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재준이 탔던 차가 순식간에 폭발을 일으킨 것이다.시뻘건 불길이 하늘로 치솟고 있었고 차는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온지유는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하얀 그녀의 피부에 시뻘건 불길이 반사되고 있었고 눈빛이 흔들렸다.‘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지?'‘차가 왜 폭발한 거냐고!'비록 별로 친하지는 않았지만 여하간에 그녀의 친삼촌이었다.설령 다른 사람이 그녀의 앞에서 죽었다고 해도 그녀도 사람이었기에 공포를 느꼈다.머릿속이 하얘졌다. 눈물이 저도 모르게 줄줄 흐르고 있었다.그녀는 한참 멍하니 서 있다가 좀비처럼 비틀대며 폭발이 일어난 곳으로 다가가려 했다.“온지유!”그런 그녀의 모습에 정신이 번쩍 든 여이현은 그녀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얼른 그녀를 붙잡아야 했다. 그렇게 그는 그녀의 팔을 당겨 품에 가두었다.그는 진지하고도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저긴 가면 안 돼. 위험해!”“배 비서, 얼른 불부터 꺼요!”온지유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여이현을 살짝 밀어내며 아주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괜찮아요. 난 그냥 멀리서 보기만 할게요. 위험하지 않을 거예요.”그녀는 그저 보고 싶었다. 온재준이 정말로 죽은 것이 맞는지 말이다.믿기지 않았다. 아니,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눈앞에서 사람이 죽다니 말이다.그들은 모두 소화기를 들고 나타나 불을 껐다.온지유는 멀리서 서서히 드러나는 형체를 지켜보고 있었다. 온재준은 미동도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는 그에게 미안하다고 했었다.이때 누군가의 손이 그녀의 두 눈을 가렸다.“됐어. 보지 마.”그러자 온지유가 물었다.“차는 왜 갑자기 폭발한 걸까요? 혹시 누군가 일부러 폭발물을 설치한 건가요? 당신들이 올 때까지만 해도 멀쩡한 차가 왜 폭발한 건데요! 왜 죽였냐고요! 그냥 법의 심판에 맡기면 되는 일이잖아요. 대체 왜 죽였어요!”여이현이 말했다.“누군가 손을 쓴 것 같아. 그것도 방금. 분명 우리 빼고 다른 사람이 있었을 거야.”그의 말에 온지유는 무언가가 떠올랐다.다른 사
여이현은 미간을 찌푸렸다.“너 방금 분명 기절했었어. 그러니까 검사 꼭 받아야 해.”온지유는 옷을 꽉 잡았다. 그러다가 여이현의 팔에서 흐르는 피를 발견했다.“저보단 이현 씨가 더 필요한 것 같네요.”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왔다.“전 그냥 목에 상처가 작게 났을 뿐이에요. 그냥 약 바르면 괜찮아져요.”“선생님, 대표님부터 봐주세요.”여이현은 눈을 가늘게 뜨며 온지유를 보았다.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그녀의 행동이 너무도 수상했다. 꼭 뭔가를 숨기고 있는 사람 같았다.그녀는 검진이 필요 없다면서 몰래 다른 병원으로 갔다.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의사는 두 사람의 의견이 엇갈리자 끼어들었다.“여이현 씨, 일단 먼저 벌어진 상처부터 치료하셔야 할 것 같네요.”여이현은 의사에 말에 대답하지 않고 온지유에게 말했다.“검진받고 싶지 않은 거라면 왜 몰래 다른 병원으로 간 거지? 나한테 뭐 숨기고 있어?”그의 눈빛이 차가워지고 어투도 쌀쌀해졌다.온지유는 긴장해졌지만, 겉으로는 담담한 척 그를 빤히 보며 말했다.“다른 병원으로 간 건 제 프라이버시 때문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별로 검진받고 싶지 않네요. 게다가 전 멀쩡하다고요.”여이현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넌 연예인도 아닌데 프라이버시가 왜 중요한 거지?”온지유는 빠르게 머리를 굴려 핑곗거리를 찾았다.“지난번 회사 앞에서 그 난리가 있었잖아요. 사람들이 이젠 저를 알아보니까 걱정되어서 그래요. 자꾸만 제가 뭘 숨긴다느니 이상한 생각하지 말아요. 딱히 숨길 것도 없으니까. 그리고 어차피 제가 입원을 하든 말든 원래부터 관심이 없었잖아요. 설령 제가 입원한다고 해도 이현 씨는 바빠서 제가 입원한 줄도 모르고 있을 거잖아요.”그녀의 말에 여이현은 입술을 틀어 물고 그녀를 똑바로 보았다.“그래서 지금 원망하는 거야?”“아니요. 전 그냥 사실만 말했을 뿐이에요.”온지유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오늘 구해줘서 고마웠어요. 전에도 이미 충분히 저를 도와줬는데 제가 왜 이현 씨를 원
온지유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온지유가 노승아한테 하지 말아야 하는 말을 한 것도, 저기를 보호하기 위해서이다.“제가 좋아하는 사람 있다는 거, 알고 있잖아요.”온지유가 말했다.한마디로 여이현의 입을 막았다.온지유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하지만 여이현은 지금까지 그 남자를 본 적이 없다.마치 그들 사이에서 풀지 못한 숙제 같았다.여이현은 오만가지 생각을 거친 얼굴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말을 꺼내야 했다.“그 남자에 대해 알고 싶지 않습니다. 계약이 끝나는 즉시, 당신을 풀어줄 테니… 그러니 이혼계약서를 가져올 필요도 없습니다.”그들의 결혼 계약이 만료되어야 온지유가 주식을 받을 수 있다.온지유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마음이 내키지 않아도 협조해 줬다.여이현에 대한 보답인 셈이다.“좋아요.”온지유는 휴대폰을 꺼내 캘린더를 보았다.“얼마 남지도 않았네요. 그럼 대표님이 시간 되는 대로 가지고 와주세요.”여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의사가 두 사람의 상처를 꿰매어 주었다.온지유의 상처는 그다지 깊지 않았다. 피부가 좀 베였을 뿐이다. 온재준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그 여자가 꼬드긴 덕분이다.잠시 후, 경찰이 병원에 도착했다.이번 일은 온지유가 피해자이다.경찰은 굳은 표정으로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온지유 씨, 유감스럽지만 온재준 씨는 이번 폭발로 인해 생명을 잃었습니다.”그렇게 큰 폭발 사건에 사람이 살아있는 것도 기적이다.시체도 다 타버릴 것이다.온지유는 이런 일을 처음 겪는데, 두렵고 안타까웠다.온재준이 온지유를 납치하는 것은 감옥에 몇 년 묵으면 되지만, 죽기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그러나 이렇게 큰 대가를 치르게 된 건 생각지도 못했다.“알겠습니다. 또 다른 발견은 없습니까?”“현장에서 조사한 바로는 누가 차에 손을 댄것 같습니다.”경찰이 사건의 경과를 설명하고 있다.온재준이 그 차를 몰때 기름이 새는 줄 몰랐다. 심지어 차에서 담배까지 피고, 불이 나서 폭발했다.당시 그
온지유는 우유를 손으로 받고, 아직 따뜻했다. 한 모금 마셨는데 달콤하니, 고소하기도 했다.여이현은 온지유를 달래면서 안쓰러웠다.“잠깐 쉬어 있어.”여이현의 상처는 이미 다 싸맸다.“경찰 쪽은 내가 처리할게.”여이현은 온지유가 너무 힘든 걸 보고 싶지 않았다.이렇게 큰 납치 사건인데, 여이현도 당연히 제대로 조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여이현은 쉴 틈도 없었다.온지유는 침대에서 누워 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누가 찾아왔다.“지유야!”“엄마!”온지유는 소리를 높였다.정미리는 들어와서 침대에 누워있는 온지유가 몸에 상처가 남은 걸 보고, 바로 눈물부터 흘러내렸다. 그리고 온지유를 품에 안겼다.“온재준, 그 자식. 감히 내 딸을 납치하고, 협박을 해? 정말 나쁜 놈이네. 우리 딸 괜찮아? 앞으로 그 집안 사람들이랑 말도 섞지 마! 너네 아빠랑도 얘기했어. 그렇게 형제간의 정을 중시해서, 이 지경까지 온거지. 네 아빠도 이제는 정신 차렸어. 나중에 한바탕 혼내줄 거래!”온경준은 문 앞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눈빛에는 마음 아프고 안쓰러움이 가득 찼다.때로는 가족을 너무 중요시해서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할 때도 있다.이번에 확실히 온경준이 잘 처리하지 못했다.온지유도 이제 마음이 놓였다. 살아 있는 게 가장 축복이고,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온지유는 약간 울먹이면서 말을 꺼냈다.“아빠, 엄마. 삼촌… 돌아가셨어요.”온지유는 자기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부모님께 이 얘기를 꺼내는 건 그래도 좀 마음이 이상했다.이 세상에 살아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갑자기 살아있던 사람이 죽었다고 하면, 얼마나 큰 원한이라도 그 순간 화가 싹 사라진다.“뭐?”정미리는 깜짝 놀랐다.온경준도 순간 말을 잇지 못했지만, 그가 받은 충격과 슬픔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온지유는 목소리를 낮추며 이어서 말했다.“시체는 아마 병원에 보냈을 거예요… 엄마, 아빠,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온지유도 어
“그러게, 말이야. 정말 나쁜 게 타고난 거였네. 온재준 참 딱하다. 조카 때문에 이게 무슨 일이야. 아이고. 불쌍해라.”“경찰은 뭐라고 하는데? 사람이 죽었는데, 그러고 말아?”“이렇게 죽으면 뭐가 돼…”“너무 불공평한거 아니야? 목숨이 걸린 문제인데, 이렇게 온지유만 멀쩡하게 살아 있으니…”정미리는 이러한 얘기를 듣고 안색이 나빠졌다.“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그래도 친척 사이인데 이렇게 대놓고 말하다니.”그들은 친척들과 거의 연락하지 않고 지낸다. 만나도 그냥 인사만 하고 헤어진다. 정미리는 온지유를 보고 말했다.“지유야, 그딴 말 신경 쓰지 마. 제사만 지내고 가자.”정미리는 더 이상 일을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만약 온지유가 온다고 하지 않았으면,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온지유는 생각보다 별 타격을 받지 않았다. 이보다 더한 말들을 들은 것도 적지 않다.가까운 이웃이 먼 친척보다 낫다.온지유가 온 이유도 단순히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배후자를 찾기 위해서다.그들이 차에서 내리자, 모두의 시선이 그들 쪽으로 쏠렸다.마치 무슨 염치로 여기까지 왔는지 말하는 것 같았다.그들은 당당하게 차에서 내렸다. 오지 않고 피하는 게 더 제 발 저린 것처럼 보일 것이다.온지유는 장례식장에 들어가 온재준의 영정 사진을 바라보았다.그리고 장수희와 오채린이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안색이 많이 초췌해졌고, 몸과 마음이 다 힘들었다.그러나 온지유를 보자 장수희는 흥분해서 눈을 붉혔다.“온지유? 네가 무슨 염치로 여기 오니? 이 살인마야! 너만 아니었으면, 네 삼촌 이렇게 억울하게 죽지 않았을 거야! 경찰들은 뭐 하고 있니? 너를 안 잡고!”누군가가 장수희를 붙잡아 있어서, 온지유한테 다가가 한바탕 저지르지 않았다.하지만 온지유는 장수희의 눈빛에서 자기 때문에 온재준이 죽었다고 원망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정말 온지유 때문에 온재준이 죽은 건가?온지유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모든 사람이 다 자기를 살인범으로 몰아가는지.
결혼식 일은 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잡담이 되었다.탓을 하기보다 부러워서 배가 아픈 것이다.그들 중에서 가장 잘사는 집안이 온지유 집안이다.다들 평범한 일반인인데, 부잣집에 시집을 가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하는 일이다.그들은 부자를 본 적도 없다.온지유가 잘 사는 것을 보고, 언짢고 부러웠다.같은 온 씨인데 신분이 다르다고 생각했다.“맞아! 유리 온 씨네는 더 이상 너희 집안을 용납할 공간이 없다!”온경준은 험담을 듣는 거에 이미 익숙해졌다. 하지만 온재준의 장례식에서도 그런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그런 생각을 해본 적도 없습니다! 모르면 가만히 계세요! 오늘은 제 동생 제사 지내러 온 거입니다. 그런 말은 넣어두세요!”“꺼져! 당장 꺼져! 누가 당신네 제사를 받고 싶대요?”장수희가 소리를 질렀다.“온 집안이 망나니야!”장수희는 온지유 집안을 밖으로 밀어냈다.“그냥 너네 사는 곳으로 돌아가요! 동생? 동생 취급이나 했어요? 그저 디딤돌로 봤지… 다시는 오지 마세요!”온지유는 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알겠어요. 들어가지 않을게요. 하지만 지금 범인이 아직 잡히지 않았어요!”온지유가 온 목적이 따로 있다. 장수희는 진범을 알고 있다.“숙모, 삼촌이 억울하게 죽게 내버려두지 않으려면…”물벼락을 맞았다.온채린이 책상에 있는 물병을 가지고 온지유 몸에 뿌렸다.“무슨 소리예요! 당신이 범인이잖아요! 아빠가 너 때문에 죽었어! 다 당신 가족들 때문이야…”“네 삼촌은 너 때문에 죽었어. 이 살인자야!”“네 삼촌이 몇 번이나 굽신굽신 돈을 빌렸는데, 안 주고! 네 삼촌을 궁지에 몰아놓았어. 납치한 것도 다 네가 돈을 안 빌려줘서 그래!”“싸다! 네가 한 사람의 목숨을 잃게 했어!”온지유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가웠다. 게다가 친척들의 비난까지 들어야 했다.언제부터 납치가 당연한 일이 됐는지…왜 온지유가 모든 벌을 받게 되는 건지…온지유는 얼굴의 물을 닦아내고, 온재준을 죽인 법인을 찾아내려고 온갖 수치를 다 받는 거로 생각했다
사람들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입을 다물고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뒤에 차가 여러 대 서 있었고, 크고 눈에 띄는 사람이 다가왔다.양복을 차려입고, 얼굴은 차갑고 잘생긴 눈매에 감히 건들지 못하는 아우라를 뿜으며 등장했다.그들은 저절로 뒤로 물러섰다.온지유는 고개를 돌려 보자마자, 그 남자가 어떻게 왔는냐는 생각이 들었다.긴장을 풀고, 손에 쥐고 있는 수도꼭지도 내버렸다.몇 초 동안 아무 소리도 나지 있었다. 갑자기 누군가가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당신 누구야? 온 씨 집안일에 네가 왜 끼어들어?”여이현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 사람을 쳐다보았다.그러자 기세가 꺾여 갑자기 주눅 됐다.여이현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온지유 씨 남편 되는 사람입니다. 이제 자격이 있는지?”“남편?”모두 놀란 표정들이었다.“남편이면, 그 부잣집 아니야?”입구에만 고급 차가 수십 대 주차되어 있었다.모두 쉽게 아는 브랜드이지만, 쉽게 볼 수 없는 브랜드이다.그들도 이 사람이 심상치 않다고 느꼈다.원래는 소문으로만 온지유가 부잣집에 시집을 갔다고 들었는데, 실제로는 처음 봤다.“어쩐지 차가 그렇게 많더라니. 역시 부잣집은 다르다.”그들은 모조리 밖에 있는 차에 시선을 두었다.여이현이 온지유의 곁으로 다가갔다.온지유가 물었다.“어떻게 여기까지 왔어요?”온지유는 며칠 동안 여이현을 만나지 못했다.전에도 설날이나 무슨 명절 때도 부모님이랑 같이 돌아오고, 여이현은 오지 않았다.계약 결혼이라서 싱글과 다를 바 없이 각자 따로 산다.여이현은 온지유의 고향에 한 번도 온 적이 없다.온지유도 그가 올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여이현이 말했다.“친척 장례식에 온다는데, 제가 와야죠.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아니요.”여이현은 그들이 온지유의 곁을 모여 있는 것을 보고, 마치 괴롭히려는 것 같아 말했다.“지금이 무슨 시대인데, 이런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해요? 빨리 물러나세요. 그렇지 않으면 제 방식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습니다!”여
오랫동안 비어있었지만, 청소하러 오는 사람이 종종 있었다.온경준과 정미리도 그들의 결혼이 없었던 일이라고 알고 있지만, 온지유보고 여이현한테 감사하다고 얘기하라고 했다.여이현은 거실에 앉아 있었다.온지유가 물 한 잔을 주면서 말했다.“엄마 아빠가 고맙다고 전해달래요.”“별말씀을요.”온지유는 여이현 옆에 앉아 한풀이했다.“아니, 제가 분명 한참 동안 설명해 드렸는데 듣지도 않고, 당신 몇 마디에 바로 수락하다니. 제가 너무 약한가요? 왜 저를 믿지 않고 당신 말은 믿는 걸까요?”온지유는 이해할 수 없었다.분명 혼자 해결할 수 있었는데 결국 여이현이 해결해 줬다.여이현은 물을 마시면서 온지유의 말을 들었다. 얼굴에는 아무런 기색의 변화도 없었다. 사실 여이현에 있어서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사람의 인성은 태어날 때부터 추악하다는 걸 기억해 둬. 특히 그 친척들을 멀리하고. 그들은 당신 약점만 뽑아 보는 사람들이야. 그러니까 너무 챙기려고 하지 마. 사람은 다 양면성이 있어. 너를 싫어하는 사람일수록, 너보다 못 살고 너를 헤치려고 안달을 써.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여이현은 온지유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당신뿐만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야. 다만 네가 지금 너희 집안에서 찍혀서 다행이지, 우리 집안 사람들을 만나면 웬만한 맹수들보다 더 무섭게 나와.”온지유는 생각에 잠겼다.“그래요?”“응.”온지유는 여이현의 가족들이랑 엮여보지 않아서, 맹수보다 무섭다는 게 어떤지 알 수 없었다.장례식은 3일 동안 진행될 예정이다.친척과 이웃들, 그리고 친구들도 다 올 것이다.점심시간이 되자 온지유는 여이현이 적응을 못 할까 봐 여쭤봤다.“점심 식사는 다들 같이하는데 가실 거예요?”“왜 안 가?”여이현은 고개를 들고 말했다.“당신이 적응을 못 할까 봐 그래서요. 안 오셔도 괜찮아요.”“갈 거야.”여이현이 가고 싶은데, 온지유도 더 이상 막지 않았다.하지만 부모님은 부르러 가지 않기로 했다. 이따가 밥만 좀 가져다드리려고 했다.온지유는
법로의 표정은 여전히 엄숙했다.온지유는 이런 소식을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지금 이 상황에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무엇을 말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지금은 침묵이 가장 좋은 답변일지도 모른다.신무열 또한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아린에게 꼭 살리겠다고 약속했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신무열은 깊은 죄책감에 사로잡힌 채 아린이 있는 침대로 다가갔다.“미안해. 한 몸 바쳐 중요한 정보를 전해준 네 목숨을 결국 지킬 수 없었어.”아린은 침대에 누워있었다. 몸속의 독으로 인해 얼굴은 이미 다 망가졌지만, 신무열이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렇게 대단한 정보도 아니에요. 제가 말하지 않아도 결국 무열 씨는 모든 걸 알게 됐을 거예요.”그녀는 자처해서 한 것이었고 이 일로 인해 신무열이 어떤 마음의 짐도 가지지 않길 바랐다.신무열은 보이지 않는 손에 심장이 쥐어 짜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자신을 위해 한 몸 바쳐 싸운 아린을 위해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는 사실에 목이 막혔다. 따로 방법이 없다면 이대로 그녀가 죽어 가는 걸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신무열은 그녀가 어떤 후회도 남기지 않도록 해주겠다고 결심했다.신무열은 아린에게 약속했다.“내 무능함 때문에 네 독을 풀어주지 못했지만 걱정하지 마. 나는 절대 널 포기하지 않을 거야. 그놈들한테 건 현상금도 아직 유효해. 정 안 된다면... 내가 반드시 복수해 줄게. 마지막으로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다면 나에게 말해줘.”신무열의 눈빛은 확고했다.아린이 어떤 소원이든 말하든 그는 반드시 그것을 이뤄줄 생각이었다.아린은 신무열이 김혜연과 결혼할 것을 알고 있었다.그랬기에 두 사람을 곤란하게 하거나 결혼 전에 그의 마음을 흔들고 싶지 않았다.아린은 끝까지 미소를 유지하며 말했다.“신무열 선생님, 제가 당신에게 이 정보를 전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당신이 저를 살리려 노력해 주고 제 곁에 있어 준 것만으로도 충분해요.”“혜연
온지유는 참지 못하고 농담을 던졌다.“결혼 후엔 아이도 빨리 낳아야겠네요. 나중에 아기가 태어나면 나도 좀 같이 놀아줘야죠.”“넌 이제 Y국에 있지도 않고 아버지도 같이 경성에 갔잖아. 차라리 Y국으로 와. 내가 널 고용할게.”신무열은 단숨에 말을 이어갔다.사실 거리가 그들 사이의 큰 걸림돌이었다. 온지유가 경성에 남기로 한 건 그녀의 선택이지만 신무열은 그녀가 Y국에 머물러 주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Y국은 그들의 뿌리와 영혼이 있는 곳이며 오빠로서 여동생에게 여러모로 보답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온지유도 신무열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이현이 경성에 있고 양부모도 그곳에 있는 온지유에게는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없었다.게다가 온지유는 Y국을 관리하는 일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온지유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형수가 아이를 낳게 되면 내가 와서 돌봐줄게요.”두 사람에겐 어머니가 없었고 신무열의 능력으로 아이가 태어날 때 산후조리사는 고용할 수 있다 해도 가족의 보살핌을 대체할 수는 없을 것이다.김혜연은 온지유가 ‘형수’라 부르는 말에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다.신무열이 자신을 인정해 주고 신무열 곁의 모든 사람이 그녀를 받아들여 주고 있다는 것이 참 다행스러웠다.신무열은 아린의 문제에 대해 법로에게 말할 필요가 있었다.“아버지, 제 친구가 노석명이 개발한 독약의 개량품에 감염되었습니다. 직접 한 번 살펴봐 주실 수 있을까요?”법로는 노석명의 이름을 듣고는 눈빛이 어두워졌다.“노석명의 독약이라니? 그놈은 이미 처형되어 사람의 형체조차 잃고 혀마저 잘려 매일 돼지처럼 살고 있다. 노석명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이냐?”혹은, 눈치도 없는 누군가가 아직도 노석명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다는 것일지도 몰랐다.한편, 온지유는 ‘아린’이라는 이름을 듣자 과거 Y국 북부에서 처음 신무열을 만났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내가 아는 그 아린 맞아요?”“그래.”신무열은 숨기지 않았다.당시 전쟁 중에 아린은 온지유에게 식사를 해주
“고마워.”나민우는 그 단어를 입 밖으로 내고 싶지 않았다. 온지유에게 감사하고 싶지 않았다. 온지유에게서 축복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에게 무슨 수가 있단 말인가?이것이 그들 사이의 가장 좋은 결말일 것이다.“나도 이만 가봐야 하니까, 돌아오면... 혹시 나중에 업무상 합작할 일이 있으면 또 보자.”온지유는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 한마디 힘겹게 뱉었다.“그래.”나민우는 온지유가 사라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고 돌아섰다. 심장이 조여왔다. 고통이 거대한 괴물처럼 덮쳐왔다.차라리 보지 않는 게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고 나민우는 생각했다....온지유는 여이현의 곁으로 돌아왔다. 여이현은 온지유에게 마실 것을 시켜줬다.그녀뿐이 아니라 별이와 법로의것까지 준비되어 있었다.별이에게는 감자튀김, 치킨을 준비했고 법로에게는 붉은색 외투를, 그리고 이번에는 배진호도 데려왔다. 배진호가 아직 한 번도 Y국에 와보지 않은 것도 있고 함께 가면 업무 진행 상황도 보고 받기 편해지기 때문이다.배진호는 일 중독자답게 비행기 대기 중에도 일을 하고 있었다.법로는 별이를 보더니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둘이 별이에게 맛있는 걸 먹이고 싶은 마음은 알지만 별이는 몸이 안 좋으니까 너무 기름진 건 많이 먹이지 마라.”“알아요 아버님. 어쩌다 가끔 사주는 거예요.”여이현도 평소에는 아이에게 패스트푸드를 사주는 건 기피하고 있었다.하지만 여이현과 온지유는 아이에게 너무 많은걸 참게 했다.게다가 할아버지도 엄하게 대하니 가끔은 보상으로 먹을 것 정도는 줘도 괜찮다 생각했다.“천천히 먹어, 체할라.”법로는 말은 그렇게 해도 사사건건 별이를 걱정해 주고 보살펴주고 있었다. 별이의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닦아주기까지 하며 말이다.한 가족의 행복이란 이런 소소한 곳에서 느껴지는 걸지도 모른다.비행기 위에서 온지유는 꿈을 꿨다.꿈속에서 그녀는 한 여자아이가 장미를 한 송이 들고 귀엽게 웃으며 바라보는 모습을 보았다.“예쁜 이모, 같이 가도 돼요?”여자아
경성에 함께 돌아온 이후로 나민우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온지유는 나민우의 마음을 알았고 나민우의 희생도 잘 알고 있었다.몇 년간 그녀는 나민우에게 휴대폰으로 메시지를 보내는 외에 직접 얼굴을 본 적은 없었다.당연했다. 그 메시지들을 나민우는 한번도 회답을 한 적 없었기 때문이다.온지유의 이 말은 비수같이 나민우의 마음에 꽂혔다.잘 지냈을 리가 있을까?집으로 돌아온 후 그의 모든 연락 수단은 뺏기고 말았다.Y국에 있는 동안 나민우는 심신이 모두 피폐해져 있었다.가족들은 그의 활동 범위를 제한해 안정을 취하도록 했다.지어는 어울리는 여자를 찾아 이어줘 둘 사이에는 아이도 생겼다.나민우는 이 몇 년간 감히 온지유에게 연락을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질까 봐 두려웠다.지금의 자신은 더 이상 온지유의 옆에 설 자격이 없었다.순간 나민우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목이 막힌 듯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온지유의 물음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온지유는 나민우에게서 이상함을 감지했다.하지만 미처 무어라 묻기도 전에 여이현이 다가왔다.여이현은 나민우를 발견하고 먼저 인사했다.“민우 씨, 오랜만이네요.”여이현까지 나타난 이상 나민우도 더 이상 피할 수 없었다.“예. 오랜만이에요.”온지유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여이현이다. 여이현이 살아 있는 지금, 그가 온지유의 곁에 서있는 지금, 온지유는 더더욱 여이현과 갈라질 일은 없었다.모든 것은 이미 다 정해진 운명이었다.나민우는 웃으며 돌아섰다.“아직 할 일이 남아서 먼저 가보겠습니다.”“네. 또 봅시다.”그저 평범한 인사치레일 뿐이었다.나민우는 돌아섰지만 온지유는 그가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여이현은 온지유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그 일에 연루되었던 사람들이 지금은 다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그렇지 않으면 온지유는 계속 마음에 두고 있을 것이다.온지유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다들 괜찮아 보이지만 나는 왠지... 나민우는
신무열은 말을 마치고 김혜연에게 따뜻한 눈길을 보냈다.김혜연은 순간 그의 뜻을 눈치챘다.그리고 싱긋 웃었다.“괜찮아요.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아요. 결혼식은 그저 형식적인 것일 뿐인걸요.”신무열은 김혜연의 머리를 쓰다듬고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했다.김혜연 마음은 호수에 빗방울이 떨어진 듯 은은하게 일렁였다.둘의 합의로 결혼식은 1주 후에 치루기로 결정되었다.신무열은 먼저 Y국 전체에 결혼을 발표했다.그리고 친구들에게도 소식을 전했다.법로는 신무열이 이렇게 빨리 결정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그에게 한마디 했다.“전에 지유를 통해 네게 귀띔했을 때는 싫다고 하더니만 지금은 어떠냐?”신무열은 웃음을 흘렸다.이번 일은 확실히 신무열의 예상 밖이었다. 세상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 말은 조심해야 하는 게 맞았다.법로가 말했다.“결혼할 생각이었으면 지유와 같이 결혼식을 치렀으면 좋았을 텐데.”법로는 온지유의 이름을 부르는 데에 익숙해져 율이라는 이름이 오히려 입에 익지 않게 되었다.법로에게 있어서는 딸이 곁에 있어만 준다면 이름이 어떻든 상관이 없었다.율이라는 이름은 한동안 노승아가 썼던 것이기도 했기에 오히려 온지유의 이름이 마음이 편했다.온지유의 기억은 경성에서 멈춰있었다.온지유만 좋다면 어떤 신분으로 있든 상관이 없다.“경성에서 돌아오기 싫은 마음은 저도 알지만 우리의 결혼식에는 참석해 줬으면 좋겠어요.”아버지와 여동생마저 참석하지 않으면 어떤 사람들은 이 결혼을 인정하지 않을지도 모른다.“알고 있다. 지유와도 내가 말해두마. 오늘 저녁에 바로 출발하겠다.”아들의 결혼식에 참석 안 할 리가 있을까?게다가 온지유에게 이미 잘 못 대해 줬었는데 아들에게까지 신뢰를 잃을 수는 없었다.온지유가 돌아오자 법로는 바로 이 소식을 전해주었다.온지유는 단숨에 승낙한 것도 모자라 두 사람의 결혼 소식에 누구보다도 기뻐했다.“정말 잘됐어요. 또 한 쌍의 연인이 맺어지게 되다니.”김혜연의 집념과 노력을 온지유는 두
아린이 같은 수단으로 신무열을 그녀의 곁에서 앗아갔기 때문이다.아린에게 더 대단한 수단이 있었다면 김혜연은 인정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지금은...김혜연은 마음속이 바늘로 쑤시듯 아파져 왔다.그녀는 신무열이 세심하게 아린을 보살피는 모습을, 직접 아린에게 약을 떠먹여 주는 그의 모습을 곁에서 뚫어져라 쳐다봤다.신무열은 한참이 지나고 아린이 잠들고 나서야 발길을 돌렸다.뒤돌아선 신무열은 그제야 뒤에 있던 김혜연을 발견했다.“네가 왜 여기에?”김혜연은 신무열의 뒤에 누워있는 아린을 보며 물었다.“아린이 찾아온 게 딱히 비밀은 아니잖아요?”Y국 전국에 이미 아린이 목숨을 걸고 신무열에게 정보를 전달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신무열은 그녀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아린을 살려내고 아린을 결혼식의 주인공으로 발표할 거라는 소문은 점점 더 퍼져가고 있었다.김혜연은 이 모든 것을 알고 나서야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신무열은 김혜연의 눈빛에서 이미 모든 것을 눈치챘다.“아린은 우리에게 중요한 정보를 전해주었어. 나는 아린이 죽게 내버려둘 수 없었을 뿐이야.”그것이 바로 신무열의 입장이었다. 그 외에는 아린에게 어떠한 다른 감정도 품고 있지 않았다.밖에는 이미 아린이 그를 도왔기에 책임감을 느낀 신무열이 그녀를 곁에 둘 것이라 말하고 있었지만, 그의 태도는 굳건했고 은혜를 갚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내주지도 않을 것이다.김혜연은 숨을 들이 삼켰다. 신무열이 그녀에게 친절히 설명을 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이에 김혜연은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무열 씨...”이름을 불렀지만 그 뒤에 무슨 말을 이어야 좋을지 생각이 들지 않았다.부인할 수 없는 건 신무열과 그녀 사이의 신분과 관계성을 고려하면 신무열이 자세히 설명을 해준다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왜? 나는 너와 약혼한 사이이기도 한데 이런 일이 일어난 뒤에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는 없잖아. 그건 네게 너무 잔인하지 않아? 아니면 넌 나를 그런 사람으로 생각해 왔던 거야?”
신무열은 상황을 파악한 후 요한을 불러 말했다.“아린을 실험실로 데려가서 검사해 봐.”이들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아린은 중요한 정보를 전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내걸었다.아린은 숨을 고르며 말했다.“선생님, 저 때문에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지금 치료는 필요 없어요.”“그들이 노리는 건 바로 너의 안전이야. 지금은 네 안전이 가장 중요해.”신무열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아린은 신무열의 따뜻한 배려를 느꼈다. 비록 신무열이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그녀의 건강을 걱정하는 것이라 해도 어떻게 되었든 신무열의 관심을 받는 것만으로도 그녀에겐 큰 위안이었다.그렇게 아린은 요한과 함께 실험실로 갔다.실험실에서 검사를 하던 연구원들은 모두 고개를 저었다.“아주 강력한 독입니다. 노석명이 개발한 독을 개량한 것이며, 지금으로선 해독제가 없습니다.”신무열의 얼굴은 어두워졌다.“노석명의 독은 이미 다 없어진 게 아니었나?”노석명은 처형되었고, 법로의 관심이 온지유와 별이에게 쏠리면서 Y국에는 더 이상 그런 독이 존재하지 않았다.“요한, 이 일을 추적해. Y국에 해가 되는 그 누구도 존재하지 못하게 하고, 국가와 국민의 안전을 지켜야 한다.”신무열은 차가운 눈빛을 띠며 단호하게 말했다.그리고 다른 연구원들에게도 명령을 내렸다.“어떤 방법이든 상관없다. 반드시 아린의 목숨을 구해!”“예!”연구원들은 그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다.아린은 마음속에 따뜻함을 느꼈다.“선생님, 제 목숨을 소중히 여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죽게 내버려두지 않으셔서요. 하지만... 저는 죽음이 두렵지 않아요.”아린은 이미 신무열에게 중요한 정보를 전했고, 그것으로 신무열이 대비할 수 있게 했다.그녀는 이미 명예롭게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세상에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신무열은 아린이 자신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그는 아린이 자신 때문에 죽게 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평
신무열은 Y국에서 높은 신분을 지니고 있지만 나라의 미래와 백성을 위해 자신의 격을 낮추고 직접 약초를 가르치고 재배법을 가르치며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기도 했다.그 시간 동안, 신무열은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었고, 아린에게도 작은 선물을 챙겨주었다. 신무열은 어떤 사람인가?그는 한 번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노력해도 마음을 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지금 이런 행동을 한다면 오히려 신무열의 마음속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망칠 뿐이었다.신무열은 그녀를 계속 싫어할 것이고 아린은 혼자서 그를 바라만 보는 삶을 살게될것이다.그럼에도 아린은 지금은 그들에게 협조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아린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무열 씨를 좋아하는 여자는 많은데 왜 저를 선택한 거죠? 저는 작은 인물이고, 아무런 배경도 없는데요.”“바로 네가 작은 인물이기 때문이지. 그래야 의심받지 않아. 정말 신무열을 영원히 네 곁에 두고 싶지 않나? 신무열은 뛰어난 사람이고 너와 그의 아이라면 최고의 유전자를 가질 텐데.”아린이 대답하지 않자 남자는 계속 그녀를 부추겼다.남자의 말들은 아린의 머릿속에서 수없이 되뇌어졌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신무열과 함께하는 것보다 미움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당신 말이 맞아요. 계획이 뭐죠? 말해줘요. 계획대로 따를게요.”그녀는 자신이 왜 선택되었는지도 알고 있었다. 작은 인물이기 때문에 조종하기 쉽고 조금의 이익으로도 매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계획은 내가 알려줄 거야. 하지만 그 전에, 너의 충성심을 위해...”‘푹!’남자는 말을 끝내지 않았다.아린은 피부에서 느껴오는 찌릿한 고통에 눈살을 찌푸렸다.아린은 자신에게 독이 주입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남자는 아린에게 위협하듯 말했다.“내 말을 어기기만 해봐. 이 독은 널 죽기보다도 못한 고통을 줄 테니까!”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아린은 견딜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머리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표정은 고통으로 일그러졌지
아린이 아직 입을 떼기도 전에 신무열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지금 나는 이미 헤연에게 약속 했어. 남자로서 한 말은 반드시 지켜야지. 게다가 난 혜연에게 특별히 불만도 없어.”아린은 숨이 막혔다.책임감 때문에 여자를 곁에 두지 않았던 신무열. 그리고 김혜연에게는 불만이 없다는 말에 더해 김혜연이 늘 신무열 곁에 있으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의 진심을 확인했다는 점에 속이 검게 타들어 갔다.“가까이 있는 자가 먼저 기회를 얻는다”는 말과 “오랜 시간이 지나야 진짜 모습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참으로 딱 들어맞았다.아린의 마음은 아팠다. 그녀는 평민일 뿐이었고 김혜연과는 신분 자체가 달랐다.신무열이 원하는 건 그와 나란히 설 수 있는 우수한 여성이자 내조자였지 빈민가 출신의 이름 없는 소녀는 아니었다.아린은 여러 해 동안 큰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들 사이의 신분 격차는 변할 리 없었다.“선생님, 당신이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축복할게요. 당신이 늘 행복하길 바라요.”이것이 아린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다.“고마워.”신무열도 그녀의 말에 감사를 표했다.아린은 돌아섰다.자신의 위치와 지위를 바꾸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 왔지만 목표가 사라진 지금은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졌다.신무열의 거처를 벗어난 아린은 얼마 가지 않아 무리에게 가로막혔다.그녀보다 키도 크고 체격이 다부진 남자들이 점점 다가왔다.아린은 본능적으로 총을 꺼내려 했지만 상대가 더 빨랐다.총구가 그녀의 머리에 겨눠지며 차갑고 위협적인 목소리가 들렸다.“죽기 싫다면 조용히 우리 말을 듣고 따라와라!”전쟁 중 매일 총탄에 대한 공포 속에 살았던 그녀였다. 몸은 총구를 두려워하고 있었지만 여긴 신무열의 구역이었다. 그녀 같은 작은 존재가 신무열에게 폐를 끼칠 순 없었다.아린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그들의 요구에 순응했다.얼마나 걸었는지 모른 채 끌려간 곳은 작은 방이었다. 그들은 무기를 꺼내 그녀를 겨눴다.“할 말이 있으면 똑바로 하세요. 괜히 쇼하지 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