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연이 이번 연회에 초대된 것은 최근 B시에서 벌어진 소동 속에서 그녀가 억울하게 누명을 썼기 때문이다. 정부는 HT그룹이 무너진 후에도 B시의 주요 납세자인 DS그룹에게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래서 하연을 달래기 위한 목적으로 이번 자리를 마련한 것이었다. 연회는 세 개의 테이블로 나뉘어 있었고, 각 테이블은 병풍으로 가려져 있으면서도 약간의 틈이 있었다. 주경미가 인사말을 마치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식사가 시작되었다.참석자들은 모두 유명 인사들이었고, 부상혁을 아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리하여 부상혁이 연회에 참석한 것에 놀란 몇몇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늘 오전에 FL그룹의 준공식 라이브를 봤는데, 저녁에 부 대표님을 직접 뵙게 됐네요. 정말 인연이군요. 오늘 이곳에는 무슨 일로 오셨나요?”주경미가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왔다는 것은 알려졌지만, 부상혁이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궁금해하는 분위기였다.상혁은 와인잔을 들고 무심한 태도로 말했다. “우연히 사모님을 만나서 저녁 식사에 들른 겁니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눈치 빠른 사람들은 그가 누구를 위해 여기에 왔는지 쉽게 알아챘다.하연이 연회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을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을 뿐, 그녀의 문제가 해결되었음을 의미했다. 부상혁과 최하연의 이별 소문이 무성했지만, 둘이 함께 연회에 참석했다는 것은 만남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했다.주경미 역시 이 상황을 눈치챘다. 그녀는 하연의 옆자리에 앉아, 두 사람을 사이에 두고 가까운 거리에서 주의 깊게 살피기 시작했다. “최 사장님, 제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소녀 같은 느낌이네요. 아주 똑똑해 보이기도 하고요. 최씨 가문의 아가씨로서의 기품이 돋보여요.”하연은 정중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과찬이십니다, 사모님. 감사합니다.”주경미는 상혁 쪽을 힐끔 보며 말했다. 그는 옆 테이블에 앉아 있었고, 자주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몇 년 전, 우리 남편이 B시에서 근무할 때, 우리 B시의 기
하연의 말을 듣고 주경미는 의외라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최하연과 부상혁과의 관계가 이미 세간에 알려져 있는데, 지금은 두 사람 사이가 이렇게까지 멀어졌다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주경미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HT그룹의 몰락에 부상혁이 큰 역할을 했고, 그 과정에서 정태산과 얽히며 여러 사건을 일으켰다. 주경미는 남편이 더 이상 위험에 빠지지 않길 바라며, 최하연과 부상혁이 잘 안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그럼 내가 힘써서 도와줄게요.” 주경미는 미소를 띠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마침 내가 아는 훌륭한 젊은이들이 있는데, 한번 볼래요?”“좋아요.” 하연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주경미가 아는 청년들은 모두 최고급 재벌 2세들이었다. 그 청년들의 조건이 좋지 않다고 하더라도, 조상 대대로 화려한 영광을 누린 가문의 출신들이었다. 그중에는 최씨 가문과 견줄만한 이들도 있었다. 주경미는 사진을 넘기다 한 장의 사진에서 멈췄다. “어, 이분은... 한 검사장님?” 사진 속 남자는 바로 한창명이었다. 그는 검은 눈썹과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정직한 인상으로 유명했다. “최 사장님, 혹시 이 청년을 알아요? 한창명이라고 해요. 이번에 파견을 받아서 B시에 왔고요. B시에서 다시 수도로 돌아가면 연이어 승진할 거예요. 이 청년은 앞날이 창창하죠. 나이가 좀 있긴 한데, 고려해 볼 만한 인물이에요.” 주경미는 부상혁보다 한창명을 더 선호했다. 한창명은 정태산의 직속 라인에 있었기 때문에 더 안심할 수 있었다.“최 사장님도 명창이가 맘에 들어요?” 주경미가 하연의 반응을 살피며 물었다. “좋다고만 하면, 내가 당장 명창이를 부를게요.”하연은 자연스럽게 상혁 쪽을 힐끔 바라봤는데, 그는 옆 사람과 비즈니스 대화를 나누며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쪽 상황을 아는지에 대한 여부는 알 수 없었다. 하연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입을 열었다. “좋아요.”주경미는 매우 기뻐하며 한창명에게 연락했다.상혁과 대화를
이 말이 상혁의 귀에 들어갔을 때, 그것은 마치 부씨 가문의 복잡한 관계를 은근히 비꼬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연은 더 이상 대응하고 싶지 않았고, 지쳐가는 마음을 느꼈다.상혁의 눈빛이 어두워졌고, 거친 손길로 하연을 자신의 품속으로 확 끌어안으며, 날카롭게 말했다.“그러면 한창명에게 물어보지 그래? 그 사람이 너를 위해 자신의 앞날을 포기할 수 있는지. 설령 그렇다 해도, 끝까지 널 지킬 수 있을 것 같아?”하연은 창피하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미 말했잖아요! 나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요! 당신만 아니었으면, 애초에 이런 곤경에 빠지지도 않았을 거예요!”“그래서 후회해?” 상혁이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밀착시키며 낮게 속삭였다. “너와 나 사이, 단지 몇 년간의 얽힘이 아니라, 그 전부터 수십 년간 이어져 온 거잖아. 네가 지우고 싶다고 해서 지워질 사이가 아니라는 뜻이지.” 좁은 공간에서 두 사람의 목소리가 얽히자, 하연은 몸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상혁은 마치 거대한 산처럼 하연을 압도하며 밀어붙였다.“나와 헤어지고 싶다면, 먼저 이 모든 걸 정리해.”하연은 상혁이 하는 말에 마음 한구석이 아팠다. ‘내가 헤어진다는 말을 꺼낸 건 그저 내 순간적인 감정이었을 뿐인데, 지금 이 나쁜 놈은 나를 이렇게까지 몰아붙이고 있어!!’ “먼저 나를 놓아줘요. 밖에 사람도...” 그녀는 상혁의 귀에 대고 속삭이며 얼굴을 빨갛게 붉혔다.바깥에서 오가는 발소리와 대화 소리, 이 모든 상황은 더욱 긴장감 넘치고 금지된 것처럼 느껴졌다. 상혁은 하연의 머리를 꼭 붙잡고, 일부러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떨어져 있는 동안, 난 네가 너무 그리웠어. 넌 나를 그리워하지 않았어?”하연은 억지로 침착하게 말했다. “안 그리웠어요!”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상혁은 더욱 강하게 하연을 끌어안았고, 두 사람은 옷 너머로 서로의 뜨거운 심장 박동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다시 대답해. 그리웠어, 안 그리웠어?”하연은 다리 사이에 느껴지는 상혁의
밖에 있는 여자들은 ‘그런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화장을 고치고 다시 자리를 향해 나섰다.하연은 상혁이 이곳에서 이렇게 대담하게 행동할 줄 몰랐기에 몸을 지탱할 힘도 없이 그의 품에 기댄 채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미 쉬어 있었다.상혁은 다리를 살짝 들어 올리며 속삭였다. “왜 울어? 여긴 집이 아니야, 소리 내면 안 돼.”하연의 집이나 상혁의 집에서는 공간이 넓어 목소리가 새어나갈 걱정이 없었다. 그럴 때마다 상혁은 하연의 목소리를 좋아했다. 그녀가 목이 쉬어가며 간절하게 애원하고, 때론 투정 부리는 그 목소리를.상혁은 이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밖에 나가면 주경미 사모님에게 뭐라고 말할 거야?”하연은 이를 악물며 대꾸했다. “당신이 화장실에서 여자랑 바람피웠다고 말할 거예요.”상혁은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묻는다. “네 이름도 같이?”하연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렇게 큰소리치고 싶다면 해봐요.”상혁은 하연의 힘없는 반응에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한층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래기 시작했다. “한창명은 너에게 맞지 않아, 연아. 한서준이 널 끌어들인 건, 내가 반드시 뼈저리게 후회하게 할 거야. 그리고 왕진을 찾았어, 병원에서 자기 딸과 함께 있어. 시간 될 때 한 번 들러봐.”그는 모든 것이 철저하게 계획된 상태였음을 밝혔다.하연은 상혁의 주도면밀함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하연의 머릿속이 하얘지고, 몸도 덩달아 흔들렸다. 상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간신히 제압했다.바로 그때, 밖에서 식당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 사장님, 여기 계세요? 주경미 사모님께서 찾으십니다.”하연은 화장실에서 너무 오래 머물렀다.그녀가 말을 잇지 못하자, 상혁이 재촉했다. “대답해.”하연은 온 힘을 다해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금방 나가요.”하지만, 상혁의 손길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고, 하연은 간신히 신음을 참았다.식당 직원은 다시 한번 말했다. “주경미 사
상혁도 그 분위기를 감지한 듯, 고개를 돌려 하연을 바라보았다.말은 없었지만, 하연은 상혁이 자신을 살피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먼저 손을 내밀었다. “한 검사장님, 안녕하세요.”하연이 먼저 인사를 건네자, 상혁은 더 이상 머물지 않고 출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뒷모습은 망설임 없이 단호했다.한창명도 손을 내밀며 맞잡았다. “하연 씨, 아니 최 사장님이라고 불러야겠네요? 요즘 명성이 대단하던데요.”그의 말투는 공적이었는데, 하연은 곁에 서 있는 이현오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보았다. “그렇군요, 한 검사장님께서도 저를 알고 계시다니, 영광입니다.”이현오는 하연의 시선을 피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이를 눈치채지 못한 주경미가 대화를 가로막으며 말했다. “아유, 창명아, 여자랑 얘기할 때도 일에 관한 말을 하다니, 어서 들어와 앉거라.”주경미는 부상혁보다 한창명을 더 좋아한다.하연은 한창명을 처음 보았지만, 그의 이름은 여러 번 들어보았다. 한창명은 정직하고 영향력 있는 인물로 유명했다. 하연이 실제로 마주한 한창명은 소문 그대로였다. 단정하고 성실한 모습, 부상혁의 온화함보다는 진지함과 엄격함이 더 두드러지는 사람이었다.한창명은 하연에게 사과하며 차를 따랐다. “아까는 실례했습니다. 최 사장님께 차를 올리겠습니다.”한창명도 하연을 처음 대면했지만, 사진으로만 보던 그녀는 현실에서 훨씬 생기 넘쳤다. 주경미는 이 둘을 잘 엮기 위해, 옆에서 휴게실을 열어놓고 가벼운 게임을 제안하며 분위기를 풀어갔다. 하연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의미심장하게 한창명의 곁에 있는 이현오를 바라보았다. “이 늦은 시간에 비서까지 대동하셨군요. 업무가 있으셨나요?”한창명은 그녀의 시선을 따라 이현오를 힐끗 보았다. “오기 전에 일이 좀 있었는데, 지금은 다 처리됐습니다.”“이 비서, 먼저 돌아가도 돼.”이현오는 긴장한 얼굴로 하연을 보며 다시 한번 당부했다. “검사장님, 몸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너무 무리하지
하연은 예상 밖이었다. 그녀는 이 일 뒤에 이런 사정들이 있을 줄은 몰랐다.“아까 보니까, 최 사장님과 부 대표님의 사이가 별로 안 좋은 것 같던데요?” 한창명은 약간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는 다른 사람의 감정사를 엿볼 생각이 없었지만, 이번 사건이 끝나지 않은 듯해서 호기심이 생겼다. 부상혁과 최하연이 대체 무엇을 하려는 건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 하연을 만나기로 했다.하연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한창명은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왜 웃으시죠?” “한 검사장님, 정말 예리하시네요. 좀 더 일찍 뵐걸 그랬어요. 지난번에 한 검사장님을 만났다면, 그렇게 당하지도 않았을 테니까요.”“무슨 뜻이죠?”“너무 분명하게 말하면 재미없잖아요. 한 검사장님은 수사하는 걸 좋아하시니까, 한 번 해보시죠? 제가 제공한 정보가 큰 도움이 될 수도 있어요.”하연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 검사장님, 주경미 사모님께 저는 먼저 가보겠다고 전해주세요. 다음 만남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하연은 긴 복도를 따라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그때, 모퉁이에서 한 인물이 나타났고, 떨리는 목소리가 뒤따라왔다.“최 사장님...”이현오였는데, 아예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이현오의 영리한 얼굴은 걱정과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최 사장님, 지난번 일은 제가 선을 넘었습니다. 술을 마셔서 정신이 없었을 뿐입니다. 사과드리러 왔어요. 최 사장님, 넓은 마음으로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하연은 한 발 뒤로 물러서며 차갑게 그를 바라보았다. “이 비서님, 그때는 무섭지 않으셨나 보네요. 이제 와서 사과하는 건, 너무 늦은 거 아닌가요?”그날 손이현이 없었다면, 하연이는 정말 큰일이 났을 것이다.이현오는 처음 B시에 왔기에 최하연의 신분을 몰랐고, 그녀가 한창명과 직접적으로 얽힐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현오는 갑자기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을 뻔했다.“적당한 기회를 찾지 못했을 뿐입니다.” 이현오는 손을 비비
상혁의 얼굴은 물처럼 차분했다. 그는 하연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조용히 차 문을 열며 말했다. “타.”하연은 국세청 직원 김은석이 데려다줬기 때문에 차를 가지고 오지 않았다. 그녀는 보는 눈이 많은 상황에서 계속 상혁과 대치할 수 없어 말없이 차에 올랐다. 운전기사는 칸막이를 올려 모든 소리를 차단했다.“방금 이현오가 왜 널 찾았어?” 상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하연은 시선을 허공에 두며 마음속의 분노를 억눌렀다. “별거 아니에요.”“이현오가 널 보는 눈빛이 이상했어. 내가 조사할까, 아니면 네가 직접 말할래?” 상혁은 이미 그 상황을 눈치챘지만, 많은 사람 앞이라 참았던 것이다.하연은 상혁이 조사하면 모르는 게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뒷좌석에 기대며 대답했다. “한창명이 나한테 좋은 인상을 받았나 봐요. 그래서 이 비서에게 다음에 만날 시간을 잡으라고 한 거죠.”말이 끝나자마자 하연의 팔에 통증이 느껴졌다. 상혁이 하연을 강하게 당겨 품에 안았고, 강제로 그녀의 다리를 벌려 무릎 위에 앉혔다.상혁은 하연의 얼굴을 똑바로 보게 했다. “거짓말.”“부 대표님께서 저와 다른 남자의 만남을 허락하신 거잖아요. 제 매력에 대해선 인정하시는 거 아니었나요?” 두 사람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들의 눈빛 속에는 집착과 고집이 숨겨져 있었다. “말했잖아, 한창명은 너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상혁은 등을 기대며 다리를 흔들었다. “이현오는 이미 밖에 나와 있었어. 한참을 서성이다가 갔지. 그런데 한창명이 보냈다고?” 하연은 상혁이 처음부터 떠나지 않고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거짓말이 들통난 하연은 할 수 없이 설명했다. “서태진의 약점을 잡기 위해서 이현오에게 접근했었어요. 이현오의 사무실에서 이현오가 나를 추행하려 했고요. 아까 와서 그 일을 비밀로 해달라고 빌더군요.”하연은 일부러 부남준의 존재를 생략했는데, 설명이 너무 복잡해지기 때문이었다.그녀는 마치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무심하게 말했
하연은 밤새 바쁘게 일을 하고 나서 정말 피곤했다. 집에서 일하는 가정부의 안내로 집에 들어서자마자, 창가에 서서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한 최하경을 보았다.“하경 오빠?”하경은 하연의 목소리를 듣고도 놀라지 않았다. “상혁이가 너를 데려다줬어?”차의 불빛이 밝았기 때문에 하경은 이미 모든 것을 다 보았다.하연은 발끝을 바라보며 약간 어색하게 말했다. “나와 상혁 오빠의 사이가 좀 복잡해졌어요.”하경은 하연 앞으로 다가가 동생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며 무겁게 말했다. “복잡해진 건 너희가 아니야. 상혁이가 복잡해진 거지. 상혁이 너에게 한 가지를 숨겼다면, 앞으로도 더 많은 걸 숨길 수 있어. 잘 생각해서 계속할지 말지 결정해.”하경이 상혁에 대해 이렇게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이 의외였던 하연은 물었다. “오빠, 혹시 무슨 일 있었어요?”하경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며칠 전 하연과 헤어진 후 바로 호텔로 가 상혁을 찾아갔던 일을 떠올렸다.그때, 하경은 책상에 손을 짚고 상혁을 몰아붙였다. “네가 내 프로그램을 해킹했다는 게 말이 돼? 솔직히 말해, 해킹한 사람이 너 맞아?”상혁은 전혀 놀라지 않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하경아, 나도 전에 컴퓨터공학 전공했었잖아.”“그건 나도 알지. 하지만 너는 이미 전공을 바꿨고, 당시 네 실력으로는 지금 내 프로그램을 해킹하는 건 불가능했을 텐데, 어떻게 한 거야?”하경은 강하게 몰아붙였다. 상혁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에 좌절감이 밀려오는 동시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 경쟁심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정말 이렇게 부족한 사람인가'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취미로 가끔 연구했어. 하경아, 진정해.”상혁은 업무가 바쁜 듯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려 하지 않았다.하경은 상혁이 돌아서는 뒷모습을 보며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상혁아, 우리는 오랜 친구였고, 학창 시절부터 친형제 같았어.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 내가 너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게 별로 없네. 너는 너무 많은 일들을
부동건은 갑작스레 거칠게 기침을 터뜨렸다. “컥”‘피 맛...?’ 목 안에서 치밀어 오르는 피비린내를 억지로 삼켰다. 손등에 핏줄이 선명히 드러나고, 이성의 끈은 이미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부동건의 시선이 천천히 송혜선과 조봉규를 향했다. ‘죽여버리고 싶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너희들... 너희들...” 부동건의 입술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송혜선은 극도의 공포에 휩싸였다. ‘이건 아니야... 이렇게 끝나면 안 돼...’ 그녀는 급히 앞으로 다가가 부동건의 팔을 붙잡았다. “회장님... 우리, 조 선생님이랑 그냥 산후 회복 얘기하던 중이었어요. 진짜예요, 저희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부동건의 손이 송혜선의 뺨을 후려쳤다. 짝! 순간 정적. 강하게 내리친 손바닥 소리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숨을 멈춘 듯 조용해졌다. 송혜선의 얼굴 한쪽이 순식간에 붉게 부어올랐다. 눈가가 덜덜 떨리며, 눈물도 같이 맺혔다. “이 천하의... 배은망덕 같은 것. 내가 너를 어떻게 믿었는데... 감히 날 기만해?” 뒤에 서 있던 하객들 사이에서도 탄식이 흘러나왔다. “저 정도였어?” “저게 진짜였네... 소문이 아니고...” “...”송혜선은 뺨의 통증을 애써 무시한 채, 다시 붙잡았다. “회장님, 제발... 오해예요. 저희 그런 사이 아니에요. 저는... 당신뿐이었어요.” 그러나 부동건은 그 손마저 거칠게 뿌리쳤다. 그리고는 힘껏 송혜선의 복부를 발로 찼다. 퍽!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송혜선은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조봉규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아니야... 지금 나섰다간 나도 끝장이야.’ 한 걸음 다가가려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회... 회장님... 저희...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하지만 그 한마디가 기름을 붓는 꼴이 됐다. 부동건은 그대로 조
일 순간 충격의 정점이었다.부동건은 들고 있던 와인잔을 그대로 바닥에 내던졌다. 쨍그랑! 깨지는 소리와 동시에 모든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저... 저런 미친...!” 그는 화면을 가리키며, 얼굴을 붉힌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숨이 거칠게 턱 끝까지 차올랐다. ‘송혜선... 네가 감히!’ 주변 하객들도 이미 술렁이기 시작했다. “저게 진짜야?” “부 회장님 딸이... 아니라고?” “와... 이건 완전히 생각지도 못한 미친 패륜이야, 상상도 못 했어.” 오늘의 연회는 더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지만, 이제 와선 최악의 스캔들 파티가 되어버렸다. ‘이 연회가... 전부 거짓된 일 때문에 생긴 일이란 말이야?’ ‘우리, 사기당한 거네. 다 같이.’ 그때 스크린이 멈췄고, 연회장 전체의 조명이 다시 환히 켜졌다. 하객들은 본능적으로 두리번거리며 부동건을 찾았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부동건은 아무런 대답 없이 어금니를 꽉 물고, 몸을 떨며 계단 쪽으로 향했다. 하객들은 그 뒤를 따라붙었다. ‘뭔가 일어나겠군...’ ‘이번엔 진짜 끝장이다.’ ...같은 시각, 2층 방 안. 송혜선은 조봉규의 손등을 다독이며 조용히 말했다. “조금만 참아. 며칠만 지나면 내가 다시 올게.” 조봉규는 싱긋 웃으며, 그녀의 허벅지를 장난스럽게 움켜쥐었다. “응. 기다릴게, 자기.”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문이 거칠게 흔들렸고,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쾅!! “송혜선! 당장 안 나와?!” 송혜선의 온몸이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조봉규의 팔을 꽉 잡았다. ‘망했다.’ “어떡해, 부동건이 올라왔어.” 두 사람은 당황하며 방 안을 둘러봤지만, 창문 하나 없는 좁은 방엔 도망칠 곳조차 없었다. ‘안 돼... 이렇게 들키면, 끝장이야. 정말 끝이야.’ 송혜선은 급하게 숨을 고르며 애써 이성을 붙잡으려 했다. ‘진정해. 침착해야 돼.
연회장 안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부동건은 손에 잔을 들고, 연신 들어오는 축하 인사에 밝은 표정으로 답하고 있었다. “회장님, 따님이 너무 예뻐요. 축하드립니다!” “아이고, 이런 경사는 자주 있어야죠!” ‘그래, 이 정도면 완벽하지. 오늘은 그 누구도 나를 흔들 수 없어.’ 그렇게 술이 한 잔, 두 잔 더해지며 연회장의 분위기도 점점 무르익고 있었다. 그때, 갑작스레 모든 조명이 꺼졌다. 탁! “어, 뭐야?” “불 꺼졌어! 왜 이래?” “아야, 누가 내 발 밟았어!” “...”순식간에 어둠이 덮친 연회장. 사람들의 놀란 목소리와 웅성거림이 퍼졌다. 잔을 들고 있던 부동건은 순간 정지된 듯 멈췄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당장 가서 확인해봐!” “네, 회장님!” 직원들이 급히 움직였고, 부동건은 진정시키려는 듯 손을 들고 말했다. “여러분, 당황하지 마시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전기 쪽 문제인 것 같습니다. 금방 복구됩니다.” 사람들은 잠시 멈춰 서서 어둠 속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그 순간, 연회장 한쪽 벽면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이 조용히 켜졌다. “위이잉...” 어둠 속에서 갑작스레 터진 화면의 빛에 모두가 눈을 찌푸리며 반사적으로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 빛이 익숙해질 무렵, 누군가가 터트린 외마디 감탄에, 시선이 일제히 스크린으로 향했다. “어... 저거 뭐야? 헉, 저게... 말이 돼?” 그리고, 그 스크린 안에 있는 건... 분명 두 남녀의 은밀한 장면이었다. 화면 속, 분명히 누군가를 알아본 듯한 목소리가 터졌다. “저 여자... 그분 아니야?” “옆에 있는 남자는...?” “헐, 이건 진짜 레전드다.” “아, 눈 버렸어. 이게 뭐야, 이게...” “...”사람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순식간에 연회장은 도저히 되돌릴 수 없는 혼돈의 도가니로 빠져들고 있었다.사람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송혜선이 복도 입구에 막 다다랐을 때였다. 갑작스레 어디선가 튀어나온 그림자가 그녀를 뒤에서 껴안았다. “꺄악!” 놀란 송혜선은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고, 누군가 재빨리 그녀의 입을 막았다. “나야! 나야, 혜선아.” 익숙한 목소리에 송혜선은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남자의 손을 떼어내며 차갑게 말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이 사람, 지금 제정신인 거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어서 급히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송혜선은 그제야 숨을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흘기듯 말했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미쳤어, 사람들 눈에 띄면 어쩌려고!!” 그 말엔 명백한 불만과 경계심이 섞여 있었다. 조봉규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되는데...’ 그 순간의 긴장, 그리고 복잡한 감정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조봉규의 시선이 송혜선의 얼굴에서 천천히 내려앉았다. 송혜선은 산후라 그런가, 몸매는 훨씬 더 부드럽고 풍성해져 있었다. ‘이러니까, 잊으려고 해도... 더 생각이 나잖아.’ 그는 순간 충동적으로 송혜선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 당황한 송혜선이 눈을 부릅떴다. “뭐 하는 거야!! 지금...” 그러나 조봉규는 말없이 송혜선을 옆방으로 이끌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작게 ‘탁’ 하고 울렸다. 좁은 공간, 차오르는 침묵. 송혜선은 남자를 노려보며 벽에 등을 댔다. “정신 차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조봉규는 그녀를 바라보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다들 홀에 있잖아. 아무도 몰라.” 남자의 말투엔 간절함과 조급함이 섞여 있었다. 이건 단순한 욕망이 아니었다. 그리움, 억눌림, 그리고 못다 한 말들. 그는 조심스럽게 송혜선의 턱선을 손끝으로 만지며 말했다. “혜선아... 나, 정말 많이 참았어.” ‘이 사람 또 이러네...’ 송혜선의 심장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분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정문 쪽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부동건이 고개를 돌리자, 최하연이 부상혁의 팔을 자연스럽게 끼고 등장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많은 이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잘생긴 남자와 우아한 여자의 조합. 누가 봐도 완벽한 한 쌍이었다. ‘딱 봐도 좋은 그림이야. 저 둘은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눈길을 끌어...’ “회장님, 부상혁 대표님은 정말 복도 많으십니다. 최씨 가문의 따님과 이렇게 잘 어울리는 커플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부동건의 표정이 확 풀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묘하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부동건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부동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젊은 사람들이 서로 마음이 맞아 좋아하는 걸, 우리 어른들은 그저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줘야 하는 일일 뿐이지요.” “게다가 상대가 최씨 가문의 따님이라니, 정말 금상첨화가 아닙니까.” 부동건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역시 상혁이다. 내 아들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상혁은 오늘 이 자리에서 당당히 아버지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었다. 한편, 송혜선도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까지 얼굴에 띄웠던 미소는 점점 사라져 갔고,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하연에게 향했다. 오늘의 하연은, 나무나 예쁘고... 아니, 그냥 눈이 부실 만큼 찬란했다. 그리고 또렷한 이목구비에 윤기 흐르는 머릿결, 화사하게 피어난 얼굴빛까지. 하연의 행복함이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송혜선의 눈빛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정다영... 그년, 나를 속였어.’ 그동안 하연 쪽에서 뭔가 반응이 있을 줄 알고 기다려 왔다. 하지만 소식은커녕, 정다영조차 자취를 감췄다. ‘다영이 걔가 하연이에게 약 먹이는 계획이 분명 실패한 거야. 그렇지 않고 선 지금 저렇게 멀쩡한 얼굴로 서 있을 수는 없어.’ 이대로 배가 불러오면, 섣불리 손도 쓸 수 없게 된다. ‘
이 질문에 송혜선은 눈을 반짝이며 부동건을 바라봤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젠 나를 당당히 소개해 줄 때가 됐겠지.’ 오늘 이 자리에서, 그녀는 부동건의 정식 아내로서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었다. “회장님, 말씀 좀 해보세요?” 조금은 성급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주변의 시선도 하나둘 송혜선과 부동건을 향했다. 모두 속으로는 뻔히 알고 있었다. 부동건이 과연 예전 애인을 진짜로 정실로 앉혔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다. 부동건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숨기거나 피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담백하게 말했다. “오 회장님, 이 사람은 제 딸의 어머니입니다.” 순간, 송혜선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딸의... 어머니?’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이 살짝 흔들렸다. 금세 넘칠 듯한 와인, 애써 잡고 있는 감정. ‘지금... 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억울함이 툭 하고 솟구쳤다. 심지어 손에 힘이 들어가며 하얗게 질린 손등이 떨렸다. 오병지는 단번에 눈치챘고, 싱긋 웃으며 더는 묻지 않았고, 대신 가볍게 말을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부 회장님, 여전히 복이 많으시네요.” 부동건은 공손하게 웃으며 송혜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손길엔 무언의 위로가 담겨 있었다. “아닙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저와 이 사람의 결혼식엔 꼭 오셔서 축배 들어주세요.” 그 말에 송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결혼식...?’ 순간,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이어서 고개를 들며 수줍게 웃었다. “회장님...” 부동건은 말없이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지만, 그 행동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 시선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송혜선을 무시하거나 조롱하던 눈빛이, 지금은 선망과 부러움으로 가득했다. 결국, ‘부동건의 아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송혜선은 온
부지윤의 ‘한 달 잔치’는 그야말로 성대한 수준의 파티였다. 초대받은 인사들만 봐도, 그 위세가 느껴졌다. F국 재계의 실력자들, 정재계의 핵심 인물, 이름만 대면 아는 명문가 자제들이 대거 초청됐고, 심지어 부씨 가문 어른들에게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직접 청첩장을 보냈다. 이 정도면, 사실상 이 아이를 공식적으로 가문에 편입시키겠다는 의지나 다름없었다. 부동건이 이 아이에게 얼마나 애정을 집착하듯 쏟고 있는지, 이날 행사 하나로 증명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부동건은 스스로의 체면과 명예를 걸고, 딸을 세상에 내보이고 있었다. ...잔치 당일, 연회장은 유난히 붐볐다. 샹들리에의 조명이 화사하게 반짝였고, 고급스러움이 풍겨 나는 악단의 선율이 분위기를 감싸고 있었다. 송혜선은 산후조리를 마친 직후였지만, 여전히 그만의 풍채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예전보다 조금 살이 오른 듯했지만, 그 덕에 오히려 분위기가 더 너그러워 보였다. 그녀가 행사장에 들어서자, 평소 자주 어울리던 재벌가 부인들이 앞다투어 다가왔다. “혜선씨는 진짜 복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 고생 끝에 드디어 볕뜰날이 왔네요.” “부 회장님이 이렇게까지 챙기시는 거 보니까, 이제 정말 한 자리 하시겠어요.” “정말 이러다 조만간 ‘겹경사’ 나는 거 아니예요? 우리라도 미리 축하해줘야 하는 거야?” 송혜선은 그 소리에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얄미울 정도로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역시 사람은 자리가 높아야 대접 받는 거야.’ “지윤이는 회장님의 첫 딸이잖아요. 그러니까 귀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회장님이 우리 모녀를 절대 가볍게 보지 않으신다는 건, 여기 있는 분들도 느끼셨을 테고요.” 그 말에 다들 박수까지 치며 웃었다. “이제 우리도 호칭 바꿔야지, 사모님!” 누군가 먼저 그렇게 불렀고, 뒤이어 몇몇이 장난처럼 따라 불렀다. 송혜선은 그 말에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턱을 살짝 들며, 그 호칭이 제법 익숙
진윤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마침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부남준은 법을 무시하고, 사람을 죽였어요. 부씨 가문이 이 일에 개입한다면... 여론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감싸려 들면 들수록, 결국은 함께 나락으로 떨어지겠죠.” ‘이건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가문의 존망이 걸린 문제야.’ 맞은편 소파에 앉은 상혁은 다리를 꼬고,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눈빛엔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세속의 먼지 따윈 전혀 묻지 않은 사람처럼. 진윤의 말이 끝났지만, 상혁의 표정엔 미동 하나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씨 가문은 항상 법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여왔습니다. 그건 변하지 않습니다, 여사님.” 그는 손짓으로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거기엔 작은 검은색 USB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 안에... 고나희 씨가 남긴 게 있습니다. 여사님께 드리라고 하더군요.” 순간, 진윤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숨이 턱 막히는 듯한 표정으로, USB를 바라봤다. “지금... 뭐라고 하셨죠?” 그녀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희가... 뭔가를 남겼다고...?’ 사고는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딸의 마지막을 함께할 시간조차 없이, 그녀는 세상을 떠났고, 어떤 유언도,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줄 알았다. “나희... 그 애가... 무슨 말을 남겼다는 거예요...” 진윤은 입을 틀어막았다. 눈물은 이미 참을 수 없다는 듯 쏟아지려 하고 있었다. 상혁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사람이 떠난 건 바꿀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남겨진 마음은, 누군가가 반드시 전해야죠.” 그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거운 공기를 뒤로한 채, 조용히 방을 나섰다. 잠시 후.룸 안에서 낮고, 억눌렀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희야...” 진윤은 USB를 손에 쥐고,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으로 울고 있
진윤은 송혜선이 내민 공백 수표를 내려다보며 손끝까지 떨렸다. 종이 한 장.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그녀의 심장을 조용히 갉아먹었다. ‘돈이란 게... 사람을 어디까지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 건지.’ 그녀는 허탈하게 웃었다. “돈, 참 좋은 거죠. 수많은 집이 그거 하나 때문에 무너지고, 사람 목숨도 스스럼없이 거래되고.” 그녀의 눈빛이 서서히 날카로워졌다. “고경수도 그랬어요. 결국 돈 때문에 스스로 감방에 들어갔고, 지금 당신은 그 돈으로 내 아이의 죽음을 사겠다는 거죠.” 진윤의 시선이 천천히 송혜선을 꿰뚫었다. “송 여사님의 눈엔... 돈이면 뭐든 다 해결돼요?” 송혜선은 대답하지 않았다. 진윤은 고개를 들었다. 쭉 뻗은 어깨, 흐트러지지 않은 눈빛으로 조용히 말했다. “근데, 저에게 그딴 건... 아무 의미 없어요.” 테이블 위의 수표는 그녀 눈엔 그저 휴짓조각에 불과한 쓰레기였다. ‘내 아이 이름 위에 적힌 숫자가 많을수록, 그 애는 더 억울해지는 거야.’ 그런 진윤의 단호함에, 송혜선도 이내 표정을 굳혔다. “정말 고집 세시네요, 여사님.”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조용히 진윤 쪽으로 다가섰다. 10센티미터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서, 송혜선은 하찮다는 듯이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며 진윤에게 시선을 내리꽂았다. “그 자존심,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지 볼까요?” 그 말투엔 이젠 더 이상 숨길 필요 없는 위협이 담겨 있었다. “당신에게는 지금, 아무것도 없어요. 남편은 감옥, 딸은... 하늘에 있어. 그런데도 이렇게 버티겠다고? 부씨 가문이 마음만 먹으면, 당신 같은 사람 하나쯤 사라지게 만드는 건 일도 아니에요.” 진윤은 순간 움찔했지만, 눈동자는 미동도 없이 그대로 송혜선을 바라봤다. 송혜선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참, 고경수 씨 말인데요. 그 사람, 아직 당신한테 마음 있더라. 감방에서 계속 당신 얘기만 했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