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현관으로 들어오자마자 그들은 소파에 앉아 있는 여진숙을 발견했다.여진숙의 안색이 어두웠다.“인터넷을 그렇게 떠들썩하게 만들어 놓고는 둘은 아주 한가로워 보이는구나.”고씨 집안에서 연 파티에서 여이현은 온지유를 위해 나서준 것이 아직도 실시간 인기 검색에 올라와 있었다.여이현은 온지유에게 눈빛을 보냈다.바로 알아챈 온지유는 여진숙을 양해 인사했다.“어머님, 아침 준비해놓았는데 혹시 아직 식사 전이라면 도우미 아주머니한테 어머님 몫도 준비해 달라고 할까요?”별장에 도우미한테 말하면 바로 준비해놓을 수 있었다.게다가 눈치 빠른 도우미는 그녀가 말하기도 전에 바로 주방으로 들어갔다.그러나 여진숙은 온지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여이현! 내가 지금 너한테 말을 하고 있잖니!”여이현이 담담하게 말했다.“저랑 지유 결혼했다는 사실은 언젠가 밝혀질 거였는데 뭘 그렇게 화를 내세요.”수많은 사람과 수많은 입을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여진숙은 아니었다. 그녀는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듣자 하니 네 고모가 너희들한테 가면무도회에 초대했다지?”여이현은 여전히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뭐가 문제가 있는 건가요?”“그런 쓸데없는 무도회나 파티에 적당히 참석해. 네 아빠가 곧 돌아오실 거다. 괜히 네 아빠 심기 건드리지 말고 얌전히 있어.”“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여이현은 여진숙의 말에도 별다른 감정 기복이 없었다. 온지유의 눈에는 꼭 아무래도 상관없는 태도로 보였다.하지만 두 사람은 원래부터 이런 방식으로 대화를 나누었다.그녀에겐 애초에 끼어들 자리가 없었기에 지금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여진숙은 여전히 분노를 다스리고 있었다.“지난번에 승아가 나한테 선물을 줬으니 이번에는 내가 줄 차례구나.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했으니 네가 이 선물을 승아한테 가져다주거라. 난 감기 걸려서 못 갈 것 같구나.”온지유가 옆에 있음에도 여진숙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그녀의 시어머니는 그녀가 있는 앞에서 대놓고 다른
여이현은 그녀와 말다툼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물건은 지유가 대신 가져다준다고 했으니 혹시 다른 일이 있으면 그냥 저한테 전화로 말씀하세요.”그 뜻은 쓸데없이 찾아오지 말라는 의미였다.여이현은 여진숙을 이렇듯 귀찮아하고 있었다.‘보아하니 승아를 더 팍팍 밀어줘야겠어!!'여진숙도 여이현과 말다툼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난 여씨 집안의 안주인이야. 네 아빠의 아내라고.”여이현은 그녀를 무시한 채 나가버렸다....온지유는 먼저 자양제를 들고 병원에 있는 노승아를 찾아갔다.병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노승아는 당연히 여이현인 줄 알고 기대했다.그러나 온지유를 본 순간 노승아의 얼굴에선 웃음기가 사라지고 싸늘하게 굳어버렸다.“왜 그쪽이 온 거죠?”온지유가 담담하게 말했다.“제 어머님께서 몸이 안 좋으시다고 하셔서요. 저더러 대신 전해달라고 했어요.”말을 하면서 온지유는 노승아의 곁으로 다가가 자양제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온지유는 자양제를 선물해주자마자 몸을 틀어 나가려 했다.노승아가 그녀를 불렀다.“온지유 씨, 이왕 온 김에 조금이라도 앉아 있다가 가지 그래요?”온지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전 노승아 씨랑 친한 사이가 아니라서요.”그녀는 그저 여진숙의 요구를 거절할 수가 없어서, 여진숙과 여이현이 다투는 걸 구경하고 싶지 않아서 온 것이었다.하지만 병원에 온 김에 그녀는 새로 진료 접수했다.아침이어도 병원엔 사람이 꽤나 있었다.그녀의 앞으로 세 명이나 대기하고 있었다.차례가 되자 의사는 그녀에게 증상을 물어보곤 초음파실로 가라고 했다.초음파 검사를 위해 그녀는 두 병의 생수를 마신 뒤 침대에 누워 검사했다.초음파 젤리를 배에 바르고 나니 차가운 기분이 들었다.온지유는 천장을 멍하니 보았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심장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올 것 같았다.그녀도 자신이 왜 이토록 긴장했는지 모른다.초음파 검사 해주던 의사는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먼저 물었다.“임신이 처음인가요?”“네...”온지유의 목소리
익숙한 목소리에 온지유는 그대로 얼어버렸다.그녀는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사람은 대학 동기였던 도세원이었다.도세원을 기억하고 있었다.3개월 전, 여진 그룹 기술팀 면접도 그녀가 직접 도세원을 평가했다. 그녀와 대학 동기인 것 제외하곤 도세원은 면접을 아주 잘 보았고 이력서의 스펙도 완벽했다.온지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런 우연이 다 있네.”아이를 낳기로 했던지라 그녀는 괜히 찔리는 기분이 들었다.“오늘 휴가라서 병원에 와서 검진 좀 받으려다가 널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지유야, 다음 주 금요일에 조교 아들 백일 잔치한다던데 갈 거야?”도세원은 온지유를 보며 물었다.대학교 시절 조교는 확실히 성실한 사람이었다.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이긴 했지만 착한 사람이라 동기들이 원하는 것을 대부분 들어주고 도와주었다.그때 당시 그녀도 조교의 도움을 받은 적 있었다.다만 백일상을 한다는 초대 문자는 받지 못했다.도세원은 온지유가 말이 없자 그제야 눈치채고 어색하게 말했다.“조교는 나랑 친한 사이라서 먼저 연락한 거야. 아직 동기 단톡방에 소식을 알리지 않았거든. 마침 널 만난 김에 그냥 물어본 거야.”도세원은 난감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분위기는 너무도 어색했다.온지유는 눈치채고 있었다.도세원이 이어서 말했다.“내가 나중에 단톡방에 올릴 거야. 조교는 미처 바빠서 신경 쓰지 못했나 봐. 조교 아들이 선천성 심장병을 앓고 있거든. 그래서 돈도 많이 쓰고 다른 곳에 신경 쓸 여유가 없을 거야...”도세원도 사실 최근에 가슴이 자주 답답하여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검진받으러 온 것이었다.온지유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이제 막 백일 된 아이가 심장병을 앓고 있다니, 분명 병원비가 꽤나 나갔을 것이다.임신한 탓인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머릿속에 순간 고통스러워하는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온지유도 마음이 아팠다.“응, 갈 거야. 너도 얼른 들어가 봐.”“응.”도세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온지유는 빠르게 걸음을 옮겨
온지유는 바로 백지희에게 연락했다.백지희의 목소리엔 나른함이 느껴져 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미안, 자고 있었어? 쉬는 거 방해해서 미안한데 나 지금 백화점 가는 길이야. 너희 집 근처 백화점에서 너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와줘.”“알았어.”백지희는 거절하지 않았다.백화점에 도착한 뒤 아무 카페로 들어가 커피 두 잔을 주문했다.백지희는 멀리서부터 카페의 하얀 의자에 앉아 한 손에 커피를 들고 있는 온지유를 발견했다.“오늘 무슨 날이기에 갑자기 나한테 데이트 신청을 다 하는 거야? 게다가 여긴 요즘 핫한 카페잖아. 말해, 무슨 일인데?”백지희는 살짝 불만이 있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자연스럽게 의자를 끌어당겨 온지유의 맞은편에 앉았다.온지유는 웃으며 답했다.“딱히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야. 그냥 나랑 같이 쇼핑하자고 부른 거야. 그리고... 이현 씨가 나한테 전시회 쪽 일을 이미 배 비서님한테 맡겨서 처리했다고 했어.”여이현을 언급하기 전까지만 해도 백지희는 기분이 아주 좋았다. 온지유에게 농담을 던질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여이현의 이름을 듣자마자 백지희는 그날 어둠 속에서 자신을 협박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게다가 온지유는 여이현에게 한없이 마음 약해지는 사람이었다.“지유야, 내가 전부터 말했지만 독한 마음을 먹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못 해. 내가 이 말을 하는 이유도 뭐겠어. 말 그대로 너도 독해지라고 하는 말이잖아. 넌 다 좋은 데 마음이 너무 여려. 조금만 독해지면 네가 못 해낼 일은 없을 거야. 계속 이렇게 누군가에게 끌려다니면서 살 수는 없잖아, 안 그래?”백지희는 입술을 틀어 물며 솔직하게 말했다.온지유도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알고 있어. 나 방금 병원에 갔다 왔어. 의사가 그러는데 임신한 지 한 달 정도 됐대.”“알아, 눈치채고 있었어.”그날, 온지유가 그녀의 집에서 음식을 먹기도 전에 헛구역질하는 것을 보고 바로 눈치챘다.그녀가 눈치채고 있었기에 온지유도 그녀에게 숨기지 않고 말한 것이다.“그래서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백지희의 라이벌인 나빛나였다.나빛나는 백지희가 전시를 열자마자 바로 다음 날 전시를 열었고 디자인도 대부분 백지희의 것을 따라 디자인했다.대부분 직원들은 고객을 등급 매겨 아부했다.온지유는 백지희가 마음에 들어 하는 옷을 당연히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 수 없었다.가방에서 여이현의 블랙카드를 꺼내 직원에게 건넸다.“이걸로 결제해줘요. 저 옷도 전부 살 거니까요.”온지유는 백지희의 손을 잡고 피팅룸에서 나왔다.굳이 입어볼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기세로 이미 나빛나를 이겨 버렸으니 말이다.나빛나와 직원은 블랙카드를 보자마자 눈이 커졌다. 특히 나빛나는 더 화가 치밀었다.“하, 일개 비서 주제에 감히 회사 대표님 카드를 들고 거드름을 피우는 거예요?”그녀는 이곳의 VVIP였다.백지희는 물론 재능이 있긴 했지만, 재력 부분에선 그녀에게 한참 뒤처지는 사람이었다.게다가 온지유도 그저 한 회사의 비서일 뿐이었다.“말 가려서 해!”백지희는 결국 참지 못하고 말했다. 원래부터 그녀가 하는 모든 것을 따라 하던 나빛나였기에 일부 나빛나의 극성팬들은 항상 다짜고짜 그녀에게 악플을 달곤 했다.그런데 나빛나는 지금 가만히 있는 그녀에게 시비를 건 것도 모자라 그녀의 절친한 친구 온지유까지 모욕하지 않았는가. 백지희는 당연히 참을 수 없었다.나빛나는 거만하게 팔짱을 끼면서 코웃음을 쳤다.“흥, 말 가려서 하라고? 왜, 가려서 하면 내가 말한 게 사실이 아니게 되나 봐? 저 여자가 먼저 남의 블랙카드를 들고 위세를 부린 거잖아. 아니면 저 여자가 여이현 아내라도 되는 거야?”여이현에게 아내가 있었다면 분명 성대한 결혼식을 치렀을 것이었다.“아, 아니지. 다른 가능성도 있었지? 저 여자는 여이현의 스폰을 받는 내연녀 같은 거겠네!”나빛나는 점차 머리를 거치지 않고 말을 막 뱉어내고 있었다.입꼬리에 걸린 비웃음은 유난히 분명했다.온지유의 눈빛이 어두워졌다.그녀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백지희가 다가가 뺨을 때렸다. 경쾌한 소리가
[다들 그만 하세요! 저 여자가 폭행당하든, 온지유가 스폰을 받든 다 저희랑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에요! 저희는 저희 앞가림만 잘하면 된다고요! 남의 일에 뭔 관심이 그렇게 많아요?!][스폰을 받는 사람이 블랙카드로 거드름을 피운다? 정말 어이가 없네요. 어쩐지 젊은 나이에 대표님 비서라고 했더니, 침대 기술이 꽤 좋은가 보네요?][온지유는 아주 대단한 사람이에요. 지난번 파티에서도 여이현 대표가 온지유를 위해 나서주면서 화를 냈다니까요? 온지유가 여이현 대표님 첫사랑마저 밀어냈다는 거 다들 모르죠?][에이, 설마요. 온지유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데 왜 여이현 대표랑 결혼은 못 했대요?][재벌가 며느리 자리에 앉기 쉬운 줄 알아요?]...얼마 지나지 않아 네티즌들은 전부 온지유를 질책하였고 심지어 누군가는 그녀의 사진을 영정사진으로 만들어 전파하기도 했다.노승아는 아주 기뻤다.이런 때에 연기를 잘해준다면 그녀는 온지유를 밀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온지유가 가져온 자양제를 열었다.몸보신에 좋은 보약이었다.노승아는 김예진에게 먹기 좋게 컵에 따라오라고 했다. 반 시간 뒤, 그녀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침대에서 이리저리 뒹굴며 바로 여이현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러나 전화를 받은 사람은 배진호였다.배진호의 일관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노승아 씨, 하실 말씀이 있으면 하세요. 제가 대표님께 전해 드리겠습니다.”“배 비서님, 저 중독된 것 같아요... 이현 오빠는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예요? 보약 하나를 먹고 나니 몸 곳곳이 너무 아파요!”노승아는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목소리를 들은 배진호는 지금 노승아가 괴로운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했다.배진호가 답했다.“노승아 씨, 대표님께선 지금 회의 중이십니다. 회의가 끝나는 대로 대표님께 알려드리겠습니다.”“네, 부탁드릴게요. 지금 언니 상태가 많이 심각하거든요.”들려온 것은 노승아의 목소리가 아닌 매니저 김예진이었다.배진호는 담담히 대답했다.“네, 알겠습니다.”통화를 종료할 때 배
티브이에서 그 문구를 본 여진숙은 더는 냉정함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분노치는 극에 달했다.그녀는 바로 곁에 있던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지금 당장 여이현과 온지유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 와.”온지유가 경찰서로 연행되었으니 여이현은 당연히 지켜만 보고 있지 않을 것이었다.사실을 증명하듯 여이현은 이미 경찰서에 도착했다.온지유, 백지희, 나빛나는 같은 취조실에 앉아 있었다. 나빛나는 사람을 부른 터라 진술만 하면 바로 경찰서에서 나올 수 있었다.그녀는 일부러 온지유와 백지희와 같은 취조실에 있겠다고 요구했다.같은 취조실에 있어야만 진술을 끝내고 두 사람의 앞에서 약 올리며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온지유 쪽에서 먼저 사람이 올 줄은 몰랐다. 게다가 다른 누구도 아닌 여진 그룹의 대표 여이현이 왔다.여이현은 회색의 셔츠와 검은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키도 크고 자세도 곧아 위엄이 느껴졌다. 하지만 싸늘하기 그지없는 그 눈빛은 차마 똑바로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여이현이 등장한 순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온지유가 여이현의 내연녀든 아니든, 지금 이 순간 온지유를 걱정하는 여이현의 마음은 진짜였다.그는 온지유를 위해 직접 경찰서로 온 것이다.심지어 온지유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그녀는 여이현을 똑바로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시비가 걸려 경찰서로 온 것이 얼마나 창피한 일이란 밀인가!“그쪽이 온지유가 내 카드를 들고 위세를 부린다고 했습니까?”여이현은 눈을 가늘게 접으며 나빛나를 보았다.칠흑 같은 두 눈동자에선 압박감이 느껴졌다.나빛나도 그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말까지 더듬었다.“대, 대표님, 저랑 온지유 씨는 그냥 사소한 일로 다툰 것뿐이에요.”그러자 여이현이 피식 웃었다.그의 웃음은 오래 가지 않아 사라져 버렸고 눈빛은 점점 더 싸늘해졌다.“사소한 다툼으로 경찰서까지 왔다고요. 그럼 대체 어떤 일이 그쪽한테는 큰 문제인 거죠?”나빛나는 그에게서 느껴지는 위압
나빛나는 거부할 수가 없었다.“알겠어요.”온지유는 계속 말을 이었다.“말로만 하는 약속은 믿을 수 없으니까 지희의 모든 것을 따라 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하나 쓰죠.”“네, 그럴게요.”나빛나는 여이현의 미움을 사지 않기 위해서는 각서를 쓰는 수밖에 없었다.3분도 안 된 시간에 나빛나는 각서를 썼다. 심지어 지장도 찍었다.그러나 온지유에게 각서를 보여주려고 하자 온지유가 차갑게 그녀를 보며 말했다.“각서의 대상은 지희에요.”나빛나는 하는 수 없이 다시 백지희에게 각서를 보여주었다.백지희는 각서 내용을 한번 훑어보았다. 나빛나가 빠르게 쓴 것 치고는 내용이 괜찮았다. 이때, 가만히 있던 여이현이 한 마디 보충했다.“배 비서, 지금 당장 여론을 일으킨 사람 찾아서 구치소에 보내요!”“네, 알겠습니다.”배진호는 빠르게 대답했다.나빛나는 멍해졌다. 그녀는 패션디자이너였고 조금 인기 있는 화가기도 했다. 심지어 나씨 가문의 딸이었지만 만약 구치소에 수감되기라도 하면, 이 바닥에서 웃음거리가 될 것이 분명했다.“대표님... 온지유, 아니, 온지유 님. 제발 이렇게 부탁드릴게요. 절 구치소에 보내지 말아 주세요. 전 정말로 반성하고 있어요. 제발요!”여이현은 온지유에게 눈빛을 보냈다.온지유는 백지희의 손을 잡고 여이현의 뒤로 갔다.그들은 애원하는 나빛나를 무시한 채 취조실에서 나가버렸다.배진호는 뒤에서 이 일을 처리하고 있었고 나빛나는 결국 구치소에 수감되고 말았다. 그리고 인터넷에 떠도는 기사와 악플을 배진호가 전부 삭제해 버려 다시 클릭했을 땐 오류로 떴다....경찰서에서 나온 뒤 백지희는 온지유에게 말했다.“지유야, 여이현 씨가 왔으니까 그럼 난 이만 가볼게. 마침 갈 곳이 있었거든.”백지희는 여이현과 같은 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그녀가 남아 보았자 여이현에게 상대도 되지 않았고 온지유를 도와줄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괜히 남았다가 여이현의 얼굴만 보면 짜증만 치밀었기에 차라리 자리를 피하는 것이 나았다.여이현은 온지유에게 눈
문지원은 어른을 마주하는 것 같았다.“아무것도 아니에요.”지석훈은 그녀가 반쯤 울리는 것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나한테도 속일 생각하고 있어?”문지원은 뭐라고 대답할 생각이 없었다.지석훈은 그녀에게 강요하고 싶지 않은 듯 다른 말로 그녀를 앉혀 식사 하게 하였다.마침, 문지원은 급하게 회사에서 나와서 아직 먹지 않았다.오늘뿐만 아니라, 요 며칠 동안 주주들과 상의 하느라 바빠서 그녀는 종종 하루에 두 번, 심지어 하루에 한 번 밥을 먹었다.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초췌하여 지 씨 아버지께서 한눈에 알아차리지 않았을 것이다.지석훈은 병원 식당에서 준비한 도시락을 가져왔다.병원의 식당은 바깥 식당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영양 균형이 잘 잡혀 있다. 그는 마치 진작에 그녀와 함께 식사하기로 계획한 것처럼 미리 두 개를 준비하였다.조용히 도시락을 먹으며 문지원은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하여 지석훈이 입을 열었을 때도 반응하지 못하였다.“요즘 뜻대로 안 돼?”“조금.”문지원은 무의식으로 대답하고 살짝 굳었는데 지석훈은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지 의사 선생님, 계세요?”밖에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곧 수술이 있기에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네, 알겠어요.”지석훈이 대꾸하자 곧 밖에 있던 사람들이 급히 떠났다.문지원은 이제야 그녀가 바빠서 몸을 뺄 수 없다는 것은 사실 선츠도 비슷하고, 심지어 지나쳐도 모자랄 정도였다는것을 깨달았다. 의사는 워낙 바쁜 직업이라.그런데 그는 이렇게 바쁜데도 시간을 내서 문지원을 위로하려고 하다니... 문지원은 갑자기 양심이 은근히 아파 났다.지석훈은 한쪽에 걸려 있는 흰 가운 외투를 입고 문지원을 쳐다보았다.“난 먼저 일하러 갈게 넌 여기 있을래 아니면 먼저 돌아갈래? 먼저 돌아가면 저녁에 널 찾으러 갈게.”문지원은 도시락을 다 먹고 내려놓았다. “먼저 돌아가 있을게요.”지석훈은 고개를 끄덕이고 떠났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돌아간 후 지석훈이 그녀를
그 남자는 분명히 강윤슬한테 평범한 사람이 아닐 것이니 문지원은 돌아가서 주의하기로 결정했다.“화닝 빌딩의 프로젝트에 대해 귀 그룹의 요구 사항을 문정 그룹에서 보았어요. 우리 그룹에서는 두 가지 사항을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첫째, 우리는 보수와 지불이 불균형하다고 생각해요. 귀사는 모든 재료를 최고 수준으로 배분할 것을 요구하지만, 이익은 10% 미만만 이에요.”“둘째, 우리는 자체 인력이 있으며, 채용 측면에서 귀 그룹에서는 간섭할 권리가 없다고 생각해요.”이것이 바로 문지원이 오늘에 온 목적이었다.문지원은 성격이 매우 좋은 사람이기에 일반적으로 갑방이 제시한 조건이 너무 지나치지 않으면 그녀는 그 조건들을 진지하게 경청하지만 이번에 강윤슬은 너무 심했다.심지어 강윤슬 자신조차도, 한 짓이 좀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갑방이 협력 파트너에게 이래라저래라 심지어 무슨 사람을 쓰는지까지 상관 한다니 한 일이 너무 심했다. 그리고 10%도 안 되는 이윤을 양보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계약서에서 말하는 ‘두 그룹이 함께 이기자'는 말장난을 하는 것은 문자께임으로 사람을 놀리는 거짓말인 것같앗다.강윤슬은 그녀가 왜 왔는지 진작 알고 있기 하나도 놀라지 않았다. “너무하다고? 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고객이 신이라는 말은 누구나 다 알아.”“고객이 이렇다 하지만 갑방이 프로젝트를 당신들에게 맡기고 당신들도 받아들였는데 지금 할 수 없다고 하면 계약을 위반한 것이야. 계약을 위반하면 두 배의 계약금을 물어내야 하는데, 이 돈을 문정 그룹에서 감당할 수 있어?”그 전에 문지원은 강윤슬에 대해 악감정이 없었다.비록 그녀와 지석훈은 알려지지 않은 과거가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 문지원은 정말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그녀는 상대방의 악의를 느낄 수 있지만, 왜 사람들은 모두 근거 없는 악의를 가지고있는지 몰랐다.문지원은 심호흡을 하며 말했다.“강윤슬 씨, 저에게 불만이 있으면 저에게 말해주세요. 그러나 협력에서 무리한 요구를 하지 말았
문지원은 강윤슬이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모르지만, 그녀는 반드시 가야 했다.한바탕 망설인 후, 그녀는 빠르게 결정 하였다. 가야 할 바엔 가자, 무슨 칼산 불바다도 아니고...강윤슬이 근무하는 회사는 규모가 상당했고, 국내에서 100위 안에 드는 대기업이다. 큰 회사답게 프런트 데스크 직원도 교육이 잘 되어 있다.“문 대표님, 강윤슬 대표님이 위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프런트 데스크에서 엘리베이터로 안내하였다. “이쪽으로 오세요.”문지원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에 있는 강윤슬의 사무실에 도착했다.문지원은 강윤슬이 기다릴 줄 알았는데 그녀의 비서가 말했다.“대표님이 회의하느라 바쁘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문지원은 이 말투가 아주 익숙하였다. 그녀는 강윤슬이 자신을 놀리고 있는 것 같았다.그녀가 소심인 배 한 것이 아니라 전화는 부재중이고,직접 왔는데 바쁘다고 하니, 일부러 그녀를 피하는 것 같았다.문지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냉담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협력을 위해 특별히 진심으로 여러분을 찾아왔는데 만약 여러분이 문 씨와 협력할 마음이 없다면, 직접 말하면 될 테니 저를 원숭이로 놀릴 필요는 없어요.”“그럴 리가요.”비서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기 시작 하였다.아마도 그들은 생김새가 온화하고 사람들에게도 대부분 선의를 가진 문지원이 이렇게 기세등등한 면이 있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뭐라고 하든 간에 문지원은 이미 결정하였다. “5분, 5분만 더 기다릴게요.”“5분후에 오지 안으면 합작이 무산된 걸로 칠 것이에요.”협력은 물론 중요하지만, 자신의 체면을 땅에 떨어뜨리는것은 안 되였다. 적어도 문지원은 그런 천덕꾸러기가 아니었다.그녀는 강윤슬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몰랐지만 언젠간 알게 될 것이니 급하지 않았다.5분이 지나자, 문지원은 떠날 준비를 했다.강윤슬은 하이힐에 리듬을 타며 느릿느릿 걸어왔다.“일이 좀 있어서 늦었어. 죄송하네.”그녀는 손을 내밀고 입가에 선의의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눈빛으로 문지원을 응시하
“조금만 더 늣더라도 아이를 볼 수 있을거야!” 강윤슬은 여기 오기전에 문지원의 상황을 알아보았기에 그녀의 금황을 알고 있었다. 강윤슬은 지금 기분이 좀 상해 있었다.그녀는 산에서 구출된 여자들을 경멸했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아이를 낳았다고 들었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날을 누가 알가? 누군가 문지원을 건드린 적이 있는지.문지원의 머리는 세게 부딪힌 것만 같았다. 한바탕 격동이 지나간 후,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려고 손가락을 움직였지만, 자신이 지금 자는 척하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섣불리 눈을 뜨면 오해받을 수 있기에 문지원은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기다리는 과정이 특히 길고 견디기 어려웠는데 마침내 그녀는 남자의 목소리를 들었다.“나는 지원 씨를 관심하니 그런 것과는 무관해.”지석훈은 담담하게 말했다.이 몇 글자는 문지원의 마음속에서 순간 잔잔한 물결을 일으켰다.이 말을 들은 강윤슬의 얼굴은 창백해지기 시작 하였다.“지석훈, 너 진심이야?”“응, 난 이전 너한테 예전같은 마음이 없어.”말하면서 지석훈은 돌아섰다.“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를 바래.”강윤슬은 남자의 무자비한 모습을 보며 자신이 남긴 쓴맛을 맛보았다. 이 쓴맛은 옛날 지석훈만 느낄 수 있었던 감정이었다.그녀는 모욕을 참지 못하고 성을 내며 병실을 떠났다.문지원은 계속 자는 척하고 하려 하였는데 머리 위에서 지석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계속 자는 것처럼 있을 거야?”문지원은 천천히 눈을 뜨면서 그를 향해 어색하면서도 예의 바른 미소를 지었다.“배고파? 먹을 것 좀 갖다 줄까?”문지원은 난처해하고 있기에 간절히 바랐다.지석훈은 잠시 나갔다가 돌아올 때 그녀에게 따뜻한 죽 2인분을 가져왔다.문지원이 자신을 보자 그는 천천히 포장을 풀면서 말했다.“나도 마침 배가 고파서 너랑 같이 먹을 거야”문지원은 아주 행복하다고 느꼈다.그녀는 병원에서 이삼일 휴양하고 퇴원했다. 안 그래도 큰 문제는 없는데 그냥 좀 피곤한데 갑자기 저혈당까지 돌발하였기에 쓰러진
깜짝 놀란 지석훈은 급히 문지원을 데리고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다.그녀가 수면부족으로 쓰러진 것을 알자 지석훈은 무력하고 마음이 약해졌다.“넌 왜 자신을 이렇게 돌보고 있어?”지석훈은 병석 앞에서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문지원은 아직 혼수상태기에 아쉽게도 듣지 못했다. 병원에서 문지원에게 포도당 점액을 처방하여 지금 그 수액을 맞고 있다. 아마도 그녀는 충분히 자야 깨어날 것 같았기에 지석훈은 급하지 않았다. 어쨌든 이미 사람을 찾았고 자신이 직접 그녀를 지켜볼 수 있으니까.“지석훈!”강윤슬이 급히 병실로 뛰여 들어오자 지석훈이 밤을 새워도 잠깐 눈붙일 생각을 하지않고 가만히 병석 앞에서 지켜보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강윤슬이 들어온 것을 보자 지석훈은 무표정하게 말했다.“당신 여긴 왜 왔어?”그의 말투는 아주 평범했지만, 그의 눈빛에는 조그마한 눈물이 고였다. 그는 진작에 마음을 내려놓았기에 그녀에 대해 예전의 느낌은 없었으나 강윤슬은 아직 내려놓지 못하였다.그녀는 원래 지석훈한테 일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손에 있는 일도 돌볼 겨를 없이 서둘러 왔는데 그는 다른 여자 곁을 지키고 있었다.강윤슬은 손바닥의 부드러운 살을 꼬집으며 입가에 보기 싫은 미소를 지었다.“석훈 씨가 괜찮다니 정말 다행이네, 일이 생겼다는 말을 듣고 다친 줄 알았어.”말한 후 강윤슬은 병석에 누워있는 문지원을 보며 말했다.“문지원 씨는 괜찮아?”문지원은 눈꺼풀을 움직였지만 뜨지 않았다. 사실 강윤슬이 왔을 때 그녀는 이미 깨어 있었지만 자는 척하였다.강윤슬은 눈을 반짝이며 방금 문지원이 약간 흔들린 눈꺼풀을 보고 자신이 잘못 본 것인가 의심하였다.지석훈은 병석에 있는 문지원을 바라보았지만, 전혀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일이 좀 생겼는데 사람은 괜찮아.”강윤슬은 마음이 더욱 쓰라렸다. “사람이 괜찮은데 왜 여전히 여기에서 지키고 있어?”“병원에 그렇게 많은 환자가 있는데 당신이 이렇게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네.”지석훈은 얼굴을
문지원은 지석훈만 홀로 남겨서 이 모든 상황을 마주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안에는 그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마지막으로 문지원은 그 지석훈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후시경을 통해 보이는 그의 날씬한 실루엣은 차가 나아갈수록 서서히 멀어졌지만 여전히 당당한 모습이 역력했다.문지원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참으며 힘껏 가속 페달을 밟았다.차는 마치 활시위에서 쏘아 올린 화살처럼 순식간에 도로를 벗어나 달려 나갔다.곧바로 마을 사람들은 손에 곡괭이를 들고 몰려와 지석훈을 완전히 포위했다....한편 마을의 경찰서에는 한 통의 신고 전화가 접수되었다.신고자는 네 명의 갇힌 여성을 데리고 경찰서에 도착해 신고했으며 그 모습을 본 경찰 내부 사람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신원 확인 후 이들 여성의 몸에는 장기간 감금과 학대의 흔적이 분명하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마을에 아직 한 사람이 남아 있어요. 그 사람을 꼭 구출해 주세요.”문지원은 지친 목소리로 경찰을 바라보며 애원했다.그녀는 중간에 한 번도 쉬지 않고 밤새도록 차를 몰았다. 식사 대신 몇 모금의 물만 마셨다.이제는 배고픔과 피로에 시달려 눈꺼풀이 무겁지만 문지원은 결코 쓰러질 수 없었다.그 이유는 지석훈이 아직 남아있었기 때문이다.경찰은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아직도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고요?”“네. 이름은 지석훈. 마을에 의료 봉사하러 간 의사예요.”문지원은 지석훈에 관한 기본 정보를 말했다.“휴대전화를 가지고 있지만 마을 사람들이 빼앗을 가능성도 있어요. 이번에 우리가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던 건 다 그 사람 덕분이에요.”그런 사람이 그토록 황량한 산골짜기 같은 곳에 남아 있다는 사실에 경찰서 사람들은 바로 회의를 열어 구조대를 꾸려 밤새도록 그 마을을 수색하기 시작했다.문지원도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경찰들은 그녀의 상태를 보고 처음엔 단호히 반대했다.하지만 문지원은 고집스럽게 말했다.“안 돼요. 꼭 가야 해요. 그 사람이 무사한지 제가 직접 확인해야
지석훈은 그녀들을 방 안으로 들인 후 여성들이 마을에서 겪은 처참한 상황을 듣고는 분노를 참지 못했다.문지원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저는 이들을 데리고 나가고 싶어요. 그들은 원해서 여기에 남아 있는 게 아니에요. 이 산 너머에는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이곳에 남아 그들의 아이 낳는 도구가 되어 살아갈 이유는 없어요.”그 말에 문지원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잠시 침묵에 빠졌다.조수현 역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들 중 일부는 이미 아이를 낳은 상태였고 이곳을 떠난다는 건 곧 자신의 아이를 두고 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어머니로서 쉽게 결단을 내릴 수 없는 일이었지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이곳에 남아 계속 학대받으며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문지원은 지석훈이 망설일까 봐 서둘러 덧붙였다.“서둘러야 해요. 마을 사람들이 곧 우리가 사라진 걸 눈치챌 거예요. 그들이 우리를 찾으러 오는 건 시간문제라고요. 우린 석훈 씨한테 폐 끼칠 생각 없어요. 그저 차 한 대만 빌려주면 돼요.”마을 밖으로 나가는 길은 분명히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석훈이 여기까지 들어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차만 있다면 충분히 탈출할 수 있었다. 문지원은 운전을 할 줄 알았기에 본인이 직접 운전해서 모두를 데리고 탈출할 생각이었다.“걱정할 필요 없어요. 차는 빌려줄 테니까.”지석훈의 말에 문지원은 예상했던 대답이었음에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른 사람들은 더욱 기뻐하며 얼굴에 희망을 띄웠다.눈앞에 놓인 탈출의 기회에 모두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지석훈은 곧장 차를 가지러 갔다. 차 한 대에 모든 인원을 태울 수는 없었지만 최대한 몸을 붙이면 간신히 탈출할 수 있는 인원이었다.문지원은 재빠르게 조수현과 다른 여성들을 차에 태운 후 지석훈이 계속 말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근데 아까부터 왜 말이 없어요? 같이 안 갈 거예요?”지석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눈치 못 챘어? 이들은 남자한테 극도로 두려움을 느끼고 있어. 몇몇은 나랑 눈도 못 마
문지원은 상의도 걸치지 않고 바지만 입은 채 허겁지겁 뛰쳐나오는 서 씨를 보고 역겨움을 느꼈지만 동시에 조수현의 안전이 걱정되었다.밤은 깊었고 어둠이 표정을 가려주어 다행히 아무도 그녀의 속내를 눈치채지 못했다.마을 사람들은 여자들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이 마을에서 여자는 그저 아이를 낳는 도구에 불과했다.특히 지금처럼 큰불이 난 상황에서는 더더욱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다.게다가 문지원은 마을 사람들에게 순종적인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에 그들이 보기엔 그녀가 도망칠 가능성이 없었다.마을 이장은 불이 난 원인을 물었지만 문지원은 적당한 핑계를 대며 얼렁뚱땅 넘어갔다.남자들이 불 끄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 문지원은 몰래 서 씨의 집으로 향했다.서 씨의 집 안에서 조수현은 밖에서 들리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처음에는 잔뜩 겁을 먹었지만 문지원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상황을 직감했다.“불... 지원 씨가 낸 거예요?” 조수현은 놀라서 물었다.“너무 대담한 거 아니에요?”문지원은 그녀를 힘껏 일으키며 말했다.“지금 그런 얘기할 때가 아니에요. 지금이 기회예요. 얼른 따라와요. 그리고 마을에 갇혀 있는 다른 여자들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죠? 그들도 함께 데리고 나가요. 오늘 밤 무조건 도망쳐야 해요.”“하지만… 우리 어떻게 도망쳐요?”조수현은 주저했다.이 마을은 외부와 단절된 깊은 산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사방은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차를 타고 오가는 것도 며칠이 걸릴 정도였다.더군다나 이들은 힘없는 여자들뿐이어서 교통수단도 없이 걸어서 나가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하지만 문지원은 이미 계획을 세운 상태였다.“마을에 온 그 의사를 찾아갈 거예요. 그들이 이곳까지 들어왔다는 건 나가는 길도 알고 있다는 뜻이에요.”“낮에 그들이 타고 온 차도 봤어요. 게다가 마을 사람들은 의사들에게는 함부로 못 하니까 그가 도와주기만 한다면 우린 반드시 나갈 수 있어요.”문지원의 결연한 눈빛을 보며 조수현도 점차 용기를 얻었다.“좋아요. 나도 따
문지원은 순진한 척하며 말했다.“알겠어요. 그냥 한번 물어본 거예요. 전 당연히 그 사람과 거리를 둘 거예요.”김숙희는 그제야 안심했다.그리고 문득 예전에 아들에게 이 여자를 데려오게 한 자신의 결정이 얼마나 선견지명이었는지 새삼 실감했다.김숙희는 문지원에게 쌀을 씻으라고 시켰고 그녀가 일을 끝마쳤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어 있었다.문지원은 조수현의 처지를 떠올리며 점점 마음이 무거워졌다.오늘 밤 그녀는 실행해야 한다.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갇혀 있는 여자들이 언제쯤 다시 자유를 찾을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었다.밤이 되자 문지원은 지하 저장고에서 술을 꺼냈다.김숙희는 아까운 듯 술을 바라보며 소리쳤다.“그걸 왜 꺼내는 거야. 어서 다시 넣어둬. 그건 명절이나 특별한 날에나 마시는 거란 말이야. 잔칫날도 아닌데 그걸 마시는 건 너무 낭비야.”문지원은 일부러 망설이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듣기로는 마을에 있는 그 의사가 수호 오빠의 다리를 고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오빠 다리가 곧 나을지도 모르니 축하하는 의미로 한잔하면 어떨까 싶어서요.”김숙희의 눈빛이 흔들렸다.문지원 혼자 즐기려는 거였다면 단호하게 반대했을 거지만 아들을 위해 축하한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진수호도 유혹에 넘어가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엄마 어차피 조금만 마시는 건데 괜찮잖아요. 이 술 지하에서 먼지만 쌓이고 있는데... 내 다리가 낫는다는데 엄마는 기쁘지도 않으세요?”“그럴 리가. 당연히 기쁘지.”김숙희는 단번에 부정했지만 결국 아들과 문지원의 부추김에 못 이겨 이를 악물고 술을 개봉했다.그 술은 사실 그저 평범한 황주였다.조금만 마시면 별문제가 없을 터였지만 좋은 일이 겹친 데다 진수호는 쾌락을 즐기는 성향이 강한 사람이어서 한순간 자제력을 잃고 지나치게 마셔버린 것이다.김숙희도 덩달아 함께 취했다.오직 문지원만이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한 잔 더.”진수호는 술에 취해 술버릇이 나왔다. “빨리 한 잔만 더 줘.”문지원은 시험 삼아 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