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이현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정미리는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신호음 소리가 들려오고 여이현은 점차 분노가 치밀었다. 핸드폰을 꽉 들면서 순식간에 잘생긴 얼굴에 시커먼 먹구름이 낀 것처럼 어두워졌다.온지유는 들어오자마자 이런 여이현을 발견했다.그의 손에는 그녀의 핸드폰이 들려있었다.온지유는 가심이 덜컥 내려앉았다.병원에서 개인 정보를 쓸 때도 전부 여이현이 들고 있던 핸드폰 번호를 적은 것이다.게다가 여이현의 표정을 보니 그녀의 진료 기록과 결제 내역을 찾아본 게 아닌가 의심도 되었다.특히 여이현의 차갑게 식어버린 두 눈이 자신에게 닿자 온지유는 등골이 서늘해져 대체 어떻게 여이현을 상대해야 할지 몰랐다.이때 여이현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온지유, 우리 이혼할 거라고 장모님께 말씀드렸어?”원래부터 겁에 질린 그녀였다. 그런데 여이현의 말을 듣고 나니 괜스레 안심되었다.그녀는 입술을 틀어 물었다.“자식이 부모님께 어떻게 지내는지 근황을 말씀드리는 건 정상적인 일이잖아요.”비록 여이현이 그녀의 전화를 대신 받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와의 이혼은 예전부터 부모님께 말씀드린 적 있었기에 딱히 비밀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두렵지 않았다.그녀가 지금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여이현이 그녀가 임신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절대 놓아주지 않는 것이었다.어쩌면 그녀를 놓아줄지는 몰라도 아이는 반드시 데려가려 할 것이다.여이현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내 동의도 없이 친정집으로 가서 이혼하겠다고 말했는데, 이게 정상적인 일이라고? 온지유, 난 네 머릿속에 대체 뭐가 들었는지 정말 궁금해!”여이현은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그녀가 악플 공격을 받고 경찰서에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는 바로 배진호에게 경찰서로 가서 그녀를 구해주려 했다. 그런데 그녀는?온지유는 고개를 푹 숙였다.“딱히 다른 생각한 적 없어요. 전 그냥 계약 기간이 끝났으니까 이젠 이 결혼 생활도 마무리 지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여이현 씨, 지금 이혼하고
하지만 이채현의 말은 여이현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다. 여이현은 그녀의 쓸데없는 말이 듣고 싶지 않았다.“이채현 씨는 온지유의 자리를 채울 수 없습니다. 그러니 착각은 거기까지만 하세요!”“네, 대표님. 제가 지금 바로 식당 주방장에게 연락해 다시 주문해 오겠습니다.”이채현은 여이현을 힐끗 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여이현은 차갑게 말했다.“됐습니다!”말을 마친 뒤 자리에서 일어나 이채현을 뒤로 한 채 방을 나가버렸다.여이현이 사무실을 나가도 이채현은 여전히 그 자리 그대로 서 있었다. 여이현은 그녀가 온지유의 자리를 대신에 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온지유가 그녀를 채용한 것은 원래부터 자신의 자리를 그녀가 대신하길 바라서였다.여이현의 반응을 보니 언제든지 그녀를 해고할 수 있을 것 같았다.그녀가 입사한 회사는 여진이었다. 만약 여이현에게 해고당한다면 다른 회사로 간다고 해도 그녀의 이력서를 본 순간 대부분 거절할 것이 분명했다.더구나 그녀의 상사는 이 도시에서 제일 권력자로 불리는 여씨 집안의 후계자였다.그렇게 생각하니 이채현의 눈빛이 달라졌다.‘반드시 살아남을 거야!'...온지유는 여이현의 말대로 수려원으로 가지 않았다.본가로 돌아왔다.부모님은 처음부터 그녀가 여이현과 계약 결혼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정미리는 그녀가 이혼할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하지만 지난번 여이현이 그녀와 함께 온재준의 장례식에 참석했을 때도 정미리는 여이현의 앞에서 단 한 번도 이혼 얘기를 꺼내지 않았기에 갑자기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이혼 얘기를 꺼낸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어 부모님 집으로 온 것이다.그녀가 본가로 오자마자 심각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 있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온경준은 그녀가 들어오자 바로 입을 열었다.“마침 잘 왔구나. 오늘부터 여이현 그 녀석 집으로 가지 말아라. 그냥 이혼 서류에 사인해서 택배로 보내. 그 녀석이 사인을 안 하려거든 그럼 이혼 소송 걸어!”여진숙이 찾아왔던 시간대에 온경준은 외출한 상태였다. 만약 그때
정미리는 생각이 달랐다.“그 여자가 또 찾아온다면 그땐 절대 그냥 돌아가게 하지 않을 거예요! 우리가 잘 못 한 게 있는 것도 아니고 왜 그 여자를 두려워해야 하는데요?!”온지유의 눈가가 붉어졌다.두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도 사실상 전부 그녀를 위해서였다.온지유는 살짝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전 두 분이 다른 사람과 다툼이 일어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요. 시어머님 일은 제가 해결할게요.”여진숙은 원래부터 그녀를 무시하고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여이현이 이혼을 원치 않고 있었기에 어쩌면 여진숙 쪽을 해결할 좋은 기회일지도 모른다.그녀는 부모님께 저녁을 해드리고 나서야 집에서 나왔다.그러나 아파트 단지 입구로 나와 택시를 잡으려 할 때 길가에 서 있는 검은색 차량을 발견했다. 창문이 스르륵 내려가고 여이현의 얼굴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그는 창문으로 팔을 내놓고 있었고 긴 손가락 사이엔 반쯤 타버린 담배가 있었다.온지유는 머뭇거리다가 그에게 다가갔다.문을 여는 그녀의 행동은 바로 여이현의 주의를 끌었다.여이현은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그녀를 보았을 땐 그녀는 이미 조수석에 앉은 상태였다. 설령 여이현이 창문을 열고 담배를 태웠다고 해도 차 안에는 코를 찌르는 매캐한 담배 냄새가 났다.아마도 임신한 탓에 후각이 예민해진 것 같았다.예전의 그녀는 이 정도 담배 냄새를 맡아도 아무렇지 않았었다.여이현이 담담하게 말했다.“넌 이채현을 너처럼 똑같이 가르친 거야?”“아니요.”온지유는 여이현이 갑자기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지만 바로 부정했다.지원자 중에서 이채현을 뽑지 않았다고 해도 그녀는 똑같이 상세한 정보가 적힌 노트를 다른 사람에게 주었을 것이다. 이채현이 잘 해내고 있다는 것은 그녀가 눈치를 잘 살폈기 때문이다.일도 깔끔하게 처리하고 머리도 좋았기에 금방 여이현의 인정을 받아냈다.여이현은 코웃음을 쳤다.“네가 나간 후에 이채현이 뭘 했는지 알기나 해? 마음대로 내 일정을 짜려고 하더군. 네 자리를 대신할 생각을 하고
옆에 있던 온지유는 들리는 ‘중독'이라는 두 글자에 어안이 벙벙해졌다.‘노승아 씨 병원에 있는 거 아니었나? 병원에서 중독되었다고?'‘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노승아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가슴이 차갑게 식어갔다. 여이현은 그녀의 상태를 알고 있었음에도 바로 달려오지 않았다. 예전의 여이현이였다면 분명 소식을 듣고 당장 달려와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을 것인데 그는 변해버렸다.그녀는 바로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이현 오빠, 혹시 내가 꾀병 부린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야, 내 모든 검진 결과가 그 자양제에 문제가 있다고 나왔어. 그 자양제 성분을 지금 분석하고 있다고.”온지유는 그제야 상황을 알게 되었다.노승아는 자양제를 먹고 중독되었다. 그리고 그 자양제는 그녀가 가져다준 것이다. 여진숙은 노승아를 아주 예뻐해 노승아의 건강에 좋은 보약을 지어왔다.그러니 여진숙은 자양제에 독을 탈 사람이 아니었다.그러면 유일하게 남은 의심 가는 사람은 그녀였다.온지유가 차갑게 말했다.“전 어머님이 가져온 그대로 병원에 가져다드렸어요. 안에 어떤 보약이 들어있는지도 열어보지 않아서 몰라요. 만약 제가 열어보았다면 노승아 씨가 받자마자 눈치 못 챌 리가 없잖아요.”그녀가 하지 않은 일이니 굳이 억울하게 당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핸드폰 너머에 있던 노승아도 온지유의 말을 전부 듣고 있었다. 핸드폰을 잡은 그녀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가고 표정이 사납게 변했다. 그녀는 온지유가 여이현의 곁에 있으리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게다가 온지유의 목소리가 이렇듯 잘 들리는 것을 보면 아주 가까이 붙어 앉아 있는 것이 분명했다.대체 어떤 공간에 같이 있어야 온지유의 목소리가 이 정도로 잘 들려올까?“온지유 씨, 전 누군가 독을 탔다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요. 그런데 먼저 그 얘기를 꺼내다니 지금 자백하는 건가요?”노승아는 이를 빠득 갈면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꾹꾹 눌렀다.여이현은 두 사람이 핸드폰으로 말다툼을 벌이는 모습을 구경하고 싶지 않았다.“그
여이현은 침묵했다.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의 입술은 일자가 되어 불쾌함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고 잘생긴 얼굴은 유난히도 싸늘하게 보였다.“온지유, 이혼하기 위해 지금 불쌍한 척 연기하는 거야? 하, 지금 당장이라도 연예계 데뷔해도 손색이 없겠네.”비꼬는 어투가 그녀의 귓가에 들어왔다.온지유는 믿기지 않았다.“이현 씨 눈에는 내가 연기하는 거로 보여요?”그녀는 그의 곁에 꽤나 오랫동안 있었다. 설령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도 그녀의 성격만큼은 파악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는 그녀의 성격마저 잘 몰랐다.그녀에게 이런 말을 했다는 자체가 그녀는 조금 충격이었다.온지유는 실망을 느꼈다.“그래요, 그렇게 생각하세요. 어차피 우린 계약 결혼한 거니까 결혼 생활을 제외한 다른 건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되죠. 저한테 그럴 자유가 있으니까 말이에요. 이현 씨도 제 자유를 억압할 권리는 없어요.”연예계로 데뷔하든 말든 전부 그녀의 자유였다.노승아가 중독되었다고 했으니 그녀는 자신을 위해 결백을 밝혀야 했다.“대표님, 출발하실 건가요? 혹시 아직도 시동 걸 생각이 없으시면 전 이만 내릴게요.”말을 마친 뒤 온지유는 문을 열려고 했다.그러나 여이현이 버튼을 꾹 누르며 잠가 버렸다.그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안전벨트 매.”여이현이 운전할 기미를 보이니 그녀도 딱히 할 말이 없었다.빠르게 여이현은 수려원에 도착했다.옷은 전부 원래 살던 집에 있었기에 수려원에서 정리할 짐이라곤 딱히 없었다. 게다가 그녀의 옷은 대부분 여이현이 배진호를 시켜 새로 산 것이었다.온지유는 친구들을 떠올렸다.그런데 탐정과 경찰이 존재할 줄은 몰랐다. 그녀는 바로 경찰에 신고한 뒤 여씨 가문에서 나와 차를 타고 병원에 들어가는 CCTV 영상까지 전부 찾아냈다.동시에 보약을 지은 업체도 찾아내 성분을 분석했다.그녀가 말한 대로 보약 포장은 2차 개봉한 흔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노승아가 제일 처음 개봉했다는 의미였다.다만 온지유는
[와, 대박. 이걸 소재로 영화를 찍어도 되겠네. 분명 대박 날 거야!]...온지유는 더는 댓글을 읽어보지 않았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증거를 올린 이상 그녀가 결백하다는 것을 밝힐 수 있었고 인터넷에서 뭐라고 하든 이제 더는 그녀와 상관없는 일이 된다.수려원에서 살고 있었기에 그녀는 조금의 물건만 남겨두었다.필요한 것만 가방에 챙기고 필요하지 않은 건 대부분 남겨두었다.물건은 딱히 많지 않았기에 빠르게 정리를 끝마칠 수 있었다.문을 열자 방 앞에 서 있는 여이현을 발견했다. 그는 그녀가 들고 있는 짐을 빤히 보더니 한껏 가라앉은 눈빛으로 변했다.“원래는 이현 씨에게 증거를 보여주려고 했었어요. 하지만 저를 향한 악플이 너무도 심해서 결국 제 계정에 올려서 결백을 밝히는 수밖에 없었어요.”노승아가 정말로 그녀를 해치려 하든, 아니면 누군가가 그녀가 독을 탔다고 의심을 하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녀는 이미 결백을 밝힌 상태였으니 말이다. 더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여이현이 화가 났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그러나 여이현은 인터넷에 올라온 것들에 관해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 댓글을 보지도 않았다. 그가 지금 신경 쓰는 건 온지유 손에 들려있는 짐과 그녀가 내뱉은 말이었다.“온지유, 자꾸만 내 인내심의 한계에 도전하려 하지 마.”여이현이 서슬 퍼런 목소리로 말했다.온지유는 그가 노승아 때문에 화난 것으로 생각하며 냉정하게 말했다.“제가 제 결백을 밝힌 게, 그게 이현 씨 인내심의 한계에 도전하는 일이었어요? 왜죠, 이 일이 노승아 씨와 연관이 있어서 그런 건가요?”그녀는 자신의 결백을 밝히자 네티즌들은 노승아의 자작극이라며 몰아갔다. 하지만 그것은 네티즌의 생각일 뿐 그녀와 아무런 관계도 없지 않은가.잔뜩 어두워진 그의 안색이 모든 것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온지유는 비록 마음이 괴롭긴 했지만, 어차피 그와 이혼할 것이 아니던가.게다가 분명하게 말을 해줘야 나중에 덜 고통스러울 것이다.일자로 된 여이현의 입술은 심기 불편함을 그대
온지유의 검은 두 눈동자엔 단호함이 담겨 있었고 예전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다음 주 수요일에 접수하러 가지.”여이현이 차갑게 말했다.온지유는 결심한 것이다.그녀는 시간을 계산해 보았다. 오늘이 월요일이니 다음 주 수요일까지 며칠의 시간이 있었다. 1분 1초마다 세상은 변해가는 데 더구나 며칠이나 더 기다려야 한다니!온지유는 입술을 틀어 물었다.“왜 오늘은 안 되는 건데요? 전 시간을 더 끌고 싶지 않아요.”“승아 일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어.”그는 차갑게 이 말을 툭 던졌다. 그녀와 더는 이 일에 관해 얘기를 나누고 싶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그렇다는 건 그녀와 1초도 말을 섞기 싫다는 의미기도 했다.게다가 그가 내뱉은 말에도 문제가 있었다.그는 노승아가 중독된 일에 그녀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하지만 그녀는 이미 증거를 자신의 계정에 올렸는데 여이현이 여전히 이런 태도를 보인다는 것은 그녀가 조사한 것을 믿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그래도 그가 이혼 서류에 사인해 주기로 했으니 전처럼 계속 버티고 있는 것보단 나았다....서재로 돌아온 여이현.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자마자 배진호의 연락을 받게 되었다.배진호는 사실 그대로 그에게 알렸다.“대표님, 사모님께서 결백을 증명하신 뒤 네티즌들은 현재 노승아 씨가 자작극을 벌인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기획사도 현재 논란에 휩싸였습니다.”이것은 전부 그가 예측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일이 커지면 회사에 영향이 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그럼 그 보약은 어떻게 된 거죠? 누가 독을 탄 건지 알아냈나요?”여이현은 눈을 가늘게 접었다. 그의 눈빛에선 서늘함이 느껴졌다.배진호가 답했다.“그쪽은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었습니다. 모든 정황이 독을 탄 사람은 사모님이라고 나오고 있습니다만 사모님께선 이미 결백을 증명하셨죠.”그 말인즉, 독을 탄 사람은 노승아일 가능성이 아주 크다는 의미기도 했다. 여이현이 기억하는 노승아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도 아끼지 않고
현재호는 찻잔을 내려놓고 나직하게 말했다.“쓸데없는 말 좀 작작 해. 이현이가 어련히 알아서 이 일을 해결하겠지.”여진숙은 더 화가 났다.“당신은 대체 왜 그렇게 무관심한 건데요? 알아서 해결한다니, 알아서 해결하다가 나중에 이혼 안 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현재호는 고개를 들어 여진숙을 보며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이혼하든 말든 현이가 알아서 하겠지. 뭘 그렇게 당신이 화를 내고 걱정해?”“내 아들인데, 내가 화를 내고 걱정하지 않으면 누가 해요?”여진숙의 목소리는 점점 더 높아졌다.그런 그녀의 모습을 본 현재호는 질린다는 눈빛으로 보다가 다시 원래의 표정대로 돌아왔다.여진숙은 더 짜증이 치밀었다.“당신은 현이를 아들이라고 생각한 적 있기나 해요? 그동안 한 번도 현이한테 관심도 없었잖아요. 당신이 이 집안에 존재하든 말든 변하는 게 하나도 없고 말이에요!”“그래도 그동안 현이가 알아서 잘 컸잖아?”현재호는 여전히 담담했다. 마치 여이현을 자기 아들이 아닌 것처럼 얘기하고 있었다.여진숙이 말했다.“현이가 부모인 우리한테 거리를 두는데, 대체 뭐가 잘 컸다는 거예요?! 이건 다 당신 탓이에요. 당신만 멀쩡한 아빠였으면 현이도 우리한테 선을 긋지 않았을 거라고요!”여진숙은 흥분한 상태였다. 두 눈에 눈물이 핑 돌면서 현재호를 향해 손가락질도 했다.현재호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익숙하면서도 질려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 말했다.“난 물건 가지러 잠깐 들린 거야. 물건만 챙기고 바로 갈 거니까 내 밥은 준비할 필요 없어.”말을 마친 그는 서재로 들어갔다.여진숙은 그를 보며 분노했다.“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나가려는 거예요! 당신이 어떻게 나한테 그래? 밖에서 만나는 여자가 나보다 더 소중하다는 거예요? 그럼 앞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말아요! 평생, 영원히!”현재호는 그녀의 말을 듣지도 않고 있었다. 물건을 챙긴 뒤 여전히 히스테리를 부리는 그녀를 무시하며 차 타고 떠나버렸다.여진숙의 얼굴은 이미 눈물범벅이었다.
문지원은 어른을 마주하는 것 같았다.“아무것도 아니에요.”지석훈은 그녀가 반쯤 울리는 것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나한테도 속일 생각하고 있어?”문지원은 뭐라고 대답할 생각이 없었다.지석훈은 그녀에게 강요하고 싶지 않은 듯 다른 말로 그녀를 앉혀 식사 하게 하였다.마침, 문지원은 급하게 회사에서 나와서 아직 먹지 않았다.오늘뿐만 아니라, 요 며칠 동안 주주들과 상의 하느라 바빠서 그녀는 종종 하루에 두 번, 심지어 하루에 한 번 밥을 먹었다.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초췌하여 지 씨 아버지께서 한눈에 알아차리지 않았을 것이다.지석훈은 병원 식당에서 준비한 도시락을 가져왔다.병원의 식당은 바깥 식당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영양 균형이 잘 잡혀 있다. 그는 마치 진작에 그녀와 함께 식사하기로 계획한 것처럼 미리 두 개를 준비하였다.조용히 도시락을 먹으며 문지원은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하여 지석훈이 입을 열었을 때도 반응하지 못하였다.“요즘 뜻대로 안 돼?”“조금.”문지원은 무의식으로 대답하고 살짝 굳었는데 지석훈은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지 의사 선생님, 계세요?”밖에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곧 수술이 있기에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네, 알겠어요.”지석훈이 대꾸하자 곧 밖에 있던 사람들이 급히 떠났다.문지원은 이제야 그녀가 바빠서 몸을 뺄 수 없다는 것은 사실 선츠도 비슷하고, 심지어 지나쳐도 모자랄 정도였다는것을 깨달았다. 의사는 워낙 바쁜 직업이라.그런데 그는 이렇게 바쁜데도 시간을 내서 문지원을 위로하려고 하다니... 문지원은 갑자기 양심이 은근히 아파 났다.지석훈은 한쪽에 걸려 있는 흰 가운 외투를 입고 문지원을 쳐다보았다.“난 먼저 일하러 갈게 넌 여기 있을래 아니면 먼저 돌아갈래? 먼저 돌아가면 저녁에 널 찾으러 갈게.”문지원은 도시락을 다 먹고 내려놓았다. “먼저 돌아가 있을게요.”지석훈은 고개를 끄덕이고 떠났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돌아간 후 지석훈이 그녀를
그 남자는 분명히 강윤슬한테 평범한 사람이 아닐 것이니 문지원은 돌아가서 주의하기로 결정했다.“화닝 빌딩의 프로젝트에 대해 귀 그룹의 요구 사항을 문정 그룹에서 보았어요. 우리 그룹에서는 두 가지 사항을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첫째, 우리는 보수와 지불이 불균형하다고 생각해요. 귀사는 모든 재료를 최고 수준으로 배분할 것을 요구하지만, 이익은 10% 미만만 이에요.”“둘째, 우리는 자체 인력이 있으며, 채용 측면에서 귀 그룹에서는 간섭할 권리가 없다고 생각해요.”이것이 바로 문지원이 오늘에 온 목적이었다.문지원은 성격이 매우 좋은 사람이기에 일반적으로 갑방이 제시한 조건이 너무 지나치지 않으면 그녀는 그 조건들을 진지하게 경청하지만 이번에 강윤슬은 너무 심했다.심지어 강윤슬 자신조차도, 한 짓이 좀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갑방이 협력 파트너에게 이래라저래라 심지어 무슨 사람을 쓰는지까지 상관 한다니 한 일이 너무 심했다. 그리고 10%도 안 되는 이윤을 양보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계약서에서 말하는 ‘두 그룹이 함께 이기자'는 말장난을 하는 것은 문자께임으로 사람을 놀리는 거짓말인 것같앗다.강윤슬은 그녀가 왜 왔는지 진작 알고 있기 하나도 놀라지 않았다. “너무하다고? 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고객이 신이라는 말은 누구나 다 알아.”“고객이 이렇다 하지만 갑방이 프로젝트를 당신들에게 맡기고 당신들도 받아들였는데 지금 할 수 없다고 하면 계약을 위반한 것이야. 계약을 위반하면 두 배의 계약금을 물어내야 하는데, 이 돈을 문정 그룹에서 감당할 수 있어?”그 전에 문지원은 강윤슬에 대해 악감정이 없었다.비록 그녀와 지석훈은 알려지지 않은 과거가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 문지원은 정말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그녀는 상대방의 악의를 느낄 수 있지만, 왜 사람들은 모두 근거 없는 악의를 가지고있는지 몰랐다.문지원은 심호흡을 하며 말했다.“강윤슬 씨, 저에게 불만이 있으면 저에게 말해주세요. 그러나 협력에서 무리한 요구를 하지 말았
문지원은 강윤슬이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모르지만, 그녀는 반드시 가야 했다.한바탕 망설인 후, 그녀는 빠르게 결정 하였다. 가야 할 바엔 가자, 무슨 칼산 불바다도 아니고...강윤슬이 근무하는 회사는 규모가 상당했고, 국내에서 100위 안에 드는 대기업이다. 큰 회사답게 프런트 데스크 직원도 교육이 잘 되어 있다.“문 대표님, 강윤슬 대표님이 위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프런트 데스크에서 엘리베이터로 안내하였다. “이쪽으로 오세요.”문지원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에 있는 강윤슬의 사무실에 도착했다.문지원은 강윤슬이 기다릴 줄 알았는데 그녀의 비서가 말했다.“대표님이 회의하느라 바쁘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문지원은 이 말투가 아주 익숙하였다. 그녀는 강윤슬이 자신을 놀리고 있는 것 같았다.그녀가 소심인 배 한 것이 아니라 전화는 부재중이고,직접 왔는데 바쁘다고 하니, 일부러 그녀를 피하는 것 같았다.문지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냉담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협력을 위해 특별히 진심으로 여러분을 찾아왔는데 만약 여러분이 문 씨와 협력할 마음이 없다면, 직접 말하면 될 테니 저를 원숭이로 놀릴 필요는 없어요.”“그럴 리가요.”비서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기 시작 하였다.아마도 그들은 생김새가 온화하고 사람들에게도 대부분 선의를 가진 문지원이 이렇게 기세등등한 면이 있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뭐라고 하든 간에 문지원은 이미 결정하였다. “5분, 5분만 더 기다릴게요.”“5분후에 오지 안으면 합작이 무산된 걸로 칠 것이에요.”협력은 물론 중요하지만, 자신의 체면을 땅에 떨어뜨리는것은 안 되였다. 적어도 문지원은 그런 천덕꾸러기가 아니었다.그녀는 강윤슬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몰랐지만 언젠간 알게 될 것이니 급하지 않았다.5분이 지나자, 문지원은 떠날 준비를 했다.강윤슬은 하이힐에 리듬을 타며 느릿느릿 걸어왔다.“일이 좀 있어서 늦었어. 죄송하네.”그녀는 손을 내밀고 입가에 선의의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눈빛으로 문지원을 응시하
“조금만 더 늣더라도 아이를 볼 수 있을거야!” 강윤슬은 여기 오기전에 문지원의 상황을 알아보았기에 그녀의 금황을 알고 있었다. 강윤슬은 지금 기분이 좀 상해 있었다.그녀는 산에서 구출된 여자들을 경멸했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아이를 낳았다고 들었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날을 누가 알가? 누군가 문지원을 건드린 적이 있는지.문지원의 머리는 세게 부딪힌 것만 같았다. 한바탕 격동이 지나간 후,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려고 손가락을 움직였지만, 자신이 지금 자는 척하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섣불리 눈을 뜨면 오해받을 수 있기에 문지원은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기다리는 과정이 특히 길고 견디기 어려웠는데 마침내 그녀는 남자의 목소리를 들었다.“나는 지원 씨를 관심하니 그런 것과는 무관해.”지석훈은 담담하게 말했다.이 몇 글자는 문지원의 마음속에서 순간 잔잔한 물결을 일으켰다.이 말을 들은 강윤슬의 얼굴은 창백해지기 시작 하였다.“지석훈, 너 진심이야?”“응, 난 이전 너한테 예전같은 마음이 없어.”말하면서 지석훈은 돌아섰다.“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를 바래.”강윤슬은 남자의 무자비한 모습을 보며 자신이 남긴 쓴맛을 맛보았다. 이 쓴맛은 옛날 지석훈만 느낄 수 있었던 감정이었다.그녀는 모욕을 참지 못하고 성을 내며 병실을 떠났다.문지원은 계속 자는 척하고 하려 하였는데 머리 위에서 지석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계속 자는 것처럼 있을 거야?”문지원은 천천히 눈을 뜨면서 그를 향해 어색하면서도 예의 바른 미소를 지었다.“배고파? 먹을 것 좀 갖다 줄까?”문지원은 난처해하고 있기에 간절히 바랐다.지석훈은 잠시 나갔다가 돌아올 때 그녀에게 따뜻한 죽 2인분을 가져왔다.문지원이 자신을 보자 그는 천천히 포장을 풀면서 말했다.“나도 마침 배가 고파서 너랑 같이 먹을 거야”문지원은 아주 행복하다고 느꼈다.그녀는 병원에서 이삼일 휴양하고 퇴원했다. 안 그래도 큰 문제는 없는데 그냥 좀 피곤한데 갑자기 저혈당까지 돌발하였기에 쓰러진
깜짝 놀란 지석훈은 급히 문지원을 데리고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다.그녀가 수면부족으로 쓰러진 것을 알자 지석훈은 무력하고 마음이 약해졌다.“넌 왜 자신을 이렇게 돌보고 있어?”지석훈은 병석 앞에서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문지원은 아직 혼수상태기에 아쉽게도 듣지 못했다. 병원에서 문지원에게 포도당 점액을 처방하여 지금 그 수액을 맞고 있다. 아마도 그녀는 충분히 자야 깨어날 것 같았기에 지석훈은 급하지 않았다. 어쨌든 이미 사람을 찾았고 자신이 직접 그녀를 지켜볼 수 있으니까.“지석훈!”강윤슬이 급히 병실로 뛰여 들어오자 지석훈이 밤을 새워도 잠깐 눈붙일 생각을 하지않고 가만히 병석 앞에서 지켜보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강윤슬이 들어온 것을 보자 지석훈은 무표정하게 말했다.“당신 여긴 왜 왔어?”그의 말투는 아주 평범했지만, 그의 눈빛에는 조그마한 눈물이 고였다. 그는 진작에 마음을 내려놓았기에 그녀에 대해 예전의 느낌은 없었으나 강윤슬은 아직 내려놓지 못하였다.그녀는 원래 지석훈한테 일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손에 있는 일도 돌볼 겨를 없이 서둘러 왔는데 그는 다른 여자 곁을 지키고 있었다.강윤슬은 손바닥의 부드러운 살을 꼬집으며 입가에 보기 싫은 미소를 지었다.“석훈 씨가 괜찮다니 정말 다행이네, 일이 생겼다는 말을 듣고 다친 줄 알았어.”말한 후 강윤슬은 병석에 누워있는 문지원을 보며 말했다.“문지원 씨는 괜찮아?”문지원은 눈꺼풀을 움직였지만 뜨지 않았다. 사실 강윤슬이 왔을 때 그녀는 이미 깨어 있었지만 자는 척하였다.강윤슬은 눈을 반짝이며 방금 문지원이 약간 흔들린 눈꺼풀을 보고 자신이 잘못 본 것인가 의심하였다.지석훈은 병석에 있는 문지원을 바라보았지만, 전혀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일이 좀 생겼는데 사람은 괜찮아.”강윤슬은 마음이 더욱 쓰라렸다. “사람이 괜찮은데 왜 여전히 여기에서 지키고 있어?”“병원에 그렇게 많은 환자가 있는데 당신이 이렇게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네.”지석훈은 얼굴을
문지원은 지석훈만 홀로 남겨서 이 모든 상황을 마주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안에는 그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마지막으로 문지원은 그 지석훈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후시경을 통해 보이는 그의 날씬한 실루엣은 차가 나아갈수록 서서히 멀어졌지만 여전히 당당한 모습이 역력했다.문지원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참으며 힘껏 가속 페달을 밟았다.차는 마치 활시위에서 쏘아 올린 화살처럼 순식간에 도로를 벗어나 달려 나갔다.곧바로 마을 사람들은 손에 곡괭이를 들고 몰려와 지석훈을 완전히 포위했다....한편 마을의 경찰서에는 한 통의 신고 전화가 접수되었다.신고자는 네 명의 갇힌 여성을 데리고 경찰서에 도착해 신고했으며 그 모습을 본 경찰 내부 사람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신원 확인 후 이들 여성의 몸에는 장기간 감금과 학대의 흔적이 분명하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마을에 아직 한 사람이 남아 있어요. 그 사람을 꼭 구출해 주세요.”문지원은 지친 목소리로 경찰을 바라보며 애원했다.그녀는 중간에 한 번도 쉬지 않고 밤새도록 차를 몰았다. 식사 대신 몇 모금의 물만 마셨다.이제는 배고픔과 피로에 시달려 눈꺼풀이 무겁지만 문지원은 결코 쓰러질 수 없었다.그 이유는 지석훈이 아직 남아있었기 때문이다.경찰은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아직도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고요?”“네. 이름은 지석훈. 마을에 의료 봉사하러 간 의사예요.”문지원은 지석훈에 관한 기본 정보를 말했다.“휴대전화를 가지고 있지만 마을 사람들이 빼앗을 가능성도 있어요. 이번에 우리가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던 건 다 그 사람 덕분이에요.”그런 사람이 그토록 황량한 산골짜기 같은 곳에 남아 있다는 사실에 경찰서 사람들은 바로 회의를 열어 구조대를 꾸려 밤새도록 그 마을을 수색하기 시작했다.문지원도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경찰들은 그녀의 상태를 보고 처음엔 단호히 반대했다.하지만 문지원은 고집스럽게 말했다.“안 돼요. 꼭 가야 해요. 그 사람이 무사한지 제가 직접 확인해야
지석훈은 그녀들을 방 안으로 들인 후 여성들이 마을에서 겪은 처참한 상황을 듣고는 분노를 참지 못했다.문지원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저는 이들을 데리고 나가고 싶어요. 그들은 원해서 여기에 남아 있는 게 아니에요. 이 산 너머에는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이곳에 남아 그들의 아이 낳는 도구가 되어 살아갈 이유는 없어요.”그 말에 문지원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잠시 침묵에 빠졌다.조수현 역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들 중 일부는 이미 아이를 낳은 상태였고 이곳을 떠난다는 건 곧 자신의 아이를 두고 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어머니로서 쉽게 결단을 내릴 수 없는 일이었지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이곳에 남아 계속 학대받으며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문지원은 지석훈이 망설일까 봐 서둘러 덧붙였다.“서둘러야 해요. 마을 사람들이 곧 우리가 사라진 걸 눈치챌 거예요. 그들이 우리를 찾으러 오는 건 시간문제라고요. 우린 석훈 씨한테 폐 끼칠 생각 없어요. 그저 차 한 대만 빌려주면 돼요.”마을 밖으로 나가는 길은 분명히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석훈이 여기까지 들어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차만 있다면 충분히 탈출할 수 있었다. 문지원은 운전을 할 줄 알았기에 본인이 직접 운전해서 모두를 데리고 탈출할 생각이었다.“걱정할 필요 없어요. 차는 빌려줄 테니까.”지석훈의 말에 문지원은 예상했던 대답이었음에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른 사람들은 더욱 기뻐하며 얼굴에 희망을 띄웠다.눈앞에 놓인 탈출의 기회에 모두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지석훈은 곧장 차를 가지러 갔다. 차 한 대에 모든 인원을 태울 수는 없었지만 최대한 몸을 붙이면 간신히 탈출할 수 있는 인원이었다.문지원은 재빠르게 조수현과 다른 여성들을 차에 태운 후 지석훈이 계속 말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근데 아까부터 왜 말이 없어요? 같이 안 갈 거예요?”지석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눈치 못 챘어? 이들은 남자한테 극도로 두려움을 느끼고 있어. 몇몇은 나랑 눈도 못 마
문지원은 상의도 걸치지 않고 바지만 입은 채 허겁지겁 뛰쳐나오는 서 씨를 보고 역겨움을 느꼈지만 동시에 조수현의 안전이 걱정되었다.밤은 깊었고 어둠이 표정을 가려주어 다행히 아무도 그녀의 속내를 눈치채지 못했다.마을 사람들은 여자들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이 마을에서 여자는 그저 아이를 낳는 도구에 불과했다.특히 지금처럼 큰불이 난 상황에서는 더더욱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다.게다가 문지원은 마을 사람들에게 순종적인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에 그들이 보기엔 그녀가 도망칠 가능성이 없었다.마을 이장은 불이 난 원인을 물었지만 문지원은 적당한 핑계를 대며 얼렁뚱땅 넘어갔다.남자들이 불 끄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 문지원은 몰래 서 씨의 집으로 향했다.서 씨의 집 안에서 조수현은 밖에서 들리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처음에는 잔뜩 겁을 먹었지만 문지원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상황을 직감했다.“불... 지원 씨가 낸 거예요?” 조수현은 놀라서 물었다.“너무 대담한 거 아니에요?”문지원은 그녀를 힘껏 일으키며 말했다.“지금 그런 얘기할 때가 아니에요. 지금이 기회예요. 얼른 따라와요. 그리고 마을에 갇혀 있는 다른 여자들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죠? 그들도 함께 데리고 나가요. 오늘 밤 무조건 도망쳐야 해요.”“하지만… 우리 어떻게 도망쳐요?”조수현은 주저했다.이 마을은 외부와 단절된 깊은 산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사방은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차를 타고 오가는 것도 며칠이 걸릴 정도였다.더군다나 이들은 힘없는 여자들뿐이어서 교통수단도 없이 걸어서 나가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하지만 문지원은 이미 계획을 세운 상태였다.“마을에 온 그 의사를 찾아갈 거예요. 그들이 이곳까지 들어왔다는 건 나가는 길도 알고 있다는 뜻이에요.”“낮에 그들이 타고 온 차도 봤어요. 게다가 마을 사람들은 의사들에게는 함부로 못 하니까 그가 도와주기만 한다면 우린 반드시 나갈 수 있어요.”문지원의 결연한 눈빛을 보며 조수현도 점차 용기를 얻었다.“좋아요. 나도 따
문지원은 순진한 척하며 말했다.“알겠어요. 그냥 한번 물어본 거예요. 전 당연히 그 사람과 거리를 둘 거예요.”김숙희는 그제야 안심했다.그리고 문득 예전에 아들에게 이 여자를 데려오게 한 자신의 결정이 얼마나 선견지명이었는지 새삼 실감했다.김숙희는 문지원에게 쌀을 씻으라고 시켰고 그녀가 일을 끝마쳤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어 있었다.문지원은 조수현의 처지를 떠올리며 점점 마음이 무거워졌다.오늘 밤 그녀는 실행해야 한다.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갇혀 있는 여자들이 언제쯤 다시 자유를 찾을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었다.밤이 되자 문지원은 지하 저장고에서 술을 꺼냈다.김숙희는 아까운 듯 술을 바라보며 소리쳤다.“그걸 왜 꺼내는 거야. 어서 다시 넣어둬. 그건 명절이나 특별한 날에나 마시는 거란 말이야. 잔칫날도 아닌데 그걸 마시는 건 너무 낭비야.”문지원은 일부러 망설이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듣기로는 마을에 있는 그 의사가 수호 오빠의 다리를 고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오빠 다리가 곧 나을지도 모르니 축하하는 의미로 한잔하면 어떨까 싶어서요.”김숙희의 눈빛이 흔들렸다.문지원 혼자 즐기려는 거였다면 단호하게 반대했을 거지만 아들을 위해 축하한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진수호도 유혹에 넘어가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엄마 어차피 조금만 마시는 건데 괜찮잖아요. 이 술 지하에서 먼지만 쌓이고 있는데... 내 다리가 낫는다는데 엄마는 기쁘지도 않으세요?”“그럴 리가. 당연히 기쁘지.”김숙희는 단번에 부정했지만 결국 아들과 문지원의 부추김에 못 이겨 이를 악물고 술을 개봉했다.그 술은 사실 그저 평범한 황주였다.조금만 마시면 별문제가 없을 터였지만 좋은 일이 겹친 데다 진수호는 쾌락을 즐기는 성향이 강한 사람이어서 한순간 자제력을 잃고 지나치게 마셔버린 것이다.김숙희도 덩달아 함께 취했다.오직 문지원만이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한 잔 더.”진수호는 술에 취해 술버릇이 나왔다. “빨리 한 잔만 더 줘.”문지원은 시험 삼아 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