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비서, 얼른 병원에 데려가요.”“네, 대표님.”여이현의 말에 배진호가 달려오자 노승아가 여이현을 향해 물었다.“오빠는 같이 안 가요?”“난 아직 해결해야 할 일이 좀 있어. 일 끝나면 갈게.”나중에 온다는 여이현의 말에 노승아가 안심하며 말했다.“알겠어요. 그럼 나 먼저 병원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요.”말을 마친 노승아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는 온지유를 쳐다보았다.여이현이 노승아를 아끼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었고 이번에는 다치기까지 했으니 걱정하는 게 당연했기에 온지유는 못마땅했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너 괜찮아?”여이현이 그런 온지유를 눈치채고 묻자 온지유는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담담하게 말했다.“내가 갔을 때 주소영은 이미 죽어 있었어요. 경찰이 그러는데 다른 용의자가 없으면 삼촌 사건은 그렇게 종결 날 거래요.”“주소영이 확실하대?”“네. 사람이 죽어서 그냥 그렇게 끝낼 수밖에 없대요.”처음에는 다른 사람한테 당했다는 게 화가 났지만 사람도 다 죽고 나니 여기서 더 따져봤자 뭐하겠냐는 생각이 들었다.“다 끝났으면 우린 그만 가자.”“어디로요?”“어디 가고 싶은데?”잠시 고민하다 묻는 여이현에 온지유는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노승아 씨 다친 거 보러 가야 하잖아요. 내가 가려는 곳이랑은 다른 방향일 텐데 뭐하러 나한테 물어요. 얼른 거기나 가봐요.”온지유는 아무렇지 않은 듯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었지만 마음속으로는 항상 질투하고 있었다. 노승아는 온지유에게 넘지 못할 벽 같은 존재였다.여이현은 그런 온지유를 가만히 바라봤지만 더는 말하지 않고 자신의 등을 떠밀기만 하는 그녀에 여이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혼자 어디 가려고?”“집에요.”온지유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말했다.“본가에 갈 거예요. 부모님한테서 연락 왔어요.”여이현의 집에 가지 않겠다는 대답에 여이현은 담담히 대꾸했다.“그래.”그런 여이현을 보고 있던 여이현이 주먹을 꽉 쥐며 생각만 해왔던 그 말을 내뱉었다.“일이 너무 딱
“회사에도 할 일이 남았잖아. 삼촌분 일 처리 끝났으면 이젠 회사 일에 집중해야지.”여이현은 온지유의 또 다른 신분을 상기시켜주었다.온지유는 여이현의 비서였기에 그에 따르는 업무가 존재했다.곧 이직할 거라서 일을 해야 하는 날이 하루밖에 남지 않았지만 집에서 삼촌 일을 처리하느라 휴가를 다 써버려서 출근하지 않으면 월급이 깎일 수 있었기에 온지유는 출근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그만둘 때 그만두더라도 하던 일은 마무리 해야 했기에 온지유는 고민 끝에 대답했다.“네, 대표님.”만족스러운 대답에 여이현이 온지유에게 향했던 눈길을 거두고 앞장서 걷자 온지유가 그 뒤를 따랐다.그렇게 둘은 예전처럼 부부가 아니라 상사와 부하직원 사이로 돌아갔다.온지유는 여이현의 눈빛만 보아도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바로 가져다줬기에 여이현도 그렇게 많은 비서를 보아왔지만 맘에 드는 건 온지유뿐이었다.둘이 처음으로 향한 곳은 온지유의 예상대로 병원이었다.온지유는 여이현이 노승아에게 정성을 쏟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마침 요즘은 노승아도 쉬고 있었으니 사랑놀이하기에 가장 적당한 시기였다.노승아를 보러 가는 엘리베이터에 있는 게 온지유와 여이현이었기에 둘 사이에는 정적이 감돌 수밖에 없었다.둘이 병실에 도착했을 때는 노승아가 이미 상처를 다 치료한 다음이었는데 의사 말을 들어보니 심신 안정을 취해야 해서 심리 상담을 받아보는 걸 추천하는 듯싶었다.안 그래도 위로가 필요했는데 이 와중에 마침 여이현이 들어오는 걸 본 노승아는 벌떡 일어나 여이현에게 달려가 그의 품에 안기며 팔을 잡아끌었다.“이현 오빠.”“나 너무 무서워요.”문에 기대어 있던 온지유는 이젠 둘이 안고 있는 모습을 봐도 아무렇지 않은 저 자신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질투도 뭣 모를 때 얘기지 이젠 이런 일이 하도 자주 일어나다 보니 여이현에 대한 기대가 사라진 지 오래였기에 더이상 상처받지도 않았다.여이현은 그런 온지유를 신경 써서인지 노승아를 떼어내며 물었다.“상처는 다 치료한 것
그 말에 이상함을 느낀 여이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십 분 동안이나 실랑이했다던데? 그동안 아무도 안 왔다고요? 그러다가 혼자 발을 헛디뎌서 떨어진 거예요?”“방안에 승아 언니랑 주소영 씨뿐이고 얘기만 하는 거니까 저도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경호원 오빠들은 승아 언니가 하필 그날 다 휴가를 줘버려서...”김예진은 여이현이 저를 탓하기라도 할까 봐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노승아의 매니저씩이나 돼서 제일 위험할 때 곁에 있어 주지 못한 건 업무를 제대로 완수하지 못한 것이었기에 탓해도 할 말은 없었다.“신고는 누가 했어요? 경찰이 엄청 빨리 왔던데.”사건이 벌어지자마자 거의 경찰이 왔으니 신고를 한참 전에 해야 가능한 일이었다.그런데 김예진도 누가 신고를 했는지 몰랐기에 그 질문에는 답을 할 수 없었다.김예진이 노승아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경찰차의 소리를 들었을 때였다.“내가 신고했어요.”그때 노승아가 나지막이 말하며 종이로 이따금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냈다.“주소영 씨는 그때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갑자기 이상한 말을 하면서 자기가 죄를 너무 많이 지어서 경찰이 잡으러 올 거라고 했어요.”그러면서 노승아는 시선을 온지유에게로 옮겼다.“지유 언니, 나도 그날 소영 씨 말 듣고 나서 언니 삼촌이 그렇게 된 거 알았어요. 그리고 언니를 납치한 것도 다 소영 씨 짓이었어요.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못 될 수가 있어요? 법은 다 무시하고 나쁜 짓만 하니까 나도 화나서 바로 경찰에 신고한 거예요.”“그리고 내가 신고하는 걸 보더니 날 죽이려고 달려들었어요.”노승아는 그 일을 떠올리며 두려움에 떨었다.온지유는 그저 여이현을 따라온 것이기에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제 삼촌을 먼저 언급하는 노승아에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노승아의 말을 삼촌을 죽인 범인이 주소영이고 자신이 그걸 알고 경찰에 신고했으니 온지유가 고마워해야 된다는 뜻으로 들렸다.만약 정말 그런 거면 다행이지만 온지유는 그렇다고만 믿을 수가 없어 노승
여이현은 김예진을 향해 차갑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묻는 건 승아를 위해서이기도 해요. 승아가 지금 이 사건의 당사자잖아요. 기사만 봐도 이보다 더한 질문을 하는 사람들 천지에요. 그런 사람들 입부터 막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노승아는 공인이었으니 그녀가 인질로 잡힌 일은 일반인이 인질로 잡힌 것과는 성질이 달랐다.일반인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어도 보도는 됐겠지만 사건의 당사자가 노승아라면 여론이 안 좋은 쪽으로 흘러갈 수도 있었다.노승아도 일이 커지면 제가 실시간 검색어에 올라갈 거라는 걸 알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감히 여이현의 아이를 낳으려 한 주소영이 스스로 제 명을 단축한 것뿐이었다.노승아는 제가 아닌 다른 여자가 여이현의 아이를 낳는 걸 두고 볼 수가 없었다.물론 여이현이 주소영에게 마음을 주지 않을 거고 주소영은 그저 제 대타일 뿐이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여이현의 아이의 엄마 자리에 주소영은 어울리지 않았다.그리고 주소영은 호시탐탐 노승아의 자리를 노려왔기에 노승아는 그걸 지켜보다 당할 수는 없어서 먼저 손을 쓴 것이었다.하지만 일은 노승아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노승아는 레드카펫을 밟고 모두가 우러러보는 자리에까지 올라가 여이현도 제 매력에 빠지게 만들어 그의 아내로 더 많은 명예를 쌓을 생각이었는데 하필 이럴 때 기사가 터져버린 것이다.노승아는 이미 여러 번 실시간 검색어에 오른 이슈 여왕이었다.문제는 매번 나는 기사마다 별로 좋은 소식이 아니라는 것이었다.노승아는 아직 기사는 보지 못했지만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여이현을 보고 그의 기분이 별로임을 알 수 있었다.“이현 오빠, 내가 또 오빠 귀찮게 했죠? 미안해요. 나도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어요. 알았으면 소영 씨를 집에 들이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럼 소영 씨도 살아있었을 거고 나도 아무 일 없었을 텐데. 나 너무 후회돼요.”“언니 잘못 아니잖아요. 주소영이 나쁜 년이고 그 사람이 지옥 가야지 언니가 왜 사과를 하고 있어요!”여이현도 노승아를 탓하지 않고
적어도 배진호가 보기에는 여이현과 노승아는 아무 사이가 아닌 듯싶었다.물론 뭐 둘 사이에 감정이 있다는 소문이 무성하긴 했지만 배진호가 본 여이현은 늘 노승아와 거리를 두고 있었다.물론 둘 사이에 배진호가 모르는 다른 것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게 사랑은 아니었다.배진호의 위로 아닌 위로에 온지유는 미소를 지었다.“진호 씨, 왜 갑자기 나한테 그런 말 해요? 진호 씨도 알잖아요 그날 봐서. 여이현 씨랑 나는 어차피 이혼할 사이었어요.”여이현이 노승아를 위해 엔터를 차렸다는 것부터가 엄청난 의미였기에 온지유는 배진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하지만 배진호는 그들의 결혼이 아무 의미도 없는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개인적인 질문 하나만 해도 돼요? 온지유 씨는 대표님이랑 이혼하고 싶으세요?”배진호의 질문에 온지유는 잠시 대답하기를 망설였다. 만약 예전에 온지유가 이런 질문을 받았다면 대답은 당연히 부정이었을 것이다. 그때의 온지유는 갖은 노력 끝에 이뤄낸 여이현과의 결혼 생활을 행복하게 보낼 거라고 다짐했었다.하지만 온지유가 마주친 현실은 그녀의 그런 바람을 짓밟아 버렸다. 이제는 온지유에게도 의미 없는 바람 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마주할 때가 온 것이다.배진호는 쉽사리 대답을 못 하는 온지유를 보더니 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린 듯 말했다.“지유 씨도 이혼은 하기 싫은 거죠? 사실 대표님도...”“이혼할 거예요.”갑자기 입을 여는 온지유에 배진호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온지유는 그런 배진호를 보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아까 달력 보고 있었어요. 이틀 뒤면 이현 씨와 약속한 날이에요. 그날 법원에 가서 이혼하기로 이미 얘기 끝냈어요.”“저랑 대표님 사이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건 비밀로 해주세요.”온지유는 웃으며 배진호를 향해 말했다.“조용하게 왔다가 조용하게 가고 싶어요. 그래야 아무한테도 피해가 안 갈 것 같아요. 대표님도 유명한 분이신데 괜한 일에 이름 거론되는 거 싫어요.”온지유를 위로해주려던 배진호는 위로 따
그녀의 결정에 배진호는 약간 놀랐다.온지유가 여진그룹에서 지금까지 일하면서 차근차근 성장하는 걸 배진호가 지켜보았다.오랫동안 함께 일을 했는데 갑자기 떠나니 약간 섭섭했다.하지만 온지유의 선택이고 결정이니 어떻게 할 수 없다.“정말 결정하셨나요?”온지유는 미소를 지으며, 평정심을 가지고 있었다. 굳이 심사숙고해서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다만 놓아야 할 때면 놓아야 한다.온지유의 이성적인 선택이다.사람은 자기 자신을 먼저 사랑해야 한다.온지유가 말했다.“결정했어요.”온지유는 고개를 들고 하늘을 쳐다보는데, 새들이 하늘에서 자유롭게 날고 있는 걸 보았다. 온지유도 저 새들처럼 자유로워지고 싶었다.“여진그룹에 계속 있을 수도 없고, 저도 세상 물정을 알아야 하죠.”배진호는 온지유의 결정을 존중했다.“네. 그럼, 앞으로 잘 해봐요. 화이팅!”온지유는 배진호를 보고 웃었다.“그럴게요.”이때, 여이현이 병실에서 나왔다.여이현은 그들이 무슨 대화를 하는지 몰랐다.다만 아주 즐거워 보였다.여이현은 눈매가 날카로워져서 배진호를 쳐다보았다.배진호는 여이현과 눈이 마주쳤는데, 등골이 오싹해지고 웃음이 굳어져서 말했다.“대표님.”온지유도 고개를 돌렸다.여이현은 배진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올해 성과는 달성하셨어요?”여이현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재진호는 어리둥절했다.“아… 연말에 보는 게 아니었나요?”여이현은 차갑게 말했다.“보너스에서 20% 뺄게요!”“…”배진호는 말문이 막혔다.20%는 배진호 석 달간 월급이다.도대체 뭘 잘못 했는지…온지유는 배진호를 보고, 여이현이 약을 잘못 먹었는지 갑자기 이러는 건지.하지만 대표님의 말에 직원이 뭐라 할 수 없다.월급도 아니고 보너스를 깎았으니…도리상 말할 수도 없다.노승아는 문 앞까지 따라왔다. 노승아는 아쉬워하며 여이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멀리 있지 않는 온지유도 쳐다보았다.“오빠. 다음에는 언제 올 거야?”여이현은 문 앞에 멈춰 서서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온지유한테 트집을 잡는 것 같았지만, 그리 심각한 것도 아니었다.온지유는 자기가 헛된 생각을 했다고 생각했다.그녀는 차 안으로 따라 탔다.시동을 걸자 여이현은 태블릿을 손에 들고, 차 안은 침묵으로 감싸고 있다.온지유도 고향에서 돌아온 후부터 그들의 관계가 서먹하게 변했음을 느꼈다.여이현이 일부러 온지유를 멀리하는 것 같다.아마도 노승아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여이현은 태블릿을 보며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 변화가 없었다.“시간도 늦었으니 데려다줄게.”병원에서 돌아오니 벌써 저녁이 되었다.온지유는 여이현을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다.노승아한테 알면, 온지유는 또 무슨 누명을 쓸지 모른다.어쨌든 주의해야 한다.“아닙니다. 제 차가 아직 경찰서에 있어서, 거기까지 데려다주시면 제가 운전해서 집으로 가겠습니다.”온지유는 바로 거절했다.여니현은 입술을 오므리고 눈빛은 차가웠다. 손가락은 짜증을 낸 듯 스크린에 긁어댔다.그리고 태블릿을 그냥 껐다.여이현은 소리를 크게 내는데, 마치 온지유한테 보여 주려고 하는 듯 했다.온지유도 여이현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더욱 건드리지 않으려고 했다.10분 후, 경찰서에 도착했다.온지유도 눈치껏 차에서 내려 더 이상 머물지 않았다.또 싸울 수는 없다.여이현은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바로 차에서 내리고 그와 말도 하지 않는 온지유를 보고, 얼굴빛이 회색이 됐다.여이현은 시선을 돌려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출발해!”배진호는 여이현의 안색이 좋지 않고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것을 보고 자기가 너무 느리다고 탓하는 줄 알았다.그래서 액셀러레이터를 세게 밟고 서둘러 떠났다.차는 온지유 앞을 스쳐 지나가며, 가스 냄새가 장난 아니었다. 온지유는 눈살을 찌푸리며 차를 바라보았다.떠날 때조차도 온지유의 주의를 끌려고 했다.…여이현은 아침 일찍 회사에 왔다.직원보다 30분 일찍 왔다.배진호가 출근하자, 여이현이 앉아서 서류를 처리하는 걸 보고 좀 의외였다.요즘 여이현이 또 바빠지기 시작했나?
“대표님. 혹시 잊으신 거 아니에요? 오늘 온 비서님이랑 이혼하는 날이잖아요. 법원 가셔야죠.”배진호가 다시 한번 말했다.“…”이 말을 들은 여이현은 더욱 입을 다물었다.여이현의 시선은 달력으로 향했다. 오늘이 딱 3년이 지나 계약 만기 된 날이다.이혼을 약속한 날이다.시간이 어쩜 이렇게 빨리 지나가는지.눈 깜짝할 사이에 여이현은 온지유와 결혼한 지 3년이 되었다.하지만 배진호가 더욱 잘 알고 기억하고 있다.여이현은 초조하게 넥타이를 만지며 배진호를 바라보았다.“온지유가 말하던가요?”배진호는 여이현의 말투가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그도 그냥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네.”“온지유랑 사이가 좋은가 봐요? 이런 일까지 먼저 알려주는 거 보니.”여이현이 다시 물었다.배진호는 잔뜩 긴장해서 말했다.“그냥 직장동료 사이입니다. 동료들끼리 평소에 이야기하는 정도 뿐입니다.”배진호는 여이현이 자기를 바라보는 눈빛이 마치 라이벌을 보는 것과 같았다.“대표님. 저 진짜 온지유 씨랑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일 말고 거의 대화를 나눈 적이 없습니다!”여이현은 말이 없었다.어제 온지유가 자기랑 말도 하지 않은 게 직장을 그만두고 자기 곁에서 떠날 생각이었구나.‘온지유가 계획이 다 있었구나.’‘이혼 전날에 그만두다니…’여이현은 무표정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의자에 앉아 일을 계속했다.배진호도 여이현이 갈 의향이 없음을 보고 곧 알아챘다.이혼은 온지유의 일방적인 생각일 뿐이다.여이현은 이혼할 생각도 없다.배진호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무슨 말을 해도 틀린 말처럼 들린다.나중에 보너스를 다 깎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도 하기 싫다.그렇게 3분도 지나지 않고 여이현의 휴대폰이 울렸다.이때 온지유는 법원에서 거의 30분을 기다렸다.온지유가 아는 여이현은 반드시 제때 와서 이혼 수속을 밟을 것이다.하지만 반 시간을 기다렸는데도 오지 않았다.전화를 걸어 상황을 물을 수밖에 없었다.전날에 이혼 얘기는 안 했지만,
남태건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그는 권다솔의 손도 제대로 잡아보지 못했기에 당연히 사이즈를 알 리가 없었다.“크기 조절 가능한 팔찌는 없어요?”“있긴 한데요. 디자인이 몇 개뿐이라서요. 인기 많은 제품들은 전부 사이즈가 정해져 있어요.”직원은 그를 힐끗보다가 속으로 중얼거렸다.‘예비 신부한테 관심이 없다고 하기엔 예물을 전부 최고급을 골랐잖아. 그렇다고 해서 또 예비 신부한테 잘해준다고 하기엔 애매해. 어떻게 여자친구 팔목 사이즈도 모를 수가 있는 거지?'‘꼭 결혼까지 앞뒀는데 동거는커녕 손도 한번 못 잡아본 것 같네. 서로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을 것 같네.'“괜찮아요. 그걸로 주세요.”남태건은 제일 무거운 팔찌를 골라 쟁반에 올려두었다.“그리고 이거, 봉황이 있는 금목걸이도 주세요.”남씨 가문에 남아도는 것이 돈이었다. 권다솔의 부모님 앞에서 자신의 성의를 보여주기 위해서라면 얼마가 되었든 상관없었다.그가 가게에서 나왔을 때 직원의 입은 귀에 걸려 있었다. 남태건 덕분에 한 달 업적을 하루 만에 달성했기 때문이다.곧이어 남태건은 권용민이 좋아할 만한 비싼 술과 담배를 산 후 권씨 가문 본가로 운전했다. 쇼핑백을 바리바리 들고 오는 남태건의 모습에 김영은은 어안이 벙벙했다.“태건아, 우리 집으로 오는 게 처음도 아니고 이게 다 뭐니? 그냥 내 집이다 생각하면서 오면 되는 건데 뭘 이렇게 많이 사 왔어?”“아버님, 어머님. 전 오늘 손님으로 찾아온 게 아니에요. 다솔이랑 결혼하고 싶어서 온 거예요. 이건 제가 드리는 선물이에요.”남태건은 자신이 사 온 것을 하나씩 열어 보여주었다.그는 물건만 사 온 것이 아니었다. 한 가방의 현금과 예물까지 준비해왔다.창문으로 비쳐 들어오는 햇볕에 금붙이들은 반짝반짝 빛났다.권용민과 김영은은 서로 마주 보았다. 두 사람은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남태건은 아주 신경 써서 선물을 준비해온 것이 그들의 눈에도 보였다. 정말로 권다솔을 좋아하고 있는 것 같았고 앞으로 두 사람이
“다솔아... 너 정말로 나한테 아무런 감정이 없는 거야?”남태건은 여전히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조금이라도, 단 한 번이라도 나한테 설렌 적 없어?”그는 그동안 아주 많은 노력을 했었다. 할 수 있는 건 전부 했다. 그러나 여전히 권다솔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게다가 우린 함께 밤까지 보냈잖아. 난 정말로 진심으로 널 책임지고 싶어. 그냥 잠만 자고 버리는 나쁜 놈이 되고 싶지 않다고. 다솔아, 다시 한번 생각해줘. 우린 이미 밤까지 보냈다고!”“지금이 어떤 시대인데요. 전 태건 씨를 이해할 수 없네요.”권다솔은 머리가 지끈거렸다.그가 질척이면 질척일수록 그녀의 생각은 점점 더 확고해졌다. 앞으로 친구로도 지낼 수 없겠다고 말이다.그녀는 인내심 있게 마지막으로 말했다.“그날 밤 일은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 더는 제 앞에서 언급하지 말아요. 만약 태건 씨의 말대로 함께 한번 잤다고 해서 무조건 함께 살아야 한다는 거라면, 이미 아이까지 한 번 있었던 저와 진호 씨는 영원히 떨어지지 말고 함께 살아야 하는 거겠네요?”남태건은 주먹을 꽉 쥐었다. 저도 모르게 이도 빠득 달았다.“권다솔, 그딴 말로 날 자극하지 마.”두 사람이 다시 잘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니 남태건은 기분이 불쾌해졌다.권다솔은 말을 이었다.“전 태건 씨를 자극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냥 예시를 들어 알려준 거죠. 그러니까 나가요. 앞으로 더는 찾아와 문도 두드리지 말고요. 방금 같은 일 또 일어나기를 바라지 않으니까.”“다솔아! 네가 나한테 어떻게 매정할 수가 있어! 차 한잔도 내어주지 않고 지금 날 쫓아내는 거야? 적어도 물 한 잔 마시게는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밖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서 있었는데. 나 힘들어 죽겠다고.”남태건은 꼬리를 내렸다.물 한잔쯤 대접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권다솔은 그에게 희망 고문하고 싶지 않았다.그녀가 예의상 했던 행동이 남태건에겐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게다가 이번 한 번 타협한다면 두 번째도 있을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이웃은 더 큰 목소리로 욕을 해댔다.“안에 사람이 있는데도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는 건 네가 꼴도 보기 싫다는 소리잖아! 핸드폰은 장식이냐? 문자 보낼 줄 몰라? 굳이 그렇게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려야겠어? 여기 너만 사냐? 이웃 배려할 줄 몰라?!”밖에서 싸우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자 권다솔은 결국 문을 열어주는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남태건이 문 앞에 서 있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이웃 주민들에게 계속 민폐를 끼칠 수 없었다.빠르게 현관으로 가서 문을 연 그녀는 결국 이웃에게 사과했다.“죄송해요. 제가 방금 너무 푹 잔 탓에 못 들었네요. 폐를 끼쳐져 정말 죄송해요.”“됐어. 커플인 것 같은데 싸울 거면 문 닫고 싸워. 괜히 우리까지 사정 알게 하지 말고!”이웃의 어투는 조금 누그러지긴 했지만, 표정은 여전히 사나웠다. 권다솔의 진심 어린 사과에 더는 심한 말을 하지 않았다.이웃이 문을 닫은 후 권다솔도 문을 닫으려고 했다. 그러나 남태건이 빠르게 잡아버렸다.그는 권다솔에게 애원했다.“나 좀 들어가게 해줘. 안에서 얘기하자, 응? 내가 계속 이렇게 밖에 서 있으면 이웃 주민들이 날 신고할지도 몰라.”“방금 그 행동은 확실히 신고할 만한 행동이죠. 그러니 폐를 끼치지 말고 그만 가세요.”권다솔은 있는 힘껏 문을 당겼다.남태건도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문을 꽉 잡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시간이 1분 1초 흘러갔다. 권다솔은 갑자기 손을 놓더니 몸을 돌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사이에 두고 버티는 게 무의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다솔아, 그럼 나 들어가도 되는 거지?”남태건은 얼른 그녀를 따라갔다.집 안으로 들어온 뒤 그는 문을 닫았다. 그리고 권다솔의 옆에 서서 또 지난번과 비슷한 말을 해댔다. 여하간에 이미 밤을 보냈으니 결혼하자는 뉘앙스였다.“남태건 씨, 그날 집으로 오고 나서 지금까지 생각해 봤어요. 앞으로 어떻게 지낼지를 말이에요. 그리고 이미 생각을 끝냈어요.”권다솔은 그를 보았다.
온지유는 들고 있던 식칼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여이현이 그녀를 불러세웠다.“여보는 손도 씻어야 하니까 귀찮게 그러지 말고 내가 가서 꺼내서 줄게.”“내 핸드백 안에 있어. 지퍼 열면 바로 보일 거야.”온지유도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켕길만한 일을 한 적 없었으니 여이현이 가방을 열어보아도 딱히 걱정되지 않았다.여이현은 주방에서 나와 별이와 함께 현관 쪽으로 갔고 대화를 하며 가방을 열려고 했다.“아들, 아빠한테 오늘 노래 대회 어땠는지 말해주면 안 돼?”“당연히 돼요! 오늘 엄마는 엄청 멋졌어요! 친구들 부모님들도 엄마한테 박수를 쳐줬어요!”별이는 입에 모터가 달린 것처럼 바로 낮에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온지유는 얼굴이 예뻤을 뿐만 아니라 온화하기까지 했다. 친구들은 집에서 엄마한테 혼난 적이 있다고 했지만 별이는 혼난 적이 없었다.여이현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올랐다.온지유의 가방을 열자 바로 칭찬 스티커가 보였다.그는 그것을 꺼내 별이에게 준 뒤 가방을 원래 위치에 가져다 놓았다. 그러던 중 별이가 실수로 옆에 있던 신발을 밟게 되었고 넘어질 뻔했다.여이현은 얼른 별이를 부축해주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온지유의 가방을 바닥에 떨구게 되었는데 안에서 무언가가 쏟아져 나왔다.소리를 들은 김명자가 얼른 별이를 안고 먼저 거실로 갔고 여이현은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진 것을 줍다가 우연히 립스틱 옆에 있는 쪽지를 발견하게 되었다.그는 온지유의 물건을 함부로 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쪽지는 열린 상태였고 그가 손을 뻗었을 때 마침 안에 쓰인 글씨를 보게 되었다.내용을 본 여이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위에는 협박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고 마지막 줄엔 커다랗게 미스터리 조직 이름을 적어두었다.이건 도발이었다.그는 어떻게든 빨리 배후를 찾아내야 한다. 그래야만 아이들과 온지유를 지킬 수 있었다.“저녁 준비 다 됐어. 얼른 와서 먹어.”바로 이때 온지유가 음식을 들고나오며 말했다.별이는 즐거운 얼굴로 달려간 뒤 자리
온지유는 속 좁은 사람이 아니었다.“우리 여보가 날 이해해줄 줄 알았어. 우리 여보랑 같이 살 수 있는 건 내 생애 최고의 행운이야.”여이현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그러던 중 별이가 거실에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우리 아들은? 방에서 자고 있는 건가.”“아니야. 지금 숙제하는 중이야.'여이현은 숙제하고 있다는 말에 만감이 교차했다.“우리 아들이 다 컸네. 막 태어났을 땐 아주 자그마했는데. 지금은 숙제도 할 줄 알고. 시간이 좀 더 흐르면 혼자 등하교도 할 수 있겠네.”“이건 좋은 일이야. 별이가 엄청 열심히 숙제하더라니까. 게다가 혼자 문제를 풀더라고.”온지유는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됐어. 그만해. 그냥 숙제만 하는 것뿐이잖아. 아직 장가가기엔 한참 멀었어. 뭘 그렇게 감동하고 그래?”온하윤은 작은 손을 뻗어 여이현의 턱을 만졌다. 그러더니 품에 안고 있던 장난감을 건넸다.그것은 온하윤이 아주 좋아하는 장난감이었다.하지만 온하윤은 장난감보다 아빠를 더 좋아했기에 장난감을 건네며 아빠랑 같이 놀자는 의미로 건넸다.여이현은 딸의 작은 손에서 장난감을 받은 후 눌렀다. 폭신폭신한 촉감이었지만 여전히 마음은 서글펐다.“하윤이도 지금은 이렇게 내 품에 쏙 안기겠지만 빠르게 크겠지. 나중에 남자친구를 데리고 오면서 결혼하겠다고 하고 아이까지 낳을 생각 하니 뭔가 자꾸 아쉬운 마음이 드네.”온지유는 그의 말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만약 온하윤이 지금 성인이 되어 남자친구까지 사귀었다면 그녀도 확실히 그런 감회가 들 것 같았다.“하지만 하윤이는 아직 한 살도 안 되었잖아. 시집가기엔 한참이나 멀었는걸. 아직 한 살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그런 걱정을 하는 거야? 얼른 가서 저녁이나 차려줘. 별이도 숙제 거의 다 했을 테니까 내가 가서 보면 돼.”온지유는 걸음을 옮겼다.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니 여이현은 출산하기 전날 고통스러워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부자이든 아니든, 설령 세계에서 실력이 제일 좋은 산부인과라고 해도 출산할 때
어린이집에서 나와 차로 돌아온 후에야 온지유는 자신의 가방이 열려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녀는 열린 지퍼를 잠그며 말했다.“별아, 이대로 집으로 갈래, 아니면 다른 데 구경하러 갈래?”“집으로 가요, 엄마. 조금 졸려요. 별이는 집에 가서 쉬고 싶어요. 내일도 어린이집 가야 하는걸요.”별이는 알아서 척척 안전벨트를 했다.온지유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별이와 대화를 나누었다. 운전기사가 앞에서 부드럽게 운전해준 덕에 편하게 집까지 도착했다.집 안으로 들어간 별이는 평소처럼 거실에 앉아 놀지 않았다. 겉옷을 벗고 실내화로 갈아신은 뒤 온지유의 앞으로 달려갔다.“엄마, 전 방에서 숙제하고 있을게요. 아마 저녁 식사 전까지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아요.”“숙제하겠다고?”온지유는 숙제라는 단어가 생소하게 느껴졌다.별이는 아직 어렸던지라 어린이집을 다니고 있었다. 초등학생도 아닌데 벌써 숙제가 있다니.물론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위해 숙제를 냈을 거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조금 빠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네, 선생님이 저희한테 지금부터 숙제하는 좋은 습관을 길러야 한다고 했어요. 안 그러면 초등학생이 되면 힘들다고 하셨어요. 어려운 숙제를 내주신 게 아니니 저는 빨리 완성할 수 있어요.”별이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비록 아이가 이렇게 말하긴 했지만 온지유는 아이를 따라 방으로 들어가 어떤 숙제를 낸 것인지 확인하려고 했다.두 사람은 계단을 올라갔다. 방으로 돌아온 뒤 별이는 가방에서 어린이집에서 나눠줬다는 연습장을 꺼내 온지유에게 보여주었다.“엄마, 선생님께선 저희에게 숙제를 두 개 내주셨어요. 하나는 글씨 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크기를 비교하는 것이에요.”온지유는 책을 넘기며 대충 훑어보았다. 책에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간단한 단어가 있었다. 아이들이 쓰기에도 쉬운 단어였다. 수학책에는 1부터 20의 숫자가 있었고 어떤 숫자가 더 큰지 적어넣는 문제가 있었다. 별이처럼 어린아이들에게 그렇게 어려운 숙제는
온지유는 당연히 잘 불러야 했다. 1등을 차지해 별이에게 멋진 엄마가 되어주고 싶었으니까.어린이집으로 가는 길에 온지유는 이어폰을 꽂고 어젯밤 생각해둔 노래를 반복해서 들었다.차는 어린이집 앞에 멈춰 섰다. 그녀는 별이의 손을 잡고 천천히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별이의 반은 3층에 있었다. 다른 어린이들과 학부모들도 거의 도착해 있었다. 온지유가 안으로 들어가자 대부분 사람들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한 무리 학부모 중 온지유가 유난히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오늘의 그녀는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걸음걸이마다 우아함이 돋보이며 굴곡진 몸매에 기품도 느껴졌다.이때 어린이 한 명이 별이의 곁으로 쪼르르 달려가 작게 물었다.“별이 엄마 진짜 예쁘다. 우리 엄마도 별이 네 엄마처럼 이뻤으면 좋겠다.”“우리 엄마들은 다 예뻐.”별이는 친구의 말을 바로잡아주었다.물론 별이의 마음속에 온지유는 세상에서 제일 예쁜 사람이었다.선생님들은 이미 학부모들이 앉을 의자를 준비해 주었다. 아직 어린아이들이 모여있는 반이었던지라 학생이 많지 않았을뿐더러 교실도 꽤나 컸기에 의자를 몇 개 더 가져다 놓는다고 해서 비좁은 느낌은 없었다.온지유는 자리에 앉았다. 별이는 그런 온지유 옆에 곧은 자세로 서 있었다.“별이 엄마, 몸매가 아주 좋으시네요. 평소에 운동하시는 거예요? 저도 몸매 유지하는 비결 좀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옆자리에 앉은 학부모가 먼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전 평소에 식사량이 많지 않은데도 뱃살은 빠지지 않더라고요.”여자들의 관심사는 전부 비슷했다. 그들은 미용이거나 몸매 관리에 관심이 아주 많았다.온지유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말해준 뒤 핸드폰을 꺼내 저장해둔 영상을 몇 개 보여주었다.“전 집에서 요가를 하거든요. 이 영상들을 따라 해봤는데 효과가 꽤 있었어요. 평소에 적게 드신다면 살은 당연히 빠지겠지만 뱃살을 없애고 싶은 거라면 제 생각엔 운동은 필수인 것 같네요.”“저희 연락처 교환해요. 이 영상들을
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노래를 잘 부르는 것은 아니나 음치는 아니었다.별이는 기쁜 얼굴로 손뼉을 쳤다.“너무 좋아요. 아빠, 엄마, 내일 어린이집에서 가족 이벤트를 한다고 했어요. 노래 대회라고 했는데 별이랑 같이 참가해줄 거죠?”내일은 주말이었다. 어린이집에서 주말에 이런 이벤트를 계획한 것도 평일 출근할 학부모를 고려해서였다.만약 여이현에게 다른 일정이 없다면 당연히 아내와 함께 별이의 어린이집으로 갈 것이었지만 하필이면 새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다.배진호는 권다솔의 마음을 되돌리느라 시간이 없으니 그가 해야 했다.“여보, 여보가 별이랑 같이 가줘. 난 그날 거래처 만나봐야 하거든.”신호를 기다리는 틈을 타 여이현이 온지유에게 말했다.온지유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아이의 일에 부모 모두 책임을 져야 했지만 두 사람은 부부였던지라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도 필요했다.여이현이 바쁘게 일하는 것도 더 유복하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함이라는 것을 온지유도 잘 알고 있었다.별이는 더욱 배려심이 깊은 아이였다. 고집을 부리지도 않고 온지유의 팔을 꼬옥 잡아 기대며 말했다.“그럼 아빠는 일하러 가세요. 별이는 엄마만 있어도 괜찮아요. 선생님도 두 분 중 한 명만 있어도 된다고 했어요. 물론 두 분이 같이 가면 더 환영한댔어요.”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세 사람은 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세 사람이 돌아왔다는 것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인지 자고 있던 온하윤도 눈을 떴다. 작은 입을 벌리며 하품했다.옆에 있던 김명자는 얼른 주방으로 가서 분유를 탄 뒤 온하윤의 입에 물려주었다. 향긋한 분유 냄새를 맡은 온하윤은 꿀꺽꿀꺽 젖병을 빨아 먹었다.세 사람이 집 안으로 들어왔을 때 마침 이 모습을 보게 되었다. 너무도 행복했다.“오늘 저녁은 내가 할게. 별이가 먹고 싶다는 햄버거를 만들고 있을 테니까 당신은 아이들이랑 놀아줘.”온지유는 여이현에게 뽀뽀한 뒤 앞치마를 두르곤 주방으로 들어갔다.거실에선 웃고 떠드는 소리가 울
권다솔은 이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결혼할 수 없었다.게다가 남태건과 평생 묶여 살고 싶지도 않았다.설령 어젯밤 이상한 약물 탓에 그와 밤을 보내게 되었다고 해도 그녀의 마음속엔 온통 배진호뿐이었다.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온몸이 남태건의 터치를 거부하고 있었다. 설령 그저 손을 잡는 것일 뿐이라고 해도 말이다.남태건은 잔뜩 실망한 기색이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그래, 일단 생각은 해봐. 다솔아, 급하게 답을 주지 않아도 돼.”그녀가 계속 거절한다면 그녀의 부모님을 찾아가 설득하면 그만이었다.권다솔의 부모님은 그를 아주 좋아했다. 어떻게든 그녀와 이어주려고 했으니 그들과 손을 잡는다면 권다솔과 결혼할 수 있을 것이다.권다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설령 오랫동안 생각을 해본다고 해도 남태건을 받아줄 리가 없었다....한편 온지유 쪽.권다솔이 떠난 후 두 사람은 서로 연락하지 않았다.그동안 여이현은 배진호를 찾아간 적 있었다. 기획하고 있던 프로젝트를 넘겨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배진호는 집안일로 상태가 아주 좋지 못했다. 지금까지 혼자 회사를 운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어 보였으며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을 기력은 없었다.배진호는 여이현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솔직하게 말했다.그가 솔직하게 말하니 여이현도 강요하지 않았다.“일단 집안일부터 처리하세요.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고요. 집안일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 나한테 다시 찾아와도 돼요. 그때 또 새로운 일을 줄 테니까요.”여하간에 여진 그룹은 대기업이었기에 프로젝트는 언제든지 있었다.한번 기회를 놓친다고 해서 문제가 될 건 없었다.배진호는 그런 여이현이 너무도 고마웠다. 이미 충분히 그를 도와주고 있었다.하지만 감정이라는 건 결국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는 법이었다. 물을 마셔도 뜨거운 것인지 차가운 것인지 본인만 아는 것처럼 말이다. 너무 많은 사람이 끼어들면 때로는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킬 때도 있었다.그는 권다솔과 다시 함께 살고 싶었지만, 전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