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래?”온지유가 갑자기 얼어붙은 것을 보고 백희지도 장난을 멈췄다. 그리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물었다.그러다가 머리를 돌리자 불청객 여이현이 떡하니 서 있는 것이 보였다.백지희도 당황했다.‘여이현이 어떻게 여기에...?’그러나 이곳에 온지유보다 더 떨리는 사람은 없었다. 원래는 백지희와 수다 떨려고 만난 것인데, 얼마 지나지도 않아 여이현이 나타난 것이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감정을 정리하며 당황함을 감추려고 했다. 여이현은 여전히 불쾌한 표정으로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차갑기 그지없는 얼굴이었다.온지유가 백지희와 즐겁게 웃고 있는 것을 보고 자신은 잊힌 것 같아 더욱 불쾌해졌다. 그는 천천히 다가가 온지유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 그렇게 좋아?”그의 날카로운 시선은 두 사람이 주문한 디저트, 그리고 레스토랑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택배 상자와 그 아래 숨겨진 몇 권의 책에 머물렀다. 온지유는 황급히 책과 택배 상자를 손에 쥐고 뒤로 숨겼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지희랑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다가 장난을 쳤어요.”“맞아요, 맞아요.”백지희도 말을 덧붙였다.“여이현 씨가 따라올 줄은 몰랐네요. 우리 지유랑 그렇게 떨어지기 싫었어요? 우리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오셨네요. 만약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적지 않게 놀랐을 거예요.”백지희는 온지유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논담으로 말했다. 하지만 웃고 있는 사람은 백지희밖에 없었다.주변은 정적에 휩싸였고 백지희는 어색하게 입을 다물었다. 여이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예리하게 온지유의 손을 바라봤다.“평소 그렇게 틱틱대던 분이 오늘은 왜 이렇게 친절할까요?”두 사람 사이의 은밀한 신호를 여이현도 느꼈다. 그는 왠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백지희는 혹시라도 무언가 들킬까 봐 안절부절못했다. 그럴수록 여이현의 의심은 점점 더 켜져 갔다.“저는...”백지희는 설명하려고 했다.“지희도 이제 반쯤 사업가가 됐으니, 이현 씨랑 친해져
여이현은 온지유를 바라보며 물었다.“소설? 이건 왜 숨긴 거야? 내가 보면 안 되는 거라도 있나?”백지희는 곧바로 해명했다.“자고로 로맨스 소설은 방에서 몰래 읽어야 맛있어요. 그리고 살짝 부끄러운 일이기도 하잖아요. 아무튼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세요!”다행히도 온지유는 언제나 신중하게 행동한다. 그녀는 육아 책과 같은 것을 함부로 꺼내 놓지 않았다. 육아 책은 이미 가방에 숨겨져 있었고, 밖에 있던 것은 페이크로 함께 산 소설뿐이다.온지유는 여이현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아서 모든 준비를 철저하게 했다. 이토록 작은 부분도 결코 놓치지 않았다.그녀는 여이현과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모든 의심이 그녀가 임신한 것이 아닌지 확인하려는 것으로 보였다. 지금으로서는 임신 여부를 떠나 여이현의 강압적인 태도에 화가 나서 떠나고 싶었다. 그녀는 가방을 챙겨 들고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여이현은 책을 테이블 위에 던지며 언성을 높였다.“온지유, 거기 서!”온지유는 그의 말에 반응하지 않고 계속 걸어 나갔다. 여이현은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내 말 안 들려? 이제 내 말도 안 듣겠다는 거야?”온지유는 손을 뿌리치지 못하고 뒤돌아보며 대답했다.“대표님, 저는 퇴근했어요. 지금은 제 자유 시간이에요. 근데 왜 대표님 말을 들어야 하죠?”이 말에 여이현은 잠시 넋이 나갔다. 두 사람의 관계에서 여이현은 항상 이득을 보는 쪽이었다. 그만큼 온지유가 순종적이라는 말이다. 직장이든 집이든 간에 그녀는 항상 그를 배려해 줬다.여이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예전에는 안 이랬잖아.”온지유는 그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어쩐지 약간 불안해 보였다. 그의 목소리도 전처럼 강압적이지 않았다.그녀는 자신의 손을 빼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맞아요, 예전에는 안 이랬죠. 이현 씨한테 큰 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순종적이기만 했어요. 심지어 이현 씨가 원하는 건 전부 해줬죠. 이현 씨 입장에서는 제가 하는
온지유와 마주친 배진호는 우뚝 멈춰 서서 물었다.“사모님, 두 분 오늘 함께 식사 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온지유의 눈가에 눈물이 차오른 것을 보고, 배진호는 두 사람 사이에 다툼이 있었음을 직감했다.“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표님이 많이 반성하고 계세요. 보세요, 오늘 꽃다발까지 준비하셨어요. 사모님을 위해서요.”배진호는 두 사람이 빨리 화해하기를 바랐다.그는 여이현의 아래에서 오랫동안 일해왔다. 그래서 더 잘 알았다. 여이현은 누군가를 위해 꽃다발을 준비할 위인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여이현은 연애하는 법을 전혀 몰랐다. 정확히는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정성을 쏟을 여자가 없었던 것이다. 여이현이 온지유에게 마음을 쓰고 있다는 것은 그녀를 신경 쓰고 있다는 의미였다.온지유는 배진호가 들고 있는 꽃을 보고 담담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전에 온 비서라고 부르기로 했잖아요? 왜 또 사모님이라고 부르세요. 이제 그 호칭은 쓰지 마세요. 저는 이제 평범한 직원일 뿐이에요. 그리고 이 꽃은 진짜 중요한 사람한테 주길 바라요.”“아니에요. 사모님보다 더 중요한 사람은 없어요!”배진호는 어떻게든 좋게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온지유는 여이현에게 더 이상 아무런 기대도 하고 싶지 않았다.지금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단지 이혼, 그리고 깔끔한 이별일 뿐이었다.“사모님...”점점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배진호는 뒤쪽에서 다가오는 여이현에게 말했다.“대표님, 빨리 쫓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사모님이 화가 많이 나신 모양이에요.”그는 여이현보다 더 걱정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을 구하기 위해 속이 다 타들어 갔다.반대로 여이현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배진호에게 물었다.“아까 지유가 우는 것 같던데, 내가 제대로 본 게 맞나요?”“네. 저도 봤습니다. 많이 힘들어 보였어요.”“그런 눈으로 끝내자는 말은 왜 할까요? 나랑 있는 것이 그렇게 힘들었던 건가요?”“그럴 리가 없어요!”배진호는 급히 말했다.“여
“무슨 일인데 그렇게 급하게 마셔?”맞은편에 앉은 최주하가 물었다.그들은 나이트클럽에 있었다. 음악의 사운드는 크고 열정적이었다. 무대 위에서는 섹시한 여자가 춤을 추고 있었다. 모두가 이 밤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었다. 분위기 또한 시끄러웠다.여이현이 이 온 것은 단지 마음이 답답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시끄러운 곳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반대로 최주하에게는 일상과 다름없었다.“아무것도 아니야.”여이현은 온지유와의 갈등을 말하고 싶지 않아 얼굴을 굳힌 채 생각에 빠졌다.최주하는 와인을 가볍게 홀짝였다. 품에는 진한 메이크업을 한 여자를 안고 있었다.“왜, 연애가 또 잘 안돼?”“에이, 설마...”지석훈이 잘 아는 양 입을 열었다.“이현이 형이 어떤 사람인데. 안 넘어올 여자는 없어.”“너 그 여자 얕보지 마. 지난번 온지유 씨가 다른 남자랑 말 좀 했다고, 이현이 질투를 얼마나 하는지... 내가 그 산 증인이다, 이거야.”지석훈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물었다.“결혼한 사이에 그런 것까지 신경 써야 해?”“둘 다 닥쳐!”여이현은 날카롭게 말을 끊었다. 최주하도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똑똑한 사람이라면 무조건 알 수 있었다. 여이현의 결혼 생활에 적신호가 떴다는 것을 말이다.그는 한 번도 이런 모습을 보인 적 없었다. 전에는 외박을 밥 먹듯이 하며 온지유는 완전히 없는 사람 취급했다. 지금도 몸은 이 자리에 앉아 있지만, 마음은 온지유에게 가 있는 듯했다.“도현이 있었으면 좋겠다. 도현이는 제대로 분석할 수 있었을 텐데. 아무래도 변호사니까 이런 문제 자주 보지 않겠어?”최주하가 다시 말했다.“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냥 형이 취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내가 지난번처럼 전화를 걸어 볼게. 아무리 매정한 여자라고 해도 걱정을 안 할 수 없을걸.”두 사람이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 여이현은 점점 짜증이 났다. 온지유의 이름 석 자는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지만, 모든 말에 그녀가 들어있었다.“내가 언제 온지유랑 관련 있다고 했
온지유는 별다른 감정 없는 얼굴로 한동안 셔츠의 자국을 응시했다.여이현이 접대하는 자리에서 어쩔 수 없이 여자들과 어울려야 한다는 점은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 어떤 사람도 그의 셔츠에 립스틱 자국을 남긴 적은 없었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셔츠를 꼭 잡았고, 셔츠는 그녀의 손에서 점점 구겨지기 시작했다. 이때 욕실 문이 열리고 그녀는 벌떡 정신을 차렸다.여이현은 욕실에서 나와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는 그녀를 보고 물었다.“왜 거기에 그러고 서 있어?”온지유의 감정 변화를 알아채지 못한 그는 시간을 한 번 확인한 후 다시 말했다.“평소에는 잠들었을 시간 아니야? 오늘은 왜 안 잤어?”최근 온지유는 거의 그를 기다리지 않고 잠에 들었다. 예전에는 그가 돌아와야만 안심하고 잠들 수 있었는데 말이다.지금은 그가 늦게 돌아와도 아랑곳하지 않고 잠들었다. 물론 온지유가 잠자는 시간까지 그가 상관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전과 다른 세세한 변화에서 오는 기분의 낙차가 도무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선명했다.그가 술을 먹고 돌아왔는데도 온지유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았다. 그녀는 그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이건 노승아가 물어봐야 할 일이다. 애초에 립스틱 자국의 주인이 노승아일 수도 있었다.“옷은 세탁기에 넣어줄게요.”온지유는 차분하게 말하고 밖으로 나갔다.여이현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그녀의 말투에서 느껴지는 냉기를 알아챘던 것이다.‘이제는 나를 쳐다보는 것도 싫다는 건가?’생각하다 보니 여이현도 기분이 나빠졌다. 그는 이불을 덮고 옆으로 누워 잠을 청하려 했다.온지유가 돌아왔을 때, 여이현은 등을 돌린 채 이불을 단단히 덮고 있었다. 이미 잠들었는지 다른 움직임은 없었다.온지유는 그를 방해하지 않고 마찬가지로 등을 돌려 누웠다.두 사람 사이에 드넓은 강이 있는 것 같았다.잠시 후 여이현은 이불을 걷어냈다. 잠들기는커녕 땀만 흠뻑 났다. 그는 고개를 돌려 깊은 잠에 빠진 온지유를 확인했다. 그녀는 그의
만약 회사에 여이현을 대표할 다른 사람이 있다면 온지유는 무조건 알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임원들이 모두 자리를 비워서 그녀가 직접 갈 수밖에 없었다.“그럼 어쩔 수 없이 제가 가야겠네요. 서연 씨도 같이 가요.”“네.”송서연이 대답했다.온지유는 몇몇 사람과 함께 출발했다. 송서연은 신입사원으로서 회사 업무를 익혀야 했고, 온지유는 가는 길 내내 주의할 점을 당부했다. 어떤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항구에 도착했다. 배는 이미 항구에 와 있었고, 금강의 사람들이 그곳에서 화물을 내리고 있었다.온지유가 차에서 내리기 바쁘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왜 대표님이 아닌 온 비서가 온 거죠? 온 비서가 언제부터 대표님 대행까지 했어요?”온지유는 머리를 돌렸다. 강하임은 팔짱을 낀 채 그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대표님이 오늘 좀 바빠서요. 제가 대표님 대신 금강과 협상하는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에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세요.”강하임은 온지유가 점점 눈에 거슬렸다. 따지고 보면 그녀가 여이현의 비서로 등장한 첫 순간부터 눈엣가시 같았다. 왜 꼭 여자 비서를 써야 하는지 의아하기도 했다. 남자 비서가 체력적으로 훨씬 낫지 않는가?온지유가 여이현의 아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순간, 그 의문은 완전히 풀렸다. 온지유는 그녀가 경계해야 하는 상대가 틀림없었다.“이해 못 할 건 없지만, 온 비서가 월권한 것 같은데요. 온 비서의 권력이 언제 이렇게 커진 건가요?”강하임은 냉정한 말투로 물었다. 눈빛에는 온지유에 대한 적의로 가득했다.“이미 말씀드렸잖아요. 대표님이 오늘 바쁘다고요.”“저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 봐요.”강하임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 시선에 그녀는 몸이 뚫릴 것만 같았다. 그래도 강하임의 말에는 대꾸하지 않았다.그녀는 강하임과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적대적인 시선을 보내는지 이해할 수 없을 따
여이현과 노승아가 특별한 사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강하임에 관한 일은 전혀 들어본 적 없었다.강하임은 추억에 잠겼다. 인생에서 가장 로맨틱하고 격정적인 순간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온 비서는 몰라요. 대표님이 구해준 순간 나는 사랑에 빠졌어요. 내가 성인이 된 다음 꼭 결혼하기로 약속까지 했다고요! 이건 가장 신성한 약속이에요!”온지유는 강하임의 말이 하도 어이없어서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의 이해에 따르면 두 사람은 어린 시절에 만난 것 같다. 어린애가 한 말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더군다나 여이현은 강하임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거창한 약속이라고 잊었을 게 뻔했다. 마치 그녀를 잊은 것처럼...여이현은 많은 사람을 구했다. 그건 그의 일이었으니까. 일로 만난 상대에게 감정이 생길 일은 절대 없었다. 그래서인지 강하임의 말도 터무니없는 것으로 느껴졌다.“그렇다면 대표님께 직접 여쭤보시죠. 저한테 말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저는 할 일이 있어서 이만...”그녀는 남의 사랑 이야기에 관심 없었다. 하지만 돌아서려는 그녀를 강하임이 꽉 붙들었다.“두 사람이 부부라는 걸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면서요? 진짜 좋아서 한 결혼이면 숨길 리가 없어요. 전 세상에 알리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죠. 대표님은 온 비서를 좋아하지 않아요. 온 비서가 더러운 수작으로 결혼까지 한 거 맞죠?”강하임은 잔뜩 흥분한 모양새였다. 온지유는 미간을 찌푸리며 팔을 뿌리쳤다.“이거 노세요. 저한테 말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고 했잖아요!”“회피는 묵인이에요. 난 내 말이 맞는 거로 알고 있을게요.”강하임은 금방이라도 온지유를 삼켜버릴 것 같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역시 온 비서는 처음부터 나한테 악감정 있었죠? 나랑 윤희 사이에서 이간질 하더니, 이제는 내 남자까지 가로채요? 정말 확 죽려버리고 싶게 만드네요.”온지유는 그녀에게 밀려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임신한 몸으로 다치면 안 되기에 최대한 그녀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했
강하임을 문 것은 마지못해서 한 선택이었다. 그녀는 너무 위험한 곳에 서 있었고, 조금이라도 휘청거리면 바다에 빠질 수 있었다.그녀는 이대로 죽고 싶지 않았다. 죽더라도 강하임은 꼭 데려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강하임이 손을 뿌리친 순간 다른 손으로 그녀를 붙잡았다.두 사람은 동시에 바다에 빠졌다. 풍덩 소리와 함께 커다란 물보라가 쳤다.수영할 줄 몰랐던 강하임은 세차게 버둥대며 외쳤다.“살려주세요!”오늘은 강풍이 부는 날이었다. 그만큼 파도의 힘도 강했다. 집채만 한 파도가 덮이자, 살려달라는 소리는 아예 들리지 않았다.온지유는 수영할 줄 아는데도 벗어나기 힘들었다. 아무리 팔을 뻗어도 점점 멀리 밀려나기만 했다.그녀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곳에서 죽고 싶지 않았다. 배 속의 아이도 다쳐서는 안 된다. 어떻게든 살아 남기 위해 수영했는데도 몸은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무기력감이 몰려오는 동시에 힘이 빠져버렸다. 바닷물은 끝없이 입속으로 들어왔고, 정말 죽는 것인지 주마등도 스쳐 지나갔다.아이... 부모... 그리고 여이현.‘엄마랑 아빠한테 효도해야 하는데. 이현 씨랑 이혼하고 아이도 낳아야 하는데...’이대로 죽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일이 너무 많았다. 만약 다음 생이 있다면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 자신을 좋아해 주는 사람과 만나겠다고 다짐했다.‘힘들어... 잠깐만 쉴래.’의식은 점점 모호해지고 몸도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갔다.“저기 사람이 있어요!”“빨리! 빨리 건져내!”“아가씨, 잠들면 안 돼요! 정신 차리고 밧줄을 잡아요!”온지유는 시끄러운 말소리에 다시 눈을 떴다. 마침 지나가던 어선에서 사람들이 그녀를 향해 밧줄을 던지고 있었다.그녀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밧줄을 잡았다. 어디에서 온 힘인지는 모르겠지만 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어부들이 도와준 덕분에 그녀는 무사히 배에 탈 수 있었다. 그들은 그녀의 곁에 빙 둘러서서 우왕좌왕했다.“아가씨, 괜찮아요?”한 여자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의식이 점점
여자의 안색이 미묘하게 변했다.“하, 지금 그런 거로 날 협박하는 거예요?”“이건 협박인지 아닌지는 그쪽의 행동에 달린 거죠. 먼저 멋대로 물건을 던진 건 그쪽이잖아요. 버리는 물건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그랬다는 건 미끼를 던진 거나 다름이 없다는 소리죠. 그쪽이 멋대로 던진 물건을 돌려주는 건데 주운 사람이 무슨 잘못이 있다는 거죠?”양시은은 잔뜩 비꼬며 말했다. 양시은을 상대로 하는 말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안 여자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고 주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도 달라졌다.“지... 지금 잘못을 나한테 떠넘기려는 거예요?! 그쪽 같은 사람은 살면서 처음 보네요! 잘못을 했으면서 반성의 기미도 없고 오히려 적반하장이라니!”“우리 엄마한테 멋대로 말하지 마시죠. 전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쪽을 욕한 적 한 번도 없는 거로 아는데요. 이미 충분히 참고 있는 건데 자꾸 화를 돋우면 제가 이렇게 나긋나긋하게 그쪽과 대화를 이어갈 수 있겠어요?”양시은은 헛소리를 들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자는 이를 빠득 갈며 고개를 돌리더니 자신의 딸에게 사나운 눈빛을 보냈다.여자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양시은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여자아이는 말라도 너무 말랐고 머리카락마저 푸석푸석했다.여자에게 밀쳐버린 여자아이는 바닥에 철퍼덕 앉더니 눈을 비비며 울기 시작했고 여자는 양시은의 탓을 해댔다.“그쪽 때문에 내 딸이 울잖아요! 당장 돈 물어내요!”양시은은 여자의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다만 너무도 능숙한 여자의 모습을 보니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일부러 일을 만들고 돈을 뜯어내는 것이었다.너무도 능숙한 모녀의 모습에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양시은은 다시 고개를 돌려 아이를 보았다. 너무도 불쌍했지만 그녀는 보살도 아니었고 제 발로 걸어들어온 사기꾼에게 동정을 베풀 생각도 없었다.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바로 신고했다.“말이 통하지 않는 것 같으니까 우리 경찰서로 가서 다시 얘기하죠.”그러자 여자는 눈
하민이는 낮에 친구들에게 외할머니가 어떤 사람인지에 관해 묻기도 했었다. 친구들의 말을 들으니 확실히 자신의 외할머니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의 외할머니는 다른 외할머니와 다르게 아이처럼 행동하며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이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런 할머니를 더 좋아했다.멀지 않은 곳에 함께 있는 문해미와 하민이의 모습에 양시은은 그제야 마음 놓고 장을 보았다. 대충 다 고르고 두 사람을 찾으러 계산대로 갔을 때 어디선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여러분! 이 할망구가 지금 남의 물건을 훔치고 있어요! 얼른 도둑 잡아요!”“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저희 외할머니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요! 아주머니가 물건을 이쪽으로 던지니까 제 외할머니가 주워서 본 거잖아요!”하민이는 논리를 따지며 맞섰다. 하지만 상대는 중년의 여성이었고 딸을 데리고 있었다. 다 큰 어른으로서 아이의 앞에서 체면을 구기는 일은 용납할 수 없었던지라 여자는 모든 잘못을 문해미에게 돌렸다.“난 아이를 봐야 했다고. 물건도 들고 있어서 핸드폰을 잠시 거기에 둔 거야. 아니, 내 핸드폰을 가져간 건 네 할머니인데 왜 적반하장이니?”여자는 차갑게 비꼬아 말했다.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자 여자는 더 목소리를 높였다.“다들 누가 옳은 건지 판단 좀 해주세요! 제가 잘못한 건가요? 다 큰 어른이 어떻게 핸드폰이 뭔지도 모르고 가져갈 수 있겠어요!”“그렇네요. 물건을 훔쳤으면서 적반하장이네요.”“꼬마야. 이번 일은 네 할머니 잘못이란다.”조급해진 하민이는 얼굴이 빨개졌다.“아니에요! 우리 할머니는 핸드폰을 돌려주려고 한 거라고요!”그러자 여자는 더 가소롭게 여기며 웃었다.“그래. 그 핸드폰이 내 거라니까.”무슨 말을 해도 상대를 이길 수 없었던 하민이는 마음이 조급하면서도 억울했고 살면서 자신을 이렇게 대한 사람은 처음이었던지라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지만 옆에 서 있는 문해미를 보며 겨우 눈물을 참았다.‘울면 안 돼. 엄마가 할
얼마 지나지 않아 양시은의 손에는 팔찌가 들려 있었다. 익숙한 감촉에 그녀는 씁쓸한 기분을 느꼈다. 문해미가 아주 오래전에 그녀에게 남긴 팔찌였으니까...문해미가 실종된 후 팔찌를 볼 때마다 생각날까 봐 그녀는 팔찌를 이곳에 맡겨두고 있었다. 결국 돌고 돌아 그녀의 손에 다시 들어오게 되었지만 말이다.팔찌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니 문해미는 혼자 놀고 있었다. 하민이가 없으니 이런 식으로 무료함을 달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문해미의 정신 연령은 다섯 살과 비슷했기에 혼자서 놀고 있어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았지만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니 양시은은 가슴이 저릿해졌다. 지금처럼.“엄마, 저 왔어요. 이거 혹시 아직도 기억해요?”“팔찌... 시은이한테 준 팔찌.”문해미는 그녀의 손에 있던 팔찌를 가져갔다. 여전히 팔찌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양시은은 2초간 멍해 있더니 눈시울이 붉어졌고 목소리도 어느새 잠겨버렸다.“엄마, 기억하고 계셨군요.”문해미는 정신적인 충격으로 많은 것을 잊어버린 상태였고 그녀의 아버지에 관해서도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매일 그녀의 이름을 불렀고 그녀만 기억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에게 줬던 팔찌와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네, 엄마가 저한테 준 팔찌에요. 엄마, 조금만 더 자세히 보세요. 제가 이걸 그동안 금은방에 맡겨두고 있어서 그때랑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거든요.”양시은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고 문해미는 팔찌를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양시은의 손을 잡았다.문해미는 팔찌를 그녀의 손목에 끼워주었다.“시은아, 껴.”양시은의 목이 메어왔고 고개를 돌려 눈물을 훔쳤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 입을 벌리기만 해도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적어도 문해미의 앞에서는 목 놓아 울지 말자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문해미가 걱정할 수 있으니까. 그러자 문해미는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고 있었다.문해미의 목소리엔 형언할 수 없는 온화함이 묻어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니 양시은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나도현은 그런 그녀의 모습이 이상하게도 싫어 식당 직원에게 눈빛을 보냈다.“여기 잘나가는 메뉴 전부 가져다주세요.”그의 말을 들은 직원은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입이 귀에 걸린 듯 웃었다. 통이 큰 손님이지 않은가.시그니처 메뉴를 전부 테이블에 놓여 있었고 중간에 샤부샤부가 뜨거운 열기를 내뿜으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매운 육수가 마침 양시은의 앞에 있어 양시은은 눈마저 매워지는 것 같았다.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며 자신의 옆으로 앉는 양시은을 보며 입을 열었다.“아까는 불러도 대답하지 않더니 이제야 내 옆으로 와주는 거야? 역시 넌 억지로 오게 하지 않으면 안 올 생각이었지?”반박할 수 없었던 양시은은 침묵했다. 확실히 그러했으니까.다만 이 일로 그녀의 기분은 조금 전보다 많이 나아졌고 모든 메뉴가 나온 뒤 샤부샤부를 먹기 시작했다. 나도현은 거의 먹지 않았고 음식을 집어 전부 양시은의 그릇에 놓아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양시은의 그릇엔 음식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그만해. 이거면 충분해.”그녀는 얼른 그릇을 옆으로 옮기며 말했다. 행여나 나도현이 계속 음식을 집어줄까 봐 말이다.나도현은 그제야 수저를 내려놓았지만 어딘가 아쉬워 보이는 표정이었다.“양 비서?”이때 분위기를 깨는 소리가 들려오고 양시은은 고개를 돌렸다. 겨우 돌아온 입맛마저 사라지는 기분이었고 점차 짜증이 치밀었다. 어딜 가나 마주치고 있으니 재수가 없지 않은가.“어라, 형도 있었네? 난 양 비서가 보이기에 다른 남자랑 밥 먹고 있는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나 보네.”나태욱은 일부러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쓸데없는 말을 하는 그의 모습에 양시은은 처음으로 나태욱이 싫어졌다. 그간 많은 사람들을 만나 보았지만 나태욱처럼 그녀의 미움을 산 사람은 없었다.나도현은 태연하게 음식을 집어 먹으며 말했다.“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니까 꺼져.”나태욱은 고개를 돌려 양시은을 보았다.“이렇
하민이에게 일단 나도현의 존재를 적응시킨 후에 아빠라는 사실을 알려주면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녀는 여전히 죄책감이 들었다.“오늘 나한테 물어봤을 때 하마터면 사실대로 말할 뻔했어. 하민이가 아빠가 왜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냐는 식으로 물어볼 줄은 몰랐거든. 순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도 모르겠더라.”나도현은 조심스럽게 그녀를 품에 안으며 자신의 따뜻한 온기를 느낄 수 있게 했다.“죄책감을 느껴야 할 사람은 네가 아니라 나야.”역시나 하민이는 나도현의 존재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고 예전에는 그저 좋은 아저씨로만 생각했다면 지금은 아빠처럼 대하고 있었다. 심지어 양시은도 그 영향을 받게 되었고 나도현과 함께 있을 때 하민이의 도움을 받아 더 가까워지게 되었다. 신경이 쓰였지만 아이에게 어떻게 밝혀야 할지 몰랐다. 여하간에 아이는 아직 어렸던지라 많은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그녀가 이런저런 고민을 하고 있던 때 사고가 나게 되면서 문해미는 입원하게 되었다.“제 엄마는 어떻게 됐어요? 어젯밤 갑자기 엄마가 소리를 지르더니 아빠 이름을 크게 부르더라고요. 왜 갑자기 그러신 건지 전 정말로 모르겠어요.”양시은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고 무력감을 느끼고 있었다. 인명진은 그런 그녀가 잡은 자신의 손을 보았다.“일단 심호흡부터 하세요.”양시은은 그제야 잡고 있던 그의 손을 놓아주었지만 여전히 신경은 온통 문해미에게 쏠렸다.“전 정말로...”“환자의 상태는 불안정해요. 시은 씨가 말했던 것처럼 소리를 지르며 누군가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는 건 무엇으로부터 자극을 받았다는 것이죠.”양시은은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하지만 엄마를 자극할 사람은 아무도 없는걸요.”문해미의 상태가 좋지 않았던지라 다들 조심스럽게 대했다. 정신 연령대가 비슷한 하민이를 제외하고 말이다. 하지만 하민이는 아직 어린이였기에 문해미를 자극할 리가 없지 않은가.양시은이 골똘히 생각하고 있을 때 인명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누가 자극했는지는 나중에 생각하
하민이 앞에 있는 도구도 가장 작은 것이었다.세 사람은 테이블에 모여 앉아 열심히 만두피를 만들었다.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만들고 있는 아이의 모습에 양시은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하민아, 그렇게 힘을 쓸 필요 없어. 엄마가 하는 대로 따라 하면 돼.”그녀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차근차근 가르쳐 주었고 나도현도 옆에서 집중하며 보았다. 당연히 양시은은 눈치채지 못했고 하민이는 점차 만드는 법을 익히게 되었다. 만두피를 만든 후 밀가루를 뿌려 붙지 않게 했고 만두를 빚기 시작했다.“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아.”양시은은 자리에서 일어난 후 기지개를 켰다. 그러자 나도현이 손을 뻗었고 그녀는 고개를 피하며 그의 손을 잡았다.“피하지 마. 얼굴에 밀가루 묻었으니까.”양시은은 그제야 얌전히 그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닦으면 닦을수록 얼굴에 묻은 밀가루가 더 많아졌고 나도현은 그제야 자신의 손을 보더니 침묵했다.그녀는 아직 자신의 얼굴이 어떻게 되었는지 몰랐다.“왜 그렇게 이상한 눈으로 보는 거야? 얼굴에 묻은 건 다 닦았어?”“응, 아마도.”나도현은 슬쩍 시선을 돌렸다.‘아마도라니?'양시은은 그제야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때 하민이가 그녀의 얼굴을 보더니 커다란 눈을 했다.“엄마, 왜 고양이가 된 거예요?”거울을 본 양시은은 바로 고개를 돌려 나도현을 보았다.“나도현. 닦아준다면서 이게 닦아준 거야?”그리고 이내 손에 밀가루를 묻히더니 망설임도 없이 그의 얼굴에 비볐고 나도현은 피하지 않았다.그렇게 거실에선 밀가루 대전이 일어났고 양시은이 적당한 때에 멈추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민이와 나도현의 얼굴엔 밀가루로 가득했고 그녀도 그러했다.세 사람은 함께 세수하러 가게 되었다. 그녀는 하민이의 얼굴을 닦아주었고 나도현은 수건으로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내가 알아서 할게.”“내가 해줄게.”나도현은 자신의 손을 밀어내려는 양시은의 손을 잡으며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양시은은 더는 거절할 수 없어 가만히 있었다.
거대한 회사에서 정식적인 정장 차림으로 출근한 사람은 사실 많지 않았고 단 둘뿐이었다.양시은은 문밖에 있는 사람이 나태욱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기에 비서들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전 저희 대표님이 이길 거로 생각해요. 어쨌든 전 대표님 비서니까 대표님 편을 드는 건 당연한 거죠.”비서들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밖에 있던 나도현은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만족한 듯 미소를 지으며 가버렸다.그림자가 사라졌다는 것을 발견한 양시은은 더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기분을 위해 가끔 이런 말을 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시간은 빠르게 흘러 하민이가 유치원에 다닌 지 어느새 보름이 지났고 양시은은 하민이 선생님에게 연락해 평소 하민이에 관해 물었다. 그러자 선생님은 하민이의 칭찬만 해댔다.“하민이 어머니, 하민이는 제 학생들 중에서 제일 얌전하고 말 잘 듣는 아이예요. 하민이처럼 착한 아이는 더 없을 거예요.”선생님의 칭찬과 설명을 들은 양시은은 마음이 놓였고 하민이는 그녀의 생각보다 더 착한 아이였다.“하민아, 엄마가 오늘 하민이 선생님께 연락해서 물어봤는데 하민이가 엄청 잘하고 있다고 하더라고. 우리 하민이 정말 최고야.”그녀는 하민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러자 하민이는 부끄러운 듯 귀까지 빨개졌다.“하민이는 엄마가 한 말씀을 기억하고 있는걸요.”아이의 말에 양시은은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를 누가 마다하겠는가. 더구나 그녀의 아들이 아닌가. 그녀는 커다란 손을 들어 하민이에게 원하는 것을 말해보라고 했다.하민이가 맛있는 음식이나 장난감을 사달라고 할 줄 알았지만 하민이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양시은을 보았다.“그럼 아저씨를 불러와서 같이 만두를 빚으면 안 돼요?”“만두를 빚자고?”양시은은 의아한 얼굴로 아이를 보았다. 그러자 하민이는 유치원에서 내준 숙제를 말해주었고 그 내용은 가족과 함께 만두를 빚는 것이었다.“하민이는 아빠를 본 적 없고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니까 아저씨랑
그저 분위기를 몰 뿐 아무도 진담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하간에 데리고 온 파트너가 있다고 해서 그 상대가 정말로 결혼할 상대인 것은 아니었고 어쩌면 놀다가 질릴 놀이 상대일 수도 있었다. 남자는 다 그러했으니까.양시은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들이 하는 농담에 토가 쏠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이때 나도현이 차가운 목소리로 그들의 웃음소리를 멈추게 했다.“최근에 확실히 있죠.”그 순간 그들은 목에 무언가라도 턱 막힌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큼, 큼큼... 제가 눈치가 없었네요. 이분이 대표님께 그런 사람일 줄은 몰랐네요.”웃음거리로 만들던 사람이 헛기침해대며 말했다. 양시은은 당연히 눈앞에 있는 사람들을 가소롭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제때 나서준 나도현 덕에 가슴 한구석이 따스해진 기분이었다.비록 술자리라곤 했지만 사실상 사업을 논의하는 자리였고 나도현의 위치와 성격 탓에 아무도 그에게 술을 잔뜩 따라줄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몇 잔 마시게 되었다.술자리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때 양시은은 나도현에게서 은은하게 나는 술 냄새를 맡게 되었다. 술에 박하잎이라도 들어간 것인지 어딘가 시원하게 느껴지기도 했다.“나도현, 내 목소리 들려?”양시은은 그가 취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손을 들어 그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그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정말로 취한 건가...”“안 취했어.”이때 갑자기 그가 입을 열었고 양시은은 깜짝 놀라게 되었다. 그다음 순간 그녀는 시원한 그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양시은은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얼른 차창을 닫으려고 그를 밀어냈다.“이거 놔. 창문 안 올렸단 말이야.”“싫어.”나도현의 담담한 말에 그녀는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고 하고 싶지 않았다.그의 손이 그녀의 등을 스쳐 지나가더니 버튼을 눌렀고 창문이 스르륵 닫혔다. 양시은은 그제야 안도했고 입술 위로 차갑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닿았다. 박하 잎을 입에 머금은 것처럼 시원했다.나도현은 그녀의 머리를 잡고는 다정한 키스를 쏟아부었고 차 안의 분위기
“잠시만요. 저도 할 말이 있어요. 해남 구역의 경쟁입찰은 이미 제가 손에 넣었거든요.”이때 나태욱이 갑자기 손을 들며 끼어들었고 사람들은 놀란 표정을 짓게 되었다. 양시은도 놀란 눈빛을 하며 그를 보았다.해남 구역의 경쟁입찰을 나태욱이 이미 손에 넣었다니...다들 수군거리고 있던 때에 나태욱은 턱을 괴며 건방진 미소를 지었다.“다들 모르셨어요? 아, 제가 말해준다는 걸 깜빡하고 있었네요. 그래도 큰일이라 다들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말을 하면서 그는 나도현을 보았다. 그 순간 회의실 안 분위기는 차갑게 얼어붙었고 양시은은 걱정 어린 눈길로 나도현을 보았다.“그럼 다른 프로젝트를 논의하죠. 회사에서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이것 하나뿐인 건 아니니까요.”나도현은 그녀의 생각보다 더 차분하고 이성적이었고 심지어 흐름이 끊기지 않게 했다. 하지만 나태욱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회의는 계속 진행되었지만 이번에 민망해진 사람은 그들이 아니었다. 여하간에 방금 자랑을 했지만 무시를 당하지 않았던가. 민망한 사람은 나태욱이었다.회의가 끝나고 양시은은 서류 정리 때문에 늦게 나오게 되었다. 나도현은 아직 멀리 가지 않았고 일부러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그녀를 기다려주고 있었다.양시은이 그를 따라잡으려 할 때 나태욱이 갑자기 그녀를 불러세웠다.“양 비서, 나한테 아직 일 잘하는 개인 비서가 없는데 이번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만 형한테 말해서 나한테 오는 건 어때요?”또 그녀를 자신의 편으로 들이려는 속셈이었다. 나태욱은 자신이 말을 꺼내기만 하면 안 넘어갈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 듯했지만 그녀는 정말로 넘어가지 않는 사람이었다.“괜찮아요. 전 이미 지난번에 분명하게 말했다고 생각하는데요. 전 대표님 곁이 아니라면 다른 곳에 갈 생각은 없네요.”그러자 나태욱이 픽 웃었다.“양 비서, 정말로 그렇게 붙어 있으면 형이 양 비서랑 결혼해줄 줄 알았어요? 그만 포기해요. 우리 고집 센 아버지는 절대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해 줄 리가 없으니까.”양시은은 걸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