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도 할 일이 남았잖아. 삼촌분 일 처리 끝났으면 이젠 회사 일에 집중해야지.”여이현은 온지유의 또 다른 신분을 상기시켜주었다.온지유는 여이현의 비서였기에 그에 따르는 업무가 존재했다.곧 이직할 거라서 일을 해야 하는 날이 하루밖에 남지 않았지만 집에서 삼촌 일을 처리하느라 휴가를 다 써버려서 출근하지 않으면 월급이 깎일 수 있었기에 온지유는 출근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그만둘 때 그만두더라도 하던 일은 마무리 해야 했기에 온지유는 고민 끝에 대답했다.“네, 대표님.”만족스러운 대답에 여이현이 온지유에게 향했던 눈길을 거두고 앞장서 걷자 온지유가 그 뒤를 따랐다.그렇게 둘은 예전처럼 부부가 아니라 상사와 부하직원 사이로 돌아갔다.온지유는 여이현의 눈빛만 보아도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바로 가져다줬기에 여이현도 그렇게 많은 비서를 보아왔지만 맘에 드는 건 온지유뿐이었다.둘이 처음으로 향한 곳은 온지유의 예상대로 병원이었다.온지유는 여이현이 노승아에게 정성을 쏟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마침 요즘은 노승아도 쉬고 있었으니 사랑놀이하기에 가장 적당한 시기였다.노승아를 보러 가는 엘리베이터에 있는 게 온지유와 여이현이었기에 둘 사이에는 정적이 감돌 수밖에 없었다.둘이 병실에 도착했을 때는 노승아가 이미 상처를 다 치료한 다음이었는데 의사 말을 들어보니 심신 안정을 취해야 해서 심리 상담을 받아보는 걸 추천하는 듯싶었다.안 그래도 위로가 필요했는데 이 와중에 마침 여이현이 들어오는 걸 본 노승아는 벌떡 일어나 여이현에게 달려가 그의 품에 안기며 팔을 잡아끌었다.“이현 오빠.”“나 너무 무서워요.”문에 기대어 있던 온지유는 이젠 둘이 안고 있는 모습을 봐도 아무렇지 않은 저 자신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질투도 뭣 모를 때 얘기지 이젠 이런 일이 하도 자주 일어나다 보니 여이현에 대한 기대가 사라진 지 오래였기에 더이상 상처받지도 않았다.여이현은 그런 온지유를 신경 써서인지 노승아를 떼어내며 물었다.“상처는 다 치료한 것
그 말에 이상함을 느낀 여이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십 분 동안이나 실랑이했다던데? 그동안 아무도 안 왔다고요? 그러다가 혼자 발을 헛디뎌서 떨어진 거예요?”“방안에 승아 언니랑 주소영 씨뿐이고 얘기만 하는 거니까 저도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경호원 오빠들은 승아 언니가 하필 그날 다 휴가를 줘버려서...”김예진은 여이현이 저를 탓하기라도 할까 봐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노승아의 매니저씩이나 돼서 제일 위험할 때 곁에 있어 주지 못한 건 업무를 제대로 완수하지 못한 것이었기에 탓해도 할 말은 없었다.“신고는 누가 했어요? 경찰이 엄청 빨리 왔던데.”사건이 벌어지자마자 거의 경찰이 왔으니 신고를 한참 전에 해야 가능한 일이었다.그런데 김예진도 누가 신고를 했는지 몰랐기에 그 질문에는 답을 할 수 없었다.김예진이 노승아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경찰차의 소리를 들었을 때였다.“내가 신고했어요.”그때 노승아가 나지막이 말하며 종이로 이따금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냈다.“주소영 씨는 그때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갑자기 이상한 말을 하면서 자기가 죄를 너무 많이 지어서 경찰이 잡으러 올 거라고 했어요.”그러면서 노승아는 시선을 온지유에게로 옮겼다.“지유 언니, 나도 그날 소영 씨 말 듣고 나서 언니 삼촌이 그렇게 된 거 알았어요. 그리고 언니를 납치한 것도 다 소영 씨 짓이었어요.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못 될 수가 있어요? 법은 다 무시하고 나쁜 짓만 하니까 나도 화나서 바로 경찰에 신고한 거예요.”“그리고 내가 신고하는 걸 보더니 날 죽이려고 달려들었어요.”노승아는 그 일을 떠올리며 두려움에 떨었다.온지유는 그저 여이현을 따라온 것이기에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제 삼촌을 먼저 언급하는 노승아에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노승아의 말을 삼촌을 죽인 범인이 주소영이고 자신이 그걸 알고 경찰에 신고했으니 온지유가 고마워해야 된다는 뜻으로 들렸다.만약 정말 그런 거면 다행이지만 온지유는 그렇다고만 믿을 수가 없어 노승
여이현은 김예진을 향해 차갑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묻는 건 승아를 위해서이기도 해요. 승아가 지금 이 사건의 당사자잖아요. 기사만 봐도 이보다 더한 질문을 하는 사람들 천지에요. 그런 사람들 입부터 막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노승아는 공인이었으니 그녀가 인질로 잡힌 일은 일반인이 인질로 잡힌 것과는 성질이 달랐다.일반인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어도 보도는 됐겠지만 사건의 당사자가 노승아라면 여론이 안 좋은 쪽으로 흘러갈 수도 있었다.노승아도 일이 커지면 제가 실시간 검색어에 올라갈 거라는 걸 알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감히 여이현의 아이를 낳으려 한 주소영이 스스로 제 명을 단축한 것뿐이었다.노승아는 제가 아닌 다른 여자가 여이현의 아이를 낳는 걸 두고 볼 수가 없었다.물론 여이현이 주소영에게 마음을 주지 않을 거고 주소영은 그저 제 대타일 뿐이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여이현의 아이의 엄마 자리에 주소영은 어울리지 않았다.그리고 주소영은 호시탐탐 노승아의 자리를 노려왔기에 노승아는 그걸 지켜보다 당할 수는 없어서 먼저 손을 쓴 것이었다.하지만 일은 노승아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노승아는 레드카펫을 밟고 모두가 우러러보는 자리에까지 올라가 여이현도 제 매력에 빠지게 만들어 그의 아내로 더 많은 명예를 쌓을 생각이었는데 하필 이럴 때 기사가 터져버린 것이다.노승아는 이미 여러 번 실시간 검색어에 오른 이슈 여왕이었다.문제는 매번 나는 기사마다 별로 좋은 소식이 아니라는 것이었다.노승아는 아직 기사는 보지 못했지만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여이현을 보고 그의 기분이 별로임을 알 수 있었다.“이현 오빠, 내가 또 오빠 귀찮게 했죠? 미안해요. 나도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어요. 알았으면 소영 씨를 집에 들이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럼 소영 씨도 살아있었을 거고 나도 아무 일 없었을 텐데. 나 너무 후회돼요.”“언니 잘못 아니잖아요. 주소영이 나쁜 년이고 그 사람이 지옥 가야지 언니가 왜 사과를 하고 있어요!”여이현도 노승아를 탓하지 않고
적어도 배진호가 보기에는 여이현과 노승아는 아무 사이가 아닌 듯싶었다.물론 뭐 둘 사이에 감정이 있다는 소문이 무성하긴 했지만 배진호가 본 여이현은 늘 노승아와 거리를 두고 있었다.물론 둘 사이에 배진호가 모르는 다른 것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게 사랑은 아니었다.배진호의 위로 아닌 위로에 온지유는 미소를 지었다.“진호 씨, 왜 갑자기 나한테 그런 말 해요? 진호 씨도 알잖아요 그날 봐서. 여이현 씨랑 나는 어차피 이혼할 사이었어요.”여이현이 노승아를 위해 엔터를 차렸다는 것부터가 엄청난 의미였기에 온지유는 배진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하지만 배진호는 그들의 결혼이 아무 의미도 없는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개인적인 질문 하나만 해도 돼요? 온지유 씨는 대표님이랑 이혼하고 싶으세요?”배진호의 질문에 온지유는 잠시 대답하기를 망설였다. 만약 예전에 온지유가 이런 질문을 받았다면 대답은 당연히 부정이었을 것이다. 그때의 온지유는 갖은 노력 끝에 이뤄낸 여이현과의 결혼 생활을 행복하게 보낼 거라고 다짐했었다.하지만 온지유가 마주친 현실은 그녀의 그런 바람을 짓밟아 버렸다. 이제는 온지유에게도 의미 없는 바람 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마주할 때가 온 것이다.배진호는 쉽사리 대답을 못 하는 온지유를 보더니 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린 듯 말했다.“지유 씨도 이혼은 하기 싫은 거죠? 사실 대표님도...”“이혼할 거예요.”갑자기 입을 여는 온지유에 배진호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온지유는 그런 배진호를 보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아까 달력 보고 있었어요. 이틀 뒤면 이현 씨와 약속한 날이에요. 그날 법원에 가서 이혼하기로 이미 얘기 끝냈어요.”“저랑 대표님 사이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건 비밀로 해주세요.”온지유는 웃으며 배진호를 향해 말했다.“조용하게 왔다가 조용하게 가고 싶어요. 그래야 아무한테도 피해가 안 갈 것 같아요. 대표님도 유명한 분이신데 괜한 일에 이름 거론되는 거 싫어요.”온지유를 위로해주려던 배진호는 위로 따
그녀의 결정에 배진호는 약간 놀랐다.온지유가 여진그룹에서 지금까지 일하면서 차근차근 성장하는 걸 배진호가 지켜보았다.오랫동안 함께 일을 했는데 갑자기 떠나니 약간 섭섭했다.하지만 온지유의 선택이고 결정이니 어떻게 할 수 없다.“정말 결정하셨나요?”온지유는 미소를 지으며, 평정심을 가지고 있었다. 굳이 심사숙고해서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다만 놓아야 할 때면 놓아야 한다.온지유의 이성적인 선택이다.사람은 자기 자신을 먼저 사랑해야 한다.온지유가 말했다.“결정했어요.”온지유는 고개를 들고 하늘을 쳐다보는데, 새들이 하늘에서 자유롭게 날고 있는 걸 보았다. 온지유도 저 새들처럼 자유로워지고 싶었다.“여진그룹에 계속 있을 수도 없고, 저도 세상 물정을 알아야 하죠.”배진호는 온지유의 결정을 존중했다.“네. 그럼, 앞으로 잘 해봐요. 화이팅!”온지유는 배진호를 보고 웃었다.“그럴게요.”이때, 여이현이 병실에서 나왔다.여이현은 그들이 무슨 대화를 하는지 몰랐다.다만 아주 즐거워 보였다.여이현은 눈매가 날카로워져서 배진호를 쳐다보았다.배진호는 여이현과 눈이 마주쳤는데, 등골이 오싹해지고 웃음이 굳어져서 말했다.“대표님.”온지유도 고개를 돌렸다.여이현은 배진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올해 성과는 달성하셨어요?”여이현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재진호는 어리둥절했다.“아… 연말에 보는 게 아니었나요?”여이현은 차갑게 말했다.“보너스에서 20% 뺄게요!”“…”배진호는 말문이 막혔다.20%는 배진호 석 달간 월급이다.도대체 뭘 잘못 했는지…온지유는 배진호를 보고, 여이현이 약을 잘못 먹었는지 갑자기 이러는 건지.하지만 대표님의 말에 직원이 뭐라 할 수 없다.월급도 아니고 보너스를 깎았으니…도리상 말할 수도 없다.노승아는 문 앞까지 따라왔다. 노승아는 아쉬워하며 여이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멀리 있지 않는 온지유도 쳐다보았다.“오빠. 다음에는 언제 올 거야?”여이현은 문 앞에 멈춰 서서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온지유한테 트집을 잡는 것 같았지만, 그리 심각한 것도 아니었다.온지유는 자기가 헛된 생각을 했다고 생각했다.그녀는 차 안으로 따라 탔다.시동을 걸자 여이현은 태블릿을 손에 들고, 차 안은 침묵으로 감싸고 있다.온지유도 고향에서 돌아온 후부터 그들의 관계가 서먹하게 변했음을 느꼈다.여이현이 일부러 온지유를 멀리하는 것 같다.아마도 노승아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여이현은 태블릿을 보며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 변화가 없었다.“시간도 늦었으니 데려다줄게.”병원에서 돌아오니 벌써 저녁이 되었다.온지유는 여이현을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다.노승아한테 알면, 온지유는 또 무슨 누명을 쓸지 모른다.어쨌든 주의해야 한다.“아닙니다. 제 차가 아직 경찰서에 있어서, 거기까지 데려다주시면 제가 운전해서 집으로 가겠습니다.”온지유는 바로 거절했다.여니현은 입술을 오므리고 눈빛은 차가웠다. 손가락은 짜증을 낸 듯 스크린에 긁어댔다.그리고 태블릿을 그냥 껐다.여이현은 소리를 크게 내는데, 마치 온지유한테 보여 주려고 하는 듯 했다.온지유도 여이현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더욱 건드리지 않으려고 했다.10분 후, 경찰서에 도착했다.온지유도 눈치껏 차에서 내려 더 이상 머물지 않았다.또 싸울 수는 없다.여이현은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바로 차에서 내리고 그와 말도 하지 않는 온지유를 보고, 얼굴빛이 회색이 됐다.여이현은 시선을 돌려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출발해!”배진호는 여이현의 안색이 좋지 않고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것을 보고 자기가 너무 느리다고 탓하는 줄 알았다.그래서 액셀러레이터를 세게 밟고 서둘러 떠났다.차는 온지유 앞을 스쳐 지나가며, 가스 냄새가 장난 아니었다. 온지유는 눈살을 찌푸리며 차를 바라보았다.떠날 때조차도 온지유의 주의를 끌려고 했다.…여이현은 아침 일찍 회사에 왔다.직원보다 30분 일찍 왔다.배진호가 출근하자, 여이현이 앉아서 서류를 처리하는 걸 보고 좀 의외였다.요즘 여이현이 또 바빠지기 시작했나?
“대표님. 혹시 잊으신 거 아니에요? 오늘 온 비서님이랑 이혼하는 날이잖아요. 법원 가셔야죠.”배진호가 다시 한번 말했다.“…”이 말을 들은 여이현은 더욱 입을 다물었다.여이현의 시선은 달력으로 향했다. 오늘이 딱 3년이 지나 계약 만기 된 날이다.이혼을 약속한 날이다.시간이 어쩜 이렇게 빨리 지나가는지.눈 깜짝할 사이에 여이현은 온지유와 결혼한 지 3년이 되었다.하지만 배진호가 더욱 잘 알고 기억하고 있다.여이현은 초조하게 넥타이를 만지며 배진호를 바라보았다.“온지유가 말하던가요?”배진호는 여이현의 말투가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그도 그냥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네.”“온지유랑 사이가 좋은가 봐요? 이런 일까지 먼저 알려주는 거 보니.”여이현이 다시 물었다.배진호는 잔뜩 긴장해서 말했다.“그냥 직장동료 사이입니다. 동료들끼리 평소에 이야기하는 정도 뿐입니다.”배진호는 여이현이 자기를 바라보는 눈빛이 마치 라이벌을 보는 것과 같았다.“대표님. 저 진짜 온지유 씨랑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일 말고 거의 대화를 나눈 적이 없습니다!”여이현은 말이 없었다.어제 온지유가 자기랑 말도 하지 않은 게 직장을 그만두고 자기 곁에서 떠날 생각이었구나.‘온지유가 계획이 다 있었구나.’‘이혼 전날에 그만두다니…’여이현은 무표정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의자에 앉아 일을 계속했다.배진호도 여이현이 갈 의향이 없음을 보고 곧 알아챘다.이혼은 온지유의 일방적인 생각일 뿐이다.여이현은 이혼할 생각도 없다.배진호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무슨 말을 해도 틀린 말처럼 들린다.나중에 보너스를 다 깎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도 하기 싫다.그렇게 3분도 지나지 않고 여이현의 휴대폰이 울렸다.이때 온지유는 법원에서 거의 30분을 기다렸다.온지유가 아는 여이현은 반드시 제때 와서 이혼 수속을 밟을 것이다.하지만 반 시간을 기다렸는데도 오지 않았다.전화를 걸어 상황을 물을 수밖에 없었다.전날에 이혼 얘기는 안 했지만,
온지유는 입을 오므렸다.“제가 그만둔다고 알고 있잖아요.”“대표님이 아직 동의하지 않으셔서 새로운 사람이 온 비서님 자리를 대신하기 전까지 출근하셔야 합니다.”“온 비서님. 이제 법원에서 나와서 회사로 오셔도 됩니다.”온지유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이혼도 못 하고, 출근도 해야 한다.하지만, 이 일은 확실히 온지유가 생각을 잘못했다.온지유의 일을 대신 해줄 사람을 찾고 나서 그만두면, 아무도 더 이상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온지유가 물었다.“그럼 제 일을 대신할 사람이 생기면, 퇴사할 수 있나요?”“아마도요.”“알겠어요. 인사부 보고 사람 뽑으라고 하겠습니다.”말을 마치자 온지유는 전화를 끊었다.배진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마치 어려운 임무를 완수한 것 같았다.여이현도 온지유가 이혼에 대한 집착이 없고 회사를 그만두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마음이 놓였다.온지유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온지유는 차를 몰고 법원을 떠났다.정미리는 온지유가 걱정돼서 언제 돌아오는지 메시지를 보냈다.온지유는 아직 어떻게 답장해야 할지 몰랐다.오히려 백지희가 걱정돼서 수없이 전화했다.비록 온지유가 괜찮다고 얘기했지만 말이다.이번에 온지유가 이혼한다는 것을 알고, 또 어떤지 물었다.온지유가 드디어 싱글이 돼서 술집에 가서 축하하려고 했다.하지만 온지유가 이혼을 못 하면 싱글이 아니니 축하도 못 한다. 또 힘들게 출근해서 일도 해야 한다.온지유는 20분 만에 회사에 도착했다.인사부에 다녀왔다.“어떻게 사람은 뽑으셨어요?”인사부 대리가 말했다.“어… 온 비서님. 지금 다들 각자 너무 바빠서 적절한 사람이 아직 없어요. 사람을 뽑아야 할 것 같아서, 좀 기다려야 할 것 같아요.”온지유는 귀찮을 걸 싫어해서 말했다. “그럼, 제가 직접 고를 게요. 번거롭게 할 필요 없습니다. 나중에 저한테 말만 해주시면 됩니다. 되죠?”“그럴게요.”채용 정보가 나간 후, 지원한 사람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경력직도 있고, 막 학교를 졸업한 사람도 있
“나도 엄마가 왜 그곳에 있었는지 몰라. 내가 발견했을 때 잘 지내지 못한 것 같았어. 누더기를 입은 채 구석에서 쓰레기를 뒤적거리고 있더라고.”말을 꺼내는 양시은의 목소리엔 떨림이 가득했다. 나도현은 그런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익숙한 온기에 양시은은 점차 진정되기 시작했고 두 사람은 거실로 돌아와 소파에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그해 아주머니가 실종되었을 때부터 어딘가 이상했어. 하지만 아직 상태도 안 좋으신 것 같으니까 내일 인명진 씨를 불러 봐달라고 하자.”“나도 그렇게 생각했어.”양시은은 문해미가 있는 방을 힐끗 보았다. 나도현은 그런 그녀의 손을 잡아주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녀를 달래주려고 했다.“괜찮을 거야. 아주머니를 찾은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기쁜 일이잖아.”양시은은 그의 위로에 고개를 끄덕였다.다음 날 오후, 인명진은 집으로 방문해 진찰해달라는 나도현의 부탁이 담긴 연락을 받게 되었다.비록 그는 정신과 의사가 아니었지만 난치병에 관해서는 계속 이런저런 연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해미를 보게 되었을 때 그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그런 그의 모습을 본 양시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우리 엄마는 어떤 상태인 거예요?”“상태가 아주 나빠요. 거의 한계에 달했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뇌 신경 쪽에 일정한 정도의 손상을 입은 것 같아요. 비록 추측이긴 하지만 80, 90% 확신하고 있어요.”인명진이 솔직하게 말해주자 옆에 있던 테이블이 흔들렸다. 나도현은 얼른 양시은은 부축해주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양시은은 이미 테이블과 함께 중심을 잃고 쓰러졌을 테니까.“어떻게 그럴 수가...”그녀는 넋을 잃은 표정을 지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눈물이 주체하지 못하고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분명 애타게 찾던 문해미를 찾았건마는, 겨우 어머니와 만나게 되었건마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응당 기뻐하고 좋아해야 할 순간에 자신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양시은은 행여나 그 사람이 사라지게 될까 봐 얼른 달려갔다.“엄마, 여기는 왜 여기에 계시는 거예요?”그녀는 노인을 붙잡으며 눈에 눈물을 머금은 채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상대가 자신을 반겨줄 거라고 생각했지만 상대는 그녀를 엄청 두려워하고 있었다.“때리지 마세요. 바로 자리를 옮길 거니까 때리지 말아 주세요.”“엄마, 제가 엄마를 왜 때려요. 저 시은이잖아요. 엄마 딸 양시은.”“전 그쪽을 몰라요...”양시은은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을 모른다니... 어떻게 그럴 리가 있겠는가. 그녀는 절대 사람을 착각했을 리가 없었고 눈앞에 있는 사람은 분명 그녀의 어머니였다.속이 뒤집힐 것 같았지만 자신을 너무도 두려워하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최대한 다정하고 온화한 어투로 말했다.“전 엄마를 해치지 않아요. 그러니까 다시 한번 제 얼굴 봐주세요.”그 말을 들은 뒤 한참 지나서야 상대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사실 세월의 흔적이 많은 얼굴은 아니었다. 다만 몸에 맞지 않는 남루한 옷 탓에 행색이 더러워 보였을 뿐이었다. 양시은은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그녀의 어머니는 아주 오래전에 실종되었다. 줄곧 찾아다녔지만 아무런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고 죽기 전까지 어머니를 다시 만날 수 없을 것 같았지만 이곳에서 어머니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처음에는 엄청난 기쁨을 느꼈지만 어머니의 행색과 상태를 보니 너무도 가슴이 아팠다. 대체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상대는 양시은을 멍하니 보았다. 어딘가 익숙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양시은, 시은아... 시은이니?”“네, 엄마. 저 시은이에요.”양시은은 감격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택시를 잡자 기사는 옷차림이 초라한 그녀의 어머니 문해미를 대놓고 싫어하는 티를 냈다.“아가씨, 대체 어디서 이런 쓰레기를 주워온 거예요? 이런 쓰레기는 내 차에 태울 수 없어요.”“왜 태울 수 없는 건데요. 이미 제 돈을 받으셨잖아요. 그런데 이제 와서 태울 수 없다고요?”양시은은 차가운 눈빛으로 운전기사를
양시은이 미간을 찌푸렸다.“말은 제대로 하셔야죠. 기세등등하게 쏘아붙이던 건 그쪽 아니었나요?”“그건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죠.”장이정이 힘을 세게 줘서 조금 아팠는지 유준이 투덜댔다.“엄마, 아파요.”그녀는 급히 손을 뗐고 얼굴에는 미안해하는 기색이 가득했다.“미안해, 유준아...”유준은 장이정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귀여운 목소리로 괜찮다고 했다.유준의 위로 덕분에 장이정은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양시은은 그 틈을 타서 말했다.“저에 대해 뭔가 오해가 있는 거 같네요.”“무슨 오해요? 유 할머니가 당신들 때문에 병원에 입원하게 된 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리고 당신들처럼 돈 있고 권력 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괴롭히는 건 너무 손쉬운 일이잖아요.”장이정이 비웃었다.역시 그 일 때문이었다.다행히도 양시은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다.병원을 떠날 때, 양시은은 병원 기록을 하나 가져갔다.“장이정 씨, 이걸 보고 얘기해 보세요.”양시은은 병원 기록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장이정 앞으로 밀었다.장이정은 눈꺼풀이 살짝 떨렸으나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때 양시은은 장이정의 품에 안긴 유준이가 장이정이 옆에 놓은 과일과 우유에 시선이 꽂힌 것을 보았다.“먹고 싶어?”“아니요. 먹고 싶지 않아요. 이건 엄마가 다른 사람에게 주려고 하던 거예요.”유준은 고개를 저었지만 시선은 여전히 그 위에 고정되어 있었다.가난한 집의 아이는 일찍 철이 든다.양시은은 한숨을 쉬고 죄책감을 느끼는 장이정을 보며 말했다.“먹어도 돼. 다 먹으면 또 있어.”“정말요?”유준은 장이정의 허락을 구했다.유준의 간절한 눈빛을 본 장이정은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낡은 동네 사람들은 대부분 저소득층이라 소비를 줄이기 위해 받은 선물은 다시 선물로 다른 사람에게 보내곤 한다.평소에도 돈을 마음대로 쓸 수 없다.어른들은 참을 수 있지만 아들을 끔찍하게 사랑하는 장이정은 유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유준이 우유
양시은은 차준기에게 부탁해 그 집 사람들의 서류를 손에 넣었다.차준기는 그녀의 질문에 약간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이걸 왜 필요하신가요?”양시은은 대충 변명을 해버리고는 그 집 사람들의 주소를 받은 후, 택시를 타고 그곳으로 향했다.그 집 사람들은 아주 오래된 건물에 살고 있었는데 이곳의 건물들은 벽지나 페인트가 벗겨지고 건물이 많이 낡아서 대부분 철거 예정이었다.그리고 또 이 동네에서 사는 대부분 사람들은 철문을 사용하고 있는 듯했다.양시은은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어떤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누구세요?”양시은은 밖에서 기다리자 곧 앞치마를 입은 여성이 나왔다. 그녀의 이름은 장이정이었다. 집 앞에 서 있는 낯선 사람을 본 장이정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양시은을 바라보았다.그녀는 길에서 산 우유 한 상자와 과일을 들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따뜻한 나눔 활동을 하고 있어서요.”그렇게 해서 여성이 문을 열었다.장이정은 그녀가 가져온 물건을 받으면서 환하게 웃었다. 경계심도 조금은 풀린 듯했다.“아직도 이런 활동이 있군요. 정말 오랜만이에요. 이 동네 사람들이라면 다 가질 수 있는 건가요?”“아직은 이곳만 있어요.”양시은이 그 집 안에 들어가 앉겠다고 제안하자 장이정은 그녀를 집 안으로 들였다.그녀는 앉자마자 집 안부터 훑어봤다.평범한 가정집의 인테리어에 벽에는 몇 층 벽지가 덮여 있었지만 심하게 낡은 벽을 가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양시은은 감탄하며 눈길을 돌렸다.“지금도 이런 낡은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죠.”“좋은 집에 살 수 있다면 누가 이런 헌 집에 살겠어요.”장이정은 한숨을 쉬며 차를 따랐다.양시은은 고마움을 표한 후, 조금 더 신중하게 물어봤다.“그럼 왜 여기서 안 나가시나요? 요즘은 집 구하기도 쉽고 여기도 철거된다고 들었거든요. 철거가 성공하면 큰돈을 받을 수 있지 않나요?”“그 돈이 얼마나 된다고...”장이정은 말을 멈추고 양시은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왜 그런 걸 묻죠?”양시은은 약간 당
양시은은 일단 속마음을 잠시 억누르기로 했다. 그리고는 먼저 유 할머니에게 간병인을 찾아주었다.유 할머니에 관한 일 처리를 끝내고 나서야 양시은은 경찰서로 향했다.오성 구역에서 소란을 피운 사람들은 한 달 동안 계속 구속되어 있었고 아직도 풀려나지 않은 상태였다.회사로 돌아온 양시은은 나도현부터 찾았다.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양시은은 먼저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나는 유진혁 뒤에 최종 보스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유진혁은 소란을 일으킨 주모자였고 나머지 사람들은 대부분 그가 부추긴 사람들이었다.나도현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모든 일이 너무 자연스럽게 일어난 것 같았다. 주민들의 불만이 갑작스레 생겨나고 나서 유 할머니가 병을 앓자 갈등이 더욱 커졌다. 이 모든 것이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조종되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양시은은 오늘 병원에서 들은 이야기를 간결하게 전했다. 그리고 유진혁에 대해 다시 언급했다.“유진혁의 최근 거래 내역을 확인해 봐. 만약 의심스러운 입금 내역이 있다면 거의 확실하다고 보면 돼.”“이미 확인했어.”나도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정리된 자료를 건네주었다.“이게 유진혁의 모든 자료야. 계좌는 모두 확인했는데 최근에는 큰 수입이 없더라고.”양시은은 빠르게 자료를 훑어봤다.자료는 매우 명확했다. 유진혁은 직업이 없는 백수였고 생계는 모두 부모에게 의존하고 있는 소위 말하는 등골브레이커였다. 그래서 그가 가지고 있는 카드들은 대부분 정지 상태였으며 수입도 전혀 없었다.지출은 꽤 크고 가끔 큰 금액이 빠져나갔는데 전부 도박에 쓰인 돈이었다.양시은은 그 서류를 보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유 할머니께서 열심히 저놈을 먹여 살리는데 정작 그는 아픈 어머니를 한 번도 찾아가지 않는다니?”그녀는 순간 모든 것을 깨달았다. 간호사가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도 이해가 갔다.자신의 부모가 그런 대우를 받았으면 그 누구라도 화가 날 것이었
인명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성이 ‘나’이신 변호사분 얘기인가요?”양시은은 시선을 돌렸다. 그가 바로 맞히자 조금 민망했다.다행히 인명진은 더 깊이 파고들지 않고 오히려 그녀에게 여러 가지를 알려주며 나도현에게도 조언해 주었다. “나도현 씨는 일중독을 빨리 고쳐야 해요. 이렇게 계속 가면 아무도 그를 도울 수 없을 거예요.”인명진을 보내고 나서 양시은은 병실로 향했다.그 환자는 성이 유 씨였고 나이는 65세였다.이 나이에 심장병을 앓고 있다는 건 매우 위험하다. 조금만 잘못하면 심장마비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나도현은 이 환자를 매우 신경 쓰고 있었다.병실도 최고급으로 배정되어 있었고 의료비도 모두 가불해주었다.그렇기에 소란을 피우려던 그 남자는 정말로 뻔뻔한 사람이다.“보호자 대신 보살피는 간병인이세요? 보호자랑 연락을 해서 병원에 오시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어머니이신데 어떻게 이렇게 방치해두겠어요? 너무 불효인 것 같아요.”“전 간병인이 아닌데요...”간호사는 당황한 기색이었다.그러자 양시은은 자신이 이곳에 오게 된 사연을 설명했다.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잘못 알아봤네요. 저는 보호자가 보낸 간병인인 줄 알고...”양시은은 그녀의 말투를 눈치채고 미묘하게 물어보았다. “그 보호자께서 자주 안 나오시나요? 제가 알기론 그분이 어머니의 병을 많이 걱정하고 있는 것 같던데요.”그가 어머니의 병을 걱정한다며 난리를 치면서 최근에는 몇 번이나 사람을 다치게 할 뻔했으니.“그게 무슨 소리예요? 진짜 걱정했다면 이렇게 오랫동안 아무 연락도 없었겠어요? 그냥 외면한 거죠, 그건 완전히 배은망덕한 사람이에요.” 간호사는 이 일을 말할 때, 화가 나서 얼굴이 붉어졌다.양시은은 그 말을 통해,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조금씩 알아 나가게 되었다.그 말로는 어머니를 무척 걱정한다고 말했던 남자가 어머니가 입원한 이후로 한 번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어머니는 병상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하루 종일
‘얼마나 슬펐을까...’“알았어. 내가 옆에 있어 줄게.”양시은은 마음이 약해졌다.그저 아픈 사람 한 명 돌보는 것뿐인데 나도현의 상태가 좋아지지 않으면 내일도 회사에는 못 갈 것 같았다.그녀가 옆에 머무르겠다고 하자 나도현은 꽉 쥐고 있던 손에 조금 힘을 풀었다.양시은은 정말 말한 것대로 옆에 있는 소파에 누워 담요를 덮고 그를 바라보았다.새벽이 되도록 나도현은 꽉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다음 날, 양시은은 소음에 의해 잠에서 깨어났다.눈을 떠보니 그녀는 소파에 누워 있었다. 본능적으로 옆을 쳐다봤지만 나도현은 자리를 떠난 상태였다.그때, 가정부가 아침 식사를 가져왔다.“아주머니, 제 옆에 있던 도현이 어디 갔는지 아세요?”양시은이 물었다.가정부는 아침 일찍부터 왔을 것이기에 나도현이 언제 나갔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되게 일찍 나가셨어요. 나가면서 아가씨를 깨우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하민이도 그분이 유치원에 데려다주신 거예요. 그리고 또 오늘은 회사에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어요.”양시은은 핸드폰을 보면서 지금 시간이 몇 시인지를 확인했다.현재 시각을 확인한 그녀는 순간 소파에서 떨어질 뻔했다.지금은 아침 10시였다. 출근 시간보다 2시간이나 늦은 시간이었다.‘그러니까 나도현은 밤새 아팠으면서 아침 일찍 일어나 하민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회사에 출근하기까지 했다는 건가?양시은은 자신의 행동이 부끄러워 나서 급히 아침을 먹고는 회사로 달려갔다.차준기는 그녀를 보고 매우 놀랐다.“양 비서님, 어떻게 오셨어요? 나 대표님 말로는 오늘 휴가 쓰셨다고 하셔서 안 오는 줄 알았거든요.”양시은도 이제 정식으로 입사했기 때문에 회사 사람들은 그녀를 ‘양 비서’라고 부르기 시작했다.“어디 나가시려고요?”아까 물음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양시은은 대화 주재를 돌렸다.“저는 심장병 환자 병문안 때문에 병원에 가는 길에요.”그가 말한 심장병 환자는 오성 구역 그분이셨다.“맞다, 그리고 나 대표님께서 명령을 내리셨
양시은은 밤마다 자주 잠에서 깨는 습관이 있었다.오늘도 어김없이 잠에서 깨어 거실로 나온 그녀는 거실에 있는 희미한 사람의 형체를 보고 깜짝 놀랐다. 한참을 바라보고 나서야 그 정체가 나도현이라는 것을 알아봤다.“도현아, 왜 잠도 안 자고 여기 앉아 있는 거야?”나도현은 낮게 한숨을 쉬었는데 목소리가 너무 낮아서 양시은은 처음에 자기가 잘못 들은 거라고 생각했다.양시은은 뭔가 이상하다 싶어서 나도현의 가까이로 다가갔다. 그의 이마에 맺힌 땀과 창백해진 그의 얼굴을 보고 그녀는 깜짝 놀랐다.“몸이 안 좋아?”“약 좀... 가져다줄 수 있어? 위가 좀 아픈 것 같아.”나도현의 목소리는 평소와 비슷했지만 그 속에 전에는 없던 허약함이 약간 섞여 있었다.양시은은 그제야 나도현은 위가 안 좋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는 위염에 자주 걸렸었는데 이는 모두 그가 너무 일에만 집중해서 생긴 문제였다.나도현이 걱정됐던 양시은은 당황하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자기 방에 위약이 있다는 생각이 났다.“내 방에 있는 것 같아. 기다려봐. 내가 가져올게.”그녀는 급히 방으로 들어가 뜨거운 물과 위약을 챙겨 가져다주었다.따뜻한 물 한 잔을 마시고 나니 나도현의 찡그렸던 눈썹도 조금 풀리는 듯했다.양시은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좀 나아졌어?”나도현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양시은은 한숨을 쉬며 다시 따뜻한 물을 준비해 그 옆에 두고 핑크색 온수 팩까지 꺼내왔다.“이걸 배 쪽에 올리면 좀 나아질 거 같아. 해봐.”“이걸 올리라고?”나도현은 핑크색 온수 팩을 쳐다보면서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지금은 색깔 따위 신경 쓸 때가 아니야. 빨리 꼭 안고 있어.”그는 그녀의 말에 이끌려 온수 팩을 배 위에 올렸다.그날 밤, 나도현이 갑자기 아픈 것 때문에 양시은은 그의 건강을 챙기느라 잠을 이룰 수 없었다.양시은은 오랫동안 그를 간호해 주다가 피곤해져서 소파에 기댄 채 잠이 들었다.아침이 되자 잠에서 깬 그녀는 급히 나도현의 상태를
양시은은 깜짝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그의 눈빛에는 여태 한 번도 본 적 없는 진지함이 담겨 있었다.누구든 알 수 있었다. 나도현의 이 말들은 절대 가식이 아니며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라는 것을 말이다.박은희는 이 장면을 보고 복잡한 감정이 교차하는 동시에 약간의 안도감을 느꼈다.몇 년 전만 해도 그녀는 나도현이 자기가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을 집으로 데려오게 될 거라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람이 자기도 인정하는 며느리가 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세 사람 중 둘은 양시은을 인정했지만 나용민은 여전히 불만족스러워했다.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양시은을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는 나도현에게 말했다.“이게 네가 다른 여자들을 거절한 이유냐? 이 여자가 뭐가 좋다고? 가문도 너랑 맞지 않고 직업도 그저 그렇잖아.”나도현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회사에서 저를 감시하세요?”그럴 수밖에 없다. 이미 은퇴한 나용민이 어떻게 이렇게 상세히 알 수 있을까?들통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나용민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감시라고? 그냥 네가 회사를 잘 운영하는지 걱정한 것뿐이야.”나도현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일어섰다. 그는 차가운 표정으로 나용민을 노려보며 말했다.나용민은 위압적인 모습의 아들을 보면서도 여전히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이제 이 아비도 네 일에 참견하지 말라는 거냐?”“저는 참견 같은 거 필요 없어요. 감당할 수 없어요.”나도현은 차갑게 말했다. 그리고 양시은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나용민은 극대노하며 소리쳤다.“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마!”그러나 나도현은 뒤돌아보지 않고 운전했다. 그리고는 차를 도로 한 쪽에 멈추었다. 나도현은 창밖을 바라보며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양시은은 그를 위로하며 말했다.“너무 속상해하지 마.”“시은아, 안고 싶은데...”나도현이 갑자기 낮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 소리가 이상하게도 마음을 아프게 했다.양시은은 잠시 망설였다.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