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 처리가 끝난 후, 차량이 견인차에 끌려갔을 때는 이미 밤 10시가 되어 있었다. 회의를 마친 상혁은 사무실로 돌아가면서 손에 든 서류를 지현에게 건네주었다.“앞으로 급한 서류는 빨간색 라벨을 붙이고, 급하지 않은 서류는 파란색 라벨을 붙여줘요.” 서류를 얼른 받아 든 지현이 대답했다.“예.” 그는 남자였기 때문에 연지처럼 사소한 문제에 대한 섬세함이 없었다. 상혁은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여자들만의 향기를 느꼈고, 익숙한 향에 눈살을 찌푸렸다.“하연이가 왔었나요?” “두 시간 전에 포장된 음식을 가져오셨는데, 회의가 끝나지 않아서요...” 상혁이 낮은 목소리로 지현의 말을 끊었다.“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죠?” 지현이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저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대표님께서는 도시 서쪽의 재개발 문제를 처리하고 계셨고, 류 대표님과 의견 충돌이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보고하려고 했지만, 대표님께서는 손짓으로 제지하셨고요.”“그랬군요.”눈을 지그시 감았다 뜬 상혁이 앞에 놓인 포장된 음식을 열었다. 그 안에는 정성스럽게 준비된 음식이 담겨 있었다. 그는 허겁지겁 음식을 먹었지만, 오랜 시간 방치된 음식은 약간 식어 있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마음이 불편하고 초조해졌다. 같은 시각.전화를 받아야 하는 하연은 마침 연지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있었다.“번거롭게 해서 미안해요.” “부 대표님은 저의 상사시잖아요. 그분을 위해서 일하는 건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예요. 그러니까 최하연 씨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아니라... 상혁 오빠를 도운 거라고요?” “부 대표님께서 부하 직원들한테 명령을 내리셨어요. 최하연 씨의 일을 대표님의 일처럼 여기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최선을 다한 거예요.” ‘상혁 오빠가 나를 그 정도로 배려해 줬다고? 그리고 황 비서님이 이렇게 솔직한 사람이었다고?’하연은 다소 놀랐다.‘내가 황 비서님을 오해한 건 아닐까?’핸드폰이 울리자, 그녀가 전화
가정에서 비롯된 결핍은 연지를 떠도는 부평초처럼 만들었고, 상혁은 그녀에게 있어 생명의 지푸라기였다. “저는 2천 원도 반으로 나눠 써야 했던 날들을... 그리고 부 대표님의 은혜를 절대 잊지 않을 거예요. 몇 년 전, 부 대표님을 따라 입사할 때 맹세했어요, 부 대표님의 명령을 영원히 따르겠다고요.” 연지의 눈빛은 대단히 확고했다. 하연이 눈을 가늘게 뜨자, 길가의 네온사인이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흩어졌다. “상혁 오빠의 뒤를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여기까지 온 거군요.” “네.”“상혁 오빠는 예전에 많이 힘들어했나요?” “처음 DL그룹에 입사하신 부 대표님은 사람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 밑바닥부터 시작하셨어요. 심지어 프로젝트를 성사시키기 위해서 한 달 동안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고객의 집 앞을 지키셨죠. 한 달 후, 프로젝트는 깔끔하게 성사됐고, 대표님은 세 단계나 승진하게 되신 거예요.”차 앞에 기댄 연지는 어려웠던 시절을 회상하며 미소를 지었다.“2년 후, 부 대표님은 9명의 이사 중 한 분이 되셨지만, 당시 협력하던 고객 한 분은 사업이 점점 쇠퇴하면서 파산해야 했고, 결국 건물에서 뛰어내려 세상을 떠나고 마셨어요.” 이 말을 들은 하연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상혁 오빠가 그랬다는 거예요?”“최하연 씨, 비즈니스 업계에서 절대적인 건 없어요. 부 대표님께서 직접 나서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그 분의 결정을 존중해요. 패권을 잡으려면 그런 결단력이 필요한 법이니까요.” 연지가 말했다.이야기가 끝날 무렵, 상혁의 검은 차가 미끄러지듯 두 사람의 앞에 다다랐다. 그가 차에서 내리며 일으킨 바람은 머리카락을 날리게 했다. 잠시 후, 상혁은 하연을 따뜻하게 안아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괜찮아?”약간 숨을 헐떡이는 그의 어투에는 걱정이 서려 있었다. 연지는 한쪽으로 물러났다. 하연은 상혁의 옷을 꽉 쥐더니 무의식중에 그를 밀쳐냈다.“괜찮다고 했는데 왜 온 거예요?”
다급해진 하연이 상혁의 손을 잡았다.“왜 안된다는 거에요? 전 오빠의 과거를 알고 싶어요. 하지만 오빠는 단 한번도 알려준 적이 없잖아요.” “알아도 되는 게 있고, 알아서는 안 되는 게 있어. 난 그 구분을 명확히 짓고 있는데, 일부는 너무 지저분한 일이라 네 귀에 들어가서는 안 돼.”상혁이 차창을 조금 내리며 밖을 바라보았다. “연인 사이에도 숨길 부분이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하연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저는 그게 무슨 일이든, 오빠와 관련이 있다면 지저분하다고 느끼지 않을 거예요.” 뒤에서부터 들려온 하연의 목소리는 상혁의 마음을 관통했다.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저는 황 비서님의 이런 점이 좋아요. 제가 오빠의 진짜 모습을 알게 해줬으니까요. 오빠는 저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 같은데, 저는 세상사를 모르는 온실 속의 화초가 아니에요.” 한숨을 내쉰 하연이 다시 그의 손을 잡았다.“상혁 오빠, 앞으로는 오빠가 해주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가정에 관한 일이든, 친구에 관한 일이든 상관없이요.” 고개를 돌린 상혁의 눈에는 약간의 혼란스러움이 서려 있었다. ‘하연이는 포용력이 아주 넓은 사람이구나.’상혁은 줄곧 하연을 손에 닿지 않는 사람으로 여겼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이제는 자신을 이해해 주려 하다니... 그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바보야.”상혁이 하연의 귓가에 흐트러진 잔머리를 정리해주며 말했다.“예전 같았으면 이렇게 많은 걸 걱정하지는 않았을 거야. 하지만 지금은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 아주 많아졌어. 나랑 함께 있으면... 아주 힘들 수밖에 없을 거야.” 이것은 애초가 그가 마음을 표현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다.기분이 좋아진 하연이 상혁의 어깨에 기대었다.“벌써 잊은 거예요? 내가 오빠랑 함께하는 건 희로애락을 함께하기 위한 거예요. 그런 여자 친구한테 그렇게 말하는 건 너무 격식을 차리는 거잖아요.” 옅은 미소를 띤 상혁이 품에 안긴 여자를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아직 잠들지 않은 조
상혁은 직접 차를 몰고 하연을 공항까지 데려다주었는데, 조수석에 앉은 그녀가 중얼거리며 말했다.“큰오빠가 이쪽 일만 잘 해결하면, B시에서 새해를 보낼 거라고 했어요. 물론 할아버지도 모시고 온다고 했고요. 그럼... 오빠는요? 오빠도 올 거예요?” 연말이 다가오고 있었는데, 이것은 HX국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날이었다.옆을 힐끗 바라본 상혁이 부드럽게 말했다.“네가 어디에 있든, 거기로 갈 생각이야.” 하연이 웃음을 터뜨렸다. 일찍 공항에 도착한 하경은 두 사람이 손을 잡은 것을 보고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왜 그렇게 느끼하게 구는 거야?” 상혁이 그의 어깨를 한 대 때렸다.“이번에는 기회가 없었지만, 다음에는 밥 한번 살게.” “누가 밥 먹고 싶대? 밥은 학교 다닐 때 충분히 먹었잖아.” 상혁이 웃으며 말했다.“하연이 좀 잘 부탁해.” “하연이는 내 동생이야. 주제넘게 굴기는...”“둘째 오빠...”하연이 불만스러워했다. “됐어, 차별하는 꼴을 좀 봐, 한심하긴.”이 말은 하경의 시샘이 여실히 드러나는 말이었다. 이때, 연지가 빠른 발걸음으로 다가왔다.“최하연 씨, 짐은 이미 다 부쳤어요. 그리고 이건 탑승권이에요.” 그녀를 한 번 쳐다본 하연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연지가 다시 상혁의 곁에 나타난 걸 보면, DL 그룹이 그녀에 대한 처분을 철회했고, 더 이상 강등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하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탑승권을 받았다.“오빠를 잘 부탁할게요.” “너그럽게 배려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할게요.” 푸른 하늘을 가로지른 비행기는 이내 흔적도 없이 멀어져갔다. 상혁은 미소를 거둔 채 몸을 돌려 떠났고, 연지는 그의 뒤를 따랐다.“부 대표님, 이전에 주시하라고 하셨던 HT그룹의 허점을 찾아냈습니다.”“그건 아주 이전에 지시했던 일인데...”상혁이 곧장 앞으로 나아가며 말했다.“황 비서, 업무에 제법 충실하네.” “제가 어떻게 대표님의 지시를 잊을 수 있
하연이 거의 한 시간을 기다린 후에야 인터뷰가 끝났고, 스태프들은 모두 흩어지기 시작했다. 앞으로 나아간 그녀가 여은에게 물 한 잔을 건네주었다.“수고했어, 다 같이 드시라고 마실 것도 주문해 뒀어.” 여은이 주위 사람들을 바라보았다.“여러분! 최 사장님께 어서 감사의 인사를 드릴까요?” “최 사장님이요?”사람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감사합니다!” 미소를 지어 보인 하연이 여은의 뒤에 있는 피취재자를 바라보았다.“어떤 분을 인터뷰한 거...”순간, 그녀의 목소리가 뚝 그쳤다. 익숙하지만 낯선 얼굴...“최하연 씨, 또 만나네요.” 하연의 표정이 굳어졌지만, 여은은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말했다.“여긴 제 친구이자 DS그룹의 총 실행 책임자인 최하연이예요. 그리고 이 분은 B시의 떠오르는 신흥 재벌이자, WA 그룹의 책임자인 부남준 사장님이셔.” 이 말을 마친 그녀가 슬그머니 하연의 귓가에 말했다.“부상혁이랑 성이 같은데, 참 공교롭지?” ‘공교롭다고...?’ 하연은 부남준이 B시에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은 상상치도 못했다.남준은 께름칙한 표정의 하연을 느긋하게 바라보며 옷매무새를 정리했고,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최 사장님께서는 저를 마주하는 게 조금 불쾌하신 것 같네요.” 비서 손상우가 하연이 준비한 커피를 건네며 기뻐했다.“부 사장님, 최 사장님께서 준비하신 겁니다.” 하지만 남준은 커피를 힐끗 바라볼 뿐이었다.“난 됐어요, 최 사장님은 늘 다른 사람에게 약을 먹이는 걸 즐기시잖아요? 내가 무슨 대가를 치를 줄 알고 그걸 마십니까?” 하연의 안색이 차갑게 식었다. 여은도 그제야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다.“두 분, 아는 사이세요?” “아니.”하연이 대답하며 남준을 응시했다.“난 함부로 약을 쓰지 않아. 그 사람이 정말로 싫은 게 아니라면 말이야.” 남준은 냉소를 터뜨렸으나, 화를 내지는 않았다.“최 사장님, 항상 조심하세요. 저는 그
[출국하셨어요?] 잠시 후, 이현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물었다. ‘내 영상을 본 것 같지, 아마?’“네, 가족을 만나러 왔어요.” [부 대표님과의 사이가 아주 좋으신가 봐요.] 하연이 다정하게 말했다.“그런대로 안정적이에요. 하지만 손 선생님, 부러워하실 거 없어요. 선생님도 언젠가 저처럼 될 거예요.” 그녀는 이현이 부러워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화기 너머의 이현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전 괜찮아요.] “괜찮기는요, 세상에 사랑받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하지만 조급해할 거 없어요. 언젠가는 꼭 그런 사람이 나타날 거예요.”그녀의 자기 만족적인 위로는 이현의 기분을 가라앉게 했다. 그가 커피를 들어 올렸다.[만약 그런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면요?] “음... 그럼 제가 소개해 드릴게요. 저한테 다른 건 몰라도 여자인 지인들은 많잖아요?” 이현이 싱긋 웃으며 막 말하려던 찰나, 고통스러운 하연의 비명이 들려왔다. 긴장한 그가 물었다.[왜 그래요?] “위층으로 올라가려다가 발을 헛디뎌서 넘어졌어요.”숨을 들이마시고 고개를 숙여 보니, 발목이 빠르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집에 누구 있어요? 괜찮아요?]하연은 집에 고용인이 너무 많은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보통 그들은 낮에 청소와 밥을 하러 오지만, 밤에는 오지 않았다. 그녀가 침묵하자, 수화기 너머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주소 좀 알려주세요. 제가 병원에 데려다줄게요.] “괜찮아요! 그럴 필요는 전혀 없어요. 그냥 저 혼자 약을 좀 바르면 돼요.”하연은 급히 일어나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는데, 발목에서 퍼지는 살을 에는 듯한 통증으로 보아, 접지른 것이 분명했다. [지금 혼자 움직일 수 있어요?]하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때, 이현은 이미 차량의 시동을 걸었다.[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발목을 삔 거라면, 부기가 더 심해질 거예요. 병원에 가는 게 싫다면, 약을 좀 가져다드릴게요. 타박
이현의 손길은 아주 능숙했다. 먼저 하연의 상처를 소독한 뒤, 약을 발라준 그는 두 손으로 약간의 열을 가해 부드럽게 마사지했다. 하연은 통증이 빠르게 줄어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엄청 능숙하시네요, 전문적으로 배운 적이 있으신 거예요?” 그녀의 하얗고 가느다란 두 발목은 접질린 탓에 붉게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이현은 손만 움직일 뿐, 그곳을 오래 쳐다보지는 않았다. “네, 일 때문에 자주 다치고, 혼자 처치하다 보니까 거의 의사 수준이 된 거죠.” 이현은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마스크와 야구모자를 쓴 채 따뜻한 눈빛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연이 궁금해하며 물었다.“예전에 무슨 일을 하셨길래 자주 다친 거예요?” 이현은 여전히 그녀의 발목을 문지르고 있었다.“배운 게 없어서 막노동했었어요.”정신이 멍해진 하연은 자신이 몹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런 일이 있는 줄은 몰라서...” 당황한 그녀의 모습을 본 이현이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괜찮아요. 말하지 못할 비밀은 아니니까요.”굳은살이 잔뜩 베인 그의 손은 부드럽고 깨끗한 상혁의 손과 확실히 달랐는데, 예전에 고된 막노동을 했다는 말을 증명하는 듯했다. “너무 늦었는데, 소울 칵테일은 아직도 영업 중이에요?”그녀는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화제를 돌리려 했다. “네, 강성훈까지 총 여덟 명의 직원이 허리도 못 펴고 일하는 상황이에요. 그런데 손님들은 끊임없이 하연 씨가 왔던 소울 칵테일을 방문하고 싶어 하고요.” 그의 말에는 약간의 농담이 담겨 있었다. 하연이 눈웃음을 지었다.“그럼 좋은 거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도 상혁 오빠랑 내기했는데, 저는 손 선생님의 소울 칵테일에 손님이 많아질 거라고 했거든요! 손 선생님, 이렇게 되면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좋은 일이에요. 선생님은 돈을 벌고, 저는 내기에서 이기는 거니까요!” 이 말을 들은 이현의 행동이 무의식적으로 느려졌다.“그분은 어떤 거에 내기를 걸었죠?” “음... 상혁
하연이 귀엽다고 생각한 상혁이 가볍게 웃으며 위로했다.[참느라 고생했겠네, 다음부터는 부남준을 만나지 않을 수 있으면, 만나지 않는 게 좋겠어.] 하연의 화가 가라앉은 찰나, 상혁이 말했다.[영상통화로 전환해 봐. 얼굴 좀 보자.] 그 순간, 천진난만하던 하연의 말투가 굳어졌다. 그녀가 이현을 힐끗 바라보았다.‘바람피우는 것만 같은 느낌이야...’ “곧 자려던 참이라... 예쁘지 않을 거예요.” 상혁은 그녀가 단순히 투정을 부린다고 생각했다.[화장하지 않은 얼굴은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그래. 좀 보여줘.] “정말 안 예쁠 거예요. 그리고 지금 너무 졸려요.”하연이 고집을 피웠다. ‘손 선생님이 아직 돌아가지 않은 상황에서 영상통화를 하는 건 두 사람 모두에게 실례되는 일이야.’ 상혁은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고, 그녀에게 일찍 쉬라고 당부한 뒤, 내일 영상 통화를 하자고 말했다.“네, 약속할게요.” 통화가 끝났을 때는 이미 10분가량이 흐른 후였다. 안으로 들어온 이현이 말했다.“그분이 정말 잘해주시나 봐요.”하연이 미안해하며 말했다.“난감하게 해서 죄송해요. 사과는 다음번에 제대로 할게요. 오늘은 정말 감사했어요.”“그리고 손 선생님... 오늘 있었던 일은 다른 사람한테 말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그럼요.”물건을 챙긴 이현이 일어나서 떠나려 하자, 하연이 불쑥 말했다. “잠시만요.”발걸음을 멈춘 그가 난감한 표정의 하연을 바라보았다.“저기... 방까지 좀 데려다주시겠어요? 아직 걸을 수가 없어서요...” 그녀의 귀밑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을 본 이현도 민망해지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는 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깊이 생각하지 않았으나, 지금은 준비된 스킨십이니까 걷는 동안 서로의 체온을 느낄 수 있지 않겠는가. 이현의 목덜미에 핏줄이 불거졌다. 하연의 방은 아주 크고 간결했으며, 소녀 감성이 가득하고 은은한 향기까지 났다. 그녀를 침대에 눕힌 이현은 손바닥과 아래쪽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가 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