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속에는 전희진이 어린 남자와 함께 붙어있는 모습이 담겨 있었는데 관계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전희진은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입을 열었다. “최하연 씨, 이게 무슨 뜻입니까?” “사모님과 주 회장 두 사람의 차이는 한쪽은 이미 폭로됐지만 다른 한쪽은 아직 아니라는 것뿐입니다.” “내가 연예인도 아니고 이런 게 폭로된다고 해도 난 잃을 게 없어요.” “과연 그럴까요?” 하연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커피잔을 흔들더니 말했다. “그쪽 세계에서 전희진 사모님에 대해 수군대도 괜찮다는 겁니까? 그들의 재밌는 안줏거리가 될 덴데 말입니다.” 전희진은 순간 몸이 경직되었는데 분명 지금 이 상황을 신경 쓰고 있는 것이었다. 하연이 서준의 아내였을 때 이 명문가 사모들의 세계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이들은 특별히 직업이 있는 게 아니었고 매일 놀고먹으면서 남의 호박씨를 까는 게 일상이었다. 그리고 남에 대해 의논하던 데로부터 자신이 그 의논의 대상이 되는 것의 차이는 정말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만큼 치명적이었다. 전희진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더니 말했다. “지금 여론은 모두 하정인과 주현빈에 관한 이야기들뿐인데 내가 나서도 해도 별로 달라질 건 없을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직접 나서 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럼 최하연 씨의 말은?” “전희진 사모님께는 아직 아이가 없으시다고 들었습니다. 하정인이 어떤 여자이든 간에 아이는 진짜 주 회장의 자식이 맞으니 앞으로 모든 재산은 그 아이에게 상속될 수 있습니다.” “그 꼴을 보고 계실 수 있겠습니까?” 하연의 매 한 마디 말은 모두 전희진의 마음에 콕콕 박혔다. 전희진은 주먹을 꽉 잡더니 말했다.“당연히 그 꼴은 못 보죠.” “그러니 이번이 절호의 기회입니다.” 하연은 커피를 한 모금 들이마시더니 말을 이어갔다. “제 생각엔 주 회장이 다시는 하정인과 접촉하게 못하게 하려면 사모님께서 직접 그녀의 야심을 끊어버려야 합니다.” 이 말에 전희진의 두 눈에서 투지가 타올랐다. “
아침 일찍 정태훈이 상황을 보고했다. “하정인 남편과 약속을 잡았습니다.” “어떻게 잡은 거야?” “저희 DS그룹처럼 큰 회사가 그런 작은 회사의 사장과 약속을 잡는 건 일도 아니죠.” 하연은 피식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약속 장소는?” “DS그룹 로비의 카페입니다.” 한편 서준이 사무실에 도착하자 모연이 이미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한 대표는 꼭 제 시간에 올 줄 알았어.” 서준은 귀찮은 듯 말했다. “무슨 일이야?” “지금 추세로 보니 며칠만 더 있으면 JJ그룹은 완전히 망할 것 같아서 한 대표에게 충고 하나만 하려고. 절대 최하연을 도울 생각은 하지 마.” 임모연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아주 싸늘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서준은 경멸에 찬 눈빛으로 모연을 쳐다보았다. 며칠 간 하연 쪽에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거로 보아 서준은 그녀가 아직 해결 방법을 못 찾고 있다고 생각했고 조금씩 걱정이 되기도 했다. “말 다 끝났어?” 모연은 순간 정색했다. “구 실장, 손님 바래다 드려.” 구동후는 바로 사무실로 들어왔고 입을 열었다. “모연 씨, 나가주시죠.” 모연은 서준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말했다. “한서준, 이번 스캔들의 불씨는 네가 직접 나에게 던져준 거야. 만약 네가 나서서 최하연을 돕는다면 이 사건의 배후가 누군인지 그녀에게 똑똑히 알려줄 거야.” “구 실장!” 서준은 대답 대신 동후를 다시 큰소리로 부를 뿐이었다.하지만 동후가 직접 움직이기도 전에 모연은 스스로 사무실을 떠나 버렸다. 서준은 넥타이를 풀어 헤쳤고 한껏 짜증이 난 듯 보였다. 바로 이때 책상 위에 있던 핸드폰의 진동이 울렸는데 하연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서준은 순간 미간을 찌푸리더니 얼굴에는 곧바로 웃음꽃이 피었고 죄책감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전화를 받았다. “하연?” [한서준 씨, 잠깐 시간 돼요? 할 말이 있어요.]서준은 다시 미간을 찌푸렸고 뭔가 마음이 약간 찔려왔다. “무슨 일인데?” [JJ그룹에 관한 얘기 들었죠?
하연은 뺏은 핸드폰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에 강진택은 마구 반항했다. “당신 뭐하는 거야! 당장 내놔! 최하연!” “너 이거 범죄야. 지금 당장 신고할 수도 있어.” “그럼 얼른 날 잡아넣어 보시지?” 하연이 웃으며 말했다. “네가 먼저 허위 사실 유포로 잡혀갈 지 아니면 내가 잡혀갈 지 궁금하네?” 어떤 사람을 상대할 때에는 가끔 이런 수단이 필요하기도 했다. 하연은 강진택이 인스타에 올린 글들을 하나 하나씩 일일이 삭제하고 있었다. “당신, 하정인의 사생아가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그러나 강진택은 당연히 입을 열 리 없었고 뒤에 있던 보디 가드가 그의 팔을 꽉 누르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 “말할게, 말한다고! 말하면 되잖아!” “하정인에게 아이가 있다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그게 아니라면 애초가 내가 그녀와 결혼할 수도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아이의 생부가 누구인지는 몰랐어. 그런데 그 후에...” 강진택은 하정인과 결혼에 성공했지만 그녀는 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가정에 소홀했다. 때문에 강진택은 외로웠다는 이유로 그녀의 매니저와 불륜을 저질렀다고 이실직고했다. 매니저는 하정인 곁에 오랫동안 함께 했던 사람으로서 아이의 친부가 주현빈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그렇게 두 사람이 작심하고 이번 일을 벌인 것이었다. 하연은 들으면서 콧방귀를 꼈고 제일 마지막 게시글까지 완벽히 지웠다. “아이를 받아들이더니 이런 식으로 이용해? 정말 한심한 놈이네.” 하연은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내뱉았다. “잘들어. 이 인스타 게시글은 처음부터 올린 적 없었던 거라고 생각해.” “계정도 삭제할 거고 앞으로 또다시 비슷한 글을 올리거나 이상 행동이 발견되면 내가 당신 회사를 사버릴 수도 있으니까 알아서 조심해!” 이에 강진택은 또 마구 반항하려 했다. “독한 년! 당신이 뭔데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데? 내 뒤에 누가 있는 지 알아?” 계정 삭제까지 완료한 하연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알고 있어.” 이 말에 강진택은 멈
서준은 당연히 손을 놓을 수 없었고 더욱 세게 잡으면서 말했다. “지금 하정인의 남편을 잡고 놔주지 않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어. 날 원망하는 것도 의미가 없는 짓이고 말이야. 지금은 해야 할 더욱 중요한 일이 있어.” 하연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났고 보디 가드에게 손짓하여 강진택을 내치도록 했다. 카페 안은 다시 고요해졌고 이 공간에는 두 사람밖에 없었다. “그럼 한 대표님께서 가르쳐 주시죠. 제가 지금 뭘 해야 하나요?” 서준은 입술을 꽉 깨물더니 수중의 서류를 하연에게 건넸다. “JJ그룹과는 연을 끊고 다른 길로 새로 시작하는 거야.” “앞으로 연말까진 아직 3개월이나 더 있어. 하연, 지금 다시 시작해도 안 늦어. 내가 네 앞길을 완전히 막은 건 아니라는 말을 하는 거야.” 하연은 뭔가 수상했고 서준이 건넨 서류를 펼쳐보았다. 이건 한 부의 새로운 프로젝트 투자 기획서였고 얼핏 ‘신재생 에너지’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하연은 참지 못하고 바로 그 기획서를 덮어 버렸다. “이제 보니 처음부터 다 이러려고 준비했던 거였어? 나와 JJ그룹의 협력을 막더니 갑자기 또 자비를 베푸는 척 새로운 투자 기획서를 넘겨? 한서준, 너 세 살짜리 애야? 이렇게 장난 치는 거 힘들지도 않아?” 이 말에 서준을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 대답했다. “너도 사업가니 일이 잘못되고 있다는 걸 눈치 챘으면 바로 발을 뺄 줄도 알아야지. 지금 내가 제시한 게 완벽한 해결방안 아닌가? 대체 왜 그렇게까지 화를 내는 건데?” “그래, 참 감사하네. 네가 아니었다면 난 이런 해결방안이 필요하지도 않았을 텐데 말이야.” 서준은 자신이 저지른 일의 죄책감에 더 이상 하연의 말을 받아 칠 수 없었다. “하연, 주현빈의 이번 일은 빨리 폭로됐기에 다행이라고 생각해. 만약 앞으로 정말 같은 배를 탔을 때 터졌다고 생각해 봐. 그때는 진짜 되돌릴 수 없었을 거야.” “일이 이 지경까지 왔으니 일단 JJ그룹과 협력을 중단하는 게 가장 급선무야. 알아들어?” 그러
하연은 하정인이 발표한 그 공식입장을 한번 훑어보았고 자신의 생각했던 것과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하정인은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렸고 주현빈은 아무 것도 몰랐으며 알고 난 뒤에는 아이 아버지의 책임을 다했다고 밝혔고 미안함의 표시로 영원히 연예계에서 은퇴할 것을 선언했다. 전희진은 두 시간도 안 되는 새에 하정인을 구워삶았던 것이다. 하연은 그제야 한 시름 놓을 수 있었다. 이때 전희진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아이는 지금 제가 데려왔습니다.]“사모님 뜻대로 되신 걸 축하합니다.” [하연 씨가 저에게 부탁한 일은 모두 끝냈습니다. 이제 저의 제지가 있는 한 하정인은 평생 동안 다시는 대중들 앞에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하연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고 창가로 걸어가 B시의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하정인을 설득한 겁니까?” 그러나 전희진이 별 거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한 엄마에게 있어 가장 큰 약점은 바로 그의 자식이니까요.][하정인에게 주현빈이 무너지면 그녀의 아이도 좋은 결과는 없을 거라 했을 뿐이예요. 그녀도 그런 결과를 바란 건 아닐 테니 자연히 자신이 지금 뭘 해야 하는지 알아차렸겠죠.][당연히 그 여자가 평생동안 놀고먹으면서 지낼 만큼의 돈도 두둑이 챙겨 주었지요. 그 조건으로 아이는 영원히 만나지 않기로 했고요.]“양쪽 다 득이 되는 상황이니 주 회장님도 만족하실 겁니다.” 하연은 잠시 멈칫하더니 말을 이어갔다. “전희진 사모님께서는 인자하신 분이니 아이를 곤란하게 하지는 않을 거라 믿습니다.” 이에 전희진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였습니까?][하연 씨, 이번 일은 제가 하연 씨를 도운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연 씨가 저를 도운 거예요. 앞으로 제가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하연은 알았다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때 진미화가 이해가 되지 않는 다는 듯이 물었다. “전희진 사모님의 방금 하신 말씀 무슨 뜻일가요?” “아이를 손에 넣
하연은 기쁨을 숨기지 못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직 안 졸려.” [내가 맞춰볼까? JJ그룹의 스캔들이 드디어 해결돼 기뻐서 잠이 안 오는 거 아니야?]하연은 순간 놀랐고 이미 묻히기 시작한 이 일이 국외에까지 퍼질 리 없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주현빈이 알려준 거야?” 상혁은 하연의 물음에 대해 정면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나에겐 다 알아내는 방법이 있지. 왜, 아닐 것 같아?]“아이고, 그렇다고 치자.” 하연은 품에 안은 인형의 귀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오빠가 걱정할까 봐 일부러 말 안 한 거야.” [그래, 우리 하연이는 스스로 해결할 능력이 되니까.]상혁의 목소리는 아주 자상했고 다정한 말투까지 더해져 전화기 너머의 하연은 두 볼이 새빨개졌다. “오빠 일은 잘 되어 가요?” ‘잘 되어 가냐고?’하연이 이 물음을 던졌을 때 상혁은 DL그룹의 사무실에 앉아 있었고 이때 황연지가 커피와 샌드위치를 가져왔다. 며칠 만에 상혁은 엄청난 기세로 부남준의 인맥들을 전부 쓸어버렸고 DL그룹 전체가 한번 뒤집혔으며 누구도 감히 미래의 이 상속자를 무시할 수 없었다. [다 잘 되어가고 있어.]“절대 무리하면 안 돼. 부남준 그 사람이 오빠를 또 괴롭히면 말해. 내가 또 가서 혼 내줄게.” 분명 사나운 말투였지만 상혁의 귀에는 너무나 귀엽게 들렸고 그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전에 설사약 두 봉지로 이미 그 자식은 널 벼르고 있어. 널 다시 만나면 그가 먼저 널 괴롭히려 들 걸?]“난 하나도 안 무서워요.” 통화음이 전화기를 통해 새어 나왔고 황연지는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여자의 목소리에 순간 멈칫했다. 그녀의 다년간 쌓인 데이터로 분석해볼 때 하연은 능력도 좋고 총명하며 대담한 동시에 여인 특유의 우아함까지 잃지 않는 그런 여자였다. 그리고 상혁은 이미 하연에게 푹 빠진 듯했다. [크리스마스 전에 보러 갈게.]이에 하연은 의아한 듯 물었다. “그럼 DL그룹은 어쩌고요?” [걱정 마.]“혹시 나 때문에 오
보름도 안 되는 사이에 JJ그룹의 사건은 완전히 해결되었고 해외와의 합작도 점차 순조로워지고 있었다. 하연은 점점 긴장이 풀려 홀가분했고 호현욱은 화가 잔뜩 난 채 배 아파했다. 이에 호현욱 곁에 있던 부하들은 조금이라도 그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모두 다 그를 피해 다녔다. 이 소식을 하연에게 전하던 정태훈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고 하연도 머릿속에 호현욱의 모습이 상상하면서 피식 웃음을 보였다. “동쪽의 그 땅에 관한 일은 어떻게 돼어 가고 있어?” “꽤 순조로는 것 같습니다.” 하연은 전에 상혁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잠시 침묵에 잠겼는데 필경 정부의 사업이니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정말 호현욱 이사와 임모연이 그렇게 득을 보게 놔둬야 하는 걸까?’ 하연은 이런 생각들이 잠깐 스쳤다. 저녁때쯤, 그녀는 정예나와 함께 쇼핑을 간 백화점에서 임모연을 마주치게 되었다. 심지어 전희진도 마주쳤는데 그녀의 곁에는 어린 남자 아이가 있었고 이 아이는 하연을 보고는 아줌마라고 불렀다. “이 분은 나이가 어리니 누나라고 부르는 게 맞아.” 하연은 웃으며 말했다. “아줌마라고 불러도 돼. 처음 만나는데 아줌마가 선물을 준비 못했네? 갖고 싶은 거 있으면 골라봐. 아줌마가 사줄게.” 그러나 이 남자 아이는 긴장한 듯 전희진의 뒤에 숨어 버렸고 그녀는 그런 아이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누가 선물 사준다고 하면 고맙습니다 하고 당당하게 받으면 돼. 자꾸 그렇게 숨기만 하는 아이는 주씨 가문의 아들로 될 자격이 없어!” 전희진의 이 기세에 예나는 깜짝 놀랐고 하연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전희진 사모님 너무 한 거 아니야?” 그런데 하연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저 멀리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게 말이야. 최하연 아줌마가 사준다고 할 땐 냉큼 받으면 돼. 어차피 저 아줌마는 넘치는 게 돈인 부자거든.” 이 사람은 바로 임모연이었고 방금 산 백을 들고 유유히 걸어왔다. 동시에 이 모습을 본 전희
모연은 하연의 말에 발끈하여 앞으로 3개월 간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생활해야 할 참이었다. 하연은 한심한 그 모습에 우스꽝스럽다 생각했는데 모연이 내민 그 카드를 보는 순간 웃음기가 바로 사라졌다.이를 발견한 정예나가 물었다. “왜 그래?’ “저 카드, 뭔가 낯익어.” 어디서 본 적 있는 것 같았지만 기억이 나질 않았다. 정예나도 한번 확인하려 했지만 이미 모연이 그 카드를 감춘 뒤였다. 이때 모연은 쇼핑백을 들고 하연의 앞으로 다가왔다. “봤죠? 샀어요. 부디 최하연 씨가 저보다 못한 걸 사진 않길 바라요. 그러면 너무 웃기잖아요!” 하지만 하연은 그녀의 말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고 곧바로 매장으로 들어가 직원에게 백 하나를 포장해달라고 부탁했다. 이 백은 아까부터 하연이 마음에 들었던 것인데 가격도 적당하고 디자인도 아주 독특했다. 이를 본 모연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겨우 4천만 원이야? 최하연 씨, 이걸 산다고요?” 하연은 의아한 듯 되물었다. “전 단지 제 마음에 드는 물건을 사러 온 것뿐이지 임모연 씨와 비기러 온 건 아니니까요. 뭐 다른 문제라도 있나요?” 모연은 그제야 자신이 또 하연에게 당했다는 걸 눈치 챘다. 앞으로 3개월 간 B시 상류층들 사이의 의논 주제가 지금 또 하나 늘어난 것이다. 모연은 쇼핑백을 꽉 잡았고 전에 있었던 모든 일까지 통 털어 생각했는데 이제야 왜 민씨 가문이 하연에게 질 수밖에 없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이유는 바로 하연이 너무 교활하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모연은 부랴부랴 현장을 떠났다. 이때 전희진이 하연의 곁으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저 여자 성이 임씨 입니까?” 하연이 대답했다. “네, 전희진 사모님도 아십니까?” “아뇨, 모릅니다. 하지만, 뭔가 낯이 익습니다.” 전희진은 상류 세계에 40여 년을 몸 담고 있는 사람이었기에 여태껏 만나온 사람은 수없이 많았는데 왜 앤지 모연이 유난히 익숙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도대체 누구인지는 정확히 생각나지 않았다.
상혁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살짝 웃음을 지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검진을 마친 뒤, 하연은 선명한 초음파 사진을 손에 들고 있었다. 사진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손끝으로 사진 속 동그란 그림을 가리켰다. “여기 봐봐요. 이게 우리 아기래요.” 목소리엔 설렘과 떨림이 그대로 묻어났다. 상혁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하연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눈엔 이미 감동이 차올라 있었다. 상혁은 조심스레 하연의 아랫배에 손을 얹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 순간... 난 정말 너무 행복해.” ‘네가 내 옆에 있고, 우리 아이가 이렇게 자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야.’ 하연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남자아기일까요, 여자아기일까요?” 그녀의 눈빛에는 이미 사랑스러운 미래가 그려지고 있었다. 상혁은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어.” 하연은 고개를 살짝 돌려 상혁을 바라봤다. 그 눈동자엔 별빛이 머물러 있는 듯 반짝였다. “그래요... 건강하게만 태어나면... 그걸로 충분해요.”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았고, 서로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따뜻함을 느꼈다. 그 순간, 상혁의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하곤 순간 눈빛이 깊어졌다. 화면엔 낯익은 이름이 선명히 떠 있었다. [부동건.]‘이 타이밍에...?’ ‘설마 무슨 일 생긴 건가?’ 지난 연회 이후, 부동건과는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의 파장이 얼마나 컸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송혜선과 조봉규. 그 두 사람 때문에 무너진 자존심. 그리고 결국, 부동건은 송혜선을 아이와 함께 본가에서 내쫓았다는 소문까지 들려왔다. 하연이 조용히 말했다. “받아봐요. 무슨 일일 수도 있으니까.” 상혁은 하연의 손등을 가볍게 토닥이고, 그녀를 옆에 있는 의자에 앉힌 후
부동건은 갑작스레 거칠게 기침을 터뜨렸다. “컥”‘피 맛...?’ 목 안에서 치밀어 오르는 피비린내를 억지로 삼켰다. 손등에 핏줄이 선명히 드러나고, 이성의 끈은 이미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부동건의 시선이 천천히 송혜선과 조봉규를 향했다. ‘죽여버리고 싶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너희들... 너희들...” 부동건의 입술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송혜선은 극도의 공포에 휩싸였다. ‘이건 아니야... 이렇게 끝나면 안 돼...’ 그녀는 급히 앞으로 다가가 부동건의 팔을 붙잡았다. “회장님... 우리, 조 선생님이랑 그냥 산후 회복 얘기하던 중이었어요. 진짜예요, 저희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부동건의 손이 송혜선의 뺨을 후려쳤다. 짝! 순간 정적. 강하게 내리친 손바닥 소리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숨을 멈춘 듯 조용해졌다. 송혜선의 얼굴 한쪽이 순식간에 붉게 부어올랐다. 눈가가 덜덜 떨리며, 눈물도 같이 맺혔다. “이 천하의... 배은망덕 같은 것. 내가 너를 어떻게 믿었는데... 감히 날 기만해?” 뒤에 서 있던 하객들 사이에서도 탄식이 흘러나왔다. “저 정도였어?” “저게 진짜였네... 소문이 아니고...” “...”송혜선은 뺨의 통증을 애써 무시한 채, 다시 붙잡았다. “회장님, 제발... 오해예요. 저희 그런 사이 아니에요. 저는... 당신뿐이었어요.” 그러나 부동건은 그 손마저 거칠게 뿌리쳤다. 그리고는 힘껏 송혜선의 복부를 발로 찼다. 퍽!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송혜선은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조봉규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아니야... 지금 나섰다간 나도 끝장이야.’ 한 걸음 다가가려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회... 회장님... 저희...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하지만 그 한마디가 기름을 붓는 꼴이 됐다. 부동건은 그대로 조
일 순간 충격의 정점이었다.부동건은 들고 있던 와인잔을 그대로 바닥에 내던졌다. 쨍그랑! 깨지는 소리와 동시에 모든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저... 저런 미친...!” 그는 화면을 가리키며, 얼굴을 붉힌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숨이 거칠게 턱 끝까지 차올랐다. ‘송혜선... 네가 감히!’ 주변 하객들도 이미 술렁이기 시작했다. “저게 진짜야?” “부 회장님 딸이... 아니라고?” “와... 이건 완전히 생각지도 못한 미친 패륜이야, 상상도 못 했어.” 오늘의 연회는 더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지만, 이제 와선 최악의 스캔들 파티가 되어버렸다. ‘이 연회가... 전부 거짓된 일 때문에 생긴 일이란 말이야?’ ‘우리, 사기당한 거네. 다 같이.’ 그때 스크린이 멈췄고, 연회장 전체의 조명이 다시 환히 켜졌다. 하객들은 본능적으로 두리번거리며 부동건을 찾았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부동건은 아무런 대답 없이 어금니를 꽉 물고, 몸을 떨며 계단 쪽으로 향했다. 하객들은 그 뒤를 따라붙었다. ‘뭔가 일어나겠군...’ ‘이번엔 진짜 끝장이다.’ ...같은 시각, 2층 방 안. 송혜선은 조봉규의 손등을 다독이며 조용히 말했다. “조금만 참아. 며칠만 지나면 내가 다시 올게.” 조봉규는 싱긋 웃으며, 그녀의 허벅지를 장난스럽게 움켜쥐었다. “응. 기다릴게, 자기.”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문이 거칠게 흔들렸고,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쾅!! “송혜선! 당장 안 나와?!” 송혜선의 온몸이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조봉규의 팔을 꽉 잡았다. ‘망했다.’ “어떡해, 부동건이 올라왔어.” 두 사람은 당황하며 방 안을 둘러봤지만, 창문 하나 없는 좁은 방엔 도망칠 곳조차 없었다. ‘안 돼... 이렇게 들키면, 끝장이야. 정말 끝이야.’ 송혜선은 급하게 숨을 고르며 애써 이성을 붙잡으려 했다. ‘진정해. 침착해야 돼.
연회장 안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부동건은 손에 잔을 들고, 연신 들어오는 축하 인사에 밝은 표정으로 답하고 있었다. “회장님, 따님이 너무 예뻐요. 축하드립니다!” “아이고, 이런 경사는 자주 있어야죠!” ‘그래, 이 정도면 완벽하지. 오늘은 그 누구도 나를 흔들 수 없어.’ 그렇게 술이 한 잔, 두 잔 더해지며 연회장의 분위기도 점점 무르익고 있었다. 그때, 갑작스레 모든 조명이 꺼졌다. 탁! “어, 뭐야?” “불 꺼졌어! 왜 이래?” “아야, 누가 내 발 밟았어!” “...”순식간에 어둠이 덮친 연회장. 사람들의 놀란 목소리와 웅성거림이 퍼졌다. 잔을 들고 있던 부동건은 순간 정지된 듯 멈췄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당장 가서 확인해봐!” “네, 회장님!” 직원들이 급히 움직였고, 부동건은 진정시키려는 듯 손을 들고 말했다. “여러분, 당황하지 마시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전기 쪽 문제인 것 같습니다. 금방 복구됩니다.” 사람들은 잠시 멈춰 서서 어둠 속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그 순간, 연회장 한쪽 벽면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이 조용히 켜졌다. “위이잉...” 어둠 속에서 갑작스레 터진 화면의 빛에 모두가 눈을 찌푸리며 반사적으로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 빛이 익숙해질 무렵, 누군가가 터트린 외마디 감탄에, 시선이 일제히 스크린으로 향했다. “어... 저거 뭐야? 헉, 저게... 말이 돼?” 그리고, 그 스크린 안에 있는 건... 분명 두 남녀의 은밀한 장면이었다. 화면 속, 분명히 누군가를 알아본 듯한 목소리가 터졌다. “저 여자... 그분 아니야?” “옆에 있는 남자는...?” “헐, 이건 진짜 레전드다.” “아, 눈 버렸어. 이게 뭐야, 이게...” “...”사람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순식간에 연회장은 도저히 되돌릴 수 없는 혼돈의 도가니로 빠져들고 있었다.사람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송혜선이 복도 입구에 막 다다랐을 때였다. 갑작스레 어디선가 튀어나온 그림자가 그녀를 뒤에서 껴안았다. “꺄악!” 놀란 송혜선은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고, 누군가 재빨리 그녀의 입을 막았다. “나야! 나야, 혜선아.” 익숙한 목소리에 송혜선은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남자의 손을 떼어내며 차갑게 말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이 사람, 지금 제정신인 거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어서 급히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송혜선은 그제야 숨을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흘기듯 말했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미쳤어, 사람들 눈에 띄면 어쩌려고!!” 그 말엔 명백한 불만과 경계심이 섞여 있었다. 조봉규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되는데...’ 그 순간의 긴장, 그리고 복잡한 감정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조봉규의 시선이 송혜선의 얼굴에서 천천히 내려앉았다. 송혜선은 산후라 그런가, 몸매는 훨씬 더 부드럽고 풍성해져 있었다. ‘이러니까, 잊으려고 해도... 더 생각이 나잖아.’ 그는 순간 충동적으로 송혜선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 당황한 송혜선이 눈을 부릅떴다. “뭐 하는 거야!! 지금...” 그러나 조봉규는 말없이 송혜선을 옆방으로 이끌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작게 ‘탁’ 하고 울렸다. 좁은 공간, 차오르는 침묵. 송혜선은 남자를 노려보며 벽에 등을 댔다. “정신 차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조봉규는 그녀를 바라보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다들 홀에 있잖아. 아무도 몰라.” 남자의 말투엔 간절함과 조급함이 섞여 있었다. 이건 단순한 욕망이 아니었다. 그리움, 억눌림, 그리고 못다 한 말들. 그는 조심스럽게 송혜선의 턱선을 손끝으로 만지며 말했다. “혜선아... 나, 정말 많이 참았어.” ‘이 사람 또 이러네...’ 송혜선의 심장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분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정문 쪽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부동건이 고개를 돌리자, 최하연이 부상혁의 팔을 자연스럽게 끼고 등장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많은 이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잘생긴 남자와 우아한 여자의 조합. 누가 봐도 완벽한 한 쌍이었다. ‘딱 봐도 좋은 그림이야. 저 둘은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눈길을 끌어...’ “회장님, 부상혁 대표님은 정말 복도 많으십니다. 최씨 가문의 따님과 이렇게 잘 어울리는 커플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부동건의 표정이 확 풀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묘하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부동건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부동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젊은 사람들이 서로 마음이 맞아 좋아하는 걸, 우리 어른들은 그저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줘야 하는 일일 뿐이지요.” “게다가 상대가 최씨 가문의 따님이라니, 정말 금상첨화가 아닙니까.” 부동건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역시 상혁이다. 내 아들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상혁은 오늘 이 자리에서 당당히 아버지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었다. 한편, 송혜선도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까지 얼굴에 띄웠던 미소는 점점 사라져 갔고,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하연에게 향했다. 오늘의 하연은, 나무나 예쁘고... 아니, 그냥 눈이 부실 만큼 찬란했다. 그리고 또렷한 이목구비에 윤기 흐르는 머릿결, 화사하게 피어난 얼굴빛까지. 하연의 행복함이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송혜선의 눈빛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정다영... 그년, 나를 속였어.’ 그동안 하연 쪽에서 뭔가 반응이 있을 줄 알고 기다려 왔다. 하지만 소식은커녕, 정다영조차 자취를 감췄다. ‘다영이 걔가 하연이에게 약 먹이는 계획이 분명 실패한 거야. 그렇지 않고 선 지금 저렇게 멀쩡한 얼굴로 서 있을 수는 없어.’ 이대로 배가 불러오면, 섣불리 손도 쓸 수 없게 된다. ‘
이 질문에 송혜선은 눈을 반짝이며 부동건을 바라봤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젠 나를 당당히 소개해 줄 때가 됐겠지.’ 오늘 이 자리에서, 그녀는 부동건의 정식 아내로서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었다. “회장님, 말씀 좀 해보세요?” 조금은 성급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주변의 시선도 하나둘 송혜선과 부동건을 향했다. 모두 속으로는 뻔히 알고 있었다. 부동건이 과연 예전 애인을 진짜로 정실로 앉혔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다. 부동건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숨기거나 피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담백하게 말했다. “오 회장님, 이 사람은 제 딸의 어머니입니다.” 순간, 송혜선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딸의... 어머니?’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이 살짝 흔들렸다. 금세 넘칠 듯한 와인, 애써 잡고 있는 감정. ‘지금... 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억울함이 툭 하고 솟구쳤다. 심지어 손에 힘이 들어가며 하얗게 질린 손등이 떨렸다. 오병지는 단번에 눈치챘고, 싱긋 웃으며 더는 묻지 않았고, 대신 가볍게 말을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부 회장님, 여전히 복이 많으시네요.” 부동건은 공손하게 웃으며 송혜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손길엔 무언의 위로가 담겨 있었다. “아닙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저와 이 사람의 결혼식엔 꼭 오셔서 축배 들어주세요.” 그 말에 송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결혼식...?’ 순간,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이어서 고개를 들며 수줍게 웃었다. “회장님...” 부동건은 말없이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지만, 그 행동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 시선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송혜선을 무시하거나 조롱하던 눈빛이, 지금은 선망과 부러움으로 가득했다. 결국, ‘부동건의 아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송혜선은 온
부지윤의 ‘한 달 잔치’는 그야말로 성대한 수준의 파티였다. 초대받은 인사들만 봐도, 그 위세가 느껴졌다. F국 재계의 실력자들, 정재계의 핵심 인물, 이름만 대면 아는 명문가 자제들이 대거 초청됐고, 심지어 부씨 가문 어른들에게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직접 청첩장을 보냈다. 이 정도면, 사실상 이 아이를 공식적으로 가문에 편입시키겠다는 의지나 다름없었다. 부동건이 이 아이에게 얼마나 애정을 집착하듯 쏟고 있는지, 이날 행사 하나로 증명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부동건은 스스로의 체면과 명예를 걸고, 딸을 세상에 내보이고 있었다. ...잔치 당일, 연회장은 유난히 붐볐다. 샹들리에의 조명이 화사하게 반짝였고, 고급스러움이 풍겨 나는 악단의 선율이 분위기를 감싸고 있었다. 송혜선은 산후조리를 마친 직후였지만, 여전히 그만의 풍채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예전보다 조금 살이 오른 듯했지만, 그 덕에 오히려 분위기가 더 너그러워 보였다. 그녀가 행사장에 들어서자, 평소 자주 어울리던 재벌가 부인들이 앞다투어 다가왔다. “혜선씨는 진짜 복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 고생 끝에 드디어 볕뜰날이 왔네요.” “부 회장님이 이렇게까지 챙기시는 거 보니까, 이제 정말 한 자리 하시겠어요.” “정말 이러다 조만간 ‘겹경사’ 나는 거 아니예요? 우리라도 미리 축하해줘야 하는 거야?” 송혜선은 그 소리에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얄미울 정도로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역시 사람은 자리가 높아야 대접 받는 거야.’ “지윤이는 회장님의 첫 딸이잖아요. 그러니까 귀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회장님이 우리 모녀를 절대 가볍게 보지 않으신다는 건, 여기 있는 분들도 느끼셨을 테고요.” 그 말에 다들 박수까지 치며 웃었다. “이제 우리도 호칭 바꿔야지, 사모님!” 누군가 먼저 그렇게 불렀고, 뒤이어 몇몇이 장난처럼 따라 불렀다. 송혜선은 그 말에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턱을 살짝 들며, 그 호칭이 제법 익숙
진윤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마침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부남준은 법을 무시하고, 사람을 죽였어요. 부씨 가문이 이 일에 개입한다면... 여론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감싸려 들면 들수록, 결국은 함께 나락으로 떨어지겠죠.” ‘이건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가문의 존망이 걸린 문제야.’ 맞은편 소파에 앉은 상혁은 다리를 꼬고,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눈빛엔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세속의 먼지 따윈 전혀 묻지 않은 사람처럼. 진윤의 말이 끝났지만, 상혁의 표정엔 미동 하나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씨 가문은 항상 법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여왔습니다. 그건 변하지 않습니다, 여사님.” 그는 손짓으로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거기엔 작은 검은색 USB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 안에... 고나희 씨가 남긴 게 있습니다. 여사님께 드리라고 하더군요.” 순간, 진윤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숨이 턱 막히는 듯한 표정으로, USB를 바라봤다. “지금... 뭐라고 하셨죠?” 그녀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희가... 뭔가를 남겼다고...?’ 사고는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딸의 마지막을 함께할 시간조차 없이, 그녀는 세상을 떠났고, 어떤 유언도,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줄 알았다. “나희... 그 애가... 무슨 말을 남겼다는 거예요...” 진윤은 입을 틀어막았다. 눈물은 이미 참을 수 없다는 듯 쏟아지려 하고 있었다. 상혁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사람이 떠난 건 바꿀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남겨진 마음은, 누군가가 반드시 전해야죠.” 그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거운 공기를 뒤로한 채, 조용히 방을 나섰다. 잠시 후.룸 안에서 낮고, 억눌렀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희야...” 진윤은 USB를 손에 쥐고,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으로 울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