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말이 안 통하는구나.”하연이 몸을 돌리며 말했다.“다시는 널 보고 싶지 않아.” 그녀는 이 말을 끝으로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서준은 손을 뻗어 하연을 붙잡으려 했지만, 결국 잡지 못했다. 살랑살랑 나풀거리는 치맛자락 아래로 하연의 발목에 붕대가 감겨 있는 것이 보였다. 순간, 서준이 인상을 찌푸렸다.‘저런 방식으로 붕대를 감는 건 경찰학교를 나온 사람이나 아는 건데...’ 매년 새해, 명준은 한씨 가문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애틋하게 여긴 강영숙은 항상 사람을 시켜 무언가를 보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명준과 서준이 조우하는 일이 생기는데... 그해에는 폭우가 내렸고, 경찰학교는 외딴곳에 있었다. 한참 도로를 달리던 서준은 산사태를 만나 운전기사와 함께 매몰되었지만, 경찰학교 학생들이 두 사람을 구조해 주었다. 그리고 그들 중 한 사람이 명준이었다. 명준은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침착한 서준의 모습에 놀랐다.“한서준?” “한명준 형?”“네 발을 좀 봐. 돌에 맞아서 다쳤나 본데, 내가 붕대를 좀 감아줄게. 아마 며칠 푹 쉬면 괜찮아질 거야.”이 말을 마친 명준은 곧장 물병을 들고 물을 받으러 갔다. 서준과 거의 접촉이 없었던 명준은 그가 자신과 닮았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분명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서준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외쳤다.“새해는 다 같이 집에서 맞이하자.” 명준은 발걸음을 멈췄으나 뒤돌아보지 않았다.“난 안 갈 거야.” 기억에서 벗어난 서준이 눈을 가늘게 떴다.‘붕대를 감는 방법이 형이랑 똑같아.’‘그새 또 최하연을 만난 거야?’ 테이블로 돌아온 하연은 고개를 숙이고 먹기만 했으며,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이 모습을 본 선유가 깜짝 놀라며 말렸다.“언니, 왜 그래요?” 하연은 배가 꽉 차서야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는 듯했다.“별거 아니야, 그냥 개한테 좀 물렸을 뿐이야.” 서준이 테이블로 돌아오자, 운석이 그를 동정스럽게 바라보며 입 모양으로
이방규의 곁에는 조용해 보이지만 명품으로 치장하여 사람들이 알아봐 주기를 원하는 여자가 있었다. 방규의 팔짱을 낀 그녀가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하선유 씨, 상상했던 것만큼 아름다우시네요.” 선유는 방규에게 물었는데, 그녀가 먼저 말을 가로챈 셈이었다. 순간, 주변 사람들의 눈빛이 이상하게 변하자, 방규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팔을 빼며 말했다.“아닙니다.” 그 여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선유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쩐지... 제가 못 뵈는 동안 안목이 나빠지신 줄 알았어요.”젊고 아름다운 선유는 조명 아래에서 더욱이 빛나고 있었다. 방규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벌써 이렇게 자란 데다가 말도 조리 있게 잘하다니... 남자친구는 있어요?” 선유가 막 입을 열려던 찰나, 하민철에게 저지당했다.“선유는 아직 어려서 그런 일은 전혀 급하지 않아요.” “결혼할 나이는 된 것 같은데요, 뭘.” 선유는 소위 ‘이씨 가문의 둘째 도련님’이라는 사람을 몇 년 동안 보지 못했는데, 다시 만나자마자 이토록 무례하게 말하는 것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연은 곧장 나아가는 운석을 붙잡지 못했다.“이 대표님도 마흔을 넘겼는데, 아직 미혼이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이 20대 초반의 아가씨에게 결혼을 재촉하다니... 조금 무례하시네요.” 술잔을 든 운석은 다소 반항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다가갔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방규와 건배했다. 운석을 그윽이 바라보던 방규가 하민철을 바라보았다.“이분은...” 운석이 잔을 꽉 쥐었다. 그는 투자은행 업계의 고수일 뿐만 아니라, B시는 물론이며 M국의 투자 분야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그런 나를 모르는 척하면서 창피를 주려 해?’ 그가 하민철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투자은행의 부사장이자, 나씨 가문의 장남인 나운석입니다. 편한 대로 부르시면 됩니다.” 방규의 눈동자에 흥미가 스쳤다. 그가 선유를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아, 나씨 가문의 장남이 벌써 이렇게 자랐군요. 기억하실
손을 뻗은 방규가 서영을 품에 안았다.“모른다는데 왜 이러시는 겁니까?” 서준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완전히 변해버린 그녀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는 아무리 화가 나도 이곳에서 소란을 피울 수 없었다. 왜냐하면 HL산업은행의 연회는 소란을 피울만한 곳이 아니었으며, 곳곳에 고위 간부들과 정치인이 있었기 때문에 HL산업은행을 난처하게 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게다가 이방규의 세력은 HT그룹보다 더 강력했기 때문에 쉽게 건드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하연은 서준이 간신히 참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방규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상석으로 돌아가자, 운석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 선유의 손을 잡은 하연은 그녀에게 귓속말했고, 선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하연은 더 이상 오래 머물지 않고 곧장 HL산업은행의 연회를 떠났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정태훈이 말했다.“이방규 대표님께서 투자한 영화사는 요즘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회사입니다. 우리 DS그룹의 영화사와는 경쟁상대인 셈이죠.” “그 사람이 최근에 계약한 연예인들을 좀 알아봐 줘.”하연이 깊은숨을 들이마셨다.‘원래 조사할 생각은 없었는데... 이렇게 된 이상, 꼭 조사할 수밖에 없겠어.’ [한서영?]수화기 너머에서 의심을 품은 상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정말 많이 변했더라고요.”“참, 이방규가 F국 출신이라던데, F국은 오빠가 잘 알잖아요. 혹시... 뒷조사를 좀 해줄 수 있을까요?” 수화기 너머에서 누군가가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약간의 잡음이 들렸다. 상혁은 문을 열고서야 입을 열었다.[알겠어.]하연은 그의 기분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렇게 두 사람은 잠시 침묵에 빠졌다. 이내 상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접질린 데는 좀 어때?] 하연이 고개를 숙이고 발목을 바라보았다.‘이제 별로 아프지 않아.’그녀가 이현이 감아준 붕대를 풀며 말했다.“괜찮아요.” “저기... 이방규의 행적에 대한 이야기를
이튿날, DS그룹으로 달려온 선유는 어젯밤의 상황을 알려주었다. “이방규의 옆에 있던 사람이요... 공개적으로 사귄 지 3,4개월이나 된 여자 친구래요. 그런데 신분이 불분명해서 이씨 가문에서는 인정하지 않나 봐요. 아무래도 진지한 관계는 아닌 것 같아요.” 하연은 한창 서류를 뒤져보고 있었다.“한씨 가문에 HT그룹까지 합쳐도 이씨 가문의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할 거야. 그리고 한서준이 아프리카로 보냈다던 한서영은 어떻게 돌아온 걸까?” “아무도 몰라요.”선유가 고개를 저었다.“이방규가 한서영의 과거를 모두 지웠다고 하더라고요.” “재밌네, 한서영한테 이런 능력이 있는 줄은 몰랐거든.” 하연이 손에 든 펜을 돌리기 시작했다.“어젯밤은 어땠어?” “운석 오빠가 몇 번이나 이방규한테 말을 걸어보려고 했는데, 절대 대답하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운석 오빠가 화가 많이 났어요.” ‘나운석이 그런 일을 당하는 날이 오는구나.’이렇게 생각한 하연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한서영은 카드 테이블에 앉아 있었는데, 한서영의 배경에 두려움을 느낀 재벌가 아가씨들이 카드를 내밀기도 했어요. 아마 꽤 많은 돈을 벌었을 텐데도 건방진 태도를 유지하면서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더라고요.”서영의 얼굴을 떠올린 선유는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랐다.“예전에는 그 여자가 눈앞에 서 있어도 쳐다보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몰라보게 달라져서 돌아왔다고요!” 하연이 못 말린다는 듯 그녀에게 물 한 잔을 따라주었다.“한서영은 이방규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야. HL산업은행의 큰 아가씨인 네가 화를 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선유는 단번에 맥이 풀렸다.“하지만 저도 HL산업은행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사실 그 여자랑 별로 다를 것도 없어요.” 하연은 어리둥절했다. “언니, 우리 아빠는 아직도 제가 아빠의 곁에 있길 바라세요.” “왜? 나씨 가문은 세계적으로도 부족함이 없고, HL 산업은행에 딱 어울리는 상대잖아.”하연은 선유와 운석이 이미 서로에게 감정이 있다
한서영이 그 소리를 듣자마자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어머, 진짜 매니저님이 오셨네요.”하연은 여유롭게 서영의 손에 있던 가방을 빼앗아 핸드폰으로 스캔했다. “공식 사이트에서 인증한 진짜 가방이에요. 뭐 할 말 있어요?”장예나는 하연이 오자마자 팔을 잡았다. “지금 저 여자가 일부러 시비 걸려고 온 거야. 나도 방금 스캔했어.”서영은 두 팔을 교차하며 오만하게 말했다. “그건 당신들이 보관을 제대로 못 해서 흠집이 생긴 거겠죠. 난 이 가방을 받지 않을 거예요. 당신들이 전액 배상해야 하니까요.”“정말 비겁하시네요!” 예나는 화가 나서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연을 넘어서려 했으나 하연에게 저지당했다.“한서영 씨, 당신이 이 가방을 받지 않겠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전액 배상도 가능하고요. 그런데 제가 공식적으로 한마디만 하죠. 앞으로 당신을 위해 맞춤 제작은 하지 않겠다고요, 어때요?”다시 말해서 서영은 이제부터 이 브랜드의 블랙리스트에 올리겠다는 것이었다.서영의 얼굴이 순간 변했다. 이 브랜드의 가방은 신분의 상징인데, 더 이상 들 수 없다면 큰 망신이었다.“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죠. 그냥 오랜만에 최하연 씨를 봐서 농담 좀 한 거예요.”서영은 돌아서서 옆에 있는 친구들에게 말했다. “너희도 최하연 씨를 알지? DS그룹의 최 사장님, 정말 대단하지 않아? 나랑 예전부터 알던 사이야.”그 친구들은 서영이 이방규의 여자 친구라는 걸 알고 매우 공손하게 말했다. “아, 친구셨군요.”“친구는 아니야. 사실 난 최하연 씨의 전 올케였어, 몰랐지? 예전에 우리 집 모든 집안일은 최하연 씨가 다 했어. 빨래하고, 청소하고, 요리까지... 그때 최하연 씨가 해준 음식이 좀 그립네. 올케, 아니, 전 올케, 나한테 다시 요리해 줄 수 있어요?”서영의 눈꼬리가 올라가며 도전적인 표정을 지었다.하연은 눈을 굴리며 속으로 후회했다.‘예전의 나는 얼마나 멍청했길래 한서준 집안에서 그렇게 많은 흑역사를 남긴 거지?! 그래서 한서영도 지금 날 이렇게까
“그만해요.” 서영이 음침한 얼굴로 말을 끊었다. 그녀는 예전에 하연에게 당한 적이 있었고, 하연이 실제로 이런 인맥을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이 많은 사람 앞에서 감히 내기할 수 없었다.하연은 재미있다는 듯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서영은 그녀에게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 너무 자만하지 마. 곧 너도 고통을 맛보게 될 거야.”하연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멀리 보이는 실루엣을 응시했다. “기다리고 있을게.”서영은 분노에 찬 채로 몸을 돌려 사람들과 함께 매장을 나섰다.순식간에 매장 안은 조용해졌다.하연은 표정을 거두었고, 하선유는 급히 물었다. “언니, 이방규한테 정말 첫사랑인 여자가 있어요?”“아니, 다 내가 지어낸 거야.”예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한서영은 언니한테 속을 수밖에 없어요. 그건 한서영이 이방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뭐 그렇게 대단한 척을 하는 건지...” 그때 부남준이 동행한 여자와 함께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가방 찾으러 왔어요.”선유도 급히 말했다. “저도요.”예나는 바로 자세를 고쳐 잡고 번호를 확인하며 물었다. “따라오세요.”두 사람은 예나를 따라 다른 쪽으로 갔다. 남준은 몸을 돌리며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다시 만나네요. 최 사장님은 여전히 말솜씨가 좋고 담대하네요.”하연은 팔짱을 끼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부 사장님도 여전하네요. B시에 와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여자가 끊이질 않으니 말이에요.”“최 사장님도 만만치 않죠. F국에서 한 명, B시에서 또 한 명을 낚았으니, 우리 형이 알면 뭐라고 할까요?”남준은 낮게 말하며 손에 든 맞춤형 라이터를 만지작거렸다. 라이터 끝에는 그의 영어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하연은 남준을 응시하며 미간을 찌푸렸고,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루머를 퍼뜨리는 건 부끄러운 일잖아요, 부 사장님.”이 순간, 하연은 남준이 한서준에 대해 뭔가 알아내고
하연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모든 사진은 그날 밤 손이현과 함께 있던 장면들이었다. 이현이 하연의 발을 주무르고, 대화를 나누고, 그녀를 부축해 계단을 오르는 모습이 사진 속에 적나라하게 담겨 있었다. 사진을 찍은 각도도 의도적이었고, 두 사람은 마치 연인처럼 보였다.하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다시 한번 남준의 비열함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이건 진실이 아니에요.”“진실이든 아니든, 우리 형이 보면 그게 진실이 되는 거죠.”남준은 마지막 사진으로 넘겼다. 사진 속 이현은 외롭게 마당에 서 있었다. “이 사진 좀 봐요. 마치 남녀 간의 즐거운 일이 다 끝난 후에 마음 편하게 담배를 태우는 것 같지 않아요?” 하연은 고개를 들고 남준을 노려보더니 갑자기 그의 얼굴을 향해 손바닥을 날렸다. 매장 안에 뺨을 때리는 소리가 아주 크게 울렸다.다행히 그때는 매장에 아무도 없었다.남준은 얼굴을 옆으로 돌리며 혀로 입가를 핥았는데, 그는 피 맛을 느꼈다.“방금 감히 날 때렸어?”“너는 참 비열하고 추악해. 네가 날 협박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내가 뭘 시키겠다고 말도 안 했는데, 벌써 그렇게 초조해할 필요는 없지 않나?”하연의 손바닥이 저릿저릿 아파왔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남준이 자신의 약점을 쥐고 있으며, 틀림없이 자신에게 어떤 불가능한 요구를 할 것임을 느꼈다.“최하연, 너 지금 털을 세운 작은 고양이처럼 보여.” 남준은 미소를 지으며 하연에게 다가와 느긋하게 그녀의 옷깃을 정리해 주었다. “걱정하지 마. 당장은 부상혁에게 말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네가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한다면, 그땐 어떻게 될지 모르지.”‘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한다면? 내가 어떤 일을 해야 부남준 이놈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거야? 그건 아무도 모르지!!’ 하연은 주먹을 꽉 쥐고 다시 남준을 밀어냈다. “내가 직접 상혁 오빠한테 말하면 돼. 절대로 네 협박에 굴복하지 않을 거야.”그녀는 그렇게 말한 뒤 곧장 매장 안쪽의 휴게실로 들어갔다.
하연의 목소리엔 약간의 곤란함이 배어 있었다.마침 그때, 강성훈이 문을 열고 들어오며 자료를 들고 있었다. 그는 이현이 통화를 끝내길 기다렸다. 이현은 손을 들어 성훈에게 먼저 앉으라는 신호를 보내고, 자신은 창가로 걸어갔다. [다른 누군가와의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데요?]하연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매우 중요해요.”[협박은 얼마나 심각해요?]하연은 이 문제가 이현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감히 말하지 못하고, 침을 삼켰다. “목숨이 걸린 건 아니지만, 그냥... 사업 경쟁 정도?”이현은 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듯했다. [제가 하연 씨라면, 잠시 참을 거예요. 시간을 두고 해결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요. 정말 중요한 관계라면, 한 번 깨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거든요.]이상하게도, 이현이 이 말을 할 때 하연은 그의 말 속에서 묘한 쓸쓸함을 느꼈다.“손 선생님, 혹시 제가 선생님의 마음속에 아픈 곳을 건드린 거예요?”[아니에요, 다 지나간 일이에요.]잠시 말을 멈추더니, 이현이 물었다.[혹시 제 도움이 필요해요?]하연은 이미 마음속으로 답을 정한 듯, 급히 감사를 표했다. “제가 스스로 해결할 수 있어요.”성훈은 시계를 한 번 보고, 통화가 5분 동안 계속된 것을 확인했다. 이현은 전화를 끊은 후에도 5분 동안 창가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성훈은 보고할 일이 좀 급했지만, 이현을 방해할 수 없었는데, 결국 참지 못하고 말을 꺼냈다. “사장님, 찾으라고 하신 자료 가져왔습니다.”이현은 그제야 돌아서서 자료를 받았다. “순조로웠어? 그쪽에서 널 괴롭히진 않았고?”“아니요, 손이현 사장님의 일이라고 하니 아주 협조적이었습니다. 예전의 ‘한 팀장님’ 덕분에 저쪽 사람들이 아직도 사장님을 존경하고 있더라고요.” 성훈은 웃으며 말하려다가 잠시 멈추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데 오늘은 왜 마스크를 안 쓰셨어요...”성훈은 이현이 얼굴을 다친 후 마스크를 벗은 모습을 처음 보았다. 얼굴이 완전히 달라진 것은 알고는 있었지만
상혁은 풍등을 들고 하연과 함께 마당으로 나왔다. 타이밍 좋게 하인이 라이터를 건네주고는 조용히 물러났다. 멀지 않은 곳에서 부남준이 조용히 고개를 내밀었다. 몰래 지켜보던 그는,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풍등을 펼치는 모습을 바라봤다. 상혁이 직접 가운데 심지에 불을 붙였다. 뜨거운 열기가 천천히 풍등을 부풀게 만들었고, 풍등은 두 사람 앞에서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연아, 빨리 소원 빌어!” 하연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간절히 소원을 빌었다. 상혁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또 다른 소원을 빌었다. ‘언제나 우리 둘이 해마다, 해마다, 서로를 마주할 수 있기를.' “다 됐어요.” 하연이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 눈빛에는 반짝이는 빛이 서려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서서히 손을 놓았다. 풍등은 하늘을 향해 천천히 날아올랐고, 점점 멀어지더니 마침내 한 점이 되어 사라졌다. “어떤 소원 빌었어?” 상혁이 손끝으로 하연의 귓불을 살짝 어루만지며 물었다. 하연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깜빡이며 말했다. “소원은 말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대요.” “그래? 그럼, 네 소원이 꼭 이루어지길 바랄게.” 두 사람은 다시 눈을 마주쳤다. 상혁의 숨소리가 깊어졌다. 그는 하연의 턱을 살며시 잡고,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을 맞췄다. 조심스러웠던 키스는 점점 더 깊어져 갔다. 하연은 숨이 가빠졌다. 상혁을 밀어보려 했지만, 오히려 더 깊이 끌어안겼다. 여자의 허리는 유연하게 휘어졌고, 상혁의 등은 팽팽한 활처럼 긴장됐다. 결국, 하연도 상혁의 목을 감싸 안고, 키스에 응답했다. 그러나 그 순간, 불청객 같은 전화벨 소리가 분위기를 깨뜨렸다. 하연은 화들짝 놀라며, 급하게 상혁을 밀어냈다. 그녀의 얼굴은 빨갛게 익은 사과처럼 새빨개졌다. “전화 울리는데요?” 하연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져 있었다. 묘하게 사람을 간지럽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상혁은
다른 곳에서 있던 조봉규가 소란이 일자마자 급히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송혜선에게 다가가며 다급히 말했다. “설날인데, 뭐하러 이렇게 화를 내...” 조봉규가 입을 여는 순간, 남준의 온몸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남준의 시선이 날카롭게 쏘아붙었고, 조봉규는 본능적으로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애써 태연한 척하며 한 발 다가섰다. 송혜선의 팔을 조심스레 부축하며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건강이 우선입니다.” ‘건강?’남준은 손에 쥔 염주를 힘껏 움켜쥐었다. 힘이 들어간 손등에는 핏대가 서고, 눈빛은 살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리고 시선은 서로 닿아 있는 두 사람의 손목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입가에 엷은 조소가 떠올랐다. “조 선생님, 참으로 열정적인 분이시군요. 설날에도 근무 태세를 유지하시다니.” 조봉규는 눈치가 빠른 인물이었다. 당연히 그의 말 속에 담긴 조롱을 알아챘다. 그러나 겉으로는 한껏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며 머리를 숙였다. “별말씀을요. 환자의 곁을 지키는 게 제 본분입니다.” 남준은 가만히 조봉규를 노려보다가, 짧고 날 선 경고를 던졌다. “그렇다면 본분에만 충실하시죠. 여긴 부씨 가문의 본가이니까.”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남준아!” 송혜선이 다급히 나섰다. 남준을 나무라는 말투였지만, 그 속에는 조봉규를 감싸려는 의도가 분명히 깔려 있었다. 남준의 눈빛은 더욱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송혜선은 오히려 기세를 올려 쏟아내듯 말했다. “네가 좀 더 나서서 잘했더라면, 부상혁한테 밀릴 일도 없었어! 내가 왜 조진숙한테 설날마다 굽신거려야 하냐고?” “지금, 어머니는 나를 원망하시는 겁니까?”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남준의 손에서 염주의 한 알이 ‘탁' 하고 부서졌다. “남준아!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송혜선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염주는 영적인 기운이 깃든 물건이야. 함부로 부수면 불길한 일이 생길
부동건의 말은 송혜선을 전적인 신뢰를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중에 진실이 밝혀지면, 과연 부동건은 스스로를 어떻게 납득할까?’ ‘결국 속아서 살아온 날이 우스운 바보일 뿐...’ 조진숙은 아무 말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애틋한 사랑인데, 굳이 이럴 필요가 있을까?”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 서류들, 가져가.” “나 다른 뜻은 없어.” 부동건은 조진숙의 단호한 태도에 살짝 주춤했지만, 곧장 다시 설득을 시도했다. “네가 아직 날 원망하고 있다는 거 알아. 그동안... 혹시 네가...” “착각하지 마.” 조진숙은 부동건의 말을 끊었다. 더 이상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부동건은 한 발 더 다가섰다. “하지만 네가 이걸 받지 않는다면, 결국 날 아직도 원망하고 있다는 뜻 아니야?” 조진숙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가슴 깊숙이 가라앉은 감정이 불쑥 떠오르는 듯했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감정을 정리한 뒤,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부동건은 말없이 서류를 정리하더니, 숙련된 손놀림으로 만년필을 열어 조진숙 앞에 내밀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대답이었다. “후회할 거였으면, 애초에 여기 오지도 않았어.” 이번엔 조진숙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펜을 들어, 서류 맨 아래에 단호한 필체로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부디 이 선택을 후회하는 날이 오지 않길 바라.” 부동건은 서류를 덮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마음속에 짓눌려 있던 무언가가 비로소 내려앉는 듯했다. 그는 문득 나직이 말했다. “이제야... 후회한들, 이제 돌아갈 길도 없어.” 조진숙은 그 말에 가슴이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끝내 시선을 돌렸다. 담담한 표정 속에 모든 감정을 삼키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 “이건... 다 정해진 운명이야.” ‘운명의 장난...’ ‘어쩔 수
“무슨 말씀인지 압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제 뜻대로 하게 해주십시오.” 부동건의 태도가 단호했다. 이를 지켜보던 부해철이 더 이상의 말은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미 네가 마음을 정했다면, 내가 더 이상 뭐라 할 수도 없지. 다만, 앞으로 그 여자를 내 앞에 데려오지는 마라. 네가 어떻게 살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 “그리고...” 부동건이 무슨 말을 더 하려 했지만, 부해철은 손을 휘저으며 등을 돌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는 뒷모습만이 남았다. ‘그렇게까지 반대할 줄은 몰랐네...’ 부동건은 묘한 기분으로 그 자리에 멈춰섰다. ...설날 온 나라가 한 해의 끝을 보내고,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 예전에는 늘 조진숙과 상혁 모자가 함께 보내던 명절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조금 달랐다.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의 본가가 가까운 데다, 명절이 지나면 하연과 상혁의 약혼식이 있을 예정이었다.그래서 조진숙이 제안했고, 양가 가족들이 함께 부씨 가문에서 설날 저녁을 보내기로 했다. 그 덕분에 조진숙은 하루 종일 분주하게 준비에 매진했다. 그러나 제사가 끝나자마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진숙아, 새해 복 많이 받아.” 부동건이 어색한 미소를 띠며 낮은 자세로 인사를 건넸다. 평소 같았으면 송혜선과 함께 명절을 보낼 사람이, 오늘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조진숙에게는 뜻밖이었다.그녀는 담담한 얼굴로 물었다. “여긴 웬일이죠?” “잠깐 들렀어, 당신한테 할 말도 있고 해서.” 조진숙은 그의 시선을 따라 문득 집안 분위기를 둘러보았다. 송혜선이 이곳에 들어온 이후, 부씨 가문 본가는 한 지붕 아래에서도 철저하게 북쪽과 남쪽으로 나뉘어 있었다.그 경계는 뚜렷했고, 불필요한 마주침은 없었다. 부동건이 송혜선과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이후, 둘은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만약 이번 일이 없었다면, 조진숙 역시 이미 오래전에 이 집을 떠났을 터였다. “들어와.
송혜선은 급히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 했다. “아무래도 남준이가 좀 늦나 봐요.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는 게 어떨까요?” 부동건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얼굴을 굳혔다. “말 같지도 안은 소리를 하고 있어! 오늘 같은 날에, 시간 개념도 없이 늑장을 부려.” 송혜선은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남준이 오면 꼭 제가 주의를 줄게요.” “교육 똑바로 시켜. 좀 상혁이 하는 것에 반만큼이라도 신중했으면, 나도 그 녀석한테 좀더 잘해 줬을 거야.” ‘또 시작이군.’ 송혜선은 속이 쓰렸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오면 오는 거고, 못 오면 어쩔 수 없지.” 부동건은 한 치의 여지도 주지 않고 단호하게 내뱉곤,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어서 남준이를 찾아와! 오늘 제사에 참석하지 못하면, 앞으로 나를 어머니라고 부를 생각은 하지도 마.” 송혜선의 가슴이 격하게 오르내렸다. 이 모든 노력들이 사소한 실수 하나로 무너질 순 없었다. ...부씨 가문은 제사에 있어서 철저한 예법을 중시했다. 다행히도 상혁은 부동건과 수년간 제사를 지내며 익숙해져 있었고, 모든 절차를 한 치의 오차 없이 진행했다. 부씨 가문의 어른들 역시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동건아, 상혁이가 있어서 네 대가 끊길 걱정은 없겠구나.” “앞으로 부씨 가문의 대업을 상혁이가 이어간다면, 우리 늙은이들도 한시름 덜겠어.” 부동건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야 물론이죠. 상혁이는 부씨 가문의 기둥이 될 인재입니다.” 상혁은 겸손한 태도로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앞으로도 많이 지도해 주십시오.” “어디 우리가 너희 젊은이들에게 배우는 게 더 많지!” “...”제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부남준이 느지막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동건은 남준을 보자마자 눈빛이 차갑게 식었지만, 일단 감정을 누르고 말했다.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어서 와서 절부터 올려라.” 남준은 살짝 눈썹을
최씨 가문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부씨 가문의 본가는 싸늘하고 조용했다.예년과 다름없이, 설날이 되면 부동건은 집안의 남자들과 함께 조상들에게 제사를 올려야 했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른 아침부터 송혜선은 핸드폰을 손에 쥐고 부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연결음만 울릴 뿐, 남준은 끝내 받지 않았다. ‘이 녀석은 정말이지, 사람 속을 태우는 재주가 있다니까.’ 송혜선의 얼굴에 점점 초조한 기색이 드러났다. 옆에서 지켜보던 조봉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때? 아직도 전화를 안 받아?” 송혜선은 짙어진 눈매로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 녀석, 정말 사람을 신경 쓰게 만드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조봉규는 부드러운 말투로 그녀를 달랬다. “혹시 무슨 사정이 있어서 늦는 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너무 걱정 마십시오. 남준이가 철없는 아이도 아니고.” ‘철없는 아이가 아닌데 이러겠어?’ 송혜선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최대한 감정을 눌렀다. “부씨 가문의 어른들이 원래부터 남준이를 못마땅해했는데. 이런 중요한 제사까지 빠지면, 분명 뒷말이 나올 거야.” 그녀의 말투에는 이미 불안과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그러는 사이, 두 사람이 작은 응접실에서 나와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그때, 정면에서 다가오던 부동건과 마주쳤다. 부동건은 갓 외투를 정리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송혜선과 조봉규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자, 손동작이 살짝 느려지며 묘한 시선을 던졌다. “조 선생, 올해도 그렇게 혜선이 옆에 딱 붙어서 열심히 잘 보살펴 주세요.” 그 말 한마디에, 분위기가 묘하게 변했다.조봉규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회장님, 제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부동건은 묘한 눈빛을 유지한 채, 덤덤히 말했다. “혜선이가 아이를 무사히 낳으면, 그에 대한 보상도 충분히 해줄 테니
두 집안이 한데 모여 북적이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이런 귀한 순간을 마음껏 즐기며 보내다 보니, 어느덧 설날 전날이 되었다. 모두 함께 전용기를 타고 F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설날이 밝았다. 올해는 오랜만에 최씨 가문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인 데다, 기쁜 소식까지 겹친 한 해였다. 그 덕분인지 최동신은 평소보다 더욱 설 준비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최씨 가문의 본가는 분주했다. 집사와 고용인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저택 곳곳을 장식했다. 새빨간 복주머니와 길상 문양이 새겨진 장식들이 하나둘 자리 잡았고, 정원에는 화려한 등불이 걸리며 설 분위기가 한층 더 짙어졌다.하연이 계단을 내려오자, 기다렸다는 듯 최하성이 환한 얼굴로 다가왔다. “하연아, 새해 복 많이 받아라.” 그러면서 두툼한 세뱃돈 봉투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하연은 두 눈을 반짝이며 얼른 봉투를 받았다. “와! 이렇게 두꺼워요? 하성 오빠 최고!” 그때, 계단 위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있다.” 최하경이었다. 그 역시 두툼한 세뱃돈 봉투를 들고 내려왔다. “작년, 재작년 다 해외에 있어서 못 챙겨줬잖아. 그래서 올해 한꺼번에 더 두둑이 넣었다.” “와! 이건 더 두껍잖아요! 이러다 손목 나가겠어요!” 하연은 연달아 두 개의 두툼한 봉투를 받아 들고, 각각 한쪽 팔을 오빠들에게 걸었다. “오빠들 있어서 진짜 좋아요!” 최하성, 최하경 둘 다 서로를 바라보며 우애가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그리고 최하민과 예아름이 나란히 들어왔다. 추운 바깥 공기를 뚫고 들어오자마자, 하민은 아름의 목에서 목도리를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그는 안쪽에서 떠들썩하게 웃고 있는 세 남매를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집이 이렇게 활기찬 게 얼마 만이에요!” 아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러게요. 앞으로 더 행복한 일만 가득할 거예요.” 하민은 아내의 허리를 가볍
그리곤 진심을 담은 남자의 목소리가 멈추었다. 하지만 하연의 눈가에는 이미 촉촉한 눈물이 맺혀 있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글귀, 한 글자 한 글자마다 상혁이 진심을 담아 전한 마음이 느껴졌다. 이건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상혁이 하연에게 건네는 가장 솔직하고 깊은 속마음이었다. 그때, 뒤에서 들려온 부드러운 목소리. “하연아.” 하연은 본능적으로 뒤돌아섰다. 그리고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숨이 멎었다. 아까까지의 편안한 차림은 온데간데없이, 눈앞의 상혁은 새하얀 수트를 차려입고 있었다. 반듯하게 맨 보타이, 정갈하게 빗어 넘긴 머리, 그리고 손에 들린 한 다발의 꽃. ‘동화 속에서 막 나온 왕자님 같아.’ 하연은 멍하니 서서 남자를 바라보았다. 상혁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하연의 가슴이 터질 듯이 뛰었다. 남자의 시선, 남자의 걸음, 그가 다가오는 순간의 모든 것이 하연의 가슴속 깊이 새겨졌다. 마침내, 상혁은 하연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두 사람은 마주 섰고, 서로의 눈동자에 상대방의 모습이 담겼다.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떨림이 전해지는 듯했다. 조용한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 상혁이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꽃을 건넸다. 남자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하연아...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말이 끝나자, 그는 왼발을 살짝 앞으로 내디디더니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작은 벨벳 상자를 꺼냈다. 이어서 뚜껑을 열자,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혁의 눈빛에는 단 하나의 감정만이 가득 차 있었다. 바로 사랑이었다. “한때 나는 사랑이란 영화 속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널 만나고, 그게 아니란 걸 알았어.” “사랑은 영화 속 한 장면이 아니라,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서로를 아껴주고, 이해하고, 감싸주는 거라는 걸.” “그래서 나는... 너와 함께, 그런 사랑을 하
둥근 형태의 테라스는 새하얀 난간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 위로 푸릇푸릇한 덩굴식물이 감싸고 있었다. 연둣빛 야자수 잎 사이로 작고 앙증맞은 꽃들이 군데군데 피어 있었고, 은은한 향기가 바람에 실려왔다. 테라스 중앙에는 우아한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이미 차와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하연아, 우리 저기에 앉자.” 상혁은 하연의 손을 잡고 테이블로 이끌었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직접 꽃차를 따라주었다. 하연은 손으로 찻잔을 감싸고 조심스레 한 모금 머금었다. 부드러운 향이 입안 가득 퍼지며 깊은 여운을 남겼다. “이거 무슨 차예요? 향이 너무 좋아요.” “목련차야. 테라스 뒤쪽에 한가득 피어 있는데, 한번 가볼래?” ‘목련꽃이 이렇게 가까이에서 피어 있다니.’ 순백의 꽃잎이 겨울을 이겨내고 피어나는 모습이라니,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연은 찻잔을 내려놓고 기대에 찬 눈빛을 보냈다. “가보자!” 둘은 테라스를 나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하얀 원형 아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너머로 눈부신 꽃의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우와...’ 하연은 숨을 삼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순백의 목련이 바람에 살랑이고, 보랏빛 라벤더가 넘실댔으며, 튤립이 형형색색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각종 귀한 품종의 꽃들이 경쟁하듯 피어나고 있었고, 이 모든 아름다움이 한데 어우러져 마치 꿈 속을 걷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상혁은 걸음을 멈추고 어디선가 꽃으로 엮은 화관을 꺼내더니, 조심스레 하연의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하연아, 여기는 너만을 위한 꽃밭이야.” 놀란 듯 하연이 눈을 깜빡이며 상혁을 올려다보았다. ‘설마...?’ 여자의 가슴이 터질 듯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상혁은 하연의 손을 잡고, 꽃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길을 따라 걷자 길이 점점 넓어졌고, 상혁과 함께 그 길을 따라 가자 점점 하연의 시야가 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