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숨을 들이마신 서준의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그에 대한 하연의 거리감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었다. 하지만 임모연은 이미 자취를 감춘 후였다.‘최하연은 절대 알 수 없을 거야, 자기가 첫눈에 반한 사람이 우리 형이었다는 사실을 말이야.’하민철의 연설이 끝나자, 직원들의 행동이 빨라졌고, 손님들에게 음식이 제공되기 시작했다. 선유는 HL산업은행 은행장의 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그녀에게 다가와 술을 권했다. 이 테이블의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 운석이 분위기를 풀어보려 했다.“여신님, F국의 4대 가문 중 하나인 이씨 가문을 아시나요?” 하연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네, 몇 번 왕래가 있었거든요.” “이씨 가문의 둘째 도련님이 B시에 오셨다고 하더라고요.” ‘골드 크라운 때문에 우리 상혁 오빠랑 대치했다던 이씨 가문의 둘째 도련님?’하연이 곰곰이 생각해 봤다.‘이름이... 이방규였나?’“그분이 여긴 왜 오신 거죠?” 운석이 요리를 집어 선유의 그릇에 담아주었다.“영화회사를 하나 인수했대요. 어쩐지 며칠 동안 그 회사의 주가가 미친 듯이 치솟더라고요. 아무래도 그 사람의 조작이 있었나 봐요.” 강렬하지만 목적이 불분명한 접근은 자본 시장의 큰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전문 조작가인 운석은 가장 먼저 정보를 받은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서준이 말했다.“나도 들었어. 이씨 가문이 그 사람 때문에 큰 손해를 봤었다며? 그래서 이씨 가문의 어르신들도 그 사람을 탐탁지 않아 하신다던데... 물론 고위층 가문들도 그 사람한테 딸을 시집보내는 걸 꺼리겠지.” “소문은 그렇지만, 그 사람은 확실히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 비록 그 오만한 자신감으로 자기 구덩이를 파고 말았지만 말이야. 너, 이씨 가문 재산의 절반이 누구의 손에 들어갔는지 알아?” 곰곰이 생각하던 서준이 입을 열었다.“신비한 사람이던데? 이름을 아는 사람도 없더라고.” “난 알아.”운석이 일부로
칠흑같이 어둡고 아름다운 하연의 눈동자에는 다른 사람에게 없는 확고함이 있었다. 이런 그녀의 모습을 마주한 서준은 마음이 텅 비는 듯하여 천천히 손을 놓았다. “예전에는 분명 널 속인 적이 있지만, 이혼하고 나서는 단 한 번도 없었어. 너도 내가 어떤 마음인지 잘 알잖아.” “내가 말한 건 그게 아니라, 결혼하기 전이야.”온몸을 움찔거리던 서준은 입술을 꽉 다문 채 한참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뭐?”‘난 분명히 묻어두려고 했어, 얼굴을 보고도 모르는 사람 대하듯 할 생각이었다고. 하지만 한서준이 계속 치근덕대는 상황에서 바보처럼 넘어갈 수는 없어!’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네 잘못을 인정하기만 하면 너를 남자로서 존경할게. 그런데 넌, 인정할 용기조차 없는 것 같네.”하연은 한마디 한마디를 느리고 정확하게 말하며, 점차 어두워지는 서준의 표정을 주시했다. “네 형은 알아? 네가 그 사람을 대신해서 나랑 결혼했다는 사실을.” 순간, 서준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알고 있었구나.’ ‘그런데... 어떻게 알게 된 거지?’ 그가 한참 후에야 어렵게 입을 열었다.“우리 형을 만난 거야?”하연은 확답하지 않았다.“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나한테 해명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찾던 사람은 네가 아니라 네 형이었어. 하지만 너는 그걸 알면서도 말해주지 않았지. 아니, 오히려 신분을 속이고 나랑 결혼했고, 한씨 가문에서 집안일이나 하면서 내 청춘을 허비하게 했어!”“재밌었니, 한서준?” 하연이 한 걸음씩 다가서며 서준을 압박하자, 그는 천천히 물러서며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꼭꼭 숨겨오던 비밀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순간은 서준이 상상했던 것보다 더욱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는 머리가 무겁고 발이 가벼운 느낌이 들었으며, 눈앞이 어두워지고 심장이 계속해서 가라앉는 것 같았다. “넌 모든 걸 알면서도 내가 처절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만 봤어. 날 B시에 가두어 네 비서로 일하게 했고, 한씨 가문을 위해 헌신하게 했어! 그 오랜 시
“정말 말이 안 통하는구나.”하연이 몸을 돌리며 말했다.“다시는 널 보고 싶지 않아.” 그녀는 이 말을 끝으로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서준은 손을 뻗어 하연을 붙잡으려 했지만, 결국 잡지 못했다. 살랑살랑 나풀거리는 치맛자락 아래로 하연의 발목에 붕대가 감겨 있는 것이 보였다. 순간, 서준이 인상을 찌푸렸다.‘저런 방식으로 붕대를 감는 건 경찰학교를 나온 사람이나 아는 건데...’ 매년 새해, 명준은 한씨 가문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애틋하게 여긴 강영숙은 항상 사람을 시켜 무언가를 보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명준과 서준이 조우하는 일이 생기는데... 그해에는 폭우가 내렸고, 경찰학교는 외딴곳에 있었다. 한참 도로를 달리던 서준은 산사태를 만나 운전기사와 함께 매몰되었지만, 경찰학교 학생들이 두 사람을 구조해 주었다. 그리고 그들 중 한 사람이 명준이었다. 명준은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침착한 서준의 모습에 놀랐다.“한서준?” “한명준 형?”“네 발을 좀 봐. 돌에 맞아서 다쳤나 본데, 내가 붕대를 좀 감아줄게. 아마 며칠 푹 쉬면 괜찮아질 거야.”이 말을 마친 명준은 곧장 물병을 들고 물을 받으러 갔다. 서준과 거의 접촉이 없었던 명준은 그가 자신과 닮았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분명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서준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외쳤다.“새해는 다 같이 집에서 맞이하자.” 명준은 발걸음을 멈췄으나 뒤돌아보지 않았다.“난 안 갈 거야.” 기억에서 벗어난 서준이 눈을 가늘게 떴다.‘붕대를 감는 방법이 형이랑 똑같아.’‘그새 또 최하연을 만난 거야?’ 테이블로 돌아온 하연은 고개를 숙이고 먹기만 했으며,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이 모습을 본 선유가 깜짝 놀라며 말렸다.“언니, 왜 그래요?” 하연은 배가 꽉 차서야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는 듯했다.“별거 아니야, 그냥 개한테 좀 물렸을 뿐이야.” 서준이 테이블로 돌아오자, 운석이 그를 동정스럽게 바라보며 입 모양으로
이방규의 곁에는 조용해 보이지만 명품으로 치장하여 사람들이 알아봐 주기를 원하는 여자가 있었다. 방규의 팔짱을 낀 그녀가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선유 씨, 상상했던 것만큼 아름다우시네요.” 선유는 방규에게 물었는데, 그녀가 먼저 말을 가로챈 셈이었다. 순간, 주변 사람들의 눈빛이 이상하게 변하자, 방규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팔을 빼며 말했다.“아닙니다.” 그 여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선유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쩐지... 제가 못 뵈는 동안 안목이 나빠지신 줄 알았어요.”젊고 아름다운 선유는 조명 아래에서 더욱이 빛나고 있었다. 방규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벌써 이렇게 자란 데다가 말도 조리 있게 잘하다니... 남자친구는 있어요?” 선유가 막 입을 열려던 찰나, 하민철에게 저지당했다.“선유는 아직 어려서 그런 일은 전혀 급하지 않아요.” “결혼할 나이는 된 것 같은데요, 뭘.” 선유는 소위 ‘이씨 가문의 둘째 도련님’이라는 사람을 몇 년 동안 보지 못했는데, 다시 만나자마자 이토록 무례하게 말하는 것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연은 곧장 나아가는 운석을 붙잡지 못했다.“이 대표님도 마흔을 넘겼는데, 아직 미혼이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이 20대 초반의 아가씨에게 결혼을 재촉하다니... 조금 무례하시네요.” 술잔을 든 운석은 다소 반항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다가갔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방규와 건배했다. 운석을 그윽이 바라보던 방규가 하민철을 바라보았다.“이분은...” 운석이 잔을 꽉 쥐었다. 그는 투자은행 업계의 고수일 뿐만 아니라, B시는 물론이며 M국의 투자 분야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그런 나를 모르는 척하면서 창피를 주려 해?’ 그가 하민철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투자은행의 부사장이자, 나씨 가문의 장남인 나운석입니다. 편한 대로 부르시면 됩니다.” 방규의 눈동자에 흥미가 스쳤다. 그가 선유를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아, 나씨 가문의 장남이 벌써 이렇게 자랐군요. 기억하실
병원 로비의 대형 스크린에는 이번 항공기 사고가 실시간으로 보도되고 있었다. 최하연은 세 명뿐인 생존자 중의 하나로 두 다리에 붕대를 감은 채 중환자실 병상 위에 누워 있었다.그때, 손에 들린 핸드폰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다음에 다시 걸어주세요.”사고가 나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남편 한서준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설마 그가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여객기 사고를 모를 일은 없었다. 사고 당시, 현장에는 승객들의 시신이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그녀는 사고의 충격과 죽음의 공포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결혼한 지 3년이나 되었지만 남편은 그녀가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 연락이 되지 않았다.하연은 마음 한 켠이 시려 오는 것을 느꼈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들려왔다. 한참이나 멍하게 있던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발신자를 확인했다. 할머니였다. 하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여보세요.”그녀가 잔뜩 쉰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전화 건너편에서 친절하면서도 연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하연이, 이 할미가 너 때문에 너무 놀라서 제 명에 못 죽겠구나. 어디 다친 데는 없고? 서준이가 옆에 같이 있지?]강영숙은 서준의 친할머니로 한씨 집안 사람들 중 유일하게 하연에게 관심을 갖는 분이었다. “서준 씨는...”머뭇거리는 그녀의 말에 강영숙이 무언가를 눈치 챈 듯했다. [이런 정신 나간 놈을 봤나! 비서로 또 아내로, 해외 출장간 남편 일을 다 봐주고 있는데 이렇게 큰 사고가 터졌는데도 코빼기도 안보여? 기다려봐라! 이 할미가 정신나간 그 녀석을 가만 두나!]그녀가 다시 물었다.[지금 어느 병원에 있어? 집사를 보낼 테니 기다리렴!]하연이 병원 주소를 알려주자 강영숙은 전화를 끊었다.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하연은 두 달 전, 1주일 정도 출장 일정이 잡혀 있던 한서준의 일정보고서가 생각났다.핸드폰을 쥐고 있는 그녀의 손이 떨려왔다.‘그 때 생긴 아이인 거야?’그녀는 한서준의 숨겨진 아내로 오래 전부터 비밀계약을 맺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껏 남편의 스캔들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한서준 사장이 여자친구에게 참 각별한 것 같아... 저 여자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 보아하니 곧 공식발표가 날 것 같은데?”“그러게. 나도 아까 검색해 봤어. 네 생각엔 저 사람이 여자친구가 맞는 것 같아?”카트를 밀고 가던 젊은 간호사가 옆에 있는 간호사에게 핸드폰 속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그녀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맞아, 맞아! 이 여자야! ST그룹 둘째 딸! 한서준이랑 너무 잘 어울리지 않아? 하늘이 맺어준 커플 같아!”두 사람은 호들갑을 떨며 반대편으로 걸어갔다.‘ST 그룹이라...’퇴원 수속을 마친 하연은 집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면서도 마음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반쯤 열린 창문 아래 핸드폰 화면의 불빛이 창백한 하연의 얼굴을 비췄다. 수 없이 검색해 봤지만 한서준과 ST 그룹과의 연관성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B시의 잘 나가는 두 명문가 집안이 이런 식으로 엮이다니 이상해.’서준의 본가에 도착하니 거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눈엣가시 같은 시누이 대신 서준의 할머니인 강영숙 여사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우리 하연이 왔구나! 네가 복이 많아서 그 큰 사고 중에도 무사했구나.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숨이 넘어갈 뻔했지 뭐냐.”“할머니, 전 괜찮아요.”하연은 올라가 쉬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웃으며 말했다.“할머니, 사실 저 좀 피곤해요.”“그래, 그래. 얼른 올라가서 쉬어라. 서준이한테 연락해 놨으니까 곧 올 거다.” 하연은 몸을 숙이는 순간 심한 통증이 몰려와 얼굴이 일그러졌다.강영숙은 하연이 괴로워하는 모습의 이유가 서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연의 머릿속에 서준의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당신이랑 그 여자, 대체 언제부터 만난 거야?”하연이 겨우 몸을 추스르며 침대에 기대앉았다.서준은 그녀가 3년전 혼인신고를 할 때보다 훨씬 말랐다는 것을 알아챘다. 어찌나 야위었던지 바람이 불면 날아가버릴 것 같았다.“당신 내 뒷조사를 한 거야?”그의 안색이 변했다.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으로 보여요? 내가 입원했던 병원에서 내 두 눈으로 당신들 두 사람을 봤어요.”그녀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지만 그 어느때보다 딱 부러지는 말투였다.순간, 하연은 심장이 찢기는 듯한 괴로움을 느꼈다.하지만 서준의 얼굴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그는 하연이 사고가 난 것을 알면서도 걱정해하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하는 말들을 들으며 혐오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부부로 살았던 3년이라는 시간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며느리로서 일을 열심히 했지만 하는 일 마다 트집잡는 시어머니와 자신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시누이에게 하연은 정성을 다했다. 집에서는 주부로 또 회사에서는 헌신적인 비서 역할을 도맡았다. 그녀는 서준의 할머니 강영숙 여사의 뜻에 따라 아들, 딸 잘 낳는 좋은 손자며느리가 되려고 노력했다.3년 동안 그만큼 했으면 강영숙 여사에게 가족으로서의 의리는 충분히 지킨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떠한가?3년간 하연은 서준의 몸에 손가락 하나도 댈 수가 없었다. 한 방을 쓰고 있었지만 침대는 따로 썼기 때문이었다. 하연은 밀려오는 통증을 참으며 차가운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그러다 무슨 용기가 났는지 소리를 내어 가볍게 웃었다.“당신 어머니는 내가 애도 못 낳으면서 결혼한 양심도 없는 여자라고 했죠. 그런데 지금 당신이 밖에서 다른 여자와 아이를 가진 걸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죠?”간신히 침대에 기대고 있는 그녀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하지만 고개를 꼿꼿하게 쳐들고는 그의 옷깃을 잡았다.하지만 곧바로 굵은 그의 손에 잡히고 말았다.한서준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혜경이는 내 세컨드
하연은 서준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그리고 그의 복근을 따라 내려가며 입을 맞추었다. 오랫동안 감춰온 서준의 대한 갈망 탓인지 귀밑까지 붉어졌다.그녀는 손놀림을 멈추지 않은 채 쉰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어떻게 이 집의 작은 안주인이 되었는지 잊었냐고요?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제 임무는 당신의 아이를 낳는 거예요. 지금 나는 내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거고요.“어떻게 그런 말을?!”화를 내는 서준의 탄탄한 복근이 울룩불룩 움직였다.“방 안에 최음제를 좀 뿌렸어요. 조금만 참으면 곧 괜찮아질 거예요. 저는 제 임무를 위해 아이를 가지려는 것뿐이에요.”그녀는 더 대담하고 과감하게 행동했다. 전에는 한번도 보여준 적 없는 요염한 모습이었다.하연의 적극적인 도발에 그의 몸이 본능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했고 호흡도 거칠어졌다.그는 이것이 최음제 때문인 것을 알고는 이성을 되찾았다. 그리고는 하연의 거침없는 손을 꽉 움켜 잡았다.“최하연, 너 정말 역겨워.”서준의 말에 그녀의 끓어오르던 욕망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하연은 눈에 눈물이 고인채로 마지막으로 물었다. “나를 안는 게 그렇게 구역질나요?”“그래!”서준은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를 밀쳐냈다.더는 그녀와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다. 서준은 하연이 벗긴 옷을 집어 들고 다시 입기 시작했다.그는 단추도 잠그지 않은 채 성큼성큼 걸어 나가버렸다. 방문이 ‘쾅’하고 닫히면서 주위가 다시 조용해졌다.하연은 그가 나가자 긴장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눈에는 서준을 원망하는 눈빛이 가득했다. 서준은 방을 나서며 생각했다.‘이 정도로 했으면 있던 마음도 없어지겠지...’...다음날 아침, 하연은 아직 성치 않은 다친 다리를 절뚝거리며 짐을 싼 여행가방을 끌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집안 살림을 돕는 가정부가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강영숙 여사는 새벽기도를 드리러 가느라 집을 비운 상태였다.“어머, 새언니! 죽다 살아난 지 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