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지유도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별다른 선택이 없었다.“네. 기뻐요.”일부러 반대로 말했다.여이현은 그녀의 속내를 훤히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괜찮은 방법이라 하면 변호사를 찾는 거?”온지유는 부정하지도 않고 잠깐의 침묵 끝에 말했다.“대표님, 이제 각자 갈 길 가시죠.”온지유는 변호사 찾으러 가야 했다.여이현은 그런 그녀를 순순히 보낼 수는 없었다.“회사에 해결해야 할 일이 많아.”“그래요.”온지유는 더는 뭐라고 하지 않았다.회사에 도착한 이들은 각자 자기 사무실로 들어갔다.이채현은 온지유를 보자마자 깜짝 놀라면서 말했다.“저는 온 비서님이 안 오는 줄 알았어요.”뒤돌아보니 깔끔하게 정장을 입고 있는 이채현이었다.여이현의 마음에 든 이채현을 직접 뽑은 것도 인수인계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하는 것도 정상이었다.하지만 정작 들으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왠지 모르게 빨리 회사를 그만두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온지유가 진지하게 말했다.“아직은 아니에요.”이채현은 온지유한테 찰싹 붙으면서 말했다.“온 비서님, 언제 그만두는데요?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온지유가 대답하기도 전에 여이현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채현 씨랑 상관없는 일인 것 같은데요?”이채현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분명 여이현이 대표님 사무실로 들어간 것을 확인하고 물어봤는데 결국 그의 귀에 들어갈 줄 몰랐다.이채현은 여이현과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하지만 또 설명을 안 할 수 없었다.“대표님, 별다른 뜻이 없었어요. 오해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그녀는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여이현은 그녀의 설명을 듣고 싶지 않았다.“오늘부로 해고에요.”이채현은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그저 온지유한테서 인수·인계받고 싶어서 물어봤는데 여이현의 심기를 건드릴 줄 몰랐다.이채현은 온지유에게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온지유는 침묵을 지켰다.여이현이 결정한 일은 아무도 설득할 수 없었다.하지만 마
여이현은 고개도 쳐들지 않았다.“호텔에 가서 금강 그룹 책임자를 픽업해. 점심 식사 장소랑 저녁 식사 장소도 알아보고.”“네.”여이현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온지유는 호텔 주소를 받고 바로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문을 열려던 순간, 누군가 팔목을 덥석 잡아 깜짝 놀랐다.뒤이어 이채현이 목소리가 들려왔다.“온 비서님은 저를 직접 뽑아주신 분이시잖아요. 제가 어떤 성격인지 모르세요? 그냥 아무 의미 없이 물어본 거잖아요. 정말 진심으로 배우고 싶었다고요. 대표님한테 다시 말씀해 주시면 안 될까요?”이채현은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주차장에서 기다리면서 온지유든, 배진호든, 여이현이든, 아무나 지나가는 대로 비굴하게 사정해 보기로 했다.하지만 온지유는 동정심 따윈 없었다.“대표님 성격 아시잖아요. 대표님께서 다시 돌아오라고 하시겠어요?”온지유는 이채현 하나 때문에 여이현과 싸우고 싶지 않았다. 더욱이 마음 약한 사람이라고 놀림당하고 싶지도 않았다.여이현의 성격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아무도 그의 용서를 받을 수 없었다.아, 노승아라면 다를 수도 있었다.조금의 희망을 품고 있던 이채현은 온지유의 말을 듣고 그제야 포기하기로 했다.“제가 그런 질문하는 게 뭐가 잘못됐어요? 제가 입사한 날부터 저한테 정확히 말씀해 주셨잖아요. 인수·인계받으려면 언제 그만두시는지 알아야 할 거 아니에요. 온 비서님이 적어주신 노트로는 모르겠어서 그래요. 온 비서님, 설마 제가 자리를 뺏었다고 갑자기 그만두기 싫어진 건 아니죠?”“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온지유는 이채현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인제 와서 보니...이채현이 이렇게 본모습을 드러낼 줄 몰랐다.온지유는 더는 그녀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이 일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대표님이에요. 대표님께서 누구를 남기고 싶으면 남기는 것이고, 누구를 쫓아내고 싶으면 쫓아내는 거예요. 아무도 간섭할 수 없어요. 여기서 이러지 말고 어떻게 하면 더욱 괜찮은 사람으로
강하임은 바로 등을 돌렸다.온지유는 이쪽 상황을 사실대로 여이현에게 알렸다.“저희 쪽에서 자꾸 책임자를 바꿔서 대표님께서 직접 오시라는데요?”온지유는 중점만 말했다.만약 여이현이 이번 비즈니스를 잡고 싶다면 직접 와야 했고 별로 잡고 싶지 않다면 모른 척하면 되었다.온지유는 이 틈을 타 변호사를 알아보러 가면 된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여이현이 바로 이렇게 말할 줄 몰랐다.“그냥 돌아와.”엄숙한 말투를 봐서는 전혀 장난처럼 들리지 않았다.“네.”온지유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다시 사무실로 돌아갔을 때, 여이현은 창가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온지유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다른 거 해야 할 거 있을까요?”여이현이 담배 연기를 뿜어내는 바람에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다.하지만 말은 또박또박 잘 들렸다.“왜 상대방이 보자마자 그런 요구를 한 건데?”의심하는 말투에 온지유가 냉랭하게 대답했다.“저 때문에 이렇게 된 거라고 의심된다면 직접 상대방에게 물어보시든가요.”온지유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지만 사실 속상했다.그래도 몇 년 동안 함께한 정은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여이현은 아무 말 없이 계속 담배만 피울 뿐이다.온지유는 계속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담배 연기는 산모한테도, 태아한테도 해로웠다.“대표님, 별다른 일이 없으면 이만 가보겠습니다.”온지유가 뒤돌아 나가려고 하자 여이현이 말했다.“새로 뽑는 비서 내 마음에 들어야 해.”“네.”온지유는 이 말에 동의했다.하지만 이력서를 아무리 보여줘도 여이현의 마음에 드는 사람은 없었다.온지유가 질문했다.“제가 비즈니스를 망쳤다고 생각하시면 대표님은요?”전에 여이현은 그만두겠으면 괜찮은 사람을 뽑아놓고 가라고 했다. 그런데 어렵게 이채현을 들였더니 꺼지라고 할 줄이야.이력서를 아무리 보여줘봤자 전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일부러 가지 못하게 핑계를 대는 줄 알았다.이력서를 제출한 사람들이 전부 명문대 출신이어도 말이다.여이현이 차갑게 말했다.“전부
깔끔하게 차려입은 한 남자가 컴퓨터 앞에 앉아서 물었다.“여사님, 동사무소에 가서 이미 예약하셨으면 기다리시면 되잖아요. 상대 배우자가 이혼할 의향이 없으시면 절차대로 진행할 수밖에 없습니다.”온지유가 진지하게 말했다.“저는 최대한 빨리 이혼하고 싶은데 얼마를 드리면 가능할까요?”2개월까지 기다리지 못하는 온지유는 마음이 급했다.변호사가 온지유의 반응을 보더니 말했다.“한쪽만 급해하시는 걸 보니 상대방은 이혼을 원하지 않는가 봐요. 아니면 외도라도 하셨나요?”온지유가 부정했다.“저는 외도한 적 없습니다. 처음부터 계약 결혼이었고 상대방은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억지로 결혼 사실을 숨기는 것도 힘들고 아무런 감정 없는 결혼생활을 유지하기도 지겹네요. 아이도 없고 재산분할도 필요 없습니다. 저는 그저 최대한 빨리 새로운 시작을 하고 싶을 뿐이에요.”결혼 사실을 숨기고 있다는 말에 변호사는 그제야 관심을 가졌다.재벌가만이 이런 행동을 하기 때문에 어쩌면 큰돈을 뜯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변호사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먼저 저희 비서님이랑 이혼 소송서류를 작성하도록 할게요.”“네.”온지유가 고개를 끄덕였다.몇 분도 안 지나 온지유는 이혼 소송서류를 들고 다시 찾아왔다.“나 변호사님.”비서님한테서 변호사 성씨가 나 씨라는 것을 들었다.나 변호사는 이혼소송 서류에 적혀 있는 피고인 여이현의 이름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아무리 봐도 상대는 여이현이 맞았다. 온지유가 말했던 결혼 계약서도 그가 직접 여이현에게 작성해 준 것이다.그가 말이 없자 온지유가 미간을 찌푸리면서 물었다.“이혼소송 서류에 무슨 문제라도 있을까요?”“아니요. 일단 돌아가 주시면 제가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그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온지유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감사합니다. 나 변호사님.”온지유가 떠나고, 나도현은 바로 여이현에게 전화했다.여이현이 전화 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때, 전화기 너머에서 여이현의 차
온지유는 인사팀으로 찾아가 이력서를 확인했다.괜찮은 사람들로 여이현에게 보여줬지만 아무런 답장도 없었다.이 많고 많은 후보 중에 여이현의 마음에 드는 사람은 없었다.결국 일부러 자신을 난처하게 하는 거라고, 보내주기 싫은 거라고 확신하게 되었다.온지유는 갑자기 밀려오는 피곤함에 한 시간만 더 있다가 퇴근하기로 했다.만약 여이현이 여전히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상관하지 않으려고 했다.무더운 날씨에 밖에 나가서 음료수를 사고 돌아오는 길, 갑자기 어지러운 느낌에 더는 걸을 수가 없었다.결국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온지유.”이때 웬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뒤돌아보았을 때, 그레이색 정장을 입은 나민우가 허리를 숙이고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온지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나민우는 다시 허리를 세워 한쪽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민우야.”나민우가 웃으면서 말했다.“그래. 나야.”“웬일이야?”요즘 따라 자주 만나는 것 같았다.“현지 시찰하러 왔다가 주차하면서 마침 너를 봤어.”온지유는 멀지 않은 곳에 세워져 있는 블랙 벤틀리 차량을 발견했다.“너는 왜 여기 혼자 있어?”온지유는 다시 시선을 돌려 나민우를 쳐다보면서 말했다.“이력서를 확인하다가 음료수 사러 나왔지.”“이력서?”나민우는 이해가 안 되는지 미간을 찌푸렸다.“네가 직접 이력서를 보고 사람을 뽑아야 해?”나민우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온지유의 옆에 앉았다.온지유가 잠깐 침묵하더니 말했다.“인수인계할 사람을 찾아야지.”“퇴사하려고?”나민우는 굳이 묻지 않아도 바로 눈치챘다.온지유도 별로 숨길 생각이 없었다.“응.”분위기는 다시 고요해지기 시작했다.나민우는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멈칫하더니 물었다.“안색이 안 좋네. 여 대표님이랑 사이가 안 좋아?”갑작스러운 질문에 온지유는 깜짝 놀라면서 고개를 쳐들었다.비밀로 결혼한 사실을 별로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민우한테 말하지도 않았는데 나랑 이현 씨가 단순히 직장
온지유가 그의 말에 찬성했다.“맞아.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거야. 믿어 의심치 않아.”나민우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온지유는 이미 확고하게 마음을 먹은 것 같았다.나민우는 생각에 빠지게 되었다.‘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좋아했는데. 정말 헤어지기로 결심한 건가?’그해, 온지유가 걱정되어 찾아간 적이 있었다.그때는 온지유가 아직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어 나무 뒤에서 몰래 지켜보았다.괜찮다는 것을 확인해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그러다 온지유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여이현을 쳐다보면서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그때까지만 해도 여이현같은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여이현은 잘생기고 공부까지 잘해서 쫓아다니는 여학생들이 많았다.하지만 나민우는 그때 뚱뚱해서 온지유의 앞에 나타날 용기가 없었다.그렇게 그는 오랫동안 좋아한 온지유를 우두커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그저 그녀가 행복했으면 했다.“온지유, 날 봐봐.”나민우의 익살스러운 표정에 온지유는 멈칫하고 말았다.나민우는 이런 반응에 그만 뻘쭘해졌다.“왜, 안 웃겨?”온지유는 평소에 진지하기만 하던 사람이 이런 표정을 지을 줄 몰랐다.익살스러운 표정을 한 것보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하는 표정이 더욱 웃겼다.온지유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왜 갑자기 이러는 거야?”나민우가 말했다.“난 네가 기분이 좋아졌으면 해서.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너의 기분을 풀어줄수 있을지 몰라서...”온지유는 늘 자신의 기분을 헤아려 주는 나민우의 모습에 감동하고 말았다.이렇게 정서가 안정적이고 다정한 사람은 온지유의 남자친구로서 딱이었다.그런데 이미 결혼도 했고, 아이까지 있는 그녀에게는 과분한 사람이었다.“덕분에 기분이 좋아졌어.”온지유가 웃으면서 말했다.“네가 웃었으면 됐어.”그런데 마침 여이현이 이 모습을 보게 되었다.온지유와 나민우는 마치 풋풋한 연인 사이처럼 보였다.여이현은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눈빛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변호사 찾으러 간
업무를 처리하고 있던 여이현은 고개 들어 그녀를 차갑게 쳐다보고는 자료를 건네받았다.의외로 자세히 자료를 확인해 보는 것이다.온지유가 긴장한 마음으로 말했다.“다 괜찮으신 분입니다. 이 중에서 뽑으시면 될 것 같습니다.”여이현은 그중에 괜찮은 이력서를 한쪽에 내려놓더니 말했다.“이 사람 내일 면접 보러 오라고 해.”의외로 명쾌한 대답에 온지유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네. 지금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여이현이 또 말했다.“별일 없으면 이만 가봐.”온지유는 차가운 그의 표정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나가라고 했으니 나갈 수밖에 없었다.이때 배진호가 성큼성큼 걸어들어왔다.“대표님, 성동 공사 현장에 사고가 발생했습니다.”여이현은 미간을 찌푸린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배진호와 함께 그쪽으로 향했다.긴박한 상황에 온지유도 뒤따라 나서려고 했다.그런데 여이현은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온지유를 힐끔 보더니 진예림에게 말했다.“진 비서도 함께 가시죠. 온 비서는 안 가셔도 됩니다.”온지유는 물론 진예림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여이현의 눈빛과 마주친 진예림은 그에게 잘 보일 기회가 생겨 냉큼 자리에서 일어났다.“네! 대표님.”진예림은 여이현과 배진호를 따라 엘리베이터로 향했다.온지유는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밖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성동 공사 현장에서 사람이 죽었다며. 사실이라면 대표님 감옥에 가야 할지도 몰라!”온지유는 어두운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뉴스를 확인해 보니 역시나 모든 화살은 여이현을 향해 있었다.온지유는 바로 뛰쳐나갔다.--성동 공사 현장 사망 인원은 한 명이 아닌 세 명이었다.건물이 무너지는 바람에 경찰은 물론 각 매체도 출동했다.여이현이 공사 현장에 도착한 순간, 기자들이 밀려와 인터뷰를 시도했다.“여 대표님, 이번 사건은 어떻게 해결하실 생각이십니까?”“여 대표님, 세 명이나 사망했는데 부실 공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기자들, 공
“그러게. 여 대표님이 이대로 망하면 돈 뜯어낼 곳이 없어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 아니야?”...결국 모든 화살이 온지유를 향하게 되었다.사람들은 미친듯이 온지유에게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옆에서 지켜보던 진예림은 속으로 깨 고소했다.‘그냥 때려. 정신을 못 차리게.’여이현은 결국 참지 못하고 경찰을 뿌리치려다 온지유를 보호해 주는 경찰과 배진호를 보고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경찰서로 향했다.“중점적으로 최승준과 이채현을 조사해 보세요.”주주총회에서 비난받았던 최승준, 최근까지 여이현의 곁을 따라다녔던 이채현, 이 두사람이 바로 가장 큰 용의자였다.하지만 사건조사가 그렇게 빨리 끝날 일은 아니었다.온지유는 다시 회사로 돌아갔고, 배진호는 나도현에게 연락하여 함께 경찰서로 향했다.여이현은 나도현을 보자마자 말했다.“내가 이혼소송을 알고 있는 거 비밀로 해.”나도현은 어이가 없었다.“여이현, 지금 사람이 죽었다고. 회사 대표인 네가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내지 못하면 몇 년형을 받게 되는지 알아?”‘지금이 어느 때인데 아직도 이혼소송을 신경 쓰고 있어!’여이현이 차갑게 말했다.“나랑 무슨 상관이야. 난 범인도 아닌데.”나도현이 그를 힘껏 째려보았다.“지금 옆에 나랑 진호 씨가 있다고 안심하는 거야?”나도현은 비록 투덜거리긴 했지만 그래도 여이현을 많이 신경 쓰고 있었다.이 시각, 최승준은 이미 다시 주주총회를 열어 대표를 다시 뽑아야 한다고 말했다.온지유는 이 사람들을 냉랭하게 쳐다보면서 말했다.“다들 여진 그룹에 오래 계셨던 분이잖아요. 만약 대표님께서 정말 잘못한 부분이 있었다면 하필 이 타이밍에 잡히지 않았겠죠.”“범인이 아니라고 해도 아직 용의자잖아요. 대표 자리를 이렇게 비워두고 있으면 어떡해요. 계속 기다릴 수는 없잖아요.”최승준은 바로 반박에 나섰다.온지유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최 대표님. 여 대표님이 구속되었어도 아직 저랑 배 비서님이 여 대표님의 뜻을 전달해 드릴 수 있습니다.”온
양시은은 돈을 내고 택시에서 내렸다.“기사님, 저 여기서 내릴게요. 감사합니다.”택시에서 내린 그녀는 얼른 검은색 차로 달려갔다.나도현은 창밖에서 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고 그곳에는 양시은이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창문을 열자 양시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나도현, 문 열어줘.”나도현의 눈빛이 흔들리고 손을 뻗더니 문이 열렸다. 양시은은 얼른 차에 올라탔다.“왜 말 한마디도 없이 혼자 여기 온 건데? 하민이 하원 시간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잖아.”“그냥 오고 싶었어.”“비서님한테 이미 들었어.”나도현은 입술을 달싹이더니 아주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어. 누가 사주한 것인지.”그가 변호사 되기를 반대하고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나용민 뿐이었고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몰랐다.나용민은 나도현에게 아주 큰 기대를 하고 있었기에 나도현이 그저 평범한 변호사가 되는 것을 반대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 아들이 자신처럼 나진 그룹을 이끄는 사람이 되길 바랐다.“병문안 갈까 고려하고 있었으니 가기도 전에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치시네.”“미안해. 다 내 탓이야...”양시은은 그런 그가 안쓰러우면서도 죄책감이 들었다.“만약 내가 설득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이런 기분을 느낄 일은 없었을 거야.”“네 잘못은 아니야. 내 잘못이지.”나도현은 담담하게 말했다. 애초에 조금이나마 기대한 그의 잘못이었다.양시은은 나도현의 냉담한 어투로 기쁨을 느낄 리가 없었고 그가 냉담하면 할수록 더 안쓰러웠다. 그동안 그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을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말이다.만약 그녀가 나도현이었어도 자신의 아버지가 꿈을 방해한다면 숨이 턱턱 막힐 것이었다.“괜찮아. 내가 있잖아.”양시은은 그를 조심스럽게 안아주었다. 그날 밤처럼 자신의 따듯한 체온으로 차가워진 그의 마음을 녹여주려 했다.나도현은 그런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기사님, 병원으로 가주세요.”나도현의 입에선 뜻밖의 말이 나와 양시은은 멍한 눈빛으로 그
대체 누가 나도현의 심기를 건드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싸늘해진 분위기부터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고 양시은도 협조적이었다.점차 그들의 분위기도 바뀌면서 룸 안은 열기로 가득해졌다. 이때 누군가 무심코 물었다.“양 비서님, 나중에 결혼 계획 있으세요?”나도현은 차가운 눈길로 입을 연 사람을 보았고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비서는 더 긴장하게 되었다.다행히 양시은은 대충 둘러 말했다.“마음이 맞는 사람이 있으면 아마 할 것 같네요. 하지만 아직은 결혼 계획은 없네요.”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그들은 배불리 먹고 즐긴 후 돌아갔다.많은 사람들이 술을 마셨던지라 해롱해롱한 상태였고 비서는 그들을 집으로 전부 돌려보랬다. 물론 양시은도 술을 마셨지만 두 잔만 마셨던지라 그저 얼굴만 불그스레한 상태였다.“양 비서님은 혼자 돌아갈 수 있죠? 혼자 갈 수 있으면 전 이만 먼저 가볼게요.”비서는 술에 취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직원을 등에 업고 있었고 그 직원은 비서의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그런 그의 모습을 보니 양시은은 괜스레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의 부담을 덜어주고 싶었다.“네. 전 혼자 갈 수 있어요.”“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비서는 얼른 자리를 떠나버렸다. 양시은이 위험할지 안 할지는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나도현이 곁에 있는 한 양시은이 절대 위험할 리가 없었으니까.직원들이 떠나고 나니 두 사람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나도현은 자연스럽게 양시은의 가방을 들어주며 말했다.“데려다줄게. 가자.”양시은은 자신의 가방을 돌려받고 싶었지만 그의 모습을 보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차피 돌려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으니까.뒷좌석에 앉은 양시은은 뒤늦은 취기에 머리가 어질거렸다. 나도현은 한참 지나도 들리지 않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양시은은 손을 들어 턱을 괸 채 눈을 감고 있었고 잠든 것 같았다.“대표님, 차가 좀 막힐 것 같습니다.”운전기사가 눈치 없이 말하자 나도현은 바로 눈치를 주었다.“목소리를 낮추세요. 길 막히면 다른
양시은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말을 해야 했다. 그들은 서로 남의 돈으로 회식을 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으니 말이다.“할 말이라도 있는 거야?”나도현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양시은은 그가 이렇듯 빨리 눈치챌 줄 몰랐던지라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할 말이 있긴 해. 사실 직원들이 회식하고 싶어 해.”그녀는 빠르게 할 말을 꺼냈고 조용히 나도현의 반응을 기다렸다. 하지만 남자는 눈썹을 꿈틀거리기만 할 뿐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그것뿐이야?”이내 그는 빠르게 회식을 허락해 주었다. 양시은이 나도현의 말을 직원들에게 전해주자 직원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세상에. 대표님이 회식을 허락하셨다고요...”“전 회식 허락 안 해줄 줄 알았어요. 평소에도 일만 하시는 분이잖아요. 매일 회사로 출근한 뒤에 쉬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는데 이렇게 쉽게 허락해 주시다니.”비서들은 서로 믿기지 않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나도현이 이렇듯 쉽게 허락해 줄 줄 몰랐기 때문이다. 어쩌면 양시은이 말을 꺼내서 허락해 준 것일 수도 있었다.그렇게 회식은 오성급 호텔에서 하게 되었고 직원들은 아주 흥분하고 있었다. 나도현은 양시은에게 찾아와 꾸미고 가지 않겠냐며 물었다. 그러자 양시은은 의아한 듯 되물었다.“왜 꾸미고 가야 하는데?”나도현은 그녀를 위아래 훑어보았다. 사실 양시은의 옷차림은 아주 정상적이었고 흔한 직장인의 모습이었다.“이렇게 입고 가기엔 조금 대충 입은 것 같아서. 어쨌든 첫 회식이잖아.”그 말을 들은 양시은은 기분이 이상했지만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첫 회식이니 대충 입고 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럼 뭘 입고 가?”양시은은 자신의 옷장을 열어보곤 훑어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입고 갈만한 예쁜 옷이 없었다.나도현은 그런 그녀를 위해 미리 준비해둔 쇼핑백을 꺼냈다. 보아하니 전부터 사둔 것인 것 같았다.“이걸 입어. 며칠 전에 맞춤제작 한 거야.”양시은은 쇼핑백에 있는 로고를 보았다. 그것은 무난한 옷을 만
사실 양시은의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나도현이 알아서 결정할 것이라고.다만 지금 중요한 것은 나진 그룹이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닌 나용민의 건강 상태였다.양시은은 다시 나도현의 안색을 살폈다. 비록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긴 했지만 정신은 다른 곳에 팔려있는 것 같았다.“사실 아까 낮에 네 아버지가 입원하셨다고 들었어.”나도현은 멈칫했다.“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난 그냥 네가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말한 거야. 네 아버지니까.”양시은이 말을 마친 후에도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행여나 그가 화가 난 것은 아닐까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폈지만 화가 난 모습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그녀의 예상이 맞았던 것 같았다...순간 긴장이 풀린 그녀는 나도현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는 늘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마음은 아주 여린 사람이었으니까. 그가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슬픔은 모두 마음속에 꾹꾹 눌러 담아 속으로 끙끙 앓고 있을 뿐이다.“걱정되는 거라면 병문안이라도 가보는 건 어때. 물론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돼. 난 그냥 그러면 더 좋을 것 같다고 제안을 하는 것뿐이야.”양시은은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듯한 부드러운 어투로 말했다. 그녀는 아버지를 여의었기에 그 마음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있을 때 잘해야 후회가 없는 법이니 아직 살아 있을 때 주변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해 잘하는 것이 좋았다.나도현의 찌푸려진 미간이 점점 풀리고 나중에는 생각해 보겠다고 대답했다.양시은은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 이미 생각해 보겠다는 대답이 나온 것으로 만족하고 있었으니까....오성 구역에서 벌어진 장이정 일가의 사건을 돌파구로 나도현은 바로 뚝심을 지키던 단골들을 찾아가 천천히 설득한 덕에 점차 진전이 보이기 시작했다.보름 정도 지나자 유진혁이 나오게 되었고 그들은 더는 유진혁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와 계약했던 사람들도 계약 해지를 요구했고 그와 더는 계약하지 않겠다며 돌아섰다.
박은희는 예전에 자신이 양시은에게 했던 만행 탓에 고개를 숙이는 수밖에 없었고 본인도 자신이 그간 얼마나 심하게 대했는지 알고 있었다.양시은은 손을 들어 그녀의 잔에 물을 따라주었다.“사모님, 말씀하셔도 돼요.”박은희는 그녀를 보더니 멍한 얼굴로 물잔을 받은 후 한참 머뭇거리다가 말했다.“그동안 내가 한 일들은 사과하마. 그래서는 안 됐었는데. 나도 내가 얼마나 악랄했는지 알고 있단다. 나조차도 견디기 힘들었을 거야.”“사모님,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시은 씨, 나 대신 도현이 좀 설득해줘.”박은희는 심호흡하곤 이틀간 있었던 일들을 말해주었다. 나도현이 집을 나간 뒤 두 사람 사이엔 단 한 마디의 대화도 오가지 않았고 나진 그룹에 있던 나용민의 사람들마저 전부 해고했다고 한다.“도현이 아빠가 지금 화가 많이 난 상태야. 원래부터 몸도 안 좋았는데 혈압이 올라가면서 결국 입원하게 되었어. 지금도 병원에 누워 있어.”박은희는 한숨을 내쉬었고 양시은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나용민이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병원에 입원했다는 사실이 너무도 놀라웠기 때문이다.“그럼 지금은 괜찮으신 거예요?”“지금은 괜찮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도현이가 한번은 만나줬으면 해서 그래.”박은희는 뜸을 들이다가 그녀를 보며 말을 이었다.사실 양시은은 그녀의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싸웠으니 난처한 사람은 중간에 낀 박은희였다. 남편의 편을 들기도, 아들의 편을 들기도 난감했고 두 사람이 싸우는 모습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다만...“죄송해요. 사모님. 다른 건 도와드릴 수 있어도 이건 도와드리지 못할 것 같아요. 이건 도현이의 선택에 달린 문제니까요.”양시은은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입장을 바꿔서 만약 그녀가 나용민의 자식이었다면 나용민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아무리 생각해도 양시은은 그 답을 얻지 못했기에 나도현을 도와줄 수 없었고 그가 스스로 그 답을 찾아야 했다.박은희는 조금 실망한 기색이었지만 이미 예상하고 왔던지라 현
문해미는 고개를 끄덕였고 도우미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꼭 어린아이를 달래는 기분이었다.도우미가 주방으로 들어갔을 때 문해미는 다소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어 양시은이 말했다.“괜찮아요. 이틀 뒤에 다시 오실 거예요.”문해미는 그녀의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고개를 푹 숙인 채 음식을 먹는 것에만 집중했다. 비록 정신 연령은 다섯 살 어린아이와 같다고 하지만 문해미의 행동은 여전히 어른과 같은 것을 보아 아마 몸이 기억하는 것 같았다.양시은은 자신의 어머니가 음식을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이때 초인종이 울리고 문해미에게 간단히 말을 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주었다. 현관문이 열리는 순간 그녀는 당황하고 말았다. 하지만 하민이는 그런 그녀의 기색을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박은희의 품에서 해맑게 그녀와 인사했다.“엄마, 하민이가 너무 보고 싶었어요.”양시은이 박은희에게 시선을 돌리자 박은희가 설명했다.“하민이가 자꾸 네가 보고 싶다고 그러더구나. 집에서도 하루 종일 즐겁게 보내지 못하는 것 같아서 데리고 온 거란다.”양시은은 어찌할 바를 몰라 멍하니 현관에 서 있었다. 박은희는 그런 그녀의 상태를 눈치챘지만 하민이는 너무 기쁜 나머지 그대로 양시은의 품으로 달려들었고 이내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다.그렇게 하민이는 문해미와 만나게 된 것이다.박은희는 밥그릇을 들고 있는 문해미를 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양시은을 보았다. 두 사람이 닮았다는 것을 보아냈지만 대놓고 물어볼 수 없었고 아직 어렸던 하민이는 본 대로 말했다.“엄마, 이 아주머니는 누구예요?”천진난만한 아이의 모습을 보니 양시은은 순간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줄곧 하민이에게 숨기며 살았으니까. 하민이의 아빠든 할머니든 전부 숨기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외할머니의 존재도 숨기고 있어 아무것도 몰랐다.그렇게 생각한 양시은은 가슴이 아파졌고 죄책감에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심호흡한 뒤 그녀는 아이에게 알려주기로 마음먹었다.“하민아, 이 아주
양시은은 처음부터 끝까지 문해미의 곁에 있어 주었고 검사 결과를 들고 온 의사는 안경을 추켜올렸다. 그의 표정은 아주 복잡해 보였다.“아마 어떤 약물 때문에 뇌에 심한 손상을 준 것 같네요. 환자가 대체 무슨 일을 겪은 거죠?”양시은은 불안한 듯 손가락을 꾹꾹 누르며 말했다.“엄마는 아주 오래전에 실종되었어요. 그래서 저도 잘 몰라요...”진실을 말하는 것 같은 모습에 의사는 그제야 의심을 거두었다.“아마 사라졌던 그동안 누군가에게 약물을 투여받은 것 같군요.”“그럼 저희 엄마는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인가요?”의사의 말에 양시은은 목구멍이 막히는 것 같았다. 문해미가 평생 이런 모습으로 사는 모습을 상상하기조차도 싫었다...의사는 잔뜩 긴장한 그녀의 모습에 누그러진 어투로 말했다.“걱정하실 건 없어요. 정성스럽게 보살피면 회복할 가능성이 있으니까요.”양시은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의사가 해준 말은 인명진이 해준 말과 같았다. 설령 그녀가 평생 문해미를 보살피면서 산다고 해도 아마 매 순간 문해미의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질 것이다.여하간에 아무도 자신의 어머니가 정신을 놓고 사는 모습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문해미는 하민이의 외할머니였고 아직 어린 하민이에겐 문해미의 모습은 충격일 것이다.그렇게 생각한 양시은은 다시 기장해졌다. 어젯밤 일부러 하민이를 피하며 박은희에게 보냈다.다행히 주말이었던지라 그녀는 걱정할 것이 없었고 하민이는 주말 내내 나씨 가문에 머물고 있었다. 하지만 주말이 지나면?평생 외할머니와 만나지 못하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병원에서 나온 양시은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고 혼자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 하며 끙끙대고 있었다.나도현은 그런 그녀를 힐끗 보더니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양시은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나도현을 보았다.“하민이는 착한 아이니까 네가 잘 얘기해주면 이해할 거야.”“응.”양시은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 나도현의 말처럼 하민이는 어른스러운 아이였고 어쩌면 그녀가 쓸
“나도 엄마가 왜 그곳에 있었는지 몰라. 내가 발견했을 때 잘 지내지 못한 것 같았어. 누더기를 입은 채 구석에서 쓰레기를 뒤적거리고 있더라고.”말을 꺼내는 양시은의 목소리엔 떨림이 가득했다. 나도현은 그런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익숙한 온기에 양시은은 점차 진정되기 시작했고 두 사람은 거실로 돌아와 소파에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그해 아주머니가 실종되었을 때부터 어딘가 이상했어. 하지만 아직 상태도 안 좋으신 것 같으니까 내일 인명진 씨를 불러 봐달라고 하자.”“나도 그렇게 생각했어.”양시은은 문해미가 있는 방을 힐끗 보았다. 나도현은 그런 그녀의 손을 잡아주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녀를 달래주려고 했다.“괜찮을 거야. 아주머니를 찾은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기쁜 일이잖아.”양시은은 그의 위로에 고개를 끄덕였다.다음 날 오후, 인명진은 집으로 방문해 진찰해달라는 나도현의 부탁이 담긴 연락을 받게 되었다.비록 그는 정신과 의사가 아니었지만 난치병에 관해서는 계속 이런저런 연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해미를 보게 되었을 때 그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그런 그의 모습을 본 양시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우리 엄마는 어떤 상태인 거예요?”“상태가 아주 나빠요. 거의 한계에 달했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뇌 신경 쪽에 일정한 정도의 손상을 입은 것 같아요. 비록 추측이긴 하지만 80, 90% 확신하고 있어요.”인명진이 솔직하게 말해주자 옆에 있던 테이블이 흔들렸다. 나도현은 얼른 양시은은 부축해주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양시은은 이미 테이블과 함께 중심을 잃고 쓰러졌을 테니까.“어떻게 그럴 수가...”그녀는 넋을 잃은 표정을 지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눈물이 주체하지 못하고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분명 애타게 찾던 문해미를 찾았건마는, 겨우 어머니와 만나게 되었건마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응당 기뻐하고 좋아해야 할 순간에 자신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양시은은 행여나 그 사람이 사라지게 될까 봐 얼른 달려갔다.“엄마, 여기는 왜 여기에 계시는 거예요?”그녀는 노인을 붙잡으며 눈에 눈물을 머금은 채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상대가 자신을 반겨줄 거라고 생각했지만 상대는 그녀를 엄청 두려워하고 있었다.“때리지 마세요. 바로 자리를 옮길 거니까 때리지 말아 주세요.”“엄마, 제가 엄마를 왜 때려요. 저 시은이잖아요. 엄마 딸 양시은.”“전 그쪽을 몰라요...”양시은은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을 모른다니... 어떻게 그럴 리가 있겠는가. 그녀는 절대 사람을 착각했을 리가 없었고 눈앞에 있는 사람은 분명 그녀의 어머니였다.속이 뒤집힐 것 같았지만 자신을 너무도 두려워하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최대한 다정하고 온화한 어투로 말했다.“전 엄마를 해치지 않아요. 그러니까 다시 한번 제 얼굴 봐주세요.”그 말을 들은 뒤 한참 지나서야 상대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사실 세월의 흔적이 많은 얼굴은 아니었다. 다만 몸에 맞지 않는 남루한 옷 탓에 행색이 더러워 보였을 뿐이었다. 양시은은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그녀의 어머니는 아주 오래전에 실종되었다. 줄곧 찾아다녔지만 아무런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고 죽기 전까지 어머니를 다시 만날 수 없을 것 같았지만 이곳에서 어머니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처음에는 엄청난 기쁨을 느꼈지만 어머니의 행색과 상태를 보니 너무도 가슴이 아팠다. 대체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상대는 양시은을 멍하니 보았다. 어딘가 익숙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양시은, 시은아... 시은이니?”“네, 엄마. 저 시은이에요.”양시은은 감격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택시를 잡자 기사는 옷차림이 초라한 그녀의 어머니 문해미를 대놓고 싫어하는 티를 냈다.“아가씨, 대체 어디서 이런 쓰레기를 주워온 거예요? 이런 쓰레기는 내 차에 태울 수 없어요.”“왜 태울 수 없는 건데요. 이미 제 돈을 받으셨잖아요. 그런데 이제 와서 태울 수 없다고요?”양시은은 차가운 눈빛으로 운전기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