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한 걸음 물러서서 입을 가렸다.“상혁 오빠? 언제 왔어요?”상혁은 차 문을 열고 하연을 타라고 했다.“3시에 도착했는데, 방해할 수 없었어.”하연은 시간을 보았다. 지금 여덟 시이다. 긴 비행 시간을 제외하면 다섯 시간 동안 이곳에서 기다린 셈이었다.하연은 차에 타고 마음이 아파 상혁의 얼굴을 만졌다.“무슨 일이 있어요? 왜 갑자기 왔어요?”상혁은 하연의 손을 잡고 바라보았다.“차를 돌려주러 왔어.”하연은 상혁을 때렸다.“거짓말하지 마세요.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혁은 입꼬리를 올렸다.“FI 그룹에 일시적인 문제가 생겨서 처리하러 왔어.”하연은 의심을 했다. 하지만 상혁은 이미 시동을 걸었다.“집에 가?”하연은 가볍게 대답했다. 아침 출근 시간이라 도로는 차들로 가득했다. 상혁은 안전하게 운전했다. 얼굴 반쪽이 햇빛을 받아 상혁이 어떤 감정인지 알 수 없었다. 물론 하연의 집으로 돌아갔다. 상혁은 차를 주차장으로 몰랐아.“주인에게 물건을 돌려주는 거야.”하연은 답답했다. 집에 들어가기 전에 멈춰 서서 진지하게 물었다.“오빠가 떠난 후 fl를 지켜봐라고 시켰어요. 대표가 직접 와서 해결해야할 큰일이 있다고 들은 적이 없어요.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하연은 걱정했다. 상혁은 웃으며 하연의 머리카락을 정리했다.“능력이 좋네, 내 것을 지켜봐?”하연은 말을 하지 않았다.“정말 일이 생겼으면, 네 사람이 어떻게 알겠어?”상혁은 하연의 손을 잡고 방 문 지문 장금 해제를 만져 문을 열었다.“걱정 마, 해결할 수 있어.”하연은 상혁의 손을 잡았다.“이렇게 다니면 힘들잖아요. 몸이 걱정되요. 철로 만든 것도 아닌데.”상혁의 시선은 맞잡은 두 손에 떨어지자 입꼬리를 올렸다. 하연은 순간 얼굴을 붉혔다. 손을 바로 풀며 모호한 분위기가 물려왔다.“아침은 뭐 먹고 싶어?”“이모님은 할 거예요.”“너한테 물어보는 거야.”“죽 먹고 싶어요. 위를 챙겨야죠.”사실 하연은 아침으로 커피와 빵을 먹는다.
이 각도에서 보면 상혁은 전혀 웃음기가 없었다. 얼굴에 먹구름에 덮인 것처럼 사람을 놀라게 했다. 하연은 똑바로 섰다.“왜요?”상혁은 하연을 잠시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할 지 몰랐다. 잠시후에야 느슨하게 말했다.“부엌 연기가 커. 먼저 나가 있어.”하연은 상혁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몇일 있어요?”“오늘 새벽에 가.”DL에 사람이 부족하면 안 되었다. 하루 반이 최대 한계이다.“그렇게 급해요?”하연은 다가갔다.“그럼 안 나갈래요. 오빠와 같이 할게요.”그런 집착에 상혁의 우울한 기분에 금이 가며 입꼬리를 올렸다.“어떻게 아가씨를 직접 요리하게 할 수 있겠어.”“내가 할래요.”하연은 바로 들어가며 토마토를 씼었다. 상혁은 어쩔 수 없어 앞으로 다가가 하연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옷 젖히지 마.”상혁은 칼질을 잘했다. 칼을 사용할 때 동작이 빨랐다. 하연은 토마토 바구니를 들고 상혁이 고기를 자르는 것을 보며 먹었다.“계속 먹으면 없어.”상혁은 말했다. 하연은 그제야 바구니에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고 어색해서 웃었다.“엄청 달아요. 먹을래요?”상혁은 고개를 흔들었다. 하연이 밤을 새서 안색이 조금 창백했다. 입가의 붉은 주스가 강한 대조를 이루어 부상혁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하연은 다가갔다.“먹어봐요, 정말 달아요.”토마토는 상혁의 입에 건네지자 상혁은 무의식적으로 피했다. 하연은 제대로 서지 못해 상혁의 품에 넘어졌다. 순간 상혁의 숨결이 느껴졌다. 토마토는 딸에 떨어졌다. 하연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상혁의 눈빛에 빠져 가슴이 두근거렸다.“저...”상혁은 힘을 주며 뜨거운 눈빛으로 하연을 바라보았다.“토마토를 안 좋아하지만 지금은 먹어보고싶네.”하연의 몸이 뻣뻣해지며 가슴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앞에 상혁이 다가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빨간 입술이 거의 닿을 것 같았다. 바로 이때 목소리가 들려왔다.“부 대표님.”소리가 갑자기 멈추었다. 연지였다. 연지는 제자리에 서서 놀란
상혁은 하연에게 의자를 끌어주었다.“어디가 달라?”식탁 위의 죽은 김이 모락모락했다. 하연은 숟가락을 들고 생각했다.“오빠는 황 비서를 많이 믿어요. 두 사람 사이에 합이 맞아요.”상혁은 바로 화제를 돌렸다.“너와 정태훈처럼.”“그것도 아니에요. 우린.”하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상혁은 반찬을 집어주었다.“빨리 먹고 자.”“깨어나면 오빠는 또 가야겠네요.”“아쉬워?”농담이지만 하연의 귀끝이 붉어졌다.“널 잠들지 못하게 하려고 돌아온 게 아니야. 말 들어.”하연은 아메리카노와 빵을 먹는 것이 익숙했다. 갑자기 따뜻한 죽을 먹자 만족스럽지 않았다. 실내가 덥고 죽도 뜨거워 상혁은 재킷을 벗어 단단한 근육을 들어냈다. 손가락으로 식탁을 두드렸다.“그 후 주현빈이 주진을 집으로 데려갔다고 들었어.”하연은 놀랐다.“어떻게 알았어요?”“평소 뉴스를 자주 봐.”“그런 셈이죠. 사모님께서 받아들였으니까요.”하연은 주진이 물에 빠진 것이 떠오르자 머뭇거렸다.“상혁 오빠, 이 아이가 무사하게 클 것 같아요?”상혁은 눈을 내리깔고 하연의 팔에 비치는 햇살을 바라보았다.“주씨 가문의 두 아들 중 큰아들은 여자가 많지만 아직도 자식이 없어. 주현빈도 아직까지 자식이 없어. 두 세대가 화목하게 지내고 있네.”“이제 주현빈이 갑자기 사생아를 데려왔어. 이익에 많이 영향되고 있어. 무사할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고난을 겪을 것이야.”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주진이 물에 빠진 것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상혁은 갑자기 하연을 바라보았다.“왜 갑자기 그걸 물어?”하연은 놀랐다. 하지만 끝까지 물에 빠진 일은 말하지 않았다. 그러면 서준의 얘기가 나와야하고 해명하기 귀찮았다. 하연은 고개를 흔들었다.“오빠, 낮에 할 일 있어요?”“FL에 다네와야해, 점심에 돌아올 거야.”하연은 기분이 좋아졌다.“기다릴게.” 아침 식사를 마치고 상혁은 떠났다. 하연은 밖에서 엔진 소리가 울리는 것을 듣고 위층에 올라가려던 중 피뜩 보았다. 갑자기 소파에
하연은 또박또박 말했다. 상혁의 안색이 어두워지며 미소가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뭐?”하연은 사진 한 무더기를 상혁의 몸에 던지며 화를 냈다.“제가 주진의 생일 연회에 갔다고 말하지 않았는데, 제 사진이 있네요. 뭘 먹었는지, 뭘 했는지, 누구랑 있었는지 다 알면서 아무말도 하지 않았네요.”“부상혁, 무슨 뜻이에요?”하연은 믿을 수없어 두려움과 공포고 가득찼다. 상혁은 눈을 내리깔고 흩어져있는 사진들을 보았다. 모두 하연이 생일 연회에 참가한 사진이었다. 그중 제일 많은 게 서준과 함께 있는 사진이다. 각도가 이상하여 너무 애매해 보였다. 옆으로 보자 연지의 가방이 보여 상혁은 모든 것을 깨달았다. 상혁은 몸을 숙여 사진을 주었다.“일부러 감시한 게 아니야. 한서준을 감시하는데, 너와 마주쳐서 사진이 찍힌 거야.”하연은 이해하지 못했다.“왜 한서준에게 사람을 붙혀요?”“JJ 그룹이 사고가 나도록 꾸몄고, 모든 게 널 가리키고 있어. 내가 당연히 지켜봐야하지 않아?”상혁은 잠잠하게 말하며 잘못을 지적하지 못했다. “네가 대처할 수 없다면 내가 바로 도와줄 수 있어.”하연은 상혁의 눈빛을 바라보았다. 믿고 싶었지만 왠지 모르게 계속 의심이 들었다.“나한테 솔직히 말할 수 있었어요.”“너와 한서준 사이에 금이 있어. 만나서 옷도 사주고, 수습도 해줄 수 있는데, 내가 알려주면 네가 받아드릴 수 있어?”상혁은 사진을 잡고 하연의 맞은편에 앉았다. 말투에는 참고 있었던 곤난함이 느껴졌다.“저.”하연은 무의식적으로 설명하고 싶었다.“저도 방법 없어요. 계속 집착하고 있잖아요.”상혁은 웃었다.“하연아, 결혼한 지 몇 년이 자나서 모두 내려놓았다고 했지만, 옛사랑을 생각하면 흔들린 적이 없었어?”“당연히 없었죠?”상혁은 갑자기 다가와 하연을 구석에 몰며 가까이 있었다.“한서준이 뭐가 좋아?”“아니요.”하연은 도망갈 길이 없어 고개를 기울려 상혁의 숨결을 느꼈다.“예전에 말이야.”‘예전에?’하연은 몇 년 전 콜롬비아에서 서준
하연은 어렵게 진정이 되었다. 가슴을 막으며 상혁을 밀어냈다.“먼저 방에 돌아갈게요. 가요.”품이 공허해졌고 상혁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무의식적으로 하연을 잡았다.“좋아해.”하연은 멈칫했다. 이런 날이 있을 거라고 상상했었다. 상상 속에서 하연의 대답은 나도 좋아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말이 나오지 않았다.“왜 귀국한 거예요?”똑똑한 하연은 바로 중점을 잡았다.“무서웠어. 너와 한서준이 다시 만날까 봐.”“아니.”하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상혁은 말을 끊었다.“그럴 확률이 적다는 걸 알아. 하지만 예전으로 다시 돌아갈까 봐 무서웠어. 그 당시도 마찬가지야. 내가 잠시 떠났는데, 넌 한서준 곁에 갔어.”상혁의 말투는 우울했다. 하연도 가슴이 찔린 듯 아파났다. 하연은 손을 내밀었다.“진정해요.”하연은 손을 뿌리치며 재빨리 계단을 올라가 계단에서 사라졌다. 연지는 하연의 집 밖에서 기다렸다. 차창으로 상혁이 안에서 나오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최하연 씨와 식사를 하지 않아요?”상혁의 안색이 어두워지며 손에 있는 가방을 연지에게 던졌다. 연지는 가방을 받았다.“이, 이건 제가 두고 온 거예요. 죄송해요.”상혁은 가만히 서서 담배에 불을 붙이며 빨아들였다.“난 여자를 때리지 않아. 해명해.”연지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깜빡했어요. 일부러 그런게 아니에요.”상혁은 말을 하지 않고 담배만 피웠다. 연기 속으로 연지를 보았다.“날 얼마동안 따랐지?”“졸업한 후부터 대표님을 따라서, 5년 되었어요.”“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던 거로 기억하는데.”“네, 대표님의 지원 덕분이에요. 아니면 유학할 기외도 없었고, DL에 입사할 기회도 없었을 거예요.”상혁은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넌 나에게 충성해야 해.”“절대 다른 마음이 없어요!”“일부러 사진을 하연 집에 놓은 건, 뭘 알려주고 싶었어?”연지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며 고개를 숙였다.“정말 일부러 두고 간 것이 아니에요. B시에 자주 머물지 않아 일이 많아서 깜빡했
가흔이 B시에 돌아오자마자 술 한 잔 하자고 불려가 조금 피곤했다.“안색이 안 좋네, 무슨 일이야?”바에서 하연은 손에 술을 들고 반쯤 마셨다.“미안해, 여흔과 예나가 바빠서 널 부를 수 박에 없었어.”하연은 취했다.“왜 그런 말을 해, 내가 남이야?”가흔은 말을 하며 자신에게 술을 부었고 진지하게 한 모금 마셨다.“아직 말을 안했어. 무슨 일이야?”하연의 얼굴이 우울해 보였다.“상혁 오빠 돌아왔어.”“좋은 일이네, 기분이 안 좋아?”“나한테 고백했어.”가흔은 충격을 받아 사레가 들렸다. 한참동안 기침을 하고서야 진정되었다.“고백? 언제, 어디서, 어떡해?”가흔은 흥분했다. 하연은 머리를 만지며 짜증을 내며 간단히 설명했다. 가흔이 화를 낼 줄 알았지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웃음이 조금 무섭네.”가흔은 하연의 술을 뺏었다.“달콤하네, 설렜어.”하연은 화가 나서 웃었다.“미쳤어?”“생각해 봐, 부상혁이 왜 돌아오겠어. 너와 한서준이 같이 있는 걸 보고 참지 못했겠지. 신경 쓰이고 질투한 것만으로도 너에 대한 마음을 설명할 수 없어?”가흔은 잠시 생각했다.“부상혁을 안 좋아해?”하연은 고개를 흔들었다.“안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서두르는 것 같아. 많은 일들을 파악하지 못했는데 너무 갑작스러워.”그것도 그런 상황에서 발생했다.“감정은 그런 거야. 모두 계획대로 가면 무슨 감정이야. 일과 뭐가 달라?”일리가 있었닥.“그럼 너와 우리 둘째 오빠는 누가 먼저 고백했어?”그 말을 듣자 가흔은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았다.“뭐라고? 시끄러워서 잘 안 들려.”하연은 화가 나서 가흔을 때렸다. 가흔도 웃으며 장난을 쳤다. 멀리서 갑자기 소리가 들려왔다.“여신님!”눈을 뜨고 보자 오랜만에 만나는 운석이었다. 손에 술을 들고 있는 걸 보니 옆에 바에서 온 것이다. 뒤에서 태현 등 사람들도 있었다. 하연의 웃음이 사라졌다.“나오기전 기도했었어야 했네요. 왜 여기에 있어요?”운석은 혀를 차며 앉았다.“여신님,
“아직 결정되지 않았어. 말하면 안 돼.”비밀로 하자 하연의 머리속에 한 인물이 스쳐지나가며 웃었다.‘설마 그 아가씨가 혹시 선유야?’계속 장난을 치자 반쯤 친구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연은 답답하여 조금 앉아 있다가 나가려고 하자 운석이 말렸다.“투자은행이 정신이 없어요. 저도 술 마실 시간이 있는데 DS가 그렇게 바빠요? 잠시도 앉을 수 없네요.”“밤을 새서 잠을 자야겠어요.”태현도 말렸다.“하연 씨가 사장님인데, 언제 자면 안 돼요. 자, 술 마시고 가요.”하연은 눈썹을 찌푸렸다.“저한테 술을 권하는 거예요?”“그런 뜻이 아니에요.”운석은 하연을 의자로 밀며 애매하게 눈을 깜빡 거렸다.“오랜만에 만났는데 같이 이야기를 나누어요.”동시에 클럽 앞에 검은색 폴르쉐가 매끄럽게 정차했다. 2분 후, 스포츠카 H9도 멈추었다. 연지가 먼저 내리고 차문을 열었다.“최하연 씨가 안에 있어요.”상혁은 대답을 하며 골드 카드를 보여주며 들어갔다.“무슨 얘기를 하고 있어?”맑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사람들은 쳐다보았다. 그러자 서준이 의자를 뒤로 당겨 앉은채 표정이 편해보였다. 하연도 깜짝 놀라 가흔과 눈을 마주쳤다. 운석은 피하지 않았다.“널 기다리기 너무 어렵네.”하연에게 마음이 없어 서준과 하연이 잘 되길 바랐다. 운석은 하연을 보자마자 서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곧 오겠다고 하더니 결국 반시간이 걸렸다. 서준은 숨기지 않고 말했다.“차가 막혔어.”하연은 심호흡을 하며 가흔을 잡고 일어섰다.“정말 가봐야해요. 너무 졸려요.”운석과 태현은 말렸다.“가지 마요. 가지 마요. 오랜만에 만났는데 얘기 좀 해요.”말을 하며 가흔을 밖으로 끌고 나갔다.“우린 먼저 돌아다녀요.”가흔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아, 저기!”바에는 서준과 하연만 남았다. 서준은 문앞에 앉아 길을 반쯤 막았다. 하연의 피곤한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해외 고객은 내가 해결해 줄 수 있어.”하연은 눈썹을 찌푸리며 서준을 내리보았다. 레이저 빛이
서준과 하연이 동시에 눈을 들자 상혁을 보았다. 검은 색 코드를 입고 엄숙하게 있었다. 조명이 화려한 와인바에 있자 더욱 훤칠해 보였다. 하연은 무의식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상혁 오빠, 왜 왔어요?”상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서준의 시선속에서 말했다.“한 대표님, 길을 막았네요.”서준의 긴 다리가 옆으로 뻗어 상혁의 길을 막았다. 바로 다리를 걷지 않았다. 서준의 카리스마도 상혁 못지 않았다.“여긴 부 대표님이 갈 길이 아니에요. 막아도 괜찮아요.”두 훌륭한 남자가 상대하니 전혀 승부가 보이지 않았고,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여긴 제가 갈 길이 아니었지만, 제가 원하는 사람이 여기에 있어 가야 해요.”뜻이 확실했다. 서준은 눈썹을 찌푸렸다.“원하는 사람이 부 대표님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이 말을 듣자 상혁은 웃으며 하연을 바라보았다.“여기 있을 거야, 아니면 나와 같이 갈 거야?”하연의 머리가 찌릿했다. 기억속에서 상혁은 이런 장소에 자주 오지 않았다. 항상 품위있고 자기 관리가 철저하여 이런 곳에 오지 않는다. 하연은 가방을 찾고 나가려 하자 서준에게 잡히고 서준도 천천히 일어섰다.“원하지 않는데 강요하세요?”하연은 멈추었다. 상혁과 이런 일이 생겨 기분이 이상했다. 상혁의 시선은 계속 하연에게 있었다.“한 대표님도 하연이 원하지 않으면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네요. 그럼 주현빈 집에서 왜 하연과 우연한 만남을 만들어요? 곤란한 게 안 보여요?”하연은 눈을 들자 서준의 힘이 풀리는 걸 느꼈다.“네가 말했어?”‘이미 모든 말을 할 사이가 되었어?’하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상혁이 사람을 붙혀서 안 것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러자 상혁은 하연의 손을 잡고 곁으로 당기며 하연의 턱을 올렸다.“얼마 마셨어?”매우 친밀해 보였다. 하연은 상혁의 손을 치웠다.“반 병, 가흔도 있어요.”“3시간 후, 비행기가 떠나. 여기에 있고 싶으면 나도 강요하지 않아.”하연은 눈을 치켜올렸다. 눈가가 촉촉하며 원망하
다른 곳에서 있던 조봉규가 소란이 일자마자 급히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송혜선에게 다가가며 다급히 말했다. “설날인데, 뭐하러 이렇게 화를 내...” 조봉규가 입을 여는 순간, 남준의 온몸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남준의 시선이 날카롭게 쏘아붙었고, 조봉규는 본능적으로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애써 태연한 척하며 한 발 다가섰다. 송혜선의 팔을 조심스레 부축하며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건강이 우선입니다.” ‘건강?’남준은 손에 쥔 염주를 힘껏 움켜쥐었다. 힘이 들어간 손등에는 핏대가 서고, 눈빛은 살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리고 시선은 서로 닿아 있는 두 사람의 손목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입가에 엷은 조소가 떠올랐다. “조 선생님, 참으로 열정적인 분이시군요. 설날에도 근무 태세를 유지하시다니.” 조봉규는 눈치가 빠른 인물이었다. 당연히 그의 말 속에 담긴 조롱을 알아챘다. 그러나 겉으로는 한껏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며 머리를 숙였다. “별말씀을요. 환자의 곁을 지키는 게 제 본분입니다.” 남준은 가만히 조봉규를 노려보다가, 짧고 날 선 경고를 던졌다. “그렇다면 본분에만 충실하시죠. 여긴 부씨 가문의 본가이니까.”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남준아!” 송혜선이 다급히 나섰다. 남준을 나무라는 말투였지만, 그 속에는 조봉규를 감싸려는 의도가 분명히 깔려 있었다. 남준의 눈빛은 더욱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송혜선은 오히려 기세를 올려 쏟아내듯 말했다. “네가 좀 더 나서서 잘했더라면, 부상혁한테 밀릴 일도 없었어! 내가 왜 조진숙한테 설날마다 굽신거려야 하냐고?” “지금, 어머니는 나를 원망하시는 겁니까?”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남준의 손에서 염주의 한 알이 ‘탁' 하고 부서졌다. “남준아!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송혜선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염주는 영적인 기운이 깃든 물건이야. 함부로 부수면 불길한 일이 생길
부동건의 말은 송혜선을 전적인 신뢰를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중에 진실이 밝혀지면, 과연 부동건은 스스로를 어떻게 납득할까?’ ‘결국 속아서 살아온 날이 우스운 바보일 뿐...’ 조진숙은 아무 말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애틋한 사랑인데, 굳이 이럴 필요가 있을까?”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 서류들, 가져가.” “나 다른 뜻은 없어.” 부동건은 조진숙의 단호한 태도에 살짝 주춤했지만, 곧장 다시 설득을 시도했다. “네가 아직 날 원망하고 있다는 거 알아. 그동안... 혹시 네가...” “착각하지 마.” 조진숙은 부동건의 말을 끊었다. 더 이상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부동건은 한 발 더 다가섰다. “하지만 네가 이걸 받지 않는다면, 결국 날 아직도 원망하고 있다는 뜻 아니야?” 조진숙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가슴 깊숙이 가라앉은 감정이 불쑥 떠오르는 듯했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감정을 정리한 뒤,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부동건은 말없이 서류를 정리하더니, 숙련된 손놀림으로 만년필을 열어 조진숙 앞에 내밀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대답이었다. “후회할 거였으면, 애초에 여기 오지도 않았어.” 이번엔 조진숙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펜을 들어, 서류 맨 아래에 단호한 필체로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부디 이 선택을 후회하는 날이 오지 않길 바라.” 부동건은 서류를 덮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마음속에 짓눌려 있던 무언가가 비로소 내려앉는 듯했다. 그는 문득 나직이 말했다. “이제야... 후회한들, 이제 돌아갈 길도 없어.” 조진숙은 그 말에 가슴이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끝내 시선을 돌렸다. 담담한 표정 속에 모든 감정을 삼키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 “이건... 다 정해진 운명이야.” ‘운명의 장난...’ ‘어쩔 수
“무슨 말씀인지 압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제 뜻대로 하게 해주십시오.” 부동건의 태도가 단호했다. 이를 지켜보던 부해철이 더 이상의 말은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미 네가 마음을 정했다면, 내가 더 이상 뭐라 할 수도 없지. 다만, 앞으로 그 여자를 내 앞에 데려오지는 마라. 네가 어떻게 살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 “그리고...” 부동건이 무슨 말을 더 하려 했지만, 부해철은 손을 휘저으며 등을 돌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는 뒷모습만이 남았다. ‘그렇게까지 반대할 줄은 몰랐네...’ 부동건은 묘한 기분으로 그 자리에 멈춰섰다. ...설날 온 나라가 한 해의 끝을 보내고,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 예전에는 늘 조진숙과 상혁 모자가 함께 보내던 명절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조금 달랐다.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의 본가가 가까운 데다, 명절이 지나면 하연과 상혁의 약혼식이 있을 예정이었다.그래서 조진숙이 제안했고, 양가 가족들이 함께 부씨 가문에서 설날 저녁을 보내기로 했다. 그 덕분에 조진숙은 하루 종일 분주하게 준비에 매진했다. 그러나 제사가 끝나자마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진숙아, 새해 복 많이 받아.” 부동건이 어색한 미소를 띠며 낮은 자세로 인사를 건넸다. 평소 같았으면 송혜선과 함께 명절을 보낼 사람이, 오늘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조진숙에게는 뜻밖이었다.그녀는 담담한 얼굴로 물었다. “여긴 웬일이죠?” “잠깐 들렀어, 당신한테 할 말도 있고 해서.” 조진숙은 그의 시선을 따라 문득 집안 분위기를 둘러보았다. 송혜선이 이곳에 들어온 이후, 부씨 가문 본가는 한 지붕 아래에서도 철저하게 북쪽과 남쪽으로 나뉘어 있었다.그 경계는 뚜렷했고, 불필요한 마주침은 없었다. 부동건이 송혜선과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이후, 둘은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만약 이번 일이 없었다면, 조진숙 역시 이미 오래전에 이 집을 떠났을 터였다. “들어와.
송혜선은 급히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 했다. “아무래도 남준이가 좀 늦나 봐요.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는 게 어떨까요?” 부동건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얼굴을 굳혔다. “말 같지도 안은 소리를 하고 있어! 오늘 같은 날에, 시간 개념도 없이 늑장을 부려.” 송혜선은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남준이 오면 꼭 제가 주의를 줄게요.” “교육 똑바로 시켜. 좀 상혁이 하는 것에 반만큼이라도 신중했으면, 나도 그 녀석한테 좀더 잘해 줬을 거야.” ‘또 시작이군.’ 송혜선은 속이 쓰렸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오면 오는 거고, 못 오면 어쩔 수 없지.” 부동건은 한 치의 여지도 주지 않고 단호하게 내뱉곤,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어서 남준이를 찾아와! 오늘 제사에 참석하지 못하면, 앞으로 나를 어머니라고 부를 생각은 하지도 마.” 송혜선의 가슴이 격하게 오르내렸다. 이 모든 노력들이 사소한 실수 하나로 무너질 순 없었다. ...부씨 가문은 제사에 있어서 철저한 예법을 중시했다. 다행히도 상혁은 부동건과 수년간 제사를 지내며 익숙해져 있었고, 모든 절차를 한 치의 오차 없이 진행했다. 부씨 가문의 어른들 역시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동건아, 상혁이가 있어서 네 대가 끊길 걱정은 없겠구나.” “앞으로 부씨 가문의 대업을 상혁이가 이어간다면, 우리 늙은이들도 한시름 덜겠어.” 부동건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야 물론이죠. 상혁이는 부씨 가문의 기둥이 될 인재입니다.” 상혁은 겸손한 태도로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앞으로도 많이 지도해 주십시오.” “어디 우리가 너희 젊은이들에게 배우는 게 더 많지!” “...”제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부남준이 느지막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동건은 남준을 보자마자 눈빛이 차갑게 식었지만, 일단 감정을 누르고 말했다.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어서 와서 절부터 올려라.” 남준은 살짝 눈썹을
최씨 가문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부씨 가문의 본가는 싸늘하고 조용했다.예년과 다름없이, 설날이 되면 부동건은 집안의 남자들과 함께 조상들에게 제사를 올려야 했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른 아침부터 송혜선은 핸드폰을 손에 쥐고 부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연결음만 울릴 뿐, 남준은 끝내 받지 않았다. ‘이 녀석은 정말이지, 사람 속을 태우는 재주가 있다니까.’ 송혜선의 얼굴에 점점 초조한 기색이 드러났다. 옆에서 지켜보던 조봉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때? 아직도 전화를 안 받아?” 송혜선은 짙어진 눈매로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 녀석, 정말 사람을 신경 쓰게 만드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조봉규는 부드러운 말투로 그녀를 달랬다. “혹시 무슨 사정이 있어서 늦는 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너무 걱정 마십시오. 남준이가 철없는 아이도 아니고.” ‘철없는 아이가 아닌데 이러겠어?’ 송혜선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최대한 감정을 눌렀다. “부씨 가문의 어른들이 원래부터 남준이를 못마땅해했는데. 이런 중요한 제사까지 빠지면, 분명 뒷말이 나올 거야.” 그녀의 말투에는 이미 불안과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그러는 사이, 두 사람이 작은 응접실에서 나와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그때, 정면에서 다가오던 부동건과 마주쳤다. 부동건은 갓 외투를 정리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송혜선과 조봉규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자, 손동작이 살짝 느려지며 묘한 시선을 던졌다. “조 선생, 올해도 그렇게 혜선이 옆에 딱 붙어서 열심히 잘 보살펴 주세요.” 그 말 한마디에, 분위기가 묘하게 변했다.조봉규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회장님, 제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부동건은 묘한 눈빛을 유지한 채, 덤덤히 말했다. “혜선이가 아이를 무사히 낳으면, 그에 대한 보상도 충분히 해줄 테니
두 집안이 한데 모여 북적이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이런 귀한 순간을 마음껏 즐기며 보내다 보니, 어느덧 설날 전날이 되었다. 모두 함께 전용기를 타고 F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설날이 밝았다. 올해는 오랜만에 최씨 가문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인 데다, 기쁜 소식까지 겹친 한 해였다. 그 덕분인지 최동신은 평소보다 더욱 설 준비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최씨 가문의 본가는 분주했다. 집사와 고용인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저택 곳곳을 장식했다. 새빨간 복주머니와 길상 문양이 새겨진 장식들이 하나둘 자리 잡았고, 정원에는 화려한 등불이 걸리며 설 분위기가 한층 더 짙어졌다.하연이 계단을 내려오자, 기다렸다는 듯 최하성이 환한 얼굴로 다가왔다. “하연아, 새해 복 많이 받아라.” 그러면서 두툼한 세뱃돈 봉투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하연은 두 눈을 반짝이며 얼른 봉투를 받았다. “와! 이렇게 두꺼워요? 하성 오빠 최고!” 그때, 계단 위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있다.” 최하경이었다. 그 역시 두툼한 세뱃돈 봉투를 들고 내려왔다. “작년, 재작년 다 해외에 있어서 못 챙겨줬잖아. 그래서 올해 한꺼번에 더 두둑이 넣었다.” “와! 이건 더 두껍잖아요! 이러다 손목 나가겠어요!” 하연은 연달아 두 개의 두툼한 봉투를 받아 들고, 각각 한쪽 팔을 오빠들에게 걸었다. “오빠들 있어서 진짜 좋아요!” 최하성, 최하경 둘 다 서로를 바라보며 우애가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그리고 최하민과 예아름이 나란히 들어왔다. 추운 바깥 공기를 뚫고 들어오자마자, 하민은 아름의 목에서 목도리를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그는 안쪽에서 떠들썩하게 웃고 있는 세 남매를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집이 이렇게 활기찬 게 얼마 만이에요!” 아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러게요. 앞으로 더 행복한 일만 가득할 거예요.” 하민은 아내의 허리를 가볍
그리곤 진심을 담은 남자의 목소리가 멈추었다. 하지만 하연의 눈가에는 이미 촉촉한 눈물이 맺혀 있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글귀, 한 글자 한 글자마다 상혁이 진심을 담아 전한 마음이 느껴졌다. 이건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상혁이 하연에게 건네는 가장 솔직하고 깊은 속마음이었다. 그때, 뒤에서 들려온 부드러운 목소리. “하연아.” 하연은 본능적으로 뒤돌아섰다. 그리고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숨이 멎었다. 아까까지의 편안한 차림은 온데간데없이, 눈앞의 상혁은 새하얀 수트를 차려입고 있었다. 반듯하게 맨 보타이, 정갈하게 빗어 넘긴 머리, 그리고 손에 들린 한 다발의 꽃. ‘동화 속에서 막 나온 왕자님 같아.’ 하연은 멍하니 서서 남자를 바라보았다. 상혁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하연의 가슴이 터질 듯이 뛰었다. 남자의 시선, 남자의 걸음, 그가 다가오는 순간의 모든 것이 하연의 가슴속 깊이 새겨졌다. 마침내, 상혁은 하연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두 사람은 마주 섰고, 서로의 눈동자에 상대방의 모습이 담겼다.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떨림이 전해지는 듯했다. 조용한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 상혁이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꽃을 건넸다. 남자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하연아...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말이 끝나자, 그는 왼발을 살짝 앞으로 내디디더니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작은 벨벳 상자를 꺼냈다. 이어서 뚜껑을 열자,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혁의 눈빛에는 단 하나의 감정만이 가득 차 있었다. 바로 사랑이었다. “한때 나는 사랑이란 영화 속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널 만나고, 그게 아니란 걸 알았어.” “사랑은 영화 속 한 장면이 아니라,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서로를 아껴주고, 이해하고, 감싸주는 거라는 걸.” “그래서 나는... 너와 함께, 그런 사랑을 하
둥근 형태의 테라스는 새하얀 난간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 위로 푸릇푸릇한 덩굴식물이 감싸고 있었다. 연둣빛 야자수 잎 사이로 작고 앙증맞은 꽃들이 군데군데 피어 있었고, 은은한 향기가 바람에 실려왔다. 테라스 중앙에는 우아한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이미 차와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하연아, 우리 저기에 앉자.” 상혁은 하연의 손을 잡고 테이블로 이끌었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직접 꽃차를 따라주었다. 하연은 손으로 찻잔을 감싸고 조심스레 한 모금 머금었다. 부드러운 향이 입안 가득 퍼지며 깊은 여운을 남겼다. “이거 무슨 차예요? 향이 너무 좋아요.” “목련차야. 테라스 뒤쪽에 한가득 피어 있는데, 한번 가볼래?” ‘목련꽃이 이렇게 가까이에서 피어 있다니.’ 순백의 꽃잎이 겨울을 이겨내고 피어나는 모습이라니,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연은 찻잔을 내려놓고 기대에 찬 눈빛을 보냈다. “가보자!” 둘은 테라스를 나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하얀 원형 아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너머로 눈부신 꽃의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우와...’ 하연은 숨을 삼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순백의 목련이 바람에 살랑이고, 보랏빛 라벤더가 넘실댔으며, 튤립이 형형색색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각종 귀한 품종의 꽃들이 경쟁하듯 피어나고 있었고, 이 모든 아름다움이 한데 어우러져 마치 꿈 속을 걷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상혁은 걸음을 멈추고 어디선가 꽃으로 엮은 화관을 꺼내더니, 조심스레 하연의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하연아, 여기는 너만을 위한 꽃밭이야.” 놀란 듯 하연이 눈을 깜빡이며 상혁을 올려다보았다. ‘설마...?’ 여자의 가슴이 터질 듯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상혁은 하연의 손을 잡고, 꽃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길을 따라 걷자 길이 점점 넓어졌고, 상혁과 함께 그 길을 따라 가자 점점 하연의 시야가 트였다.
고개를 돌려 반짝이는 눈빛으로 하연이 상혁을 바라보았다. “여긴 어디예요?” 상혁은 여자의 시선을 따라 앞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때 버려졌던 작은 섬인데. 나중에 내가 사들였어.” 그는 자연스럽게 하연의 손을 잡으며 손가락을 맞물렸다. “어때? 마음에 들어?” 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네, 좋아요!” ‘좋다니 다행이야. 오랜 시간 공들여 준비한 보람이 있었네.’이 순간을 상혁이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그는 하연의 손을 살짝 당기며 말했다. “일단 우리 아침부터 먹자. 그리고 이따가 바닷가에 데려가 줄게.” “좋아요.” 이 섬은 남태평양 깊숙한 곳에 자리한 작은 외딴섬이었다. 한때는 몇 년 동안 방치되어 잡초가 무성하고 황폐했지만, 우연한 기회에 상혁이 이곳을 매입해 전문가에게 맡겼다. 불과 2년 만에 섬은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집도 짓고, 길도 만들고, 섬 전체가 아름답게 정돈되었다. 한낮이 되자 햇살이 섬을 따스하게 감쌌다. 하연과 상혁은 손을 잡고 깔끔하게 정돈된 자갈길을 따라 걸었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며 미소를 짓고 있었고, 그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따뜻했다. 바람이 불어오자 하연의 원피스 자락이 살짝 날렸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멀리 두었다. 눈앞에는 하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었고, 곱디고운 모래가 햇빛 아래 반짝이고 있었다. “저기 봐요! 야자수가 있어요!” 하연은 설레는 듯 조심스레 뛰어나갔다. 상혁은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그녀가 가는 곳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푸른 하늘 아래, 키가 큰 야자수들이 가지런히 줄지어 서 있었다. 커다란 잎사귀들이 바닷바람을 타고 사각사각 소리를 냈다. 마치 오랜 세월을 품고 바다의 이야기를 속삭이는 것 같았다. 하연은 신발을 벗고 모래 위에 발을 내디뎠다. 발끝을 감싸는 모래가 부드럽고도 간질거려, 묘한 전율이 발끝에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