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숙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여이현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녀를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여진숙은 아랑곳하지 않고 들어가려 했다.그러나 몇 걸음 못 가 보안 요원들이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 그중 직위가 높아 보이는 직원이 말을 걸었다.“사모님, 저희를 난처하게 하지 말아 주세요. 저희도 대표님께서 시켜서 하는 겁니다. 대표님을 만나고 싶으시다면 이따가 댁에서 만나시거나, 아니면 먼저 연락이라도 드려보는 게 어떨까요.”보안 요원은 이내 한 마디 더 보태면서 여진숙에게 말했다.“생각해보세요. 여기를 지나가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 누가 사진이라도 찍어 인터넷에 올리기라도 하면 보기 안 좋잖아요.”여진숙의 호흡이 다소 거칠어졌다. 화가 난 것이 분명했다.‘날 막아선 것도 모자라 나한테 지금 전화까지 해보라고?'‘결국은 다 온지유를 위해서잖아! 내가 온지유를 괴롭힐까 봐!'‘그래!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여이현 이 녀석 지금 온지유를 위해 이렇게까지 해!'여진숙은 화를 내며 떠났다....대표이사실.여이현은 온지유를 데리고 온 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서류를 처리하고 있었다. 가만히 놀고만 있을 수 없었던 온지유는 자신의 자리로 가서 컴퓨터를 켰다.얼마 지나지 않아 온지유는 커피를 들고 여이현의 방으로 가는 이채현을 발견했다.“온 비서, 거래처 계약서 가지고 와요.”“에, 알겠습니다.”온지유는 생각을 멈추고 계약서를 찾아 여이현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여이현은 이채현이 내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가자 여이현은 이채현을 칭찬했다.“커피 맛이 괜찮네요.”“전부 온 비서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한 거예요. 온 비서님께서 아주 잘 가르쳐 주셨거든요. 대표님, 오늘 저녁 메뉴는 뭐로 준비할까요?”이채현은 여이현의 말에 대답하면서 잊지 않고 그녀를 칭찬했다.여이현은 침묵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알아서 준비해줘요. 이 비서 실력 믿고 있으니까.”온지유는 가슴이 답답해졌고 목에 생선 가시라도 걸린 것처
온지유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아니에요. 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저도 계약서 내용을 잘 알고 있어요. 그리고 제가 누굴 좋아하는지 잘 알고 계시잖아요.”그녀가 이런 말을 하면 여이현이 무조건 화낼 것이 분명했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여이현에게 자신이 질투했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녀가 그 말을 꺼내자마자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점차 사라지고 표정이 구겨졌다.“여긴 회삽니다. 온지유 씨는 내 비서고요. 내가 시킨 일에 그냥 하겠다고만 대답하면 되는 겁니다.”그 말인즉슨 쓸데없는 소리 적당히 해라는 의미였다.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리고 발걸음을 옮겨 여이현의 뒤로 갔다.손을 들어 천천히 그의 어깨와 목 부위를 안마했다. 사실 그는 온지유의 은은한 체향을 아주 좋아했다. 맡으면 맡을수록 심신이 안정되는 기분이었고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두 눈을 감은 채 편히 쉬었다....같은 시각, 여진숙은 온지유의 본가로 찾아왔다.지난번 병원에서 온지유에게 손을 댄 후류 정미리는 여진숙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이번에 여진숙을 보았을 때 감정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싫은 티를 냈다.“여긴 무슨 일로 오셨어요?”여진숙은 명품 가방을 든 채 거만한 시선으로 정미리를 보았다.“그쪽 딸은 원래부터 우리 이현이랑 계약 결혼을 한 거였죠. 그때는 20억 받고 결혼했으니 말해보세요, 얼마를 주면 현이랑 이혼할 거죠?”여진숙의 말에 정미리는 다시 분노가 치밀었다.그녀는 옆에 있던 빗자루를 들어 여진숙을 쫓아내려 했다.“계약 기간이 끝나면 알아서 이혼하겠죠. 하지만 아직 이혼 안 했잖아요. 그쪽 아들이 지금 우리 딸을 붙잡고 안 놓아준다고요! 자꾸만 돈 가지고 사람 모욕하지 마세요. 만약 여이현도 우리 딸한테 아무 마음도 없었으면 처음부터 왜 결혼하자고 했겠어요?”온경준이 외출한 상태였기에 오늘은 두 여자의 싸움이 되었다.여진숙은 정미리가
여이현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정미리는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신호음 소리가 들려오고 여이현은 점차 분노가 치밀었다. 핸드폰을 꽉 들면서 순식간에 잘생긴 얼굴에 시커먼 먹구름이 낀 것처럼 어두워졌다.온지유는 들어오자마자 이런 여이현을 발견했다.그의 손에는 그녀의 핸드폰이 들려있었다.온지유는 가심이 덜컥 내려앉았다.병원에서 개인 정보를 쓸 때도 전부 여이현이 들고 있던 핸드폰 번호를 적은 것이다.게다가 여이현의 표정을 보니 그녀의 진료 기록과 결제 내역을 찾아본 게 아닌가 의심도 되었다.특히 여이현의 차갑게 식어버린 두 눈이 자신에게 닿자 온지유는 등골이 서늘해져 대체 어떻게 여이현을 상대해야 할지 몰랐다.이때 여이현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온지유, 우리 이혼할 거라고 장모님께 말씀드렸어?”원래부터 겁에 질린 그녀였다. 그런데 여이현의 말을 듣고 나니 괜스레 안심되었다.그녀는 입술을 틀어 물었다.“자식이 부모님께 어떻게 지내는지 근황을 말씀드리는 건 정상적인 일이잖아요.”비록 여이현이 그녀의 전화를 대신 받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와의 이혼은 예전부터 부모님께 말씀드린 적 있었기에 딱히 비밀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두렵지 않았다.그녀가 지금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여이현이 그녀가 임신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절대 놓아주지 않는 것이었다.어쩌면 그녀를 놓아줄지는 몰라도 아이는 반드시 데려가려 할 것이다.여이현은 차갑게 피식 웃었다.“내 동의도 없이 친정집으로 가서 이혼하겠다고 말했는데, 이게 정상적인 일이라고? 온지유, 난 네 머릿속에 대체 뭐가 들었는지 정말 궁금해!”여이현은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그녀가 악플 공격을 받고 경찰서에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는 바로 배진호에게 경찰서로 가서 그녀를 구해주려 했다. 그런데 그녀는?온지유는 고개를 푹 숙였다.“딱히 다른 생각한 적 없어요. 전 그냥 계약 기간이 끝났으니까 이젠 이 결혼 생활도 마무리 지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여이현 씨, 지금 이혼하고
하지만 이채현의 말은 여이현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다. 여이현은 그녀의 쓸데없는 말이 듣고 싶지 않았다.“이채현 씨는 온지유의 자리를 채울 수 없습니다. 그러니 착각은 거기까지만 하세요!”“네, 대표님. 제가 지금 바로 식당 주방장에게 연락해 다시 주문해 오겠습니다.”이채현은 여이현을 힐끗 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여이현은 차갑게 말했다.“됐습니다!”말을 마친 뒤 자리에서 일어나 이채현을 뒤로 한 채 방을 나가버렸다.여이현이 사무실을 나가도 이채현은 여전히 그 자리 그대로 서 있었다. 여이현은 그녀가 온지유의 자리를 대신에 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온지유가 그녀를 채용한 것은 원래부터 자신의 자리를 그녀가 대신하길 바라서였다.여이현의 반응을 보니 언제든지 그녀를 해고할 수 있을 것 같았다.그녀가 입사한 회사는 여진이었다. 만약 여이현에게 해고당한다면 다른 회사로 간다고 해도 그녀의 이력서를 본 순간 대부분 거절할 것이 분명했다.더구나 그녀의 상사는 이 도시에서 제일 권력자로 불리는 여씨 집안의 후계자였다.그렇게 생각하니 이채현의 눈빛이 달라졌다.‘반드시 살아남을 거야!'...온지유는 여이현의 말대로 수려원으로 가지 않았다.본가로 돌아왔다.부모님은 처음부터 그녀가 여이현과 계약 결혼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정미리는 그녀가 이혼할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하지만 지난번 여이현이 그녀와 함께 온재준의 장례식에 참석했을 때도 정미리는 여이현의 앞에서 단 한 번도 이혼 얘기를 꺼내지 않았기에 갑자기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이혼 얘기를 꺼낸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어 부모님 집으로 온 것이다.그녀가 본가로 오자마자 심각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 있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온경준은 그녀가 들어오자 바로 입을 열었다.“마침 잘 왔구나. 오늘부터 여이현 그 녀석 집으로 가지 말아라. 그냥 이혼 서류에 사인해서 택배로 보내. 그 녀석이 사인을 안 하려거든 그럼 이혼 소송 걸어!”여진숙이 찾아왔던 시간대에 온경준은 외출한 상태였다. 만약 그때
정미리는 생각이 달랐다.“그 여자가 또 찾아온다면 그땐 절대 그냥 돌아가게 하지 않을 거예요! 우리가 잘 못 한 게 있는 것도 아니고 왜 그 여자를 두려워해야 하는데요?!”온지유의 눈가가 붉어졌다.두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도 사실상 전부 그녀를 위해서였다.온지유는 살짝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전 두 분이 다른 사람과 다툼이 일어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요. 시어머님 일은 제가 해결할게요.”여진숙은 원래부터 그녀를 무시하고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여이현이 이혼을 원치 않고 있었기에 어쩌면 여진숙 쪽을 해결할 좋은 기회일지도 모른다.그녀는 부모님께 저녁을 해드리고 나서야 집에서 나왔다.그러나 아파트 단지 입구로 나와 택시를 잡으려 할 때 길가에 서 있는 검은색 차량을 발견했다. 창문이 스르륵 내려가고 여이현의 얼굴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그는 창문으로 팔을 내놓고 있었고 긴 손가락 사이엔 반쯤 타버린 담배가 있었다.온지유는 머뭇거리다가 그에게 다가갔다.문을 여는 그녀의 행동은 바로 여이현의 주의를 끌었다.여이현은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그녀를 보았을 땐 그녀는 이미 조수석에 앉은 상태였다. 설령 여이현이 창문을 열고 담배를 태웠다고 해도 차 안에는 코를 찌르는 매캐한 담배 냄새가 났다.아마도 임신한 탓에 후각이 예민해진 것 같았다.예전의 그녀는 이 정도 담배 냄새를 맡아도 아무렇지 않았었다.여이현이 담담하게 말했다.“넌 이채현을 너처럼 똑같이 가르친 거야?”“아니요.”온지유는 여이현이 갑자기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지만 바로 부정했다.지원자 중에서 이채현을 뽑지 않았다고 해도 그녀는 똑같이 상세한 정보가 적힌 노트를 다른 사람에게 주었을 것이다. 이채현이 잘 해내고 있다는 것은 그녀가 눈치를 잘 살폈기 때문이다.일도 깔끔하게 처리하고 머리도 좋았기에 금방 여이현의 인정을 받아냈다.여이현은 코웃음을 쳤다.“네가 나간 후에 이채현이 뭘 했는지 알기나 해? 마음대로 내 일정을 짜려고 하더군. 네 자리를 대신할 생각을 하고
옆에 있던 온지유는 들리는 ‘중독'이라는 두 글자에 어안이 벙벙해졌다.‘노승아 씨 병원에 있는 거 아니었나? 병원에서 중독되었다고?'‘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노승아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가슴이 차갑게 식어갔다. 여이현은 그녀의 상태를 알고 있었음에도 바로 달려오지 않았다. 예전의 여이현이였다면 분명 소식을 듣고 당장 달려와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을 것인데 그는 변해버렸다.그녀는 바로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이현 오빠, 혹시 내가 꾀병 부린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야, 내 모든 검진 결과가 그 자양제에 문제가 있다고 나왔어. 그 자양제 성분을 지금 분석하고 있다고.”온지유는 그제야 상황을 알게 되었다.노승아는 자양제를 먹고 중독되었다. 그리고 그 자양제는 그녀가 가져다준 것이다. 여진숙은 노승아를 아주 예뻐해 노승아의 건강에 좋은 보약을 지어왔다.그러니 여진숙은 자양제에 독을 탈 사람이 아니었다.그러면 유일하게 남은 의심 가는 사람은 그녀였다.온지유가 차갑게 말했다.“전 어머님이 가져온 그대로 병원에 가져다드렸어요. 안에 어떤 보약이 들어있는지도 열어보지 않아서 몰라요. 만약 제가 열어보았다면 노승아 씨가 받자마자 눈치 못 챌 리가 없잖아요.”그녀가 하지 않은 일이니 굳이 억울하게 당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핸드폰 너머에 있던 노승아도 온지유의 말을 전부 듣고 있었다. 핸드폰을 잡은 그녀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가고 표정이 사납게 변했다. 그녀는 온지유가 여이현의 곁에 있으리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게다가 온지유의 목소리가 이렇듯 잘 들리는 것을 보면 아주 가까이 붙어 앉아 있는 것이 분명했다.대체 어떤 공간에 같이 있어야 온지유의 목소리가 이 정도로 잘 들려올까?“온지유 씨, 전 누군가 독을 탔다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요. 그런데 먼저 그 얘기를 꺼내다니 지금 자백하는 건가요?”노승아는 이를 빠득 갈면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꾹꾹 눌렀다.여이현은 두 사람이 핸드폰으로 말다툼을 벌이는 모습을 구경하고 싶지 않았다.“그
여이현은 침묵했다.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의 입술은 일자가 되어 불쾌함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고 잘생긴 얼굴은 유난히도 싸늘하게 보였다.“온지유, 이혼하기 위해 지금 불쌍한 척 연기하는 거야? 하, 지금 당장이라도 연예계 데뷔해도 손색이 없겠네.”비꼬는 어투가 그녀의 귓가에 들어왔다.온지유는 믿기지 않았다.“이현 씨 눈에는 내가 연기하는 거로 보여요?”그녀는 그의 곁에 꽤나 오랫동안 있었다. 설령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도 그녀의 성격만큼은 파악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는 그녀의 성격마저 잘 몰랐다.그녀에게 이런 말을 했다는 자체가 그녀는 조금 충격이었다.온지유는 실망을 느꼈다.“그래요, 그렇게 생각하세요. 어차피 우린 계약 결혼한 거니까 결혼 생활을 제외한 다른 건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되죠. 저한테 그럴 자유가 있으니까 말이에요. 이현 씨도 제 자유를 억압할 권리는 없어요.”연예계로 데뷔하든 말든 전부 그녀의 자유였다.노승아가 중독되었다고 했으니 그녀는 자신을 위해 결백을 밝혀야 했다.“대표님, 출발하실 건가요? 혹시 아직도 시동 걸 생각이 없으시면 전 이만 내릴게요.”말을 마친 뒤 온지유는 문을 열려고 했다.그러나 여이현이 버튼을 꾹 누르며 잠가 버렸다.그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안전벨트 매.”여이현이 운전할 기미를 보이니 그녀도 딱히 할 말이 없었다.빠르게 여이현은 수려원에 도착했다.옷은 전부 원래 살던 집에 있었기에 수려원에서 정리할 짐이라곤 딱히 없었다. 게다가 그녀의 옷은 대부분 여이현이 배진호를 시켜 새로 산 것이었다.온지유는 친구들을 떠올렸다.그런데 탐정과 경찰이 존재할 줄은 몰랐다. 그녀는 바로 경찰에 신고한 뒤 여씨 가문에서 나와 차를 타고 병원에 들어가는 CCTV 영상까지 전부 찾아냈다.동시에 보약을 지은 업체도 찾아내 성분을 분석했다.그녀가 말한 대로 보약 포장은 2차 개봉한 흔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노승아가 제일 처음 개봉했다는 의미였다.다만 온지유는
[와, 대박. 이걸 소재로 영화를 찍어도 되겠네. 분명 대박 날 거야!]...온지유는 더는 댓글을 읽어보지 않았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증거를 올린 이상 그녀가 결백하다는 것을 밝힐 수 있었고 인터넷에서 뭐라고 하든 이제 더는 그녀와 상관없는 일이 된다.수려원에서 살고 있었기에 그녀는 조금의 물건만 남겨두었다.필요한 것만 가방에 챙기고 필요하지 않은 건 대부분 남겨두었다.물건은 딱히 많지 않았기에 빠르게 정리를 끝마칠 수 있었다.문을 열자 방 앞에 서 있는 여이현을 발견했다. 그는 그녀가 들고 있는 짐을 빤히 보더니 한껏 가라앉은 눈빛으로 변했다.“원래는 이현 씨에게 증거를 보여주려고 했었어요. 하지만 저를 향한 악플이 너무도 심해서 결국 제 계정에 올려서 결백을 밝히는 수밖에 없었어요.”노승아가 정말로 그녀를 해치려 하든, 아니면 누군가가 그녀가 독을 탔다고 의심을 하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녀는 이미 결백을 밝힌 상태였으니 말이다. 더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다.여이현이 화가 났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그러나 여이현은 인터넷에 올라온 것들에 관해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 댓글을 보지도 않았다. 그가 지금 신경 쓰는 건 온지유 손에 들려있는 짐과 그녀가 내뱉은 말이었다.“온지유, 자꾸만 내 인내심의 한계에 도전하려 하지 마.”여이현이 서슬 퍼런 목소리로 말했다.온지유는 그가 노승아 때문에 화난 것으로 생각하며 냉정하게 말했다.“제가 제 결백을 밝힌 게, 그게 이현 씨 인내심의 한계에 도전하는 일이었어요? 왜죠, 이 일이 노승아 씨와 연관이 있어서 그런 건가요?”그녀는 자신의 결백을 밝히자 네티즌들은 노승아의 자작극이라며 몰아갔다. 하지만 그것은 네티즌의 생각일 뿐 그녀와 아무런 관계도 없지 않은가.잔뜩 어두워진 그의 안색이 모든 것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온지유는 비록 마음이 괴롭긴 했지만, 어차피 그와 이혼할 것이 아니던가.게다가 분명하게 말을 해줘야 나중에 덜 고통스러울 것이다.일자로 된 여이현의 입술은 심기 불편함을 그대
그리고 엄마가 아프다는 시점도 너무 절묘했다. 설마 아픈 척하는 건가?이럴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배진호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떴다. 반드시 철저히 조사해야 했다.그가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배진호의 어머니는 잠에서 깨어났다.아들의 의심을 불러일으킨 것도 모른 채 여전히 의사와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내 아들 앞에서 꼭 내 병이 심각한 것처럼 말해줘야 해. 안 그러면 걔 마음이 여전히 그 여자한테 기울어 있을 거야.”“걱정 마. 동창끼리 네 계획을 망치기라도 하겠어?”의사는 가슴을 두드리며 장담했다.“내가 다 맡을 테니 신경 쓰지 마. 그런데 사실 나도 부탁이 하나 있는데 우리 아들이 유학을 가야 하는데 돈이 조금 모자라거든. 좀 도와줄 수 있어? 올해 보너스 나오면 바로 갚을게.”정미진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흔쾌히 승낙했다.어차피 그녀는 돈에 쪼들리지 않았으니.배진호가 비서로 일할 때부터 매달 월급 일부를 그녀에게 보내왔고 이후 그가 회사를 차려 독립하면서 더 많은 돈을 보내왔다.그녀는 사고 싶은 것을 마음껏 사면서 이제는 좋은 며느리를 얻는 데만 집착하고 있었다.“돈은 천천히 갚아도 돼. 여유가 생기면 갚아. 동창 사이인데 내가 너를 믿지 않겠어?”그녀의 말에 의사는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병실을 나선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사람이 참 복에 겨워 사는 줄 모르네. 배진호 같은 아들에, 그토록 훌륭한 며느리까지 얻었는데 뭐가 불만이야? 게다가 그 집안의 돈은 몇 대가 써도 부족함이 없는데 굳이 문제를 만들 필요가 있나? 나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거야. 그냥 일도 때려치우고 집에서 술이나 한잔하면서 낚시도 하고 가끔은 카드놀이도 하면서 살겠지. 생각만 해도 얼마나 여유롭겠어?”하지만 그는 정미진이 아니었고 방관자로서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다음 날 아침, 권다솔은 간단히 짐을 챙긴 후 캐리어를 끌고 여행사로 향했다.그곳에는 대형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고 모든 인원이 모이자 운전기사는 공항으로
지금 그의 모습이 헌신짝이랑 다를 게 뭐가 있지?권다솔 때문에 이렇게까지 할 가치가 있을까?배진호는 전혀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그는 여전히 석규리를 등진 채 그녀를 무시했다.석규리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다른 사람의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한 통의 메시지를 보낸 뒤 불과 30분도 채 되지 않아 배진호의 어머니가 직접 나타났다.정미진을 본 순간 배진호는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엄마! 몸도 안 좋으신데, 게다가 이제 막 수술을 끝내셨잖아요. 퇴원하시면 어떡해요?”“내가 와서 다행이지! 아니면 네가 여기서 얼마나 더 멍청하게 서 있었을지 몰라. 진호야, 엄마가 곧 죽게 생겼는데 너 정말 엄마를 좀 편하게 보내줄 수 없는 거니?”정미진은 배진호의 이마를 꾹 눌러가며 안타까워했다.권다솔의 가정환경이 조금이라도 평범했다면 돈으로 해결했을 것이다.하지만 권다솔은 권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정미진이 아무리 손을 뻗어도 권씨 가문까지 닿을 수 없었기에 결국 배진호에게만 압박을 넣을 수밖에 없었다.“엄마가 부탁할게. 죽기 전에 몇 날이라도 좀 조용히 지낼 수 있게 해줘. 더 이상 문제 일으키지 말고 권다솔과 깨끗이 끝내. 네가 꼭 여기에 남아 있겠다면 엄마도 너랑 같이 있을 거야.”정미진은 외투를 벗어 석규리의 손에 건넸다.그녀는 안에 얇은 옷만 입고 있었다.석규리가 옷을 다시 정미진의 어깨에 덮어주려고 했지만 정미진은 단호하게 거절했다.“엄마가 아들 교육을 제대로 못 시킨 탓에 내 아들이 한밤중에 여기서 바람 맞고 있잖아. 나만 병실에서 잘 먹고 편히 있을 수는 없지 않겠어?”“엄마, 정말 제가 무릎이라도 꿇어야 멈추시겠어요?”배진호의 눈에는 이미 생기가 없어진 채 허망한 표정으로 바라봤다.역시나 자신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는 사람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진호야, 엄마는 네가 무릎 꿇으라고 이러는 게 아니야. 엄마가 원하는 건 네가 권다솔과 완전히 끝내는 거야. 이게 엄마의 마지막 소
“있어요! 내일 아침 출발하는 건데, 초원에서 말을 타고 마유주를 마시는 일정이에요. 총 7박 8일이고 모든 비용은 전부 저희가 책임집니다!” 여대생은 너무 기쁜 나머지 말까지 더듬었다.아르바이트 첫날 만에 벌써 계약을 성사시키다니!급여를 받으면 바로 외할머니 치료비에 보탤 수 있었다.“그럼 그걸로 할게요.”어차피 어디든 상관없었다.여기를 떠나기만 하면 됐다. 더 이상 배진호와 남태건을 마주치지 않는 걸로 충분했다.권다솔은 가이드의 연락처를 추가한 뒤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출발지 근처의 호텔에 묵기로 했다.그리고 방으로 돌아온 뒤 부모님께 영상 통화를 걸었다.“저 내일 여행사 패키지로 여행 가려 해요. 다음 주쯤 돌아올게요.”“좋지! 네 나이에는 이곳저곳 다니며 세상을 봐야 해. 만 권의 책을 읽으려면 만 리를 걸어야 한다잖니. 짐은 다 챙겼니?”김영은은 딸이 여행 가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다만 여행길이 불편할까 걱정될 뿐이었다.권다솔은 고개를 저었다. 비록 아무것도 챙기지 못했지만 괜찮았다.“요즘 세상이 얼마나 편한데요. 필요한 건 현지에서 사면 돼요.”“다른 건 밖에서 사도 되지만 침구류는 우리가 보내줄게. 네 피부가 워낙 예민해서 호텔 이불 덮었다가 알레르기라도 나면 어쩌려고.”권용민이 덧붙였다.아무리 좋은 호텔이라도 집의 침구와 비길 순 없었다.그는 아직도 권다솔이 어릴 적 피부 알레르기로 한밤중에 병원에 가서 약을 사고 주사를 맞으며 한바탕 난리를 겪었던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저 지금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요. 굳이 여기까지 오실 필요 없어요. 너무 번거롭잖아요.”권다솔은 부모님이 늦은 시간까지 자신을 위해 고생하는 게 마음에 걸렸다.그러나 딸을 걱정하는 부모의 마음은 그녀의 마음보다 더 깊었다.권용민은 끝내 직접 가겠다고 고집했고 권다솔은 결국 그들을 이기지 못해 승낙했다.전화를 끊고 나서 그녀는 문득 배진호를 떠올렸다.‘지금쯤 석규리와 단둘이 집에서 다정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다만
할머니는 갑자기 진지하게 말했다.“아이고, 보아하니 꽤 오랫동안 여기 서 있었던 것 같은데 여자 친구가 아직도 너를 만나주지 않니? 이 할미가 한 가지 충고를 해주고 싶은데 들어볼 생각 있니?”배진호는 당연히 할머니가 그만 포기하라고 할 줄 알았다.만약 여기 서 있는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면 배진호 역시 같은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건 당사자만 알 수 있는 법이다. 사랑은 보잘것없는 먼지가 아니기에 바람에 날려 사라질 수 없었다.다만 할머니는 전혀 다른 말을 꺼냈다.“나도 젊었을 때 우리 집 할아버지를 엄청 쫓아다녔단다. 그때 할아버지는 나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집안 사람들 또한 나를 못마땅하게 여겼지. 내가 시골 출신이라 배운 게 없다고 말이야. 하지만 그게 어쨌단 말이니? 나는 그저 그 사람 자체가 좋았어. 그렇게 오랫동안 쫓아다녔고 결국 내 사람으로 만들었단다.”할머니는 눈꼬리를 휘어 올리며 말했다.배진호는 본능적으로 물었다.“그러면 두 분이 함께하신 후에도 할아버지 집안 사람들은 여전히 할머니를 예전처럼 대하셨나요?”“그럴 리가 있겠니? 부모는 그저 자식이 좋은 짝을 만나길 바라는 것뿐이야. 일부러 방해하려는 건 아니지. 결혼 후엔 날 친딸처럼 대했단다. 집안의 돈까지 전부 나한테 맡겼으니. 설령 그 집안에서 나를 못마땅하게 여겨도 두려울 게 없었어. 어차피 내가 그들보다 오래 살 텐데.”할머니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당당하게 말했다.“적어도 99살까지는 살 거 같아.”배진호는 할머니의 말에 크게 동요했다.그는 권다솔의 부모님이 인품이 훌륭한 분들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비록 결혼 전에는 반대했지만 결혼 후에는 축복해 줄 사람들이었다. 그의 어머니처럼 계속해서 방해할 분들이 아니었다.그의 어머니 역시 할머니가 말한 것처럼 몸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아서 이미 수술을 한 번 받은 적이 있었다. 지금 강력히 반대한다고 해도 과연 얼마나 갈 수 있을까?결국 병문안 갈 때 적당히 연기하면 되는 것이었다.“할머니,
왜 아침에 눈을 뜨고 나니 권다솔의 태도가 다시 이전처럼 차가워진 걸까?“저를 때리든 욕하든 심지어 문밖에서 밤새 무릎 꿇고 있으라 해도 전 한 마디 불평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다솔 씨, 제발 절 무시하지는 말아줘요.”배진호는 간절히 애원했다.그는 누구에게도 이렇게까지 비굴하게 군 적이 없었다.아무리 까다로운 고객이라도 그는 이런 식으로 자세를 낮춘 적이 없었다. 하지만 유독 권다솔 앞에서는 모든 것을 잃어도 상관없었다. 오직 그녀만은 잃을 수 없었다.권다솔은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었다.그러나 배진호의 목소리에 그녀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발이 마치 바닥에 붙은 것처럼 한 발짝도 떼지 못했다.그녀는 고개를 저을 뿐 차마 뒤돌아볼 수 없었다. 뒤돌아봤다가는 다시는 떠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진호 씨, 우린 이미 끝났어요. 만약 다시 만나더라도 여긴 아니에요.”둘의 마지막은 구청이어야 했다.이혼 절차를 밟고 나서야 비로소 각자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우리가 끝났다고 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잖아요. 다솔 씨 마음속에 제가 없다는 걸 믿을 수 없어요.”배진호는 집착했고 고집스러웠다.권다솔이 그를 뻔뻔하다 욕하든 귀찮다 욕하든 전혀 상관없었다. 사랑하는 여자를 잡을 수만 있다면 무슨 말을 들어도 괜찮았다.“우리가 어떻게 다시 돌아가요? 돌아갈 수 없어요. 아이도 없고... 그리고 며칠 전 술을 마시다가...”권다솔은 사실을 그에게 알리고 싶었다.이미 남태건과 관계를 맺은 사실이 그녀의 마음속 깊이 박힌 가시가 되어버렸다.하지만 정작 입을 열려는 순간 그녀는 망설였다.이혼까지 가는 마당에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게다가 이 사실을 배진호가 알게 되면 그는 분명히 그녀를 경멸할 것이다. 천한 여자라고 생각할 테니.그녀는 한편으로 선을 긋고 싶어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가 자신을 경멸할까 봐 두려웠다.‘사랑’이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었다.“그날 다솔 씨가 취했을 때 저도 같은 술집에 있었어요. 그리고 다솔 씨가...”“그
김영은도 이번 일로 남태건이 막무가내로 느껴졌다.하지만 남태건의 인성에 문제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태건이는 마음이 급해서 그런 걸 거야. 그래서 실수를 하게 되는 거지.”“마음이 급하든 말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어쨌든 전 태건 씨랑 결혼할 수 없어요. 그날은 제가 술에 잔뜩 취해서 실수한 거예요. 누군가 제 술잔에 약을 탔거든요. 그래서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이 일어난 것뿐이에요. 전 절대 하룻밤의 실수로 제 평생을 누군가에게 보상으로 주려는 생각은 없어요.”권다솔은 계속 자기 생각을 말했다.아무리 김영은이 설득한다고 해도 그녀는 절대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 생각이 없었다.뛰어드는 건 쉬웠지만 빠져나오는 건 어려웠으니까.더구나 남태건이 이토록 일러바치는 것을 좋아하니 그녀는 더더욱 그와 결혼 할 수 없다. 다 큰 어른이 어린이집 다니는 아이들처럼 유치하게 굴고 있기 때문이다.“다솔아, 네가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우린 그냥 네가 태건이랑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알아가길 바랐을 뿐이야.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이 꼭 결혼하라는 뜻은 아니었어.”뜻밖에도 김영은은 그녀의 편을 들어주었다.권용민은 옆에서 줄담배를 피우다가 꺼버린 후 김영은의 옆으로 다가왔다.“설령 네가 평생 혼자 산다고 해도 괜찮다. 너 하나쯤은 평생 먹고 살게 해줄 돈은 있으니까. 나랑 네 엄마는 네가 행복한 게 더 중요해. 행복할 방법은 아주 많지. 그중에서 네가 좋아하는 일만 해.”권다솔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눈물이 흘러나왔다.그녀는 이렇게나 좋은 부모님을 만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를 이해해줄 뿐만 아니라 그녀의 편을 들어주니까.동시에 그녀는 두렵기도 했다.만약 이렇게 좋은 부모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정말로 억지로 남태건과 결혼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정말로 그렇게 된다면 그녀는 아마 더는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정말 고마워요, 엄마, 아빠. 역시 저한테는 두 분밖에 없네요.”권다솔은 분명 웃고 있었지만, 눈물은 계속
결혼은 장난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김영은은 딸 대신 함부로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권용민에게 눈짓했다. 권용민은 얼른 차를 따라주었다.“태건아, 아직 차 한잔도 못 마셨지? 얼른 한잔하면서 좀 쉬어.”“아버님, 어머님. 전 진심으로 다솔이랑 결혼하고 싶어요. 저희는 급도 맞잖아요. 다솔이와 결혼하게 해주신다면 평생 잘해줄 거예요. 저희 부모님께서도 다솔이를 딸처럼 예뻐하고 계시는 거 잘 아시잖아요. 그러니까 허락해주세요.”남태건은 찻잔을 받았지만 마시지 않았다.기대하는 얼굴로 권용민과 김영은을 보았다.권용민은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태건아, 난 이 일을 우리가 함부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단다. 결혼 전에 먼저 약혼부터 해야 하잖니. 약혼 전에 상견례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모든 걸 절차대로 마쳐야 결혼을 할 수 있는 거란다. 일단 이 물건들을 가져가. 그리고 다음에 내가 집사람과 함께 찾아가마.”남태건은 그의 말에서 거절의 의미를 눈치챘다.하지만 이미 이렇게까지 말한 이상 그는 더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권다솔을 억지로 끌고 가서 혼인신고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그는 일단 물러설 수밖에 없었지만 이미 가져온 예물과 금붙이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남기고 가려고 했다.“태건아, 네가 우리한테 준 선물은 사양하지 않고 받을게. 하지만 예물은 도로 가져가는 게 좋겠구나.”권용민이 허리를 굽혀 짐을 정리하는 순간 남태건은 이미 현관까지 가버렸다.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권용민은 손에 든 쇼핑백을 내려놓았다.“일단 다솔이한테 연락해서 무슨 일인지 물어봐.”김영은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권다솔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권다솔은 전화를 받기 전 특별히 거울을 보며 차림새와 머리를 정리했다. 그리고 혈색 없는 입술에 립스틱을 바른 후에야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두 사람을 웃는 얼굴로 맞이했다.“아빠, 엄마. 전 혼자 잘 지내고 있어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너랑 태
남태건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그는 권다솔의 손도 제대로 잡아보지 못했기에 당연히 사이즈를 알 리가 없었다.“크기 조절 가능한 팔찌는 없어요?”“있긴 한데요. 디자인이 몇 개뿐이라서요. 인기 많은 제품들은 전부 사이즈가 정해져 있어요.”직원은 그를 힐끗보다가 속으로 중얼거렸다.‘예비 신부한테 관심이 없다고 하기엔 예물을 전부 최고급을 골랐잖아. 그렇다고 해서 또 예비 신부한테 잘해준다고 하기엔 애매해. 어떻게 여자친구 팔목 사이즈도 모를 수가 있는 거지?'‘꼭 결혼까지 앞뒀는데 동거는커녕 손도 한번 못 잡아본 것 같네. 서로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을 것 같네.'“괜찮아요. 그걸로 주세요.”남태건은 제일 무거운 팔찌를 골라 쟁반에 올려두었다.“그리고 이거, 봉황이 있는 금목걸이도 주세요.”남씨 가문에 남아도는 것이 돈이었다. 권다솔의 부모님 앞에서 자신의 성의를 보여주기 위해서라면 얼마가 되었든 상관없었다.그가 가게에서 나왔을 때 직원의 입은 귀에 걸려 있었다. 남태건 덕분에 한 달 업적을 하루 만에 달성했기 때문이다.곧이어 남태건은 권용민이 좋아할 만한 비싼 술과 담배를 산 후 권씨 가문 본가로 운전했다. 쇼핑백을 바리바리 들고 오는 남태건의 모습에 김영은은 어안이 벙벙했다.“태건아, 우리 집으로 오는 게 처음도 아니고 이게 다 뭐니? 그냥 내 집이다 생각하면서 오면 되는 건데 뭘 이렇게 많이 사 왔어?”“아버님, 어머님. 전 오늘 손님으로 찾아온 게 아니에요. 다솔이랑 결혼하고 싶어서 온 거예요. 이건 제가 드리는 선물이에요.”남태건은 자신이 사 온 것을 하나씩 열어 보여주었다.그는 물건만 사 온 것이 아니었다. 한 가방의 현금과 예물까지 준비해왔다.창문으로 비쳐 들어오는 햇볕에 금붙이들은 반짝반짝 빛났다.권용민과 김영은은 서로 마주 보았다. 두 사람은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남태건은 아주 신경 써서 선물을 준비해온 것이 그들의 눈에도 보였다. 정말로 권다솔을 좋아하고 있는 것 같았고 앞으로 두 사람이
“다솔아... 너 정말로 나한테 아무런 감정이 없는 거야?”남태건은 여전히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조금이라도, 단 한 번이라도 나한테 설렌 적 없어?”그는 그동안 아주 많은 노력을 했었다. 할 수 있는 건 전부 했다. 그러나 여전히 권다솔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게다가 우린 함께 밤까지 보냈잖아. 난 정말로 진심으로 널 책임지고 싶어. 그냥 잠만 자고 버리는 나쁜 놈이 되고 싶지 않다고. 다솔아, 다시 한번 생각해줘. 우린 이미 밤까지 보냈다고!”“지금이 어떤 시대인데요. 전 태건 씨를 이해할 수 없네요.”권다솔은 머리가 지끈거렸다.그가 질척이면 질척일수록 그녀의 생각은 점점 더 확고해졌다. 앞으로 친구로도 지낼 수 없겠다고 말이다.그녀는 인내심 있게 마지막으로 말했다.“그날 밤 일은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 더는 제 앞에서 언급하지 말아요. 만약 태건 씨의 말대로 함께 한번 잤다고 해서 무조건 함께 살아야 한다는 거라면, 이미 아이까지 한 번 있었던 저와 진호 씨는 영원히 떨어지지 말고 함께 살아야 하는 거겠네요?”남태건은 주먹을 꽉 쥐었다. 저도 모르게 이도 빠득 달았다.“권다솔, 그딴 말로 날 자극하지 마.”두 사람이 다시 잘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니 남태건은 기분이 불쾌해졌다.권다솔은 말을 이었다.“전 태건 씨를 자극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냥 예시를 들어 알려준 거죠. 그러니까 나가요. 앞으로 더는 찾아와 문도 두드리지 말고요. 방금 같은 일 또 일어나기를 바라지 않으니까.”“다솔아! 네가 나한테 어떻게 매정할 수가 있어! 차 한잔도 내어주지 않고 지금 날 쫓아내는 거야? 적어도 물 한 잔 마시게는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밖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서 있었는데. 나 힘들어 죽겠다고.”남태건은 꼬리를 내렸다.물 한잔쯤 대접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권다솔은 그에게 희망 고문하고 싶지 않았다.그녀가 예의상 했던 행동이 남태건에겐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게다가 이번 한 번 타협한다면 두 번째도 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