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을 듣고 여이현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어떤 비밀인데?"상대방은 여이현이 여전히 관심이 있음을 확인하고 말했다."온지유씨는 여러 번 병원에 다녀왔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온지유씨에 대해서 철저히 함구하고 있었지만, 저희 노력 끝에 온지유씨가 간 곳이 산부인과라는 것을 밝혀냈습니다."여이현은 충격스러운 사실에 한동안 정신 차릴 수 없었다.그는 병원에서 온지유와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온지유는 생리주기가 불규칙하다며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아야 한다고 했었다.여이현이 데려다주려 할 때마다 온지유는 매번 거절했었다.일부러 숨기려 한 것이었다.여이현은 온지유의 사생활에 거의 관심이 없었고, 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아니, 생각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었다.여이현은 온지유와의 지난 3년 동안 항상 거리를 두었었다.그동안 온지유를 한 번도 건드린 적이 없었다.그가 원한다고 해도 온지유가 원치 않으면 강요하지 않았다.두 사람의 혼인에는 넘을 수 없는 울타리가 있었고, 여이현은 온지유에게 최대한의 존중을 보이고자 했다.지금도 여이현은 함부로 짐작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생각이 많아질수록 마음은 더욱 복잡해졌다. 보이지 않는 그물에 꽉 묶여 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확실해?"여이현이 여전히 침착하게 물었다."확실합니다. 온지유 씨의 병원 행적을 녹화한 것을 복사해 두었습니다. 곧 대표님께도 보내드리겠습니다.""그래."여이현은 전화를 끊었다.이윽고, 휴대폰 화면이 밝아졌다.영상이 벌써 여이현의 휴대폰으로 전송된 것이었다.그러나 여이현은 바로 열어 보지 않고, 사무실 의자에 앉은 대로 깊이 고민했다.해가 지고 밤이 되어, 회사 사람들은 이미 퇴근했지만, 그의 사무실의 불은 여전히 켜져 있었고, 그는 쭉 같은 자세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여이현은 용기가 없었다. 온지유가 산부인과에 간 것이 단순한 검진이 아니었을까 봐 두려웠고, 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 있을까 봐 두려웠다. 언제부터 이
그래도 여진숙은 이상함을 눈치챘다.온지유가 여이현과 함께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여진숙과 함께 지내며 불편함을 겪지 않도록 여이현이 배려하여, 그동안 온지유와 그는 이 저택이 아닌 다른 곳에 머물고 있었다.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여이현 혼자 이 저택으로 돌아오고, 온지유는 보이지 않으니, 여진숙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게다가 온지유에 대해 여이현이 전혀 언급하지 않으려 했기에, 여진숙은 더더욱 가슴속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수소문해 보니, 온지유는 이미 회사에 출근하지 않은 지 한참이 되었다고 한다.‘아들과 결별한 것일까?’소식을 확인해 보려 해도, 여이현이 그리하게 내버려둘지는 모르는 일이었다.예를 들면, 수려원에서 일어나는 일은 여진숙에게도 철저히 통제 되어있었다.여진숙은 여이현의 어머니로서, 이 집의 주인으로서, 수려원 역시 그녀의 눈치를 봐야 하는 게 도리였다.하지만 그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오직 여이현의 말만 따랐다.이에 여진숙은 줄곧 감정이 상해있었다.어찌 됐든, 지금은 온지유와 여이현이 이어지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여진숙은 반드시 사실을 알아내기로 결심했다.여이현이 위층으로 올라가려는 순간, 여진숙이 물었다.“요 며칠 동안 지유를 보지 못했는데, 둘이 싸운 거야, 아니면 이미 이혼을 한 거니?”만약 이미 이혼했다면, 여진숙은 이 좋은 소식을 빨리 노승아에게 전하고 싶었다.그러면 여진숙도 그룹에서 한 자리 차지할 수 있을 테니까.지금의 노승아는 그야말로 승승장구였다. 여진그룹의 아들이 대세인 여배우와 결혼했다고 알려지면 꽤 큰 자랑거리가 될 것이다.여이현은 발걸음을 멈췄다.조금 전까지는 모자 사이의 체면을 유지했다면, 이제는 대놓고 면박을 줬다.“남 걱정할 시간에 차라리 어머니 남편이나 신경 쓰지 그러세요!”이 말에 여진숙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의 약점을 찌른 셈이었다.뭐라 대꾸하고 싶었지만, 여이현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위층으로 올라갔다.여이현은 이제 그녀를 쳐다보려 하지도 않았다.온지유 그
그 사람은 온지유와 만난 뒤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았다.둘은 꽤 친한 사이로 보였다.여이현은 이 사람에게 어느 정도 기억이 있었다. 분명 회사에 있는 누군가일 것으로 생각했다.온지유가 떠난 후, 그 남자는 쓰레기통에서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그의 행동에 여이현은 심기가 불편했지만, 지금은 그만이 진실을 알고 있을 것이기에 참고 조사를 계속했다.도세원은 프로그래밍에 몰두하고 있었다.여진그룹 같은 큰 회사에서는 경쟁이 매우 치열했다. 중소기업에 있을 때는 일인자였지만, 여기에는 그와 비슷한 수준의 프로그래머가 열 명은 족히 되었다.성공하기 위해서는 두각을 나타내야 했다.전 직장을 떠난 것도 더 높은 곳으로 가고 싶어서였다.그는 한시도 쉬지 않고 키보드를 두드리며, 식사도 간단히 빵 몇 조각으로 때우고 있었다.도세원이 손에 든 빵을 입에 넣으려던 순간, 그의 옆에 사람들이 웅성웅성 몰려 들었다.고개를 들어 곁을 쳐다본 도세원은 놀란 나머지 손에 든 빵을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대표님!”눈앞에는 여이현의 모습이 있었고, 그에게는 무시할 수 없는 압박감이 느껴졌다.도세원이 급히 일어섰다.“대표님, 무슨 일입니까?”여이현은 온지유와 비슷한 나이대의 남자를 바라보며 차분히 물었다.“도세원씨 맞나요?”“네, 제가 도세원입니다.”도세원은 왜 여이현이 자신을 찾아왔는지 알 수 없어 물었다.“혹시 제가... 뭘 잘못한 게 있을까요?”도세원은 여진그룹에서 열정을 다해서 일하고 있었고, 혹시 모를 실수에 해고당하고 싶지 않았다.여이현은 말없이 대표 사무실로 걸어갔다.그리고 도세원을 재촉했다."서 있지 말고 이쪽으로 오세요."“아, 네!”도세원이 급히 사무실로 따라 들어갔다.사무실에는 여이현과 도세원 둘만 있었다.도세원은 숨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여태 여이현과 직접 대면한 적은 없지만, 그의 성격을 소문으로 알고 있었고, 공기에서 전해오는 압박감을 느낄 수 있었다.여이현은 소파에 편안하게 앉아, 도세원을 바라보며 말했다.“온지유
도세원은 의아한 표정이었다. 여이현이 일에 관해 말하러 온 줄 알았지만, 상황을 설명하지도 않은채 온지유가 병원에 간 경우만 묻고 가버렸다.온지유가 임신한 것이 여이현과 무슨 관계라도 있는 걸까?도세원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일단 직장만 잃지 않았으면 된 거로 생각했다.여이현은 엘리베이터에 타서 주머니에 손을 넣어 분노를 감추고,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당장 온지유가 어디 있는지 알아내요!"‘감히 나 여이현을 배신하다니. 천하의 끝까지 도망가도 잡아 올 것이다!’배진호는 여이현히 이렇게 화난 눈빛을 처음 봤다. 마치 사람을 잡아먹을 듯한 기세였다.온지유의 행방을 묻기 시작한 후로 배진호는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온지유가 발견된 날은 큰 일이 일어나리라 생각했다.그녀가 스스로 운이 좋기를 바랄 뿐이었다.--“에취—”온지유는 갑자기 나온 재채기에 눈물이 찡 났다.휴지로 대충 눈물을 닦고 다시 문서를 작성했다.누가 뒤에서 몰래 말하고 있기라도 한 건지.‘요즘 사이가 안 좋아진 사람이 있었나?’‘새 일자리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으니, 그럴 리는 없을 텐데.’"지유 씨, 편집장님께서 이 뉴스 기사를 수정해달라고 하시네요."온지유는 동료가 건넨 문서를 받아 들고 대답했다."네, 바로 수정할게요."온지유는 방송국에서 편집자로 일하고 있었다.전부터 뉴스에 관심이 많았기에, 이 일을 선택했다.이전부터 매거진 에디터인 진솔과의 관계가 있었기에 추천으로 이곳에 오게 되었다.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지만, 온지유의 풍부한 경력 덕분에 인턴이 아닌 정직원으로 시작할 수 있었고, 이미 방송국의 공식 계정을 맡아 독자들의 투고를 기사로 편집해 계정에 게시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단순히 타이핑만 하면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내용이 빈약하면 구독자는 찾아오지 않는다.편집자는 독자의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필력과 좋은 소재가 필요했다.그래도 온지유는 이 업무에 꽤 잘 적응하고 있었다.대학 시절 문학
다급한 상황에서 온지유는 힘껏 상대방의 등을 쳐대며 크게 외쳤다.“누구야, 놔, 빨리 놓으라고!”남자는 말을 듣지 않고, 온지유가 때리고 욕하는 대로 두고는 빠르게 앞으로 걸어갔다.온지유는 흥분한 나머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고, 그저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는 본능뿐이었다.온 지 며칠 되지 않은 새로운 환경에서 주위에 위험한 곳이 있을지 알 수 없었다.온지유는 다칠까 두려워 일단 위험에서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아무리 물고 때려도 상대방은 그녀에게 해를 가할 의사가 없었다.이건 강도가 아니었다.또한 이렇게 큰 소리로 외치는데도 겁먹지 않는 것을 보면, 설마...온지유가 상황을 파악할 때쯤, 남자는 그녀를 다시 바닥에 안정적으로 내려줬다.그를 알아본 온지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당신...”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을 때, 온지유는 그들 사이가 이미 이렇게 틀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이젠 이름을 부를 마음이 들지 않았다.온지유는 입을 닫고 그를 마주하고 싶지 않아 빠르게 돌아서 걸어갔다.“날 보자마자 도망가는 걸 보니, 양심에 찔리기는 하는가 보지?”남자가 차갑게 말했다.온지유는 발걸음을 멈추고 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온지유가 떠난 이후, 여이현은 그녀를 잡지 않았다.여이현은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이다. 온지유는 그가 다시는 자신에게 신경 쓰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고, 자연스럽게 그대로 이혼할 거라 생각했다.정밀 온지유를 찾고 싶었다면 처음부터 찾아냈을 것이다.헤어진 지 며칠이나 지난 후에 찾아왔다는 것은, 새로운 집념이라도 생겼음을 의미하는 걸까?“전 명확하게 말했어요. 이혼 합의서도 준비되어 있으니, 서명하기만 하면 당신은 자유로워요. 그런데 왜 절 찾아온 거죠? 우리 관계는 이 지경이고, 이미 보기 흉해졌지 않아요. 아니면 대표님께서 이미 예약을 마쳤으니, 당장 함께 이혼 신고하러 가겠다는 건가요?”온지유는 시험 삼아 물었다.등을 돌리고 있어 그의 표정이나 감정을 알 수 없었지만, 발걸음 소리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그럼, 네 배 속의 아이는 뭔데?”여이현은 거의 소리치듯 외쳤고, 눈에는 불꽃이 일었다.그 말을 듣고 온지유는 눈을 크게 뜨며 충격을 받았다.여이현이 갑자기 온지유의 임신 소식을 알게 된 것은 상상치도 못한 일이었고, 순간적 적절한 변명을 생각해 내지 못했다.여이현은 그녀의 멍해진 눈빛을 보며 모든 것이 사실임을 깨달았다.그는 비웃으며 말했다.“할 말도 없나? 평생 누구에게도 배신당한 적이 없는데, 네가 첫 번째네.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까!”온지유는 그의 뜨겁고도 위험한 손길을 느끼며 그가 지금 와서야 자신을 찾은 이유가 임신 소식을 알게 되어서라는 것을 깨달았다.여이현의 위험한 눈빛을 보며 그녀는 더욱더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온지유는 한 손으로 배를 감싸며 말했다.“임신한 게 사실이라 해도, 우리 사이의 계약을 어긴 건 아니에요. 서로 간섭하지 않기로 한 건 당신이 한 말이니, 약속을 지키길 바라요. 어차피 우리 결혼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고, 이혼하면 당신도 다시 결혼할 수 있잖아요.”“아이의 아빠는 누구야?”여이현이 이를 악물고 물었다.온지유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떨며 눈을 감았다.“무슨 상관이에요? 어차피 당신은 아니에요!”“석이의 아이야?”여이현은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고 싶었다.“석이가 대체 누군데? 나민우...?”“아니에요!”온지유가 단호하게 말했다.“그럼, 누구야?”여이현은 그 사람에 대해 매우 궁금했다. 온지유가 필사적으로 지키려고 하는 한 번도 나타나지 않은 이 남자는 대체 어떤 사람인지.온지유는 다시 말했다.“제 사생활일 뿐이에요. 지금 말할 의무는 없어요. 그럼, 대표님, 이미 늦었으니 저는 돌아가서 쉬어야 할것같네요. 내일도 출근해야 하거든요.”온지유는 그의 손을 피해 여기서 벗어나고 싶었다.여이현이 그녀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되면 배 속의 아이도 무사하지 않을 것이다.온지유는 자신의 아이를 잃고 싶지 않았다.여이현은 온지유가 떠나려 하자 얼굴이 차갑게 변하며 다시 품속에 끌어안아 가두
온지유는 여이현의 뺨을 세게 때렸다.여이현은 피하지 않고 그대로 그녀의 손길을 받았다.얼굴에는 선명한 자국이 남았다.그는 고개를 잠시 돌렸다가 다시 온지유를 차갑게 쳐다보았다.온지유 역시 충격을 받아 자기 손을 바라보았다. 힘이 많이 들어가 손이 얼얼했다.온지유는 이렇게 반응한 것에 본인도 매우 놀랐다.여이현과 7년을 함께 지내면서 어떤 갈등이 있어도 손을 대본 적이 없었다.그녀뿐만 아니라 여이현도 자라면서 아무에게도 맞아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온지유...”여이현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온지유는 저리는 손을 거두며 변명했다.“고의가 아니었어요… 당신이 이상한 짓을 하지 않았다면 때릴 일 없었잖아요!”여이현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온지유는 이제 자신을 떠날 용기도 생기고, 때릴 용기도 생겼다. 꽉 쥔 주먹의 관절에서 소리가 났다.화난 여이현의 모습에 온지유는 조금 두려웠고, 그가 마찬가지로 손을 올릴까 봐 겁이 났다.하지만 여이현은 그저 온지유를 차갑게 쳐다보며 말했다.“그 남자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다는 거야?”온지유는 아이의 진실을 그에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온지유는 여이현과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이 아이는 그녀가 결정할 문제다.이기적일 수는 있지만, 그가 노승아와 몰래 눈치 보며 얽혀있는 것보다야, 차라리 시원하게 관계를 끊는 것이 나았다.여이현이 만약 그녀가 임신한 것을 알게 되면, 아이를 지우든, 낳아 키우든, 어떤 선택도 온지유가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온지유는 여이현과 아무런 연관도 갖고 싶지 않았고, 이 아이가 온지유의 것이 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된다.아이의 존재를 안 여이현이 오늘은 남기길 용서한다 해도, 나중에 아이가 태어나면 다시 이혼을 원할 것이고, 아이의 양육권은 그에게 박탈될 것이다.그런 일이 발생하는 것을 절대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온지유는 여이현이 자신과 잘 지내리라고 믿을 수 없었다.예전에는 많이 양보를 해왔지만, 이번만
심지어 약까지 써가며!아이를 지우라는 요구조차도 듣지 않으려 한다.눈앞에서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으려 하다니.감히 이 여이현을 두고 그런 말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여이현은 결국 온지유의 손을 놓고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하지만 그의 눈빛은 차가웠고 이미 온지유에게 크게 실망한 모습이었다.“온지유, 넌 꼭 후회할 거야!”단호한 몇 마디였다.그 말을 들은 온지유의 상처 입은 얼굴을 뒤로 한 채 돌아섰다.온지유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고, 한 방울 두 방울 흘러내렸지만, 고집을 꺾지는 않았다.여이현은 더 이상 뒤돌아보지도 않고 온지유의 시야에서 사라졌다.온지유는 그 자리에 웅크려 앉아, 붉어진 자기 손목을 꽉 잡고 고개를 떨구었다.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회오리쳤다.온지유는 공허했다.그러나 이런 공허함을 처음부터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단지 몇 번이나 실망을 겪고 나서야 혼자 있는 것이 좋다고, 이 결혼을 포기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온지유는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했다.더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하지 않을 거라 여겼는데, 여이현은 다시 나타났다.다시 절망의 날들로 데려갔다.그래, 온지유는 더 이상 불안한 삶을 원하지 않았다.그녀의 선택은 옳았다.그리고 후회해서는 안 된다.온지유는 흐르지 말았어야 할 눈물을 닦고, 일어서서 다시 용기를 내어 미소를 지어 보였다.앞으로의 삶은 나쁘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더 좋아질 것이다.온지유는 여이현이 모든 것을 잘 이해하고 다시는 찾아오지 않기를 바랐다.또한, 이번 일을 겪고 난 여이현도 다시는 온지유를 찾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남자란 자존심이 있어야 하고, 체면도 중요하니까.미련이 남아 있었더라도, 온지유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밴 것을 알고 났으니, 이제는 더욱더 그녀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온지유는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집으로 걸어갔다.피곤했다. 그냥 푹 자고 싶었다.--여이현은 차 안에 앉아 차갑게 굳은 얼굴로 앞을 주시하며 칼날 같은 시선을 보냈다.그래도 풀리
나도현은 고개를 들어 믿을 수 없다는 눈길로 보았다. 이내 박은희가 문을 닫았다.혼란스러워 보이는 나도현을 보며 박은희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자꾸 아버지한테 화를 내지 마. 네 아버지도 그냥 말만 그렇게 하시는 분이야. 그동안 네가 변호사 하겠다고 고집을 부려도 말만 그렇게 할 뿐이지 속으로는 은근 자랑스러워했어.”나도현은 박은희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줄곧 자신을 미워한다고 생각하던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 기분이 어떤 기분인지 형언할 수 없었다.물론 이런 상황을 누구나 다 바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그렇게 나도현은 저녁도 먹지 않고 바로 본가에서 나와버렸다. 양시은은 당연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민이는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양시은이 옆에서 말 못 하게 막아버렸다.집에 도착하고 침대에 서로 기대앉고 나서야 양시은은 본가에서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기분은 좀 괜찮아?”나도현의 목소리가 한참 지나서야 들려왔다.“괜찮고 안 괜찮고 할 것 없어.”“알겠어.”양시은은 그런 그를 꽉 안아주었다. 이런 기분을 그녀가 제일 잘 알았다. 양채은이 살아 있다고 했을 때 이런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다. 살아 있다는 사실에 기쁘면서도 그간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다는 것에 섭섭함을 느끼기도 했다.“그래도 이젠 알게 되어서 다행이네. 부모님이 널 사랑하고 있다는 걸 말이야. 그냥 말로 표현하기 어려우셨던 거야. 하지만 부모님의 자식 사랑은 깊고 영원한 것이니 아버님도 그러리라 생각해.”“응...”나도현도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나용민의 상태는 심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갑작스러운 고혈압으로 잠깐 정신을 잃은 것일 뿐 며칠 동안 편히 쉬고 있으면 다시 원래의 모습대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이었다.양시은이 하민이를 데리고 나용민을 보러 갔을 때 나용민은 하민이와 놀아주기도 했다. 매일 본가엔 할아버지와 손자의 웃음소리만 울려 퍼졌다.나도현과 나용민의 사이도 점차 달라지기도
양시은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실수를 저질러 부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긴장이 풀린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주변 식당을 탐색한 후 보여주었다.“그럼 여기로 가자.”나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하민이도 데리고 가자. 오후엔 유치원에 갈 필요 없이 하민이 선생님께 말씀도 드리고. 점심을 먹고 나면 본가로 가야 해.”양시은은 왜 본가로 가야 하는지를 묻지 않았다. 나도현의 표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이런 표정을 짓게 만드는 사람을 몇 없었기에 나용민에 관한 일로 가는 것임을 대충 눈치채고 있었다.점심을 먹은 후 그들은 나씨 가문 본가로 출발했다.하민이는 본가로 처음 가는 것이 아니었지만 양시은과 함께 가는 것은 처음이었던지라 아주 흥분한 상태였고 차 안에서도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참고 있던 양시은이 결국 장난기 가득한 하민이를 꽉 잡으며 말했다.“하민아, 똑바로 앉아. 움직이지 말고.”하민이는 바로 얌전히 제자리에 앉은 후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엄마, 이번에 본가로 하면 할머니 만날 수 있어요?”나도현이 자신의 아빠라는 것을 알게 된 하민이는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해주던 박은희가 자신의 친할머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양시은은 그런 아이의 머리를 뒤로 넘겨주다가 머리를 다듬을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래. 할머니를 뵙고 나면 우리 하민이 머리 다듬으러 갈 거야.”하민이는 머리를 자르는 것에 딱히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오로지 박은희를 만나러 간다는 생각에 들떠 있을 뿐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차는 나씨 가문 본가 대문 앞에서 멈춰 섰다. 하지만 분위기는 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가볍지 않았고 오히려 무거웠다.그들이 들어왔을 때 박은희는 눈물을 닦고 있었다.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나용민의 모습에 양시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아버님은요?”불길한 예감이 들었다.항상 이미지를 신경 쓰던 사람이 그들이 보는 앞에서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박은희는 고개를 들어 그들을 보았다. 그녀의 두
다음 날이 되자 하민이는 양시은을 빤히 보았다. 너무도 빤히 보고 있어 양시은은 도저히 그 시선을 무시할 수 없었고 행여나 뭔가를 눈치챈 것이라도 아닐까 입을 열었다.“왜 그렇게 엄마를 빤히 보고 있어? 얼른 먹어. 자꾸 안 먹고 빤히 보고 있으면 지각할 거야.”하민이는 만두를 집어 먹으면서 여전히 그녀를 빤히 보더니 웅얼대며 말했다.“유치원 친구들이 저한테 그랬어요. 엄마랑 아빠 사이가 좋으면 하민이 동생이 생길 거라고요. 엄마, 하민이한테 동생이 생겨요?”아이의 말에 양시은은 하마터면 사레가 들뻔했다.가슴을 두드리며 진정한 그녀는 빨개진 얼굴로 순진한 하민이를 슬쩍 째려보았다.“무슨 말을 하는 거야. 얼른 아침이나 먹어.”“네.”하민이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만약 양시은이 아이가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지를 전부 알고 있었다면 아마 이렇듯 가볍게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하민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난 그녀는 평소처럼 회사로 출근했다. 그녀를 본 사람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양 비서님, 오늘 왜 회사로 오신 거예요?”기획팀의 직원 장은영이 놀란 얼굴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 장은영의 눈빛은 꼭 눈앞에 나타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을 보는 듯했기에 양시은도 어처구니가 없었다.“여긴 회사고 제가 왜 여길 왔겠어요?”장은영은 우물쭈물하더니 이마를 짚었다.“하지만 양 비서님은 대표님과 이미...”장은영의 머릿속은 사실 아주 단순했다. 출근은 하는 것은 돈을 벌기 위함이었고 아무도 출근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다. 만약 평생을 놀고먹고 살 수 있을 만한 능력이 있다면 누가 이렇듯 매일 회사로 출근하겠는가. 미치지 않고서야 말이다.눈치 빠른 양시은은 그녀의 눈빛에서 생각을 읽어내곤 못 말린다는 듯 말했다.“비록 제가 대표님과 결혼하긴 했으나 아직 회사를 그만둔 건 아니잖아요. 전 여전히 은영 씨에게도 익숙한 양 비서인걸요.”그녀는 그들이 자신을 예전처럼 대해주길 바랐다.양시은의 뜻을 이해한 장은영은 조금 미안한 듯 멋쩍게 미소를 지었다. 양시
양시은은 순간 감정이 벅차 올라왔고 당장이라도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았다. 오랜만에 보는 양채은을 한참이나 빤히 보았다.그 순간 그녀는 양채은의 이목구비가 예전과 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얼굴이 왜 그래? 혹시 화재 때문에 그런 거야? 아프지는 않았어...?”양채은은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만지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사실 그녀는 자신의 얼굴이 딱히 신경 쓰이는 것은 아니었다. 얼굴이 예전과 달라졌을 뿐 목숨을 잃을 뻔한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금 이렇게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이었으니까.늘 이렇게 생각했던 양채은이었지만 아프지는 않았냐고 물어보는 양시은의 걱정 가득한 목소리에 결국 눈시울이 붉어지고 말았다.“아파. 언니. 나 너무 아팠어.”그녀는 살면서 이렇게 아픈 적은 없었다. 불에 탈 때도 아팠고 침대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 있을 때도 아팠다. 그 남자가 자신의 몸에 주입한 약 때문에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할 때도, 폭행을 당할 때도 너무도 아팠다.양채은은 말하고 나니 서러움이 밀려왔다.“정말로 너무 아팠어. 매번 이대로 죽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또 살아 돌아왔...”그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양시은이 그녀를 품에 꽉 끌어안았다. 그녀를 안고 있는 양시은의 손이 덜덜 떨렸고 천천히 등을 토닥이며 달래주었다.“괜찮아. 다 지나간 일이야. 돌아온 거로 됐어. 이젠 아무도 널 해코지하지 못할 거야.”양채은은 그녀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고 한참 지나서야 웅얼대며 물었다.“언니. 내가 안 미워?”양시은은 그녀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언제 널 미워한 적 있어? 넌 쭉 내 동생이었는걸.”두 사람은 한참 앉아 대화를 나누었고 양채은에게 문해미를 찾았다는 소식도 전하면서 시간이 나면 보러 오라고 했다.양채은은 다소 망설여졌다.“지금은 안 될 것 같아.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거든.”“내가 도와줄 건 없어?”양시은이 묻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양시은은
하지만 자신의 동생이 지금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그녀는 순간 진정해질 수 있었고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도 조금 전처럼 어렵지 않았다.온지유는 양시은과 나도현과 함께 샴페인을 마시다가 제안했다.“두 사람 러브샷 하는 거 어때요? 그렇게 각자 술 마시는 것보단 러브샷 하면서 마시는 게 더 재밌잖아요. 안 그래요?”별이는 입안 가득 음식을 밀어 넣으면서도 온지유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었다.“맞아요!”양시은은 못 말린다는 얼굴로 온지유와 별이를 보았다.“별이가 누굴 닮은 건지 이제야 알겠네요.”온지유는 별이를 안아주더니 입가를 닦아주며 눈썹을 꿈틀댔다.“누굴 닮은 건지 이제야 알겠다니요. 전 그냥 두 사람이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주려는 것뿐이라고요.”물론 양시은은 결국에 온지유의 말대로 했다. 그녀는 몸을 돌려 나도현과 함께 술잔을 들었다.“그럼 이번은 러브샷 하는 거로.”조금 전부터 지금까지 나도현은 술을 아주 많이 마셨다. 그녀의 주량이 몇 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의 앞으로 내민 술은 그가 전부 마셨다.나도현도 새 술잔을 들었다. 별이는 순진무구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보았고 온지유는 그런 아이의 눈을 가려주었다.“어린이는 보면 안 돼요.”양시은은 나도현과 러브샷 한 뒤 술잔을 내려놓았다. 술이 몸으로 들어간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얼굴이 빨개지는 그녀였다. 주위에선 호응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녀의 얼굴이 더 빨갛게 익어버렸다.역시나 그녀의 주량은 약해도 너무 약했다. 고작 한 잔으로 벌써 정신이 해롱해롱해지기 시작했으니 말이다.다만 아직 결혼식은 끝나지 않았고 술잔도 이제야 절반밖에 비우지 못했기에 취기가 오르는 몸으로 버티고 있었다. 물론 나도현의 눈을 속이는 건 불가능했다. 그는 양시은의 손목을 잡으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그만 마셔.”양시은은 조금 더 마셔보려고 했다.“아니야. 아직 괜찮아...”그녀의 말에 나도현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고 그제야 그녀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직 술
양시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이는 것 외엔 다른 대답을 할 생각이 없었다.나도현은 그녀의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었고 은빛의 반지가 그녀의 손가락에 딱 맞게 들어갔다. 다음 순서로 그녀가 나도현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었고 그제야 자신의 반지와 그의 반지에 새겨진 이니셜 디자인이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녀의 반지에 새겨진 이니셜은 외관에 도드라지게 새겨져 있었지만 나도현의 반지엔 안에 새겨져 있었고 똑같이 도드라진 디자인이었다. 반지를 손가락에 끼면 그 이니셜이 살을 누르게 될 것이고 아픈 것은 물론이고 불편할 것이다.양시은은 그의 반지를 보곤 한참 멍한 표정을 지었다. 다행히 나도현이 그녀의 정신을 돌아오게 해주었다.“미안해. 잠깐 다른 생각 해버렸어.”양시은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간 뒤 작게 사과했다. 나도현은 그녀의 팔을 잡아 자신의 팔에 팔짱 끼게 한 뒤 하객들에게 인사를 했다.“응. 알고 있었어.”그래서 다시 집중할 수 있게 살짝 친 것이었다. 다행히 몇 초간 넋 놓고 있었던 것이었던지라 대부분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했지만 유독 눈치 빠른 사람이 있었다.양채은은 구석에 있는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었다. 창문 쪽은 사각지대였던지라 대부분 사람들이 그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고 사람들의 축복을 받고 있는 나도현과 양시은도 그러했다.그녀는 양시은이 잠깐 다른 곳에 정신을 팔고 있었다는 것을 눈치챈 유일한 사람이었다.아무리 먼 곳에 있어도 양채은은 양시은의 표정에서 놀라움을 보아냈다. 왜냐하면 그녀보다 자신의 언니를 더 잘 아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다만 양채은은 양시은이 뭘 보고 놀란 것인지 굳이 짐작하지 않았다. 이미 결혼식을 올리기도 전에 양채은은 나도현이 반지에 이니셜을 새겼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언니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야.”양채은의 눈빛이 어두워지고 아름다운 양시은의 모습을 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다만 질투 때문에 한 말은 아니었다. 그저 정말로 부러워서 한 말이었다.그녀는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아 샴페인 잔
양시은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나도현이 지금 그녀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의 손을 꽉 잡으며 주위에서 들리는 축복 소리와 함께 차에 올라탔다.온지유도 뒤에서 대기하던 차에 올라탔다. 몇 대의 차가 긴 줄을 이루며 도로를 달리고 있었고 전부 비싼 자동차였기에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도 했다. 그들은 저마다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은 후 개인 SNS에 올렸다.[어느 집 도련님이 결혼하는 걸까. 이렇게 호화로운 차로 신부를 데리고 가다니. 너무 부럽네.]사진은 어느새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고 각종 언론과 플랫폼에 오르게 되었다. 그제야 사람들은 기사를 보며 그저 평범한 부잣집 도련님이 아니라 그 유명한 나진 그룹의 대표님인 나도현이 결혼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어떤 네티즌은 두 사람이 오랫동안 서로만을 기다리다가 오늘에야 결실을 보게 되었다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인터넷엔 전부 두 사람의 결혼에 대한 축복과 감탄으로 가득했지만 핸드폰을 볼 시간이 없었던 양시은은 당연히 이 사실을 몰랐다.결혼식장으로 가는 길은 멀지 않았다. 그저 십 분이 좀 넘는 거리였지만 그녀는 유난히도 길게 느껴졌다. 나도현은 그녀가 긴장감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을 눈치채곤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괜찮아. 내가 있으니까 긴장하지 않아도 돼.”양시은은 심호흡했다.“고마워. 덕분에 좀 나아진 것 같아.”빈말은 아니었다. 확실히 나도현이 손을 꼭 잡아주고 있으니 그녀는 전처럼 긴장하지 않게 되었다.결혼식장에 도착하고 나서도 나도현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차에서 내렸다. 하민이는 별이와 함께 예쁘게 차려입고 꽃바구니를 들었다.두 사람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아이들은 꽃바구니에 있던 꽃을 작은 손으로 뿌려댔다. 꽃잎들이 바닥에 살랑살랑 떨어졌다. 하민이는 어제 여이현에게 배운 대로 말했다.“두 분 축하드려요. 백년해로하시고 자식도 순풍순풍 낳기를 바랄게요.”키가 허리에도 오지 않는 아이들이 귀여운 목소리로 말하고 있으니 양시은은
나도현은 눈앞에 있는 양시은을 보았다.“그리고 줄 게 하나 더 있어.”“뭔데?”나도현이 내민 상자를 열자 안에는 반지가 있었고 그녀는 조금 당황하게 되었다.“지금 껴야 하는 거야? 하지만 이건 내일에...”“일단 먼저 껴봐.”나도현은 오래전부터 그녀를 위해 준비한 반지임을 설명해주었고 다만 그때 그녀가 자신의 곁에 없어서 주지 못했을 뿐이라고 말했다.직접 사이즈를 재보고 산 것이 아니었기에 대충 짐작으로 반지를 맞추었고 정말로 그녀의 손가락이 맞는지는 몰랐다.그런 그의 설명을 들은 양시은은 마음이 녹아내릴 것 같았고 나도현이 말한 그때는 아마 그녀가 그를 떠난 그때일 것이다... 그때의 그녀는 이미 그와의 관계가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몰래 반지를 준비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그렇게 생각하니 그녀는 더는 나도현을 거절할 수 없었고 눈물을 머금은 두 눈을 하며 손을 내밀었다. 목소리도 어느새 눈물에 젖어 있었다.“그럼 당신이 끼워줘. 그래 줄 거지?”“당연하지.”나도현은 대답한 후 양시은의 손을 잡아 손등에 키스했고 이내 조심스럽게 반지를 끼워주었다.은빛을 내는 반지는 그녀의 손가락에서 반짝이는 빛을 냈다. 반지를 낀 손을 드니 자신의 인생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 같았고 반지에 이니셜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반지에는 대문자로 ‘N&Y'라고 적혀 있었다. 글자를 빤히 보는 양시은의 모습에 나도현이 살풋 웃으며 말했다.“우리의 성에서 하나씩 따온 거야. 마음에 들어?”양시은은 나직하게 대답했다.“응, 마음에 들어. 너무 마음에 들어.”두 사람은 밝은 달빛 아래서 서로 끌어안았다.다음 날 아침이 되자 양시은은 일찍 일어났다.“오늘은 시은 씨가 새신부 되는 날이니까 제가 화장해 드릴게요. 오늘 하루만큼은 세상에서 제일 이쁜 신부가 되어드리게 하죠!”온지유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양시은은 입꼬리를 올렸다.“저도 지유 씨에게 부탁하려고 했었어요.”온지유는 그녀의 제일 친한
나도현의 태도는 극도로 냉담했다.“전에도 분명히 말씀드렸다고 생각하는데요.”임다혜는 이런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는지 그의 옷을 잡아당기는 동시에 자기 옷까지 마구 찢어대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가 어찌 나도현의 상대가 되겠는가? 나도현은 그녀를 소파에 밀어 넘어뜨린 뒤 문을 열었다.밖에는 경찰들이 도착해 있었다. 동시에 기자들도 사전에 연락이라도 받은 것처럼 준비된 모습으로 대기하고 있었다.“이 여자가 무단으로 들어왔어요.”나도현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말을 이었다.“게다가 제 방 카드까지 갖고 있었어요. 와인은 호텔 직원이 가져다 준 건데 약물이 있는 것 같으니 조사해서 처리해 줘요.”몇몇 경찰은 이런 상황이 처음이었는지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감시 카메라 영상을 확인해 보니 지금까지의 정황은 나도현의 말과 일치했다.기자들 역시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나도현은 차가운 눈길로 그들을 흘겨보았다.“아마 기사 제목까지 정해 두셨겠죠? 유명 변호사, 결혼식 전날 밤 내연녀와 밀회 같은 거요.”기자들은 정곡을 찔린 듯 머리를 긁적이며 서로 눈치만 살폈다.“내일 그런 제목을 보게 되면 전부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겁니다.”나도현이 에이스 변호사로서 얼마나 많은 소송을 이겨 왔는지는 모두가 아는 터였다. 기자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설마요, 변호사님. 저희도 직업 윤리는 지킵니다.”“그 외에 뭘 어떻게 쓰든 마음대로 하세요.”나도현은 그렇게 말하고는 뒤돌아 주저 없이 자리를 떠났다.그 뒤 밤새 조사가 이뤄졌고, 나도현은 현지의 일을 마무리한 뒤 비행기에 오르려 할 무렵 경찰에게 전화를 받았다.“대략 파악이 끝났습니다. 와인에 최면제 성분이 들어 있었고, 호텔 직원이 매수되어 임다혜 씨에게 방 카드를 넘겼어요. 지금 임다혜 씨는 유치장에 있는데 변호사님을 만나고 싶다고 하네요.”“저는 시간이 없으니 법대로 처리해 줘요. 이후 제가 변호사를 붙여서 고소를 진행할 겁니다.”나도현의 냉정한 응대에 경찰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보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