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임은 바로 등을 돌렸다.온지유는 이쪽 상황을 사실대로 여이현에게 알렸다.“저희 쪽에서 자꾸 책임자를 바꿔서 대표님께서 직접 오시라는데요?”온지유는 중점만 말했다.만약 여이현이 이번 비즈니스를 잡고 싶다면 직접 와야 했고 별로 잡고 싶지 않다면 모른 척하면 되었다.온지유는 이 틈을 타 변호사를 알아보러 가면 된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여이현이 바로 이렇게 말할 줄 몰랐다.“그냥 돌아와.”엄숙한 말투를 봐서는 전혀 장난처럼 들리지 않았다.“네.”온지유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다시 사무실로 돌아갔을 때, 여이현은 창가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온지유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다른 거 해야 할 거 있을까요?”여이현이 담배 연기를 뿜어내는 바람에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다.하지만 말은 또박또박 잘 들렸다.“왜 상대방이 보자마자 그런 요구를 한 건데?”의심하는 말투에 온지유가 냉랭하게 대답했다.“저 때문에 이렇게 된 거라고 의심된다면 직접 상대방에게 물어보시든가요.”온지유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지만 사실 속상했다.그래도 몇 년 동안 함께한 정은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여이현은 아무 말 없이 계속 담배만 피울 뿐이다.온지유는 계속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담배 연기는 산모한테도, 태아한테도 해로웠다.“대표님, 별다른 일이 없으면 이만 가보겠습니다.”온지유가 뒤돌아 나가려고 하자 여이현이 말했다.“새로 뽑는 비서 내 마음에 들어야 해.”“네.”온지유는 이 말에 동의했다.하지만 이력서를 아무리 보여줘도 여이현의 마음에 드는 사람은 없었다.온지유가 질문했다.“제가 비즈니스를 망쳤다고 생각하시면 대표님은요?”전에 여이현은 그만두겠으면 괜찮은 사람을 뽑아놓고 가라고 했다. 그런데 어렵게 이채현을 들였더니 꺼지라고 할 줄이야.이력서를 아무리 보여줘봤자 전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일부러 가지 못하게 핑계를 대는 줄 알았다.이력서를 제출한 사람들이 전부 명문대 출신이어도 말이다.여이현이 차갑게 말했다.“전부
깔끔하게 차려입은 한 남자가 컴퓨터 앞에 앉아서 물었다.“여사님, 동사무소에 가서 이미 예약하셨으면 기다리시면 되잖아요. 상대 배우자가 이혼할 의향이 없으시면 절차대로 진행할 수밖에 없습니다.”온지유가 진지하게 말했다.“저는 최대한 빨리 이혼하고 싶은데 얼마를 드리면 가능할까요?”2개월까지 기다리지 못하는 온지유는 마음이 급했다.변호사가 온지유의 반응을 보더니 말했다.“한쪽만 급해하시는 걸 보니 상대방은 이혼을 원하지 않는가 봐요. 아니면 외도라도 하셨나요?”온지유가 부정했다.“저는 외도한 적 없습니다. 처음부터 계약 결혼이었고 상대방은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억지로 결혼 사실을 숨기는 것도 힘들고 아무런 감정 없는 결혼생활을 유지하기도 지겹네요. 아이도 없고 재산분할도 필요 없습니다. 저는 그저 최대한 빨리 새로운 시작을 하고 싶을 뿐이에요.”결혼 사실을 숨기고 있다는 말에 변호사는 그제야 관심을 가졌다.재벌가만이 이런 행동을 하기 때문에 어쩌면 큰돈을 뜯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변호사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먼저 저희 비서님이랑 이혼 소송서류를 작성하도록 할게요.”“네.”온지유가 고개를 끄덕였다.몇 분도 안 지나 온지유는 이혼 소송서류를 들고 다시 찾아왔다.“나 변호사님.”비서님한테서 변호사 성씨가 나 씨라는 것을 들었다.나 변호사는 이혼소송 서류에 적혀 있는 피고인 여이현의 이름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아무리 봐도 상대는 여이현이 맞았다. 온지유가 말했던 결혼 계약서도 그가 직접 여이현에게 작성해 준 것이다.그가 말이 없자 온지유가 미간을 찌푸리면서 물었다.“이혼소송 서류에 무슨 문제라도 있을까요?”“아니요. 일단 돌아가 주시면 제가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그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온지유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감사합니다. 나 변호사님.”온지유가 떠나고, 나도현은 바로 여이현에게 전화했다.여이현이 전화 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때, 전화기 너머에서 여이현의 차
온지유는 인사팀으로 찾아가 이력서를 확인했다.괜찮은 사람들로 여이현에게 보여줬지만 아무런 답장도 없었다.이 많고 많은 후보 중에 여이현의 마음에 드는 사람은 없었다.결국 일부러 자신을 난처하게 하는 거라고, 보내주기 싫은 거라고 확신하게 되었다.온지유는 갑자기 밀려오는 피곤함에 한 시간만 더 있다가 퇴근하기로 했다.만약 여이현이 여전히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상관하지 않으려고 했다.무더운 날씨에 밖에 나가서 음료수를 사고 돌아오는 길, 갑자기 어지러운 느낌에 더는 걸을 수가 없었다.결국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온지유.”이때 웬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뒤돌아보았을 때, 그레이색 정장을 입은 나민우가 허리를 숙이고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온지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나민우는 다시 허리를 세워 한쪽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민우야.”나민우가 웃으면서 말했다.“그래. 나야.”“웬일이야?”요즘 따라 자주 만나는 것 같았다.“현지 시찰하러 왔다가 주차하면서 마침 너를 봤어.”온지유는 멀지 않은 곳에 세워져 있는 블랙 벤틀리 차량을 발견했다.“너는 왜 여기 혼자 있어?”온지유는 다시 시선을 돌려 나민우를 쳐다보면서 말했다.“이력서를 확인하다가 음료수 사러 나왔지.”“이력서?”나민우는 이해가 안 되는지 미간을 찌푸렸다.“네가 직접 이력서를 보고 사람을 뽑아야 해?”나민우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온지유의 옆에 앉았다.온지유가 잠깐 침묵하더니 말했다.“인수인계할 사람을 찾아야지.”“퇴사하려고?”나민우는 굳이 묻지 않아도 바로 눈치챘다.온지유도 별로 숨길 생각이 없었다.“응.”분위기는 다시 고요해지기 시작했다.나민우는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멈칫하더니 물었다.“안색이 안 좋네. 여 대표님이랑 사이가 안 좋아?”갑작스러운 질문에 온지유는 깜짝 놀라면서 고개를 쳐들었다.비밀로 결혼한 사실을 별로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민우한테 말하지도 않았는데 나랑 이현 씨가 단순히 직장
온지유가 그의 말에 찬성했다.“맞아.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거야. 믿어 의심치 않아.”나민우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온지유는 이미 확고하게 마음을 먹은 것 같았다.나민우는 생각에 빠지게 되었다.‘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좋아했는데. 정말 헤어지기로 결심한 건가?’그해, 온지유가 걱정되어 찾아간 적이 있었다.그때는 온지유가 아직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어 나무 뒤에서 몰래 지켜보았다.괜찮다는 것을 확인해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그러다 온지유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여이현을 쳐다보면서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그때까지만 해도 여이현같은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여이현은 잘생기고 공부까지 잘해서 쫓아다니는 여학생들이 많았다.하지만 나민우는 그때 뚱뚱해서 온지유의 앞에 나타날 용기가 없었다.그렇게 그는 오랫동안 좋아한 온지유를 우두커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그저 그녀가 행복했으면 했다.“온지유, 날 봐봐.”나민우의 익살스러운 표정에 온지유는 멈칫하고 말았다.나민우는 이런 반응에 그만 뻘쭘해졌다.“왜, 안 웃겨?”온지유는 평소에 진지하기만 하던 사람이 이런 표정을 지을 줄 몰랐다.익살스러운 표정을 한 것보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하는 표정이 더욱 웃겼다.온지유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왜 갑자기 이러는 거야?”나민우가 말했다.“난 네가 기분이 좋아졌으면 해서.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너의 기분을 풀어줄수 있을지 몰라서...”온지유는 늘 자신의 기분을 헤아려 주는 나민우의 모습에 감동하고 말았다.이렇게 정서가 안정적이고 다정한 사람은 온지유의 남자친구로서 딱이었다.그런데 이미 결혼도 했고, 아이까지 있는 그녀에게는 과분한 사람이었다.“덕분에 기분이 좋아졌어.”온지유가 웃으면서 말했다.“네가 웃었으면 됐어.”그런데 마침 여이현이 이 모습을 보게 되었다.온지유와 나민우는 마치 풋풋한 연인 사이처럼 보였다.여이현은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눈빛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변호사 찾으러 간
업무를 처리하고 있던 여이현은 고개 들어 그녀를 차갑게 쳐다보고는 자료를 건네받았다.의외로 자세히 자료를 확인해 보는 것이다.온지유가 긴장한 마음으로 말했다.“다 괜찮으신 분입니다. 이 중에서 뽑으시면 될 것 같습니다.”여이현은 그중에 괜찮은 이력서를 한쪽에 내려놓더니 말했다.“이 사람 내일 면접 보러 오라고 해.”의외로 명쾌한 대답에 온지유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네. 지금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여이현이 또 말했다.“별일 없으면 이만 가봐.”온지유는 차가운 그의 표정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나가라고 했으니 나갈 수밖에 없었다.이때 배진호가 성큼성큼 걸어들어왔다.“대표님, 성동 공사 현장에 사고가 발생했습니다.”여이현은 미간을 찌푸린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배진호와 함께 그쪽으로 향했다.긴박한 상황에 온지유도 뒤따라 나서려고 했다.그런데 여이현은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온지유를 힐끔 보더니 진예림에게 말했다.“진 비서도 함께 가시죠. 온 비서는 안 가셔도 됩니다.”온지유는 물론 진예림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여이현의 눈빛과 마주친 진예림은 그에게 잘 보일 기회가 생겨 냉큼 자리에서 일어났다.“네! 대표님.”진예림은 여이현과 배진호를 따라 엘리베이터로 향했다.온지유는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밖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성동 공사 현장에서 사람이 죽었다며. 사실이라면 대표님 감옥에 가야 할지도 몰라!”온지유는 어두운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뉴스를 확인해 보니 역시나 모든 화살은 여이현을 향해 있었다.온지유는 바로 뛰쳐나갔다.--성동 공사 현장 사망 인원은 한 명이 아닌 세 명이었다.건물이 무너지는 바람에 경찰은 물론 각 매체도 출동했다.여이현이 공사 현장에 도착한 순간, 기자들이 밀려와 인터뷰를 시도했다.“여 대표님, 이번 사건은 어떻게 해결하실 생각이십니까?”“여 대표님, 세 명이나 사망했는데 부실 공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기자들, 공
“그러게. 여 대표님이 이대로 망하면 돈 뜯어낼 곳이 없어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 아니야?”...결국 모든 화살이 온지유를 향하게 되었다.사람들은 미친듯이 온지유에게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옆에서 지켜보던 진예림은 속으로 깨 고소했다.‘그냥 때려. 정신을 못 차리게.’여이현은 결국 참지 못하고 경찰을 뿌리치려다 온지유를 보호해 주는 경찰과 배진호를 보고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경찰서로 향했다.“중점적으로 최승준과 이채현을 조사해 보세요.”주주총회에서 비난받았던 최승준, 최근까지 여이현의 곁을 따라다녔던 이채현, 이 두사람이 바로 가장 큰 용의자였다.하지만 사건조사가 그렇게 빨리 끝날 일은 아니었다.온지유는 다시 회사로 돌아갔고, 배진호는 나도현에게 연락하여 함께 경찰서로 향했다.여이현은 나도현을 보자마자 말했다.“내가 이혼소송을 알고 있는 거 비밀로 해.”나도현은 어이가 없었다.“여이현, 지금 사람이 죽었다고. 회사 대표인 네가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내지 못하면 몇 년형을 받게 되는지 알아?”‘지금이 어느 때인데 아직도 이혼소송을 신경 쓰고 있어!’여이현이 차갑게 말했다.“나랑 무슨 상관이야. 난 범인도 아닌데.”나도현이 그를 힘껏 째려보았다.“지금 옆에 나랑 진호 씨가 있다고 안심하는 거야?”나도현은 비록 투덜거리긴 했지만 그래도 여이현을 많이 신경 쓰고 있었다.이 시각, 최승준은 이미 다시 주주총회를 열어 대표를 다시 뽑아야 한다고 말했다.온지유는 이 사람들을 냉랭하게 쳐다보면서 말했다.“다들 여진 그룹에 오래 계셨던 분이잖아요. 만약 대표님께서 정말 잘못한 부분이 있었다면 하필 이 타이밍에 잡히지 않았겠죠.”“범인이 아니라고 해도 아직 용의자잖아요. 대표 자리를 이렇게 비워두고 있으면 어떡해요. 계속 기다릴 수는 없잖아요.”최승준은 바로 반박에 나섰다.온지유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최 대표님. 여 대표님이 구속되었어도 아직 저랑 배 비서님이 여 대표님의 뜻을 전달해 드릴 수 있습니다.”온
최승준의 등에 떠밀려 이 자리에 참석한 주주들은 온지유의 말에 토를 달 수 없었다.진예림도 온지유와 최승준의 싸움이 더욱 커지길 바랐는데 이렇게 끝날 줄 몰랐다.그녀 역시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하지만 여이현이 없는 동안이 가장 좋은 기회인 건 틀림없었다.--한참 가만히 앉아있던 온지유는 유인작전을 실행해 보기로 했다.그래서 일부러 배진호에게 전화했다.“저한테 지금 중요한 증거가 있는데 여 대표님께 직접 드려야겠어요.”전화를 끊자마자 진예림이 온지유의 앞으로 다가와서 혹시나하는 마음에 물었다.“온 비서님, 방금 중요한 증거를 대표님께 가져다드린다고 하셨어요? 누가 대표님을 모함했는지 알아낸 거예요?”온지유가 고개를 끄덕였다.“회사 내부 사람이죠.”“누구를 의심하고 있는데요?”이 질문에 온지유는 그녀를 의심하기 시작했다.모든 사람이 여이현이 감옥에 갈까 봐 걱정하고 있는 와중에 진예림이 이런 질문을 할 줄 몰랐다.온지유가 피식 웃었다.“제가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증거를 찾은 거죠. 지금 바로 대표님 만나러 갈거예요.”온지유는 말하면서 테이블을 정리했다.사실 몰래 녹음기를 켜놓은 것이다.진예림은 확실한 대답을 듣기 전에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온 비서님, 저랑 함께 가요. 평소에는 그래도 배 비서님이 계셨는데 오늘은 안 계시는 배 비서님 대신 제가 함께할게요. 물건들 제가 들어드릴게요.”평소에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다면 이 말을 믿었을지도 몰랐다.온지유는 아무 물건이나 건네면서 말했다.“그러면 진 비서님이 가져다주세요. 저는 개인적인 일 때문에 퇴사할 예정이거든요. 그리고 최근에 대표님 심기도 건드리고 해서...”“네?”진예림은 겉으로는 놀란 척했지만 내심 기뻤다.‘그래서 그때 성동 공사 현장에서 대표님 편을 들어준 거구나.’이렇게까지 말했는데 거절할 진예림이 아니었다.“그러면 저한테 주세요. 제가 가져다드릴게요.”“네.”온지유는 떠나가는 진예림의 뒷모습을 쳐다보다 녹음한 내용을 배진호에게 보내주었다.배
“뭐라고요?”진예림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최승준이 카페를 벗어나려고 할 때,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배진호, 온지유, 그리고 경찰들이 들이닥쳤다.진예림의 표정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온 비서님, 저한테 수작 부린 거였어요?”온지유가 입가에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수작이 아니라, 진 비서님 스스로 함정에 빠진 거잖아요.”원래는 최승준과 이채현이 가장 의심되는 사람이었다.하지만 유인작전을 제대로 실행하기도 전에 진예림이 배진호와의 대화를 엿듣고 제 발로 찾아올 줄 몰랐다.그래서 혹시나하는 마음에 가능성을 열어두었고, 진예림을 통해 진짜 범인을 찾아낼 수 있다면 가장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만약 진예림과 상관없는 일이라면 나중에 사과하면 될 일이었다.과연 누가 범인인지는 시도해 보면 되었다.역시나 사람은 욕심 많은 동물이라 꼬리가 밟히기 일쑤였다.그렇게 진예림과 최승준은 경찰에 체포되었고, 녹음까지 된 마당에 진예림은 솔직해져 보기로 했다.“최 대표님이 먼저 저를 찾으셨어요. 시키는 대로만 하면 온 비서님을 회사에서 쫓아내 주겠다고... 그러면 제가 유일한 여비서로 될수 있다면서요... 그래서 최 대표님이 시키는 대로 몇몇 계약서를 위조한 것뿐이에요. 마약밀수는 저랑 상관없는 일이에요. 최 대표님이 몰래 벌인 일이라고요. 저는 그저 대표님의 이쁨을 받는 온 비서님이 싫었을 뿐이에요. 제가 어떻게 다른 짓까지 벌일 수 있겠어요!”아무리 해소해 봐도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최승준은 여이현을 보자마자 펄쩍 뛰기 시작했다.“여이현! 너무 잘난 척하지 마! 옆에 충신이 없었으면 넌 이번에 끝장났어!”퍽!여이현은 바로 최승준을 발로 걷어차고는 어두운 표정으로 다가가 그의 등을 짓밟았다.“최승준, 여진 그룹에 오래 있었으면 내가 어떤 성격인 거 알지?”“아악!”심문실에서 비명이 들리기 시작했다.1분도 안 되어 최승준은 이빨이 다 빠진 채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배진호는 최승준과 진예림이
그리고 엄마가 아프다는 시점도 너무 절묘했다. 설마 아픈 척하는 건가?이럴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배진호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떴다. 반드시 철저히 조사해야 했다.그가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배진호의 어머니는 잠에서 깨어났다.아들의 의심을 불러일으킨 것도 모른 채 여전히 의사와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내 아들 앞에서 꼭 내 병이 심각한 것처럼 말해줘야 해. 안 그러면 걔 마음이 여전히 그 여자한테 기울어 있을 거야.”“걱정 마. 동창끼리 네 계획을 망치기라도 하겠어?”의사는 가슴을 두드리며 장담했다.“내가 다 맡을 테니 신경 쓰지 마. 그런데 사실 나도 부탁이 하나 있는데 우리 아들이 유학을 가야 하는데 돈이 조금 모자라거든. 좀 도와줄 수 있어? 올해 보너스 나오면 바로 갚을게.”정미진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흔쾌히 승낙했다.어차피 그녀는 돈에 쪼들리지 않았으니.배진호가 비서로 일할 때부터 매달 월급 일부를 그녀에게 보내왔고 이후 그가 회사를 차려 독립하면서 더 많은 돈을 보내왔다.그녀는 사고 싶은 것을 마음껏 사면서 이제는 좋은 며느리를 얻는 데만 집착하고 있었다.“돈은 천천히 갚아도 돼. 여유가 생기면 갚아. 동창 사이인데 내가 너를 믿지 않겠어?”그녀의 말에 의사는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병실을 나선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사람이 참 복에 겨워 사는 줄 모르네. 배진호 같은 아들에, 그토록 훌륭한 며느리까지 얻었는데 뭐가 불만이야? 게다가 그 집안의 돈은 몇 대가 써도 부족함이 없는데 굳이 문제를 만들 필요가 있나? 나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거야. 그냥 일도 때려치우고 집에서 술이나 한잔하면서 낚시도 하고 가끔은 카드놀이도 하면서 살겠지. 생각만 해도 얼마나 여유롭겠어?”하지만 그는 정미진이 아니었고 방관자로서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다음 날 아침, 권다솔은 간단히 짐을 챙긴 후 캐리어를 끌고 여행사로 향했다.그곳에는 대형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고 모든 인원이 모이자 운전기사는 공항으로
지금 그의 모습이 헌신짝이랑 다를 게 뭐가 있지?권다솔 때문에 이렇게까지 할 가치가 있을까?배진호는 전혀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그는 여전히 석규리를 등진 채 그녀를 무시했다.석규리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다른 사람의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한 통의 메시지를 보낸 뒤 불과 30분도 채 되지 않아 배진호의 어머니가 직접 나타났다.정미진을 본 순간 배진호는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엄마! 몸도 안 좋으신데, 게다가 이제 막 수술을 끝내셨잖아요. 퇴원하시면 어떡해요?”“내가 와서 다행이지! 아니면 네가 여기서 얼마나 더 멍청하게 서 있었을지 몰라. 진호야, 엄마가 곧 죽게 생겼는데 너 정말 엄마를 좀 편하게 보내줄 수 없는 거니?”정미진은 배진호의 이마를 꾹 눌러가며 안타까워했다.권다솔의 가정환경이 조금이라도 평범했다면 돈으로 해결했을 것이다.하지만 권다솔은 권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정미진이 아무리 손을 뻗어도 권씨 가문까지 닿을 수 없었기에 결국 배진호에게만 압박을 넣을 수밖에 없었다.“엄마가 부탁할게. 죽기 전에 몇 날이라도 좀 조용히 지낼 수 있게 해줘. 더 이상 문제 일으키지 말고 권다솔과 깨끗이 끝내. 네가 꼭 여기에 남아 있겠다면 엄마도 너랑 같이 있을 거야.”정미진은 외투를 벗어 석규리의 손에 건넸다.그녀는 안에 얇은 옷만 입고 있었다.석규리가 옷을 다시 정미진의 어깨에 덮어주려고 했지만 정미진은 단호하게 거절했다.“엄마가 아들 교육을 제대로 못 시킨 탓에 내 아들이 한밤중에 여기서 바람 맞고 있잖아. 나만 병실에서 잘 먹고 편히 있을 수는 없지 않겠어?”“엄마, 정말 제가 무릎이라도 꿇어야 멈추시겠어요?”배진호의 눈에는 이미 생기가 없어진 채 허망한 표정으로 바라봤다.역시나 자신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는 사람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진호야, 엄마는 네가 무릎 꿇으라고 이러는 게 아니야. 엄마가 원하는 건 네가 권다솔과 완전히 끝내는 거야. 이게 엄마의 마지막 소
“있어요! 내일 아침 출발하는 건데, 초원에서 말을 타고 마유주를 마시는 일정이에요. 총 7박 8일이고 모든 비용은 전부 저희가 책임집니다!” 여대생은 너무 기쁜 나머지 말까지 더듬었다.아르바이트 첫날 만에 벌써 계약을 성사시키다니!급여를 받으면 바로 외할머니 치료비에 보탤 수 있었다.“그럼 그걸로 할게요.”어차피 어디든 상관없었다.여기를 떠나기만 하면 됐다. 더 이상 배진호와 남태건을 마주치지 않는 걸로 충분했다.권다솔은 가이드의 연락처를 추가한 뒤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출발지 근처의 호텔에 묵기로 했다.그리고 방으로 돌아온 뒤 부모님께 영상 통화를 걸었다.“저 내일 여행사 패키지로 여행 가려 해요. 다음 주쯤 돌아올게요.”“좋지! 네 나이에는 이곳저곳 다니며 세상을 봐야 해. 만 권의 책을 읽으려면 만 리를 걸어야 한다잖니. 짐은 다 챙겼니?”김영은은 딸이 여행 가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다만 여행길이 불편할까 걱정될 뿐이었다.권다솔은 고개를 저었다. 비록 아무것도 챙기지 못했지만 괜찮았다.“요즘 세상이 얼마나 편한데요. 필요한 건 현지에서 사면 돼요.”“다른 건 밖에서 사도 되지만 침구류는 우리가 보내줄게. 네 피부가 워낙 예민해서 호텔 이불 덮었다가 알레르기라도 나면 어쩌려고.”권용민이 덧붙였다.아무리 좋은 호텔이라도 집의 침구와 비길 순 없었다.그는 아직도 권다솔이 어릴 적 피부 알레르기로 한밤중에 병원에 가서 약을 사고 주사를 맞으며 한바탕 난리를 겪었던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저 지금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요. 굳이 여기까지 오실 필요 없어요. 너무 번거롭잖아요.”권다솔은 부모님이 늦은 시간까지 자신을 위해 고생하는 게 마음에 걸렸다.그러나 딸을 걱정하는 부모의 마음은 그녀의 마음보다 더 깊었다.권용민은 끝내 직접 가겠다고 고집했고 권다솔은 결국 그들을 이기지 못해 승낙했다.전화를 끊고 나서 그녀는 문득 배진호를 떠올렸다.‘지금쯤 석규리와 단둘이 집에서 다정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다만
할머니는 갑자기 진지하게 말했다.“아이고, 보아하니 꽤 오랫동안 여기 서 있었던 것 같은데 여자 친구가 아직도 너를 만나주지 않니? 이 할미가 한 가지 충고를 해주고 싶은데 들어볼 생각 있니?”배진호는 당연히 할머니가 그만 포기하라고 할 줄 알았다.만약 여기 서 있는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면 배진호 역시 같은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건 당사자만 알 수 있는 법이다. 사랑은 보잘것없는 먼지가 아니기에 바람에 날려 사라질 수 없었다.다만 할머니는 전혀 다른 말을 꺼냈다.“나도 젊었을 때 우리 집 할아버지를 엄청 쫓아다녔단다. 그때 할아버지는 나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집안 사람들 또한 나를 못마땅하게 여겼지. 내가 시골 출신이라 배운 게 없다고 말이야. 하지만 그게 어쨌단 말이니? 나는 그저 그 사람 자체가 좋았어. 그렇게 오랫동안 쫓아다녔고 결국 내 사람으로 만들었단다.”할머니는 눈꼬리를 휘어 올리며 말했다.배진호는 본능적으로 물었다.“그러면 두 분이 함께하신 후에도 할아버지 집안 사람들은 여전히 할머니를 예전처럼 대하셨나요?”“그럴 리가 있겠니? 부모는 그저 자식이 좋은 짝을 만나길 바라는 것뿐이야. 일부러 방해하려는 건 아니지. 결혼 후엔 날 친딸처럼 대했단다. 집안의 돈까지 전부 나한테 맡겼으니. 설령 그 집안에서 나를 못마땅하게 여겨도 두려울 게 없었어. 어차피 내가 그들보다 오래 살 텐데.”할머니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당당하게 말했다.“적어도 99살까지는 살 거 같아.”배진호는 할머니의 말에 크게 동요했다.그는 권다솔의 부모님이 인품이 훌륭한 분들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비록 결혼 전에는 반대했지만 결혼 후에는 축복해 줄 사람들이었다. 그의 어머니처럼 계속해서 방해할 분들이 아니었다.그의 어머니 역시 할머니가 말한 것처럼 몸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아서 이미 수술을 한 번 받은 적이 있었다. 지금 강력히 반대한다고 해도 과연 얼마나 갈 수 있을까?결국 병문안 갈 때 적당히 연기하면 되는 것이었다.“할머니,
왜 아침에 눈을 뜨고 나니 권다솔의 태도가 다시 이전처럼 차가워진 걸까?“저를 때리든 욕하든 심지어 문밖에서 밤새 무릎 꿇고 있으라 해도 전 한 마디 불평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다솔 씨, 제발 절 무시하지는 말아줘요.”배진호는 간절히 애원했다.그는 누구에게도 이렇게까지 비굴하게 군 적이 없었다.아무리 까다로운 고객이라도 그는 이런 식으로 자세를 낮춘 적이 없었다. 하지만 유독 권다솔 앞에서는 모든 것을 잃어도 상관없었다. 오직 그녀만은 잃을 수 없었다.권다솔은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었다.그러나 배진호의 목소리에 그녀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발이 마치 바닥에 붙은 것처럼 한 발짝도 떼지 못했다.그녀는 고개를 저을 뿐 차마 뒤돌아볼 수 없었다. 뒤돌아봤다가는 다시는 떠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진호 씨, 우린 이미 끝났어요. 만약 다시 만나더라도 여긴 아니에요.”둘의 마지막은 구청이어야 했다.이혼 절차를 밟고 나서야 비로소 각자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우리가 끝났다고 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잖아요. 다솔 씨 마음속에 제가 없다는 걸 믿을 수 없어요.”배진호는 집착했고 고집스러웠다.권다솔이 그를 뻔뻔하다 욕하든 귀찮다 욕하든 전혀 상관없었다. 사랑하는 여자를 잡을 수만 있다면 무슨 말을 들어도 괜찮았다.“우리가 어떻게 다시 돌아가요? 돌아갈 수 없어요. 아이도 없고... 그리고 며칠 전 술을 마시다가...”권다솔은 사실을 그에게 알리고 싶었다.이미 남태건과 관계를 맺은 사실이 그녀의 마음속 깊이 박힌 가시가 되어버렸다.하지만 정작 입을 열려는 순간 그녀는 망설였다.이혼까지 가는 마당에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게다가 이 사실을 배진호가 알게 되면 그는 분명히 그녀를 경멸할 것이다. 천한 여자라고 생각할 테니.그녀는 한편으로 선을 긋고 싶어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가 자신을 경멸할까 봐 두려웠다.‘사랑’이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었다.“그날 다솔 씨가 취했을 때 저도 같은 술집에 있었어요. 그리고 다솔 씨가...”“그
김영은도 이번 일로 남태건이 막무가내로 느껴졌다.하지만 남태건의 인성에 문제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태건이는 마음이 급해서 그런 걸 거야. 그래서 실수를 하게 되는 거지.”“마음이 급하든 말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쨌든 전 태건 씨랑 결혼할 수 없어요. 그날은 제가 술에 잔뜩 취해서 실수한 거예요. 누군가 제 술잔에 약을 탔거든요. 그래서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이 일어난 것뿐이에요. 전 절대 하룻밤의 실수로 제 평생을 누군가에게 보상으로 주려는 생각은 없어요.”권다솔은 계속 자기 생각을 말했다.아무리 김영은이 설득한다고 해도 그녀는 절대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 생각이 없었다.뛰어드는 건 쉬웠지만 빠져나오는 건 어려웠으니까.더구나 남태건이 이토록 일러바치는 것을 좋아하니 그녀는 더더욱 그와 결혼 할 수 없다. 다 큰 어른이 어린이집 다니는 아이들처럼 유치하게 굴고 있기 때문이다.“다솔아, 네가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우린 그냥 네가 태건이랑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이 꼭 결혼하라는 뜻은 아니었어.”뜻밖에도 김영은은 그녀의 편을 들어주었다.권용민은 옆에서 줄담배를 피우다가 꺼버린 후 김영은의 옆으로 다가왔다.“설령 네가 평생 혼자 산다고 해도 괜찮다. 너 하나쯤은 평생 먹고 살게 해줄 돈은 있으니까. 나랑 네 엄마는 네가 행복한 게 더 중요해. 행복할 방법은 아주 많지. 그중에서 네가 좋아하는 일만 해.”권다솔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눈물이 흘러나왔다.그녀는 이렇게나 좋은 부모님을 만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를 이해해줄 뿐만 아니라 그녀의 편을 들어주니까.동시에 그녀는 두렵기도 했다.만약 이렇게 좋은 부모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정말로 억지로 남태건과 결혼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정말로 그렇게 된다면 그녀는 아마 더는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정말 고마워요, 엄마, 아빠. 역시 저한테는 두 분밖에 없네요.”권다솔은 분명 웃고 있었지만, 눈물은 계속
결혼은 장난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김영은은 딸 대신 함부로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권용민에게 눈짓했다. 권용민은 얼른 차를 따라주었다.“태건아, 아직 차 한잔도 못 마셨지? 얼른 한잔하면서 좀 쉬어.”“아버님, 어머님. 전 진심으로 다솔이랑 결혼하고 싶어요. 저희는 급도 맞잖아요. 다솔이와 결혼하게 해주신다면 평생 잘해줄 거예요. 저희 부모님께서도 다솔이를 딸처럼 예뻐하고 계시는 거 잘 아시잖아요. 그러니까 허락해주세요.”남태건은 찻잔을 받았지만 마시지 않았다.기대하는 얼굴로 권용민과 김영은을 보았다.권용민은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태건아, 난 이 일을 우리가 함부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단다. 결혼 전에 먼저 약혼부터 해야 하잖니. 약혼 전에 상견례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모든 걸 절차대로 마쳐야 결혼을 할 수 있는 거란다. 일단 이 물건들을 가져가. 그리고 다음에 내가 집사람과 함께 찾아가마.”남태건은 그의 말에서 거절의 의미를 눈치챘다.하지만 이미 이렇게까지 말한 이상 그는 더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권다솔을 억지로 끌고 가서 혼인신고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그는 일단 물러설 수밖에 없었지만 이미 가져온 예물과 금붙이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남기고 가려고 했다.“태건아, 네가 우리한테 준 선물은 사양하지 않고 받을게. 하지만 예물은 도로 가져가는 게 좋겠구나.”권용민이 허리를 굽혀 짐을 정리하는 순간 남태건은 이미 현관까지 가버렸다.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권용민은 손에 든 쇼핑백을 내려놓았다.“일단 다솔이한테 연락해서 무슨 일인지 물어봐.”김영은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권다솔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권다솔은 전화를 받기 전 특별히 거울을 보며 차림새와 머리를 정리했다. 그리고 혈색 없는 입술에 립스틱을 바른 후에야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두 사람을 웃는 얼굴로 맞이했다.“아빠, 엄마. 전 혼자 잘 지내고 있어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너랑 태
남태건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그는 권다솔의 손도 제대로 잡아보지 못했기에 당연히 사이즈를 알 리가 없었다.“크기 조절 가능한 팔찌는 없어요?”“있긴 한데요. 디자인이 몇 개뿐이라서요. 인기 많은 제품들은 전부 사이즈가 정해져 있어요.”직원은 그를 힐끗보다가 속으로 중얼거렸다.‘예비 신부한테 관심이 없다고 하기엔 예물을 전부 최고급을 골랐잖아. 그렇다고 해서 또 예비 신부한테 잘해준다고 하기엔 애매해. 어떻게 여자친구 팔목 사이즈도 모를 수가 있는 거지?'‘꼭 결혼까지 앞뒀는데 동거는커녕 손도 한번 못 잡아본 것 같네. 서로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을 것 같네.'“괜찮아요. 그걸로 주세요.”남태건은 제일 무거운 팔찌를 골라 쟁반에 올려두었다.“그리고 이거, 봉황이 있는 금목걸이도 주세요.”남씨 가문에 남아도는 것이 돈이었다. 권다솔의 부모님 앞에서 자신의 성의를 보여주기 위해서라면 얼마가 되었든 상관없었다.그가 가게에서 나왔을 때 직원의 입은 귀에 걸려 있었다. 남태건 덕분에 한 달 업적을 하루 만에 달성했기 때문이다.곧이어 남태건은 권용민이 좋아할 만한 비싼 술과 담배를 산 후 권씨 가문 본가로 운전했다. 쇼핑백을 바리바리 들고 오는 남태건의 모습에 김영은은 어안이 벙벙했다.“태건아, 우리 집으로 오는 게 처음도 아니고 이게 다 뭐니? 그냥 내 집이다 생각하면서 오면 되는 건데 뭘 이렇게 많이 사 왔어?”“아버님, 어머님. 전 오늘 손님으로 찾아온 게 아니에요. 다솔이랑 결혼하고 싶어서 온 거예요. 이건 제가 드리는 선물이에요.”남태건은 자신이 사 온 것을 하나씩 열어 보여주었다.그는 물건만 사 온 것이 아니었다. 한 가방의 현금과 예물까지 준비해왔다.창문으로 비쳐 들어오는 햇볕에 금붙이들은 반짝반짝 빛났다.권용민과 김영은은 서로 마주 보았다. 두 사람은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남태건은 아주 신경 써서 선물을 준비해온 것이 그들의 눈에도 보였다. 정말로 권다솔을 좋아하고 있는 것 같았고 앞으로 두 사람이
“다솔아... 너 정말로 나한테 아무런 감정이 없는 거야?”남태건은 여전히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조금이라도, 단 한 번이라도 나한테 설렌 적 없어?”그는 그동안 아주 많은 노력을 했었다. 할 수 있는 건 전부 했다. 그러나 여전히 권다솔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게다가 우린 함께 밤까지 보냈잖아. 난 정말로 진심으로 널 책임지고 싶어. 그냥 잠만 자고 버리는 나쁜 놈이 되고 싶지 않다고. 다솔아, 다시 한번 생각해줘. 우린 이미 밤까지 보냈다고!”“지금이 어떤 시대인데요. 전 태건 씨를 이해할 수 없네요.”권다솔은 머리가 지끈거렸다.그가 질척이면 질척일수록 그녀의 생각은 점점 더 확고해졌다. 앞으로 친구로도 지낼 수 없겠다고 말이다.그녀는 인내심 있게 마지막으로 말했다.“그날 밤 일은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 더는 제 앞에서 언급하지 말아요. 만약 태건 씨의 말대로 함께 한번 잤다고 해서 무조건 함께 살아야 한다는 거라면, 이미 아이까지 한 번 있었던 저와 진호 씨는 영원히 떨어지지 말고 함께 살아야 하는 거겠네요?”남태건은 주먹을 꽉 쥐었다. 저도 모르게 이도 빠득 달았다.“권다솔, 그딴 말로 날 자극하지 마.”두 사람이 다시 잘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니 남태건은 기분이 불쾌해졌다.권다솔은 말을 이었다.“전 태건 씨를 자극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냥 예시를 들어 알려준 거죠. 그러니까 나가요. 앞으로 더는 찾아와 문도 두드리지 말고요. 방금 같은 일 또 일어나기를 바라지 않으니까.”“다솔아! 네가 나한테 어떻게 매정할 수가 있어! 차 한잔도 내어주지 않고 지금 날 쫓아내는 거야? 적어도 물 한 잔 마시게는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밖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서 있었는데. 나 힘들어 죽겠다고.”남태건은 꼬리를 내렸다.물 한잔쯤 대접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권다솔은 그에게 희망 고문하고 싶지 않았다.그녀가 예의상 했던 행동이 남태건에겐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게다가 이번 한 번 타협한다면 두 번째도 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