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지유는 생각이 많았다. 어떤 면에서는 그녀와 강하임은 매우 비슷했다.둘 다 여이현의 도움을 받고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강하임처럼 극단적이지 않았다. 만약 여이현이 그녀를 선택해 주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아마 진작 포기했을 것이다.누가 한 우물만 파고 싶겠는가?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지금의 수많은 일이 두 사람의 결혼을 전제로 일어난 것이었다.“난 의무적으로 사람들을 구해줬을 뿐이야. 내 개인과는 큰 상관이 없어. 누가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싶겠어? 그때 했던 일은 단지 신념과 의무 때문이야. 만약 그 일이 없었다면, 난 아마 군대에 가지도 않았을 거야. 그러면 그렇게 많은 일들이 생기지도 않았을 테고.”여이현은 스스로 생각했다. 만약 그가 여씨 가문에 남아 있었다면, 위험한 일을 할 가능성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더군다나 그 시기는 영광과 거리가 먼 가장 암울한 시기였다.“알아요.”온지유는 그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모두 지나간 일이에요. 저도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일찍이 알고 있었다. 여이현이 그녀를 구해준 것은 명령과 의무 때문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것이 그가 그녀를 전혀 기억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여이현은 조용히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모든 것이 평온해 보였다. 그런데도 그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의 반응이 자꾸만 위험하게 보였다.“너 오늘 정말 이상해.”“그래요?”온지유는 그와 팔짱을 꼈다.“죽었다가 살아나니 정신을 차린 게 아닐까요?”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여이현은 깜짝 놀랐다. 이토록 적극적인 태도 역시 놀라웠지만, 딱히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그래서 대신 설명이나 했다.“오늘 시상식에 참석했어. 원래는 어제 말하려고 했는데 시간이 없었어. 앞으로 내 핸드폰은 24시간 켜져 있을 거야. 다시는 너를 찾지 못하는 일은 없을 거야.”“이해해요. 우리 집에 돌아가요. 맞다, 전에 F국에 가고 싶다고 했잖아요? 요즘 시간 있어요?
여이현의 품에 안긴 온지유는 잠깐 멈칫했다. 잠시 후 그녀는 요리 중인 프라이팬을 내려놓으며 물었다.“왜 그래요? 야식은 곧 먹을 수 있어요.”여이현은 그녀를 더욱 꽉 끌어안으며 머리카락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익숙한 향기가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켜 주었다.“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너랑 같이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아.”온지유는 담담한 눈빛으로 프라이팬을 뒤적였다. “부엌은 기름 냄새가 심해서 이현 씨한테 안 좋아요.”“너와 함께라면 어디든 괜찮아.”예전의 온지유라면 무조건 가슴이 떨려서 어쩔 줄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마음이 잔잔한 호수처럼 고요했다. 여이현의 달콤한 말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기대했다가 실망한 날이 많아서인지, 그녀의 마음은 점점 무뎌지기 시작했다.온지유는 그를 밀어내지도, 거부하지도 않으며 말없이 함께 있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앞으로 이런 기회는 절대 없으리라는 것을 말이다.음식이 준비되자 온지유는 살짝 몸을 틀어 그를 돌아보았다. “이제 나가요. 예쁘게 담기만 하면 바로 먹을 수 있어요.”“그렇게 신경 쓸 필요 없어. 대충 담아서 같이 나가자.”“싫어요. 전 예쁘게 하고 먹을래요.”온지유는 그를 서둘러 밖으로 밀어내며 말했다. “나가서 앉아 있어요. 누가 보고 있으면 민망하단 말이에요!”여이현은 마지못해 밖으로 나갔다. 머리를 돌려보니 온지유는 부엌문을 닫아서 그가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다.바쁘게 움직이는 그녀의 그림자 보면서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피어올랐다. 플레이팅까지 신경 쓰는 모습에 그녀가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는 호의를 거절하지 않고 식탁에 앉아서 가만히 기다렸다. 깊은 밤의 은은한 조명 분위기를 더했다. 그는 손가락으로 식탁을 두드리며 부엌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느 순간 어둠 속에서 온지유가 천천히 다가왔다.그녀는 평소 입던 딱딱한 정장이 아닌, 흰색 스웨터와 넉넉한 바지를 입고 있었다. 뽀얀 피부는 스웨터 덕분에 더욱 빛나 보였다.온지
그 말을 들은 여이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다시 생각해 봐도 자신을 비꼬고 있는 말로 들렸다.식탁은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맞은편에 앉은 온지유와의 거리감이 왠지 마음 한편을 허전하게 만들었다.여이현이 말을 걸었다."좀 더 가까이 앉아."온지유는 그 말에 거절하지 않고, 의자를 끌어 그의 옆자리로 왔다. 그리고는 여이현에게 반찬을 덜어주며 말했다."시간이 꽤 지났는데 왜 아무것도 안 먹고 있어요? 요리가 입에 안 맞아요?"여이현은 온지유가 자기 그릇에 음식을 덜어주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젓가락을 집었다."요리하기 전에도 말했잖아. 네가 만든 거라면 뭐든 다 먹겠다고."그는 온지유가 덜어 준 음식을 입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음, 맛있네. 요리에도 재능이 있나 봐?"그리고는 같은 반찬을 몇 번 더 집었다.여이현이 진심으로 요리를 즐기는 모습에 온지유는 마음속이 크게 요동쳤다.그러나 티 내지 않고 그저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말했다."어머, 진짜요? 저도 먹어봐야겠어요, 정말 그렇게 맛있는지."그리고 다른 접시에 젓가락을 뻗어 맛보고는 말했다."음... 그냥 평범한데요. 도우미가 해준 요리가 더 맛있는 것 같은데."몇 끼를 굶기라도 했는지, 여이현은 가볍게 웃으며 요리를 집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난 네가 만든 게 더 맛있는 것 같은데."여이현이 자신의 요리 솜씨를 계속 칭찬해 주는 모습에 온지유는 기분이 좋아졌다.그 순간, 온지유는 두 사람이 진정한 부부로서 함께 생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여이현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잘생긴 얼굴은 그저 국물을 마시는 모습조차도 남들과 사뭇 달라 보였다. 온지유의 얼굴에는 자연스레 미소가 떠올랐고, 여이현을 바라보는 눈빛에도 저도 모르게 따뜻한 감정이 실렸다."요즘 밥은 잘 챙겨 먹고 있는 거죠?"온지유가 당부했다."아무리 바빠도 끼니는 거르면 안 돼요. 돈은 천천히 벌 수 있지만, 몸은 하나뿐이잖아요. 한번 무너지면 다시 회복하는 데 돈도 시간도 더
온지유가 계속 온 비서로 남았다면 분명히 아무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그러나 그녀는 욕심이 생겨버렸다. 여이현의 사랑을 갖기를 원했다.이대로 계속 함께 있으면, 둘은 점점 더 불행해질 것이고, 아름다웠던 추억은 결국 그림자조차 남지 않을 것이다."온지유..."여이현의 감정이 격해질수록 약효는 점점 강해졌다.여이현은 온지유를 뚫어져라 응시했다."설마 날 떠나는 이유가... 석이한테 가기 위해서야?"온지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의 날카로운 시선을 이겨내며 여이현의 얼굴을 어루만질 뿐이었다.온지유는 그에게서 석이의 흔적을 찾으려 했다.하지만 눈앞의 그는 여이현이었다. 더 이상 그 젊고 패기 넘치던 소년이 아니었다.온지유는 강도의 손에서 자신을 구하려다 심하게 다쳤던 정의감 넘치던 그를 떠올렸다. 그에게 목숨을 빚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석이는 온지유를 위해 피를 흘렸고, 온지유도 여이현의 생명을 구하면서 그 빚을 갚았다.온지유는 석이와의 일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중학교 졸업 이후, 온지유의 시선은 항상 그를 따라다녔다. 그가 다니던 고등학교, 그가 다니던 대학교에 따라갔다. 여이현에게 온지유는 7년 동안 존재 한 사람이지만, 온지유의 삶에 여이현은 14년 동안 존재했다.어느 한 무더운 오후였다.특별한 날을 맞아, 학교에서는 단체로 연극을 준비 하기로 했었다. 어떤 일이든 정성을 다하던 온지유는 다른 학생들보다 30분 일찍 강당에 도착했다. 가장 먼저 와서 대사를 연습하곤 했던 온지유는 그날도 평소처럼 강당에 들어섰고, 동시에 코를 찌르는 심한 피비린내를 맡았다.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낀 온지유는 냄새를 따라 대기실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학교에서 사용하던 공연 의상들로 가득했다. 어딘가에서 무거운 숨소리가 들려왔다. 온지유는 도둑일 것이라 생각하며 두려운 마음에 문 뒤에 있던 야구 배트를 잡고 다가갔다.걸쳐있던 옷을 밀어내었을 때, 손에서 놓친 야구 배트가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여이현의 얼굴이 먼저 눈
온지유는 마지막 한 모금 남은 잔을 여이현의 술잔에 가볍게 부딪혔다.나름 깔끔한 작별 인사였지 않을까.그 전에 함께 즐겁게 식사도 했으니 말이다.온지유는 떠나기 전에 이혼 서류를 다시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 옆에는 두 장의 프랑스행 항공권도 있었다. 티켓의 주인은 여이현과 노승아였다.온지유는 이를 통해 여이현을 완전히 놓아주었다는 뜻을 전하고 싶었다.프랑스같이 로맨틱한 여행지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는 것이 더 어울릴 것이니.모든 일을 마친 온지유는 짐을 챙겨 집을 나섰다.이날 밤은 아무도 저택을 지키고 있지 않았다.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다음 날."대표님!""대표님, 정신 차리세요!"여이현은 서서히 깨어났으나, 머리는 여전히 묵직한 돌에 짓눌린 듯 무거웠다.밀려오는 두통에 이마를 짚으며, 엊저녁 온지유가 요리해 주던 장면을 떠올렸다.여이현은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텅 빈 주위에 온지유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대표님, 괜찮습니까? 병원에 가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배진호는 그의 안색이 좋지 않음을 보고 걱정하며 물었다.이른 아침, 도우미가 여이현이 바닥에 잠들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아무리 불러도 깨어나지 않자, 배진호에게 전화를 건 것이었다.여이현은 온지유의 단호하던 그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온지유는 여이현에게서 떠나기 위해서라면 약물을 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여이현은 자리에 앉으며 허탈한 듯 웃었다."나에게서 떠나려고 이런 태도를 보였던 거야."“사모님 말씀인가요? 정말 떠나신 건가요?”배진호는 이미 눈치를 채고, 여이현을 보며 말했다.“바로 사람을 보내 데려오겠습니다!”“됐어!”여이현이 바로 그를 제지했다.배진호는 발걸음을 돌려 다시 여이현의 곁으로 돌아왔다.의자에 걸터앉은 채 이미 다 포기한 듯 공허한 여이현의 모습에 배진호가 다시 물었다."사모님이 갑자기 달라지셨을 때 이미 눈치채셨던 것 아닌가요? 어제는 일부러 사모님의 함정에 빠지신 거죠?"온지유는 떠나기 위
그 말을 듣고 여이현은 잠시 멈칫하더니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어떤 비밀인데?"상대방은 여이현이 여전히 관심이 있음을 확인하고 말했다."온지유씨는 여러 번 병원에 다녀왔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온지유씨에 대해서 철저히 함구하고 있었지만, 저희 노력 끝에 온지유씨가 간 곳이 산부인과라는 것을 밝혀냈습니다."여이현은 충격스러운 사실에 한동안 정신 차릴 수 없었다.그는 병원에서 온지유와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온지유는 생리주기가 불규칙하다며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아야 한다고 했었다.여이현이 데려다주려 할 때마다 온지유는 매번 거절했었다.일부러 숨기려 한 것이었다.여이현은 온지유의 사생활에 거의 관심이 없었고, 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아니, 생각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었다.여이현은 온지유와의 지난 3년 동안 항상 거리를 두었었다.그동안 온지유를 한 번도 건드린 적이 없었다.그가 원한다고 해도 온지유가 원치 않으면 강요하지 않았다.두 사람의 혼인에는 넘을 수 없는 울타리가 있었고, 여이현은 온지유에게 최대한의 존중을 보이고자 했다.지금도 여이현은 함부로 짐작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생각이 많아질수록 마음은 더욱 복잡해졌다. 보이지 않는 그물에 꽉 묶여 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확실해?"여이현이 여전히 침착하게 물었다."확실합니다. 온지유 씨의 병원 행적을 녹화한 것을 복사해 두었습니다. 곧 대표님께도 보내드리겠습니다.""그래."여이현은 전화를 끊었다.이윽고, 휴대폰 화면이 밝아졌다.영상이 벌써 여이현의 휴대폰으로 전송된 것이었다.그러나 여이현은 바로 열어 보지 않고, 사무실 의자에 앉은 대로 깊이 고민했다.해가 지고 밤이 되어, 회사 사람들은 이미 퇴근했지만, 그의 사무실의 불은 여전히 켜져 있었고, 그는 쭉 같은 자세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여이현은 용기가 없었다. 온지유가 산부인과에 간 것이 단순한 검진이 아니었을까 봐 두려웠고, 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 있을까 봐 두려웠다. 언제부터 이
그래도 여진숙은 이상함을 눈치챘다.온지유가 여이현과 함께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여진숙과 함께 지내며 불편함을 겪지 않도록 여이현이 배려하여, 그동안 온지유와 그는 이 저택이 아닌 다른 곳에 머물고 있었다.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여이현 혼자 이 저택으로 돌아오고, 온지유는 보이지 않으니, 여진숙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게다가 온지유에 대해 여이현이 전혀 언급하지 않으려 했기에, 여진숙은 더더욱 가슴속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수소문해 보니, 온지유는 이미 회사에 출근하지 않은 지 한참이 되었다고 한다.‘아들과 결별한 것일까?’소식을 확인해 보려 해도, 여이현이 그리하게 내버려둘지는 모르는 일이었다.예를 들면, 수려원에서 일어나는 일은 여진숙에게도 철저히 통제 되어있었다.여진숙은 여이현의 어머니로서, 이 집의 주인으로서, 수려원 역시 그녀의 눈치를 봐야 하는 게 도리였다.하지만 그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오직 여이현의 말만 따랐다.이에 여진숙은 줄곧 감정이 상해있었다.어찌 됐든, 지금은 온지유와 여이현이 이어지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여진숙은 반드시 사실을 알아내기로 결심했다.여이현이 위층으로 올라가려는 순간, 여진숙이 물었다.“요 며칠 동안 지유를 보지 못했는데, 둘이 싸운 거야, 아니면 이미 이혼을 한 거니?”만약 이미 이혼했다면, 여진숙은 이 좋은 소식을 빨리 노승아에게 전하고 싶었다.그러면 여진숙도 그룹에서 한 자리 차지할 수 있을 테니까.지금의 노승아는 그야말로 승승장구였다. 여진그룹의 아들이 대세인 여배우와 결혼했다고 알려지면 꽤 큰 자랑거리가 될 것이다.여이현은 발걸음을 멈췄다.조금 전까지는 모자 사이의 체면을 유지했다면, 이제는 대놓고 면박을 줬다.“남 걱정할 시간에 차라리 어머니 남편이나 신경 쓰지 그러세요!”이 말에 여진숙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의 약점을 찌른 셈이었다.뭐라 대꾸하고 싶었지만, 여이현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위층으로 올라갔다.여이현은 이제 그녀를 쳐다보려 하지도 않았다.온지유 그
그 사람은 온지유와 만난 뒤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았다.둘은 꽤 친한 사이로 보였다.여이현은 이 사람에게 어느 정도 기억이 있었다. 분명 회사에 있는 누군가일 것으로 생각했다.온지유가 떠난 후, 그 남자는 쓰레기통에서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그의 행동에 여이현은 심기가 불편했지만, 지금은 그만이 진실을 알고 있을 것이기에 참고 조사를 계속했다.도세원은 프로그래밍에 몰두하고 있었다.여진그룹 같은 큰 회사에서는 경쟁이 매우 치열했다. 중소기업에 있을 때는 일인자였지만, 여기에는 그와 비슷한 수준의 프로그래머가 열 명은 족히 되었다.성공하기 위해서는 두각을 나타내야 했다.전 직장을 떠난 것도 더 높은 곳으로 가고 싶어서였다.그는 한시도 쉬지 않고 키보드를 두드리며, 식사도 간단히 빵 몇 조각으로 때우고 있었다.도세원이 손에 든 빵을 입에 넣으려던 순간, 그의 옆에 사람들이 웅성웅성 몰려 들었다.고개를 들어 곁을 쳐다본 도세원은 놀란 나머지 손에 든 빵을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대표님!”눈앞에는 여이현의 모습이 있었고, 그에게는 무시할 수 없는 압박감이 느껴졌다.도세원이 급히 일어섰다.“대표님, 무슨 일입니까?”여이현은 온지유와 비슷한 나이대의 남자를 바라보며 차분히 물었다.“도세원씨 맞나요?”“네, 제가 도세원입니다.”도세원은 왜 여이현이 자신을 찾아왔는지 알 수 없어 물었다.“혹시 제가... 뭘 잘못한 게 있을까요?”도세원은 여진그룹에서 열정을 다해서 일하고 있었고, 혹시 모를 실수에 해고당하고 싶지 않았다.여이현은 말없이 대표 사무실로 걸어갔다.그리고 도세원을 재촉했다."서 있지 말고 이쪽으로 오세요."“아, 네!”도세원이 급히 사무실로 따라 들어갔다.사무실에는 여이현과 도세원 둘만 있었다.도세원은 숨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여태 여이현과 직접 대면한 적은 없지만, 그의 성격을 소문으로 알고 있었고, 공기에서 전해오는 압박감을 느낄 수 있었다.여이현은 소파에 편안하게 앉아, 도세원을 바라보며 말했다.“온지유
어둠이 내려앉자 경성은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냈다. 특히 오늘은 밸런타인데이였던지라 곳곳의 가게에서 행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밸런타인데이를 삼켜버릴 것처럼 말이다.온지유는 여희영이 알려준 호텔로 왔으나 바로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커다란 창가로 여희영이 알려준 파란 장미를 든 남자를 찾아보고 있었다.테이블마다 한 쌍씩 앉아 있었지만 여희영이 말한 남자는 없었다.전화를 들어 여희영에게 상대가 기다리다가 지쳐 먼저 돌아간 것은 아닌지 물어보려고 한순간 익숙한 형체를 발견하게 되었다.여이현이 코너를 돌며 2층의 룸으로 올라갔다.밸런타인데이에 귀가하지 않고 이곳에 와서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것일까.온지유의 머릿속에 순간 여러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대부분은 여이현이 바람을 피웠다는 가능성이었다.그녀는 씩씩대며 호텔 안으로 들어간 뒤 바로 2층으로 올라갔다.“어서 오세요, 몇 분이실까요?”직원이 그녀를 붙잡았다.온지유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이 안에 몇 분이 예약되었는지 알려주시면 이 돈을 전부 드리죠.”그녀는 통 크게 돈뭉치를 꺼내 직원에게 주었다. 직원은 눈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을 두 개 펼쳐 보였다.밸런타인데이에 호텔에 혼자 오는 사람은 없었다.그녀는 바로 발을 들어 문을 차버리곤 코웃음을 쳤다.“이현 씨, 즐거운가 봐. 나한테 들켰다고...”뒷말을 이을 수 없었다. 룸 안에 여이현 혼자 있었기 때문이다.온지유는 바로 고개를 돌려 직원에게 따져 물었다.“안에 둘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대표님께선 두 명으로 예약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직 아내 분이 도착하지 않으셨다고...”“이제 가도 됩니다. 여긴 제가 설명하죠.”여이현은 직원에게 물러나라고 하곤 문을 닫으려 했으나 그제야 문이 뜯겨 나갔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내 빙긋 웃었다.“룸을 바꿔야 할 것 같네.”직원은 눈치껏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온지유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했다. 바람 피우는 현장을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직원은 그녀에게 여이현의 아내가 아직 도착하지 않
“얼른 여이현한테 전화해서 여진을 나한테 넘기라고 말해. 그리고 여씨 가문의 모든 재산도 전부 나한테 주라고 해. 안 그러면 지금 이곳이 곧 너의 무덤이 될 테니까.”여재호는 뒤를 돌아보라는 턱짓을 했다.온지유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이현 씨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거니까 헛된 망상은 그만하시죠.”“여이현이 그러지 않겠다고 하면 널 죽여버리면 돼. 그리고 네 아들을 여기로 잡아 오는 거지. 여이현이 그럼에도 넘기지 않겠다고 하면 어쩔 수 없이 네 아들도 죽이는 거지 뭐.”여재호는 칼을 꺼낸 후 온지유의 앞으로 갔다. 그녀의 턱을 꽉 잡으며 뺨을 때렸다.“가능한 어떻게든 여이현을 설득해야 할 거야. 안 그러면...”서늘한 칼날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온지유는 눈을 가늘게 떴다.여재호는 돈을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런 그가 계속 이 세상에 남는다면 세상은 앞으로 불안만 가득해질 것이다.무언가 떠오른 온지유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래요. 제가 이현 씨를 설득해볼게요. 그런데 저한테 핸드폰이라도 줘야 설득해보는 거 아닌가요? 핸드폰도 없이 제가 어떻게 말을 해보죠?”여재호는 머릿수가 많다는 이유로 방심하면서 온지유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어차피 산 아래에도 그의 사람들이 깔려 있었으니까.바로 옆 사람에게 지시를 내려 온지유에게 핸드폰을 주었다.자유를 되찾은 온지유는 뻐근한 손목을 돌리며 여이현에게 전화를 거는 척했다.“이현 씨, 나 지금 사방이 무덤인 산에 있어. 얼른 와줘...”“씨X, 지금 날 속여?”여재호는 갑자기 그녀에게 다가가 핸드폰을 확 빼앗았다. 온지유는 그를 꽉 끌어안더니 벼랑 끝으로 뛰어내렸다.“야!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여재호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차정혁이 얼른 사람들과 함께 벼랑 끝으로 달려와 내려다보았지만 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온지유는 죽지 않았다. 이미 전에 더 험한 일을 당했었던지라 여재호를 상대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여재호가 그 말을 하자마자 그녀는
두 사람은 익숙하게 별장으로 들어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여희영을 부축하면서 나왔다.온지유는 여희영이 입원한 병원으로 왔다.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여희영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여희영은 그런 온지유의 손등을 토닥이며 달랬다.“괜찮아. 정말이야.”“저희가 너무 소홀했어요.”“너희 탓이 아니야. 이것도 다 내 운명인 거지. 이런 오빠의 동생으로 태어난 게 잘못이지.”여희영은 말을 마친 후 여이현을 보았다.“여재호가 회사를 엉망으로 만들어 놨어. 얼른 다시 원상복구 해야 해. 절대 다른 사람이 빈틈을 노리게 해서는 안 돼. 그리고 여재호는 고민할 것 없어. 그냥 너희들이 하고 싶은 대로 처리해.”여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계획이 있었다. 이번 일을 겪은 후 이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회사 쪽은 여희영이 입원해 있는 동안 전부 깔끔하게 정리했다.속도는 빠르게 진행도이었다. 아무리 여재호가 업소녀에게 돈을 주며 입막음을 했다고 해도 늦었다. 경찰이 너무도 빠르게 도착했기 때문이다.여재호의 사람들을 전부 해고했다. 그리고 그가 매수한 거래처들과도 전부 거래를 끊어버렸다.여재호에게 처음으로 매수당한 고객은 차정혁이었다.그는 가짜를 진품처럼 팔고 품질이 안 좋은 물건을 대놓고 팔았다. 여재호에게 매수당하지 않았어도 여이현은 그와 거래를 끊을 생각이었다.두 사람은 차에 올라탔다. 차정혁은 바로 여재호에게 자료 한 부를 건넸다. 그 자료에는 여진 그룹 서류뿐만 아니라 온지유가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시간도 적혀 있었다.여재호는 미간을 찌푸렸다.“여이현의 여자를 건들라고? 죽고 싶어?”“대표님, 정말로 판을 뒤엎고 싶다면 이것이 마지막으로 남은 기횝니다. 아니면 정말로 새파랗게 어린놈한테 밟히고 싶은 겁니까. 잊지 마세요, 여진 그룹을 물려받아야 할 사람은 응당 대표님이십니다.”차정혁은 목소리를 낮게 깔며 말했다.“이 일은 제가 다 준비를 해뒀으니 대표님께선 지시만 내리시면 됩니다. 그러면 제 사람들이 바로
“날 조롱할 것 없어. 여이현, 네가 날 찾아왔다는 건 내가 여진을 조정하는 중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 찾아왔다는 의미겠지. 그래, 여진은 내가 반드시 손에 넣을 거야. 여진뿐만 아니라 여씨 가문 모든 재산을 손에 넣을 거라고.”여재호는 고개를 빳빳이 들며 말했다. 꼭 반항기가 흘러넘치는 청소년처럼 말이다.여이현은 술을 한잔 마시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고모는 어디에 있어요.”그는 회사 때문에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여재호에게 고모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서 찾아왔다.오는 길에 이미 여희영의 집으로 사람을 보냈으나 여희영을 찾을 수 없었고 그의 추측이 거의 확신이 되어갔다.여재호의 표정이 부자연스럽게 굳어지더니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웃음을 멈추었다.“여희영을 데려가도 돼. 하지만 내일 회사로 가서 계약서에 사인해. 여진의 모든 지분과 운영할 권리는 내게 넘긴다고.”“제가 싫다고 하면요?”“그럼 여희영을 만날 생각은 하지 마. 희영이가 걱정되지? 그래, 당연히 그렇겠지. 여희영한테 그렇게 네 편에 서지 말라고 말했는데 말이야. 오빠인 내 말을 안 듣더라고.”여재호는 음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여이현은 그와 쓸데없는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차 키를 들고 일어나며 싸늘한 시선으로 여재호를 보았다.“그동안 꽤나 많은 돈을 빼돌리고 계셨나 봐요. 집까지 업소녀를 부르고 말이에요. 지금 신경 써야 할 게 명성이 아닌가요? 이미지 나락으로 빠지고 싶은 거 아니라면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을 거예요.”여재호는 코웃음을 쳤다.“저의 일 처리 방식이 어떤지 그동안 봐서 잘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해요. 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도 않고 자비도 베풀지 않는 사람이죠.”말을 마친 여이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렸다.여재호는 여이현의 말에 순간 겁을 먹게 되었다. 그리곤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방으로 올라간 여자에게 화풀이했다.여재호에게서 단서를 알아내지 못한 여이현은 다시 회사로 돌아와 모든 CCTV를 돌려보았다.여희영이
“날 오빠 취급하든 말든 상관없어. 어차피 돈 생기고 권력이 생기면 내가 원하는 걸 전부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니까.”여재호는 결국 여희영이 정신을 잃을 때까지 폭행한 후 작은 다락방에 가둬버렸다.밤이 되니 온지유와 여이현이 탑승한 비행기도 도착했다.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보이는 커다란 광고판에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공항에 설치된 가장 큰 광고판에는 여진 그룹에서 출시하여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화장품 영상을 틀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음식 밀키트 광고로 바뀌었다.여이현의 동의도 없이 광고를 바꿨다는 건 너무도 이상했다.두 사람의 생각은 같았다. 서로 마주 본 두 사람은 경성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바로 눈치챘다.온지유가 입을 열려던 순간 여이현의 핸드폰이 울렸다.전화를 건 사람은 기획부 부장이었고 여진 그룹의 원로라고 할 수도 있는 존재였고 여진을 향한 충성이 아주 높았다..“서 부장님, 마침 연락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공항 광고판 광고가 왜 바뀐 거죠?”“대표님, 안 그래도 이 일로 연락드렸습니다. 얼른 저의 집으로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다들 대표님만 기다리고 계십니다.”서철민은 다급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이현과 온지유는 더는 묻지 않고 바로 서철민의 집으로 출발했다.서철민의 집 서재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여이현을 보자마자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대표님.”모든 사람들이 입을 열었다.여이현은 그들에게 앉으라는 제스처를 한 뒤 입을 열었다.“저를 찾으신 이유를 말해보세요.”그는 대충 짐작하고 있었으나 증거가 없었기에 함부로 말을 꺼낼 수 없었다.“여재호가 저희 회사 재무부장과 구매부 부장, 그리고 일부 고객들을 매수했습니다. 현재 여진이 여재호 쪽으로 기울었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하...”서철민과 일부 사람들이 까발린 여재호의 만행은 그들의 예상을 뛰어넘었다.온지유는 미간을 찌푸렸다. 경성으로 돌아오면 평화로운 일상을 보낼 줄 알았으나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꿈에도
많은 사람들이 여이현에게 연락하며 상황을 알렸다.하지만 그는 배진호와 함께 비행기에 있어 전화를 받지 못했다.여재호는 오직 하나의 목표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돈과 지위를 얻는 것이었다.과거에 자신이 손에 넣지 못했던 재산을 이번에는 반드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결심이었다.그가 여진그룹에서 큰 소동을 일으키자 결국 여희영도 나서게 되었다.여희영은 직접 찾아와 그를 말렸다.“할 말은 이미 다 했어. 그날 결혼식에서 이현이의 태도가 얼마나 분명했는지 오빠도 직접 봤잖아. 그런데 왜 또 이러는 거야?”“이현이는 너를 홀대한 적이 없잖아?”여진 그룹이 위태로웠던 시절 여이현의 뛰어난 능력 덕분에 그룹은 조금씩 번창하며 오늘날의 위치에 올랐다.하지만 지금...여재호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이현이 여진 그룹을 이 정도로 키운 건 맞아. 그런데 문제는 나도 빈손으로 남을 수는 없다는 거야.”“네가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면 아버지가 너를 불러들였을 때엔 왜 거절하지 않았대? 지금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위선적이라는 생각은 안 들어?”여희영는 직설적인 성격이었다.그녀는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일에 대해서는 거침없이 말하는 성격이었다.게다가 그녀의 오빠는 지금까지 제대로 한 일이 없었을뿐더러 지금은 더 악랄하게 굴고 있었다.“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어이가 없어서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네.”“할 말이 없으면 하지 마. 내가 하는 일이 네게 방해가 되는 것도 아니잖아. 뭘 걱정하는 건데? 여희영, 너도 알잖아. 이현이는 가문의 사람이 아니야. 왜 네 팔은 밖으로만 굽는 거야?”여재호는 돈을 받지 못하고 여이현에게 문전박대를 당한 것만으로도 이미 인내심이 폭발할 지경이었다.여기에 여희영의 말까지 더해지자 그는 더 이상 화를 참을 수 없었다.여희영도 화가 치밀었다.“내 팔이 밖으로 굽는다고? 오빠가 가문을 내팽개쳤을 때 나는 가문을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알아? 아버지와 이현이에게 일을 다 떠넘기고는 이제 와서
“전 무열 씨의 의지력을 믿어요. 당신이라면 분명히 이겨낼 수 있을 거예요. 앞으로는 제가 계속 상태를 관리할게요.”인명진은 부드럽게 말했다.그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약물 금단 증상은 고통스러웠지만 신무열의 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특히 김혜연은 늘 그의 주변에 함께 있어 주었다.덕분에 신무열은 일주일 만에 약물 의존을 끊어냈다.이는 모두에게 기쁜 소식이었고, 특히 김혜연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었다.“무열 씨, 우리 현장에도 내려가 봐요. 현장에는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을 거예요.”김혜연의 생각은 간단했다. 함께 일에 몰두하면 그는 아린의 죽음을 떠올릴 시간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동안 신무열은 막 결혼한 상태에서 그녀에게 미안함을 느껴 곁을 떠나지 않았지만, 그로 인해 더 큰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신무열은 김혜연을 품에 안으며 말했다.“좋은 생각이야. 현장으로 가자. 이쪽의 일은 내가 처리해 둘게. 요한도 있으니까 걱정 마.”“좋아요.”그들의 결정을 들은 법로는 남아서 Y국의 상황을 관리하기로 했다.그는 별이를 떠나보내는 것이 유일한 아쉬움이었다.경성에서 별이와 함께 보낸 시간은 매우 따뜻하고 행복한 순간들이었다.이번은 신무열과 김혜연의 결혼식에 참석하려 Y국에 온것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일이 벌어져 버렸다.“별아, 이번에 엄마랑 아빠랑 같이 돌아가면 말 잘 들어야 한다. 외할아버지가 나중에 보러 갈게.”법로는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고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외할아버지, 걱정 마세요. 아빠랑 엄마 말씀 잘 듣고 공부도 열심히 할게요. 돌아오시면 꼭 다시 만나요!”“그래.”법로는 그들을 공항까지 직접 배웅했다.업무적으로는 배진호가 있었지만 온지유와 관련된 부분은 온지유의 결정을 존중했다.배진호는 먼저 제안했다.“대표님, 아드님을 제가 먼저 데려가서 학교에 보내겠습니다. 두 분은 Y국에서 조금 더 머무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사모님의 양부모님들과
신무열은 김혜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걱정 끼쳐서 미안해.”“무열 씨, 제발 꼭 좋아져야 해요. 이렇게 날 떠나면 안 돼요. 우리... 우리 아직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고 다 아쉬움으로 남았잖아요.”김혜연은 신무열을 꼭 끌어안으며 목소리가 갈라질 정도로 간절히 말했다.그녀는 정말로 두려웠다.만약 신무열의 마음속에 모든 분야에 출중한 완벽한 존재가 있었다면 그녀는 이렇게까지 고통스럽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아린의 경우는 달랐다. 모든 조건을 떼어 놓고 보면 말이다.김혜연에게는 선택지가 주어졌지만 선택을 하지 않은 건 그녀 자신이었다.김혜연은 신무열의 남은 생이 죄책감 속에서 허비되지 않기를 바랐다.신무열은 김헤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네가 하려는 말 다 알아. 걱정하지 마. 나도 최선을 다해 이전의 일들에서 벗어나려고 할게.”김혜연은 그런 문제들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신무열은 그녀의 진심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원망하지 않았다.이때, 인명진이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신무열의 약물 의존은 법로가 책임지고 있었고, 인명진은 그의 심리 치료를 맡게 되었다.신무열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그러나 아린이 자신의 품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본 그는 마음의 상처를 도저히 치유할 수 없었다.인명진은 그의 마음을 이해했다.그는 최면을 통해 신무열의 내면을 하나씩 풀어가며 그의 마음을 안정시키려 노력했다.신무열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저는 누구도 죽이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저 때문에 죽어가요. 죽음이 이렇게도 불공평하고 아무 소리도 없이 다가온다는 걸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신무열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씩 흘러나왔다.인명진은 낮은 목소리로 그를 위로했다.“모든 일에는 아쉬움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무열 씨는 최선을 다했고 아린을 방치한 것도 아니었잖아요. 현실은 잔혹해요. 무열 씨에게는 방법이 없었고, 아린에게는 죽음이 오히려 해방이었을지도 모르죠.”“노예 수용소에 있던 사람들은 수천, 수만 명이었어요
신무열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고통스럽게 절규했다.그의 이런 모습을 본 온지유는 가슴이 찢어졌다. 매일 곁에서 지켜보는 김혜연에게는 더 큰 고통이었다.온지유는 신무열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부드럽게 말했다.“오빠, 그건 오빠 잘못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너무 자신을 몰아붙이지 말아요...”하지만 신무열은 그녀의 말을 끊으며 힘겹게 말했다.“아니, 내 잘못이야. 만약 내가 더 잘했다면 아린은 희생하지 않았을 거야. 죽음을 많이 봐왔지만 이번처럼 고통스러운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지유야, 너도 알잖아? 난 아린이 눈앞에서 죽는 걸 직접 봤어...”그의 목소리는 쉰 듯한 낮은 톤으로 하나하나 쏟아져 나왔고, 온지유는 처음으로 신무열이 이렇게 절망하는 모습을 보게됐다.도와주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그녀는 무력감을 느꼈다.신무열이 감정을 통제하지 못해 스스로를 해칠까 두려웠던 온지유는 급히 법로에게 전화를 걸었다.곧 법로는 실험실 사람들과 함께 그들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신무열의 상태를 본 법로는 마음이 아팠다.신무열은 그의 하나뿐인 아들이다!상태를 점검한 법로는 신무열이 몰래 페노바르비탈을 복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더욱 심각한 것은, 이 약물은 한때 법로거 개량했던 중독성을 유발하는 형태였다는 점이었다.신무열의 방금 전 감정 폭발은 약을 제때 복용하지 못해 나타난 금단 증상이었다.법로는 즉시 실험실의 약물 사용 규정을 엄격히 강화했다.앞으로는 모든 약물 사용이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명령했다.또한, 신무열이 약물을 복용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을 철저히 관리했다.신무열은 Y국의 수령으로, 많은 이들이 그를 끌어내리고 새 인물을 세우고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만약 그의 약물 복용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면 반드시 정치적으로 이용될 것이 분명했다.김혜연은 신무열의 곁을 지키고 싶었지만 법로가 이를 막아섰다.“신무열이 자리를 비우는 건 공적인 이유로는 가능하다. 하지만 네가 자리를 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