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지유는 여진숙의 성격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단지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서였다.정미리는 원래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여진숙의 발언에 화가 치밀어 올라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이런 일이 있는데도 참 당당하네요. 착각하지 마요, 이 관계에서 잘못된 건 결혼 중에 다른 여자를 만나 임신까지 시킨 당신 아들이니까요!”여진숙이 반박했다.“당신 딸년이 애를 낳지 못하니까 내 아들이 겉도는 거 아니에요!”여이현이 차갑게 말했다.“그만해요!”여진숙은 점점 창백해지는 그의 얼굴을 보고 말을 멈추었다.“알았어, 그만할게. 얼른 침대에 가서 누워 있자.”이때 온경준이 말했다.“지유야, 이제 그만하고 돌아가자.”온지유도 이곳에서 백번 말해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았어요, 아빠.”그녀는 묵묵히 온경준의 곁으로 걸어갔다.그녀의 단호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여이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그녀를 끝까지 바라보았지만, 끝내 붙잡는 말을 하지 못했다.“이현아.”여진숙이 그를 부축하면서 불렀다. 주소영도 달려와서 함께 부축했다.“들어가자. 뭐 볼 게 있다고.”여이현은 두 사람을 밀어내며 냉정하게 말했다.“배 비서!”그동안 투명 인간처럼 가만히 있던 배진호가 급히 다가와서 말했다.“제가 부축할게요!”여이현은 배진호의 부축을 받으며 침대로 돌아갔다.여진숙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여이현은 자꾸만 그녀에게 거리를 두었다. 아무래도 전에 그녀가 너무 매정하게 군 탓일 것이다.그래서 그녀는 이제 성깔을 죽이고 여이현에게 잘해주려고 했다. 그런데도 여이현은 낯선 사람보다도 못한 대우를 해줬다.딱히 할 말이 없었던 여진숙은 주소영에게 물었다.“너 이름이 뭐라고 했지?”주소영은 여진숙이 온지유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자신감을 얻었다. 그래서 어른이 좋아할 만한 태도로 얌전하게 대했다.“주소영입니다.”여진숙이 다시 물었다.“소영아
여진숙은 창백한 안색의 여이현을 다시 바라보며 생각했다.‘이 아가씨를 좋아한다는 것은 아직 승아를 잊지 못했다는 뜻이겠지. 일을 더 쉽게 해결할 수 있겠어.’주소영은 여이현을 힐끔거리면서 여진숙에게 말했다.“제가 이현 오빠 곁에서 돌보고 있을까요?”“그럴 순 없지.”여진숙은 그녀가 이곳에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임신 중인 애가 간병은 무슨... 이현이를 돌봐 줄 사람은 많아. 넌 나랑 집에 돌아가자꾸나. 넌 네 몸만 잘 돌보면 돼.”주소영은 그래도 여이현을 돌보고 싶었다. 온지유가 없는 지금이 그의 곁에 있을 수 있는 최적의 기회였다. 하지만 여진숙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던 그녀는 순순히 머리를 끄덕였다.“네, 아주머니.”그녀의 눈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하지만 괜찮았다. 여이현이 퇴원하면 집에 돌아갈 것이고, 그때는 자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여진숙은 노승아를 생각하며 마음이 복잡했다. 여이현이 다치고 입원해 있는 상황에서 온지유와 완전히 틀어졌으니, 노승아가 오면 그 틈을 탈 수 있다고 생각했다.마음속으로 줄곧 노승아를 며느리로 인정했던 그녀는 급히 핸드폰을 꺼내 들고 메시지를 보냈다.[승아야, 이현이 다쳤어. 빨리 와줘.]같은 시각, 노승아는 촬영장에서 메이크업을 받고 있었다. 30분 후 아주 중요한 씬을 촬영해야 했다.이 드라마는 유명한 감독의 작품이다. 비록 그녀가 주인공은 아니지만, 비중이 꽤 큰 조연 역할을 맡았다. 사실상 조연의 캐릭터가 주연보다 좋아서 여이현이 특별히 얻어준 것이다.이 드라마가 방송되면 무조건 큰 히트를 칠 것이다. 그렇다면 이후 어떤 작품이든 출연할 기회가 생긴다.노승아는 성공을 위해 열심히 촬영에 임하고 있었다. 당분간은 여이현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 시기만 잘 넘기면 곧 여이현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여이현이 그녀를 이렇게까지 도왔으니, 그의 마음속에 그녀가 있다는 것은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었다. 조만간 이 이상의 관계도
노승아가 말했다.“저 병원에 가야 해요.”“승아 씨가 병원에 가면 촬영은 어떡해?”오랜 경력을 가진 감독조차도 병원을 핑계로 촬영을 중단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실은 이현 오빠가 다쳐서 입원했어요. 아무래도 걱정돼서 빨리 가 봐야 할 것 같아요.”감독은 여이현의 이름을 듣고 조금 물러섰다. 애초에 노승아는 여이현의 추천으로 이 드라마에 출연하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그래, 그럼 하루만 쉬지.”감독은 속으로 불만이 있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그러자 노승아는 웃으면서 말했다.“감사합니다, 감독님. 촬영이 끝나면 오빠랑 함께 식사 대접할게요.”노승아는 황급히 촬영장을 떠났다. 다른 배우들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감독님, 노승아 한 사람 때문에 저희 스케줄 다 엉망진창이에요. 저는 어머니가 아픈데도 돌아가지 못했는데, 왜 노승아만 특별 대우를 받는 거예요?”감독은 차갑게 대답했다.“노승아라서 그래. 내가 낙하산을 무슨 수로 이겨.”이 말에 배우들은 전부 입을 다물었다.“노승아는 도대체 뭐가 저렇게 당당할까요?”매니저의 말에 장다희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대답했다.“감독님이 저렇게 말씀하셨는데 어떡하겠어. 노승아는 우리랑 다르잖아.”“하긴, 아주 많이 다르죠. 노승아는 연기의 연자도 모르잖아요. 인공 눈물을 써야 눈물 흘릴 수 있는 주제에 무슨 촬영을 한다고...”장다희는 무표정한 얼굴로 현실을 받아들였다.“사람마다 타고난 운명이 다른 법이야. 어떤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주연인가 보지.”장다희는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왔다. 그녀는 노승아와 같은 사람들을 하도 많이 봐서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노승아는 첫 작품부터 중요한 배역을 맡았다. 이미 다른 배우들보다 몇 단계 위에 있다는 말이다.감독은 투자자의 낙하산인 그녀에게 언제나 특별 대우를 해왔다. 여이현의 눈치를 보면서 그녀에게만 최고의 스태프를 제공했다. 이건 주연도 없는 대우였다.노승아의 주위에는 또 여이현이 배치한 일고여덟 명의 조수가 있었다. 그중 아무도 그
아무리 화가 나도 자신의 몸을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 하지만 여이현은 배진호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온지유의 냉정한 뒷모습으로 가득했다.‘감히 나보다 먼저 등을 돌려?’여이현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온지유한테 전화해요.”배진호는 잠시 멍해졌다. 여이현이 무엇을 하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이 이 지경에 이른 것도 그에게는 큰 충격이었다.그동안 두 사람은 결혼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배진호는 온지유가 조용한 성격이라서 그런 줄 알았고, 여이현이 그녀의 생각을 존중해 그런 줄 알았다.하지만 결국 그것은 사랑 없는 결혼이었던 것이다.‘좀 안타깝네...’전에는 여이현이 온지유를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보니 그렇게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배진호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네, 대표님.”그는 온지유에게 전화를 걸었다.같은 시각, 온지유는 부모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일찍이 퇴원하고 싶어 했던 온경준은 골절이 심각하지 않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고 얼마 전 퇴원했다.병원에서 일어난 소란으로 인해 그들은 말을 잃었다. 표정도 잔뜩 처져 있었다.이때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장수희와 온채린은 명예훼손과 공공질서 위반 혐의로 경찰서에 있었고, 증거가 명확한 관계로 법적 책임을 져야 했다.경찰은 온지유에게 고소할 것이냐고 물었다. 온지유는 지금의 상황부터 정리한 후 경찰서에 가려고 했다.잠시 후 전화가 다시 울렸을 때 그녀는 당연히 경찰서에서 온 전화인 줄 알았다. 그래서 자리를 피하며 정미리에게 말했다.“엄마, 저 전화 좀 받을게요.”“그래.”정미리는 곧 이혼할 마당에 온지유가 시댁에 있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다.“지유야, 네 방은 금방 정리해 놓을게. 당분간 여기서 지내자.”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사모님...”배진호는 일단 입을 열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온지유는 배진호의 목소리를 알아채고 물었다.“무슨 일인가요?”그녀는
배진호는 다시 여이현을 바라보며 말했다.“스웨터는 왼쪽 드레스룸에 있으니, 도우미한테 말하면 된다고 하십니다.”여이현이 미간을 찌푸렸다.“외투는요? 베이지색 외투.”“그 외투는 옷장에 걸려있어요.”온지유가 전화 건너편에서 듣고 대답했다.“스웨터는 됐고 양복을 챙겨줘. 파란색 넥타이도 같이.”“하... 파란색 넥타이는 여러 개 있어요.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거죠?”“세로 줄무늬 있는 거.”“그건 넥타이 상자 28번째 칸에 있어요.”온지유는 이제 여이현의 질문을 예상한 듯 한꺼번에 말을 퍼부었다.“양복과 셔츠는 드라이클리닝 맡긴 걸 제외하고 모두 옷장에 있어요. 겨울옷은 제가 분류해서 드레스룸에 정리해 놨어요. 도우미 아주머니한테 말하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넥타이는 모두 같은 곳에 있고, 칸마다 색깔별로 분류해 뒀어요. 배 비서님이 가도 틀릴 일 없을 거예요...”여이현이 무엇을 묻든 온지유는 바로 답할 수 있었다. 그녀는 외투, 스웨터, 심지어 넥타이의 무늬와 손목시계의 브랜드까지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굳이 찾아가지 않아도 그녀는 술술 대답할 수 있었다. 여이현의 비서로 일한 3년 동안 그의 취향과 스타일을 완벽하게 파악한 덕분이었다.그녀는 이를 비서로서의 본분, 그리고 아내로서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온지유가 말을 마친 다음 전화 건너편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오랫동안 대답이 없자,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배 비서님, 더 필요한 게 있을까요?”배진호는 당황한 표정으로 여이현을 바라보았다. 여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온지유가 빈틈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온지유도 알았다. 여이현이 일부러 트집을 잡으려고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다른 일 없으면 이만 끊을게요.”온지유는 배진호가 대답할 틈도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 같으면 그녀는 여이현이 필요로 하는 것을 곧바로 배달해 줬을 것이다. 지금 와
“네, 그럼 부탁드릴게요.”배진호는 정중하게 말하며 여이현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여이현의 안색은 약간 풀렸고 그도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온지유는 원래 집에서 밥 먹으려고 했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침실을 정리하는 정미리에게 말했다.“엄마, 저 잠깐 나가 봐야 해서 먼저 식사하세요.”정미리가 고개를 들었다.“무슨 일이니?”“회사 일 때문에요.”정미리는 온지유에게 다가가 말했다.“지유야, 이만 퇴사하고 다른 일을 찾는 건 어떻겠니? 세상에 좋은 직장은 많단다.”이혼한 후에도 여이현의 곁에 남아서 일하는 건 아주 어색한 일이다. 그래서 정미리는 내심 그녀가 퇴사하기를 바랐다.“알겠어요.”온지유도 당연히 같은 생각이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여이현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니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단호한 정리였다.밖으로 나간 온지유는 다시 여이현의 집으로 돌아갔다. 도우미들은 여전히 그녀를 사모님이라고 부르면서 인사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온지유는 신발을 벗으며 도우미에게 물었다.“스웨터를 못 찾았다고요?”자초지종을 몰랐던 도우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무슨 스웨터요?”온지유는 고개를 들었다.“대표님이 찾아달라고 연락하지 않았나요?”“아뇨, 대표님은 전화가 없으셨는데...”온지유는 침묵에 잠겼다. 여이현이 애초에 전화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지유 씨?”한 여자의 목소리에 온지유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소영은 식탁에 앉아서 보양식을 먹고 있었다.온지유는 그녀의 차림새를 묵묵히 바라봤다. 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던 볼품없는 소녀가 이제는 명품을 걸치고 있었고 혈색도 부쩍 좋아졌다. 마치 이 집의 안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그녀는 이 집에서 살기로 했다. 이건 여진숙이 말을 꺼내고, 여이현이 묵인한 일이다.주소영은 손에 들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지유 씨라고 부르는 건 너무 서먹한 것 같아서 그냥 언니라고 부를게
온지유는 주소영의 행동을 말없이 주시했다. 아무리 곧 이혼할 사이라고 해도, 그녀가 썼던 침대에 다른 사람이 손대는 것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주소영이 침대에 손을 대려고 한 순간 그녀는 주소영의 손을 잡았다.“어떤 스웨터인지는 알아요?”주소영은 잠깐 멈칫하더니 아주 쉽게 대답했다.“그냥 스웨터일 뿐이잖아요. 저도 가져다줄 수 있어요.”주소영은 온지유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자신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온지유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이 자리에 앉고 싶은 거죠? 그러면 자격이 있는지 한 번 확인해 봐야겠어요.”그녀는 침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대표님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아주 명확해요. 예를 들어, 스웨터도 날에 따라 무슨 색깔을 입을지 달라져요. 잘못 고르면 아주 난감해질 거예요.”“헛소리하지 마요!”주소영은 당연히 믿지 않았다. 그녀는 온지유가 한 모든 말이 자신을 물러서게 하려는 속셈이라고 생각했다.“날씨가 추워졌으니, 오빠는 두꺼운 옷을 입고 싶어 할 거예요. 그냥 따뜻하기만 하면 돼요. 애도 아니고 설마 옷 색깔을 가리겠어요?”주소영은 옷장을 열었다. 옷장 안의 옷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그녀는 가장 눈에 띄는 스웨터와 외투를 골라서 들었다.“아무튼 이건 제가 가져다줄게요.”그녀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비록 여진숙은 집에서 쉬기만 하면 된다고 했지만, 그녀는 여이현과 함께 있는 편이 더 좋았다.‘만나지 않으면 언제 정이 생기겠어? 온지유는 비서 생활을 7년이나 했다고 했지? 그런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결혼할 수 있었던 거야.’그녀는 자신도 온지유처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젊고, 예쁘고, 열정도 있었다. 온지유처럼 평범한 여자가 가능하다면, 그녀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다.밖으로 나가는 주소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온지유는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여이현의 까다로운 성향을 생각하며 이내 결심했다.온지유는 옷장을 열어 겨울옷을 꺼내고, 그중 여이현이 찾았던
평소 온지유는 줄곧 조용하고 무심한 태도로 타인과의 마찰을 피했다. 주소영이 아무리 도를 넘더라도 그녀는 무심하게 넘기고는 했다.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주소영이 온지유를 얕보기 시작했고, 자신이 그녀보다 우월하다고 여겨 방자하게 굴었다.온지유가 갑자기 폭발해서 뺨을 때리자, 주소영은 오히려 어찌할 바를 몰랐다. 병실 안에는 여이현이 있었기에 그녀는 맞서기보다는 눈물을 글썽이며 위축된 목소리로 말했다.“제... 제가 잘못했어요.”온지유는 주소영이 연기하는 방식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참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아까랑 태도가 너무 다른데요? 주소영 씨는 제가 일부러 엿 먹인다고 했죠. 스스로 너무 대단하다고 착각하지 마요. 근본 없는 주제에 여씨 가문에 들어오자마자 안주인 행세를 하지도 말고요.”온지유의 말에 주소영은 분노를 억누르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의 자존심은 처참히 짓밟히고 말았다.온지유의 차가운 시선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언니, 제가 잘못했어요. 언니가 오해했어요. 제발 때리지 말아 주세요!”그 순간 병실 문이 열렸다. 여이현은 화가 난 상태로 주소영이 얼굴을 감싸고 우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선명한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여이현은 온지유를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그녀가 집에 다녀온 사실을 알고 있기에, 주소영이 병원에 온 것도 온지유가 알린 것으로 생각했다.그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온지유에게서는 손톱만큼의 질투도 보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녀는 그가 다른 여자와 만나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가 다른 여자에게 빠지고 무사히 이혼하는 것이 그녀의 소원일 것이다.“두 사람 여기서 뭐 하는 거야?”주소영은 서러운 표정으로 여이현에게 말했다.“제가 다 잘못했어요. 언니는 오해해서 그런 말을 한 거예요. 오빠를 불쾌하게 한 것도 제 잘못이에요. 하지만 언니가 일부러 저한테 거짓말을 해서 오빠를 불쾌하게 한 건..
정말 기막힌 우연이었다.남태건과 권다솔이 차를 지하 주차장에 세우고 걸어오는데 멀리서부터 배진호의 목소리가 들렸다.지금 배진호는 누군가와 부딪힌 차 문제로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그는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그쪽 차를 뒤에서 들이받은 게 맞고 사진도 찍었으니 보험 처리를 할게요.”“안 돼. 네가 보험 처리한다면 바로 넘어가 줄 것 같아? 난 그렇게 한가하지 않아. 이 차 뭔 줄 알아? 비싼 차야. 당장 1000만 원 물어내. 한 푼도 깎지 말고.”남자는 막무가내로 우겼다. 그는 심지어 옆에 서 있던 석규리에게까지 시비를 걸었다.“너희 둘 어디 결혼하러 가? 운전은 왜 그렇게 급하게 해? 제정신이야?”배진호는 속에서 불길이 치솟았지만 참고 견뎠다.“책임질 테니 말 좀 가려 해요. 인신공격도 삼가세요.”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권다솔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녀는 문득 회사가 막 출범하던 시절을 떠올렸다.그때 배진호는 사업을 키우기 위해 하루가 멀다 하고 술자리에 나가야 했다. 아마 고객들을 대할 때도 지금처럼 불편해도 참고 화가 나도 웃어넘겼을 것이다.그녀 어머니가 말했던 것 중 하나는 틀렸다. 배진호가 정말 그녀를 이용하려 했더라면 고객 붙잡느라 고생할 시간에 차라리 그녀의 집안에 매달렸을 테니 말이다.“내 차를 망가뜨려 놓고 내가 한두 마디 하는 것도 못 참아? 너랑 네 마누라가 뭐 그렇게 대단한 것들이라고!”남자가 계속 악담을 퍼부었다.“우린 부부 사이 아니에요.”배진호가 짧게 반박했다.“부부가 아니면 내연 관계냐? 아니면 왜 손을 잡고 다녀? 내가 보기엔 둘 다 멀쩡한 사람은 아닌 것 같네. 분명 매일 밤 한 이불 덮고 잘 거 아냐?”남자는 목청을 높여 일부러 주위 사람들 귀에 들어가도록 비아냥댔다.더는 참기 힘들었던 배진호가 경찰을 부르려 할 때, 그 남자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남태건을 발견했다.“어이쿠, 남 대표님! 여기 어쩐 일이세요?”그는 태도가 싹 바뀌어 허리를 굽혔다.남태건은
“생선구이 다 먹고 나서 1층 좀 더 둘러보고 싶었는데 네가 피곤해 보이네.”남태건은 권다솔의 눈 밑 다크서클을 보며 아쉬워도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권다솔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어제 잠을 잘 못 자서요. 집에 가서 좀 더 자지 않으면 너무 피곤할 것 같아요.”그러자 남태건은 미련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도 결국 인정했다.“그럼 내가 집에 데려다줄게. 우선 편히 쉬어.”그들은 더 이상 화장품을 고르지 않았다. 남태건이 아예 중장년층용 세트 전부를 싹 쓸어 담았다. 에센스 제품까지 통으로 챙기니 점원의 입꼬리가 귀 뒤까지 넘어갈 듯했다.“손님 정말 통 크시네요. 이렇게나 많은 세트라면 세 사람이 써도 다 못 쓸걸요?”점원이 감탄을 흘렸다.“어머니께 드리고 싶은데 어떤 걸 좋아하실지 몰라서요. 일단 다 사서 직접 써보시게 하려고요.”이렇게 말하며 그의 시선은 줄곧 권다솔에게 머물렀다.점원들은 눈치가 빨랐다. 입으로는 어머니라고 하지만 사실상 예비 장모님에게 바치는 선물이라는 의미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느 남자가 이렇게까지 신경을 쓸까?급기야 한 점원은 권다솔에게 다가와 치켜세웠다.“예비 신랑이 정말 좋네요. 요즘 같은 시대에 이렇게 신경 써주는 남자 찾기 힘들어요. 저도 애가 있지만 친정 갈 때 뭘 좀 챙기려 하면 남편은 내켜 하지도 않거든요.”그러자 권다솔이 고개를 저었다.“저희 그런 사이 아니에요. 그리고 이 세트들 제 카드로 결제할게요.”‘어차피 엄마한테 드릴 물건이니까...’점원 말대로라면 사위가 장모님을 위해 챙기는 선물이겠지만, 남태건과 그녀는 그저 친구 사이일 뿐 남의 돈을 이렇게 많이 쓸 수는 없었다.점원은 잠시 멈칫했다. 자신이 너무 들떴나 싶었다. 그래도 누가 결제하든 상관없었다. 팔기만 하면 되는 법이니까.카드 결제는 금방 끝났다. 잠시 후 남태건이 세트 박스를 다 포장해 들고 왔을 때, 권다솔의 손에 영수증이 있는 걸 발견했다.“왜 네가 결제했어?”남태건은 의아해했다.“원래도 엄마한테
“제가 무슨 서러울 게 있겠어요?”권다솔은 헛웃음을 지었다. 방금 전에 배진호를 본 건 맞지만, 본 건 본 거지 그렇게 넋 놓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배진호를 천천히 잊으려 하고 있었다. 인생은 길고 한 남자 때문에 평생 슬픔에 잠길 순 없는 법이다.‘조금씩 잊으면 되는 거야.’그녀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다짐했다.“원래는 너 호텔에 데려가서 밥 먹이려고 했는데, 네가 배고프다길래 그냥 이 상가에서 아무 가게나 들어왔어. 다솔아, 전에 네가 권씨 집안에 있을 때 이런 서러움 당한 적 있어?”남태건은 계속해서 그녀를 부추기는 말투를 이어갔다. 그의 의도는 분명했다. 이 모든 게 배진호 탓이라는 것이다.배진호의 가정형편은 평범했다. 그동안 돈을 꽤 모아두긴 했지만 집 사고 결혼하는 데 쓰고, 또 직접 회사를 운영해야 하니 형편이 팍팍했을 터였다.반면 오래 운영해 온 권씨 가문 같은 기업은 달랐다. 안정적인 현금 흐름과 배당금이 있고 집안에 고정 자산도 많았다. 상가 임대료만으로도 충분히 쓸 수 있을 정도니까.권다솔은 남태건의 속내를 알았지만 정말로 이게 서러울 일인지 의문이었다.“이 가게 생선이 아주 신선하고 손님도 많네요. 입맛 좀 바꿔보는 것도 나쁘지 않고요. 저 가끔은 노상에서 파는 간식도 사 먹어요.”특히 그녀와 배진호가 가장 힘들었던 시절엔 더욱 그랬다. 둘은 정말 바빴고 돈도 별로 없었으며 밤늦게 퇴근하니 집에 가서 요리할 시간이 없었다.그래서 집으로 가는 길에 간단히 사 먹곤 했다. 그 시절은 오히려 가볍고 한가로웠다. 지금 돌이켜봐도 권다솔은 전혀 후회하지 않았고 서러울 것도 없었다.‘그때가 훨씬 마음 편했어.’그녀는 속으로 담담히 생각했다.“노상 간식?”남태건의 눈가가 붉어졌다.“네가 나한테 시집오면 절대 이런 서러움 안 겪게 해줄게. 권다솔, 맹세하는데 너를 모두가 부러워할 사람으로 만들어줄 거야.”마침 그때 종업원이 생선구이를 내왔다. 이들이 시킨 건 국물이 있는 생선구이였는데, 펄펄 끓는 국물에서 나온 뜨거
배진호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방금 전 석규리 씨가 다솔 씨한테 뭐라고 했는지 기억해요?”“당연히 기억하죠.”석규리는 왜 배진호가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하지만 한 번 말했으면 두 번도 말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이번에는 배진호가 먼저 물어본 것이다.“권다솔 씨는 진호 씨와 이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남자를 만난 거니 좋은 여자가 아니에요. 아까 진호 씨도 직접 봤잖아요. 지금 당장은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계속 자신을 속일 순 없지 않나요?”석규리는 말을 하며 정미진 이야기를 꺼냈다.“만약 어머님께서 이걸 알면 분명 더 화낼 거예요.”“그래요. 다솔 씨랑 저 아직 이혼하지 않았어요. 석규리 씨, 저는 지금 기혼자예요. 이렇게 제 앞에서 이런 얘기 하는 걸 나서서 내연녀가 되려는 거라고 이해해도 되나요?”석규리의 얼굴은 금세 붉었다가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입술을 부들부들 떨었다. 내연녀라니, 얼마나 거북한 단어인가. 배진호는 어떻게 이렇게 불쾌한 표현으로 그녀를 묘사할 수 있을까?“우리 둘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볼 수 있나요...?”“다솔 씨와 그 남자는 훨씬 더 결백해요. 둘은 서로 껴안거나 옷차림 흐트러진 채 한 방에 있은 적도 없고, 게다가 다솔 씨 어머니는 자식한테 약을 먹이는 짓 따윈 하지 않아요.”배진호는 이 일을 떠올릴 때마다 화가 치밀었다. 요즘은 반려동물을 키울 때도 동물의 의견을 중요하게 여기는데, 정미진은 정말 온갖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석규리는 여전히 자신이 내연녀 짓을 했다는 걸 인정하지 않고 반박했다.“그렇다면 어머님께서 권다솔 씨를 싫어하는 건 분명 권다솔 씨한테 문제가 있다는 뜻 아니에요? 아니면 왜 두 분 사이가 이렇게 험악해졌겠어요?”이건 전형적인 피해자 유죄 논리였다.“저는 석규리 씨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 논리대로라면 그건 전부 석규리 씨 탓이라는 얘기겠네요. 집에 가서 곰곰이 생각해 보고 저랑은 좀 떨어져 지내줘요.”석규리는 한마디도
남태건은 배진호에게 도전적인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배진호 씨, 한 회사의 대표로서 이렇게 질척거리는 모습 보이는 건 별로 좋지 않지 않나요?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려고요?”배진호는 권다솔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명예 따위 신경 쓰지 않을 참이었다. 처음부터 회사를 키운 이유도 그녀에게 더 나은 생활을 마련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런 태도가 권다솔에게 불편과 피로만 안긴다면 그건 그냥 자기중심적인 욕심일 뿐이었다.“됐어요. 저 피곤해요. 어머님께 드릴 화장품 얼른 고르고 돌아가고 싶어요.”권다솔은 마지막으로 배진호를 한 번 바라봤다.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마음은 지금도 옅어지지 않았다. 이혼하게 된다 해도 다른 이가 배진호를 함부로 헐뜯는 걸 듣고 싶지 않았다.남태건은 재빨리 그녀의 손을 잡았다.“그럼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가까운 가게 들어가서 뭐라도 먹으면서 좀 쉬면 되잖아. 우리 둘밖에 없으니까 천천히 해도 돼.”석규리는 다가와 배진호의 팔을 끼고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진호 씨, 우리도 가서 밥 먹어요. 제가 찍어둔 립스틱 색상들이 있는데 성연 씨는 뭐가 좋은지 물어보고 싶어요.”“석규리 씨, 여긴 무대도 아니고 촬영장도 아니에요. 그런 행동은 하지 말아요.”배진호는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아무리 권다솔이 남태건과 함께 있어도 석규리와 유치한 신경전을 벌일 생각은 없었다. 둘 다 어른인데 이런 식으로 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저 권다솔이 행복하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여겼다.“진호 씨! 전 당신을 도우려고 하는 거예요.”석규리는 권다솔의 뒷모습을 가리켰다.“두 사람 아직 이혼 전이고, 결과가 나오기까지 기다려야 하잖아요. 그런데 벌써 다른 남자랑 다니는 여자가 뭐가 아쉬워요? 어머님 말씀이 맞아요, 저 여자는 정말...”짝!석규리는 얼어붙은 듯 얼굴을 감쌌다. 믿기지 않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지금... 저를 때린 거예요?”많은 사람이 오가는 쇼핑몰 한가운데서 배진호는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그녀에
권다솔은 발걸음을 멈췄다.고개를 돌려 배진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엔 믿기지 않는다는 감정이 가득했다. 배진호가 하는 말의 낱말 하나하나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 단어들이 합쳐진 문장은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그녀는 참지 못하고 되묻듯 말했다.“진호 씨 말은... 어머님이 약을 썼다는 뜻이에요? 그것도 그런 종류의 약을?”“네.”배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참 창피했다. 하지만 반드시 권다솔에게 알리고 싶었다. 이혼을 하든, 하지 않든, 적어도 오해는 풀고 싶었다.그리고 무엇보다, 권다솔 눈에 그가 감정을 농락하는 사람으로 비치는 건 바라지 않았다. 적어도 그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아줬으면 했다.“솔직히 그 말 믿기 어려워요. 저... 저는...”권다솔은 당장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했다. 그녀의 눈가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고, 마침내 그 눈물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그 순간 그녀는 잃은 아이를 떠올렸다.분명 아무 문제 없던 아이였다. 그녀의 몸 상태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정미진이 와서 돌봐주겠다고 한 뒤 이상하게도 아이를 잃었다.그때부터 의심은 있었지만, 동시에 그런 의심을 품은 자신이 부끄러웠다. 정미진이 아무리 그녀를 좋아하지 않아도 손주의 존재만큼은 중요하게 생각할 거라 여겼다.하지만 오늘 배진호의 말을 듣고 나니 자신이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미진은 그들이 이혼하도록 어떤 수단이라도 쓰는 사람이었다. 친아들에게 약을 먹일 정도라면 무슨 못할 일이 있을까. 이젠 증거가 필요 없었다.권다솔은 배진호의 손을 뿌리쳤다.“어머님이 약을 썼다고 해도 그게 무슨 소용이겠어요? 저는 두 사람이 서로 껴안은 걸 직접 봤어요. 진호 씨, 설마 그날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할 생각이에요? 지금은 없다 해도 앞으로 없으리란 보장은 없잖아요.”“다솔 씨! 저를 믿지 않는 거예요?”배진호의 눈빛에는 깊은 괴로움이 어렸다.권다솔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배진호를 믿지 않았다면 애초에 결혼하
“괜찮습니다. 전혀 번거롭지 않아요.”석규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배진호와 오래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뻤다. 더 함께 있고 싶은 마당에 어찌 번거롭다는 생각이 들겠는가?배성연은 난처한 듯 미소 지었다.“오빠, 우리 둘은 비슷한 점이 많아. 규리 씨는 내가 뭘 원하는지 알고 있어.”배진호는 말없이 조용히 돌아서 나갔다. 어차피 다 정해진 상황이었다.그가 거절하기만 하면 불효자 취급을 당할 것이고, 그러면 정미진은 약도 주사도 거부할 게 뻔했다. 불효 소리를 듣는 건 상관없지만 정미진이 제대로 치료를 받지 않으면 정말 문제가 생긴다.‘정말로 이 길밖에 없는 건가.’석규리는 들뜬 표정으로 그를 뒤따랐다.쇼핑몰로 향하는 길 내내 그녀는 쉴 새 없이 말을 이어갔지만, 배진호는 전혀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형식적으로 나온 것일 뿐이었다. 대체 이 자리가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쇼핑몰 1층에는 다양한 화장품 매장이 있었다. 석규리는 무심코 립스틱 두 개를 골라 배진호에게 물었다.“진호 씨, 어떤 색이 더 괜찮아요?”배진호는 힐끗 보며 무심하게 답했다.“똑같지 않아요?”“아니에요. 이건 토마토 레드고, 이건 자몽 레드라서 달라요.”“결국 다 빨간색 아니냐는 겁니다.”배진호는 전혀 인내심을 보이지 않았다.석규리는 어쩔 수 없이 립스틱을 내려놓고 다른 제품을 골랐다.파운데이션을 고르던 중 그녀는 우연히 고개를 들었고, 멀리서 권다솔과 낯선 남자가 함께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그 순간 석규리의 눈에 강렬한 기쁨이 피어올랐다. 권다솔이 이렇게 빨리 다른 남자를 찾다니 말이다. 안 그래도 배진호 앞에서 권다솔을 깎아내릴 궁리를 하고 있었는데, 이제 그가 직접 확인하게 된 셈이다.‘좋아, 이걸로 변명도 못 하겠지.’석규리는 허둥지둥 돌아서서 배진호의 소매를 잡았다.“여긴 제가 원하는 게 없네요. 우리 다른 가게 한번 볼까요?”“정말 번거롭네요.”배진호의 목소리에는 인내심이 바닥난 기색이 역력했다.그는 석규리의 손을 뿌
그와 권다솔은 진심으로 사랑했고 서로에게 많은 것을 바쳤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호구 짓’ 같은 말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다솔 씨는 한 번도 나를 배신하거나 잘못한 적 없어. 오히려 내가 잘못했지. 그리고 어머니, 친아들한테 약을 먹이는 짓은 어머니밖에 못 할 겁니다.”배진호는 병상에 누운 어머니를 바라보았다.깊은 슬픔과 무력감이 그를 짓눌렀다.그는 지금도 어머니가 자기에게 약을 먹였다는 사실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하지만 어머니가 아픈 상황에서 아들로서 그 과거를 들추거나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결국 모든 감정을 억누르며 버틸 수밖에 없었고 그 기분은 정말 참기 어려웠다.배성연은 약을 먹인 일에 대해선 몰랐다. 그녀는 정미진을 바라보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처음 자신을 불렀을 때 이런 일까지 있었다는 말은 전혀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이때 정미진은 갑자기 심하게 기침하기 시작했고 석규리는 급히 다가가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아주머니, 의사 선생님이 그러셨잖아요. 지금 몸 상태로는 절대 화내면 안 된다고요. 일단 진정하시고 쉬셔야죠.”“규리야, 봤지? 내가 이렇게 병상에 누워 아무것도 못 하는데도 일부러 나를 화나게 만드는 사람이 있어.”정미진은 특정 인물을 지목하진 않았지만 시선은 아들을 향하고 있었다.배진호는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아들이 병실에 있는 게 기분만 나빠진다면 차라리 나가는 게 낫겠어요. 그래야 어머니도 마음 편히 요양할 수 있겠죠.”그는 더 이상 이곳에서 억눌린 채로 있고 싶지 않았다. 상황이 계속된다면 정말로 견디기 어려울 것 같았다.왜 자신은 이런 부모를 만나서 이 고생을 해야 하는지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가, 가려거든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마. 네가 어릴 때 온갖 고생 다 하며 널 키웠는데 이젠 내가 늙고 병드니까 짐짝 취급을 받는구나. 됐다, 너희들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아도 좋아. 내가 죽더라도 너는 부르지 않을 거야. 밖에서 네 맘대로 살고, 네가 행복하면 그걸로 됐
권다솔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사실 그녀도 아이를 정말 좋아했다. 임신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는 너무나도 기뻤다.그런데 결과는?아이를 잃었고 깊이 사랑했던 남편도 잃었다. 한때 행복했던 순간들은 마치 환상처럼 손가락으로 살짝만 건드려도 깨져버렸고 남은 것은 산산조각 난 유리 조각들뿐이었다.“미안해. 내가 괜히 네 아픈 기억을 건드렸어. 다 내 잘못이야.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바보 같이...”남태건은 점점 초조해지며 자신의 뺨을 때렸다.두 번째로 자신을 때리려 했지만 권다솔은 그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그러지 마세요. 태건 씨를 탓하려는 게 아니에요. 이건 태건 씨 잘못이 아니잖아요.”그녀가 아이를 잃은 건 남태건과 전혀 상관이 없었다.게다가 방금 했던 말도 그녀에게 크게 상처가 되지 않았다. 아이를 잃었다고 해서 주변 모든 사람이 그녀 앞에서 아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건 현실적이지 않았다.“그래도 네가 힘들어할까 봐 걱정돼. 다솔아, 기분이 안 좋으면 마음껏 화를 내. 나를 화풀이 대상으로 써도 괜찮아. 난 널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어.”남태건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권다솔은 휴대폰 잠금을 해제하며 시간을 확인하려 했지만 화면에는 끝없이 많은 메시지로 가득 차 있었다.모두 배진호가 보낸 메시지였다.그렇게 많은 메시지를 보냈지만 그녀는 단 하나도 읽고 싶지 않았다.권다솔은 모든 메시지를 선택하고 삭제 버튼을 눌렀다.남태건은 계속해서 그녀의 휴대폰을 흘끗거렸다.각도상 화면의 글씨는 보이지 않았지만 이 시점에 권다솔에게 장문의 메시지를 보낼 사람은 한 사람뿐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배진호다!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뒤바꼈다. 권다솔이 유산한 이후로 배진호는 남태건과 비교할 자격조차 없게 되었다.방금 일부러 떠본 결과 권다솔은 아직도 그 아이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는 게 분명했다.두 사람 사이에는 생명의 무게가 가로막혀 있고 정미진이 적극적으로 방해하고 있는 상황에서 둘이 다시 함께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