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현관으로 들어오자마자 그들은 소파에 앉아 있는 여진숙을 발견했다.여진숙의 안색이 어두웠다.“인터넷을 그렇게 떠들썩하게 만들어 놓고는 둘은 아주 한가로워 보이는구나.”고씨 집안에서 연 파티에서 여이현은 온지유를 위해 나서준 것이 아직도 실시간 인기 검색에 올라와 있었다.여이현은 온지유에게 눈빛을 보냈다.바로 알아챈 온지유는 여진숙을 양해 인사했다.“어머님, 아침 준비해놓았는데 혹시 아직 식사 전이라면 도우미 아주머니한테 어머님 몫도 준비해 달라고 할까요?”별장에 도우미한테 말하면 바로 준비해놓을 수 있었다.게다가 눈치 빠른 도우미는 그녀가 말하기도 전에 바로 주방으로 들어갔다.그러나 여진숙은 온지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여이현! 내가 지금 너한테 말을 하고 있잖니!”여이현이 담담하게 말했다.“저랑 지유 결혼했다는 사실은 언젠가 밝혀질 거였는데 뭘 그렇게 화를 내세요.”수많은 사람과 수많은 입을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여진숙은 아니었다. 그녀는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듣자 하니 네 고모가 너희들한테 가면무도회에 초대했다지?”여이현은 여전히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뭐가 문제가 있는 건가요?”“그런 쓸데없는 무도회나 파티에 적당히 참석해. 네 아빠가 곧 돌아오실 거다. 괜히 네 아빠 심기 건드리지 말고 얌전히 있어.”“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여이현은 여진숙의 말에도 별다른 감정 기복이 없었다. 온지유의 눈에는 꼭 아무래도 상관없는 태도로 보였다.하지만 두 사람은 원래부터 이런 방식으로 대화를 나누었다.그녀에겐 애초에 끼어들 자리가 없었기에 지금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여진숙은 여전히 분노를 다스리고 있었다.“지난번에 승아가 나한테 선물을 줬으니 이번에는 내가 줄 차례구나.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했으니 네가 이 선물을 승아한테 가져다주거라. 난 감기 걸려서 못 갈 것 같구나.”온지유가 옆에 있음에도 여진숙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그녀의 시어머니는 그녀가 있는 앞에서 대놓고 다른
여이현은 그녀와 말다툼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물건은 지유가 대신 가져다준다고 했으니 혹시 다른 일이 있으면 그냥 저한테 전화로 말씀하세요.”그 뜻은 쓸데없이 찾아오지 말라는 의미였다.여이현은 여진숙을 이렇듯 귀찮아하고 있었다.‘보아하니 승아를 더 팍팍 밀어줘야겠어!!'여진숙도 여이현과 말다툼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난 여씨 집안의 안주인이야. 네 아빠의 아내라고.”여이현은 그녀를 무시한 채 나가버렸다....온지유는 먼저 자양제를 들고 병원에 있는 노승아를 찾아갔다.병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노승아는 당연히 여이현인 줄 알고 기대했다.그러나 온지유를 본 순간 노승아의 얼굴에선 웃음기가 사라지고 싸늘하게 굳어버렸다.“왜 그쪽이 온 거죠?”온지유가 담담하게 말했다.“제 어머님께서 몸이 안 좋으시다고 하셔서요. 저더러 대신 전해달라고 했어요.”말을 하면서 온지유는 노승아의 곁으로 다가가 자양제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온지유는 자양제를 선물해주자마자 몸을 틀어 나가려 했다.노승아가 그녀를 불렀다.“온지유 씨, 이왕 온 김에 조금이라도 앉아 있다가 가지 그래요?”온지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전 노승아 씨랑 친한 사이가 아니라서요.”그녀는 그저 여진숙의 요구를 거절할 수가 없어서, 여진숙과 여이현이 다투는 걸 구경하고 싶지 않아서 온 것이었다.하지만 병원에 온 김에 그녀는 새로 진료 접수했다.아침이어도 병원엔 사람이 꽤나 있었다.그녀의 앞으로 세 명이나 대기하고 있었다.차례가 되자 의사는 그녀에게 증상을 물어보곤 초음파실로 가라고 했다.초음파 검사를 위해 그녀는 두 병의 생수를 마신 뒤 침대에 누워 검사했다.초음파 젤리를 배에 바르고 나니 차가운 기분이 들었다.온지유는 천장을 멍하니 보았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심장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올 것 같았다.그녀도 자신이 왜 이토록 긴장했는지 모른다.초음파 검사 해주던 의사는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먼저 물었다.“임신이 처음인가요?”“네...”온지유의 목소리
익숙한 목소리에 온지유는 그대로 얼어버렸다.그녀는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사람은 대학 동기였던 도세원이었다.도세원을 기억하고 있었다.3개월 전, 여진 그룹 기술팀 면접도 그녀가 직접 도세원을 평가했다. 그녀와 대학 동기인 것 제외하곤 도세원은 면접을 아주 잘 보았고 이력서의 스펙도 완벽했다.온지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런 우연이 다 있네.”아이를 낳기로 했던지라 그녀는 괜히 찔리는 기분이 들었다.“오늘 휴가라서 병원에 와서 검진 좀 받으려다가 널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지유야, 다음 주 금요일에 조교 아들 백일 잔치한다던데 갈 거야?”도세원은 온지유를 보며 물었다.대학교 시절 조교는 확실히 성실한 사람이었다.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이긴 했지만 착한 사람이라 동기들이 원하는 것을 대부분 들어주고 도와주었다.그때 당시 그녀도 조교의 도움을 받은 적 있었다.다만 백일상을 한다는 초대 문자는 받지 못했다.도세원은 온지유가 말이 없자 그제야 눈치채고 어색하게 말했다.“조교는 나랑 친한 사이라서 먼저 연락한 거야. 아직 동기 단톡방에 소식을 알리지 않았거든. 마침 널 만난 김에 그냥 물어본 거야.”도세원은 난감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분위기는 너무도 어색했다.온지유는 눈치채고 있었다.도세원이 이어서 말했다.“내가 나중에 단톡방에 올릴 거야. 조교는 미처 바빠서 신경 쓰지 못했나 봐. 조교 아들이 선천성 심장병을 앓고 있거든. 그래서 돈도 많이 쓰고 다른 곳에 신경 쓸 여유가 없을 거야...”도세원도 사실 최근에 가슴이 자주 답답하여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검진받으러 온 것이었다.온지유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이제 막 백일 된 아이가 심장병을 앓고 있다니, 분명 병원비가 꽤나 나갔을 것이다.임신한 탓인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머릿속에 순간 고통스러워하는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온지유도 마음이 아팠다.“응, 갈 거야. 너도 얼른 들어가 봐.”“응.”도세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온지유는 빠르게 걸음을 옮겨
온지유는 바로 백지희에게 연락했다.백지희의 목소리엔 나른함이 느껴져 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미안, 자고 있었어? 쉬는 거 방해해서 미안한데 나 지금 백화점 가는 길이야. 너희 집 근처 백화점에서 너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와줘.”“알았어.”백지희는 거절하지 않았다.백화점에 도착한 뒤 아무 카페로 들어가 커피 두 잔을 주문했다.백지희는 멀리서부터 카페의 하얀 의자에 앉아 한 손에 커피를 들고 있는 온지유를 발견했다.“오늘 무슨 날이기에 갑자기 나한테 데이트 신청을 다 하는 거야? 게다가 여긴 요즘 핫한 카페잖아. 말해, 무슨 일인데?”백지희는 살짝 불만이 있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자연스럽게 의자를 끌어당겨 온지유의 맞은편에 앉았다.온지유는 웃으며 답했다.“딱히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야. 그냥 나랑 같이 쇼핑하자고 부른 거야. 그리고... 이현 씨가 나한테 전시회 쪽 일을 이미 배 비서님한테 맡겨서 처리했다고 했어.”여이현을 언급하기 전까지만 해도 백지희는 기분이 아주 좋았다. 온지유에게 농담을 던질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여이현의 이름을 듣자마자 백지희는 그날 어둠 속에서 자신을 협박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게다가 온지유는 여이현에게 한없이 마음 약해지는 사람이었다.“지유야, 내가 전부터 말했지만 독한 마음을 먹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못 해. 내가 이 말을 하는 이유도 뭐겠어. 말 그대로 너도 독해지라고 하는 말이잖아. 넌 다 좋은 데 마음이 너무 여려. 조금만 독해지면 네가 못 해낼 일은 없을 거야. 계속 이렇게 누군가에게 끌려다니면서 살 수는 없잖아, 안 그래?”백지희는 입술을 틀어 물며 솔직하게 말했다.온지유도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알고 있어. 나 방금 병원에 갔다 왔어. 의사가 그러는데 임신한 지 한 달 정도 됐대.”“알아, 눈치채고 있었어.”그날, 온지유가 그녀의 집에서 음식을 먹기도 전에 헛구역질하는 것을 보고 바로 눈치챘다.그녀가 눈치채고 있었기에 온지유도 그녀에게 숨기지 않고 말한 것이다.“그래서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백지희의 라이벌인 나빛나였다.나빛나는 백지희가 전시를 열자마자 바로 다음 날 전시를 열었고 디자인도 대부분 백지희의 것을 따라 디자인했다.대부분 직원들은 고객을 등급 매겨 아부했다.온지유는 백지희가 마음에 들어 하는 옷을 당연히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 수 없었다.가방에서 여이현의 블랙카드를 꺼내 직원에게 건넸다.“이걸로 결제해줘요. 저 옷도 전부 살 거니까요.”온지유는 백지희의 손을 잡고 피팅룸에서 나왔다.굳이 입어볼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기세로 이미 나빛나를 이겨 버렸으니 말이다.나빛나와 직원은 블랙카드를 보자마자 눈이 커졌다. 특히 나빛나는 더 화가 치밀었다.“하, 일개 비서 주제에 감히 회사 대표님 카드를 들고 거드름을 피우는 거예요?”그녀는 이곳의 VVIP였다.백지희는 물론 재능이 있긴 했지만, 재력 부분에선 그녀에게 한참 뒤처지는 사람이었다.게다가 온지유도 그저 한 회사의 비서일 뿐이었다.“말 가려서 해!”백지희는 결국 참지 못하고 말했다. 원래부터 그녀가 하는 모든 것을 따라 하던 나빛나였기에 일부 나빛나의 극성팬들은 항상 다짜고짜 그녀에게 악플을 달곤 했다.그런데 나빛나는 지금 가만히 있는 그녀에게 시비를 건 것도 모자라 그녀의 절친한 친구 온지유까지 모욕하지 않았는가. 백지희는 당연히 참을 수 없었다.나빛나는 거만하게 팔짱을 끼면서 코웃음을 쳤다.“흥, 말 가려서 하라고? 왜, 가려서 하면 내가 말한 게 사실이 아니게 되나 봐? 저 여자가 먼저 남의 블랙카드를 들고 위세를 부린 거잖아. 아니면 저 여자가 여이현 아내라도 되는 거야?”여이현에게 아내가 있었다면 분명 성대한 결혼식을 치렀을 것이었다.“아, 아니지. 다른 가능성도 있었지? 저 여자는 여이현의 스폰을 받는 내연녀 같은 거겠네!”나빛나는 점차 머리를 거치지 않고 말을 막 뱉어내고 있었다.입꼬리에 걸린 비웃음은 유난히 분명했다.온지유의 눈빛이 어두워졌다.그녀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백지희가 다가가 뺨을 때렸다. 경쾌한 소리가
[다들 그만 하세요! 저 여자가 폭행당하든, 온지유가 스폰을 받든 다 저희랑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에요! 저희는 저희 앞가림만 잘하면 된다고요! 남의 일에 뭔 관심이 그렇게 많아요?!][스폰을 받는 사람이 블랙카드로 거드름을 피운다? 정말 어이가 없네요. 어쩐지 젊은 나이에 대표님 비서라고 했더니, 침대 기술이 꽤 좋은가 보네요?][온지유는 아주 대단한 사람이에요. 지난번 파티에서도 여이현 대표가 온지유를 위해 나서주면서 화를 냈다니까요? 온지유가 여이현 대표님 첫사랑마저 밀어냈다는 거 다들 모르죠?][에이, 설마요. 온지유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데 왜 여이현 대표랑 결혼은 못 했대요?][재벌가 며느리 자리에 앉기 쉬운 줄 알아요?]...얼마 지나지 않아 네티즌들은 전부 온지유를 질책하였고 심지어 누군가는 그녀의 사진을 영정사진으로 만들어 전파하기도 했다.노승아는 아주 기뻤다.이런 때에 연기를 잘해준다면 그녀는 온지유를 밀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온지유가 가져온 자양제를 열었다.몸보신에 좋은 보약이었다.노승아는 김예진에게 먹기 좋게 컵에 따라오라고 했다. 반 시간 뒤, 그녀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침대에서 이리저리 뒹굴며 바로 여이현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러나 전화를 받은 사람은 배진호였다.배진호의 일관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노승아 씨, 하실 말씀이 있으면 하세요. 제가 대표님께 전해 드리겠습니다.”“배 비서님, 저 중독된 것 같아요... 이현 오빠는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예요? 보약 하나를 먹고 나니 몸 곳곳이 너무 아파요!”노승아는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목소리를 들은 배진호는 지금 노승아가 괴로운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했다.배진호가 답했다.“노승아 씨, 대표님께선 지금 회의 중이십니다. 회의가 끝나는 대로 대표님께 알려드리겠습니다.”“네, 부탁드릴게요. 지금 언니 상태가 많이 심각하거든요.”들려온 것은 노승아의 목소리가 아닌 매니저 김예진이었다.배진호는 담담히 대답했다.“네, 알겠습니다.”통화를 종료할 때 배
티브이에서 그 문구를 본 여진숙은 더는 냉정함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분노치는 극에 달했다.그녀는 바로 곁에 있던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지금 당장 여이현과 온지유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 와.”온지유가 경찰서로 연행되었으니 여이현은 당연히 지켜만 보고 있지 않을 것이었다.사실을 증명하듯 여이현은 이미 경찰서에 도착했다.온지유, 백지희, 나빛나는 같은 취조실에 앉아 있었다. 나빛나는 사람을 부른 터라 진술만 하면 바로 경찰서에서 나올 수 있었다.그녀는 일부러 온지유와 백지희와 같은 취조실에 있겠다고 요구했다.같은 취조실에 있어야만 진술을 끝내고 두 사람의 앞에서 약 올리며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온지유 쪽에서 먼저 사람이 올 줄은 몰랐다. 게다가 다른 누구도 아닌 여진 그룹의 대표 여이현이 왔다.여이현은 회색의 셔츠와 검은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키도 크고 자세도 곧아 위엄이 느껴졌다. 하지만 싸늘하기 그지없는 그 눈빛은 차마 똑바로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여이현이 등장한 순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온지유가 여이현의 내연녀든 아니든, 지금 이 순간 온지유를 걱정하는 여이현의 마음은 진짜였다.그는 온지유를 위해 직접 경찰서로 온 것이다.심지어 온지유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그녀는 여이현을 똑바로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시비가 걸려 경찰서로 온 것이 얼마나 창피한 일이란 밀인가!“그쪽이 온지유가 내 카드를 들고 위세를 부린다고 했습니까?”여이현은 눈을 가늘게 접으며 나빛나를 보았다.칠흑 같은 두 눈동자에선 압박감이 느껴졌다.나빛나도 그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말까지 더듬었다.“대, 대표님, 저랑 온지유 씨는 그냥 사소한 일로 다툰 것뿐이에요.”그러자 여이현이 피식 웃었다.그의 웃음은 오래 가지 않아 사라져 버렸고 눈빛은 점점 더 싸늘해졌다.“사소한 다툼으로 경찰서까지 왔다고요. 그럼 대체 어떤 일이 그쪽한테는 큰 문제인 거죠?”나빛나는 그에게서 느껴지는 위압
나빛나는 거부할 수가 없었다.“알겠어요.”온지유는 계속 말을 이었다.“말로만 하는 약속은 믿을 수 없으니까 지희의 모든 것을 따라 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하나 쓰죠.”“네, 그럴게요.”나빛나는 여이현의 미움을 사지 않기 위해서는 각서를 쓰는 수밖에 없었다.3분도 안 된 시간에 나빛나는 각서를 썼다. 심지어 지장도 찍었다.그러나 온지유에게 각서를 보여주려고 하자 온지유가 차갑게 그녀를 보며 말했다.“각서의 대상은 지희에요.”나빛나는 하는 수 없이 다시 백지희에게 각서를 보여주었다.백지희는 각서 내용을 한번 훑어보았다. 나빛나가 빠르게 쓴 것 치고는 내용이 괜찮았다. 이때, 가만히 있던 여이현이 한 마디 보충했다.“배 비서, 지금 당장 여론을 일으킨 사람 찾아서 구치소에 보내요!”“네, 알겠습니다.”배진호는 빠르게 대답했다.나빛나는 멍해졌다. 그녀는 패션디자이너였고 조금 인기 있는 화가기도 했다. 심지어 나씨 가문의 딸이었지만 만약 구치소에 수감되기라도 하면, 이 바닥에서 웃음거리가 될 것이 분명했다.“대표님... 온지유, 아니, 온지유 님. 제발 이렇게 부탁드릴게요. 절 구치소에 보내지 말아 주세요. 전 정말로 반성하고 있어요. 제발요!”여이현은 온지유에게 눈빛을 보냈다.온지유는 백지희의 손을 잡고 여이현의 뒤로 갔다.그들은 애원하는 나빛나를 무시한 채 취조실에서 나가버렸다.배진호는 뒤에서 이 일을 처리하고 있었고 나빛나는 결국 구치소에 수감되고 말았다. 그리고 인터넷에 떠도는 기사와 악플을 배진호가 전부 삭제해 버려 다시 클릭했을 땐 오류로 떴다....경찰서에서 나온 뒤 백지희는 온지유에게 말했다.“지유야, 여이현 씨가 왔으니까 그럼 난 이만 가볼게. 마침 갈 곳이 있었거든.”백지희는 여이현과 같은 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그녀가 남아 보았자 여이현에게 상대도 되지 않았고 온지유를 도와줄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괜히 남았다가 여이현의 얼굴만 보면 짜증만 치밀었기에 차라리 자리를 피하는 것이 나았다.여이현은 온지유에게 눈
신무열은 김혜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걱정 끼쳐서 미안해.”“무열 씨, 제발 꼭 좋아져야 해요. 이렇게 날 떠나면 안 돼요. 우리... 우리 아직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고 다 아쉬움으로 남았잖아요.”김혜연은 신무열을 꼭 끌어안으며 목소리가 갈라질 정도로 간절히 말했다.그녀는 정말로 두려웠다.만약 신무열의 마음속에 모든 분야에 출중한 완벽한 존재가 있었다면 그녀는 이렇게까지 고통스럽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아린의 경우는 달랐다. 모든 조건을 떼어 놓고 보면 말이다.김혜연에게는 선택지가 주어졌지만 선택을 하지 않은 건 그녀 자신이었다.김혜연은 신무열의 남은 생이 죄책감 속에서 허비되지 않기를 바랐다.신무열은 김헤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네가 하려는 말 다 알아. 걱정하지 마. 나도 최선을 다해 이전의 일들에서 벗어나려고 할게.”김혜연은 그런 문제들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신무열은 그녀의 진심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원망하지 않았다.이때, 인명진이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신무열의 약물 의존은 법로가 책임지고 있었고, 인명진은 그의 심리 치료를 맡게 되었다.신무열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그러나 아린이 자신의 품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본 그는 마음의 상처를 도저히 치유할 수 없었다.인명진은 그의 마음을 이해했다.그는 최면을 통해 신무열의 내면을 하나씩 풀어가며 그의 마음을 안정시키려 노력했다.신무열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저는 누구도 죽이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저 때문에 죽어가요. 죽음이 이렇게도 불공평하고 아무 소리도 없이 다가온다는 걸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신무열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씩 흘러나왔다.인명진은 낮은 목소리로 그를 위로했다.“모든 일에는 아쉬움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무열 씨는 최선을 다했고 아린을 방치한 것도 아니었잖아요. 현실은 잔혹해요. 무열 씨에게는 방법이 없었고, 아린에게는 죽음이 오히려 해방이었을지도 모르죠.”“노예 수용소에 있던 사람들은 수천, 수만 명이었어요
신무열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고통스럽게 절규했다.그의 이런 모습을 본 온지유는 가슴이 찢어졌다. 매일 곁에서 지켜보는 김혜연에게는 더 큰 고통이었다.온지유는 신무열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부드럽게 말했다.“오빠, 그건 오빠 잘못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너무 자신을 몰아붙이지 말아요...”하지만 신무열은 그녀의 말을 끊으며 힘겹게 말했다.“아니, 내 잘못이야. 만약 내가 더 잘했다면 아린은 희생하지 않았을 거야. 죽음을 많이 봐왔지만 이번처럼 고통스러운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지유야, 너도 알잖아? 난 아린이 눈앞에서 죽는 걸 직접 봤어...”그의 목소리는 쉰 듯한 낮은 톤으로 하나하나 쏟아져 나왔고, 온지유는 처음으로 신무열이 이렇게 절망하는 모습을 보게됐다.도와주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그녀는 무력감을 느꼈다.신무열이 감정을 통제하지 못해 스스로를 해칠까 두려웠던 온지유는 급히 법로에게 전화를 걸었다.곧 법로는 실험실 사람들과 함께 그들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신무열의 상태를 본 법로는 마음이 아팠다.신무열은 그의 하나뿐인 아들이다!상태를 점검한 법로는 신무열이 몰래 페노바르비탈을 복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더욱 심각한 것은, 이 약물은 한때 법로거 개량했던 중독성을 유발하는 형태였다는 점이었다.신무열의 방금 전 감정 폭발은 약을 제때 복용하지 못해 나타난 금단 증상이었다.법로는 즉시 실험실의 약물 사용 규정을 엄격히 강화했다.앞으로는 모든 약물 사용이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명령했다.또한, 신무열이 약물을 복용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을 철저히 관리했다.신무열은 Y국의 수령으로, 많은 이들이 그를 끌어내리고 새 인물을 세우고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만약 그의 약물 복용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면 반드시 정치적으로 이용될 것이 분명했다.김혜연은 신무열의 곁을 지키고 싶었지만 법로가 이를 막아섰다.“신무열이 자리를 비우는 건 공적인 이유로는 가능하다. 하지만 네가 자리를 비우
케빈은 단 한 가지 뜻만을 품고 있었다.반드시 Y국을, 그리고 신무열을 지키겠다는 결심이었다.신무열과 이 나라는 그의 누나 아린이 목숨을 바쳐 지키고자 했던 것들이었기 때문이다.케빈이 떠나는 날 온지유가 그를 배웅하러 나왔다.케빈은 돈도, 지위도, 그 외의 물질적인 것들은 모두 원하지 않았다.온지유가 케빈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직접 구해 온 평안을 비는 부적뿐이었다.“케빈, 국경은 힘든 곳이야. 건강히 지내야 해. 네 누나는 떠났지만 우리는 언제까지나 네 가족이야. 언제든 돌아와도 돼.”온지유의 말에 케빈은 미소를 지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었다.누나가 죽은 이상 이곳에는 더 이상 자신의 집은 없었다.온지유가 그렇게 말해줬지만 그들에게도 자신들만의 삶이 있었다.케빈은 이제 네다섯 살의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 이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케빈이 떠난 뒤 아린에 관한 일은 잘 마무리되었다.하지만 온지유는 신무열의 정신 상태를 걱정해 한동안 Y국에 머물렀다.겉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상태는 눈에 띄게 나빠졌다.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고 표정은 지쳐 보였으며 전혀 활기가 없었다.온지유는 더 이상 그를 방치할 수 없었다.“이렇게 지내는 건 정말 위험해 보여요. 밤마다 잠을 잘 자지 못하는 거죠? 도저히 안 되겠으면 내가 명진 씨에게 연락해서 좀 봐달라 할게요.”신무열의 성격상 그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문제를 말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인명진이라면 다를 것이다. 같은 또래라 거리낌이 없기 때문이었다.“아무것도...”신무열은 온지유에게 솔직히 털어놓을 생각이 없었다.하지만 그의 말을 김혜연이 끊어버렸다.“어떻게 아무 일도 없겠어요! 밤마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계속 아린을 되뇌고 있잖아요! 무열 씨, 지금 당신은 아직도 아린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고요. 당신은 최선을 다했잖아요!”신무열은 전쟁 속에서 수많은 죽음을 목격했다.김혜연도 아린이 신무열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케빈은 여전히 고집스러운 태도로 소리쳤다.“제 생각은 달라요! 당신들은 신분 문제 때문에 제 누나를 구하려 하지 않은 거예요!”법로는 조용히 말했다.“미안하다. 과거에 내가 너무 집착했었지. 죽은 사람을 되살리고자 하는 욕망, 어떤 목적을 이루고자 했던 욕심... 하지만 결국 그것들은 내가 만든 환상이었다는 걸 깨달았다.”“네 누나의 죽음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안다. 하지만 Y국의 발전은 멈출 수 없다. 네가 원한다면 그들을 너에게 넘겨주게 할 것이다. 또 너에게 필요한 보상도 줄 거고 내가 방금 한 약속들도 모두 지킬 테다.”법로는 한숨을 쉬며 케빈 쪽으로 걸어갔다.그는 이미 결심했다. 만약 케빈이 자신에게 손을 올리거나 목숨을 원한다면 그는 이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그는 저항하지 않을 것이고 온지유와 신무열에게도 케빈을 막지 말라고 당부할 생각이었다.비록 법로는 직접 말하지 않았지만 온지유와 신무열은 이미 그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케빈! 네 누나를 죽게 한 건 우리가 아니야! 너희는 Y국의 국민이잖아. 네 누나가 무열 씨에게 사랑이 없었다 해도 애국심은 분명히 있었을 거야. 안그래?”온지유의 말은 케빈의 마음을 찔렀다. 그는 과거 자신과 아린이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아린은 신무열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애정을 품고 있었고, 신무열과 관련된 모든 소식을 모았다.신문에서 오려낸 사진들, 비디오에서 캡처한 화면, 심지어 직접 인쇄한 이미지까지.케빈은 그녀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누나와 선생님의 신분 차이가 이렇게 큰데 집착하는 이유가 뭐야? 설마 나중에는 선생님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겠다고 하는 건 아니지?”그는 자신의 말이 현실이 될 줄은 몰랐다.아린이 그때 했던 대답이 선명하게 기억났다.“내가 선생님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선생님은 이 나라를 이끄는 사람이셔. 만약 내가 선생님을 위해 죽는다면 그건 모두를 위한 죽음이고 정말 영광스러운 일일 거야.”온지유가 같은 이야기를 꺼내고 나서야 케빈은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케빈은 고통 속에서 절규했다.노예 수용소에는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결국 그들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Y국에는 그렇게 많은 약초가 있는데 그의 누나 하나 살리지 못했다는 말인가?결국 케빈은 그의 누나가 신무열을 좋아했기 때문에, 그녀가 신무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두려워해서가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케빈은 가슴을 움켜쥐며 외쳤다.“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었고, 그렇게 많은 실험을 해왔잖아요. 그런데 왜 제 누나만큼은 구하지 않으려 한 거죠?”이성을 잃은 케빈이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모를 상황에 신무열은 법로 앞에 서서 그를 막아섰다.그의 목소리는 처연했다.“여러 방법을 시도해 봤지만 네 누나를 살리지 못한 건 내 무능함의 결과다. 복수를 원한다면 내 목숨을 가져가.”신무열의 눈빛은 확고했다.“안 돼요! 당신은 지금 Y국의 수령이에요. 꼭 누군가 죽어야 분이 풀리겠다면 차라리 제 목숨을 가져가세요!”김혜연은 신무열을 사랑했다. 그녀는 신무열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을 눈 뜨고 볼 수 없었다.그녀는 즉시 두 팔을 벌려 신무열을 막아섰다.그들은 이제 막 신혼이었다. 결혼식에는 다른 목적이 있었고, 신혼 첫날밤도 여러 사정으로 아쉬웠다.이제 둘 중 하나라도 죽는다면 그들의 이야기는 처참한 비극으로 끝날 것이다.이때 법로가 앞으로 나섰다.“내가 네 누나를 구하지 못한 게 문제다. 나를 죽여라.”그는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신무열은 법로가 가장 신뢰하는 후계자였고 Y국의 미래는 모두가 인정할 만큼 밝았다.신무열이 죽는다면 이는 나라의 큰 손실이 될 것이다.법로는 자신이 죽더라도 신무열을 희생시킬 수는 없었다.그리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삶을 이어가야 한다.신무열과 김혜연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잘못한 사람은 바로 자신이라며 법로는 그 모든 책임을 자신이 감당하겠다고 했다.케빈은 자신의 누나가 죽은 것에 대한 슬픔과 분노로 마음의 균형을 잃었다.그가 정말로 법로나 신무열을 죽이기라도 한다면 나라 전체의
이것은 신무열이 해줄 수 있는 가장 진심 어린 동시에 가장 무력한 축복이었다.처음엔 아린의 독을 법로가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법로에게는 아무런 방법도 없었고 결국 그는 아린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신무열은 아린의 곁에서 밤을 지새우고 마지막엔 직접 그녀를 안치했다.김혜연은 그를 찾지 않았다.그녀는 신무열이 지금 힘들어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고 충분히 이해하며 기다릴 수 있었다.삶은 원래 아쉬움이 남는 법이었다.돌아온 신무열을 김혜연은 꼭 끌어안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의 침묵은 가벼운 몇 마디 말보다 더 큰 위로가 되었다.“샤워하고 푹 자요. 살아 있는 우리는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해요. Y국의 사람들은 아직 우릴 필요로 하니까요.”김혜연은 신무열의 내조자로서 Y국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그를 도울 각오를 하고 있었다.신무열은 입을 열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목이 막혀오고 가슴은 무거운 돌을 얹은 것처럼 답답했다.심혜연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린은 정말 좋은 사람이었어요. 자신의 목숨을 바쳐 당신에게 해를 끼치려던 사람들을 막아줬잖아요.”만약 아린이 자신의 목숨을 아끼는 사람이었다면, 그녀는 그들과 협력해 신무열을 해쳤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아린은 그러지 않았다.그녀 덕분에 신무열은 위협의 존재를 미리 알아차리고 그들을 제거할 수 있었다.“무열 씨, 우리 앞으로 매년 아린 산소에 찾아가고 가족도 잘 보살펴줘요.”“그래.”“신혼 첫날 밤인데... 미안해.”천천히 입을 연 신무열의 목소리는 몹시 가라앉아 있었다.아린은 진심으로 그를 위해 생명을 바쳤지만 김혜연 역시 진심으로 그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 심지어 결혼식과 신혼 첫날밤에도 그는 다른 이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김혜연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이해해요. 모든 걸 알고 있는 제가 어떻게 무열 씨를 원망할 수 있겠어요? 이번 결혼식은 원래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한 것이잖아요. 난 전혀 신경
“다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너무 큰 부담을 가지지 마요.”온지유는 김혜연을 다독이며 말했다.김혜연은 곧 마음속 불안했던 감정을 털어내고 안정을 되찾았다.그들의 결혼식은 화려하게 열렸고 신무열은 이 기회를 이용해 아린에게 독을 투입한 범인들을 찾아냈다.그는 그들에게 조건을 내걸었다.“목숨은 살려줄 테니 해독제를 내놔.”결혼식은 일부러 범인들에게 자신이 행복에 취해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기 위한 연출이었다.그들은 허상에 속아 방심해 결국 덫에 걸려들었다.“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곁에 있는 법로조차도 해독제를 못 개발했나봐? 그런데 우리에게 있을 리가 없잖아.”만약 해독제가 있었다면 법로는 이미 아린을 살렸을 것이다.지금 아린은 며칠밖에 못 살아갈 상태였다.그들은 아린을 이용해 정보를 얻은 후 그녀를 제거하려고 했지만 아린은 신무열에게 끝까지 충성을 다했다.심지어 그녀는 죽음을 선택하더라도 신무열을 해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더군다나 신무열이 자신의 결혼식을 덫으로 사용해 이들을 잡아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신무열의 얼굴은 차갑게 굳었다.“해독제가 없다면 너희도 죽어야지.”그는 총알을 장전하고 무기를 아린에게 건넸다. 직접 복수하는 것만큼 후련한 건 없다.하지만 아린은 이미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가 이들을 처치한다고 해도 자신의 삶은 더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신무열이 직접 건네준 무기였기에 아린은 그의 뜻을 따랐다.‘탕! 탕! 탕!’눈앞의 사람들은 총소리와 함께 차례로 쓰러졌다.그러나 아린은 자신의 힘으로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뒤로 쓰러졌다.신무열 재빨리 그녀를 부축했다.그 순간 아린의 입에서 피가 쏟아져 나오고, 눈에서도 피가 흘러나왔다. 신무열은 그 모습을 보고 크게 외쳤다.“누구 없어! 빨리 이쪽으로 와!”아린은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요, 신무열 선생님.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버티려고 했는데 자신을 과대평가했나 봐요... 기대 같은 건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아린은 애초에
법로의 표정은 여전히 엄숙했다.온지유는 이런 소식을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지금 이 상황에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무엇을 말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지금은 침묵이 가장 좋은 답변일지도 모른다.신무열 또한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아린에게 꼭 살리겠다고 약속했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신무열은 깊은 죄책감에 사로잡힌 채 아린이 있는 침대로 다가갔다.“미안해. 한 몸 바쳐 중요한 정보를 전해준 네 목숨을 결국 지킬 수 없었어.”아린은 침대에 누워있었다. 몸속의 독으로 인해 얼굴은 이미 다 망가졌지만, 신무열이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렇게 대단한 정보도 아니에요. 제가 말하지 않아도 결국 무열 씨는 모든 걸 알게 됐을 거예요.”그녀는 자처해서 한 것이었고 이 일로 인해 신무열이 어떤 마음의 짐도 가지지 않길 바랐다.신무열은 보이지 않는 손에 심장이 쥐어 짜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자신을 위해 한 몸 바쳐 싸운 아린을 위해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는 사실에 목이 막혔다. 따로 방법이 없다면 이대로 그녀가 죽어 가는 걸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신무열은 그녀가 어떤 후회도 남기지 않도록 해주겠다고 결심했다.신무열은 아린에게 약속했다.“내 무능함 때문에 네 독을 풀어주지 못했지만 걱정하지 마. 나는 절대 널 포기하지 않을 거야. 그놈들한테 건 현상금도 아직 유효해. 정 안 된다면... 내가 반드시 복수해 줄게. 마지막으로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다면 나에게 말해줘.”신무열의 눈빛은 확고했다.아린이 어떤 소원이든 말하든 그는 반드시 그것을 이뤄줄 생각이었다.아린은 신무열이 김혜연과 결혼할 것을 알고 있었다.그랬기에 두 사람을 곤란하게 하거나 결혼 전에 그의 마음을 흔들고 싶지 않았다.아린은 끝까지 미소를 유지하며 말했다.“신무열 선생님, 제가 당신에게 이 정보를 전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당신이 저를 살리려 노력해 주고 제 곁에 있어 준 것만으로도 충분해요.”“혜연
온지유는 참지 못하고 농담을 던졌다.“결혼 후엔 아이도 빨리 낳아야겠네요. 나중에 아기가 태어나면 나도 좀 같이 놀아줘야죠.”“넌 이제 Y국에 있지도 않고 아버지도 같이 경성에 갔잖아. 차라리 Y국으로 와. 내가 널 고용할게.”신무열은 단숨에 말을 이어갔다.사실 거리가 그들 사이의 큰 걸림돌이었다. 온지유가 경성에 남기로 한 건 그녀의 선택이지만 신무열은 그녀가 Y국에 머물러 주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Y국은 그들의 뿌리와 영혼이 있는 곳이며 오빠로서 여동생에게 여러모로 보답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온지유도 신무열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이현이 경성에 있고 양부모도 그곳에 있는 온지유에게는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없었다.게다가 온지유는 Y국을 관리하는 일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온지유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형수가 아이를 낳게 되면 내가 와서 돌봐줄게요.”두 사람에겐 어머니가 없었고 신무열의 능력으로 아이가 태어날 때 산후조리사는 고용할 수 있다 해도 가족의 보살핌을 대체할 수는 없을 것이다.김혜연은 온지유가 ‘형수’라 부르는 말에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다.신무열이 자신을 인정해 주고 신무열 곁의 모든 사람이 그녀를 받아들여 주고 있다는 것이 참 다행스러웠다.신무열은 아린의 문제에 대해 법로에게 말할 필요가 있었다.“아버지, 제 친구가 노석명이 개발한 독약의 개량품에 감염되었습니다. 직접 한 번 살펴봐 주실 수 있을까요?”법로는 노석명의 이름을 듣고는 눈빛이 어두워졌다.“노석명의 독약이라니? 그놈은 이미 처형되어 사람의 형체조차 잃고 혀마저 잘려 매일 돼지처럼 살고 있다. 노석명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이냐?”혹은, 눈치도 없는 누군가가 아직도 노석명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다는 것일지도 몰랐다.한편, 온지유는 ‘아린’이라는 이름을 듣자 과거 Y국 북부에서 처음 신무열을 만났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내가 아는 그 아린 맞아요?”“그래.”신무열은 숨기지 않았다.당시 전쟁 중에 아린은 온지유에게 식사를 해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