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이현은 침묵했다.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의 입술은 일자가 되어 불쾌함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고 잘생긴 얼굴은 유난히도 싸늘하게 보였다.“온지유, 이혼하기 위해 지금 불쌍한 척 연기하는 거야? 하, 지금 당장이라도 연예계 데뷔해도 손색이 없겠네.”비꼬는 어투가 그녀의 귓가에 들어왔다.온지유는 믿기지 않았다.“이현 씨 눈에는 내가 연기하는 거로 보여요?”그녀는 그의 곁에 꽤나 오랫동안 있었다. 설령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도 그녀의 성격만큼은 파악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는 그녀의 성격마저 잘 몰랐다.그녀에게 이런 말을 했다는 자체가 그녀는 조금 충격이었다.온지유는 실망을 느꼈다.“그래요, 그렇게 생각하세요. 어차피 우린 계약 결혼한 거니까 결혼 생활을 제외한 다른 건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되죠. 저한테 그럴 자유가 있으니까 말이에요. 이현 씨도 제 자유를 억압할 권리는 없어요.”연예계로 데뷔하든 말든 전부 그녀의 자유였다.노승아가 중독되었다고 했으니 그녀는 자신을 위해 결백을 밝혀야 했다.“대표님, 출발하실 건가요? 혹시 아직도 시동 걸 생각이 없으시면 전 이만 내릴게요.”말을 마친 뒤 온지유는 문을 열려고 했다.그러나 여이현이 버튼을 꾹 누르며 잠가 버렸다.그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안전벨트 매.”여이현이 운전할 기미를 보이니 그녀도 딱히 할 말이 없었다.빠르게 여이현은 수려원에 도착했다.옷은 전부 원래 살던 집에 있었기에 수려원에서 정리할 짐이라곤 딱히 없었다. 게다가 그녀의 옷은 대부분 여이현이 배진호를 시켜 새로 산 것이었다.온지유는 친구들을 떠올렸다.그런데 탐정과 경찰이 존재할 줄은 몰랐다. 그녀는 바로 경찰에 신고한 뒤 여씨 가문에서 나와 차를 타고 병원에 들어가는 CCTV 영상까지 전부 찾아냈다.동시에 보약을 지은 업체도 찾아내 성분을 분석했다.그녀가 말한 대로 보약 포장은 2차 개봉한 흔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노승아가 제일 처음 개봉했다는 의미였다.다만 온지유는
[와, 대박. 이걸 소재로 영화를 찍어도 되겠네. 분명 대박 날 거야!]...온지유는 더는 댓글을 읽어보지 않았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증거를 올린 이상 그녀가 결백하다는 것을 밝힐 수 있었고 인터넷에서 뭐라고 하든 이제 더는 그녀와 상관없는 일이 된다.수려원에서 살고 있었기에 그녀는 조금의 물건만 남겨두었다.필요한 것만 가방에 챙기고 필요하지 않은 건 대부분 남겨두었다.물건은 딱히 많지 않았기에 빠르게 정리를 끝마칠 수 있었다.문을 열자 방 앞에 서 있는 여이현을 발견했다. 그는 그녀가 들고 있는 짐을 빤히 보더니 한껏 가라앉은 눈빛으로 변했다.“원래는 이현 씨에게 증거를 보여주려고 했었어요. 하지만 저를 향한 악플이 너무도 심해서 결국 제 계정에 올려서 결백을 밝히는 수밖에 없었어요.”노승아가 정말로 그녀를 해치려 하든, 아니면 누군가가 그녀가 독을 탔다고 의심을 하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녀는 이미 결백을 밝힌 상태였으니 말이다. 더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여이현이 화가 났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그러나 여이현은 인터넷에 올라온 것들에 관해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 댓글을 보지도 않았다. 그가 지금 신경 쓰는 건 온지유 손에 들려있는 짐과 그녀가 내뱉은 말이었다.“온지유, 자꾸만 내 인내심의 한계에 도전하려 하지 마.”여이현이 서슬 퍼런 목소리로 말했다.온지유는 그가 노승아 때문에 화난 것으로 생각하며 냉정하게 말했다.“제가 제 결백을 밝힌 게, 그게 이현 씨 인내심의 한계에 도전하는 일이었어요? 왜죠, 이 일이 노승아 씨와 연관이 있어서 그런 건가요?”그녀는 자신의 결백을 밝히자 네티즌들은 노승아의 자작극이라며 몰아갔다. 하지만 그것은 네티즌의 생각일 뿐 그녀와 아무런 관계도 없지 않은가.잔뜩 어두워진 그의 안색이 모든 것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온지유는 비록 마음이 괴롭긴 했지만, 어차피 그와 이혼할 것이 아니던가.게다가 분명하게 말을 해줘야 나중에 덜 고통스러울 것이다.일자로 된 여이현의 입술은 심기 불편함을 그대
온지유의 검은 두 눈동자엔 단호함이 담겨 있었고 예전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다음 주 수요일에 접수하러 가지.”여이현이 차갑게 말했다.온지유는 결심한 것이다.그녀는 시간을 계산해 보았다. 오늘이 월요일이니 다음 주 수요일까지 며칠의 시간이 있었다. 1분 1초마다 세상은 변해가는 데 더구나 며칠이나 더 기다려야 한다니!온지유는 입술을 틀어 물었다.“왜 오늘은 안 되는 건데요? 전 시간을 더 끌고 싶지 않아요.”“승아 일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어.”그는 차갑게 이 말을 툭 던졌다. 그녀와 더는 이 일에 관해 얘기를 나누고 싶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그렇다는 건 그녀와 1초도 말을 섞기 싫다는 의미기도 했다.게다가 그가 내뱉은 말에도 문제가 있었다.그는 노승아가 중독된 일에 그녀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하지만 그녀는 이미 증거를 자신의 계정에 올렸는데 여이현이 여전히 이런 태도를 보인다는 것은 그녀가 조사한 것을 믿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그래도 그가 이혼 서류에 사인해 주기로 했으니 전처럼 계속 버티고 있는 것보단 나았다....서재로 돌아온 여이현.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자마자 배진호의 연락을 받게 되었다.배진호는 사실 그대로 그에게 알렸다.“대표님, 사모님께서 결백을 증명하신 뒤 네티즌들은 현재 노승아 씨가 자작극을 벌인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기획사도 현재 논란에 휩싸였습니다.”이것은 전부 그가 예측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일이 커지면 회사에 영향이 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그럼 그 보약은 어떻게 된 거죠? 누가 독을 탄 건지 알아냈나요?”여이현은 눈을 가늘게 접었다. 그의 눈빛에선 서늘함이 느껴졌다.배진호가 답했다.“그쪽은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었습니다. 모든 정황이 독을 탄 사람은 사모님이라고 나오고 있습니다만 사모님께선 이미 결백을 증명하셨죠.”그 말인즉, 독을 탄 사람은 노승아일 가능성이 아주 크다는 의미기도 했다. 여이현이 기억하는 노승아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도 아끼지 않고
현재호는 찻잔을 내려놓고 나직하게 말했다.“쓸데없는 말 좀 작작 해. 이현이가 어련히 알아서 이 일을 해결하겠지.”여진숙은 더 화가 났다.“당신은 대체 왜 그렇게 무관심한 건데요? 알아서 해결한다니, 알아서 해결하다가 나중에 이혼 안 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현재호는 고개를 들어 여진숙을 보며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이혼하든 말든 현이가 알아서 하겠지. 뭘 그렇게 당신이 화를 내고 걱정해?”“내 아들인데, 내가 화를 내고 걱정하지 않으면 누가 해요?”여진숙의 목소리는 점점 더 높아졌다.그런 그녀의 모습을 본 현재호는 질린다는 눈빛으로 보다가 다시 원래의 표정대로 돌아왔다.여진숙은 더 짜증이 치밀었다.“당신은 현이를 아들이라고 생각한 적 있기나 해요? 그동안 한 번도 현이한테 관심도 없었잖아요. 당신이 이 집안에 존재하든 말든 변하는 게 하나도 없고 말이에요!”“그래도 그동안 현이가 알아서 잘 컸잖아?”현재호는 여전히 담담했다. 마치 여이현을 자기 아들이 아닌 것처럼 얘기하고 있었다.여진숙이 말했다.“현이가 부모인 우리한테 거리를 두는데, 대체 뭐가 잘 컸다는 거예요?! 이건 다 당신 탓이에요. 당신만 멀쩡한 아빠였으면 현이도 우리한테 선을 긋지 않았을 거라고요!”여진숙은 흥분한 상태였다. 두 눈에 눈물이 핑 돌면서 현재호를 향해 손가락질도 했다.현재호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익숙하면서도 질려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 말했다.“난 물건 가지러 잠깐 들린 거야. 물건만 챙기고 바로 갈 거니까 내 밥은 준비할 필요 없어.”말을 마친 그는 서재로 들어갔다.여진숙은 그를 보며 분노했다.“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나가려는 거예요! 당신이 어떻게 나한테 그래? 밖에서 만나는 여자가 나보다 더 소중하다는 거예요? 그럼 앞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말아요! 평생, 영원히!”현재호는 그녀의 말을 듣지도 않고 있었다. 물건을 챙긴 뒤 여전히 히스테리를 부리는 그녀를 무시하며 차 타고 떠나버렸다.여진숙의 얼굴은 이미 눈물범벅이었다.
이 말을 꺼낸 여이현의 어투는 한없이 차가웠다.온지유는 여이현의 어투에서 가소로움과 차가움을 눈치챘다.너무도 아이러니했다.“그냥 물어본 거예요. 공짜 여행을 싫어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어요. 알겠어요, 혹시 다른 할 말은 없죠?”그 말인즉 별다른 할 말 없으면 백지희의 집으로 떠나겠다는 의미였다.여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지유도 그가 말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서재에서 나갔다.그러나 여이현은 노승아가 손목을 그으며 자살할 줄은 전혀 몰랐다.노승아의 매니저인 김예진이 급하게 그에게 연락했다.“대표님, 승아 언니는 모든 잘못을 온지유 씨에게 돌릴 생각 하지 않으셨어요. 그 보약도 제가 보는 앞에서 드셨어요. 전 언니 곁에서 오랫동안 일했고 언니를 해칠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었어요. 언니는 대표님 회사에 피해를 주는 게 싫어서 결국 목숨으로 결백하다는 걸 증명하려고 했어요...”김예진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려왔다. 두려움에 휩싸인 그런 목소리였다.“지금 상태는 어떻죠?”여이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김예진은 울음을 터뜨렸다.“지금 응급 수술 들어갔어요. 대표님, 한 번만 와주시면 안 될까요. 저 너무 무서워요...”김예진은 더는 뒷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그러죠. 지금 갈게요.”여이현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다소 긴장한 얼굴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여이현이 차를 몰고 대문 밖까지 나왔을 때 길가에 서 있는 온지유를 발견했다.온지유는 택시를 잡고 있었다.그녀는 여이현과 더는 얽히고 싶지 않았고 여이현의 차를 타면서 운전 기사에게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고 싶지 않았다.택시가 잡히지 않아 결국 앱으로 콜택시를 불렀지만, 그녀와 아직 4.6 km 떨어진 거리에서 달려오고 있어 기다려야 했다.여이현은 그녀의 앞에서 멈추었다.“타, 데려다줄 테니까.”“괜찮아요. 콜택시 불렀어요.”여이현의 시선을 느낀 그녀는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작아졌다.그의 싸늘한 시선 탓에 등골이 서늘해진 그녀는 결국 하는 수 없이 콜택시를
그녀는 여이현이 냉정하게 생각하길 바랐다.그렇지 않으면 정말로 그녀를 노승아가 있는 곳으로 데려가 억지로 사죄하라고 할 것 같았다. 그녀에게 어떤 벌을 내릴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배 속에 있는 아이에게 영향이 간다면 평생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그녀의 어깨에 올린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렇게라도 그녀가 진정하길 바랐다.“나도 알아. 난 널 승아가 있는 곳으로 데려갈 생각 없어. 나 못 믿는다면 지금 백지희한테 연락해서 데리러 오라고 해, 그럼 되지?”지금 온지유의 상태로 여이현은 절대 혼자 가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온지유는 멍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조금 믿어지지 않았다.여이현이 더는 말이 없자 그녀는 빠르게 백지희에게 연락했다.“지희야, 내가 지금 위치를 문자로 찍어 보내줄 테니까 나 좀 데리러 와줘...”온지유의 목소리에선 떨림이 느껴졌다.백지희는 당연히 그 떨림을 눈치챘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고 대답했다.“그래, 알았어.”온지유는 백지희에게 주소를 문자로 찍어주는 동안에도 손이 덜덜 떨려왔다.그녀가 주소를 전송하는 것까지 지켜본 뒤에야 여이현은 입을 열었다.“이젠 믿어져? 난 정말로 널 승아 앞으로 데려갈 생각 없었어.”온지유는 목구멍에 가시라도 박힌 듯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여이현의 말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도 몰랐고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도 몰랐다.그녀는 그저 배 속에 있는 아이가 위험해질까 봐 두려웠고 여이현이 강제로 그녀는 노승아의 앞으로 데려가 사과하라고 할까 봐 두렵기도 했다.한참 침묵하던 그녀는 그제야 서서히 입을 열었다.“이현 씨, 노승아 씨가 자살로 결백을 증명했다고 했죠. 그런 건 저도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전 그 행동이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생각해요. 만약 절 못 믿으시겠다면 계속 사람을 시켜서 조사해도 전 괜찮아요.”온지유는 여전히 그 말을 믿고 있었다. 진실은 언젠가 밝혀진다는 그 말을.여이현은 입술을 달싹이며 말했다.“넌 이미 증거를 SNS에 올려 증명했잖아.”온
백지희는 상황을 대충 알게 되었다.방금 온지유와 여이현의 사이에 불쾌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백지희는 코웃음을 쳤다.“흥, 자살 시도한 게 뭐 대수라고. 진짜로 깊숙이 찔렀는지 아닌지는 아직 모르잖아. 그리고 보약 지은 곳에서도 2차 개봉의 흔적은 없다고 했어. 그럼 분명 노승아한테 문제가 있다는 거지.”솔직히 말해 노승아는 자살 시도를 했다는 것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돌리면서 자신은 결백하다는 걸 증거도 없이 증명할 생각인 것이다.사람들은 아마도 노승아가 목숨으로 자신이 결백하다는 것을 호소했으니 비난의 화살이 다시 온지유에게로 향해 온지유를 의심하게 된다.노승아는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었다.온지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분이 이상하리만큼 울적했다.노승아가 무슨 짓을 하든 그녀와 상관이 없었다. 다만 중요한 것은 노승아가 여이현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았고 여진숙도 노승아를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기에 엄청나게 걱정하고 있었다.백지희는 운전을 하면서 여진숙의 탓으로 돌렸다.“정말 웃기는 사람들이네. 네가 여이현이랑 아직 이혼도 안 했는데 말이야. 21세기에 그런 시어머니가 존재한다는 것도 정말 어이가 없어. 아니, 네 시어머니는 노승아를 첩으로라도 집안에 들일 생각이래?”“뭐, 아마도 그렇겠지.”여진숙은 확실히 노승아를 예뻐하면서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만약 그녀가 여이현과 계약 결혼을 하지 않았더라면 여이현과 결혼한 사람은 아마 노승아일 것이다. 게다가 여이현이 노승아를 향한 감정을 생각해보면 지금 두 사람 사이엔 분명 아이까지 있었을 것이다.온지유는 편하게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지희야, 나 너무 피곤해. 이따가 도착하면 나 좀 깨워줄래?”“그래, 좀 자.”백지희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지유가 조금이라도 더 편히 쉴 수 있도록 차 안의 온도도 조절해 주었다.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그녀는 부드럽게 운전했다....한편 여이현은 병원에 도착했다.노승아는 이미 수술실에서 나와 병실에 누워있었다. 그
“네티즌들이 너무 무서워. 나 퇴원하고 싶어.”노승아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눈가엔 미처 마르지 못한 눈물이 남아 있었다.그런 그녀의 모습은 억울해 보이면서도 가련해 보였다.여이현은 계속 말을 이었다.“나중에 내가 배 비서한테 시켜서 악플 없애거나 고소하라고 할게. 다만 지금 네 상태를 봐서는 입원해 있는 게 나을 것 같아. 배 비서한테 경호원 붙여두라고 할 테니까 넌 아무 생각도 하지 마.”노승아는 알고 있었다. 여이현은 비록 말은 이렇게 하지만 사실상 여전히 그녀와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심지어 병실로 와서부터 지금까지 그는 단 한 번도 온지유를 언급한 적 없었다.여이현은 아직도 온지유를 신경 쓰고 걱정하는 것이 분명했다.“오빠가 신경 써줬으니까 난 두렵지 않아. 하지만 오빠는 모를 거야. 네티즌들이 얼마나 무서운지. 나도 댓글을 읽다가 더는 버틸 수가 없어서, 그래서, 그래서 내가...”노승아는 더는 말을 이어가지 않고 눈물을 흘렸다.그럼에도 그녀는 최근 신경 쓰고 있던 것을 물었다.“이현 오빠, 최근에 나 보러 올 시간 있어?”여이현은 그녀에게 휴지를 건넸다.“최근 시간 없어. 바빠. 게다가 온지유랑 F 국으로 여행가기로 약속했거든.”그 말을 들은 노승아는 귀를 의심했다.‘난 이젠 더 이상 소중하지 않다는 거야?'그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이현 오빠, 나도 알아. 오빠가 지유 언니랑 결혼한 거. 그런데 두 사람은 계약 결혼이었잖아. 괜찮아... 난 기다릴 수 있어.”이렇게까지 말했으니 여이현이 그녀를 거절할 리가 없다고 생각한 그녀였다.그러나 여이현은 아주 담담하게 거절했다.“기다리지 마. 네가 내 목숨을 살려줬으니 너한테 빚을 진 거나 마찬가지지. 너와 난 그냥 지금처럼 친구로 지내면 돼.”여이현에겐 그녀는 친구밖에 되지 않았다.그는 전에 주소영과도 가까이 지냈으면서 그녀와는 선을 긋고 있었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친구라면서 연락하면 왜 바로 달려온 거야? 이현 오빠... 나한테 너무 잔인하게 그러
신무열은 김혜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걱정 끼쳐서 미안해.”“무열 씨, 제발 꼭 좋아져야 해요. 이렇게 날 떠나면 안 돼요. 우리... 우리 아직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고 다 아쉬움으로 남았잖아요.”김혜연은 신무열을 꼭 끌어안으며 목소리가 갈라질 정도로 간절히 말했다.그녀는 정말로 두려웠다.만약 신무열의 마음속에 모든 분야에 출중한 완벽한 존재가 있었다면 그녀는 이렇게까지 고통스럽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아린의 경우는 달랐다. 모든 조건을 떼어 놓고 보면 말이다.김혜연에게는 선택지가 주어졌지만 선택을 하지 않은 건 그녀 자신이었다.김혜연은 신무열의 남은 생이 죄책감 속에서 허비되지 않기를 바랐다.신무열은 김헤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네가 하려는 말 다 알아. 걱정하지 마. 나도 최선을 다해 이전의 일들에서 벗어나려고 할게.”김혜연은 그런 문제들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신무열은 그녀의 진심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원망하지 않았다.이때, 인명진이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신무열의 약물 의존은 법로가 책임지고 있었고, 인명진은 그의 심리 치료를 맡게 되었다.신무열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그러나 아린이 자신의 품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본 그는 마음의 상처를 도저히 치유할 수 없었다.인명진은 그의 마음을 이해했다.그는 최면을 통해 신무열의 내면을 하나씩 풀어가며 그의 마음을 안정시키려 노력했다.신무열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저는 누구도 죽이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저 때문에 죽어가요. 죽음이 이렇게도 불공평하고 아무 소리도 없이 다가온다는 걸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요...”신무열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씩 흘러나왔다.인명진은 낮은 목소리로 그를 위로했다.“모든 일에는 아쉬움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무열 씨는 최선을 다했고 아린을 방치한 것도 아니었잖아요. 현실은 잔혹해요. 무열 씨에게는 방법이 없었고, 아린에게는 죽음이 오히려 해방이었을지도 모르죠.”“노예 수용소에 있던 사람들은 수천, 수만 명이었어요
신무열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고통스럽게 절규했다.그의 이런 모습을 본 온지유는 가슴이 찢어졌다. 매일 곁에서 지켜보는 김혜연에게는 더 큰 고통이었다.온지유는 신무열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부드럽게 말했다.“오빠, 그건 오빠 잘못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너무 자신을 몰아붙이지 말아요...”하지만 신무열은 그녀의 말을 끊으며 힘겹게 말했다.“아니, 내 잘못이야. 만약 내가 더 잘했다면 아린은 희생하지 않았을 거야. 죽음을 많이 봐왔지만 이번처럼 고통스러운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지유야, 너도 알잖아? 난 아린이 눈앞에서 죽는 걸 직접 봤어...”그의 목소리는 쉰 듯한 낮은 톤으로 하나하나 쏟아져 나왔고, 온지유는 처음으로 신무열이 이렇게 절망하는 모습을 보게됐다.도와주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그녀는 무력감을 느꼈다.신무열이 감정을 통제하지 못해 스스로를 해칠까 두려웠던 온지유는 급히 법로에게 전화를 걸었다.곧 법로는 실험실 사람들과 함께 그들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신무열의 상태를 본 법로는 마음이 아팠다.신무열은 그의 하나뿐인 아들이다!상태를 점검한 법로는 신무열이 몰래 페노바르비탈을 복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더욱 심각한 것은, 이 약물은 한때 법로거 개량했던 중독성을 유발하는 형태였다는 점이었다.신무열의 방금 전 감정 폭발은 약을 제때 복용하지 못해 나타난 금단 증상이었다.법로는 즉시 실험실의 약물 사용 규정을 엄격히 강화했다.앞으로는 모든 약물 사용이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명령했다.또한, 신무열이 약물을 복용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을 철저히 관리했다.신무열은 Y국의 수령으로, 많은 이들이 그를 끌어내리고 새 인물을 세우고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만약 그의 약물 복용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면 반드시 정치적으로 이용될 것이 분명했다.김혜연은 신무열의 곁을 지키고 싶었지만 법로가 이를 막아섰다.“신무열이 자리를 비우는 건 공적인 이유로는 가능하다. 하지만 네가 자리를 비우
케빈은 단 한 가지 뜻만을 품고 있었다.반드시 Y국을, 그리고 신무열을 지키겠다는 결심이었다.신무열과 이 나라는 그의 누나 아린이 목숨을 바쳐 지키고자 했던 것들이었기 때문이다.케빈이 떠나는 날 온지유가 그를 배웅하러 나왔다.케빈은 돈도, 지위도, 그 외의 물질적인 것들은 모두 원하지 않았다.온지유가 케빈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직접 구해 온 평안을 비는 부적뿐이었다.“케빈, 국경은 힘든 곳이야. 건강히 지내야 해. 네 누나는 떠났지만 우리는 언제까지나 네 가족이야. 언제든 돌아와도 돼.”온지유의 말에 케빈은 미소를 지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었다.누나가 죽은 이상 이곳에는 더 이상 자신의 집은 없었다.온지유가 그렇게 말해줬지만 그들에게도 자신들만의 삶이 있었다.케빈은 이제 네다섯 살의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 이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케빈이 떠난 뒤 아린에 관한 일은 잘 마무리되었다.하지만 온지유는 신무열의 정신 상태를 걱정해 한동안 Y국에 머물렀다.겉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상태는 눈에 띄게 나빠졌다.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고 표정은 지쳐 보였으며 전혀 활기가 없었다.온지유는 더 이상 그를 방치할 수 없었다.“이렇게 지내는 건 정말 위험해 보여요. 밤마다 잠을 잘 자지 못하는 거죠? 도저히 안 되겠으면 내가 명진 씨에게 연락해서 좀 봐달라 할게요.”신무열의 성격상 그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문제를 말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인명진이라면 다를 것이다. 같은 또래라 거리낌이 없기 때문이었다.“아무것도...”신무열은 온지유에게 솔직히 털어놓을 생각이 없었다.하지만 그의 말을 김혜연이 끊어버렸다.“어떻게 아무 일도 없겠어요! 밤마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계속 아린을 되뇌고 있잖아요! 무열 씨, 지금 당신은 아직도 아린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고요. 당신은 최선을 다했잖아요!”신무열은 전쟁 속에서 수많은 죽음을 목격했다.김혜연도 아린이 신무열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케빈은 여전히 고집스러운 태도로 소리쳤다.“제 생각은 달라요! 당신들은 신분 문제 때문에 제 누나를 구하려 하지 않은 거예요!”법로는 조용히 말했다.“미안하다. 과거에 내가 너무 집착했었지. 죽은 사람을 되살리고자 하는 욕망, 어떤 목적을 이루고자 했던 욕심... 하지만 결국 그것들은 내가 만든 환상이었다는 걸 깨달았다.”“네 누나의 죽음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안다. 하지만 Y국의 발전은 멈출 수 없다. 네가 원한다면 그들을 너에게 넘겨주게 할 것이다. 또 너에게 필요한 보상도 줄 거고 내가 방금 한 약속들도 모두 지킬 테다.”법로는 한숨을 쉬며 케빈 쪽으로 걸어갔다.그는 이미 결심했다. 만약 케빈이 자신에게 손을 올리거나 목숨을 원한다면 그는 이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그는 저항하지 않을 것이고 온지유와 신무열에게도 케빈을 막지 말라고 당부할 생각이었다.비록 법로는 직접 말하지 않았지만 온지유와 신무열은 이미 그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케빈! 네 누나를 죽게 한 건 우리가 아니야! 너희는 Y국의 국민이잖아. 네 누나가 무열 씨에게 사랑이 없었다 해도 애국심은 분명히 있었을 거야. 안그래?”온지유의 말은 케빈의 마음을 찔렀다. 그는 과거 자신과 아린이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아린은 신무열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애정을 품고 있었고, 신무열과 관련된 모든 소식을 모았다.신문에서 오려낸 사진들, 비디오에서 캡처한 화면, 심지어 직접 인쇄한 이미지까지.케빈은 그녀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누나와 선생님의 신분 차이가 이렇게 큰데 집착하는 이유가 뭐야? 설마 나중에는 선생님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겠다고 하는 건 아니지?”그는 자신의 말이 현실이 될 줄은 몰랐다.아린이 그때 했던 대답이 선명하게 기억났다.“내가 선생님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선생님은 이 나라를 이끄는 사람이셔. 만약 내가 선생님을 위해 죽는다면 그건 모두를 위한 죽음이고 정말 영광스러운 일일 거야.”온지유가 같은 이야기를 꺼내고 나서야 케빈은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케빈은 고통 속에서 절규했다.노예 수용소에는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결국 그들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Y국에는 그렇게 많은 약초가 있는데 그의 누나 하나 살리지 못했다는 말인가?결국 케빈은 그의 누나가 신무열을 좋아했기 때문에, 그녀가 신무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두려워해서가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케빈은 가슴을 움켜쥐며 외쳤다.“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었고, 그렇게 많은 실험을 해왔잖아요. 그런데 왜 제 누나만큼은 구하지 않으려 한 거죠?”이성을 잃은 케빈이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모를 상황에 신무열은 법로 앞에 서서 그를 막아섰다.그의 목소리는 처연했다.“여러 방법을 시도해 봤지만 네 누나를 살리지 못한 건 내 무능함의 결과다. 복수를 원한다면 내 목숨을 가져가.”신무열의 눈빛은 확고했다.“안 돼요! 당신은 지금 Y국의 수령이에요. 꼭 누군가 죽어야 분이 풀리겠다면 차라리 제 목숨을 가져가세요!”김혜연은 신무열을 사랑했다. 그녀는 신무열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을 눈 뜨고 볼 수 없었다.그녀는 즉시 두 팔을 벌려 신무열을 막아섰다.그들은 이제 막 신혼이었다. 결혼식에는 다른 목적이 있었고, 신혼 첫날밤도 여러 사정으로 아쉬웠다.이제 둘 중 하나라도 죽는다면 그들의 이야기는 처참한 비극으로 끝날 것이다.이때 법로가 앞으로 나섰다.“내가 네 누나를 구하지 못한 게 문제다. 나를 죽여라.”그는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신무열은 법로가 가장 신뢰하는 후계자였고 Y국의 미래는 모두가 인정할 만큼 밝았다.신무열이 죽는다면 이는 나라의 큰 손실이 될 것이다.법로는 자신이 죽더라도 신무열을 희생시킬 수는 없었다.그리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삶을 이어가야 한다.신무열과 김혜연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잘못한 사람은 바로 자신이라며 법로는 그 모든 책임을 자신이 감당하겠다고 했다.케빈은 자신의 누나가 죽은 것에 대한 슬픔과 분노로 마음의 균형을 잃었다.그가 정말로 법로나 신무열을 죽이기라도 한다면 나라 전체의
이것은 신무열이 해줄 수 있는 가장 진심 어린 동시에 가장 무력한 축복이었다.처음엔 아린의 독을 법로가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법로에게는 아무런 방법도 없었고 결국 그는 아린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신무열은 아린의 곁에서 밤을 지새우고 마지막엔 직접 그녀를 안치했다.김혜연은 그를 찾지 않았다.그녀는 신무열이 지금 힘들어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고 충분히 이해하며 기다릴 수 있었다.삶은 원래 아쉬움이 남는 법이었다.돌아온 신무열을 김혜연은 꼭 끌어안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의 침묵은 가벼운 몇 마디 말보다 더 큰 위로가 되었다.“샤워하고 푹 자요. 살아 있는 우리는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해요. Y국의 사람들은 아직 우릴 필요로 하니까요.”김혜연은 신무열의 내조자로서 Y국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그를 도울 각오를 하고 있었다.신무열은 입을 열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목이 막혀오고 가슴은 무거운 돌을 얹은 것처럼 답답했다.심혜연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린은 정말 좋은 사람이었어요. 자신의 목숨을 바쳐 당신에게 해를 끼치려던 사람들을 막아줬잖아요.”만약 아린이 자신의 목숨을 아끼는 사람이었다면, 그녀는 그들과 협력해 신무열을 해쳤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아린은 그러지 않았다.그녀 덕분에 신무열은 위협의 존재를 미리 알아차리고 그들을 제거할 수 있었다.“무열 씨, 우리 앞으로 매년 아린 산소에 찾아가고 가족도 잘 보살펴줘요.”“그래.”“신혼 첫날 밤인데... 미안해.”천천히 입을 연 신무열의 목소리는 몹시 가라앉아 있었다.아린은 진심으로 그를 위해 생명을 바쳤지만 김혜연 역시 진심으로 그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 심지어 결혼식과 신혼 첫날밤에도 그는 다른 이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김혜연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이해해요. 모든 걸 알고 있는 제가 어떻게 무열 씨를 원망할 수 있겠어요? 이번 결혼식은 원래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한 것이잖아요. 난 전혀 신경
“다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너무 큰 부담을 가지지 마요.”온지유는 김혜연을 다독이며 말했다.김혜연은 곧 마음속 불안했던 감정을 털어내고 안정을 되찾았다.그들의 결혼식은 화려하게 열렸고 신무열은 이 기회를 이용해 아린에게 독을 투입한 범인들을 찾아냈다.그는 그들에게 조건을 내걸었다.“목숨은 살려줄 테니 해독제를 내놔.”결혼식은 일부러 범인들에게 자신이 행복에 취해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기 위한 연출이었다.그들은 허상에 속아 방심해 결국 덫에 걸려들었다.“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곁에 있는 법로조차도 해독제를 못 개발했나봐? 그런데 우리에게 있을 리가 없잖아.”만약 해독제가 있었다면 법로는 이미 아린을 살렸을 것이다.지금 아린은 며칠밖에 못 살아갈 상태였다.그들은 아린을 이용해 정보를 얻은 후 그녀를 제거하려고 했지만 아린은 신무열에게 끝까지 충성을 다했다.심지어 그녀는 죽음을 선택하더라도 신무열을 해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더군다나 신무열이 자신의 결혼식을 덫으로 사용해 이들을 잡아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신무열의 얼굴은 차갑게 굳었다.“해독제가 없다면 너희도 죽어야지.”그는 총알을 장전하고 무기를 아린에게 건넸다. 직접 복수하는 것만큼 후련한 건 없다.하지만 아린은 이미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가 이들을 처치한다고 해도 자신의 삶은 더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신무열이 직접 건네준 무기였기에 아린은 그의 뜻을 따랐다.‘탕! 탕! 탕!’눈앞의 사람들은 총소리와 함께 차례로 쓰러졌다.그러나 아린은 자신의 힘으로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뒤로 쓰러졌다.신무열 재빨리 그녀를 부축했다.그 순간 아린의 입에서 피가 쏟아져 나오고, 눈에서도 피가 흘러나왔다. 신무열은 그 모습을 보고 크게 외쳤다.“누구 없어! 빨리 이쪽으로 와!”아린은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요, 신무열 선생님.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버티려고 했는데 자신을 과대평가했나 봐요... 기대 같은 건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아린은 애초에
법로의 표정은 여전히 엄숙했다.온지유는 이런 소식을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지금 이 상황에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무엇을 말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지금은 침묵이 가장 좋은 답변일지도 모른다.신무열 또한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아린에게 꼭 살리겠다고 약속했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신무열은 깊은 죄책감에 사로잡힌 채 아린이 있는 침대로 다가갔다.“미안해. 한 몸 바쳐 중요한 정보를 전해준 네 목숨을 결국 지킬 수 없었어.”아린은 침대에 누워있었다. 몸속의 독으로 인해 얼굴은 이미 다 망가졌지만, 신무열이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렇게 대단한 정보도 아니에요. 제가 말하지 않아도 결국 무열 씨는 모든 걸 알게 됐을 거예요.”그녀는 자처해서 한 것이었고 이 일로 인해 신무열이 어떤 마음의 짐도 가지지 않길 바랐다.신무열은 보이지 않는 손에 심장이 쥐어 짜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자신을 위해 한 몸 바쳐 싸운 아린을 위해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는 사실에 목이 막혔다. 따로 방법이 없다면 이대로 그녀가 죽어 가는 걸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신무열은 그녀가 어떤 후회도 남기지 않도록 해주겠다고 결심했다.신무열은 아린에게 약속했다.“내 무능함 때문에 네 독을 풀어주지 못했지만 걱정하지 마. 나는 절대 널 포기하지 않을 거야. 그놈들한테 건 현상금도 아직 유효해. 정 안 된다면... 내가 반드시 복수해 줄게. 마지막으로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다면 나에게 말해줘.”신무열의 눈빛은 확고했다.아린이 어떤 소원이든 말하든 그는 반드시 그것을 이뤄줄 생각이었다.아린은 신무열이 김혜연과 결혼할 것을 알고 있었다.그랬기에 두 사람을 곤란하게 하거나 결혼 전에 그의 마음을 흔들고 싶지 않았다.아린은 끝까지 미소를 유지하며 말했다.“신무열 선생님, 제가 당신에게 이 정보를 전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당신이 저를 살리려 노력해 주고 제 곁에 있어 준 것만으로도 충분해요.”“혜연
온지유는 참지 못하고 농담을 던졌다.“결혼 후엔 아이도 빨리 낳아야겠네요. 나중에 아기가 태어나면 나도 좀 같이 놀아줘야죠.”“넌 이제 Y국에 있지도 않고 아버지도 같이 경성에 갔잖아. 차라리 Y국으로 와. 내가 널 고용할게.”신무열은 단숨에 말을 이어갔다.사실 거리가 그들 사이의 큰 걸림돌이었다. 온지유가 경성에 남기로 한 건 그녀의 선택이지만 신무열은 그녀가 Y국에 머물러 주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Y국은 그들의 뿌리와 영혼이 있는 곳이며 오빠로서 여동생에게 여러모로 보답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온지유도 신무열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이현이 경성에 있고 양부모도 그곳에 있는 온지유에게는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없었다.게다가 온지유는 Y국을 관리하는 일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온지유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형수가 아이를 낳게 되면 내가 와서 돌봐줄게요.”두 사람에겐 어머니가 없었고 신무열의 능력으로 아이가 태어날 때 산후조리사는 고용할 수 있다 해도 가족의 보살핌을 대체할 수는 없을 것이다.김혜연은 온지유가 ‘형수’라 부르는 말에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다.신무열이 자신을 인정해 주고 신무열 곁의 모든 사람이 그녀를 받아들여 주고 있다는 것이 참 다행스러웠다.신무열은 아린의 문제에 대해 법로에게 말할 필요가 있었다.“아버지, 제 친구가 노석명이 개발한 독약의 개량품에 감염되었습니다. 직접 한 번 살펴봐 주실 수 있을까요?”법로는 노석명의 이름을 듣고는 눈빛이 어두워졌다.“노석명의 독약이라니? 그놈은 이미 처형되어 사람의 형체조차 잃고 혀마저 잘려 매일 돼지처럼 살고 있다. 노석명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이냐?”혹은, 눈치도 없는 누군가가 아직도 노석명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다는 것일지도 몰랐다.한편, 온지유는 ‘아린’이라는 이름을 듣자 과거 Y국 북부에서 처음 신무열을 만났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내가 아는 그 아린 맞아요?”“그래.”신무열은 숨기지 않았다.당시 전쟁 중에 아린은 온지유에게 식사를 해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