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급해진 하연이 상혁의 손을 잡았다.“왜 안된다는 거에요? 전 오빠의 과거를 알고 싶어요. 하지만 오빠는 단 한번도 알려준 적이 없잖아요.” “알아도 되는 게 있고, 알아서는 안 되는 게 있어. 난 그 구분을 명확히 짓고 있는데, 일부는 너무 지저분한 일이라 네 귀에 들어가서는 안 돼.”상혁이 차창을 조금 내리며 밖을 바라보았다. “연인 사이에도 숨길 부분이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하연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저는 그게 무슨 일이든, 오빠와 관련이 있다면 지저분하다고 느끼지 않을 거예요.” 뒤에서부터 들려온 하연의 목소리는 상혁의 마음을 관통했다.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저는 황 비서님의 이런 점이 좋아요. 제가 오빠의 진짜 모습을 알게 해줬으니까요. 오빠는 저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 같은데, 저는 세상사를 모르는 온실 속의 화초가 아니에요.” 한숨을 내쉰 하연이 다시 그의 손을 잡았다.“상혁 오빠, 앞으로는 오빠가 해주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가정에 관한 일이든, 친구에 관한 일이든 상관없이요.” 고개를 돌린 상혁의 눈에는 약간의 혼란스러움이 서려 있었다. ‘하연이는 포용력이 아주 넓은 사람이구나.’상혁은 줄곧 하연을 손에 닿지 않는 사람으로 여겼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이제는 자신을 이해해 주려 하다니... 그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바보야.”상혁이 하연의 귓가에 흐트러진 잔머리를 정리해주며 말했다.“예전 같았으면 이렇게 많은 걸 걱정하지는 않았을 거야. 하지만 지금은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 아주 많아졌어. 나랑 함께 있으면... 아주 힘들 수밖에 없을 거야.” 이것은 애초가 그가 마음을 표현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다.기분이 좋아진 하연이 상혁의 어깨에 기대었다.“벌써 잊은 거예요? 내가 오빠랑 함께하는 건 희로애락을 함께하기 위한 거예요. 그런 여자 친구한테 그렇게 말하는 건 너무 격식을 차리는 거잖아요.” 옅은 미소를 띤 상혁이 품에 안긴 여자를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아직 잠들지 않은 조
상혁은 직접 차를 몰고 하연을 공항까지 데려다주었는데, 조수석에 앉은 그녀가 중얼거리며 말했다.“큰오빠가 이쪽 일만 잘 해결하면, B시에서 새해를 보낼 거라고 했어요. 물론 할아버지도 모시고 온다고 했고요. 그럼... 오빠는요? 오빠도 올 거예요?” 연말이 다가오고 있었는데, 이것은 HX국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날이었다.옆을 힐끗 바라본 상혁이 부드럽게 말했다.“네가 어디에 있든, 거기로 갈 생각이야.” 하연이 웃음을 터뜨렸다. 일찍 공항에 도착한 하경은 두 사람이 손을 잡은 것을 보고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왜 그렇게 느끼하게 구는 거야?” 상혁이 그의 어깨를 한 대 때렸다.“이번에는 기회가 없었지만, 다음에는 밥 한번 살게.” “누가 밥 먹고 싶대? 밥은 학교 다닐 때 충분히 먹었잖아.” 상혁이 웃으며 말했다.“하연이 좀 잘 부탁해.” “하연이는 내 동생이야. 주제넘게 굴기는...”“둘째 오빠...”하연이 불만스러워했다. “됐어, 차별하는 꼴을 좀 봐, 한심하긴.”이 말은 하경의 시샘이 여실히 드러나는 말이었다. 이때, 연지가 빠른 발걸음으로 다가왔다.“최하연 씨, 짐은 이미 다 부쳤어요. 그리고 이건 탑승권이에요.” 그녀를 한 번 쳐다본 하연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연지가 다시 상혁의 곁에 나타난 걸 보면, DL 그룹이 그녀에 대한 처분을 철회했고, 더 이상 강등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하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탑승권을 받았다.“오빠를 잘 부탁할게요.” “너그럽게 배려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할게요.” 푸른 하늘을 가로지른 비행기는 이내 흔적도 없이 멀어져갔다. 상혁은 미소를 거둔 채 몸을 돌려 떠났고, 연지는 그의 뒤를 따랐다.“부 대표님, 이전에 주시하라고 하셨던 HT그룹의 허점을 찾아냈습니다.”“그건 아주 이전에 지시했던 일인데...”상혁이 곧장 앞으로 나아가며 말했다.“황 비서, 업무에 제법 충실하네.” “제가 어떻게 대표님의 지시를 잊을 수 있
하연이 거의 한 시간을 기다린 후에야 인터뷰가 끝났고, 스태프들은 모두 흩어지기 시작했다. 앞으로 나아간 그녀가 여은에게 물 한 잔을 건네주었다.“수고했어, 다 같이 드시라고 마실 것도 주문해 뒀어.” 여은이 주위 사람들을 바라보았다.“여러분! 최 사장님께 어서 감사의 인사를 드릴까요?” “최 사장님이요?”사람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감사합니다!” 미소를 지어 보인 하연이 여은의 뒤에 있는 피취재자를 바라보았다.“어떤 분을 인터뷰한 거...”순간, 그녀의 목소리가 뚝 그쳤다. 익숙하지만 낯선 얼굴...“최하연 씨, 또 만나네요.” 하연의 표정이 굳어졌지만, 여은은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말했다.“여긴 제 친구이자 DS그룹의 총 실행 책임자인 최하연이예요. 그리고 이 분은 B시의 떠오르는 신흥 재벌이자, WA 그룹의 책임자인 부남준 사장님이셔.” 이 말을 마친 그녀가 슬그머니 하연의 귓가에 말했다.“부상혁이랑 성이 같은데, 참 공교롭지?” ‘공교롭다고...?’ 하연은 부남준이 B시에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은 상상치도 못했다.남준은 께름칙한 표정의 하연을 느긋하게 바라보며 옷매무새를 정리했고,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최 사장님께서는 저를 마주하는 게 조금 불쾌하신 것 같네요.” 비서 손상우가 하연이 준비한 커피를 건네며 기뻐했다.“부 사장님, 최 사장님께서 준비하신 겁니다.” 하지만 남준은 커피를 힐끗 바라볼 뿐이었다.“난 됐어요, 최 사장님은 늘 다른 사람에게 약을 먹이는 걸 즐기시잖아요? 내가 무슨 대가를 치를 줄 알고 그걸 마십니까?” 하연의 안색이 차갑게 식었다. 여은도 그제야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다.“두 분, 아는 사이세요?” “아니.”하연이 대답하며 남준을 응시했다.“난 함부로 약을 쓰지 않아. 그 사람이 정말로 싫은 게 아니라면 말이야.” 남준은 냉소를 터뜨렸으나, 화를 내지는 않았다.“최 사장님, 항상 조심하세요. 저는 그
[출국하셨어요?] 잠시 후, 이현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물었다. ‘내 영상을 본 것 같지, 아마?’“네, 가족을 만나러 왔어요.” [부 대표님과의 사이가 아주 좋으신가 봐요.] 하연이 다정하게 말했다.“그런대로 안정적이에요. 하지만 손 선생님, 부러워하실 거 없어요. 선생님도 언젠가 저처럼 될 거예요.” 그녀는 이현이 부러워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화기 너머의 이현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전 괜찮아요.] “괜찮기는요, 세상에 사랑받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하지만 조급해할 거 없어요. 언젠가는 꼭 그런 사람이 나타날 거예요.”그녀의 자기 만족적인 위로는 이현의 기분을 가라앉게 했다. 그가 커피를 들어 올렸다.[만약 그런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면요?] “음... 그럼 제가 소개해 드릴게요. 저한테 다른 건 몰라도 여자인 지인들은 많잖아요?” 이현이 싱긋 웃으며 막 말하려던 찰나, 고통스러운 하연의 비명이 들려왔다. 긴장한 그가 물었다.[왜 그래요?] “위층으로 올라가려다가 발을 헛디뎌서 넘어졌어요.”숨을 들이마시고 고개를 숙여 보니, 발목이 빠르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집에 누구 있어요? 괜찮아요?]하연은 집에 고용인이 너무 많은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보통 그들은 낮에 청소와 밥을 하러 오지만, 밤에는 오지 않았다. 그녀가 침묵하자, 수화기 너머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주소 좀 알려주세요. 제가 병원에 데려다줄게요.] “괜찮아요! 그럴 필요는 전혀 없어요. 그냥 저 혼자 약을 좀 바르면 돼요.”하연은 급히 일어나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는데, 발목에서 퍼지는 살을 에는 듯한 통증으로 보아, 접지른 것이 분명했다. [지금 혼자 움직일 수 있어요?]하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때, 이현은 이미 차량의 시동을 걸었다.[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발목을 삔 거라면, 부기가 더 심해질 거예요. 병원에 가는 게 싫다면, 약을 좀 가져다드릴게요. 타박
이현의 손길은 아주 능숙했다. 먼저 하연의 상처를 소독한 뒤, 약을 발라준 그는 두 손으로 약간의 열을 가해 부드럽게 마사지했다. 하연은 통증이 빠르게 줄어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엄청 능숙하시네요, 전문적으로 배운 적이 있으신 거예요?” 그녀의 하얗고 가느다란 두 발목은 접질린 탓에 붉게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이현은 손만 움직일 뿐, 그곳을 오래 쳐다보지는 않았다. “네, 일 때문에 자주 다치고, 혼자 처치하다 보니까 거의 의사 수준이 된 거죠.” 이현은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마스크와 야구모자를 쓴 채 따뜻한 눈빛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연이 궁금해하며 물었다.“예전에 무슨 일을 하셨길래 자주 다친 거예요?” 이현은 여전히 그녀의 발목을 문지르고 있었다.“배운 게 없어서 막노동했었어요.”정신이 멍해진 하연은 자신이 몹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런 일이 있는 줄은 몰라서...” 당황한 그녀의 모습을 본 이현이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괜찮아요. 말하지 못할 비밀은 아니니까요.”굳은살이 잔뜩 베인 그의 손은 부드럽고 깨끗한 상혁의 손과 확실히 달랐는데, 예전에 고된 막노동을 했다는 말을 증명하는 듯했다. “너무 늦었는데, 소울 칵테일은 아직도 영업 중이에요?”그녀는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화제를 돌리려 했다. “네, 강성훈까지 총 여덟 명의 직원이 허리도 못 펴고 일하는 상황이에요. 그런데 손님들은 끊임없이 하연 씨가 왔던 소울 칵테일을 방문하고 싶어 하고요.” 그의 말에는 약간의 농담이 담겨 있었다. 하연이 눈웃음을 지었다.“그럼 좋은 거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도 상혁 오빠랑 내기했는데, 저는 손 선생님의 소울 칵테일에 손님이 많아질 거라고 했거든요! 손 선생님, 이렇게 되면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좋은 일이에요. 선생님은 돈을 벌고, 저는 내기에서 이기는 거니까요!” 이 말을 들은 이현의 행동이 무의식적으로 느려졌다.“그분은 어떤 거에 내기를 걸었죠?” “음... 상혁
하연이 귀엽다고 생각한 상혁이 가볍게 웃으며 위로했다.[참느라 고생했겠네, 다음부터는 부남준을 만나지 않을 수 있으면, 만나지 않는 게 좋겠어.] 하연의 화가 가라앉은 찰나, 상혁이 말했다.[영상통화로 전환해 봐. 얼굴 좀 보자.] 그 순간, 천진난만하던 하연의 말투가 굳어졌다. 그녀가 이현을 힐끗 바라보았다.‘바람피우는 것만 같은 느낌이야...’ “곧 자려던 참이라... 예쁘지 않을 거예요.” 상혁은 그녀가 단순히 투정을 부린다고 생각했다.[화장하지 않은 얼굴은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그래. 좀 보여줘.] “정말 안 예쁠 거예요. 그리고 지금 너무 졸려요.”하연이 고집을 피웠다. ‘손 선생님이 아직 돌아가지 않은 상황에서 영상통화를 하는 건 두 사람 모두에게 실례되는 일이야.’ 상혁은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고, 그녀에게 일찍 쉬라고 당부한 뒤, 내일 영상 통화를 하자고 말했다.“네, 약속할게요.” 통화가 끝났을 때는 이미 10분가량이 흐른 후였다. 안으로 들어온 이현이 말했다.“그분이 정말 잘해주시나 봐요.”하연이 미안해하며 말했다.“난감하게 해서 죄송해요. 사과는 다음번에 제대로 할게요. 오늘은 정말 감사했어요.”“그리고 손 선생님... 오늘 있었던 일은 다른 사람한테 말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그럼요.”물건을 챙긴 이현이 일어나서 떠나려 하자, 하연이 불쑥 말했다. “잠시만요.”발걸음을 멈춘 그가 난감한 표정의 하연을 바라보았다.“저기... 방까지 좀 데려다주시겠어요? 아직 걸을 수가 없어서요...” 그녀의 귀밑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을 본 이현도 민망해지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는 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깊이 생각하지 않았으나, 지금은 준비된 스킨십이니까 걷는 동안 서로의 체온을 느낄 수 있지 않겠는가. 이현의 목덜미에 핏줄이 불거졌다. 하연의 방은 아주 크고 간결했으며, 소녀 감성이 가득하고 은은한 향기까지 났다. 그녀를 침대에 눕힌 이현은 손바닥과 아래쪽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가 몸을
이현이 말한 대로 하연의 발 부상은 이틀 만에 다 나았다. 그녀는 귀국하자마자 대기업들의 연회 초청장을 받았는데, 그중에는 HT그룹의 초청장도 있었다. 그 초청장은 구동후가 직접 전한 것이었는데, 정기태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그것을 가로막을 뿐이었다. “초청장은 필요 없습니다. 최 사장님은 참석하지 않으실 테니까요.” 동후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HT 그룹은 최 사장님께서 처음으로 근무하신 회사였지 않습니까. 감정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저희는 최 사장님께서 HT 그룹의 발전을 보러 오시기를 간곡히 청하는 바입니다.” 이 말을 들은 정기태는 고개를 저었다.“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일 뿐입니다. 뒤돌아보는 건 아무 의미가 없죠.” 동후는 회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을 들은 하연은 조금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아주 잘하셨어요.”하연은 나머지 초청장들도 모두 거절했지만, 단 하나만 받아들였다. 그것은 HL산업은행의 초청장이었는데, 하선유가 직접 작성한 것이었으며, 마지막에는 특별히 귀여운 이모지까지 덧붙여져 있었다. [꼭 와 주세요!] 웃음을 머금은 하연은 정기태에게 후한 선물을 준비하라고 분부했다. 회의장에 들어서자, 하연을 한눈에 알아본 선유가 깡충깡충 뛰어나왔다.“언니!” 하연이 웃으며 말했다.“와, HL산업은행의 행사는 규모가 너무 커서 부담스러운데?”하민철이 선유의 뒤를 따르며 말했다.“DS그룹의 연회도 아주 훌륭할 텐데, 너무 겸손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고개를 끄덕인 하연은 인사를 하기 위하여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 바로 이때, 차에서 내린 한서준과 나운석을 본 그녀의 얼굴이 차갑게 식었다. ‘하마터면 HL산업은행과의 관계를 고려한 나운석이 이 연회에 참석할 거라는 사실을 잊을 뻔했어. 나운석과 사이가 좋은 한서준도 이유를 불문하고 이 연회에 참석하려 했겠지.’ 그 동영상을 본 후부터 하연은 눈앞의 남자가 더욱 낯설다고 느꼈다. 그녀가 시선을 옮기자
깊은숨을 들이마신 서준의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그에 대한 하연의 거리감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었다. 하지만 임모연은 이미 자취를 감춘 후였다.‘최하연은 절대 알 수 없을 거야, 자기가 첫눈에 반한 사람이 우리 형이었다는 사실을 말이야.’하민철의 연설이 끝나자, 직원들의 행동이 빨라졌고, 손님들에게 음식이 제공되기 시작했다. 선유는 HL산업은행 은행장의 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그녀에게 다가와 술을 권했다. 이 테이블의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 운석이 분위기를 풀어보려 했다.“여신님, F국의 4대 가문 중 하나인 이씨 가문을 아시나요?” 하연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네, 몇 번 왕래가 있었거든요.” “이씨 가문의 둘째 도련님이 B시에 오셨다고 하더라고요.” ‘골드 크라운 때문에 우리 상혁 오빠랑 대치했다던 이씨 가문의 둘째 도련님?’하연이 곰곰이 생각해 봤다.‘이름이... 이방규였나?’“그분이 여긴 왜 오신 거죠?” 운석이 요리를 집어 선유의 그릇에 담아주었다.“영화회사를 하나 인수했대요. 어쩐지 며칠 동안 그 회사의 주가가 미친 듯이 치솟더라고요. 아무래도 그 사람의 조작이 있었나 봐요.” 강렬하지만 목적이 불분명한 접근은 자본 시장의 큰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전문 조작가인 운석은 가장 먼저 정보를 받은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서준이 말했다.“나도 들었어. 이씨 가문이 그 사람 때문에 큰 손해를 봤었다며? 그래서 이씨 가문의 어르신들도 그 사람을 탐탁지 않아 하신다던데... 물론 고위층 가문들도 그 사람한테 딸을 시집보내는 걸 꺼리겠지.” “소문은 그렇지만, 그 사람은 확실히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 비록 그 오만한 자신감으로 자기 구덩이를 파고 말았지만 말이야. 너, 이씨 가문 재산의 절반이 누구의 손에 들어갔는지 알아?” 곰곰이 생각하던 서준이 입을 열었다.“신비한 사람이던데? 이름을 아는 사람도 없더라고.” “난 알아.”운석이 일부로
상혁은 풍등을 들고 하연과 함께 마당으로 나왔다. 타이밍 좋게 하인이 라이터를 건네주고는 조용히 물러났다. 멀지 않은 곳에서 부남준이 조용히 고개를 내밀었다. 몰래 지켜보던 그는,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풍등을 펼치는 모습을 바라봤다. 상혁이 직접 가운데 심지에 불을 붙였다. 뜨거운 열기가 천천히 풍등을 부풀게 만들었고, 풍등은 두 사람 앞에서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연아, 빨리 소원 빌어!” 하연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간절히 소원을 빌었다. 상혁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또 다른 소원을 빌었다. ‘언제나 우리 둘이 해마다, 해마다, 서로를 마주할 수 있기를.' “다 됐어요.” 하연이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 눈빛에는 반짝이는 빛이 서려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서서히 손을 놓았다. 풍등은 하늘을 향해 천천히 날아올랐고, 점점 멀어지더니 마침내 한 점이 되어 사라졌다. “어떤 소원 빌었어?” 상혁이 손끝으로 하연의 귓불을 살짝 어루만지며 물었다. 하연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깜빡이며 말했다. “소원은 말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대요.” “그래? 그럼, 네 소원이 꼭 이루어지길 바랄게.” 두 사람은 다시 눈을 마주쳤다. 상혁의 숨소리가 깊어졌다. 그는 하연의 턱을 살며시 잡고,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을 맞췄다. 조심스러웠던 키스는 점점 더 깊어져 갔다. 하연은 숨이 가빠졌다. 상혁을 밀어보려 했지만, 오히려 더 깊이 끌어안겼다. 여자의 허리는 유연하게 휘어졌고, 상혁의 등은 팽팽한 활처럼 긴장됐다. 결국, 하연도 상혁의 목을 감싸 안고, 키스에 응답했다. 그러나 그 순간, 불청객 같은 전화벨 소리가 분위기를 깨뜨렸다. 하연은 화들짝 놀라며, 급하게 상혁을 밀어냈다. 그녀의 얼굴은 빨갛게 익은 사과처럼 새빨개졌다. “전화 울리는데요?” 하연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져 있었다. 묘하게 사람을 간지럽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상혁은
다른 곳에서 있던 조봉규가 소란이 일자마자 급히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송혜선에게 다가가며 다급히 말했다. “설날인데, 뭐하러 이렇게 화를 내...” 조봉규가 입을 여는 순간, 남준의 온몸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남준의 시선이 날카롭게 쏘아붙었고, 조봉규는 본능적으로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애써 태연한 척하며 한 발 다가섰다. 송혜선의 팔을 조심스레 부축하며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건강이 우선입니다.” ‘건강?’남준은 손에 쥔 염주를 힘껏 움켜쥐었다. 힘이 들어간 손등에는 핏대가 서고, 눈빛은 살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리고 시선은 서로 닿아 있는 두 사람의 손목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입가에 엷은 조소가 떠올랐다. “조 선생님, 참으로 열정적인 분이시군요. 설날에도 근무 태세를 유지하시다니.” 조봉규는 눈치가 빠른 인물이었다. 당연히 그의 말 속에 담긴 조롱을 알아챘다. 그러나 겉으로는 한껏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며 머리를 숙였다. “별말씀을요. 환자의 곁을 지키는 게 제 본분입니다.” 남준은 가만히 조봉규를 노려보다가, 짧고 날 선 경고를 던졌다. “그렇다면 본분에만 충실하시죠. 여긴 부씨 가문의 본가이니까.”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남준아!” 송혜선이 다급히 나섰다. 남준을 나무라는 말투였지만, 그 속에는 조봉규를 감싸려는 의도가 분명히 깔려 있었다. 남준의 눈빛은 더욱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송혜선은 오히려 기세를 올려 쏟아내듯 말했다. “네가 좀 더 나서서 잘했더라면, 부상혁한테 밀릴 일도 없었어! 내가 왜 조진숙한테 설날마다 굽신거려야 하냐고?” “지금, 어머니는 나를 원망하시는 겁니까?”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남준의 손에서 염주의 한 알이 ‘탁' 하고 부서졌다. “남준아!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송혜선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염주는 영적인 기운이 깃든 물건이야. 함부로 부수면 불길한 일이 생길
부동건의 말은 송혜선을 전적인 신뢰를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중에 진실이 밝혀지면, 과연 부동건은 스스로를 어떻게 납득할까?’ ‘결국 속아서 살아온 날이 우스운 바보일 뿐...’ 조진숙은 아무 말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애틋한 사랑인데, 굳이 이럴 필요가 있을까?”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 서류들, 가져가.” “나 다른 뜻은 없어.” 부동건은 조진숙의 단호한 태도에 살짝 주춤했지만, 곧장 다시 설득을 시도했다. “네가 아직 날 원망하고 있다는 거 알아. 그동안... 혹시 네가...” “착각하지 마.” 조진숙은 부동건의 말을 끊었다. 더 이상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부동건은 한 발 더 다가섰다. “하지만 네가 이걸 받지 않는다면, 결국 날 아직도 원망하고 있다는 뜻 아니야?” 조진숙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가슴 깊숙이 가라앉은 감정이 불쑥 떠오르는 듯했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감정을 정리한 뒤,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부동건은 말없이 서류를 정리하더니, 숙련된 손놀림으로 만년필을 열어 조진숙 앞에 내밀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대답이었다. “후회할 거였으면, 애초에 여기 오지도 않았어.” 이번엔 조진숙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펜을 들어, 서류 맨 아래에 단호한 필체로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부디 이 선택을 후회하는 날이 오지 않길 바라.” 부동건은 서류를 덮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마음속에 짓눌려 있던 무언가가 비로소 내려앉는 듯했다. 그는 문득 나직이 말했다. “이제야... 후회한들, 이제 돌아갈 길도 없어.” 조진숙은 그 말에 가슴이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끝내 시선을 돌렸다. 담담한 표정 속에 모든 감정을 삼키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 “이건... 다 정해진 운명이야.” ‘운명의 장난...’ ‘어쩔 수
“무슨 말씀인지 압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제 뜻대로 하게 해주십시오.” 부동건의 태도가 단호했다. 이를 지켜보던 부해철이 더 이상의 말은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미 네가 마음을 정했다면, 내가 더 이상 뭐라 할 수도 없지. 다만, 앞으로 그 여자를 내 앞에 데려오지는 마라. 네가 어떻게 살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 “그리고...” 부동건이 무슨 말을 더 하려 했지만, 부해철은 손을 휘저으며 등을 돌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는 뒷모습만이 남았다. ‘그렇게까지 반대할 줄은 몰랐네...’ 부동건은 묘한 기분으로 그 자리에 멈춰섰다. ...설날 온 나라가 한 해의 끝을 보내고,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 예전에는 늘 조진숙과 상혁 모자가 함께 보내던 명절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조금 달랐다.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의 본가가 가까운 데다, 명절이 지나면 하연과 상혁의 약혼식이 있을 예정이었다.그래서 조진숙이 제안했고, 양가 가족들이 함께 부씨 가문에서 설날 저녁을 보내기로 했다. 그 덕분에 조진숙은 하루 종일 분주하게 준비에 매진했다. 그러나 제사가 끝나자마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진숙아, 새해 복 많이 받아.” 부동건이 어색한 미소를 띠며 낮은 자세로 인사를 건넸다. 평소 같았으면 송혜선과 함께 명절을 보낼 사람이, 오늘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조진숙에게는 뜻밖이었다.그녀는 담담한 얼굴로 물었다. “여긴 웬일이죠?” “잠깐 들렀어, 당신한테 할 말도 있고 해서.” 조진숙은 그의 시선을 따라 문득 집안 분위기를 둘러보았다. 송혜선이 이곳에 들어온 이후, 부씨 가문 본가는 한 지붕 아래에서도 철저하게 북쪽과 남쪽으로 나뉘어 있었다.그 경계는 뚜렷했고, 불필요한 마주침은 없었다. 부동건이 송혜선과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이후, 둘은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만약 이번 일이 없었다면, 조진숙 역시 이미 오래전에 이 집을 떠났을 터였다. “들어와.
송혜선은 급히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 했다. “아무래도 남준이가 좀 늦나 봐요.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는 게 어떨까요?” 부동건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얼굴을 굳혔다. “말 같지도 안은 소리를 하고 있어! 오늘 같은 날에, 시간 개념도 없이 늑장을 부려.” 송혜선은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남준이 오면 꼭 제가 주의를 줄게요.” “교육 똑바로 시켜. 좀 상혁이 하는 것에 반만큼이라도 신중했으면, 나도 그 녀석한테 좀더 잘해 줬을 거야.” ‘또 시작이군.’ 송혜선은 속이 쓰렸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오면 오는 거고, 못 오면 어쩔 수 없지.” 부동건은 한 치의 여지도 주지 않고 단호하게 내뱉곤,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어서 남준이를 찾아와! 오늘 제사에 참석하지 못하면, 앞으로 나를 어머니라고 부를 생각은 하지도 마.” 송혜선의 가슴이 격하게 오르내렸다. 이 모든 노력들이 사소한 실수 하나로 무너질 순 없었다. ...부씨 가문은 제사에 있어서 철저한 예법을 중시했다. 다행히도 상혁은 부동건과 수년간 제사를 지내며 익숙해져 있었고, 모든 절차를 한 치의 오차 없이 진행했다. 부씨 가문의 어른들 역시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동건아, 상혁이가 있어서 네 대가 끊길 걱정은 없겠구나.” “앞으로 부씨 가문의 대업을 상혁이가 이어간다면, 우리 늙은이들도 한시름 덜겠어.” 부동건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야 물론이죠. 상혁이는 부씨 가문의 기둥이 될 인재입니다.” 상혁은 겸손한 태도로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앞으로도 많이 지도해 주십시오.” “어디 우리가 너희 젊은이들에게 배우는 게 더 많지!” “...”제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부남준이 느지막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동건은 남준을 보자마자 눈빛이 차갑게 식었지만, 일단 감정을 누르고 말했다.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어서 와서 절부터 올려라.” 남준은 살짝 눈썹을
최씨 가문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부씨 가문의 본가는 싸늘하고 조용했다.예년과 다름없이, 설날이 되면 부동건은 집안의 남자들과 함께 조상들에게 제사를 올려야 했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른 아침부터 송혜선은 핸드폰을 손에 쥐고 부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연결음만 울릴 뿐, 남준은 끝내 받지 않았다. ‘이 녀석은 정말이지, 사람 속을 태우는 재주가 있다니까.’ 송혜선의 얼굴에 점점 초조한 기색이 드러났다. 옆에서 지켜보던 조봉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때? 아직도 전화를 안 받아?” 송혜선은 짙어진 눈매로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 녀석, 정말 사람을 신경 쓰게 만드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조봉규는 부드러운 말투로 그녀를 달랬다. “혹시 무슨 사정이 있어서 늦는 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너무 걱정 마십시오. 남준이가 철없는 아이도 아니고.” ‘철없는 아이가 아닌데 이러겠어?’ 송혜선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최대한 감정을 눌렀다. “부씨 가문의 어른들이 원래부터 남준이를 못마땅해했는데. 이런 중요한 제사까지 빠지면, 분명 뒷말이 나올 거야.” 그녀의 말투에는 이미 불안과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그러는 사이, 두 사람이 작은 응접실에서 나와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그때, 정면에서 다가오던 부동건과 마주쳤다. 부동건은 갓 외투를 정리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송혜선과 조봉규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자, 손동작이 살짝 느려지며 묘한 시선을 던졌다. “조 선생, 올해도 그렇게 혜선이 옆에 딱 붙어서 열심히 잘 보살펴 주세요.” 그 말 한마디에, 분위기가 묘하게 변했다.조봉규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회장님, 제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부동건은 묘한 눈빛을 유지한 채, 덤덤히 말했다. “혜선이가 아이를 무사히 낳으면, 그에 대한 보상도 충분히 해줄 테니
두 집안이 한데 모여 북적이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이런 귀한 순간을 마음껏 즐기며 보내다 보니, 어느덧 설날 전날이 되었다. 모두 함께 전용기를 타고 F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설날이 밝았다. 올해는 오랜만에 최씨 가문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인 데다, 기쁜 소식까지 겹친 한 해였다. 그 덕분인지 최동신은 평소보다 더욱 설 준비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최씨 가문의 본가는 분주했다. 집사와 고용인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저택 곳곳을 장식했다. 새빨간 복주머니와 길상 문양이 새겨진 장식들이 하나둘 자리 잡았고, 정원에는 화려한 등불이 걸리며 설 분위기가 한층 더 짙어졌다.하연이 계단을 내려오자, 기다렸다는 듯 최하성이 환한 얼굴로 다가왔다. “하연아, 새해 복 많이 받아라.” 그러면서 두툼한 세뱃돈 봉투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하연은 두 눈을 반짝이며 얼른 봉투를 받았다. “와! 이렇게 두꺼워요? 하성 오빠 최고!” 그때, 계단 위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있다.” 최하경이었다. 그 역시 두툼한 세뱃돈 봉투를 들고 내려왔다. “작년, 재작년 다 해외에 있어서 못 챙겨줬잖아. 그래서 올해 한꺼번에 더 두둑이 넣었다.” “와! 이건 더 두껍잖아요! 이러다 손목 나가겠어요!” 하연은 연달아 두 개의 두툼한 봉투를 받아 들고, 각각 한쪽 팔을 오빠들에게 걸었다. “오빠들 있어서 진짜 좋아요!” 최하성, 최하경 둘 다 서로를 바라보며 우애가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그리고 최하민과 예아름이 나란히 들어왔다. 추운 바깥 공기를 뚫고 들어오자마자, 하민은 아름의 목에서 목도리를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그는 안쪽에서 떠들썩하게 웃고 있는 세 남매를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집이 이렇게 활기찬 게 얼마 만이에요!” 아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러게요. 앞으로 더 행복한 일만 가득할 거예요.” 하민은 아내의 허리를 가볍
그리곤 진심을 담은 남자의 목소리가 멈추었다. 하지만 하연의 눈가에는 이미 촉촉한 눈물이 맺혀 있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글귀, 한 글자 한 글자마다 상혁이 진심을 담아 전한 마음이 느껴졌다. 이건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상혁이 하연에게 건네는 가장 솔직하고 깊은 속마음이었다. 그때, 뒤에서 들려온 부드러운 목소리. “하연아.” 하연은 본능적으로 뒤돌아섰다. 그리고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숨이 멎었다. 아까까지의 편안한 차림은 온데간데없이, 눈앞의 상혁은 새하얀 수트를 차려입고 있었다. 반듯하게 맨 보타이, 정갈하게 빗어 넘긴 머리, 그리고 손에 들린 한 다발의 꽃. ‘동화 속에서 막 나온 왕자님 같아.’ 하연은 멍하니 서서 남자를 바라보았다. 상혁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하연의 가슴이 터질 듯이 뛰었다. 남자의 시선, 남자의 걸음, 그가 다가오는 순간의 모든 것이 하연의 가슴속 깊이 새겨졌다. 마침내, 상혁은 하연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두 사람은 마주 섰고, 서로의 눈동자에 상대방의 모습이 담겼다.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떨림이 전해지는 듯했다. 조용한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 상혁이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꽃을 건넸다. 남자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하연아...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말이 끝나자, 그는 왼발을 살짝 앞으로 내디디더니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작은 벨벳 상자를 꺼냈다. 이어서 뚜껑을 열자,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혁의 눈빛에는 단 하나의 감정만이 가득 차 있었다. 바로 사랑이었다. “한때 나는 사랑이란 영화 속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널 만나고, 그게 아니란 걸 알았어.” “사랑은 영화 속 한 장면이 아니라,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서로를 아껴주고, 이해하고, 감싸주는 거라는 걸.” “그래서 나는... 너와 함께, 그런 사랑을 하
둥근 형태의 테라스는 새하얀 난간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 위로 푸릇푸릇한 덩굴식물이 감싸고 있었다. 연둣빛 야자수 잎 사이로 작고 앙증맞은 꽃들이 군데군데 피어 있었고, 은은한 향기가 바람에 실려왔다. 테라스 중앙에는 우아한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이미 차와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하연아, 우리 저기에 앉자.” 상혁은 하연의 손을 잡고 테이블로 이끌었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직접 꽃차를 따라주었다. 하연은 손으로 찻잔을 감싸고 조심스레 한 모금 머금었다. 부드러운 향이 입안 가득 퍼지며 깊은 여운을 남겼다. “이거 무슨 차예요? 향이 너무 좋아요.” “목련차야. 테라스 뒤쪽에 한가득 피어 있는데, 한번 가볼래?” ‘목련꽃이 이렇게 가까이에서 피어 있다니.’ 순백의 꽃잎이 겨울을 이겨내고 피어나는 모습이라니,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연은 찻잔을 내려놓고 기대에 찬 눈빛을 보냈다. “가보자!” 둘은 테라스를 나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하얀 원형 아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너머로 눈부신 꽃의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우와...’ 하연은 숨을 삼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순백의 목련이 바람에 살랑이고, 보랏빛 라벤더가 넘실댔으며, 튤립이 형형색색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각종 귀한 품종의 꽃들이 경쟁하듯 피어나고 있었고, 이 모든 아름다움이 한데 어우러져 마치 꿈 속을 걷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상혁은 걸음을 멈추고 어디선가 꽃으로 엮은 화관을 꺼내더니, 조심스레 하연의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하연아, 여기는 너만을 위한 꽃밭이야.” 놀란 듯 하연이 눈을 깜빡이며 상혁을 올려다보았다. ‘설마...?’ 여자의 가슴이 터질 듯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상혁은 하연의 손을 잡고, 꽃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길을 따라 걷자 길이 점점 넓어졌고, 상혁과 함께 그 길을 따라 가자 점점 하연의 시야가 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