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을 들은 여이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다시 생각해 봐도 자신을 비꼬고 있는 말로 들렸다.식탁은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맞은편에 앉은 온지유와의 거리감이 왠지 마음 한편을 허전하게 만들었다.여이현이 말을 걸었다."좀 더 가까이 앉아."온지유는 그 말에 거절하지 않고, 의자를 끌어 그의 옆자리로 왔다. 그리고는 여이현에게 반찬을 덜어주며 말했다."시간이 꽤 지났는데 왜 아무것도 안 먹고 있어요? 요리가 입에 안 맞아요?"여이현은 온지유가 자기 그릇에 음식을 덜어주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젓가락을 집었다."요리하기 전에도 말했잖아. 네가 만든 거라면 뭐든 다 먹겠다고."그는 온지유가 덜어 준 음식을 입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음, 맛있네. 요리에도 재능이 있나 봐?"그리고는 같은 반찬을 몇 번 더 집었다.여이현이 진심으로 요리를 즐기는 모습에 온지유는 마음속이 크게 요동쳤다.그러나 티 내지 않고 그저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말했다."어머, 진짜요? 저도 먹어봐야겠어요, 정말 그렇게 맛있는지."그리고 다른 접시에 젓가락을 뻗어 맛보고는 말했다."음... 그냥 평범한데요. 도우미가 해준 요리가 더 맛있는 것 같은데."몇 끼를 굶기라도 했는지, 여이현은 가볍게 웃으며 요리를 집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난 네가 만든 게 더 맛있는 것 같은데."여이현이 자신의 요리 솜씨를 계속 칭찬해 주는 모습에 온지유는 기분이 좋아졌다.그 순간, 온지유는 두 사람이 진정한 부부로서 함께 생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여이현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잘생긴 얼굴은 그저 국물을 마시는 모습조차도 남들과 사뭇 달라 보였다. 온지유의 얼굴에는 자연스레 미소가 떠올랐고, 여이현을 바라보는 눈빛에도 저도 모르게 따뜻한 감정이 실렸다."요즘 밥은 잘 챙겨 먹고 있는 거죠?"온지유가 당부했다."아무리 바빠도 끼니는 거르면 안 돼요. 돈은 천천히 벌 수 있지만, 몸은 하나뿐이잖아요. 한번 무너지면 다시 회복하는 데 돈도 시간도 더
온지유가 계속 온 비서로 남았다면 분명히 아무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그러나 그녀는 욕심이 생겨버렸다. 여이현의 사랑을 갖기를 원했다.이대로 계속 함께 있으면, 둘은 점점 더 불행해질 것이고, 아름다웠던 추억은 결국 그림자조차 남지 않을 것이다."온지유..."여이현의 감정이 격해질수록 약효는 점점 강해졌다.여이현은 온지유를 뚫어져라 응시했다."설마 날 떠나는 이유가... 석이한테 가기 위해서야?"온지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의 날카로운 시선을 이겨내며 여이현의 얼굴을 어루만질 뿐이었다.온지유는 그에게서 석이의 흔적을 찾으려 했다.하지만 눈앞의 그는 여이현이었다. 더 이상 그 젊고 패기 넘치던 소년이 아니었다.온지유는 강도의 손에서 자신을 구하려다 심하게 다쳤던 정의감 넘치던 그를 떠올렸다. 그에게 목숨을 빚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석이는 온지유를 위해 피를 흘렸고, 온지유도 여이현의 생명을 구하면서 그 빚을 갚았다.온지유는 석이와의 일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중학교 졸업 이후, 온지유의 시선은 항상 그를 따라다녔다. 그가 다니던 고등학교, 그가 다니던 대학교에 따라갔다. 여이현에게 온지유는 7년 동안 존재 한 사람이지만, 온지유의 삶에 여이현은 14년 동안 존재했다.어느 한 무더운 오후였다.특별한 날을 맞아, 학교에서는 단체로 연극을 준비 하기로 했었다. 어떤 일이든 정성을 다하던 온지유는 다른 학생들보다 30분 일찍 강당에 도착했다. 가장 먼저 와서 대사를 연습하곤 했던 온지유는 그날도 평소처럼 강당에 들어섰고, 동시에 코를 찌르는 심한 피비린내를 맡았다.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낀 온지유는 냄새를 따라 대기실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학교에서 사용하던 공연 의상들로 가득했다. 어딘가에서 무거운 숨소리가 들려왔다. 온지유는 도둑일 것이라 생각하며 두려운 마음에 문 뒤에 있던 야구 배트를 잡고 다가갔다.걸쳐있던 옷을 밀어내었을 때, 손에서 놓친 야구 배트가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여이현의 얼굴이 먼저 눈
온지유는 마지막 한 모금 남은 잔을 여이현의 술잔에 가볍게 부딪혔다.나름 깔끔한 작별 인사였지 않을까.그 전에 함께 즐겁게 식사도 했으니 말이다.온지유는 떠나기 전에 이혼 서류를 다시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 옆에는 두 장의 프랑스행 항공권도 있었다. 티켓의 주인은 여이현과 노승아였다.온지유는 이를 통해 여이현을 완전히 놓아주었다는 뜻을 전하고 싶었다.프랑스같이 로맨틱한 여행지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는 것이 더 어울릴 것이니.모든 일을 마친 온지유는 짐을 챙겨 집을 나섰다.이날 밤은 아무도 저택을 지키고 있지 않았다.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다음 날."대표님!""대표님, 정신 차리세요!"여이현은 서서히 깨어났으나, 머리는 여전히 묵직한 돌에 짓눌린 듯 무거웠다.밀려오는 두통에 이마를 짚으며, 엊저녁 온지유가 요리해 주던 장면을 떠올렸다.여이현은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텅 빈 주위에 온지유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대표님, 괜찮습니까? 병원에 가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배진호는 그의 안색이 좋지 않음을 보고 걱정하며 물었다.이른 아침, 도우미가 여이현이 바닥에 잠들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아무리 불러도 깨어나지 않자, 배진호에게 전화를 건 것이었다.여이현은 온지유의 단호하던 그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온지유는 여이현에게서 떠나기 위해서라면 약물을 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여이현은 자리에 앉으며 허탈한 듯 웃었다."나에게서 떠나려고 이런 태도를 보였던 거야."“사모님 말씀인가요? 정말 떠나신 건가요?”배진호는 이미 눈치를 채고, 여이현을 보며 말했다.“바로 사람을 보내 데려오겠습니다!”“됐어!”여이현이 바로 그를 제지했다.배진호는 발걸음을 돌려 다시 여이현의 곁으로 돌아왔다.의자에 걸터앉은 채 이미 다 포기한 듯 공허한 여이현의 모습에 배진호가 다시 물었다."사모님이 갑자기 달라지셨을 때 이미 눈치채셨던 것 아닌가요? 어제는 일부러 사모님의 함정에 빠지신 거죠?"온지유는 떠나기 위
그 말을 듣고 여이현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어떤 비밀인데?"상대방은 여이현이 여전히 관심이 있음을 확인하고 말했다."온지유씨는 여러 번 병원에 다녀왔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온지유씨에 대해서 철저히 함구하고 있었지만, 저희 노력 끝에 온지유씨가 간 곳이 산부인과라는 것을 밝혀냈습니다."여이현은 충격스러운 사실에 한동안 정신 차릴 수 없었다.그는 병원에서 온지유와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온지유는 생리주기가 불규칙하다며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아야 한다고 했었다.여이현이 데려다주려 할 때마다 온지유는 매번 거절했었다.일부러 숨기려 한 것이었다.여이현은 온지유의 사생활에 거의 관심이 없었고, 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아니, 생각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었다.여이현은 온지유와의 지난 3년 동안 항상 거리를 두었었다.그동안 온지유를 한 번도 건드린 적이 없었다.그가 원한다고 해도 온지유가 원치 않으면 강요하지 않았다.두 사람의 혼인에는 넘을 수 없는 울타리가 있었고, 여이현은 온지유에게 최대한의 존중을 보이고자 했다.지금도 여이현은 함부로 짐작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생각이 많아질수록 마음은 더욱 복잡해졌다. 보이지 않는 그물에 꽉 묶여 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확실해?"여이현이 여전히 침착하게 물었다."확실합니다. 온지유 씨의 병원 행적을 녹화한 것을 복사해 두었습니다. 곧 대표님께도 보내드리겠습니다.""그래."여이현은 전화를 끊었다.이윽고, 휴대폰 화면이 밝아졌다.영상이 벌써 여이현의 휴대폰으로 전송된 것이었다.그러나 여이현은 바로 열어 보지 않고, 사무실 의자에 앉은 대로 깊이 고민했다.해가 지고 밤이 되어, 회사 사람들은 이미 퇴근했지만, 그의 사무실의 불은 여전히 켜져 있었고, 그는 쭉 같은 자세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여이현은 용기가 없었다. 온지유가 산부인과에 간 것이 단순한 검진이 아니었을까 봐 두려웠고, 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 있을까 봐 두려웠다. 언제부터 이
그래도 여진숙은 이상함을 눈치챘다.온지유가 여이현과 함께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여진숙과 함께 지내며 불편함을 겪지 않도록 여이현이 배려하여, 그동안 온지유와 그는 이 저택이 아닌 다른 곳에 머물고 있었다.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여이현 혼자 이 저택으로 돌아오고, 온지유는 보이지 않으니, 여진숙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게다가 온지유에 대해 여이현이 전혀 언급하지 않으려 했기에, 여진숙은 더더욱 가슴속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수소문해 보니, 온지유는 이미 회사에 출근하지 않은 지 한참이 되었다고 한다.‘아들과 결별한 것일까?’소식을 확인해 보려 해도, 여이현이 그리하게 내버려둘지는 모르는 일이었다.예를 들면, 수려원에서 일어나는 일은 여진숙에게도 철저히 통제 되어있었다.여진숙은 여이현의 어머니로서, 이 집의 주인으로서, 수려원 역시 그녀의 눈치를 봐야 하는 게 도리였다.하지만 그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오직 여이현의 말만 따랐다.이에 여진숙은 줄곧 감정이 상해있었다.어찌 됐든, 지금은 온지유와 여이현이 이어지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여진숙은 반드시 사실을 알아내기로 결심했다.여이현이 위층으로 올라가려는 순간, 여진숙이 물었다.“요 며칠 동안 지유를 보지 못했는데, 둘이 싸운 거야, 아니면 이미 이혼을 한 거니?”만약 이미 이혼했다면, 여진숙은 이 좋은 소식을 빨리 노승아에게 전하고 싶었다.그러면 여진숙도 그룹에서 한 자리 차지할 수 있을 테니까.지금의 노승아는 그야말로 승승장구였다. 여진그룹의 아들이 대세인 여배우와 결혼했다고 알려지면 꽤 큰 자랑거리가 될 것이다.여이현은 발걸음을 멈췄다.조금 전까지는 모자 사이의 체면을 유지했다면, 이제는 대놓고 면박을 줬다.“남 걱정할 시간에 차라리 어머니 남편이나 신경 쓰지 그러세요!”이 말에 여진숙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의 약점을 찌른 셈이었다.뭐라 대꾸하고 싶었지만, 여이현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위층으로 올라갔다.여이현은 이제 그녀를 쳐다보려 하지도 않았다.온지유 그
그 사람은 온지유와 만난 뒤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았다.둘은 꽤 친한 사이로 보였다.여이현은 이 사람에게 어느 정도 기억이 있었다. 분명 회사에 있는 누군가일 것으로 생각했다.온지유가 떠난 후, 그 남자는 쓰레기통에서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그의 행동에 여이현은 심기가 불편했지만, 지금은 그만이 진실을 알고 있을 것이기에 참고 조사를 계속했다.도세원은 프로그래밍에 몰두하고 있었다.여진그룹 같은 큰 회사에서는 경쟁이 매우 치열했다. 중소기업에 있을 때는 일인자였지만, 여기에는 그와 비슷한 수준의 프로그래머가 열 명은 족히 되었다.성공하기 위해서는 두각을 나타내야 했다.전 직장을 떠난 것도 더 높은 곳으로 가고 싶어서였다.그는 한시도 쉬지 않고 키보드를 두드리며, 식사도 간단히 빵 몇 조각으로 때우고 있었다.도세원이 손에 든 빵을 입에 넣으려던 순간, 그의 옆에 사람들이 웅성웅성 몰려 들었다.고개를 들어 곁을 쳐다본 도세원은 놀란 나머지 손에 든 빵을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대표님!”눈앞에는 여이현의 모습이 있었고, 그에게는 무시할 수 없는 압박감이 느껴졌다.도세원이 급히 일어섰다.“대표님, 무슨 일입니까?”여이현은 온지유와 비슷한 나이대의 남자를 바라보며 차분히 물었다.“도세원씨 맞나요?”“네, 제가 도세원입니다.”도세원은 왜 여이현이 자신을 찾아왔는지 알 수 없어 물었다.“혹시 제가... 뭘 잘못한 게 있을까요?”도세원은 여진그룹에서 열정을 다해서 일하고 있었고, 혹시 모를 실수에 해고당하고 싶지 않았다.여이현은 말없이 대표 사무실로 걸어갔다.그리고 도세원을 재촉했다."서 있지 말고 이쪽으로 오세요."“아, 네!”도세원이 급히 사무실로 따라 들어갔다.사무실에는 여이현과 도세원 둘만 있었다.도세원은 숨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여태 여이현과 직접 대면한 적은 없지만, 그의 성격을 소문으로 알고 있었고, 공기에서 전해오는 압박감을 느낄 수 있었다.여이현은 소파에 편안하게 앉아, 도세원을 바라보며 말했다.“온지유
도세원은 의아한 표정이었다. 여이현이 일에 관해 말하러 온 줄 알았지만, 상황을 설명하지도 않은채 온지유가 병원에 간 경우만 묻고 가버렸다.온지유가 임신한 것이 여이현과 무슨 관계라도 있는 걸까?도세원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일단 직장만 잃지 않았으면 된 거로 생각했다.여이현은 엘리베이터에 타서 주머니에 손을 넣어 분노를 감추고,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당장 온지유가 어디 있는지 알아내요!"‘감히 나 여이현을 배신하다니. 천하의 끝까지 도망가도 잡아 올 것이다!’배진호는 여이현히 이렇게 화난 눈빛을 처음 봤다. 마치 사람을 잡아먹을 듯한 기세였다.온지유의 행방을 묻기 시작한 후로 배진호는 긴장을 풀 수가 없었다.온지유가 발견된 날은 큰 일이 일어나리라 생각했다.그녀가 스스로 운이 좋기를 바랄 뿐이었다.--“에취—”온지유는 갑자기 나온 재채기에 눈물이 찡 났다.휴지로 대충 눈물을 닦고 다시 문서를 작성했다.누가 뒤에서 몰래 말하고 있기라도 한 건지.‘요즘 사이가 안 좋아진 사람이 있었나?’‘새 일자리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으니, 그럴 리는 없을 텐데.’"지유 씨, 편집장님께서 이 뉴스 기사를 수정해달라고 하시네요."온지유는 동료가 건넨 문서를 받아 들고 대답했다."네, 바로 수정할게요."온지유는 방송국에서 편집자로 일하고 있었다.전부터 뉴스에 관심이 많았기에, 이 일을 선택했다.이전부터 매거진 에디터인 진솔과의 관계가 있었기에 추천으로 이곳에 오게 되었다.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지만, 온지유의 풍부한 경력 덕분에 인턴이 아닌 정직원으로 시작할 수 있었고, 이미 방송국의 공식 계정을 맡아 독자들의 투고를 기사로 편집해 계정에 게시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단순히 타이핑만 하면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내용이 빈약하면 구독자는 찾아오지 않는다.편집자는 독자의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필력과 좋은 소재가 필요했다.그래도 온지유는 이 업무에 꽤 잘 적응하고 있었다.대학 시절 문학
다급한 상황에서 온지유는 힘껏 상대방의 등을 쳐대며 크게 외쳤다.“누구야, 놔, 빨리 놓으라고!”남자는 말을 듣지 않고, 온지유가 때리고 욕하는 대로 두고는 빠르게 앞으로 걸어갔다.온지유는 흥분한 나머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고, 그저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는 본능뿐이었다.온 지 며칠 되지 않은 새로운 환경에서 주위에 위험한 곳이 있을지 알 수 없었다.온지유는 다칠까 두려워 일단 위험에서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아무리 물고 때려도 상대방은 그녀에게 해를 가할 의사가 없었다.이건 강도가 아니었다.또한 이렇게 큰 소리로 외치는데도 겁먹지 않는 것을 보면, 설마...온지유가 상황을 파악할 때쯤, 남자는 그녀를 다시 바닥에 안정적으로 내려줬다.그를 알아본 온지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당신...”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을 때, 온지유는 그들 사이가 이미 이렇게 틀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이젠 이름을 부를 마음이 들지 않았다.온지유는 입을 닫고 그를 마주하고 싶지 않아 빠르게 돌아서 걸어갔다.“날 보자마자 도망가는 걸 보니, 양심에 찔리기는 하는가 보지?”남자가 차갑게 말했다.온지유는 발걸음을 멈추고 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온지유가 떠난 이후, 여이현은 그녀를 잡지 않았다.여이현은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이다. 온지유는 그가 다시는 자신에게 신경 쓰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고, 자연스럽게 그대로 이혼할 거라 생각했다.정밀 온지유를 찾고 싶었다면 처음부터 찾아냈을 것이다.헤어진 지 며칠이나 지난 후에 찾아왔다는 것은, 새로운 집념이라도 생겼음을 의미하는 걸까?“전 명확하게 말했어요. 이혼 합의서도 준비되어 있으니, 서명하기만 하면 당신은 자유로워요. 그런데 왜 절 찾아온 거죠? 우리 관계는 이 지경이고, 이미 보기 흉해졌지 않아요. 아니면 대표님께서 이미 예약을 마쳤으니, 당장 함께 이혼 신고하러 가겠다는 건가요?”온지유는 시험 삼아 물었다.등을 돌리고 있어 그의 표정이나 감정을 알 수 없었지만, 발걸음 소리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그리고 엄마가 아프다는 시점도 너무 절묘했다. 설마 아픈 척하는 건가?이럴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배진호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떴다. 반드시 철저히 조사해야 했다.그가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배진호의 어머니는 잠에서 깨어났다.아들의 의심을 불러일으킨 것도 모른 채 여전히 의사와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내 아들 앞에서 꼭 내 병이 심각한 것처럼 말해줘야 해. 안 그러면 걔 마음이 여전히 그 여자한테 기울어 있을 거야.”“걱정 마. 동창끼리 네 계획을 망치기라도 하겠어?”의사는 가슴을 두드리며 장담했다.“내가 다 맡을 테니 신경 쓰지 마. 그런데 사실 나도 부탁이 하나 있는데 우리 아들이 유학을 가야 하는데 돈이 조금 모자라거든. 좀 도와줄 수 있어? 올해 보너스 나오면 바로 갚을게.”정미진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흔쾌히 승낙했다.어차피 그녀는 돈에 쪼들리지 않았으니.배진호가 비서로 일할 때부터 매달 월급 일부를 그녀에게 보내왔고 이후 그가 회사를 차려 독립하면서 더 많은 돈을 보내왔다.그녀는 사고 싶은 것을 마음껏 사면서 이제는 좋은 며느리를 얻는 데만 집착하고 있었다.“돈은 천천히 갚아도 돼. 여유가 생기면 갚아. 동창 사이인데 내가 너를 믿지 않겠어?”그녀의 말에 의사는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병실을 나선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사람이 참 복에 겨워 사는 줄 모르네. 배진호 같은 아들에, 그토록 훌륭한 며느리까지 얻었는데 뭐가 불만이야? 게다가 그 집안의 돈은 몇 대가 써도 부족함이 없는데 굳이 문제를 만들 필요가 있나? 나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거야. 그냥 일도 때려치우고 집에서 술이나 한잔하면서 낚시도 하고 가끔은 카드놀이도 하면서 살겠지. 생각만 해도 얼마나 여유롭겠어?”하지만 그는 정미진이 아니었고 방관자로서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다음 날 아침, 권다솔은 간단히 짐을 챙긴 후 캐리어를 끌고 여행사로 향했다.그곳에는 대형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고 모든 인원이 모이자 운전기사는 공항으로
지금 그의 모습이 헌신짝이랑 다를 게 뭐가 있지?권다솔 때문에 이렇게까지 할 가치가 있을까?배진호는 전혀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그는 여전히 석규리를 등진 채 그녀를 무시했다.석규리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다른 사람의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한 통의 메시지를 보낸 뒤 불과 30분도 채 되지 않아 배진호의 어머니가 직접 나타났다.정미진을 본 순간 배진호는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엄마! 몸도 안 좋으신데, 게다가 이제 막 수술을 끝내셨잖아요. 퇴원하시면 어떡해요?”“내가 와서 다행이지! 아니면 네가 여기서 얼마나 더 멍청하게 서 있었을지 몰라. 진호야, 엄마가 곧 죽게 생겼는데 너 정말 엄마를 좀 편하게 보내줄 수 없는 거니?”정미진은 배진호의 이마를 꾹 눌러가며 안타까워했다.권다솔의 가정환경이 조금이라도 평범했다면 돈으로 해결했을 것이다.하지만 권다솔은 권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정미진이 아무리 손을 뻗어도 권씨 가문까지 닿을 수 없었기에 결국 배진호에게만 압박을 넣을 수밖에 없었다.“엄마가 부탁할게. 죽기 전에 몇 날이라도 좀 조용히 지낼 수 있게 해줘. 더 이상 문제 일으키지 말고 권다솔과 깨끗이 끝내. 네가 꼭 여기에 남아 있겠다면 엄마도 너랑 같이 있을 거야.”정미진은 외투를 벗어 석규리의 손에 건넸다.그녀는 안에 얇은 옷만 입고 있었다.석규리가 옷을 다시 정미진의 어깨에 덮어주려고 했지만 정미진은 단호하게 거절했다.“엄마가 아들 교육을 제대로 못 시킨 탓에 내 아들이 한밤중에 여기서 바람 맞고 있잖아. 나만 병실에서 잘 먹고 편히 있을 수는 없지 않겠어?”“엄마, 정말 제가 무릎이라도 꿇어야 멈추시겠어요?”배진호의 눈에는 이미 생기가 없어진 채 허망한 표정으로 바라봤다.역시나 자신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는 사람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진호야, 엄마는 네가 무릎 꿇으라고 이러는 게 아니야. 엄마가 원하는 건 네가 권다솔과 완전히 끝내는 거야. 이게 엄마의 마지막 소
“있어요! 내일 아침 출발하는 건데, 초원에서 말을 타고 마유주를 마시는 일정이에요. 총 7박 8일이고 모든 비용은 전부 저희가 책임집니다!” 여대생은 너무 기쁜 나머지 말까지 더듬었다.아르바이트 첫날 만에 벌써 계약을 성사시키다니!급여를 받으면 바로 외할머니 치료비에 보탤 수 있었다.“그럼 그걸로 할게요.”어차피 어디든 상관없었다.여기를 떠나기만 하면 됐다. 더 이상 배진호와 남태건을 마주치지 않는 걸로 충분했다.권다솔은 가이드의 연락처를 추가한 뒤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출발지 근처의 호텔에 묵기로 했다.그리고 방으로 돌아온 뒤 부모님께 영상 통화를 걸었다.“저 내일 여행사 패키지로 여행 가려 해요. 다음 주쯤 돌아올게요.”“좋지! 네 나이에는 이곳저곳 다니며 세상을 봐야 해. 만 권의 책을 읽으려면 만 리를 걸어야 한다잖니. 짐은 다 챙겼니?”김영은은 딸이 여행 가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다만 여행길이 불편할까 걱정될 뿐이었다.권다솔은 고개를 저었다. 비록 아무것도 챙기지 못했지만 괜찮았다.“요즘 세상이 얼마나 편한데요. 필요한 건 현지에서 사면 돼요.”“다른 건 밖에서 사도 되지만 침구류는 우리가 보내줄게. 네 피부가 워낙 예민해서 호텔 이불 덮었다가 알레르기라도 나면 어쩌려고.”권용민이 덧붙였다.아무리 좋은 호텔이라도 집의 침구와 비길 순 없었다.그는 아직도 권다솔이 어릴 적 피부 알레르기로 한밤중에 병원에 가서 약을 사고 주사를 맞으며 한바탕 난리를 겪었던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저 지금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요. 굳이 여기까지 오실 필요 없어요. 너무 번거롭잖아요.”권다솔은 부모님이 늦은 시간까지 자신을 위해 고생하는 게 마음에 걸렸다.그러나 딸을 걱정하는 부모의 마음은 그녀의 마음보다 더 깊었다.권용민은 끝내 직접 가겠다고 고집했고 권다솔은 결국 그들을 이기지 못해 승낙했다.전화를 끊고 나서 그녀는 문득 배진호를 떠올렸다.‘지금쯤 석규리와 단둘이 집에서 다정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다만
할머니는 갑자기 진지하게 말했다.“아이고, 보아하니 꽤 오랫동안 여기 서 있었던 것 같은데 여자 친구가 아직도 너를 만나주지 않니? 이 할미가 한 가지 충고를 해주고 싶은데 들어볼 생각 있니?”배진호는 당연히 할머니가 그만 포기하라고 할 줄 알았다.만약 여기 서 있는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면 배진호 역시 같은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건 당사자만 알 수 있는 법이다. 사랑은 보잘것없는 먼지가 아니기에 바람에 날려 사라질 수 없었다.다만 할머니는 전혀 다른 말을 꺼냈다.“나도 젊었을 때 우리 집 할아버지를 엄청 쫓아다녔단다. 그때 할아버지는 나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집안 사람들 또한 나를 못마땅하게 여겼지. 내가 시골 출신이라 배운 게 없다고 말이야. 하지만 그게 어쨌단 말이니? 나는 그저 그 사람 자체가 좋았어. 그렇게 오랫동안 쫓아다녔고 결국 내 사람으로 만들었단다.”할머니는 눈꼬리를 휘어 올리며 말했다.배진호는 본능적으로 물었다.“그러면 두 분이 함께하신 후에도 할아버지 집안 사람들은 여전히 할머니를 예전처럼 대하셨나요?”“그럴 리가 있겠니? 부모는 그저 자식이 좋은 짝을 만나길 바라는 것뿐이야. 일부러 방해하려는 건 아니지. 결혼 후엔 날 친딸처럼 대했단다. 집안의 돈까지 전부 나한테 맡겼으니. 설령 그 집안에서 나를 못마땅하게 여겨도 두려울 게 없었어. 어차피 내가 그들보다 오래 살 텐데.”할머니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당당하게 말했다.“적어도 99살까지는 살 거 같아.”배진호는 할머니의 말에 크게 동요했다.그는 권다솔의 부모님이 인품이 훌륭한 분들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비록 결혼 전에는 반대했지만 결혼 후에는 축복해 줄 사람들이었다. 그의 어머니처럼 계속해서 방해할 분들이 아니었다.그의 어머니 역시 할머니가 말한 것처럼 몸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아서 이미 수술을 한 번 받은 적이 있었다. 지금 강력히 반대한다고 해도 과연 얼마나 갈 수 있을까?결국 병문안 갈 때 적당히 연기하면 되는 것이었다.“할머니,
왜 아침에 눈을 뜨고 나니 권다솔의 태도가 다시 이전처럼 차가워진 걸까?“저를 때리든 욕하든 심지어 문밖에서 밤새 무릎 꿇고 있으라 해도 전 한 마디 불평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다솔 씨, 제발 절 무시하지는 말아줘요.”배진호는 간절히 애원했다.그는 누구에게도 이렇게까지 비굴하게 군 적이 없었다.아무리 까다로운 고객이라도 그는 이런 식으로 자세를 낮춘 적이 없었다. 하지만 유독 권다솔 앞에서는 모든 것을 잃어도 상관없었다. 오직 그녀만은 잃을 수 없었다.권다솔은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었다.그러나 배진호의 목소리에 그녀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발이 마치 바닥에 붙은 것처럼 한 발짝도 떼지 못했다.그녀는 고개를 저을 뿐 차마 뒤돌아볼 수 없었다. 뒤돌아봤다가는 다시는 떠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진호 씨, 우린 이미 끝났어요. 만약 다시 만나더라도 여긴 아니에요.”둘의 마지막은 구청이어야 했다.이혼 절차를 밟고 나서야 비로소 각자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우리가 끝났다고 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잖아요. 다솔 씨 마음속에 제가 없다는 걸 믿을 수 없어요.”배진호는 집착했고 고집스러웠다.권다솔이 그를 뻔뻔하다 욕하든 귀찮다 욕하든 전혀 상관없었다. 사랑하는 여자를 잡을 수만 있다면 무슨 말을 들어도 괜찮았다.“우리가 어떻게 다시 돌아가요? 돌아갈 수 없어요. 아이도 없고... 그리고 며칠 전 술을 마시다가...”권다솔은 사실을 그에게 알리고 싶었다.이미 남태건과 관계를 맺은 사실이 그녀의 마음속 깊이 박힌 가시가 되어버렸다.하지만 정작 입을 열려는 순간 그녀는 망설였다.이혼까지 가는 마당에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게다가 이 사실을 배진호가 알게 되면 그는 분명히 그녀를 경멸할 것이다. 천한 여자라고 생각할 테니.그녀는 한편으로 선을 긋고 싶어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가 자신을 경멸할까 봐 두려웠다.‘사랑’이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었다.“그날 다솔 씨가 취했을 때 저도 같은 술집에 있었어요. 그리고 다솔 씨가...”“그
김영은도 이번 일로 남태건이 막무가내로 느껴졌다.하지만 남태건의 인성에 문제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태건이는 마음이 급해서 그런 걸 거야. 그래서 실수를 하게 되는 거지.”“마음이 급하든 말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쨌든 전 태건 씨랑 결혼할 수 없어요. 그날은 제가 술에 잔뜩 취해서 실수한 거예요. 누군가 제 술잔에 약을 탔거든요. 그래서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이 일어난 것뿐이에요. 전 절대 하룻밤의 실수로 제 평생을 누군가에게 보상으로 주려는 생각은 없어요.”권다솔은 계속 자기 생각을 말했다.아무리 김영은이 설득한다고 해도 그녀는 절대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 생각이 없었다.뛰어드는 건 쉬웠지만 빠져나오는 건 어려웠으니까.더구나 남태건이 이토록 일러바치는 것을 좋아하니 그녀는 더더욱 그와 결혼 할 수 없다. 다 큰 어른이 어린이집 다니는 아이들처럼 유치하게 굴고 있기 때문이다.“다솔아, 네가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우린 그냥 네가 태건이랑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이 꼭 결혼하라는 뜻은 아니었어.”뜻밖에도 김영은은 그녀의 편을 들어주었다.권용민은 옆에서 줄담배를 피우다가 꺼버린 후 김영은의 옆으로 다가왔다.“설령 네가 평생 혼자 산다고 해도 괜찮다. 너 하나쯤은 평생 먹고 살게 해줄 돈은 있으니까. 나랑 네 엄마는 네가 행복한 게 더 중요해. 행복할 방법은 아주 많지. 그중에서 네가 좋아하는 일만 해.”권다솔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눈물이 흘러나왔다.그녀는 이렇게나 좋은 부모님을 만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를 이해해줄 뿐만 아니라 그녀의 편을 들어주니까.동시에 그녀는 두렵기도 했다.만약 이렇게 좋은 부모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정말로 억지로 남태건과 결혼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정말로 그렇게 된다면 그녀는 아마 더는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정말 고마워요, 엄마, 아빠. 역시 저한테는 두 분밖에 없네요.”권다솔은 분명 웃고 있었지만, 눈물은 계속
결혼은 장난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김영은은 딸 대신 함부로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권용민에게 눈짓했다. 권용민은 얼른 차를 따라주었다.“태건아, 아직 차 한잔도 못 마셨지? 얼른 한잔하면서 좀 쉬어.”“아버님, 어머님. 전 진심으로 다솔이랑 결혼하고 싶어요. 저희는 급도 맞잖아요. 다솔이와 결혼하게 해주신다면 평생 잘해줄 거예요. 저희 부모님께서도 다솔이를 딸처럼 예뻐하고 계시는 거 잘 아시잖아요. 그러니까 허락해주세요.”남태건은 찻잔을 받았지만 마시지 않았다.기대하는 얼굴로 권용민과 김영은을 보았다.권용민은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태건아, 난 이 일을 우리가 함부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단다. 결혼 전에 먼저 약혼부터 해야 하잖니. 약혼 전에 상견례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모든 걸 절차대로 마쳐야 결혼을 할 수 있는 거란다. 일단 이 물건들을 가져가. 그리고 다음에 내가 집사람과 함께 찾아가마.”남태건은 그의 말에서 거절의 의미를 눈치챘다.하지만 이미 이렇게까지 말한 이상 그는 더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권다솔을 억지로 끌고 가서 혼인신고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그는 일단 물러설 수밖에 없었지만 이미 가져온 예물과 금붙이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남기고 가려고 했다.“태건아, 네가 우리한테 준 선물은 사양하지 않고 받을게. 하지만 예물은 도로 가져가는 게 좋겠구나.”권용민이 허리를 굽혀 짐을 정리하는 순간 남태건은 이미 현관까지 가버렸다.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권용민은 손에 든 쇼핑백을 내려놓았다.“일단 다솔이한테 연락해서 무슨 일인지 물어봐.”김영은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권다솔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권다솔은 전화를 받기 전 특별히 거울을 보며 차림새와 머리를 정리했다. 그리고 혈색 없는 입술에 립스틱을 바른 후에야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두 사람을 웃는 얼굴로 맞이했다.“아빠, 엄마. 전 혼자 잘 지내고 있어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너랑 태
남태건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그는 권다솔의 손도 제대로 잡아보지 못했기에 당연히 사이즈를 알 리가 없었다.“크기 조절 가능한 팔찌는 없어요?”“있긴 한데요. 디자인이 몇 개뿐이라서요. 인기 많은 제품들은 전부 사이즈가 정해져 있어요.”직원은 그를 힐끗보다가 속으로 중얼거렸다.‘예비 신부한테 관심이 없다고 하기엔 예물을 전부 최고급을 골랐잖아. 그렇다고 해서 또 예비 신부한테 잘해준다고 하기엔 애매해. 어떻게 여자친구 팔목 사이즈도 모를 수가 있는 거지?'‘꼭 결혼까지 앞뒀는데 동거는커녕 손도 한번 못 잡아본 것 같네. 서로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을 것 같네.'“괜찮아요. 그걸로 주세요.”남태건은 제일 무거운 팔찌를 골라 쟁반에 올려두었다.“그리고 이거, 봉황이 있는 금목걸이도 주세요.”남씨 가문에 남아도는 것이 돈이었다. 권다솔의 부모님 앞에서 자신의 성의를 보여주기 위해서라면 얼마가 되었든 상관없었다.그가 가게에서 나왔을 때 직원의 입은 귀에 걸려 있었다. 남태건 덕분에 한 달 업적을 하루 만에 달성했기 때문이다.곧이어 남태건은 권용민이 좋아할 만한 비싼 술과 담배를 산 후 권씨 가문 본가로 운전했다. 쇼핑백을 바리바리 들고 오는 남태건의 모습에 김영은은 어안이 벙벙했다.“태건아, 우리 집으로 오는 게 처음도 아니고 이게 다 뭐니? 그냥 내 집이다 생각하면서 오면 되는 건데 뭘 이렇게 많이 사 왔어?”“아버님, 어머님. 전 오늘 손님으로 찾아온 게 아니에요. 다솔이랑 결혼하고 싶어서 온 거예요. 이건 제가 드리는 선물이에요.”남태건은 자신이 사 온 것을 하나씩 열어 보여주었다.그는 물건만 사 온 것이 아니었다. 한 가방의 현금과 예물까지 준비해왔다.창문으로 비쳐 들어오는 햇볕에 금붙이들은 반짝반짝 빛났다.권용민과 김영은은 서로 마주 보았다. 두 사람은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남태건은 아주 신경 써서 선물을 준비해온 것이 그들의 눈에도 보였다. 정말로 권다솔을 좋아하고 있는 것 같았고 앞으로 두 사람이
“다솔아... 너 정말로 나한테 아무런 감정이 없는 거야?”남태건은 여전히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조금이라도, 단 한 번이라도 나한테 설렌 적 없어?”그는 그동안 아주 많은 노력을 했었다. 할 수 있는 건 전부 했다. 그러나 여전히 권다솔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게다가 우린 함께 밤까지 보냈잖아. 난 정말로 진심으로 널 책임지고 싶어. 그냥 잠만 자고 버리는 나쁜 놈이 되고 싶지 않다고. 다솔아, 다시 한번 생각해줘. 우린 이미 밤까지 보냈다고!”“지금이 어떤 시대인데요. 전 태건 씨를 이해할 수 없네요.”권다솔은 머리가 지끈거렸다.그가 질척이면 질척일수록 그녀의 생각은 점점 더 확고해졌다. 앞으로 친구로도 지낼 수 없겠다고 말이다.그녀는 인내심 있게 마지막으로 말했다.“그날 밤 일은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 더는 제 앞에서 언급하지 말아요. 만약 태건 씨의 말대로 함께 한번 잤다고 해서 무조건 함께 살아야 한다는 거라면, 이미 아이까지 한 번 있었던 저와 진호 씨는 영원히 떨어지지 말고 함께 살아야 하는 거겠네요?”남태건은 주먹을 꽉 쥐었다. 저도 모르게 이도 빠득 달았다.“권다솔, 그딴 말로 날 자극하지 마.”두 사람이 다시 잘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니 남태건은 기분이 불쾌해졌다.권다솔은 말을 이었다.“전 태건 씨를 자극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냥 예시를 들어 알려준 거죠. 그러니까 나가요. 앞으로 더는 찾아와 문도 두드리지 말고요. 방금 같은 일 또 일어나기를 바라지 않으니까.”“다솔아! 네가 나한테 어떻게 매정할 수가 있어! 차 한잔도 내어주지 않고 지금 날 쫓아내는 거야? 적어도 물 한 잔 마시게는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밖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서 있었는데. 나 힘들어 죽겠다고.”남태건은 꼬리를 내렸다.물 한잔쯤 대접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권다솔은 그에게 희망 고문하고 싶지 않았다.그녀가 예의상 했던 행동이 남태건에겐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게다가 이번 한 번 타협한다면 두 번째도 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