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브이에서 그 문구를 본 여진숙은 더는 냉정함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분노치는 극에 달했다.그녀는 바로 곁에 있던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지금 당장 여이현과 온지유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 와.”온지유가 경찰서로 연행되었으니 여이현은 당연히 지켜만 보고 있지 않을 것이었다.사실을 증명하듯 여이현은 이미 경찰서에 도착했다.온지유, 백지희, 나빛나는 같은 취조실에 앉아 있었다. 나빛나는 사람을 부른 터라 진술만 하면 바로 경찰서에서 나올 수 있었다.그녀는 일부러 온지유와 백지희와 같은 취조실에 있겠다고 요구했다.같은 취조실에 있어야만 진술을 끝내고 두 사람의 앞에서 약 올리며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온지유 쪽에서 먼저 사람이 올 줄은 몰랐다. 게다가 다른 누구도 아닌 여진 그룹의 대표 여이현이 왔다.여이현은 회색의 셔츠와 검은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키도 크고 자세도 곧아 위엄이 느껴졌다. 하지만 싸늘하기 그지없는 그 눈빛은 차마 똑바로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여이현이 등장한 순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온지유가 여이현의 내연녀든 아니든, 지금 이 순간 온지유를 걱정하는 여이현의 마음은 진짜였다.그는 온지유를 위해 직접 경찰서로 온 것이다.심지어 온지유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그녀는 여이현을 똑바로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시비가 걸려 경찰서로 온 것이 얼마나 창피한 일이란 밀인가!“그쪽이 온지유가 내 카드를 들고 위세를 부린다고 했습니까?”여이현은 눈을 가늘게 접으며 나빛나를 보았다.칠흑 같은 두 눈동자에선 압박감이 느껴졌다.나빛나도 그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말까지 더듬었다.“대, 대표님, 저랑 온지유 씨는 그냥 사소한 일로 다툰 것뿐이에요.”그러자 여이현이 피식 웃었다.그의 웃음은 오래 가지 않아 사라져 버렸고 눈빛은 점점 더 싸늘해졌다.“사소한 다툼으로 경찰서까지 왔다고요. 그럼 대체 어떤 일이 그쪽한테는 큰 문제인 거죠?”나빛나는 그에게서 느껴지는 위압
나빛나는 거부할 수가 없었다.“알겠어요.”온지유는 계속 말을 이었다.“말로만 하는 약속은 믿을 수 없으니까 지희의 모든 것을 따라 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하나 쓰죠.”“네, 그럴게요.”나빛나는 여이현의 미움을 사지 않기 위해서는 각서를 쓰는 수밖에 없었다.3분도 안 된 시간에 나빛나는 각서를 썼다. 심지어 지장도 찍었다.그러나 온지유에게 각서를 보여주려고 하자 온지유가 차갑게 그녀를 보며 말했다.“각서의 대상은 지희에요.”나빛나는 하는 수 없이 다시 백지희에게 각서를 보여주었다.백지희는 각서 내용을 한번 훑어보았다. 나빛나가 빠르게 쓴 것 치고는 내용이 괜찮았다. 이때, 가만히 있던 여이현이 한 마디 보충했다.“배 비서, 지금 당장 여론을 일으킨 사람 찾아서 구치소에 보내요!”“네, 알겠습니다.”배진호는 빠르게 대답했다.나빛나는 멍해졌다. 그녀는 패션디자이너였고 조금 인기 있는 화가기도 했다. 심지어 나씨 가문의 딸이었지만 만약 구치소에 수감되기라도 하면, 이 바닥에서 웃음거리가 될 것이 분명했다.“대표님... 온지유, 아니, 온지유 님. 제발 이렇게 부탁드릴게요. 절 구치소에 보내지 말아 주세요. 전 정말로 반성하고 있어요. 제발요!”여이현은 온지유에게 눈빛을 보냈다.온지유는 백지희의 손을 잡고 여이현의 뒤로 갔다.그들은 애원하는 나빛나를 무시한 채 취조실에서 나가버렸다.배진호는 뒤에서 이 일을 처리하고 있었고 나빛나는 결국 구치소에 수감되고 말았다. 그리고 인터넷에 떠도는 기사와 악플을 배진호가 전부 삭제해 버려 다시 클릭했을 땐 오류로 떴다....경찰서에서 나온 뒤 백지희는 온지유에게 말했다.“지유야, 여이현 씨가 왔으니까 그럼 난 이만 가볼게. 마침 갈 곳이 있었거든.”백지희는 여이현과 같은 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그녀가 남아 보았자 여이현에게 상대도 되지 않았고 온지유를 도와줄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괜히 남았다가 여이현의 얼굴만 보면 짜증만 치밀었기에 차라리 자리를 피하는 것이 나았다.여이현은 온지유에게 눈
여진숙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여이현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녀를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여진숙은 아랑곳하지 않고 들어가려 했다.그러나 몇 걸음 못 가 보안 요원들이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 그중 직위가 높아 보이는 직원이 말을 걸었다.“사모님, 저희를 난처하게 하지 말아 주세요. 저희도 대표님께서 시켜서 하는 겁니다. 대표님을 만나고 싶으시다면 이따가 댁에서 만나시거나, 아니면 먼저 연락이라도 드려보는 게 어떨까요.”보안 요원은 이내 한 마디 더 보태면서 여진숙에게 말했다.“생각해보세요. 여기를 지나가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 누가 사진이라도 찍어 인터넷에 올리기라도 하면 보기 안 좋잖아요.”여진숙의 호흡이 다소 거칠어졌다. 화가 난 것이 분명했다.‘날 막아선 것도 모자라 나한테 지금 전화까지 해보라고?'‘결국은 다 온지유를 위해서잖아! 내가 온지유를 괴롭힐까 봐!'‘그래!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여이현 이 녀석 지금 온지유를 위해 이렇게까지 해!'여진숙은 화를 내며 떠났다....대표이사실.여이현은 온지유를 데리고 온 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서류를 처리하고 있었다. 가만히 놀고만 있을 수 없었던 온지유는 자신의 자리로 가서 컴퓨터를 켰다.얼마 지나지 않아 온지유는 커피를 들고 여이현의 방으로 가는 이채현을 발견했다.“온 비서, 거래처 계약서 가지고 와요.”“에, 알겠습니다.”온지유는 생각을 멈추고 계약서를 찾아 여이현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여이현은 이채현이 내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가자 여이현은 이채현을 칭찬했다.“커피 맛이 괜찮네요.”“전부 온 비서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한 거예요. 온 비서님께서 아주 잘 가르쳐 주셨거든요. 대표님, 오늘 저녁 메뉴는 뭐로 준비할까요?”이채현은 여이현의 말에 대답하면서 잊지 않고 그녀를 칭찬했다.여이현은 침묵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알아서 준비해줘요. 이 비서 실력 믿고 있으니까.”온지유는 가슴이 답답해졌고 목에 생선 가시라도 걸린 것처
온지유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아니에요. 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저도 계약서 내용을 잘 알고 있어요. 그리고 제가 누굴 좋아하는지 잘 알고 계시잖아요.”그녀가 이런 말을 하면 여이현이 무조건 화낼 것이 분명했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여이현에게 자신이 질투했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녀가 그 말을 꺼내자마자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점차 사라지고 표정이 구겨졌다.“여긴 회삽니다. 온지유 씨는 내 비서고요. 내가 시킨 일에 그냥 하겠다고만 대답하면 되는 겁니다.”그 말인즉슨 쓸데없는 소리 적당히 해라는 의미였다.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리고 발걸음을 옮겨 여이현의 뒤로 갔다.손을 들어 천천히 그의 어깨와 목 부위를 안마했다. 사실 그는 온지유의 은은한 체향을 아주 좋아했다. 맡으면 맡을수록 심신이 안정되는 기분이었고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두 눈을 감은 채 편히 쉬었다....같은 시각, 여진숙은 온지유의 본가로 찾아왔다.지난번 병원에서 온지유에게 손을 댄 후류 정미리는 여진숙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이번에 여진숙을 보았을 때 감정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싫은 티를 냈다.“여긴 무슨 일로 오셨어요?”여진숙은 명품 가방을 든 채 거만한 시선으로 정미리를 보았다.“그쪽 딸은 원래부터 우리 이현이랑 계약 결혼을 한 거였죠. 그때는 20억 받고 결혼했으니 말해보세요, 얼마를 주면 현이랑 이혼할 거죠?”여진숙의 말에 정미리는 다시 분노가 치밀었다.그녀는 옆에 있던 빗자루를 들어 여진숙을 쫓아내려 했다.“계약 기간이 끝나면 알아서 이혼하겠죠. 하지만 아직 이혼 안 했잖아요. 그쪽 아들이 지금 우리 딸을 붙잡고 안 놓아준다고요! 자꾸만 돈 가지고 사람 모욕하지 마세요. 만약 여이현도 우리 딸한테 아무 마음도 없었으면 처음부터 왜 결혼하자고 했겠어요?”온경준이 외출한 상태였기에 오늘은 두 여자의 싸움이 되었다.여진숙은 정미리가
여이현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정미리는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신호음 소리가 들려오고 여이현은 점차 분노가 치밀었다. 핸드폰을 꽉 들면서 순식간에 잘생긴 얼굴에 시커먼 먹구름이 낀 것처럼 어두워졌다.온지유는 들어오자마자 이런 여이현을 발견했다.그의 손에는 그녀의 핸드폰이 들려있었다.온지유는 가심이 덜컥 내려앉았다.병원에서 개인 정보를 쓸 때도 전부 여이현이 들고 있던 핸드폰 번호를 적은 것이다.게다가 여이현의 표정을 보니 그녀의 진료 기록과 결제 내역을 찾아본 게 아닌가 의심도 되었다.특히 여이현의 차갑게 식어버린 두 눈이 자신에게 닿자 온지유는 등골이 서늘해져 대체 어떻게 여이현을 상대해야 할지 몰랐다.이때 여이현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온지유, 우리 이혼할 거라고 장모님께 말씀드렸어?”원래부터 겁에 질린 그녀였다. 그런데 여이현의 말을 듣고 나니 괜스레 안심되었다.그녀는 입술을 틀어 물었다.“자식이 부모님께 어떻게 지내는지 근황을 말씀드리는 건 정상적인 일이잖아요.”비록 여이현이 그녀의 전화를 대신 받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와의 이혼은 예전부터 부모님께 말씀드린 적 있었기에 딱히 비밀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두렵지 않았다.그녀가 지금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여이현이 그녀가 임신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절대 놓아주지 않는 것이었다.어쩌면 그녀를 놓아줄지는 몰라도 아이는 반드시 데려가려 할 것이다.여이현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내 동의도 없이 친정집으로 가서 이혼하겠다고 말했는데, 이게 정상적인 일이라고? 온지유, 난 네 머릿속에 대체 뭐가 들었는지 정말 궁금해!”여이현은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그녀가 악플 공격을 받고 경찰서에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는 바로 배진호에게 경찰서로 가서 그녀를 구해주려 했다. 그런데 그녀는?온지유는 고개를 푹 숙였다.“딱히 다른 생각한 적 없어요. 전 그냥 계약 기간이 끝났으니까 이젠 이 결혼 생활도 마무리 지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여이현 씨, 지금 이혼하고
하지만 이채현의 말은 여이현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다. 여이현은 그녀의 쓸데없는 말이 듣고 싶지 않았다.“이채현 씨는 온지유의 자리를 채울 수 없습니다. 그러니 착각은 거기까지만 하세요!”“네, 대표님. 제가 지금 바로 식당 주방장에게 연락해 다시 주문해 오겠습니다.”이채현은 여이현을 힐끗 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여이현은 차갑게 말했다.“됐습니다!”말을 마친 뒤 자리에서 일어나 이채현을 뒤로 한 채 방을 나가버렸다.여이현이 사무실을 나가도 이채현은 여전히 그 자리 그대로 서 있었다. 여이현은 그녀가 온지유의 자리를 대신에 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온지유가 그녀를 채용한 것은 원래부터 자신의 자리를 그녀가 대신하길 바라서였다.여이현의 반응을 보니 언제든지 그녀를 해고할 수 있을 것 같았다.그녀가 입사한 회사는 여진이었다. 만약 여이현에게 해고당한다면 다른 회사로 간다고 해도 그녀의 이력서를 본 순간 대부분 거절할 것이 분명했다.더구나 그녀의 상사는 이 도시에서 제일 권력자로 불리는 여씨 집안의 후계자였다.그렇게 생각하니 이채현의 눈빛이 달라졌다.‘반드시 살아남을 거야!'...온지유는 여이현의 말대로 수려원으로 가지 않았다.본가로 돌아왔다.부모님은 처음부터 그녀가 여이현과 계약 결혼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정미리는 그녀가 이혼할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하지만 지난번 여이현이 그녀와 함께 온재준의 장례식에 참석했을 때도 정미리는 여이현의 앞에서 단 한 번도 이혼 얘기를 꺼내지 않았기에 갑자기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이혼 얘기를 꺼낸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어 부모님 집으로 온 것이다.그녀가 본가로 오자마자 심각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 있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온경준은 그녀가 들어오자 바로 입을 열었다.“마침 잘 왔구나. 오늘부터 여이현 그 녀석 집으로 가지 말아라. 그냥 이혼 서류에 사인해서 택배로 보내. 그 녀석이 사인을 안 하려거든 그럼 이혼 소송 걸어!”여진숙이 찾아왔던 시간대에 온경준은 외출한 상태였다. 만약 그때
정미리는 생각이 달랐다.“그 여자가 또 찾아온다면 그땐 절대 그냥 돌아가게 하지 않을 거예요! 우리가 잘 못 한 게 있는 것도 아니고 왜 그 여자를 두려워해야 하는데요?!”온지유의 눈가가 붉어졌다.두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도 사실상 전부 그녀를 위해서였다.온지유는 살짝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전 두 분이 다른 사람과 다툼이 일어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요. 시어머님 일은 제가 해결할게요.”여진숙은 원래부터 그녀를 무시하고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여이현이 이혼을 원치 않고 있었기에 어쩌면 여진숙 쪽을 해결할 좋은 기회일지도 모른다.그녀는 부모님께 저녁을 해드리고 나서야 집에서 나왔다.그러나 아파트 단지 입구로 나와 택시를 잡으려 할 때 길가에 서 있는 검은색 차량을 발견했다. 창문이 스르륵 내려가고 여이현의 얼굴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그는 창문으로 팔을 내놓고 있었고 긴 손가락 사이엔 반쯤 타버린 담배가 있었다.온지유는 머뭇거리다가 그에게 다가갔다.문을 여는 그녀의 행동은 바로 여이현의 주의를 끌었다.여이현은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그녀를 보았을 땐 그녀는 이미 조수석에 앉은 상태였다. 설령 여이현이 창문을 열고 담배를 태웠다고 해도 차 안에는 코를 찌르는 매캐한 담배 냄새가 났다.아마도 임신한 탓에 후각이 예민해진 것 같았다.예전의 그녀는 이 정도 담배 냄새를 맡아도 아무렇지 않았었다.여이현이 담담하게 말했다.“넌 이채현을 너처럼 똑같이 가르친 거야?”“아니요.”온지유는 여이현이 갑자기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지만 바로 부정했다.지원자 중에서 이채현을 뽑지 않았다고 해도 그녀는 똑같이 상세한 정보가 적힌 노트를 다른 사람에게 주었을 것이다. 이채현이 잘 해내고 있다는 것은 그녀가 눈치를 잘 살폈기 때문이다.일도 깔끔하게 처리하고 머리도 좋았기에 금방 여이현의 인정을 받아냈다.여이현은 코웃음을 쳤다.“네가 나간 후에 이채현이 뭘 했는지 알기나 해? 마음대로 내 일정을 짜려고 하더군. 네 자리를 대신할 생각을 하고
옆에 있던 온지유는 들리는 ‘중독'이라는 두 글자에 어안이 벙벙해졌다.‘노승아 씨 병원에 있는 거 아니었나? 병원에서 중독되었다고?'‘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노승아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가슴이 차갑게 식어갔다. 여이현은 그녀의 상태를 알고 있었음에도 바로 달려오지 않았다. 예전의 여이현이였다면 분명 소식을 듣고 당장 달려와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을 것인데 그는 변해버렸다.그녀는 바로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이현 오빠, 혹시 내가 꾀병 부린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야, 내 모든 검진 결과가 그 자양제에 문제가 있다고 나왔어. 그 자양제 성분을 지금 분석하고 있다고.”온지유는 그제야 상황을 알게 되었다.노승아는 자양제를 먹고 중독되었다. 그리고 그 자양제는 그녀가 가져다준 것이다. 여진숙은 노승아를 아주 예뻐해 노승아의 건강에 좋은 보약을 지어왔다.그러니 여진숙은 자양제에 독을 탈 사람이 아니었다.그러면 유일하게 남은 의심 가는 사람은 그녀였다.온지유가 차갑게 말했다.“전 어머님이 가져온 그대로 병원에 가져다드렸어요. 안에 어떤 보약이 들어있는지도 열어보지 않아서 몰라요. 만약 제가 열어보았다면 노승아 씨가 받자마자 눈치 못 챌 리가 없잖아요.”그녀가 하지 않은 일이니 굳이 억울하게 당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핸드폰 너머에 있던 노승아도 온지유의 말을 전부 듣고 있었다. 핸드폰을 잡은 그녀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가고 표정이 사납게 변했다. 그녀는 온지유가 여이현의 곁에 있으리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게다가 온지유의 목소리가 이렇듯 잘 들리는 것을 보면 아주 가까이 붙어 앉아 있는 것이 분명했다.대체 어떤 공간에 같이 있어야 온지유의 목소리가 이 정도로 잘 들려올까?“온지유 씨, 전 누군가 독을 탔다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요. 그런데 먼저 그 얘기를 꺼내다니 지금 자백하는 건가요?”노승아는 이를 빠득 갈면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꾹꾹 눌렀다.여이현은 두 사람이 핸드폰으로 말다툼을 벌이는 모습을 구경하고 싶지 않았다.“그
신무열은 김혜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걱정 끼쳐서 미안해.”“무열 씨, 제발 꼭 좋아져야 해요. 이렇게 날 떠나면 안 돼요. 우리... 우리 아직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고 다 아쉬움으로 남았잖아요.”김혜연은 신무열을 꼭 끌어안으며 목소리가 갈라질 정도로 간절히 말했다.그녀는 정말로 두려웠다.만약 신무열의 마음속에 모든 분야에 출중한 완벽한 존재가 있었다면 그녀는 이렇게까지 고통스럽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아린의 경우는 달랐다. 모든 조건을 떼어 놓고 보면 말이다.김혜연에게는 선택지가 주어졌지만 선택을 하지 않은 건 그녀 자신이었다.김혜연은 신무열의 남은 생이 죄책감 속에서 허비되지 않기를 바랐다.신무열은 김헤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네가 하려는 말 다 알아. 걱정하지 마. 나도 최선을 다해 이전의 일들에서 벗어나려고 할게.”김혜연은 그런 문제들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신무열은 그녀의 진심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원망하지 않았다.이때, 인명진이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신무열의 약물 의존은 법로가 책임지고 있었고, 인명진은 그의 심리 치료를 맡게 되었다.신무열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그러나 아린이 자신의 품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본 그는 마음의 상처를 도저히 치유할 수 없었다.인명진은 그의 마음을 이해했다.그는 최면을 통해 신무열의 내면을 하나씩 풀어가며 그의 마음을 안정시키려 노력했다.신무열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저는 누구도 죽이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저 때문에 죽어가요. 죽음이 이렇게도 불공평하고 아무 소리도 없이 다가온다는 걸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신무열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씩 흘러나왔다.인명진은 낮은 목소리로 그를 위로했다.“모든 일에는 아쉬움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무열 씨는 최선을 다했고 아린을 방치한 것도 아니었잖아요. 현실은 잔혹해요. 무열 씨에게는 방법이 없었고, 아린에게는 죽음이 오히려 해방이었을지도 모르죠.”“노예 수용소에 있던 사람들은 수천, 수만 명이었어요
신무열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고통스럽게 절규했다.그의 이런 모습을 본 온지유는 가슴이 찢어졌다. 매일 곁에서 지켜보는 김혜연에게는 더 큰 고통이었다.온지유는 신무열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부드럽게 말했다.“오빠, 그건 오빠 잘못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너무 자신을 몰아붙이지 말아요...”하지만 신무열은 그녀의 말을 끊으며 힘겹게 말했다.“아니, 내 잘못이야. 만약 내가 더 잘했다면 아린은 희생하지 않았을 거야. 죽음을 많이 봐왔지만 이번처럼 고통스러운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지유야, 너도 알잖아? 난 아린이 눈앞에서 죽는 걸 직접 봤어...”그의 목소리는 쉰 듯한 낮은 톤으로 하나하나 쏟아져 나왔고, 온지유는 처음으로 신무열이 이렇게 절망하는 모습을 보게됐다.도와주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그녀는 무력감을 느꼈다.신무열이 감정을 통제하지 못해 스스로를 해칠까 두려웠던 온지유는 급히 법로에게 전화를 걸었다.곧 법로는 실험실 사람들과 함께 그들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신무열의 상태를 본 법로는 마음이 아팠다.신무열은 그의 하나뿐인 아들이다!상태를 점검한 법로는 신무열이 몰래 페노바르비탈을 복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더욱 심각한 것은, 이 약물은 한때 법로거 개량했던 중독성을 유발하는 형태였다는 점이었다.신무열의 방금 전 감정 폭발은 약을 제때 복용하지 못해 나타난 금단 증상이었다.법로는 즉시 실험실의 약물 사용 규정을 엄격히 강화했다.앞으로는 모든 약물 사용이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명령했다.또한, 신무열이 약물을 복용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을 철저히 관리했다.신무열은 Y국의 수령으로, 많은 이들이 그를 끌어내리고 새 인물을 세우고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만약 그의 약물 복용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면 반드시 정치적으로 이용될 것이 분명했다.김혜연은 신무열의 곁을 지키고 싶었지만 법로가 이를 막아섰다.“신무열이 자리를 비우는 건 공적인 이유로는 가능하다. 하지만 네가 자리를 비우
케빈은 단 한 가지 뜻만을 품고 있었다.반드시 Y국을, 그리고 신무열을 지키겠다는 결심이었다.신무열과 이 나라는 그의 누나 아린이 목숨을 바쳐 지키고자 했던 것들이었기 때문이다.케빈이 떠나는 날 온지유가 그를 배웅하러 나왔다.케빈은 돈도, 지위도, 그 외의 물질적인 것들은 모두 원하지 않았다.온지유가 케빈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직접 구해 온 평안을 비는 부적뿐이었다.“케빈, 국경은 힘든 곳이야. 건강히 지내야 해. 네 누나는 떠났지만 우리는 언제까지나 네 가족이야. 언제든 돌아와도 돼.”온지유의 말에 케빈은 미소를 지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었다.누나가 죽은 이상 이곳에는 더 이상 자신의 집은 없었다.온지유가 그렇게 말해줬지만 그들에게도 자신들만의 삶이 있었다.케빈은 이제 네다섯 살의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 이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케빈이 떠난 뒤 아린에 관한 일은 잘 마무리되었다.하지만 온지유는 신무열의 정신 상태를 걱정해 한동안 Y국에 머물렀다.겉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상태는 눈에 띄게 나빠졌다.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고 표정은 지쳐 보였으며 전혀 활기가 없었다.온지유는 더 이상 그를 방치할 수 없었다.“이렇게 지내는 건 정말 위험해 보여요. 밤마다 잠을 잘 자지 못하는 거죠? 도저히 안 되겠으면 내가 명진 씨에게 연락해서 좀 봐달라 할게요.”신무열의 성격상 그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문제를 말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인명진이라면 다를 것이다. 같은 또래라 거리낌이 없기 때문이었다.“아무것도...”신무열은 온지유에게 솔직히 털어놓을 생각이 없었다.하지만 그의 말을 김혜연이 끊어버렸다.“어떻게 아무 일도 없겠어요! 밤마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계속 아린을 되뇌고 있잖아요! 무열 씨, 지금 당신은 아직도 아린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고요. 당신은 최선을 다했잖아요!”신무열은 전쟁 속에서 수많은 죽음을 목격했다.김혜연도 아린이 신무열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케빈은 여전히 고집스러운 태도로 소리쳤다.“제 생각은 달라요! 당신들은 신분 문제 때문에 제 누나를 구하려 하지 않은 거예요!”법로는 조용히 말했다.“미안하다. 과거에 내가 너무 집착했었지. 죽은 사람을 되살리고자 하는 욕망, 어떤 목적을 이루고자 했던 욕심... 하지만 결국 그것들은 내가 만든 환상이었다는 걸 깨달았다.”“네 누나의 죽음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안다. 하지만 Y국의 발전은 멈출 수 없다. 네가 원한다면 그들을 너에게 넘겨주게 할 것이다. 또 너에게 필요한 보상도 줄 거고 내가 방금 한 약속들도 모두 지킬 테다.”법로는 한숨을 쉬며 케빈 쪽으로 걸어갔다.그는 이미 결심했다. 만약 케빈이 자신에게 손을 올리거나 목숨을 원한다면 그는 이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그는 저항하지 않을 것이고 온지유와 신무열에게도 케빈을 막지 말라고 당부할 생각이었다.비록 법로는 직접 말하지 않았지만 온지유와 신무열은 이미 그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케빈! 네 누나를 죽게 한 건 우리가 아니야! 너희는 Y국의 국민이잖아. 네 누나가 무열 씨에게 사랑이 없었다 해도 애국심은 분명히 있었을 거야. 안그래?”온지유의 말은 케빈의 마음을 찔렀다. 그는 과거 자신과 아린이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아린은 신무열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애정을 품고 있었고, 신무열과 관련된 모든 소식을 모았다.신문에서 오려낸 사진들, 비디오에서 캡처한 화면, 심지어 직접 인쇄한 이미지까지.케빈은 그녀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누나와 선생님의 신분 차이가 이렇게 큰데 집착하는 이유가 뭐야? 설마 나중에는 선생님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겠다고 하는 건 아니지?”그는 자신의 말이 현실이 될 줄은 몰랐다.아린이 그때 했던 대답이 선명하게 기억났다.“내가 선생님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선생님은 이 나라를 이끄는 사람이셔. 만약 내가 선생님을 위해 죽는다면 그건 모두를 위한 죽음이고 정말 영광스러운 일일 거야.”온지유가 같은 이야기를 꺼내고 나서야 케빈은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케빈은 고통 속에서 절규했다.노예 수용소에는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결국 그들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Y국에는 그렇게 많은 약초가 있는데 그의 누나 하나 살리지 못했다는 말인가?결국 케빈은 그의 누나가 신무열을 좋아했기 때문에, 그녀가 신무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두려워해서가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케빈은 가슴을 움켜쥐며 외쳤다.“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었고, 그렇게 많은 실험을 해왔잖아요. 그런데 왜 제 누나만큼은 구하지 않으려 한 거죠?”이성을 잃은 케빈이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모를 상황에 신무열은 법로 앞에 서서 그를 막아섰다.그의 목소리는 처연했다.“여러 방법을 시도해 봤지만 네 누나를 살리지 못한 건 내 무능함의 결과다. 복수를 원한다면 내 목숨을 가져가.”신무열의 눈빛은 확고했다.“안 돼요! 당신은 지금 Y국의 수령이에요. 꼭 누군가 죽어야 분이 풀리겠다면 차라리 제 목숨을 가져가세요!”김혜연은 신무열을 사랑했다. 그녀는 신무열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을 눈 뜨고 볼 수 없었다.그녀는 즉시 두 팔을 벌려 신무열을 막아섰다.그들은 이제 막 신혼이었다. 결혼식에는 다른 목적이 있었고, 신혼 첫날밤도 여러 사정으로 아쉬웠다.이제 둘 중 하나라도 죽는다면 그들의 이야기는 처참한 비극으로 끝날 것이다.이때 법로가 앞으로 나섰다.“내가 네 누나를 구하지 못한 게 문제다. 나를 죽여라.”그는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신무열은 법로가 가장 신뢰하는 후계자였고 Y국의 미래는 모두가 인정할 만큼 밝았다.신무열이 죽는다면 이는 나라의 큰 손실이 될 것이다.법로는 자신이 죽더라도 신무열을 희생시킬 수는 없었다.그리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삶을 이어가야 한다.신무열과 김혜연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잘못한 사람은 바로 자신이라며 법로는 그 모든 책임을 자신이 감당하겠다고 했다.케빈은 자신의 누나가 죽은 것에 대한 슬픔과 분노로 마음의 균형을 잃었다.그가 정말로 법로나 신무열을 죽이기라도 한다면 나라 전체의
이것은 신무열이 해줄 수 있는 가장 진심 어린 동시에 가장 무력한 축복이었다.처음엔 아린의 독을 법로가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법로에게는 아무런 방법도 없었고 결국 그는 아린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신무열은 아린의 곁에서 밤을 지새우고 마지막엔 직접 그녀를 안치했다.김혜연은 그를 찾지 않았다.그녀는 신무열이 지금 힘들어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고 충분히 이해하며 기다릴 수 있었다.삶은 원래 아쉬움이 남는 법이었다.돌아온 신무열을 김혜연은 꼭 끌어안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의 침묵은 가벼운 몇 마디 말보다 더 큰 위로가 되었다.“샤워하고 푹 자요. 살아 있는 우리는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해요. Y국의 사람들은 아직 우릴 필요로 하니까요.”김혜연은 신무열의 내조자로서 Y국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그를 도울 각오를 하고 있었다.신무열은 입을 열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목이 막혀오고 가슴은 무거운 돌을 얹은 것처럼 답답했다.심혜연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린은 정말 좋은 사람이었어요. 자신의 목숨을 바쳐 당신에게 해를 끼치려던 사람들을 막아줬잖아요.”만약 아린이 자신의 목숨을 아끼는 사람이었다면, 그녀는 그들과 협력해 신무열을 해쳤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아린은 그러지 않았다.그녀 덕분에 신무열은 위협의 존재를 미리 알아차리고 그들을 제거할 수 있었다.“무열 씨, 우리 앞으로 매년 아린 산소에 찾아가고 가족도 잘 보살펴줘요.”“그래.”“신혼 첫날 밤인데... 미안해.”천천히 입을 연 신무열의 목소리는 몹시 가라앉아 있었다.아린은 진심으로 그를 위해 생명을 바쳤지만 김혜연 역시 진심으로 그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 심지어 결혼식과 신혼 첫날밤에도 그는 다른 이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김혜연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이해해요. 모든 걸 알고 있는 제가 어떻게 무열 씨를 원망할 수 있겠어요? 이번 결혼식은 원래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한 것이잖아요. 난 전혀 신경
“다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너무 큰 부담을 가지지 마요.”온지유는 김혜연을 다독이며 말했다.김혜연은 곧 마음속 불안했던 감정을 털어내고 안정을 되찾았다.그들의 결혼식은 화려하게 열렸고 신무열은 이 기회를 이용해 아린에게 독을 투입한 범인들을 찾아냈다.그는 그들에게 조건을 내걸었다.“목숨은 살려줄 테니 해독제를 내놔.”결혼식은 일부러 범인들에게 자신이 행복에 취해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기 위한 연출이었다.그들은 허상에 속아 방심해 결국 덫에 걸려들었다.“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곁에 있는 법로조차도 해독제를 못 개발했나봐? 그런데 우리에게 있을 리가 없잖아.”만약 해독제가 있었다면 법로는 이미 아린을 살렸을 것이다.지금 아린은 며칠밖에 못 살아갈 상태였다.그들은 아린을 이용해 정보를 얻은 후 그녀를 제거하려고 했지만 아린은 신무열에게 끝까지 충성을 다했다.심지어 그녀는 죽음을 선택하더라도 신무열을 해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더군다나 신무열이 자신의 결혼식을 덫으로 사용해 이들을 잡아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신무열의 얼굴은 차갑게 굳었다.“해독제가 없다면 너희도 죽어야지.”그는 총알을 장전하고 무기를 아린에게 건넸다. 직접 복수하는 것만큼 후련한 건 없다.하지만 아린은 이미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가 이들을 처치한다고 해도 자신의 삶은 더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신무열이 직접 건네준 무기였기에 아린은 그의 뜻을 따랐다.‘탕! 탕! 탕!’눈앞의 사람들은 총소리와 함께 차례로 쓰러졌다.그러나 아린은 자신의 힘으로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뒤로 쓰러졌다.신무열 재빨리 그녀를 부축했다.그 순간 아린의 입에서 피가 쏟아져 나오고, 눈에서도 피가 흘러나왔다. 신무열은 그 모습을 보고 크게 외쳤다.“누구 없어! 빨리 이쪽으로 와!”아린은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요, 신무열 선생님.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버티려고 했는데 자신을 과대평가했나 봐요... 기대 같은 건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아린은 애초에
법로의 표정은 여전히 엄숙했다.온지유는 이런 소식을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지금 이 상황에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무엇을 말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지금은 침묵이 가장 좋은 답변일지도 모른다.신무열 또한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아린에게 꼭 살리겠다고 약속했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신무열은 깊은 죄책감에 사로잡힌 채 아린이 있는 침대로 다가갔다.“미안해. 한 몸 바쳐 중요한 정보를 전해준 네 목숨을 결국 지킬 수 없었어.”아린은 침대에 누워있었다. 몸속의 독으로 인해 얼굴은 이미 다 망가졌지만, 신무열이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렇게 대단한 정보도 아니에요. 제가 말하지 않아도 결국 무열 씨는 모든 걸 알게 됐을 거예요.”그녀는 자처해서 한 것이었고 이 일로 인해 신무열이 어떤 마음의 짐도 가지지 않길 바랐다.신무열은 보이지 않는 손에 심장이 쥐어 짜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자신을 위해 한 몸 바쳐 싸운 아린을 위해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는 사실에 목이 막혔다. 따로 방법이 없다면 이대로 그녀가 죽어 가는 걸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신무열은 그녀가 어떤 후회도 남기지 않도록 해주겠다고 결심했다.신무열은 아린에게 약속했다.“내 무능함 때문에 네 독을 풀어주지 못했지만 걱정하지 마. 나는 절대 널 포기하지 않을 거야. 그놈들한테 건 현상금도 아직 유효해. 정 안 된다면... 내가 반드시 복수해 줄게. 마지막으로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다면 나에게 말해줘.”신무열의 눈빛은 확고했다.아린이 어떤 소원이든 말하든 그는 반드시 그것을 이뤄줄 생각이었다.아린은 신무열이 김혜연과 결혼할 것을 알고 있었다.그랬기에 두 사람을 곤란하게 하거나 결혼 전에 그의 마음을 흔들고 싶지 않았다.아린은 끝까지 미소를 유지하며 말했다.“신무열 선생님, 제가 당신에게 이 정보를 전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당신이 저를 살리려 노력해 주고 제 곁에 있어 준 것만으로도 충분해요.”“혜연
온지유는 참지 못하고 농담을 던졌다.“결혼 후엔 아이도 빨리 낳아야겠네요. 나중에 아기가 태어나면 나도 좀 같이 놀아줘야죠.”“넌 이제 Y국에 있지도 않고 아버지도 같이 경성에 갔잖아. 차라리 Y국으로 와. 내가 널 고용할게.”신무열은 단숨에 말을 이어갔다.사실 거리가 그들 사이의 큰 걸림돌이었다. 온지유가 경성에 남기로 한 건 그녀의 선택이지만 신무열은 그녀가 Y국에 머물러 주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Y국은 그들의 뿌리와 영혼이 있는 곳이며 오빠로서 여동생에게 여러모로 보답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온지유도 신무열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이현이 경성에 있고 양부모도 그곳에 있는 온지유에게는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없었다.게다가 온지유는 Y국을 관리하는 일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온지유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형수가 아이를 낳게 되면 내가 와서 돌봐줄게요.”두 사람에겐 어머니가 없었고 신무열의 능력으로 아이가 태어날 때 산후조리사는 고용할 수 있다 해도 가족의 보살핌을 대체할 수는 없을 것이다.김혜연은 온지유가 ‘형수’라 부르는 말에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다.신무열이 자신을 인정해 주고 신무열 곁의 모든 사람이 그녀를 받아들여 주고 있다는 것이 참 다행스러웠다.신무열은 아린의 문제에 대해 법로에게 말할 필요가 있었다.“아버지, 제 친구가 노석명이 개발한 독약의 개량품에 감염되었습니다. 직접 한 번 살펴봐 주실 수 있을까요?”법로는 노석명의 이름을 듣고는 눈빛이 어두워졌다.“노석명의 독약이라니? 그놈은 이미 처형되어 사람의 형체조차 잃고 혀마저 잘려 매일 돼지처럼 살고 있다. 노석명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이냐?”혹은, 눈치도 없는 누군가가 아직도 노석명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다는 것일지도 몰랐다.한편, 온지유는 ‘아린’이라는 이름을 듣자 과거 Y국 북부에서 처음 신무열을 만났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내가 아는 그 아린 맞아요?”“그래.”신무열은 숨기지 않았다.당시 전쟁 중에 아린은 온지유에게 식사를 해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