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이현은 미간을 찌푸렸다.“너 방금 분명 기절했었어. 그러니까 검사 꼭 받아야 해.”온지유는 옷을 꽉 잡았다. 그러다가 여이현의 팔에서 흐르는 피를 발견했다.“저보단 이현 씨가 더 필요한 것 같네요.”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왔다.“전 그냥 목에 상처가 작게 났을 뿐이에요. 그냥 약 바르면 괜찮아져요.”“선생님, 대표님부터 봐주세요.”여이현은 눈을 가늘게 뜨며 온지유를 보았다.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그녀의 행동이 너무도 수상했다. 꼭 뭔가를 숨기고 있는 사람 같았다.그녀는 검진이 필요 없다면서 몰래 다른 병원으로 갔다.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의사는 두 사람의 의견이 엇갈리자 끼어들었다.“여이현 씨, 일단 먼저 벌어진 상처부터 치료하셔야 할 것 같네요.”여이현은 의사에 말에 대답하지 않고 온지유에게 말했다.“검진받고 싶지 않은 거라면 왜 몰래 다른 병원으로 간 거지? 나한테 뭐 숨기고 있어?”그의 눈빛이 차가워지고 어투도 쌀쌀해졌다.온지유는 긴장해졌지만, 겉으로는 담담한 척 그를 빤히 보며 말했다.“다른 병원으로 간 건 제 프라이버시 때문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별로 검진받고 싶지 않네요. 게다가 전 멀쩡하다고요.”여이현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넌 연예인도 아닌데 프라이버시가 왜 중요한 거지?”온지유는 빠르게 머리를 굴려 핑곗거리를 찾았다.“지난번 회사 앞에서 그 난리가 있었잖아요. 사람들이 이젠 저를 알아보니까 걱정되어서 그래요. 자꾸만 제가 뭘 숨긴다느니 이상한 생각하지 말아요. 딱히 숨길 것도 없으니까. 그리고 어차피 제가 입원을 하든 말든 원래부터 관심이 없었잖아요. 설령 제가 입원한다고 해도 이현 씨는 바빠서 제가 입원한 줄도 모르고 있을 거잖아요.”그녀의 말에 여이현은 입술을 틀어 물고 그녀를 똑바로 보았다.“그래서 지금 원망하는 거야?”“아니요. 전 그냥 사실만 말했을 뿐이에요.”온지유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오늘 구해줘서 고마웠어요. 전에도 이미 충분히 저를 도와줬는데 제가 왜 이현 씨를 원
온지유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온지유가 노승아한테 하지 말아야 하는 말을 한 것도, 저기를 보호하기 위해서이다.“제가 좋아하는 사람 있다는 거, 알고 있잖아요.”온지유가 말했다.한마디로 여이현의 입을 막았다.온지유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하지만 여이현은 지금까지 그 남자를 본 적이 없다.마치 그들 사이에서 풀지 못한 숙제 같았다.여이현은 오만가지 생각을 거친 얼굴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말을 꺼내야 했다.“그 남자에 대해 알고 싶지 않습니다. 계약이 끝나는 즉시, 당신을 풀어줄 테니… 그러니 이혼계약서를 가져올 필요도 없습니다.”그들의 결혼 계약이 만료되어야 온지유가 주식을 받을 수 있다.온지유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마음이 내키지 않아도 협조해 줬다.여이현에 대한 보답인 셈이다.“좋아요.”온지유는 휴대폰을 꺼내 캘린더를 보았다.“얼마 남지도 않았네요. 그럼 대표님이 시간 되는 대로 가지고 와주세요.”여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의사가 두 사람의 상처를 꿰매어 주었다.온지유의 상처는 그다지 깊지 않았다. 피부가 좀 베였을 뿐이다. 온재준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그 여자가 꼬드긴 덕분이다.잠시 후, 경찰이 병원에 도착했다.이번 일은 온지유가 피해자이다.경찰은 굳은 표정으로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온지유 씨, 유감스럽지만 온재준 씨는 이번 폭발로 인해 생명을 잃었습니다.”그렇게 큰 폭발 사건에 사람이 살아있는 것도 기적이다.시체도 다 타버릴 것이다.온지유는 이런 일을 처음 겪는데, 두렵고 안타까웠다.온재준이 온지유를 납치하는 것은 감옥에 몇 년 묵으면 되지만, 죽기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그러나 이렇게 큰 대가를 치르게 된 건 생각지도 못했다.“알겠습니다. 또 다른 발견은 없습니까?”“현장에서 조사한 바로는 누가 차에 손을 댄것 같습니다.”경찰이 사건의 경과를 설명하고 있다.온재준이 그 차를 몰때 기름이 새는 줄 몰랐다. 심지어 차에서 담배까지 피고, 불이 나서 폭발했다.당시 그
온지유는 우유를 손으로 받고, 아직 따뜻했다. 한 모금 마셨는데 달콤하니, 고소하기도 했다.여이현은 온지유를 달래면서 안쓰러웠다.“잠깐 쉬어 있어.”여이현의 상처는 이미 다 싸맸다.“경찰 쪽은 내가 처리할게.”여이현은 온지유가 너무 힘든 걸 보고 싶지 않았다.이렇게 큰 납치 사건인데, 여이현도 당연히 제대로 조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여이현은 쉴 틈도 없었다.온지유는 침대에서 누워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누가 찾아왔다.“지유야!”“엄마!”온지유는 소리를 높였다.정미리는 들어와서 침대에 누워있는 온지유가 몸에 상처가 남은 걸 보고, 바로 눈물부터 흘러내렸다. 그리고 온지유를 품에 안겼다.“온재준, 그 자식. 감히 내 딸을 납치하고, 협박을 해? 정말 나쁜 놈이네. 우리 딸 괜찮아? 앞으로 그 집안 사람들이랑 말도 섞지 마! 너네 아빠랑도 얘기했어. 그렇게 형제간의 정을 중시해서, 이 지경까지 온거지. 네 아빠도 이제는 정신 차렸어. 나중에 한바탕 혼내줄 거래!”온경준은 문 앞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눈빛에는 마음 아프고 안쓰러움이 가득 찼다.때로는 가족을 너무 중요시해서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할 때도 있다.이번에 확실히 온경준이 잘 처리하지 못했다.온지유도 이제 마음이 놓였다. 살아 있는 게 가장 축복이고,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온지유는 약간 울먹이면서 말을 꺼냈다.“아빠, 엄마. 삼촌… 돌아가셨어요.”온지유는 자기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부모님께 이 얘기를 꺼내는 건 그래도 좀 마음이 이상했다.이 세상에 살아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갑자기 살아있던 사람이 죽었다고 하면, 얼마나 큰 원한이라도 그 순간 화가 싹 사라진다.“뭐?”정미리는 깜짝 놀랐다.온경준도 순간 말을 잇지 못했지만, 그가 받은 충격과 슬픔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온지유는 목소리를 낮추며 이어서 말했다.“시체는 아마 병원에 보냈을 거예요… 엄마, 아빠,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온지유도 어
“그러게, 말이야. 정말 나쁜 게 타고난 거였네. 온재준 참 딱하다. 조카 때문에 이게 무슨 일이야. 아이고. 불쌍해라.”“경찰은 뭐라고 하는데? 사람이 죽었는데, 그러고 말아?”“이렇게 죽으면 뭐가 돼…”“너무 불공평한거 아니야? 목숨이 걸린 문제인데, 이렇게 온지유만 멀쩡하게 살아 있으니…”정미리는 이러한 얘기를 듣고 안색이 나빠졌다.“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그래도 친척 사이인데 이렇게 대놓고 말하다니.”그들은 친척들과 거의 연락하지 않고 지낸다. 만나도 그냥 인사만 하고 헤어진다. 정미리는 온지유를 보고 말했다.“지유야, 그딴 말 신경 쓰지 마. 제사만 지내고 가자.”정미리는 더 이상 일을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만약 온지유가 온다고 하지 않았으면,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온지유는 생각보다 별 타격을 받지 않았다. 이보다 더한 말들을 들은 것도 적지 않다.가까운 이웃이 먼 친척보다 낫다.온지유가 온 이유도 단순히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배후자를 찾기 위해서다.그들이 차에서 내리자, 모두의 시선이 그들 쪽으로 쏠렸다.마치 무슨 염치로 여기까지 왔는지 말하는 것 같았다.그들은 당당하게 차에서 내렸다. 오지 않고 피하는 게 더 제 발 저린 것처럼 보일 것이다.온지유는 장례식장에 들어가 온재준의 영정 사진을 바라보았다.그리고 장수희와 오채린이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안색이 많이 초췌해졌고, 몸과 마음이 다 힘들었다.그러나 온지유를 보자 장수희는 흥분해서 눈을 붉혔다.“온지유? 네가 무슨 염치로 여기 오니? 이 살인마야! 너만 아니었으면, 네 삼촌 이렇게 억울하게 죽지 않았을 거야! 경찰들은 뭐 하고 있니? 너를 안 잡고!”누군가가 장수희를 붙잡아 있어서, 온지유한테 다가가 한바탕 저지르지 않았다.하지만 온지유는 장수희의 눈빛에서 자기 때문에 온재준이 죽었다고 원망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정말 온지유 때문에 온재준이 죽은 건가?온지유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모든 사람이 다 자기를 살인범으로 몰아가는지.
결혼식 일은 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잡담이 되었다.탓을 하기보다 부러워서 배가 아픈 것이다.그들 중에서 가장 잘사는 집안이 온지유 집안이다.다들 평범한 일반인인데, 부잣집에 시집을 가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하는 일이다.그들은 부자를 본 적도 없다.온지유가 잘 사는 것을 보고, 언짢고 부러웠다.같은 온 씨인데 신분이 다르다고 생각했다.“맞아! 유리 온 씨네는 더 이상 너희 집안을 용납할 공간이 없다!”온경준은 험담을 듣는 거에 이미 익숙해졌다. 하지만 온재준의 장례식에서도 그런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그런 생각을 해본 적도 없습니다! 모르면 가만히 계세요! 오늘은 제 동생 제사 지내러 온 거입니다. 그런 말은 넣어두세요!”“꺼져! 당장 꺼져! 누가 당신네 제사를 받고 싶대요?”장수희가 소리를 질렀다.“온 집안이 망나니야!”장수희는 온지유 집안을 밖으로 밀어냈다.“그냥 너네 사는 곳으로 돌아가요! 동생? 동생 취급이나 했어요? 그저 디딤돌로 봤지… 다시는 오지 마세요!”온지유는 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알겠어요. 들어가지 않을게요. 하지만 지금 범인이 아직 잡히지 않았어요!”온지유가 온 목적이 따로 있다. 장수희는 진범을 알고 있다.“숙모, 삼촌이 억울하게 죽게 내버려두지 않으려면…”물벼락을 맞았다.온채린이 책상에 있는 물병을 가지고 온지유 몸에 뿌렸다.“무슨 소리예요! 당신이 범인이잖아요! 아빠가 너 때문에 죽었어! 다 당신 가족들 때문이야…”“네 삼촌은 너 때문에 죽었어. 이 살인자야!”“네 삼촌이 몇 번이나 굽신굽신 돈을 빌렸는데, 안 주고! 네 삼촌을 궁지에 몰아놓았어. 납치한 것도 다 네가 돈을 안 빌려줘서 그래!”“싸다! 네가 한 사람의 목숨을 잃게 했어!”온지유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가웠다. 게다가 친척들의 비난까지 들어야 했다.언제부터 납치가 당연한 일이 됐는지…왜 온지유가 모든 벌을 받게 되는 건지…온지유는 얼굴의 물을 닦아내고, 온재준을 죽인 법인을 찾아내려고 온갖 수치를 다 받는 거로 생각했다
사람들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입을 다물고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뒤에 차가 여러 대 서 있었고, 크고 눈에 띄는 사람이 다가왔다.양복을 차려입고, 얼굴은 차갑고 잘생긴 눈매에 감히 건들지 못하는 아우라를 뿜으며 등장했다.그들은 저절로 뒤로 물러섰다.온지유는 고개를 돌려 보자마자, 그 남자가 어떻게 왔는냐는 생각이 들었다.긴장을 풀고, 손에 쥐고 있는 수도꼭지도 내버렸다.몇 초 동안 아무 소리도 나지 있었다. 갑자기 누군가가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당신 누구야? 온 씨 집안일에 네가 왜 끼어들어?”여이현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 사람을 쳐다보았다.그러자 기세가 꺾여 갑자기 주눅 됐다.여이현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온지유 씨 남편 되는 사람입니다. 이제 자격이 있는지?”“남편?”모두 놀란 표정들이었다.“남편이면, 그 부잣집 아니야?”입구에만 고급 차가 수십 대 주차되어 있었다.모두 쉽게 아는 브랜드이지만, 쉽게 볼 수 없는 브랜드이다.그들도 이 사람이 심상치 않다고 느꼈다.원래는 소문으로만 온지유가 부잣집에 시집을 갔다고 들었는데, 실제로는 처음 봤다.“어쩐지 차가 그렇게 많더라니. 역시 부잣집은 다르다.”그들은 모조리 밖에 있는 차에 시선을 두었다.여이현이 온지유의 곁으로 다가갔다.온지유가 물었다.“어떻게 여기까지 왔어요?”온지유는 며칠 동안 여이현을 만나지 못했다.전에도 설날이나 무슨 명절 때도 부모님이랑 같이 돌아오고, 여이현은 오지 않았다.계약 결혼이라서 싱글과 다를 바 없이 각자 따로 산다.여이현은 온지유의 고향에 한 번도 온 적이 없다.온지유도 그가 올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여이현이 말했다.“친척 장례식에 온다는데, 제가 와야죠.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아니요.”여이현은 그들이 온지유의 곁을 모여 있는 것을 보고, 마치 괴롭히려는 것 같아 말했다.“지금이 무슨 시대인데, 이런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해요? 빨리 물러나세요. 그렇지 않으면 제 방식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습니다!”여
오랫동안 비어있었지만, 청소하러 오는 사람이 종종 있었다.온경준과 정미리도 그들의 결혼이 없었던 일이라고 알고 있지만, 온지유보고 여이현한테 감사하다고 얘기하라고 했다.여이현은 거실에 앉아 있었다.온지유가 물 한 잔을 주면서 말했다.“엄마 아빠가 고맙다고 전해달래요.”“별말씀을요.”온지유는 여이현 옆에 앉아 한풀이했다.“아니, 제가 분명 한참 동안 설명해 드렸는데 듣지도 않고, 당신 몇 마디에 바로 수락하다니. 제가 너무 약한가요? 왜 저를 믿지 않고 당신 말은 믿는 걸까요?”온지유는 이해할 수 없었다.분명 혼자 해결할 수 있었는데 결국 여이현이 해결해 줬다.여이현은 물을 마시면서 온지유의 말을 들었다. 얼굴에는 아무런 기색의 변화도 없었다. 사실 여이현에 있어서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사람의 인성은 태어날 때부터 추악하다는 걸 기억해 둬. 특히 그 친척들을 멀리하고. 그들은 당신 약점만 뽑아 보는 사람들이야. 그러니까 너무 챙기려고 하지 마. 사람은 다 양면성이 있어. 너를 싫어하는 사람일수록, 너보다 못 살고 너를 헤치려고 안달을 써.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여이현은 온지유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당신뿐만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야. 다만 네가 지금 너희 집안에서 찍혀서 다행이지, 우리 집안 사람들을 만나면 웬만한 맹수들보다 더 무섭게 나와.”온지유는 생각에 잠겼다.“그래요?”“응.”온지유는 여이현의 가족들이랑 엮여보지 않아서, 맹수보다 무섭다는 게 어떤지 알 수 없었다.장례식은 3일 동안 진행될 예정이다.친척과 이웃들, 그리고 친구들도 다 올 것이다.점심시간이 되자 온지유는 여이현이 적응을 못 할까 봐 여쭤봤다.“점심 식사는 다들 같이하는데 가실 거예요?”“왜 안 가?”여이현은 고개를 들고 말했다.“당신이 적응을 못 할까 봐 그래서요. 안 오셔도 괜찮아요.”“갈 거야.”여이현이 가고 싶은데, 온지유도 더 이상 막지 않았다.하지만 부모님은 부르러 가지 않기로 했다. 이따가 밥만 좀 가져다드리려고 했다.온지유는
온지유는 여이현이 이렇게 말을 하자, 그녀도 더 이상 숨기지 않았다.“철수 할아버지. 저 결혼 했어요. 선 안 봐도 돼요.”“네가 바로 지유 남편이구나!”한철수는 오히려 매우 기뻐했다. 온지유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온지유는 학생이었는데, 결혼했다니 아주 신기하고 기뻤다. 여이현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웃으며 말했다.“얼굴도 잘생겼고, 딱 봐도 인재가 따로 없네. 지유 네가 사람 복이 있구나.”“너희 예쁘게 잘 살아야 해. 이렇게 만나는 것도 인연인데, 소중하게 여기고!”한철수가 잔소리하는 것도 그들을 위해서이다.여이현은 한철수의 말을 듣고 입꼬리가 올라갔다.온지유도 한철수의 말을 끊기가 어려워서 그저 들을 수밖에 없었다.한철수도 장례식에 가려고 그들과 같이 갔다. 한숨을 쉬며 말했다.“재준이 이 녀석도 참… 온 씨가 먼저 가서 다행이지, 알면 화병으로라도 죽었을 거다.”한철수는 온재준을 어렸을 때부터 보고 자랐다.온재준이 점점 변해가는 걸 보았다. 온재준이 자기보다 일찍 죽었으니, 한철수도 내심 유감스럽다고 느꼈다.온지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이현의 말처럼, 진실을 알고 싶은 사람은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알게 된다.하객들은 이미 꽉 찼다.온지유는 들어가자, 누군가 뒷담화를 하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그런데 그녀가 도착하기도 전에 누군가가 온지유를 향해 손짓했다.“지유야. 어서 이리 와서 앉아. 우리 사위도 이리 와!”갑자기 누군가 자기 손을 잡으니 의아했다. 온지유는 큰할아버지 댁의 딸인 것을 보고 조금 놀라며 여이현을 쳐다보았다.여이현은 온지유에게 안도의 눈빛을 보내더니, 당황하지 말라고 하는 듯했다.“지유가 오랜만에 돌아왔는데, 돌아오자마자 사위를 데려왔네! 다들 이리 와서 봐봐요! 지유 남편이에요!”“지유도 이뻐졌네. 이 사위 놈도 잘생겼네. 온 씨 집안에 복도 많구나!”“과찬이세요. 그냥 사위가 아니에요. 회사 차리는 사장이랍니다. 우리 지유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지유야! 그리고 우리 사위! 어서
술병이 박살 나며 바닥이 깨진 조각들로 가득 찼다.여자는 눈앞의 상황에 깜짝 놀라 화들짝 일어섰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배진호를 쳐다보는 그녀의 심장은 놀라서 요동쳤다."당신 지금 뭐 하는 거야?""비키라고 했잖아."배진호는 마침내 그녀를 바라보았다.그의 눈빛엔 감정이 전혀 없었다. 욕망은커녕 오히려 혐오감만 가득 차 있었다.그 순간, 여자는 철저히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내가 그렇게 형편없나?’제 발로 찾아온 여자도 거부할 뿐만 아니라 맥주병까지 깨버리다니."알았어. 가면 되잖아. 설마 내가 당신 아니면 안 될 줄 알아?"그녀도 자존심에 화가 났다.체면을 세우고 싶었던 그녀는 독설을 날렸다."당신 같은 사람 나 말고 누가 좋아한다고 그래? 사람들한테 방해받기 싫으면 여기엔 왜 온 건데?"클럽은 남녀가 자유롭게 어울리는 곳 아닌가?자기가 순진한 남자라도 되는 줄 아는가?배진호는 그녀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주변이 조용해진 뒤, 그는 다시 자리에 앉아 조용히 술잔을 들었다.만약 권다솔이 여기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일 뿐이라는 것을.그가 술잔을 집으려 고개를 숙인 순간, 남태건이 그의 옆을 지나 안쪽 자리로 향했다.권다솔이 그곳에 앉아 있었다.그녀는 자신이 쫓아낸 남자들이 몇 명인지 셀 수도 없었다. 몇몇은 버티며 소란을 피우려 했지만 그녀의 손에 든 맥주병은 그들을 봐주지 않았다.머리를 맞을 뻔한 남자들은 당연히 더 이상 그녀를 귀찮게 하지 못했다.하지만 그들 역시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틈틈이 이쪽을 힐끔거리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그때 남태건이 다가왔다.그는 권다솔의 손에 있던 술병을 순식간에 낚아챘다.“다솔아,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밤늦게 집에 안 들어가고 왜 여기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어?”“이건 내 일이에요. 당신이랑은 아무 상관 없어요.”권다솔은 그의 말을 듣고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권다솔은 방금 뺏긴 술병 대신 새로운 술병
클럽에는 예쁜 여자들이 많았지만 권다솔 같은 분위기의 사람은 얼마 보이지 않았다.권다솔이 들어서자마자 한 남자가 술잔을 들고 와서 말을 걸었다.“저희 이미 자리 잡았는데 오실래요? 스페이드 에이스도 깠어요. 마시러 와요.”“저 사람 따라가실 거면 그만두고 이쪽으로 오세요. 전 이 클럽 회원이에요. 마시고 싶은 술이 있으면 아무거나 불러요.”하지만 권다솔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그들을 밀어냈다.“비켜주세요.”권다솔은 곧장 카운터로 걸어가서 테이블 석과 맥주를 한 박스 주문했다.그녀는 혼자서 자리에 앉아 기계식으로 맥주를 열고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곧 테이블 위에는 빈 맥주병들이 줄을 지었다.알콜로 정신을 마비시키고 싶었지만 이렇게 많은 술을 마셔도 머리는 점점 맑아지기만 했다.머릿속에는 심지어 배진호의 모습이 그려지기까지 했다.같이 일을 하던 장면들, 행복한 연애를 하던 장면들, 많은 조각들이 모여져 무릎을 꿇고 프러포즈를 하는 배진호의 모습으로 변했다.한때 그녀는 자신이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인 것 같았다. 크면서 한 번도 억울함을 겪은 적 없었고 일도 순조로웠다. 배진호라는 사랑하는 남자도 만났고 말이다.하지만 지금은 그저 광대가 돼버린듯한 기분이었다.“웨이터.”권다솔은 빈 술병을 한쪽에 치워두고 휘청거리며 일어섰다.“소주 몇 병 추가해 주세요.”맥주로는 아무리 마셔도 도저히 취하지 않았다.소주라도 더 마셔야 할 것 같았다.취하고 나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 슬프지도 않을 것이다.머지않은 곳 다른 테이블 석에서 배진호도 한잔 또 한잔 술을 입안에 들이붓고 있었다.잘 생기고 분위기 있는 그의 모습에 고급스러운 옷차림, 게다가 주변에는 다른 여자도 없었다.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바에 있는 여자들의 이목을 끌었다.곧 노출이 심한 복장을 항 여자 한 명이 그의 곁에 와서 앉으며 배진호의 허리를 두 손으로 감쌌다.“오빠, 혼자 왔어? 혼자 마셔도 재미없는데 나랑 게임 할까? 진 사람이 옷 하나씩 벗기
설마 특수한 취향이라도 있어서 다른 사람의 욕을 듣는 걸 좋아하기라도 하는 건가?“진호 오빠...”석규리는 배진호가 떠나는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그녀는 따라가지 않고 자리에서 묵묵히 일어나기만 했다.배진호가 보여준 혐오는 거짓이 아니었다. 석규리도 바보는 아니니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정미진이 약속한 물건은 너무나도 달콤했다.둘이 결혼을 해서 아이를 갖기만 하면 집안의 모든 것은 아이의 것이 되고 회사도 수중에 들어올 수 있다.여이현도 배진호를 가족처럼 대해주니 그 인맥을 이용해 배진호의 회사는 앞으로도 승승장구할 테다. 지금 이 대우만 참아내기만 하면 그녀를 기다리는 건 호화로운 부잣집 며느리 생활이었다.남편이 잘 대해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시부모의 사랑을 받고 있으니 무서울 게 없었다. 아이의 얼굴을 봐서라도 배진호는 독하게 굴지 않을 것이다. 배진호는 좋은 남자였다. 그를 따내기만 하면 그 뒤에는 달콤한 미래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석규리는 치밀하게 계산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여기서 포기할 수는 더더욱 없었다....권다솔 쪽.그녀는 단걸음에 자신의 방으로 달려와 방문을 잠갔다. 창밖의 풍경을 보며 눈물은 하염없이 흘러내렸다.그녀는 자신에게 한번, 또 한 번 배진호 따위를 위해 눈물을 흘려서는 안된다고 되새김했지만 감정이라는 건 사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똑똑똑.”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가 따라온 것일 테다.권다솔은 마음을 가다듬고 문을 열었다. 하지만 문밖에는 아버지가 아닌 남태건이 서 있었다.“다솔아, 괜찮아? 나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진호 씨와 여자분이 하도 너무 심한 말을 하길래. 입 밖에 오빠, 오빠라며 얼마나 시끄럽게 구는지. 아버지의 성격도 잘 알잖아. 그렇게 너를 사랑하시는데 얼마나 화가 나셨겠어.”남태건은 한숨을 내쉬었다.“네가 많이 속상할거라는건 잘 알고 있어. 뭔가 있으면 나한테 말해. 말하고 나면 좋아질 거야.”“졸려요. 전 그냥 빨리 자고 싶어요.”
“다솔 씨, 우리 꼭 이런 결말로 끝을 보아야겠어요?”배진호는 차갑게 식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그의 마음도 덩달아 식어가기 시작했다.이 순간 배진호는 과거의 추억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권다솔이 그를 바라보던 눈빛에는 사랑이 가득했었다. 그녀의 시선은 마치 정오의 햇빛처럼 따뜻했다.지금은 모든 것이 바뀌어버렸다.권다솔은 그를 비웃으며 말했다.“여기까지 온건 다 당신 탓이 아닌가요? 진호 씨, 선택은 당신이 했으면서 이제 와서 후회를 하는건 재미가 없어요. 성인인데 자신이 한 결정에는 책임을 져야지 않겠어요?”그가 어머니의 말을 듣기로 하고 석규리와 함께 이 자리에 나타난 순간부터 둘 사이에는 일말의 가능성도 남지 않았다.권다솔은 이 모든 것을 용서해 줄 수 있을 만큼 대인배가 아니었다. 남편이 밖에서 여동생을 만들어 오는 것도, 시어머니가 시시각각 남편에게 바람 상대를 소개해 주는 것도 참을 수 없다.그래도 좋다는 사람이 그와 함께 살면 된다. 어쨌든 권다솔은 사서 고생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다솔 씨, 제가 선택한 사람은 당신이에요. 인터넷 여론도 사람을 시켜서 해결하도록 했어요. 어머니 쪽도 제가 잘 처리할 수 있어요. 우리 좋았던 때로 다시 돌아가면 안 돼요?”배진호는 끊임없이 그녀를 설득하려 했다.권다솔은 손을 뻗어 옆의 나무에서 나뭇가지를 꺾어 왔다.그리고 그 나뭇가지를 배진호의 손에 쥐여주었다.“이 가지를 다시 이어 붙일 수 있어요? 안 되겠죠. 엎지른 물은 다시 주어 담을 수 없어요. 저희 사이는 완전히 끝났으니까 이만 애인을 데리고 돌아가세요.”권다솔은 이미 이 모든 것에 질려버렸다.사랑이며 혼인이며 결국은 다 헛된 것뿐이다. 다시는 남자와 엮이고 싶지 않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배진호는 그래도 권다솔을 쫓아가고 싶었으나 석규리가 그의 팔을 잡아끌며 온몸의 힘으로 멈춰 세웠다.“진호 오빠, 제발 가지 말아요. 오빠가 이렇게까지 맞았는데 또 모욕을 받게 내버려둘 수 없어요!”그러나 배진호는 힘껏 그녀의 팔
“비켜, 방해하지 말고! 석규리 너 내 손에 죽고 싶은 거야?”배진호는 두 눈을 붉히며 말했다.그는 권용민과 대화를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런데 어째서 상관없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그의 앞에 나타나서 방해를 해오는 걸까.“진호 씨, 절 죽이고 싶다면 그대로 목을 졸라 죽이세요. 전 상관없어요.”석규리는 턱을 들고 가녀린 목을 배진호 앞에 드러냈다.한 가닥의 투명한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내려왔다.그녀는 배진호가 아무리 화가 나도 여성에게 손을 대는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가 보고 있는 곳에서 그녀는 목 졸라 죽일 리도 없다고 믿고 있었다.모든 일에는 리스크가 따르는 법이다. 이번 일로 정말 그의 노여움을 사게 된다 하더라도 권다솔의 집안의 마음을 완전히 돌려버릴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이었다.권용민은 두 사람이 일부러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여겼다.이곳은 그의 집이다. 드라마 촬영현장이 아니다.차오르는 화를 못 이겨 권용민은 다시 한번 배진호를 향해 발길을 날렸다.“양심의 가책은 무슨!”“아저씨, 때리려면 저를 때리세요! 진호 오빠를 때리지 말아 주세요!”석규리는 급히 배진호의 앞을 막아섰다.권다솔은 메시지를 받고 달려 온 순간 이 광경을 보게 되었다.석규리는 배진호의 앞에 막아선 것도 모자라 권용민을 손으로 밀어내기까지 했다.아버지가 비틀거리는 것을 본 권다솔은 재빨리 달려가서 그를 부축하려 했다.하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 초인이 아닌 이상 그렇게 빨리 도착할수 없었다. 그저 눈앞에서 아버지가 넘어지는 것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다행히 곁에 남태건이 있었기에 권용민은 바닥에 넘어지지 않았다.권다솔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그는 남태건의 손에서 아버지의 손을 전해받고 그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배진호를 보는 권다솔의 눈에는 실망이 가득했다.“가세요. 전 이제 당신 얼굴 보고 싶지 않아요.”“당신 아버지라는 사람이 진호 오빠를 때려서 이 지경으로 만들었는데 그러고 돌아갈 생각이에요?”석규리는 쉽게 돌아설
“당연히 아니에요. 우리 사이에는 아무 관계도 없어요.”배진호는 급히 해명했다.하지만 석규리의 눈에서는 눈물이 더 쏟아졌다. 그녀는 먼저 배진호를 한번 바라보고 억울한 듯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마치 큰 결심을 한 것처럼 말했다.“저는 진호 씨를 단순히 오빠로만 생각해요. 우리 둘은 남매처럼 지내는 사이입니다. 그러니 제발 저희 관계를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그리고 그런 말씀도 하지 말아 주셨으면 해요.”이 말은 권용민의 분노를 건드리기에 충분했다.그는 멍청하지 않았다. 석규리의 표정만 보아도 이 두 사람 사이가 결코 평범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그런데 무슨 남매 같은 사이라니.“오빠 동생은 무슨. 이혼도 했겠다 집에 가서 실컷 마음껏 해 봐라. 왜 여기서 연극을 하면서 날 역겹게 만드냐!”권용민은 분노에 차서 배진호의 옷깃을 놓고 손을 털어냈다.그는 자신의 딸이 이런 남자에게 소중한 시간을 낭비한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아니에요! 우리 사이엔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요. 진호 오빠, 빨리 말 좀 해 봐요! 오빠가 형수님이랑 이혼한 건 저 때문이 아니잖아요!”석규리는 서둘러 배진호의 옆으로 다가섰다.그녀는 손을 뻗어 배진호의 손을 잡으려 하며 연약한 척 그의 쪽으로 기댔다.남태건은 이 장면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사진을 찍어 권다솔에게 보내고 메시지를 덧붙였다.배진호는 석규리를 거칠게 밀어내며 혐오감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꺼져!”그는 어머니가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이유로 석규리를 양녀로 받아들이는 것을 묵인했지만 그것이 자신과 석규리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석규리가 계속해서 배진호의 앞에 나타나 관심을 끌려는 행동에 그는 진절머리가 났다. 심지어 이런 상황에서도 말이다.석규리는 남태건과 비등할 정도로 성가셨다. 둘이야말로 천생연분이니 그와 권다솔 사이를 방해하지 말고 같이 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배진호는 생각했다.권용민은 배진호의 태도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눈에서 보이는 혐오는 거짓으로 보
딸이 결혼 생활 동안 겪은 고통은 얼마나 컸을까!게다가 인터넷에 퍼진 여론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아무 이유 없이 권다솔을 욕하고 악독한 말들로 그녀를 공격했다.이 모든 것을 떠올린 권용민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결국 그는 더는 참지 못하고 분노에 찬 주먹을 휘둘렀다.배진호의 몸에 주먹이 연달아 날아들었다.“아버님, 남태건은 비열한 사람입니다. 남태건의 말을 믿으시면 안 됩니다. 저는 다솔 씨를 때린 적도 없고, 욕하거나 모함하려 한 적도 없어요.”배진호는 권용민에게 손을 대고 싶지 않아 반격하지 않고 계속 몸을 피하며 말했다.하지만 권용민은 이미 분노에 휩싸여 있어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그는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을 믿으며 말했다.“콩 심은 데서 콩 난다는데 당신 어머니도 좋은 사람이 아니었잖아. 매일 우리 딸을 괴롭힐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당신이라고 뭐가 다르겠어?”배진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굳어 있었다.그 역시 남자로서 권용민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만약 상처받은 사람이 자신의 딸이었다면 자신도 다른 사람의 해명을 듣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그는 권다솔을 상처 입히고 싶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그녀를 깊이 아프게 한 건 사실이었다.그리고 혈연관계는 쉽게 끊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그가 어머니와 다르다는 걸 아무리 말해도 사람들이 그의 말을 믿어 줄까?“이렇게 찾아와서 변명하는 건 무슨 뜻인데? 다솔이 부모님에게 미움받기 싫어서 그러는 거 아니야? 그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회사에 피해 갈까 봐 말이지.”남태건은 이 틈을 이용해 발길질을 더 했다.남태건의 발길은 거칠었다. 특히 한 번은 배진호의 허리를 강하게 찼다. 배진호가 권다솔과 부부였다는 사실, 그들이 모든 친밀한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이 남태건의 분노를 극도로 자극했다.권다솔은 그의 것이다. 영원히!“네가 우리 딸을 진심으로 대하고 처음에 나와 한 약속을 지켰다면 우리도 널 도와줬을 거다. 내가 소중한 딸을 고생하게 놔두겠냐? 그런데 약속은커녕
밖으로 가는 도중 남태건은 권용민을 진정시키는 척 불 난 집에 부채질을 하는 말만 계속했다.문 앞에 도착한 그들은 마침 배진호와 마주쳤다.“무슨 담으로 여기에 온 거냐! 딸을 그렇게 해코지해놓고 지금 와서 또 무슨 짓을 벌이려고?”권용민은 소매를 걷고 주먹을 꽉 쥐었다.쭉 신사적인 태도로 살아왔던 그는 말로 처리할 수 있는 일에는 절대 손을 올리지 않았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딸을 위해 배진호의 얼굴에 한 방 날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아버님, 죄송합니다. 제가 다솔 씨를 지키지 못한 탓입니다. 제가...”배진호는 진심으로 사과를 했다.하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태건이 그의 말을 끊었다.그는 진실이 밝혀질까 봐 불안해 급히 배진호를 쫓아내려 했다.“두 분은 이미 이혼하셨지 않나요. 지금 이곳에 있을 자격은 없다고 봅니다만. 당장 여기서 떠나세요, 될수록 멀리요. 이미 다솔이를 죽을 만큼 괴롭게 만들었는데 이번에는 부모님들도 편치 않게 만들 작정인가요!”“태건 씨, 사람을 모함하는 데에도 정도가 있습니다!”배진호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둘은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원수처럼 누구도 물러서지 않으려 했다.남태건은 인품에 문제가 있었다. 그가 한 짓들은 비겁하다는 단어 외에 묘사할 방법이 없었다.하지만 남태건은 그런 짓들을 벌이고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는 비웃음이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진호 씨는 이미 내기에서 졌어요. 당장 다솔이 곁에서 떨어져서 다시는 접근하지 마세요. 뒤에서 꼼수를 부릴 생각은 꿈도 꾸지 말고요.”배진호는 인터넷의 여론을 떠올렸다.다시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권용민의 모습을 보고 그는 이해를 할 수 없었다.권용민은 분명 이 모든 것이 배진호가 벌인 짓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하지만 배진호가 권다솔을 해칠 리가 있는가?“아버님, 인터넷의 그...”“퍽!”남태건은 급한 마음에 결국 배진호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그는 배진호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게 하려는 생각뿐이었다
비서가 그에게 모든 일을 설명하고 나서야 배진호는 진실을 알게 되었다.배진호는 자신이 어떤 모욕을 들어도 상관없었으나 권다솔이 상처를 받지는 않았는지가 걱정이었다.“다솔 씨는 제게 미안할 일은 전혀 한 적이 없어요. 이런 말들을 들어야 할 사람이 아닙니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한 거죠?”설령 권다솔이 정말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 하더라도 그 남자가 좋은 사람이면 가슴 아프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배진호가 권다솔에게 험한 말을 할 리가 없었다.권다솔은 좋은 여성이었다. 둘이 헤어지게 된 건 다 배진호가 잘해주지 못해 그녀에게 상처를 줬기 때문이다.“잘 모르겠어요. 누군가가 동영상을 업로드 한것이 지금 곳곳에 퍼져 나가고 있어요. 실시간 검색어에도 올라가서 권다솔 씨 집에서 반격을 하고 있습니다.”비서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모두 전해주었다.배진호는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바로 사람을 시켜서 해명하도록 하세요. 함부로 루머를 퍼뜨리고 있는 계정에는 고소장을 보내고요. 앞으로 또 근거 없는 말들을 하면 법적 책임을 묻도록 하겠습니다.”말을 마치고 그는 밖으로 걸음을 돌렸다.배진호는 당장 권다솔을 만나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다.비서는 바로 해명 글을 올리러 갔다.하지만 밀접히 인터넷 여론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는 남태건이 이 일을 쉽사리 해명하게 놔둘 리가 없었다.배진호가 해명 문장을 올린다면 그 문장들 사이에서 트집을 잡아내 또 네티즌들을 자극 시키면 된다.동시에 권용민과 김영은에게 배진호가 한 ‘악행’들을 전해주기도 했다.“다솔이는 너무 순진했던 겁니다. 부모님이 어릴 때부터 곱게 키우셔서 사회의 어두운 면을 잘 몰랐던 거죠. 그래서 배진호의 본성을 알아 채지 못한 겁니다. 배진호라는 사람도 정말 지독하죠. 아무리 그래도 부부였던 사이인데 남은 정도 없는 걸까요.”“우리 딸에게 욕받이를 시키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건가!”권용민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는 힘껏 상을 내리쳤다. 눈에는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