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은 서로 마음을 터놓지 않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온지유는 방으로 돌아가 짐을 정리했다. 온재준의 장례식이 끝나고 나니 이제 돌아갈 때가 되었다.“지유야.”정미리가 갑자기 들어왔다.온지유는 움직임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엄마.”정미리는 그녀 옆에 앉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았다. 온지유도 이를 눈치 채고 그녀 옆에 앉았다. “엄마, 무슨 일이에요?”“이번에 여이현이 왔잖니.” 정미리가 말했다.“네.”정미리는 온지유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희가 이혼할 거라고 하지 않았니? 그런데 이번에 도와주러 오고 전혀 이혼하는 것 같지 않더구나. 이렇게 된 거면 굳이 사람을 귀찮게 할 필요 없잖니.”그들은 여이현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 갚기 힘들어질 것이다.온지유는 말했다. “우리가 고향에 오는 걸 여이현에게 말하지 않았어요. 나중에 감사 인사를 할게요.”“그런데 왜 그가 너를 도와주지?” 정미리는 이해하지 못했다. “너희가 말하지 않았다면 나는 네가 좋은 남편을 만난 줄 알았을 거야. 결혼을 숨기든 말든 상관없었을 거야. 지금 사람들은 내가 좋은 사위를 뒀다고 얼마나 열성적인지 몰라. 여이현이 오지 않았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나는 너희를 이해할 수가 없어.”그뿐만 아니라 그녀도 이해할 수 없었다.사랑 없는 결혼인데도 그는 항상 자신의 일처럼 그녀의 일을 챙겨준다.결혼한 지 3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여전히 그를 남편이라고 외부에 말한다.정미리는 다시 말했다. “나는 네가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너를 사랑하는 남자를 찾고 돈이 있든 없든 상관없어. 물론, 이현이는 모든 면에서 훌륭하지만 결국 한순간의 꿈일 뿐이야.”온지유는 어머니가 자신이 빠져들지 않기를 바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알겠어요, 엄마.”온지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이 결혼은 반드시 끝낼 거예요.”정미리는 온지유의 손을 잡으며 약간 마음이 아팠다. “미안해, 지유야.”온지유
장수희는 오랫동안 망설인 끝에 온재준이 땅속에서라도 편히 잠들게 하는 것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온재준이 헛되이 죽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온지유, 온재준의 일로 우리가 큰 대가를 치렀어. 우리도 고통을 겪었어.” 장수희는 이 며칠 사이에 한순간에 늙어버린 듯 보였고 머리에는 몇 가닥의 흰머리가 생겼다. “장례식 동안 내가 너에게 심한 말을 한 것에 대해 미안해. 내가 이성을 잃었었어. 이제 온재준을 죽인 범인을 찾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의향이 있어.”“숙모” 온지유가 한 번 불렀다. “모든 일은 이미 지나갔어요. 저도 마음에 담아두지 않아요.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해요. 옛일에 얽매여서는 안 돼요. 온채린의 실습 문제는 제가 해결할게요. 비록 그녀가 여진그룹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절대 그녀를 억울하게 하지 않을 거예요.”이 말은 그녀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식이었다.온지유의 인맥은 그녀들보다 훨씬 강했기 때문에 절대 손해 보지 않을 것이다.“고마워, 온지유.” 장수희는 안심하며 웃었다.온채린도 따라서 말했다. “고마워요, 사촌 언니.”본론으로 돌아와, 온지유는 핸드폰을 꺼내 사진 앨범을 열고 바로 사진을 그녀들 앞에 놓고 물었다. “당신들을 꼬드긴 사람이 이 사람이에요?”장수희와 온채린은 사진을 보고 약간 흥분하며 손가락으로 사진을 가리켰다. “맞아요, 맞아요!”그들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어떻게 알았어요?”온지유는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다.묘지에서 그녀는 주소영의 사진을 몰래 찍어 두었는데 바로 그녀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그녀의 추측이 맞았다.이렇게 멍청한 짓을 할 사람은 그녀밖에 없었다.“이 사람을 알아요. 그녀는 나에게 문제를 일으키려고 내 주변 사람들을 이용해요. 당신들 가족을 노린 거죠.”온지유는 이제 모든 것을 이해했다. 그 뒤에서 이 모든 일을 주도한 사람이 주소영이었다.온채린은 말했다. “난 봤어요. 묘지에서 그 여자가 언니를 해치려 했지만 우리 아빠를
그날 밤 클럽의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오래간만에 연락이 닿아 주소영은 좋은 소식을 전하려고 했다.전화를 받자 그녀는 기쁜 소식을 전하며 웃으며 말했다. “여보세요, 엄마, 저 지금 잘 지내고 있어요. 아기도 건강하고, 큰 집에 살고 있고, 돌봐주는 사람도 있어요. 특히 아이 아빠의 어머니가 저를 아주 좋아해요. 앞으로도 잘 지낼 것 같아요.”하지만 그쪽에서는 다급하게 말했다. “소영아, 내가 너한테 전화한 이유는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알려주려고 해. 경찰이 너에 대해 물어보고 있어. 무슨 일 저지른 거 아니야?”이 말을 듣자 주소영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졌다. “경찰이 정말 나를 찾고 있어요?”“그래, 네 정보를 캐고 있더라고.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소영은 전화를 끊었다.그들은 자신이 여씨 집안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경찰이 금방 이곳에 올 것이다.그녀는 경찰에 잡힐 수 없었다. 그래서 이곳을 떠나야 했다.서둘러 집을 나서며 어디로 가는지 말할 수도 없었다. 급히 여씨 집안을 떠났다.그녀가 막 뛰어나왔을 때 경찰차 소리가 들렸다.정말로 그녀를 찾으러 온 것이다.주소영은 얼굴이 창백해졌고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처럼 몰래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경찰에 잡히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이제 막 좋은 삶을 살기 시작했는데 남은 인생을 감옥에서 보내고 싶지 않았다.경찰차가 여씨 가문에 도착했다.여이현은 소리를 듣고 약간 당황했다. 경찰이 왜 이곳을 찾아왔을까.알고 보니 그들은 주소영을 찾고 있었다.그렇다면 그녀가 범죄를 저질렀을 것이다. 여이현의 얼굴은 매우 어두워졌다.보기엔 멀쩡한 여자애가 어떻게 경찰에 쫓길 수 있는지 말이 안 되었다.주소영은 경찰이 쫓아올까 봐 빠르게 도망쳤다. 잠시도 멈출 수 없었다.지쳤고 몸이 불편했지만 배를 움켜쥐고 계속 뛰어야 했다.하지만 어디로 갈 수 있을까?주소영은 갑자기 방향을 잃었다.클럽으로 갈 수 없었다.경찰이 분명 고향까지 찾아갈 것이다.어디로도 갈 수 없
타고난 아가씨의 기질. 이런 고귀함은 다른 사람에게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주소영은 이런 점이 부러웠다. 어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승자다. 반면 그녀는 예쁜 얼굴을 가지고 있어도 클럽에서 일할 수밖에 없다.노승아는 거울을 통해 그녀를 바라보며 입 꼬리를 살짝 올리고 차갑게 물었다. “날 찾아온 이유가 뭐죠?”“날 좀 도와줘요, 경찰이 날 잡으려고 해요.”주소영은 지금도 여전히 두려움에 떨고 있었고 경찰차 소리가 들리는 것만으로도 겁이 났다. 오직 노승아만이 그녀를 도울 수 있었다.“김예진, 너는 나가 있어. 내가 그녀와 이야기 좀 할게.”“알겠습니다.”매니저는 대답하고는 방을 나갔다. 방 안에는 두 사람만 남았고 옆에는 수많은 드레스 샘플들이 있었다. 옆에는 베란다도 있었다.주소영은 베란다 옆 의자에 앉아 있었다. 옆에 작은 테이블이 있었고 그 위에는 여전히 따뜻한 차가 있었다. 그녀는 그 차를 손에 들고 손을 데우며 다급하게 말했다. “지금 나는 길이 막혔어요. 경찰이 분명히 날 잡으러 올 거예요. 나는 감옥에 가기 싫어요, 정말 싫어요...”노승아는 매우 침착하게 홍차를 들고 가볍게 마셨다. “무슨 일을 저질렀어요?”“사람을 해쳤어요.” 주소영의 목소리는 떨렸고 그녀는 그 순간을 마음에서 떨쳐낼 수 없었다. “온지유의 삼촌을 내가 죽였어요. 그를 시켜 온지유를 납치하게 했어요. 나는 온지유가 죽길 바랐어요, 하지만 그녀는 목숨이 질겨서 살아남았어요.”“그녀의 삼촌은 손을 대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래서 내가 그녀의 삼촌에게 먼저 그녀를 죽이라고 했어요. 그러면 살인은 내가 한 것이 아닐테니깐요. 하지만 그는 내 말을 듣지 않았어요. 이건 납치죄예요, 감옥에 가야 해요. 나는 감옥에 가기 싫었고 그가 나에게 죄를 떠밀까 봐 무서웠어요. 그는 이미 내 얼굴을 봤고 나는 온지유를 그렇게 많이 해쳤는데 그들이 나를 폭로하면 어떻게 할까요? 그가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해야 했어요. 그래서 차에 손을 대서 폭발하게 해서 그는 죽었고
주소영은 그녀의 눈빛을 보고 처음 만났을 때의 친밀함과는 완전히 다른 것을 느꼈다. 그녀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당신은 날 이용한 거야!”주소영은 말했다. “당신은 일부러 나에게 그 말을 했고 일부러 내가 행동하게 한 뒤 손을 뗐어. 잔인한 사람은 바로 당신이야.”노승아가 일부러 친근하게 접근하고 아기 옷을 사주며 그 말을 한 것은 주소영을 이용해 자신의 후환을 제거하려는 의도였다. 노승아는 진심으로 그녀를 관심한 것이 아니라, 주소영을 깊은 구렁텅이로 밀어 넣으려 한 것이다.“정말 연기 잘하는구나!” 주소영은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당신은 나를 아주 좋아하는 척, 나를 위해주는 척, 착한 척, 너그러운 척했어.”노승아는 차분하게 차를 마시며 이런 말들은 그녀에게 칭찬에 불과했다.“지금도 내 아이를 해치려고 해.” 주소영은 배를 감싸며 말했다. “당신은 나와 이현 오빠의 아이를 받아들이지 못해. 당신은 잔인한 여자야!”주소영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안 돼, 여기서 머무를 수 없어. 당신은 날 구해주지 않을 거야!”그녀는 도망치려고 했지만 밖에서 경찰차 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공포에 질려 다시 노승아를 바라보았다. “경찰이 여기 어떻게 온 거죠? 어떻게 찾아낸 거죠?”노승아는 눈을 들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물론 신고했죠. 당신이 범죄를 저질렀다면서요? 당연히 경찰에 알려야죠. 나는 착한 사람이니까요.”“노승아!” 주소영은 분노에 차 외쳤다. “너 이 나쁜 년아, 네가 날 망쳤어. 너 이 나쁜 년!”주소영은 격분하여 노승아의 목을 움켜잡았다. “당신은 날 대신 죽게 하려고 했어. 죽을 거면 같이 죽자. 너도 살지 못할 거야!”노승아는 입을 크게 벌리며 소리쳤다. “살려줘! 살인이다, 살인!”그러나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미 노승아에 의해 밖으로 나가 있었다.주소영은 이성을 잃고 탁자 위의 과일 칼을 집어 들고 노승아를 찌르려 했다.노승아는 두려움에 떨며 말했다. “안 돼, 안 돼!”그녀의
죽을 때까지도 이런 집착이 남아 있었다.그녀는 아이를 통해 신분 상승을 꿈꾸었다.아이가 생기면 그녀도 안정될 줄 알았다.모친의 지위로 아이를 통해 자신도 출세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결국은 한낱 헛된 꿈일 뿐이었다.이 말을 다 하고 나서, 주소영은 숨을 멈췄다. 눈은 크게 뜬 채로 전혀 감기지 않았다.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한 채 말이다.경찰이 내려왔을 때, 주소영은 이미 죽어 있었다.그들은 현장을 통제선으로 둘러쌌다.노승아는 경찰에 의해 부축을 받아 내려왔다. 머리는 헝클어지고 얼굴은 창백했으며 온몸은 피투성이였다. 눈물은 눈가에 맺혀 있었고 겁에 질린 표정이었으며 손은 계속 떨리고 있었다.경찰은 그녀를 위로하며 겁먹지 말라고 했다.노승아의 눈물이 서서히 흘러내리며 그녀는 공포에 떨었다.매니저는 그녀를 안아주며 위로했다.온지유가 도착했을 때, 사건은 이미 끝난 상태였다.그녀가 본 것은 한 구의 시체뿐이었다.그 순간, 그녀는 매우 충격을 받았다. 주소영이 왜 추락해서 죽은 것일까?그녀는 다시 한 번 멀리서 노승아를 바라보았다. 노승아는 앉아서 따뜻한 물을 마시고 있었다.“온지유, 용의자는 이미 사망했습니다!” 경찰은 온지유에게 말했다. “이 사건에 다른 의심스러운 인물이 없다면 사건은 일단락될 것입니다!”온지유는 듣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노승아를 향했고 의심이 생겼다.주소영과 노승아는 몇 번 만나본 적이 없었는데 왜 그녀를 찾아왔을까? 게다가 추락해서 죽었다는 것이 의심스러웠다.주소영의 시체는 운반되었다.그들은 다시 경찰서로 돌아갔다.이번에는 주소영의 사망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서였다.노승아는 코트를 걸치고 앉아 있었고 얼굴은 핏기 없이 창백했다. 그녀는 떨리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왜 그녀가 저를 찾았는지 모르겠어요...아마 제가 여씨 가문에서 그녀를 몇 번 보고 대화를 나눴을 때, 매우 즐거운 대화였어요. 그래서 그녀가 저를 찾아왔을 때 저도 친절하게 대접했어요. 제
삼촌을 죽인 범인이 없어졌다.이제 더 이상 조사를 할 필요가 없어졌다. 증거를 찾을 필요도 없다. 이 사건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노 아가씨, 당신의 진술은 끝났습니다. 이제 상처를 치료하러 가세요.” 경찰이 말했다.매니저가 말했다. “노승아 언니, 당신은 너무 착해요. 자신도 다쳤는데 병원에 가지 않고 먼저 경찰서에 와서 일을 마무리하다니.”노승아의 눈가는 빨갛고 얼굴은 매우 창백했다. “그만 말해, 이미 끝났어. 이제 병원에 가자.”매니저는 노승아를 부축하며 걸었다. 그녀는 매우 허약해 보였지만 억지로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그들은 바로 온지유와 마주쳤다.노승아는 온지유를 보며 말했다. “정말 우연이네요, 경찰서에서도 만나게 되다니.”온지유는 노승아의 손이 다쳤고 옷이 피로 범벅인 것을 보았다. “우연이 한두 가지가 아니죠. 사람이 떨어져 죽었는데 하필 당신 집에서 떨어졌다고요?”노승아는 잠시 멈췄다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며 말했다. “그 소녀 말하는 거예요?”그녀는 태연하게 서 있었고 다시 말했다. “그 소녀가 왜 날 찾아왔는지 모르겠어요. 나를 죽이려고 했던 거예요. 너무 무서웠어요. 그녀가 범죄를 저질렀다고 들었어요. 아마도 도망치다가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걸 거예요.”“맞아요, 그녀와 몇 번 만났어요. 항상 여씨 가문에서 봤어요. 그녀는 여이현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들었어요. 그녀는 내가 여이현과 관련이 있는 것을 알고 질투해서 나를 죽이려고 했을지도 몰라요.” 노승아는 모든 것을 명확하게 말하며 덧붙였다. “그녀는 여이현을 좋아했어요. 단 하룻밤의 관계였지만 그녀는 이미 자신을 여주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니예요. 안타깝게도 젊은 나이에 잘못된 길을 걸었어요.”노승아는 모든 책임을 자신과는 무관하게 돌렸다.“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온지유는 노승아를 주시하며 말했다. “주소영이 저지른 어리석은 일들은 당신이 뒤에서 조종한 거겠죠.”“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난 그녀와 친하지
“배 비서, 얼른 병원에 데려가요.”“네, 대표님.”여이현의 말에 배진호가 달려오자 노승아가 여이현을 향해 물었다.“오빠는 같이 안 가요?”“난 아직 해결해야 할 일이 좀 있어. 일 끝나면 갈게.”나중에 온다는 여이현의 말에 노승아가 안심하며 말했다.“알겠어요. 그럼 나 먼저 병원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요.”말을 마친 노승아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는 온지유를 쳐다보았다.여이현이 노승아를 아끼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었고 이번에는 다치기까지 했으니 걱정하는 게 당연했기에 온지유는 못마땅했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너 괜찮아?”여이현이 그런 온지유를 눈치채고 묻자 온지유는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담담하게 말했다.“내가 갔을 때 주소영은 이미 죽어 있었어요. 경찰이 그러는데 다른 용의자가 없으면 삼촌 사건은 그렇게 종결 날 거래요.”“주소영이 확실하대?”“네. 사람이 죽어서 그냥 그렇게 끝낼 수밖에 없대요.”처음에는 다른 사람한테 당했다는 게 화가 났지만 사람도 다 죽고 나니 여기서 더 따져봤자 뭐하겠냐는 생각이 들었다.“다 끝났으면 우린 그만 가자.”“어디로요?”“어디 가고 싶은데?”잠시 고민하다 묻는 여이현에 온지유는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노승아 씨 다친 거 보러 가야 하잖아요. 내가 가려는 곳이랑은 다른 방향일 텐데 뭐하러 나한테 물어요. 얼른 거기나 가봐요.”온지유는 아무렇지 않은 듯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었지만 마음속으로는 항상 질투하고 있었다. 노승아는 온지유에게 넘지 못할 벽 같은 존재였다.여이현은 그런 온지유를 가만히 바라봤지만 더는 말하지 않고 자신의 등을 떠밀기만 하는 그녀에 여이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혼자 어디 가려고?”“집에요.”온지유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말했다.“본가에 갈 거예요. 부모님한테서 연락 왔어요.”여이현의 집에 가지 않겠다는 대답에 여이현은 담담히 대꾸했다.“그래.”그런 여이현을 보고 있던 여이현이 주먹을 꽉 쥐며 생각만 해왔던 그 말을 내뱉었다.“일이 너무 딱
법로의 표정은 여전히 엄숙했다.온지유는 이런 소식을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지금 이 상황에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무엇을 말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지금은 침묵이 가장 좋은 답변일지도 모른다.신무열 또한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아린에게 꼭 살리겠다고 약속했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신무열은 깊은 죄책감에 사로잡힌 채 아린이 있는 침대로 다가갔다.“미안해. 한 몸 바쳐 중요한 정보를 전해준 네 목숨을 결국 지킬 수 없었어.”아린은 침대에 누워있었다. 몸속의 독으로 인해 얼굴은 이미 다 망가졌지만, 신무열이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렇게 대단한 정보도 아니에요. 제가 말하지 않아도 결국 무열 씨는 모든 걸 알게 됐을 거예요.”그녀는 자처해서 한 것이었고 이 일로 인해 신무열이 어떤 마음의 짐도 가지지 않길 바랐다.신무열은 보이지 않는 손에 심장이 쥐어 짜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자신을 위해 한 몸 바쳐 싸운 아린을 위해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는 사실에 목이 막혔다. 따로 방법이 없다면 이대로 그녀가 죽어 가는 걸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신무열은 그녀가 어떤 후회도 남기지 않도록 해주겠다고 결심했다.신무열은 아린에게 약속했다.“내 무능함 때문에 네 독을 풀어주지 못했지만 걱정하지 마. 나는 절대 널 포기하지 않을 거야. 그놈들한테 건 현상금도 아직 유효해. 정 안 된다면... 내가 반드시 복수해 줄게. 마지막으로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다면 나에게 말해줘.”신무열의 눈빛은 확고했다.아린이 어떤 소원이든 말하든 그는 반드시 그것을 이뤄줄 생각이었다.아린은 신무열이 김혜연과 결혼할 것을 알고 있었다.그랬기에 두 사람을 곤란하게 하거나 결혼 전에 그의 마음을 흔들고 싶지 않았다.아린은 끝까지 미소를 유지하며 말했다.“신무열 선생님, 제가 당신에게 이 정보를 전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당신이 저를 살리려 노력해 주고 제 곁에 있어 준 것만으로도 충분해요.”“혜연
온지유는 참지 못하고 농담을 던졌다.“결혼 후엔 아이도 빨리 낳아야겠네요. 나중에 아기가 태어나면 나도 좀 같이 놀아줘야죠.”“넌 이제 Y국에 있지도 않고 아버지도 같이 경성에 갔잖아. 차라리 Y국으로 와. 내가 널 고용할게.”신무열은 단숨에 말을 이어갔다.사실 거리가 그들 사이의 큰 걸림돌이었다. 온지유가 경성에 남기로 한 건 그녀의 선택이지만 신무열은 그녀가 Y국에 머물러 주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Y국은 그들의 뿌리와 영혼이 있는 곳이며 오빠로서 여동생에게 여러모로 보답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온지유도 신무열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이현이 경성에 있고 양부모도 그곳에 있는 온지유에게는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없었다.게다가 온지유는 Y국을 관리하는 일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온지유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형수가 아이를 낳게 되면 내가 와서 돌봐줄게요.”두 사람에겐 어머니가 없었고 신무열의 능력으로 아이가 태어날 때 산후조리사는 고용할 수 있다 해도 가족의 보살핌을 대체할 수는 없을 것이다.김혜연은 온지유가 ‘형수’라 부르는 말에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다.신무열이 자신을 인정해 주고 신무열 곁의 모든 사람이 그녀를 받아들여 주고 있다는 것이 참 다행스러웠다.신무열은 아린의 문제에 대해 법로에게 말할 필요가 있었다.“아버지, 제 친구가 노석명이 개발한 독약의 개량품에 감염되었습니다. 직접 한 번 살펴봐 주실 수 있을까요?”법로는 노석명의 이름을 듣고는 눈빛이 어두워졌다.“노석명의 독약이라니? 그놈은 이미 처형되어 사람의 형체조차 잃고 혀마저 잘려 매일 돼지처럼 살고 있다. 노석명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이냐?”혹은, 눈치도 없는 누군가가 아직도 노석명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다는 것일지도 몰랐다.한편, 온지유는 ‘아린’이라는 이름을 듣자 과거 Y국 북부에서 처음 신무열을 만났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내가 아는 그 아린 맞아요?”“그래.”신무열은 숨기지 않았다.당시 전쟁 중에 아린은 온지유에게 식사를 해주
“고마워.”나민우는 그 단어를 입 밖으로 내고 싶지 않았다. 온지유에게 감사하고 싶지 않았다. 온지유에게서 축복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에게 무슨 수가 있단 말인가?이것이 그들 사이의 가장 좋은 결말일 것이다.“나도 이만 가봐야 하니까, 돌아오면... 혹시 나중에 업무상 합작할 일이 있으면 또 보자.”온지유는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 한마디 힘겹게 뱉었다.“그래.”나민우는 온지유가 사라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고 돌아섰다. 심장이 조여왔다. 고통이 거대한 괴물처럼 덮쳐왔다.차라리 보지 않는 게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고 나민우는 생각했다....온지유는 여이현의 곁으로 돌아왔다. 여이현은 온지유에게 마실 것을 시켜줬다.그녀뿐이 아니라 별이와 법로의것까지 준비되어 있었다.별이에게는 감자튀김, 치킨을 준비했고 법로에게는 붉은색 외투를, 그리고 이번에는 배진호도 데려왔다. 배진호가 아직 한 번도 Y국에 와보지 않은 것도 있고 함께 가면 업무 진행 상황도 보고 받기 편해지기 때문이다.배진호는 일 중독자답게 비행기 대기 중에도 일을 하고 있었다.법로는 별이를 보더니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둘이 별이에게 맛있는 걸 먹이고 싶은 마음은 알지만 별이는 몸이 안 좋으니까 너무 기름진 건 많이 먹이지 마라.”“알아요 아버님. 어쩌다 가끔 사주는 거예요.”여이현도 평소에는 아이에게 패스트푸드를 사주는 건 기피하고 있었다.하지만 여이현과 온지유는 아이에게 너무 많은걸 참게 했다.게다가 할아버지도 엄하게 대하니 가끔은 보상으로 먹을 것 정도는 줘도 괜찮다 생각했다.“천천히 먹어, 체할라.”법로는 말은 그렇게 해도 사사건건 별이를 걱정해 주고 보살펴주고 있었다. 별이의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닦아주기까지 하며 말이다.한 가족의 행복이란 이런 소소한 곳에서 느껴지는 걸지도 모른다.비행기 위에서 온지유는 꿈을 꿨다.꿈속에서 그녀는 한 여자아이가 장미를 한 송이 들고 귀엽게 웃으며 바라보는 모습을 보았다.“예쁜 이모, 같이 가도 돼요?”여자아
경성에 함께 돌아온 이후로 나민우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온지유는 나민우의 마음을 알았고 나민우의 희생도 잘 알고 있었다.몇 년간 그녀는 나민우에게 휴대폰으로 메시지를 보내는 외에 직접 얼굴을 본 적은 없었다.당연했다. 그 메시지들을 나민우는 한번도 회답을 한 적 없었기 때문이다.온지유의 이 말은 비수같이 나민우의 마음에 꽂혔다.잘 지냈을 리가 있을까?집으로 돌아온 후 그의 모든 연락 수단은 뺏기고 말았다.Y국에 있는 동안 나민우는 심신이 모두 피폐해져 있었다.가족들은 그의 활동 범위를 제한해 안정을 취하도록 했다.지어는 어울리는 여자를 찾아 이어줘 둘 사이에는 아이도 생겼다.나민우는 이 몇 년간 감히 온지유에게 연락을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질까 봐 두려웠다.지금의 자신은 더 이상 온지유의 옆에 설 자격이 없었다.순간 나민우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목이 막힌 듯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온지유의 물음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온지유는 나민우에게서 이상함을 감지했다.하지만 미처 무어라 묻기도 전에 여이현이 다가왔다.여이현은 나민우를 발견하고 먼저 인사했다.“민우 씨, 오랜만이네요.”여이현까지 나타난 이상 나민우도 더 이상 피할 수 없었다.“예. 오랜만이에요.”온지유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여이현이다. 여이현이 살아 있는 지금, 그가 온지유의 곁에 서있는 지금, 온지유는 더더욱 여이현과 갈라질 일은 없었다.모든 것은 이미 다 정해진 운명이었다.나민우는 웃으며 돌아섰다.“아직 할 일이 남아서 먼저 가보겠습니다.”“네. 또 봅시다.”그저 평범한 인사치레일 뿐이었다.나민우는 돌아섰지만 온지유는 그가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여이현은 온지유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그 일에 연루되었던 사람들이 지금은 다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그렇지 않으면 온지유는 계속 마음에 두고 있을 것이다.온지유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다들 괜찮아 보이지만 나는 왠지... 나민우는
신무열은 말을 마치고 김혜연에게 따뜻한 눈길을 보냈다.김혜연은 순간 그의 뜻을 눈치챘다.그리고 싱긋 웃었다.“괜찮아요.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아요. 결혼식은 그저 형식적인 것일 뿐인걸요.”신무열은 김혜연의 머리를 쓰다듬고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했다.김혜연 마음은 호수에 빗방울이 떨어진 듯 은은하게 일렁였다.둘의 합의로 결혼식은 1주 후에 치루기로 결정되었다.신무열은 먼저 Y국 전체에 결혼을 발표했다.그리고 친구들에게도 소식을 전했다.법로는 신무열이 이렇게 빨리 결정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그에게 한마디 했다.“전에 지유를 통해 네게 귀띔했을 때는 싫다고 하더니만 지금은 어떠냐?”신무열은 웃음을 흘렸다.이번 일은 확실히 신무열의 예상 밖이었다. 세상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 말은 조심해야 하는 게 맞았다.법로가 말했다.“결혼할 생각이었으면 지유와 같이 결혼식을 치렀으면 좋았을 텐데.”법로는 온지유의 이름을 부르는 데에 익숙해져 율이라는 이름이 오히려 입에 익지 않게 되었다.법로에게 있어서는 딸이 곁에 있어만 준다면 이름이 어떻든 상관이 없었다.율이라는 이름은 한동안 노승아가 썼던 것이기도 했기에 오히려 온지유의 이름이 마음이 편했다.온지유의 기억은 경성에서 멈춰있었다.온지유만 좋다면 어떤 신분으로 있든 상관이 없다.“경성에서 돌아오기 싫은 마음은 저도 알지만 우리의 결혼식에는 참석해 줬으면 좋겠어요.”아버지와 여동생마저 참석하지 않으면 어떤 사람들은 이 결혼을 인정하지 않을지도 모른다.“알고 있다. 지유와도 내가 말해두마. 오늘 저녁에 바로 출발하겠다.”아들의 결혼식에 참석 안 할 리가 있을까?게다가 온지유에게 이미 잘 못 대해 줬었는데 아들에게까지 신뢰를 잃을 수는 없었다.온지유가 돌아오자 법로는 바로 이 소식을 전해주었다.온지유는 단숨에 승낙한 것도 모자라 두 사람의 결혼 소식에 누구보다도 기뻐했다.“정말 잘됐어요. 또 한 쌍의 연인이 맺어지게 되다니.”김혜연의 집념과 노력을 온지유는 두
아린이 같은 수단으로 신무열을 그녀의 곁에서 앗아갔기 때문이다.아린에게 더 대단한 수단이 있었다면 김혜연은 인정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지금은...김혜연은 마음속이 바늘로 쑤시듯 아파져 왔다.그녀는 신무열이 세심하게 아린을 보살피는 모습을, 직접 아린에게 약을 떠먹여 주는 그의 모습을 곁에서 뚫어져라 쳐다봤다.신무열은 한참이 지나고 아린이 잠들고 나서야 발길을 돌렸다.뒤돌아선 신무열은 그제야 뒤에 있던 김혜연을 발견했다.“네가 왜 여기에?”김혜연은 신무열의 뒤에 누워있는 아린을 보며 물었다.“아린이 찾아온 게 딱히 비밀은 아니잖아요?”Y국 전국에 이미 아린이 목숨을 걸고 신무열에게 정보를 전달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신무열은 그녀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아린을 살려내고 아린을 결혼식의 주인공으로 발표할 거라는 소문은 점점 더 퍼져가고 있었다.김혜연은 이 모든 것을 알고 나서야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신무열은 김혜연의 눈빛에서 이미 모든 것을 눈치챘다.“아린은 우리에게 중요한 정보를 전해주었어. 나는 아린이 죽게 내버려둘 수 없었을 뿐이야.”그것이 바로 신무열의 입장이었다. 그 외에는 아린에게 어떠한 다른 감정도 품고 있지 않았다.밖에는 이미 아린이 그를 도왔기에 책임감을 느낀 신무열이 그녀를 곁에 둘 것이라 말하고 있었지만, 그의 태도는 굳건했고 은혜를 갚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내주지도 않을 것이다.김혜연은 숨을 들이 삼켰다. 신무열이 그녀에게 친절히 설명을 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이에 김혜연은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무열 씨...”이름을 불렀지만 그 뒤에 무슨 말을 이어야 좋을지 생각이 들지 않았다.부인할 수 없는 건 신무열과 그녀 사이의 신분과 관계성을 고려하면 신무열이 자세히 설명을 해준다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왜? 나는 너와 약혼한 사이이기도 한데 이런 일이 일어난 뒤에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는 없잖아. 그건 네게 너무 잔인하지 않아? 아니면 넌 나를 그런 사람으로 생각해 왔던 거야?”
신무열은 상황을 파악한 후 요한을 불러 말했다.“아린을 실험실로 데려가서 검사해 봐.”이들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아린은 중요한 정보를 전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내걸었다.아린은 숨을 고르며 말했다.“선생님, 저 때문에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지금 치료는 필요 없어요.”“그들이 노리는 건 바로 너의 안전이야. 지금은 네 안전이 가장 중요해.”신무열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아린은 신무열의 따뜻한 배려를 느꼈다. 비록 신무열이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그녀의 건강을 걱정하는 것이라 해도 어떻게 되었든 신무열의 관심을 받는 것만으로도 그녀에겐 큰 위안이었다.그렇게 아린은 요한과 함께 실험실로 갔다.실험실에서 검사를 하던 연구원들은 모두 고개를 저었다.“아주 강력한 독입니다. 노석명이 개발한 독을 개량한 것이며, 지금으로선 해독제가 없습니다.”신무열의 얼굴은 어두워졌다.“노석명의 독은 이미 다 없어진 게 아니었나?”노석명은 처형되었고, 법로의 관심이 온지유와 별이에게 쏠리면서 Y국에는 더 이상 그런 독이 존재하지 않았다.“요한, 이 일을 추적해. Y국에 해가 되는 그 누구도 존재하지 못하게 하고, 국가와 국민의 안전을 지켜야 한다.”신무열은 차가운 눈빛을 띠며 단호하게 말했다.그리고 다른 연구원들에게도 명령을 내렸다.“어떤 방법이든 상관없다. 반드시 아린의 목숨을 구해!”“예!”연구원들은 그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다.아린은 마음속에 따뜻함을 느꼈다.“선생님, 제 목숨을 소중히 여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죽게 내버려두지 않으셔서요. 하지만... 저는 죽음이 두렵지 않아요.”아린은 이미 신무열에게 중요한 정보를 전했고, 그것으로 신무열이 대비할 수 있게 했다.그녀는 이미 명예롭게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세상에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신무열은 아린이 자신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그는 아린이 자신 때문에 죽게 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평
신무열은 Y국에서 높은 신분을 지니고 있지만 나라의 미래와 백성을 위해 자신의 격을 낮추고 직접 약초를 가르치고 재배법을 가르치며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기도 했다.그 시간 동안, 신무열은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었고, 아린에게도 작은 선물을 챙겨주었다. 신무열은 어떤 사람인가?그는 한 번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노력해도 마음을 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지금 이런 행동을 한다면 오히려 신무열의 마음속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망칠 뿐이었다.신무열은 그녀를 계속 싫어할 것이고 아린은 혼자서 그를 바라만 보는 삶을 살게될것이다.그럼에도 아린은 지금은 그들에게 협조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아린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무열 씨를 좋아하는 여자는 많은데 왜 저를 선택한 거죠? 저는 작은 인물이고, 아무런 배경도 없는데요.”“바로 네가 작은 인물이기 때문이지. 그래야 의심받지 않아. 정말 신무열을 영원히 네 곁에 두고 싶지 않나? 신무열은 뛰어난 사람이고 너와 그의 아이라면 최고의 유전자를 가질 텐데.”아린이 대답하지 않자 남자는 계속 그녀를 부추겼다.남자의 말들은 아린의 머릿속에서 수없이 되뇌어졌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신무열과 함께하는 것보다 미움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당신 말이 맞아요. 계획이 뭐죠? 말해줘요. 계획대로 따를게요.”그녀는 자신이 왜 선택되었는지도 알고 있었다. 작은 인물이기 때문에 조종하기 쉽고 조금의 이익으로도 매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계획은 내가 알려줄 거야. 하지만 그 전에, 너의 충성심을 위해...”‘푹!’남자는 말을 끝내지 않았다.아린은 피부에서 느껴오는 찌릿한 고통에 눈살을 찌푸렸다.아린은 자신에게 독이 주입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남자는 아린에게 위협하듯 말했다.“내 말을 어기기만 해봐. 이 독은 널 죽기보다도 못한 고통을 줄 테니까!”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아린은 견딜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머리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표정은 고통으로 일그러졌지
아린이 아직 입을 떼기도 전에 신무열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지금 나는 이미 헤연에게 약속 했어. 남자로서 한 말은 반드시 지켜야지. 게다가 난 혜연에게 특별히 불만도 없어.”아린은 숨이 막혔다.책임감 때문에 여자를 곁에 두지 않았던 신무열. 그리고 김혜연에게는 불만이 없다는 말에 더해 김혜연이 늘 신무열 곁에 있으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의 진심을 확인했다는 점에 속이 검게 타들어 갔다.“가까이 있는 자가 먼저 기회를 얻는다”는 말과 “오랜 시간이 지나야 진짜 모습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참으로 딱 들어맞았다.아린의 마음은 아팠다. 그녀는 평민일 뿐이었고 김혜연과는 신분 자체가 달랐다.신무열이 원하는 건 그와 나란히 설 수 있는 우수한 여성이자 내조자였지 빈민가 출신의 이름 없는 소녀는 아니었다.아린은 여러 해 동안 큰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들 사이의 신분 격차는 변할 리 없었다.“선생님, 당신이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축복할게요. 당신이 늘 행복하길 바라요.”이것이 아린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다.“고마워.”신무열도 그녀의 말에 감사를 표했다.아린은 돌아섰다.자신의 위치와 지위를 바꾸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 왔지만 목표가 사라진 지금은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졌다.신무열의 거처를 벗어난 아린은 얼마 가지 않아 무리에게 가로막혔다.그녀보다 키도 크고 체격이 다부진 남자들이 점점 다가왔다.아린은 본능적으로 총을 꺼내려 했지만 상대가 더 빨랐다.총구가 그녀의 머리에 겨눠지며 차갑고 위협적인 목소리가 들렸다.“죽기 싫다면 조용히 우리 말을 듣고 따라와라!”전쟁 중 매일 총탄에 대한 공포 속에 살았던 그녀였다. 몸은 총구를 두려워하고 있었지만 여긴 신무열의 구역이었다. 그녀 같은 작은 존재가 신무열에게 폐를 끼칠 순 없었다.아린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그들의 요구에 순응했다.얼마나 걸었는지 모른 채 끌려간 곳은 작은 방이었다. 그들은 무기를 꺼내 그녀를 겨눴다.“할 말이 있으면 똑바로 하세요. 괜히 쇼하지 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