는데 옷태가 아주 좋았다. 성격이 지랄맞지 않고 자꾸 알 수 없는 표정을 짓지 않는다면 그에게 호감 갈 사람이 아주 많을 것이 뻔했다. 지금 이런 성향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간호사들이 그를 훔쳐보고는 흐뭇해하기 때문이다.은서우만 그에게 아무 감흥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비호감이라고 생각하고 밀어냈다.“별일 없으면 저는 이만 가볼게요. 이 박사님. 배웅은 안 나가니까 조심히 가세요.”말이 끝나기 바쁘게 방을 나서 사무실로 돌아온 서우는 복잡한 심정으로 다시금 그 익숙한 자료들을 꺼내보았다.수많은 좌절을 겪고 나서
문을 나서려고 할 때 갑자기 딩동 하는 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걸어 들어왔다.은서우는 눈이 휘둥그레지게 놀랐다.이 사람이 여길 왜?이준서도 눈썹을 꿈틀거리며 당황한 듯싶었다.“잠시만요, 지나갈게요.”이준서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으나 길을 막고 있는 바람에 은서우는 하는 수 없이 먼저 입을 열었고 다행히 준서는 아무 말 없이 길을 내주었다.은서우가 내심 안도하며 지나가려고 하는 그때, 준서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여기서 마주치다니 인연이네요, 인명진 씨 비서님.”은서우는 고개를 들여 눈을 마주치고는 아무 말 없이 지나쳤다.준서는 두 손을 호주머니에 넣은 채 한참을 서 있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이고는 꽃집으로 들어가 카네이션 한 송이를 들고나왔다.집으로 돌아온 은서우는 방금 전에 마주친 사람을 떠올리며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결국에는 인명진한테 전화를 걸었다.준서를 위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명진 씨, 제가 방금 전에 그 분을 마주쳤어요. 명진 씨와 원수인 그 분.”“누구요?”인명진의 쉰 목소리를 들은 은서우는 신경이 그쪽으로 쏠려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명진 씨, 어디 편찮으세요?”“환절기라서 그래요. 괜찮아요. 계속해요.”은서우는 걱정되는 마음을 잠시 뒤로한 채 계속 말을 이어갔다.“이 박사님이요. 이준서. 아까 마주쳤어요.”그 시각, 사무실에 있던 인명진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물었다.“어디서 마주쳤어요?”은서우는 꽃집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자신이 내일 할 선물이 들통날까 봐 거짓말을 했다.“퇴근길에 마주쳤어요.”인명진은 더 캐묻지 않고 조심하라고 당부했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았는지 말을 바꿨다.“내가 내일 갈게요.”“아니요, 내일 일이 있어서 그러는데 모레 오시는 게 어때요?”은서우가 주문한 꽃이 내일에 인명진에게로 배송 예약이 되어있기에 은서우는 다급히 말리며 말했다.전화기 너머로 서우의 거부감을 느낀 명진은 의아했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한잠 자고 난 서우는 이 일을 까마득히 잊고
은서우는 종이 한 장을 뽑아서 아이의 엄마에게 건네주며 말했다.“아니에요, 병을 고치고 사람을 살리는 게 의사가 해야 할 일인걸요. 전 그냥 의사로서 의무를 다한 것뿐이에요.”아이의 엄마는 몇 번이나 더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서야 떠났다.은서우는 뭉친 근육을 풀며 이번 일은 그렇게 잘 마무리가 되는 줄로만 알았다.그런데 바로 다음 날, 아이의 엄마가 은서우에게「현호제세」가 적힌 페넌트를 보내왔다.그 소식에 병원 전체가 들썩였다.은서우는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이 빨개진 얼굴로 간신히 환자와 가족을 배웅했다. 그리고 점심을 먹으러 병원 식당에 갔을 때 또 한 번 놀림을 당하고 말았다.“듣자 하니 은 선생님께서 아침에 페넌트를 받았다고요? 새 병원에 오자마자 첫날부터 화제성을 몰고 다니다니, 대단한걸요!”“어제 홀로 외과 수술을 진행했다던데, 진짠가요?”은서우는 마지못해 그 사람들에게 해석했다.“저 혼자서 진행한 게 아니라 가르쳐주신 분이 계셨어요.”하지만 그 말에 곧바로 뒤따라오는 대체 누가 도와줬냐는 물음에는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사람들은 대답 없는 은서우에게 재차 물어보았지만 대답해줄 기미가 보이지 않자 이내 흥미를 잃었다.은서우는 그제야 한숨 돌렸다.비록 사람들이 저에 관한 관심은 모두 선의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때로는 감당할 수 없이 벅찬 선의가 악의보다 은서우를 더 난감하게 만들었다.은서우는 그 일이 있고 난 후 병원에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유명해져서 좋은 점이라면, 당연히 그녀를 찾는 환자들이 눈에 띄게 급증했다는 것이었다.갑자기 늘어난 환자에 은서우는 더는 유유자적하지 못했고 매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쳐야 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가면 밥을 먹고 씻고 나와서는 다른 걸 할 기력도 없이 바로 잠들어버렸다.물론 병원에서 진상 환자들을 만나는 일도 적지 않았지만 그다지 큰일이 아니었다.무엇보다 지금 병원의 대체적인 분위기는 경성의 병원보다 훨씬 좋았다. 만약 지나치게 진상을 부리는 환자가 나타나면 병원 동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