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도 안 되는 사이에 JJ그룹의 사건은 완전히 해결되었고 해외와의 합작도 점차 순조로워지고 있었다. 하연은 점점 긴장이 풀려 홀가분했고 호현욱은 화가 잔뜩 난 채 배 아파했다. 이에 호현욱 곁에 있던 부하들은 조금이라도 그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모두 다 그를 피해 다녔다. 이 소식을 하연에게 전하던 정태훈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고 하연도 머릿속에 호현욱의 모습이 상상하면서 피식 웃음을 보였다. “동쪽의 그 땅에 관한 일은 어떻게 돼어 가고 있어?” “꽤 순조로는 것 같습니다.” 하연은 전에 상혁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잠시 침묵에 잠겼는데 필경 정부의 사업이니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정말 호현욱 이사와 임모연이 그렇게 득을 보게 놔둬야 하는 걸까?’ 하연은 이런 생각들이 잠깐 스쳤다. 저녁때쯤, 그녀는 정예나와 함께 쇼핑을 간 백화점에서 임모연을 마주치게 되었다. 심지어 전희진도 마주쳤는데 그녀의 곁에는 어린 남자 아이가 있었고 이 아이는 하연을 보고는 아줌마라고 불렀다. “이 분은 나이가 어리니 누나라고 부르는 게 맞아.” 하연은 웃으며 말했다. “아줌마라고 불러도 돼. 처음 만나는데 아줌마가 선물을 준비 못했네? 갖고 싶은 거 있으면 골라봐. 아줌마가 사줄게.” 그러나 이 남자 아이는 긴장한 듯 전희진의 뒤에 숨어 버렸고 그녀는 그런 아이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누가 선물 사준다고 하면 고맙습니다 하고 당당하게 받으면 돼. 자꾸 그렇게 숨기만 하는 아이는 주씨 가문의 아들로 될 자격이 없어!” 전희진의 이 기세에 예나는 깜짝 놀랐고 하연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전희진 사모님 너무 한 거 아니야?” 그런데 하연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저 멀리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게 말이야. 최하연 아줌마가 사준다고 할 땐 냉큼 받으면 돼. 어차피 저 아줌마는 넘치는 게 돈인 부자거든.” 이 사람은 바로 임모연이었고 방금 산 백을 들고 유유히 걸어왔다. 동시에 이 모습을 본 전희
모연은 하연의 말에 발끈하여 앞으로 3개월 간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생활해야 할 참이었다. 하연은 한심한 그 모습에 우스꽝스럽다 생각했는데 모연이 내민 그 카드를 보는 순간 웃음기가 바로 사라졌다.이를 발견한 정예나가 물었다. “왜 그래?’ “저 카드, 뭔가 낯익어.” 어디서 본 적 있는 것 같았지만 기억이 나질 않았다. 정예나도 한번 확인하려 했지만 이미 모연이 그 카드를 감춘 뒤였다. 이때 모연은 쇼핑백을 들고 하연의 앞으로 다가왔다. “봤죠? 샀어요. 부디 최하연 씨가 저보다 못한 걸 사진 않길 바라요. 그러면 너무 웃기잖아요!” 하지만 하연은 그녀의 말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고 곧바로 매장으로 들어가 직원에게 백 하나를 포장해달라고 부탁했다. 이 백은 아까부터 하연이 마음에 들었던 것인데 가격도 적당하고 디자인도 아주 독특했다. 이를 본 모연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겨우 4천만 원이야? 최하연 씨, 이걸 산다고요?” 하연은 의아한 듯 되물었다. “전 단지 제 마음에 드는 물건을 사러 온 것뿐이지 임모연 씨와 비기러 온 건 아니니까요. 뭐 다른 문제라도 있나요?” 모연은 그제야 자신이 또 하연에게 당했다는 걸 눈치 챘다. 앞으로 3개월 간 B시 상류층들 사이의 의논 주제가 지금 또 하나 늘어난 것이다. 모연은 쇼핑백을 꽉 잡았고 전에 있었던 모든 일까지 통 털어 생각했는데 이제야 왜 민씨 가문이 하연에게 질 수밖에 없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이유는 바로 하연이 너무 교활하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모연은 부랴부랴 현장을 떠났다. 이때 전희진이 하연의 곁으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저 여자 성이 임씨 입니까?” 하연이 대답했다. “네, 전희진 사모님도 아십니까?” “아뇨, 모릅니다. 하지만, 뭔가 낯이 익습니다.” 전희진은 상류 세계에 40여 년을 몸 담고 있는 사람이었기에 여태껏 만나온 사람은 수없이 많았는데 왜 앤지 모연이 유난히 익숙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도대체 누구인지는 정확히 생각나지 않았다.
이미 월말이 되었지만 성동 부동산의 시공이 점점 느려지고 있어 모연은 조바심이 났고 전에 현장 검사를 갔을 때도 발견된 수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쇼핑을 마친 뒤 모연은 집으로 돌아갔는데 집 안에 차량 한 대가 서 있었다.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가니 건장한 한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양재성? 당신이 왜 여기 있어?” 양재성이라 불리는 남자는 몸을 돌리자마자 모연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사장님, 살려주세요!” 이에 모연은 순간 당황했다. 5분 뒤, 그녀는 테이블 위의 모든 물건들을 쓸어버렸고 노발대발하며 말했다.“이건 정부의 사업이야. 어떻게 감히 그 자금에 손을 댈 생각을 했어? 죽고 싶은 거야?” 양재성은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그렇게 많이 움직일 생각은 없었는데 점점 빚이 쌓이다 보니 어쩔 수가 없었어요.” 모연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식은땀이 흘렀다. “아직 얼마나 남았어?” “절반...” 양재성이 우물쭈물하며 대답했다. “절반도 안 남았습니다.” “너 정말!” 모연은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 “지금 당장 경찰에 신고할 거야. 당신 잡아가라고 말이지.” “아뇨, 임 사장님! 절 잡아간다고 해도 이미 돈을 회수할 수 없어요. 제발요!” 양재성은 그녀의 다리를 붙잡은 채 처참하기 그지없는 어조로 말했다. “이제 책임을 묻게 되면 저뿐만 아니라 임 사장님도 책임을 져야 할 겁니다!” 순간 모연은 그대로 동작을 멈추었고 소파에 털썩 주저 앉았다. “공사를 예정된 시일 내에 완성하지 못하면 우린 다 끝장이야!” 모연은 절반이 넘는 자금인 1400~1600억을 메꿀 방법이 도저히 생각나지 않았다. 양재성은 모연의 바지 가랑이를 꽉 잡고 있었고 눈에는 탐욕이 가득 찬 채 말했다. “전 임 사장님께 이 상황을 대처할 방법을 제시해 드리러 온 겁니다.” “그게 뭔데?” 그런데 이때 문 밖에서 차량이 멈추는 소리가 들려왔고 모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가로 가보니 서준이 차였다
“알았어요, 확인되면 고민해 볼게.”모연은 돌아섰다. 하지만 서준은 서두르지 않고 다시 한번 화장실을 바라보았다.“써도 돼?”“쥐가 있다고 했잖아, 서준 도련님은 쓰지 않는 게 좋을 거야.”“혜주야, 쥐가 있든 없든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쥐를 제때에 치우는 거야.”서준은 최대한 자비로운 태도로 말을 하고는 뒤돌아 차를 몰고 떠났다. 차가 점점 멀어지는 소리를 듣자 모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식은땀이 몸에 달라붙어 매우 불편한 것 같았다.“나와.”양재성도 땀에 흠뻑 젖은 채 화장실에서 나와 다시 한번 무릎을 꿇었다.“제발 살려주세요.”모연은 갑자기 다리를 내밀며 양재성을 차버렸다.“안 들려? 한서준까지 네 일을 알았어. 내가 숨겨주고 싶어도 때가 되면 계좌에 돈이 없어서 숨길 수 없어!”“숨길 수 있어요! 할 수 있어요!”양재성 은 빨리 말했다.“저한테 방법이 있어요.”모연은 의심했다.“무슨 방법?”양재성 은 침을 삼키며 모연의 몸을 기울이라는 신호를 주었다. 가까이 오자 몇 마디 속삭였다. 그 말을 듣자 모연의 표정이 변했다.“미쳤어?”“방법 없어요. 전에도 혼란의 틈을 탄 적이 있어요. 별일이 없었어요. 게다가 부동산도. 사실 다 그래요.”이달 초 주씨 가문 도련님의 생일날 주씨 가문의 사람이 가득했다. 리무진이 거리에서 줄을 지었고, 축하하러 온 손님들 모두 귀족 가문 사람들이다. 전희진이 아들을 인정하겠다는 걸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 그럼 미래도 아들에게 맡길 거라는 것이다. 그래서 대충 할 수 없다. 하연은 특별히 두툼한 선물을 준비하며, 눈에 잘 띄지 않는 옷을 입었다. 하지만 전희진은 하연이 일부러 눈에 띄게 했다.“하연아, 이리 와.”하연은 기태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가서 사람을 대접해라는 신호를 보냈고, 하연은 전희진을 따라 떠났다.“아이가 여덟 번째 생일을 맞아 특별히 극단을 초대하여 집에서 하고 있어. 사람들은 모두 거기에 갔어. 난 지루한 것 같아. 차라리 차를 마시고 게임하는 게 좋을
“그냥 보기만 할게요. 놀지는 않아요.”여자들의 모임은 항상 그렇다. 하연은 오른쪽에 앉아 진지 해 보이지만 사실 머리를 쓰지 않았다. 라운드가 끝나기 전에 방의 문이 열렸다. 주현빈이 먼저 들어와서 전희진에게 물었다.“이겼어?”전희진은 피식 웃었다.“너무 일찍 와서 아직 결과를 보지 못했어.”하연은 멍해졌다. 주현빈 뒤에 있는 서준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고, 서준도 마찬가지로 하연을 쳐다보았다. 목표는 명확했다. 왼쪽에 앉은 전희진도 보았다.“한 대표님 아니에요? 젊었지만 대단하신 분께서 우리 여자들이 노는 걸 봐도 되요? 너무 부끄럽네요.”서준은 재킷의 단추를 풀고 옆에 걸치며 하연의 곁에 앉았다.“사모님의 카드로 부끄러워하시면 안 돼죠. 너무 좋은 거잖아요.”전희진은 기뻐했다. 잘생긴 훌륭한 남자에게 칭찬을 받는 걸 싫어할 사람은 없다. 하연은 입술을 오물거렸다.“한 대표님께서 놀고 싶으시면 제가 자리를 내줄게요. 제가 마침...”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준의 손이 하연의 어깨에 놓고 눌렀다. “전 구경만 하면 되요.”하연은 서준을 노려보았다.‘놀기 싫으면서 왜 와, 날 상대하는 거야!’전희진은 그 모습을 보며 카드를 던졌다.“평소 한 대표님을 만나기 어려운데, 오늘은 한가하시나 보네요. 어렵네요. 혹시 어느 가문 아가씨에게 마음이 있어서 소개해 달라고 하고 싶어요?”하연은 불똥이 튈까 봐 몸이 굳어졌다. 그러나 서준의 말이 예상치 못했다.“최하연 씨가 긴장을 많이 하시네요. 사모님께서 저에게 질문하는데 왜 두려워해요?”순간 여러 테이블의 시선이 하연에게 쏠렸다. 하연은 억지로 참았다.“바람이 통하는 곳에 앉아서 추워서 그래요.”하준은 하연 손에 있는 카드를 한 장 버렸다.“카드를 내는 걸 잊었군요.”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모호해졌다. 하연은 가시방석에 앉은 것 같았다. 하연의 일대일로 싸우는 모습이 유명해져 사람들이 하연에 대한 인상은 DS의 최 사장님, 아가씨이지, 서준의 전처가 아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같이 있어서
하연과 서준은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려보니 무대 쪽에 일이 생긴 것 같았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하연은 깜짝 놀랐다. 서준과 눈이 마주치자 두 사람은 그쪽으로 달려갔다.“도련님이 물에 빠졌어요, 도련님이 물에 빠졌어요!”가정부들의 놀란 외침이 울려 퍼졌다. 방 안에서 진행되던 게임판도 흩어지며 주현빈과 전희진이 동시에 달려 나왔다.“무슨 일이에요?”서준은 가정부를 잡고 물었다.“방금 도련님께서 호숫가에서 물고기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어요. 제가 한눈 판 사이에 떨어졌어요!”주진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렸다.“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서준은 눈을 부릅뜨며 바로 뛰어 내려갔다. 하연이 말릴 틈도 없었다. 서준은 수영을 할 줄 안다. 하지만 호수의 깊이를 몰라 사고가 있을 수도 있다.“한서준!”서준이 최선을 다해 주진을 향해 헤염치더니 주진의 손을 잡고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괜찮아, 아저씨가 있어.”주진은 숨을 헐떡였다. 주현빈의 마음이 급했다.“빨리!”다행히 수면 위와 멀지 않아 서준이 바로 구할 수 있었다. 가정부는 바로 수건을 가져와 주진에게 둘러주었고, 주현빈이 주진을 품에 안았다.“괜찮아?”“의사, 빨리 의사를 불러와!”전희진의 안색이 창백했다.“고마워요, 한 대표님.”서준은 맨팔로 있어 근육이 선명했다. 추운 겨울에도 전혀 떨지 않고 매우 유혹적이었다.“괜찮아요. 아드님이 괜찮은지 먼저 확인하세요.”주현빈은 아이를 안고 실내로 달려갔고, 전희숙도 서둘러 따랐다. 가정부가 서준에게 수건을 주었다. 하연이 다가왔다.“그렇게 깊은 곳에 뛰어들어?”서준은 수건으로 머리를 닦았다.“내가 나 몰라라 하는 사람이 아니야.”하연은 입술을 오물거렸다. 다른 의미로 서준은 확실히 좋은 남자이다. 그렇지 않으면 몇년 동안 서준에게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들어가자, 밖에 추워.”서준은 피뜩 보았다.“또 계속 고맙다고만 하겠지. 그런 게 익숙하지 않아. 먼저 가고 싶어.”하연은 이해했다.“그럼 차에 들어가자.
하연은 짜증이 났다.“행동하기 전에 내 의견을 물어봤었어? 하서준, 넌 여느 때처럼 자만심에 차 있어. 너의 소위 선의는 필요없어.”“응, 인정해. 이 일은 내 탓이야.”서준은 이어서 말했다.“그래서 사과하러 왔어. 날 용서했으면 좋겠어.”주씨 가문 생일 연회에 참석한 것도 하연 때문에 온 것이다.“생각해 봤는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야. 사업가 사이에 이익 문제가 있는 건 정상이야. 네가 한 일은 네 일이야. 내가 널 비난할 자격이 없어. 그래서 네가 사과할 필요도 없어.”하연은 차분하게 선을 넘지 않게 말했다. 서준은 눈썹을 찌푸리며 가슴이 내려앉았다.“하연아.”“하서준, 네가 JJ를 무시하고, 내 안목을 무시하는 걸 알아. 하지만 너도 주현빈에게 은혜를 베푸려고 뛰어내려서 주진을 구했잖아?”하연은 그저 아이러니했다. 서준은 말을 하지 않았다. 이건 사실이었다.“다음부터는 고상한 척하지 마. 역겨워.”말을 마치자 하연은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리려 했다. 그러자 서준은 하연을 잡았다.“그럼 부상혁은? 나랑 비하면 부상혁이 더 고상한 척하고 있어.”상혁의 얘기가 나오자 하연은 손을 뿌리치려 했다.“네가 무슨 자격으로 부상혁 얘기를 해?”서준은 하연을 꼭 잡고 또박또박 말했다.“여러 번 국내외를 오가는 건 공무 때문에 아니야. 부상까지 입었어. 알고 있어? 너한테 솔직하게 말했어? 그게 고상한 척 아니야?”하연이 확실히 모르는 것 같았다. 하연은 더욱 황당한 것 같았다.“그건 우리 사이의 일이야. 네가 뭔데, 네가 무슨 자격으로 말해!”우리라는 말이 서준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건 그들의 사이에 이미 자기의 개인 공간이 있다는 것이다.“둘이 사귀는구나.”서준은 말했다. 하연은 인정하고 싶었지만, 상혁과 아직 그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아니.”하연은 서준의 손을 뿌리쳤다.“그건 너와 상관 없어.”말을 마친 후 하연은 문을 닫고 차를 찾으러 갔다. 서준은 백미러에 비친 결연한 하연의 모습을 보자 안색이 어두워졌다. 얼
상혁은 잠시 머뭇거렸다. 하연은 여전히 말하려는 마음이 없어 포기했다.[B 시 온도가 떨어졌어. 옷 많이 입고 다녀.]하연은 무의식적으로 오늘 입은 옷을 보았다. 확실히 얇았다. 방금 서준과 밖에 있을 때 은근히 추웠다. 하연은 신경 쓰지 않고 기분을 풀었다.“상혁 오빠, 해외에 있는데도 B시 일기 예보를 보네요.”[누군가가 말을 안 들어서, 신경 쓸 게 많아.]하연은 고개를 숙여 웃었다. 순간 나쁜 기분이 사라졌다.“오늘 바빠요?”상혁은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사들을 보았다. 모두 상혁의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안 바빠.]“다행이네요.”차는 이미 DS 아래 도착했다. 하연은 차에서 내렸다. 말하기도 전에 멀지 않은 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진미화를 보았다.“하지만 저는 이제 바빠지기 시작할 거예요. 상혁 오빠, 저녁에 다시 전화할게요.”상혁에게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하연은 전화를 끊었다. 황연지가 곁에서 상혁의 안색이 좋지 않다는 걸 눈치 챘다.“회의가 3시간동안 진행되고 있어요, 아니면 이만 할까요?”상혁은 핸드폰을 치웠다.“계속해. 그리고 대신 처리해 줄 일이 있어.”한편 하연은 다가가서 진미화를 맞이했다.“무슨 일이에요?”진미화의 손에 서류를 들고 있었다.“사장님, 안색이 안 좋아요.”“괜찮아요, 말하세요.”진미화는 하연의 뒤를 따르며 설명했다.“JJ와 해외 이커머스 구축이 문제 생겼어요. 주로 고객들이 신뢰가 없어요. 누구도 도박을 원하지 않아서 한동안 정체가 있었어요.”처음에는 모든 것이 어려운 법이다. 이 모든 것이 예상되어 하연은 심호흡을 했다.“DS의 해외 고객을 연락해 볼게요. 함께할 의향이 있는지 확인해야겠어요.”이때 엘리베이터에서 호현욱이 나왔다. 호현욱은 웃었다.“최 사장님, 방금 다녀오셨어요? 쯧, 안색이 안 좋네요. 보양식을 많이 드셔야겠어요.”하연은 웃는 듯 마는 듯했다.“호 이사님과 비교할 수 없죠. 좋은 일이 있으세요?”“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일어날 일들은
하연은 밝게 웃으며 상혁이 건넨 잔을 받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갓 짠 오렌지 주스는 상큼하면서도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부 대표님이 직접 짠 오렌지 주스라 그런가, 확실히 맛이 다르네요. 정말 맛있어요.” 상혁은 미소를 지으며 장난스레 손을 뻗어 그녀의 코끝을 살짝 건드렸다. “맛있으면 자주 짜줄게.” 하연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답했다. “그럼 감사히 잘 마실게요, 부 대표님!” “아니, 한참을 찾았는데 여기서 둘이서만 꽁냥거리고 있었네?” 문 앞에 기대어 서 있던 하성이 두 팔을 교차하고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상혁, 너 요즘 이 녀석을 너무 애지중지하더라. 그러다 버릇 나빠지겠어.” “오빠!!” 하연은 볼이 부풀어올라 약간 투덜거렸지만, 옆에 있던 상혁은 태연하게 그녀를 감싸며 말했다. “애지중지하든 말든 내 마음이지. 네가 무슨 상관이야?” 하성은 두 손을 들며 장난스레 투항했다. “알았어, 알았어. 난 그냥 너희 둘이 잘 지내는 거 보니 마음이 놓여서 하는 소리야.”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그래, 계속 이렇게 잘 지내줘, 아주 보기 좋아!”그때 하연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부남준’이라는 이름이 뜨자 그녀는 잠시 긴장한 듯 눈빛이 흔들렸다. “오빠들, 먼저 얘기하고 있어요. 난 전화 좀 받고 올게요.” 하연이 자리를 비우고 복도로 나가자, 하성은 방금 전과는 달리 진지한 표정으로 상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요즘 너희 집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소문이 있더라. 동건 삼촌 쪽에서 뭔가 일이 있는 것 같던데?” 상혁은 하연이 마시다 남긴 오렌지 주스를 마시며 시선을 복도 쪽에 고정한 채 무심하게 말했다. “첩이 ‘본처’의 자리를 노리는 거야. 흔한 일이잖아.” 하성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 “동건 삼촌이 그 여자를 꽤 오랫동안 봐줬던 모양이던데. 이제는 꽤 많은 걸 쌓아둔 듯하고, 한번 크게 판을 벌일
“뭐 하는 거야? 빨리 이 주스를 연회장으로 가져가!” 홀 매니저가 다가와 살짝 꾸짖었다. 여자는 급히 고개를 숙이며 질투로 번들거리던 눈빛을 감추고는 얌전히 대답했다. “네, 바로 가겠습니다.” 다영은 태어나서 가사일 한 번 손댄 적 없었지만, 어쩔 수 없이 트레이를 들고 발걸음을 옮겼다. “잠깐!” 매니저가 갑자기 그녀를 불렀다. “너 신입이야? 본 적이 없는 얼굴인데?” 다영의 심장이 두근거리며 가슴 속에서 송혜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 고향 친척 중 하나가 DS그룹에서 일하고 있어. 오늘 밤엔 그 사람 신분을 쓰는 게 편할 거야.” 침착함을 되찾은 다영은 고개를 들어 냉정하게 대답했다. “저는 고객지원부의 진미입니다. 연회 인력이 부족해서 임시로 지원 나온 거예요.” 매니저는 그녀의 명찰을 한 번 흘깃 본 뒤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트레이를 건네받았다. “신입이라면 전면에 나가면 실수하기 쉬워. 내실에서 돕는 게 좋겠어.” “알겠습니다.” 매니저가 떠난 뒤, 다영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다시 연회장을 바라봤을 때, 앞줄에 앉아 있던 하연과 상혁은 이미 모습을 감췄다. 2층 휴게실 안. 원신명은 한 손에 신선한 오렌지 한 봉지를, 다른 손에 포장을 뜯지 않은 녹즙기를 들고 들어왔다. “대표님, 주문하신 오렌지와 녹즙기입니다.” 원신명은 궁금한 듯 물었다. “대표님, 직접 오렌지 주스를 만드시는 건가요?” 상혁은 짧게 대답했다. “원 비서, 거기 두고 가면 돼.” 원신명은 얼른 다가가 도움을 자청했다. “대표님, 이런 건 제가 할게요.” “와이프가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싶다는데, 남에게 맡길 수는 없지.” ‘와이프’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왔고, 마치 그 단어를 그의 마음속에서 수없이 되뇌었던 것처럼 익숙했다. 원신명은 곧 깨달았다. ‘아, 대표님이 직접 최하연 씨를 위해 주스를 준비하시고 싶은 거구나!’ “원 비서, 연말인데도
최하성은 오늘 검정색 정장을 입고 등장했다. 그의 차가운 분위기와 단정한 모습은 단번에 모든 직원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최 대표님!”하성을 마주친 직원들은 공손하게 인사했다. 하성은 살짝 고개를 끄덕일 뿐, 시선을 주지 않고 빠르게 행사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오늘 저녁 만찬은 매우 풍성했다. 동서양의 요리가 조화를 이루며 대부분 직원들의 입맛과 식습관을 세심하게 고려한 모습이었다. 준비에 꽤 공을 들인 것이 분명했고, 결과적으로 반응도 좋았다. 연말 만찬이 시작되기 전, 하성은 DS그룹의 대표이사로서 무대에 올라 인사말을 했다. 하성은 차분한 걸음으로 무대에 오르며, 그의 존재감은 단번에 분위기를 압도했다. 그가 화려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단 몇 마디 간결한 말로도, 관중석에서는 뜨거운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번 연말 행사는 생중계되고 있었으며, 하성이 등장하자마자 팬들과 네티즌들이 빠르게 몰려들었다.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시청자 수가 십만 명을 돌파했다. [최하성 씨, 오랜만이에요! 보고 싶었어요!][연예계에 최하성이 없으니 허전한 기분이에요. 최하성 씨, 돌아와 주세요!][다들 동감! 언제쯤 복귀할 수 있는 거죠?][복귀 요청 99%!!][...] 팬들의 댓글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하성의 인기는 생중계 플랫폼 순위에서도 단연코 1위를 차지했다. 무대 아래에서 생중계를 담당하던 진행자는 이 뜨거운 열기를 놓치지 않고 하성에게 다가갔다. “최 대표님, 생중계 채팅창에 팬들이 사장님의 새해 계획에 대해 굉장히 궁금해하고 있어요. 오늘 이 특별한 밤에 팬분들께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될까요?” 하성은 미소를 머금으며 카메라를 응시했다. 그 순간, 생중계 채팅창은 순식간에 폭발했다. 선물 아이콘이 화면을 뒤덮었고, 댓글은 끊임없이 새로 고침 되었다. “안녕하세요, 하성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저와 DS그룹을 응원해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도 DL 그룹
“어머님, 정말로 부 회장님과 결혼하세요?” 이 얘기는 다영에게 있어 꽤 충격적이었다. 세간에서는 송혜선과 부동건의 관계를 두고 여러 말이 떠돌았고, 그중 가장 많이 들려온 것은 송혜선이 ‘첩’이라는 점이었다. 한때 정지철 부인도 이 사실을 꽤 꺼려했던 터라, 다영은 송혜선이 이렇게 대놓고 정식으로 자리 잡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언제 결혼 승낙을 받으신 거예요?” 송혜선은 이미 불룩해진 배를 가볍게 쓸며, 깊은 눈빛 속에 숨겨진 야망을 드러냈다. “부회장님께서 말씀하시길, 새해도 지나고 이제 곧 아이가 태어날 테니 우리 모자에게 반드시 정당한 신분을 보장해 주시겠다고 하셨어.” “그러니... 다영아, 우리 남준이를 믿어야 해. 지금은 잠시 밀려난 상황이지만,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잖니?” 다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더욱 굳게 다졌다. “어머님, 걱정 마세요. 저는 언제나 남준 씨를 도울 거예요.” 송혜선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더욱 부드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그래야지. 남준이도 절대 너를 저버리지 않을 거야.” 그러다 두 사람이 화제를 돌리며 덧붙였다. “지금 부 회장님이 부상혁을 중시하며 DL그룹의 운영을 맡긴 데는 이유가 있어. 결국은 부씨 가문의 장손이라는 명분 때문이지.” “하지만, 임신 초기에는 변수가 많아. 무슨 사고라도 생기면, 어떻게 되겠니?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잖니?” “만약 그 아이가 사라지면, 부상혁 쪽의 지렛대도 없어진 셈이니 남준이한테 분명 유리한 상황이 될 거야. 그렇지 않겠니?” “...” 다영은 멍하니 한참 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어머님, 그게 무슨 뜻이에요?” 송혜선은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조그마한 흰색 약병을 다영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 약은 무색무취야. 일반인이 먹으면 아무 이상이 없지만, 임신한 사람이 먹으면 삼 일 안에 유산이 돼.” 다영의 손이 떨리며 본능적으로 병을 놓치듯 뺐다. “어머님,
“정다영 씨의 상상력은 참 풍부하시네요.” 상혁은 입꼬리를 비틀며 약간의 비웃음을 섞어 말했다. “세상을 잘 모르는 아가씨다운 모습이라 참 순진하긴 한데, 이런 험한 세상에선 지나치게 순진한 건 별로 좋지 않아요.” 더는 말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듯, 상혁은 뒤돌아 떠났다. 다영은 마치 머릿속이 폭발이라도 한 듯, 귓가에서 찡하는 이명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럴 리 없어요, 남준 씨는 그럴 리 없어요!” 그녀는 낮게 중얼거리며 자신을 설득하려 애쓰며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이미 수없이 눌렀던 번호를 다급히 눌렀다. 하지만,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건 여전히 차갑고 무미건조한 여성의 자동응답 소리뿐이었다. “안 돼!” 다영은 절망하며 비명을 지르고는 갑작스레 밖으로 뛰쳐나갔다. 깊은 겨울밤, 바람은 더욱 매섭게 몰아치고 있었다. ...창밖의 거센 바람에 창문이 덜컹이며 울렸다. 병원의 VVIP 병실 안. 다영은 온몸을 떨며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초점 잃은 눈동자는 텅 빈 듯했고, 난방이 틀어져 있어도 그녀를 감싼 차가운 공기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다영아, 이렇게 늦은 밤에 무슨 일이야?” 송혜선은 평소와 같은 말투로 물었고, 전혀 이상한 기색은 비추지 않았다. 실은 송혜선도 이미 알고 있었다. 정지철이 이제는 구속되고 정씨 가문이 더 이상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나 다영의 마음에는 여전히 남준의 존재가 얽매여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다영에게서 더 많은 가치를 끌어낼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송혜선 또한 명확이 알고 있었다. 그런 생각이 스치자, 송혜선은 표정을 가다듬고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넸다. “자, 물 한 잔 마시고 몸 좀 녹여.” 다영은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린 듯, 송혜선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간절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머님, 남준 씨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세요, 제발요!” 송혜선은 한숨을 쉬며 어쩔 수 없다
며칠 사이, 정다영은 차갑게 닫힌 문을 수없이 마주했다. 한때 주변 사람들이 다영을 떠받들며 찬란한 별처럼 여겼지만, 이제 집안의 사건이 터지자 사람들은 그녀를 피하려고만 했다. 마치 다영에게 다가가기만 해도 불행이 전염될 것처럼... 그렇게 다영은 세상의 차가운 이면과 인간관계의 허망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자연스레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바꾸었다. “송 여사와 남준이는 요즘 집에 없는 걸로 아는데, 정 다영 씨는 왜 여기에 있는 거죠?” 상혁은 평범한 어조로 물었지만, 그 말은 다영을 잠시 멈칫하게 했다. 그녀는 곧바로 대답했다. “남준 씨가 곧 돌아온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상혁은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그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날이 추우니 안에서 기다려요.” 말을 마친 그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남겨진 건 남자의 차가운 뒷모습뿐이었다. 다영은 상혁을 따라가며 급히 소리쳤다. “부 대표님, 잠깐만요...” 상혁이 발걸음을 멈췄다. “무슨 할 말이라도?” 다영은 망설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며칠 동안 그녀가 이리저리 뛰어다닌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아버지를 이 난관에서 구해내기 위해서... 그리고 지금, 아버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의 눈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제 아버지와 관련된 일입니다.” 상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 건 검찰 소관이에요. 전문 변호팀을 고용하면 사건의 진행 상황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을 거예요.” 다영은 초조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부 대표님, 이건 분명 오해입니다. 제 아버지는 회사에 평생을 바친 분입니다. 아버지는 공문서를 위조하거나 계약서를 조작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녀는 자기 아버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즉, 정지철은 딸을 희생하더라도 자신의 미래를 망칠 행동은 절대 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분명히 이번 일에는 뭔가 숨겨진 진실
최씨 가문 본가 후원에 있는 온실에서는 조용히 바둑알이 내려놓아는 소리가 들렸다. 상혁과 최동신은 마주 앉아 바둑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상혁아, 지금 이 바둑판은 승부가 거의 결정 난 것 같은데!” 바둑판 위에서 흑과 백이 치열하게 맞서며 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냈다. 최동신은 한 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다. “자네의 백돌이 반 집 차이로 우위를 점하고 있어. 대단해! 예전보다 실력이 많이 늘었어.” 상혁은 겸손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할아버지 기백이 여전히 넘치시니 제가 아직 배울 점이 많습니다.” 최동신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탄식했다. “늙었지. 이제는 예전 같지 않다.” 그러나 그는 곧 말을 돌려 흑돌을 손에 들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하지만 지금부터 자네도 조심해야겠어.” 최동신은 그 말을 하며 흑돌을 바둑판 위에 툭 하고 내려놓았다. 그 돌이 놓인 자리로 인해 한순간 바둑판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두 사람의 시선이 바둑판 위에 집중되었다. 상혁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손을 멈췄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우위를 점하고 있던 상황이 단 한 수로 인해 역전이 된 것이다. “할아버지의 바둑 실력은 늘 감탄할 따름입니다. 제가 이 점을 간과하고 놓치고 있었네요.” 상혁은 차분하게 패배를 인정하며 판세를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다. 최동신은 손에 들고 있던 바둑알을 다시 주우며 훈계하듯 말했다. “그렇지. 이길 수 있는 상황도 한 수의 실수로 모두 망쳐버릴 수 있는 법이다.” 상혁은 최동신의 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잠시 마주쳤다. 최동신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들리는 말에 DL그룹의 실질적인 권한은 이제 자네가 잡았고, 자네 동생은 동남아 지사로 발령이 났다고 들었네.” “겉으로 보기엔 좋은 상황 같아 보이지만, 상혁이, 네가 한 수라도 실수하는 날엔 모든 걸 망칠 수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이 말은 단순한 충고 이상의 뜻을 담고 있었다
“이렇게 빨리?” 남준은 무심코 말을 뱉었다. 그의 음성엔 조급함이 묻어 있었다. 남준은 방 안을 계속해서 왔다 갔다 하며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연말 이후로 예정되어 있지 않았나? 어떻게 앞당겨진 거지?” 연지는 침착하게 보고했다. “들리는 말로는 이번 사건이 중대한 만큼 생각보다 빠르게 처리되면서 연말 전에 재판이 열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남준은 발걸음을 멈추고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경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부상혁이 나를 궁지로 몰아넣고, 정규인의 입을 열어 내 약점을 찾아내려는 것이겠지.” 그는 잠시 멈칫하다가, 비웃는 듯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하지만 부상혁도 모르는 게 있지. 정규인의 입은 결코 열리지 않을 거란 사실을 말이야.” 연지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상무님, 그 말은 혹시...” 그러나 그녀의 말은 남준의 강렬한 눈빛으로 끊겼다. 서로의 눈이 마주친 순간, 연지는 남준의 의도를 즉각 이해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 정규인의 사건은 법원에서 열렸고, 법정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경찰들이 구치소에서 정규인을 호송해 나오자, 멀리서 그의 초췌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정규인의 기운 없는 모습에서 예전의 당당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법정 방청석을 둘러보다가, 맨 끝자락에서 누군가를 발견했다. 순간, 정규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는 갑작스럽게 방청석을 향해 달려들며 미친 듯이 외쳤다. “여기 왜 왔어! 당장 나가! 나가란 말이야!” 경찰들이 급히 정규인을 제지하려 했으나, 그의 필사적인 몸부림에 저지당했다. “진정해!” 경찰은 엄중히 경고했지만, 그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그러다 결국, 경찰봉이 그의 등을 강하게 내려쳤다. 퍽! 정규인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고, 그의 몸은 앞으로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방청석의 허징인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
“이모...” 하연은 조진숙을 꽉 끌어안으며 말문이 막혔다. 지금은 어떤 말도 조진숙에게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떻게 되든 간에, 이모 곁엔 항상 저희가 있어요.” 조진숙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하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고맙다.” ... 한적한 교외에 위치한 독채 빌라. 고급스러운 소형 승용차 한 대가 천천히 차고로 들어섰다. 황연지는 휴대폰으로 위치를 확인한 뒤, 차 문을 열고 내렸다. 빌라는 꽤 외진 곳에 있었고, 오랜 기간 비어 있었던 듯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연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상무님? 계신가요?”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텅 빈 집안의 메아리뿐이었다. 연지는 2층으로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용기를 냈다. 계단 끝에 닫혀 있는 문 하나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상무님, 안에 계신가요?” 그녀는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잠시 망설이던 연지는 문을 조심스레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코를 찌르는 강렬한 술 냄새가 그녀를 덮쳤다. 연지는 본능적으로 코를 막고 안으로 더 들어갔는데, 방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낯익은 실루엣을 발견했다. “상무님?” 이사회 이후 부남준은 자취를 감췄고, 외부에서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없단다. 그렇게 된 지가 삼 일째였다. 연지는 재빨리 그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 “상무님, 괜찮으세요?” 남준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비록 지금의 그는 어딘가 지쳐 보였지만, 그 매서운 매의 눈은 여전히 날카로운 빛을 띄고 있었다. 그는 황연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입가에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너였구나?” 연지는 아침에 급히 소식을 듣고 서둘러 이곳으로 달려왔다. “상무님, 사라지신 며칠 동안 정다영 씨가 상무님을 계속 찾고 있었습니다.” 정다영은 남준을 찾기 위해 거의 미쳐버린 상태였고, 부남준을 찾을 수 있는 곳은 모조리 뒤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