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연은 어렵게 진정이 되었다. 가슴을 막으며 상혁을 밀어냈다.“먼저 방에 돌아갈게요. 가요.”품이 공허해졌고 상혁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무의식적으로 하연을 잡았다.“좋아해.”하연은 멈칫했다. 이런 날이 있을 거라고 상상했었다. 상상 속에서 하연의 대답은 나도 좋아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말이 나오지 않았다.“왜 귀국한 거예요?”똑똑한 하연은 바로 중점을 잡았다.“무서웠어. 너와 한서준이 다시 만날까 봐.”“아니.”하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상혁은 말을 끊었다.“그럴 확률이 적다는 걸 알아. 하지만 예전으로 다시 돌아갈까 봐 무서웠어. 그 당시도 마찬가지야. 내가 잠시 떠났는데, 넌 한서준 곁에 갔어.”상혁의 말투는 우울했다. 하연도 가슴이 찔린 듯 아파났다. 하연은 손을 내밀었다.“진정해요.”하연은 손을 뿌리치며 재빨리 계단을 올라가 계단에서 사라졌다. 연지는 하연의 집 밖에서 기다렸다. 차창으로 상혁이 안에서 나오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최하연 씨와 식사를 하지 않아요?”상혁의 안색이 어두워지며 손에 있는 가방을 연지에게 던졌다. 연지는 가방을 받았다.“이, 이건 제가 두고 온 거예요. 죄송해요.”상혁은 가만히 서서 담배에 불을 붙이며 빨아들였다.“난 여자를 때리지 않아. 해명해.”연지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깜빡했어요. 일부러 그런게 아니에요.”상혁은 말을 하지 않고 담배만 피웠다. 연기 속으로 연지를 보았다.“날 얼마동안 따랐지?”“졸업한 후부터 대표님을 따라서, 5년 되었어요.”“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던 거로 기억하는데.”“네, 대표님의 지원 덕분이에요. 아니면 유학할 기외도 없었고, DL에 입사할 기회도 없었을 거예요.”상혁은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넌 나에게 충성해야 해.”“절대 다른 마음이 없어요!”“일부러 사진을 하연 집에 놓은 건, 뭘 알려주고 싶었어?”연지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며 고개를 숙였다.“정말 일부러 두고 간 것이 아니에요. B시에 자주 머물지 않아 일이 많아서 깜빡했
가흔이 B시에 돌아오자마자 술 한 잔 하자고 불려가 조금 피곤했다.“안색이 안 좋네, 무슨 일이야?”바에서 하연은 손에 술을 들고 반쯤 마셨다.“미안해, 여흔과 예나가 바빠서 널 부를 수 박에 없었어.”하연은 취했다.“왜 그런 말을 해, 내가 남이야?”가흔은 말을 하며 자신에게 술을 부었고 진지하게 한 모금 마셨다.“아직 말을 안했어. 무슨 일이야?”하연의 얼굴이 우울해 보였다.“상혁 오빠 돌아왔어.”“좋은 일이네, 기분이 안 좋아?”“나한테 고백했어.”가흔은 충격을 받아 사레가 들렸다. 한참동안 기침을 하고서야 진정되었다.“고백? 언제, 어디서, 어떡해?”가흔은 흥분했다. 하연은 머리를 만지며 짜증을 내며 간단히 설명했다. 가흔이 화를 낼 줄 알았지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웃음이 조금 무섭네.”가흔은 하연의 술을 뺏었다.“달콤하네, 설렜어.”하연은 화가 나서 웃었다.“미쳤어?”“생각해 봐, 부상혁이 왜 돌아오겠어. 너와 한서준이 같이 있는 걸 보고 참지 못했겠지. 신경 쓰이고 질투한 것만으로도 너에 대한 마음을 설명할 수 없어?”가흔은 잠시 생각했다.“부상혁을 안 좋아해?”하연은 고개를 흔들었다.“안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서두르는 것 같아. 많은 일들을 파악하지 못했는데 너무 갑작스러워.”그것도 그런 상황에서 발생했다.“감정은 그런 거야. 모두 계획대로 가면 무슨 감정이야. 일과 뭐가 달라?”일리가 있었닥.“그럼 너와 우리 둘째 오빠는 누가 먼저 고백했어?”그 말을 듣자 가흔은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았다.“뭐라고? 시끄러워서 잘 안 들려.”하연은 화가 나서 가흔을 때렸다. 가흔도 웃으며 장난을 쳤다. 멀리서 갑자기 소리가 들려왔다.“여신님!”눈을 뜨고 보자 오랜만에 만나는 운석이었다. 손에 술을 들고 있는 걸 보니 옆에 바에서 온 것이다. 뒤에서 태현 등 사람들도 있었다. 하연의 웃음이 사라졌다.“나오기전 기도했었어야 했네요. 왜 여기에 있어요?”운석은 혀를 차며 앉았다.“여신님,
“아직 결정되지 않았어. 말하면 안 돼.”비밀로 하자 하연의 머리속에 한 인물이 스쳐지나가며 웃었다.‘설마 그 아가씨가 혹시 선유야?’계속 장난을 치자 반쯤 친구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연은 답답하여 조금 앉아 있다가 나가려고 하자 운석이 말렸다.“투자은행이 정신이 없어요. 저도 술 마실 시간이 있는데 DS가 그렇게 바빠요? 잠시도 앉을 수 없네요.”“밤을 새서 잠을 자야겠어요.”태현도 말렸다.“하연 씨가 사장님인데, 언제 자면 안 돼요. 자, 술 마시고 가요.”하연은 눈썹을 찌푸렸다.“저한테 술을 권하는 거예요?”“그런 뜻이 아니에요.”운석은 하연을 의자로 밀며 애매하게 눈을 깜빡 거렸다.“오랜만에 만났는데 같이 이야기를 나누어요.”동시에 클럽 앞에 검은색 폴르쉐가 매끄럽게 정차했다. 2분 후, 스포츠카 H9도 멈추었다. 연지가 먼저 내리고 차문을 열었다.“최하연 씨가 안에 있어요.”상혁은 대답을 하며 골드 카드를 보여주며 들어갔다.“무슨 얘기를 하고 있어?”맑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사람들은 쳐다보았다. 그러자 서준이 의자를 뒤로 당겨 앉은채 표정이 편해보였다. 하연도 깜짝 놀라 가흔과 눈을 마주쳤다. 운석은 피하지 않았다.“널 기다리기 너무 어렵네.”하연에게 마음이 없어 서준과 하연이 잘 되길 바랐다. 운석은 하연을 보자마자 서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곧 오겠다고 하더니 결국 반시간이 걸렸다. 서준은 숨기지 않고 말했다.“차가 막혔어.”하연은 심호흡을 하며 가흔을 잡고 일어섰다.“정말 가봐야해요. 너무 졸려요.”운석과 태현은 말렸다.“가지 마요. 가지 마요. 오랜만에 만났는데 얘기 좀 해요.”말을 하며 가흔을 밖으로 끌고 나갔다.“우린 먼저 돌아다녀요.”가흔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아, 저기!”바에는 서준과 하연만 남았다. 서준은 문앞에 앉아 길을 반쯤 막았다. 하연의 피곤한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해외 고객은 내가 해결해 줄 수 있어.”하연은 눈썹을 찌푸리며 서준을 내리보았다. 레이저 빛이
서준과 하연이 동시에 눈을 들자 상혁을 보았다. 검은 색 코드를 입고 엄숙하게 있었다. 조명이 화려한 와인바에 있자 더욱 훤칠해 보였다. 하연은 무의식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상혁 오빠, 왜 왔어요?”상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서준의 시선속에서 말했다.“한 대표님, 길을 막았네요.”서준의 긴 다리가 옆으로 뻗어 상혁의 길을 막았다. 바로 다리를 걷지 않았다. 서준의 카리스마도 상혁 못지 않았다.“여긴 부 대표님이 갈 길이 아니에요. 막아도 괜찮아요.”두 훌륭한 남자가 상대하니 전혀 승부가 보이지 않았고,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여긴 제가 갈 길이 아니었지만, 제가 원하는 사람이 여기에 있어 가야 해요.”뜻이 확실했다. 서준은 눈썹을 찌푸렸다.“원하는 사람이 부 대표님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이 말을 듣자 상혁은 웃으며 하연을 바라보았다.“여기 있을 거야, 아니면 나와 같이 갈 거야?”하연의 머리가 찌릿했다. 기억속에서 상혁은 이런 장소에 자주 오지 않았다. 항상 품위있고 자기 관리가 철저하여 이런 곳에 오지 않는다. 하연은 가방을 찾고 나가려 하자 서준에게 잡히고 서준도 천천히 일어섰다.“원하지 않는데 강요하세요?”하연은 멈추었다. 상혁과 이런 일이 생겨 기분이 이상했다. 상혁의 시선은 계속 하연에게 있었다.“한 대표님도 하연이 원하지 않으면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네요. 그럼 주현빈 집에서 왜 하연과 우연한 만남을 만들어요? 곤란한 게 안 보여요?”하연은 눈을 들자 서준의 힘이 풀리는 걸 느꼈다.“네가 말했어?”‘이미 모든 말을 할 사이가 되었어?’하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상혁이 사람을 붙혀서 안 것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러자 상혁은 하연의 손을 잡고 곁으로 당기며 하연의 턱을 올렸다.“얼마 마셨어?”매우 친밀해 보였다. 하연은 상혁의 손을 치웠다.“반 병, 가흔도 있어요.”“3시간 후, 비행기가 떠나. 여기에 있고 싶으면 나도 강요하지 않아.”하연은 눈을 치켜올렸다. 눈가가 촉촉하며 원망하
서준의 눈빛이 점차 위험해졌다. 한참 제자리에 서며 전화를 걸었다.“부상혁이 언제 왔어, 왜 아무도 나한테 알려주지 않았어!”...바깥 날씨가 추웠다. 하연이 문 앞에 서서 입김이 났다. 얼굴 반쯤을 스카프에 묻혀 있고 불쌍하게 눈만 드러냈다. 상혁은 하연의 곁에 다가갔다.“왜 차에 타지 않아?”하연은 화를 냈다.“저도 차 있어요.”상혁은 하연을 바며 손을 잡고 따뜻하게 해주었다.“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자지도 못했어. 체면을 봐줄래? 화내지 마.”하연은 더욱 화가 났다.“덕분에 저도 자지 않았어요!”상혁은 웃었다.“고생시켰네, 미안해. 내 탓이야.”상혁의 피부가 원래도 하얀데 검은 코트에 의해 더욱 창백해 보이며 병약한 모습에 하연의 마음이 약해졌다.“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상혁은 기다리고 있는 연지를 바라보았다.“공식전인 업무 외에 네 행방은 매우 고정되어 알아내기 쉬워.”하연은 상혁을 찼다.“모두 손바닥에 있어요? 부 대표님이 저한테까지 수작을 부리네요.”상혁은 아파서 소리를 냈다. 하연은 순간 당황했다.“아파요? 죄송해요, 저.”하연은 상혁의 눈빛에 빠졌다.“여전히 날 아끼네.”하연은 상혁의 손을 뿌리치고 앞으로 갔다. 정말 화가 났다.“상대하기 귀찮아요!”상혁은 가볍게 웃으며 따라갔다.“오늘 한 말들은 진심이야. 방식이 틀리긴 했지만 거짓말이 아니야.”“한서준이 한씨 그룹의 고객을 조건으로 제 용서를 빌었어요.”상혁은 눈썹을 찌푸렸다. 하연은 두로 가며 상혁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오빠는요?”“설렜어?”“아니요. 하지만 오늘 기운석을 만났어요. 요즘 좋아하는 사람에게 구애하고 있다네요. 승마장도 주고 여자가 좋아하는 산업에 투자도 하며 구애하고 있어요.”하연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부 대표님, 제가 좋다면서 이렇게 해요? 아무것도 없어요?”상혁은 손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아무도 없었다. 상혁은 씁쓸하게 말했다.“대학원을 졸업한 때 기억나?”하연은 놀랐다. 그래에 하연은 상혁과 졸업
하연은 얼굴을 들고 입김을 불자 시야의 일부가 가려졌다. 한참 후 하연이 물었다.“왜 알려주지 않았어요.”“그때 네가 한서준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다고 했어.”하연은 눈을 감고 깨달았다.“그래서 그 후 오빠의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네요.”“네가 결혼한 날, DL에 들어가서 일에 집중하겠다고 아버지와 약속했어. 2년이 지난 후 이사회에 들어가서 9명의 이사 중의 한 명이 되었어.”연지는 차를 몰고 거리를 유지하며 그들을 따랐다. 차의 헤드라이트가 오랜 세월처럼 추위 속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는 두 사람을 비추었다.“일 때문에 많이 힘들었어. 그보다 아쉬움이 더욱 컸어. 네가 이혼한 걸 듣고 모든 것을 버리고 B시와서 FL 그룹을 성립했어. 그 핑계로 널 자주 보고 싶었어.”“네가 한씨 가문에서 잘지내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너무 아팠어, 하연아.”상혁의 목소리는 슬픔에 잠겨 있었고, 하연의 가슴도 깨질 것 같았다. 몇년 동안 상혁은 희망 없는 기대를 품고 어떻게 지냈는지 상상이 안 된다. 하연은 급했다.“저, 죄송해요.”“나한테 미안한 일을 하지 않았어. 넌 그저 네 마음을 따랐을 뿐이야.”상혁은 다시 하연의 손을 잡았다.“네가 다시 한서준을 선택한다고 해도 난 널 존중해. 네가 상처를 받으면 내 곁으로 물러서도 널 지적하지 않고 지켜줄 거야.”하연은 머리를 힘껏 흔들며 눈시울을 붉혔다.“아니요, 상혁 오빠. 다시는, 다시는 한서준을 선택하지 ㅇ낳아요.”상혁은 놀랐다. 하연을 바로 품에 안고 힘껏 안았다.“다시는 널 놓치지 않을 거야. 하연아, 사랑해. 오랜동안 사랑했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사랑할 거야.”어렸을 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평생... 하연은 기분이 이상했다. 너무 일찍 설렌 것 같았지만, 오래전 부터 상혁이가 자신을 사랑한 걸 상상도 못 했다.“부상혁, 난 예전에 유치하고 많은 일들을 잘 몰랐어요. 이제야 좋아하는 마음을 알게 되었어요. 늦지 않았어요?”상혁은 가볍게 말했다.“늦지 않았어. 딱 좋아
하연의 별장 안.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난 가흔은 흥분하여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세상에! 이게 무슨 드라마도 아니고, 현실에 이런 사랑이 있다니!” 하연은 싱긋 미소를 지었고 머릿속에는 온통 상혁 생각뿐이었다. 가흔은 재빨리 타자를 치기 시작했는데 하연이 그녀를 말렸다. “뭐하려고?” “이런 빅뉴스는 당연히 공유를 해야지!” 가흔은 단톡방에 이 사실을 말하려 했고 하연은 얼른 그녀를 제지했다. “일단 말하지 마.” “왜?” 가흔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했으면 서로의 관계는 이미 확정된 거 아니야? 너 설마?” “그런 거 아니야.” 하연은 가흔이 타자하고 있던 글을 후딱 지웠고 자신조차도 지금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몰랐다. “아직 관계가 안정된 단계는 아니니까 좀 더 안정되고 나면 그때 다시 말할 거야.” 이 말을 들은 가흔은 손으로 자신의 볼을 감싸고 하연의 표정을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하연, 너 설마 아직도 흔들리는 거 아니지?” “너 그거 알아? 실제로 몇 년 간의 시간은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눈 깜짝할 새에 지나고 그러지 않아. 그건 아주 길고 고통스러운 기다림을 거쳐야 하는 거야.”“부상혁 같은 남자가 주변에 여자가 없는 것도 아닐 텐데 너를 위해 지금까지 기다렸잖아. 이 세상에서 그런 남자는 더 이상 찾기 힘들 꺼야. 그러니 네가 부디 놓치지 않길 바랄 뿐이야.” 자신도 비슷한 경험을 했기에 가흔은 더욱 마음이 쓰이고 공감이 되었다.이에 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알아. 하지만 난 왠지 모든 게 생각처럼 간단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두 사람은 뭔가 서로에 대해 다 알 것 같았지만 또 잘 모르는 것 같기도 했다. 가흔도 망설이는 하연의 모습에 단톡방에 이 소식을 전하진 않았고 무심코 인스타에 올랐는데 순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왜 그래?” 가흔은 바로 하연에게 핸드폰 화면을 보여주며 말했다. “태현이 방금 인스타에 게시물을 올렸어.” B시 상류 계
하연도 며칠간 밤 샜고 제대로 쉬지 못했다. 다음날 오후, 하연은 DS그룹에 도착했고 이미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태훈이 첫 마디를 꺼냈다. “사장님, JJ그룹 쪽 일은 잘 해결됐습니다.” 이에 하연은 의외라는 듯 물었다. “해결됐다고?” 그녀가 DS그룹의 해외 거래처와 연락을 한 건 맞지만 이렇게 빨리 일이 해결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러자 태훈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쪽에서 말하길 갑자기 엄청난 제안이 두 군데에서 들어왔다고 하네요. 제가 따로 조사해보니 한쪽은 DL그룹이었고 다른 한쪽은 HT그룹의 해외 인맥이었어요.” 그제야 하연은 방금 태훈이 지은 웃음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상혁이 자신을 돕는 건 크게 의외가 아니었으나 서준이 왜 이런 상황에서 적극 나서서 도움을 주는 건지 조금 놀라웠다. “이제 다 됐어. 그 두 회사의 인력과 DS 그룹의 인맥까지 합쳐지면 JJ그룹이 해외에서 운영을 시작하기엔 충분할 거야.” “그럼 HT그룹 쪽엔 따로 인사를 갈까요?” 하연은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한서준은 나에게 미안한 마음에 도운 것일 테니 내가 당연히 얻어도 되는 거야. 그러니 굳이 가서 뭐라고 전할 필요 없어.” 태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무실로 돌아온 후 하연은 줄곧 마음이 심란했는데 머릿속에는 온통 모연이 긁었던 그 카드 생각으로 가득 찼고 이 모든 것은 생각처럼 단순한 일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임모연의 요즘 일정은 어때?” 태훈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LS그룹은 현재 모든 정력을 성동의 그 땅에 쏟아붓고 있고 임모연 씨도 사업과 관련된 인원들을 만나거나 상류층 사모님들과 모임을 가지는 것 외에 특별한 일정은 없었습니다.” “한서준과는 만난 적은?” “아니요. 최소한 그 두 분이 만나는 모습이 저희 쪽 눈에 띈 적은 없었습니다.” 하연은 생각에 잠긴 듯했고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상혁에게 물었다. [오빠, 어떤 관계면 한 남자가 자신의 가족카드를 여자에게 줄 것 같아요?] 상혁이 바로
하연은 밝게 웃으며 상혁이 건넨 잔을 받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갓 짠 오렌지 주스는 상큼하면서도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부 대표님이 직접 짠 오렌지 주스라 그런가, 확실히 맛이 다르네요. 정말 맛있어요.” 상혁은 미소를 지으며 장난스레 손을 뻗어 그녀의 코끝을 살짝 건드렸다. “맛있으면 자주 짜줄게.” 하연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답했다. “그럼 감사히 잘 마실게요, 부 대표님!” “아니, 한참을 찾았는데 여기서 둘이서만 꽁냥거리고 있었네?” 문 앞에 기대어 서 있던 하성이 두 팔을 교차하고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상혁, 너 요즘 이 녀석을 너무 애지중지하더라. 그러다 버릇 나빠지겠어.” “오빠!!” 하연은 볼이 부풀어올라 약간 투덜거렸지만, 옆에 있던 상혁은 태연하게 그녀를 감싸며 말했다. “애지중지하든 말든 내 마음이지. 네가 무슨 상관이야?” 하성은 두 손을 들며 장난스레 투항했다. “알았어, 알았어. 난 그냥 너희 둘이 잘 지내는 거 보니 마음이 놓여서 하는 소리야.”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그래, 계속 이렇게 잘 지내줘, 아주 보기 좋아!”그때 하연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부남준’이라는 이름이 뜨자 그녀는 잠시 긴장한 듯 눈빛이 흔들렸다. “오빠들, 먼저 얘기하고 있어요. 난 전화 좀 받고 올게요.” 하연이 자리를 비우고 복도로 나가자, 하성은 방금 전과는 달리 진지한 표정으로 상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요즘 너희 집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소문이 있더라. 동건 삼촌 쪽에서 뭔가 일이 있는 것 같던데?” 상혁은 하연이 마시다 남긴 오렌지 주스를 마시며 시선을 복도 쪽에 고정한 채 무심하게 말했다. “첩이 ‘본처’의 자리를 노리는 거야. 흔한 일이잖아.” 하성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 “동건 삼촌이 그 여자를 꽤 오랫동안 봐줬던 모양이던데. 이제는 꽤 많은 걸 쌓아둔 듯하고, 한번 크게 판을 벌일
“뭐 하는 거야? 빨리 이 주스를 연회장으로 가져가!” 홀 매니저가 다가와 살짝 꾸짖었다. 여자는 급히 고개를 숙이며 질투로 번들거리던 눈빛을 감추고는 얌전히 대답했다. “네, 바로 가겠습니다.” 다영은 태어나서 가사일 한 번 손댄 적 없었지만, 어쩔 수 없이 트레이를 들고 발걸음을 옮겼다. “잠깐!” 매니저가 갑자기 그녀를 불렀다. “너 신입이야? 본 적이 없는 얼굴인데?” 다영의 심장이 두근거리며 가슴 속에서 송혜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 고향 친척 중 하나가 DS그룹에서 일하고 있어. 오늘 밤엔 그 사람 신분을 쓰는 게 편할 거야.” 침착함을 되찾은 다영은 고개를 들어 냉정하게 대답했다. “저는 고객지원부의 진미입니다. 연회 인력이 부족해서 임시로 지원 나온 거예요.” 매니저는 그녀의 명찰을 한 번 흘깃 본 뒤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트레이를 건네받았다. “신입이라면 전면에 나가면 실수하기 쉬워. 내실에서 돕는 게 좋겠어.” “알겠습니다.” 매니저가 떠난 뒤, 다영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다시 연회장을 바라봤을 때, 앞줄에 앉아 있던 하연과 상혁은 이미 모습을 감췄다. 2층 휴게실 안. 원신명은 한 손에 신선한 오렌지 한 봉지를, 다른 손에 포장을 뜯지 않은 녹즙기를 들고 들어왔다. “대표님, 주문하신 오렌지와 녹즙기입니다.” 원신명은 궁금한 듯 물었다. “대표님, 직접 오렌지 주스를 만드시는 건가요?” 상혁은 짧게 대답했다. “원 비서, 거기 두고 가면 돼.” 원신명은 얼른 다가가 도움을 자청했다. “대표님, 이런 건 제가 할게요.” “와이프가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싶다는데, 남에게 맡길 수는 없지.” ‘와이프’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왔고, 마치 그 단어를 그의 마음속에서 수없이 되뇌었던 것처럼 익숙했다. 원신명은 곧 깨달았다. ‘아, 대표님이 직접 최하연 씨를 위해 주스를 준비하시고 싶은 거구나!’ “원 비서, 연말인데도
최하성은 오늘 검정색 정장을 입고 등장했다. 그의 차가운 분위기와 단정한 모습은 단번에 모든 직원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최 대표님!”하성을 마주친 직원들은 공손하게 인사했다. 하성은 살짝 고개를 끄덕일 뿐, 시선을 주지 않고 빠르게 행사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오늘 저녁 만찬은 매우 풍성했다. 동서양의 요리가 조화를 이루며 대부분 직원들의 입맛과 식습관을 세심하게 고려한 모습이었다. 준비에 꽤 공을 들인 것이 분명했고, 결과적으로 반응도 좋았다. 연말 만찬이 시작되기 전, 하성은 DS그룹의 대표이사로서 무대에 올라 인사말을 했다. 하성은 차분한 걸음으로 무대에 오르며, 그의 존재감은 단번에 분위기를 압도했다. 그가 화려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단 몇 마디 간결한 말로도, 관중석에서는 뜨거운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번 연말 행사는 생중계되고 있었으며, 하성이 등장하자마자 팬들과 네티즌들이 빠르게 몰려들었다.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시청자 수가 십만 명을 돌파했다. [최하성 씨, 오랜만이에요! 보고 싶었어요!][연예계에 최하성이 없으니 허전한 기분이에요. 최하성 씨, 돌아와 주세요!][다들 동감! 언제쯤 복귀할 수 있는 거죠?][복귀 요청 99%!!][...] 팬들의 댓글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하성의 인기는 생중계 플랫폼 순위에서도 단연코 1위를 차지했다. 무대 아래에서 생중계를 담당하던 진행자는 이 뜨거운 열기를 놓치지 않고 하성에게 다가갔다. “최 대표님, 생중계 채팅창에 팬들이 사장님의 새해 계획에 대해 굉장히 궁금해하고 있어요. 오늘 이 특별한 밤에 팬분들께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될까요?” 하성은 미소를 머금으며 카메라를 응시했다. 그 순간, 생중계 채팅창은 순식간에 폭발했다. 선물 아이콘이 화면을 뒤덮었고, 댓글은 끊임없이 새로 고침 되었다. “안녕하세요, 하성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저와 DS그룹을 응원해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도 DL 그룹
“어머님, 정말로 부 회장님과 결혼하세요?” 이 얘기는 다영에게 있어 꽤 충격적이었다. 세간에서는 송혜선과 부동건의 관계를 두고 여러 말이 떠돌았고, 그중 가장 많이 들려온 것은 송혜선이 ‘첩’이라는 점이었다. 한때 정지철 부인도 이 사실을 꽤 꺼려했던 터라, 다영은 송혜선이 이렇게 대놓고 정식으로 자리 잡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언제 결혼 승낙을 받으신 거예요?” 송혜선은 이미 불룩해진 배를 가볍게 쓸며, 깊은 눈빛 속에 숨겨진 야망을 드러냈다. “부회장님께서 말씀하시길, 새해도 지나고 이제 곧 아이가 태어날 테니 우리 모자에게 반드시 정당한 신분을 보장해 주시겠다고 하셨어.” “그러니... 다영아, 우리 남준이를 믿어야 해. 지금은 잠시 밀려난 상황이지만,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잖니?” 다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더욱 굳게 다졌다. “어머님, 걱정 마세요. 저는 언제나 남준 씨를 도울 거예요.” 송혜선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더욱 부드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그래야지. 남준이도 절대 너를 저버리지 않을 거야.” 그러다 두 사람이 화제를 돌리며 덧붙였다. “지금 부 회장님이 부상혁을 중시하며 DL그룹의 운영을 맡긴 데는 이유가 있어. 결국은 부씨 가문의 장손이라는 명분 때문이지.” “하지만, 임신 초기에는 변수가 많아. 무슨 사고라도 생기면, 어떻게 되겠니?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잖니?” “만약 그 아이가 사라지면, 부상혁 쪽의 지렛대도 없어진 셈이니 남준이한테 분명 유리한 상황이 될 거야. 그렇지 않겠니?” “...” 다영은 멍하니 한참 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어머님, 그게 무슨 뜻이에요?” 송혜선은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조그마한 흰색 약병을 다영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 약은 무색무취야. 일반인이 먹으면 아무 이상이 없지만, 임신한 사람이 먹으면 삼 일 안에 유산이 돼.” 다영의 손이 떨리며 본능적으로 병을 놓치듯 뺐다. “어머님,
“정다영 씨의 상상력은 참 풍부하시네요.” 상혁은 입꼬리를 비틀며 약간의 비웃음을 섞어 말했다. “세상을 잘 모르는 아가씨다운 모습이라 참 순진하긴 한데, 이런 험한 세상에선 지나치게 순진한 건 별로 좋지 않아요.” 더는 말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듯, 상혁은 뒤돌아 떠났다. 다영은 마치 머릿속이 폭발이라도 한 듯, 귓가에서 찡하는 이명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럴 리 없어요, 남준 씨는 그럴 리 없어요!” 그녀는 낮게 중얼거리며 자신을 설득하려 애쓰며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이미 수없이 눌렀던 번호를 다급히 눌렀다. 하지만,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건 여전히 차갑고 무미건조한 여성의 자동응답 소리뿐이었다. “안 돼!” 다영은 절망하며 비명을 지르고는 갑작스레 밖으로 뛰쳐나갔다. 깊은 겨울밤, 바람은 더욱 매섭게 몰아치고 있었다. ...창밖의 거센 바람에 창문이 덜컹이며 울렸다. 병원의 VVIP 병실 안. 다영은 온몸을 떨며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초점 잃은 눈동자는 텅 빈 듯했고, 난방이 틀어져 있어도 그녀를 감싼 차가운 공기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다영아, 이렇게 늦은 밤에 무슨 일이야?” 송혜선은 평소와 같은 말투로 물었고, 전혀 이상한 기색은 비추지 않았다. 실은 송혜선도 이미 알고 있었다. 정지철이 이제는 구속되고 정씨 가문이 더 이상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나 다영의 마음에는 여전히 남준의 존재가 얽매여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다영에게서 더 많은 가치를 끌어낼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송혜선 또한 명확이 알고 있었다. 그런 생각이 스치자, 송혜선은 표정을 가다듬고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넸다. “자, 물 한 잔 마시고 몸 좀 녹여.” 다영은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린 듯, 송혜선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간절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머님, 남준 씨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세요, 제발요!” 송혜선은 한숨을 쉬며 어쩔 수 없다
며칠 사이, 정다영은 차갑게 닫힌 문을 수없이 마주했다. 한때 주변 사람들이 다영을 떠받들며 찬란한 별처럼 여겼지만, 이제 집안의 사건이 터지자 사람들은 그녀를 피하려고만 했다. 마치 다영에게 다가가기만 해도 불행이 전염될 것처럼... 그렇게 다영은 세상의 차가운 이면과 인간관계의 허망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자연스레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바꾸었다. “송 여사와 남준이는 요즘 집에 없는 걸로 아는데, 정 다영 씨는 왜 여기에 있는 거죠?” 상혁은 평범한 어조로 물었지만, 그 말은 다영을 잠시 멈칫하게 했다. 그녀는 곧바로 대답했다. “남준 씨가 곧 돌아온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상혁은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그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날이 추우니 안에서 기다려요.” 말을 마친 그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남겨진 건 남자의 차가운 뒷모습뿐이었다. 다영은 상혁을 따라가며 급히 소리쳤다. “부 대표님, 잠깐만요...” 상혁이 발걸음을 멈췄다. “무슨 할 말이라도?” 다영은 망설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며칠 동안 그녀가 이리저리 뛰어다닌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아버지를 이 난관에서 구해내기 위해서... 그리고 지금, 아버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의 눈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제 아버지와 관련된 일입니다.” 상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 건 검찰 소관이에요. 전문 변호팀을 고용하면 사건의 진행 상황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을 거예요.” 다영은 초조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부 대표님, 이건 분명 오해입니다. 제 아버지는 회사에 평생을 바친 분입니다. 아버지는 공문서를 위조하거나 계약서를 조작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녀는 자기 아버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즉, 정지철은 딸을 희생하더라도 자신의 미래를 망칠 행동은 절대 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분명히 이번 일에는 뭔가 숨겨진 진실
최씨 가문 본가 후원에 있는 온실에서는 조용히 바둑알이 내려놓아는 소리가 들렸다. 상혁과 최동신은 마주 앉아 바둑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상혁아, 지금 이 바둑판은 승부가 거의 결정 난 것 같은데!” 바둑판 위에서 흑과 백이 치열하게 맞서며 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냈다. 최동신은 한 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다. “자네의 백돌이 반 집 차이로 우위를 점하고 있어. 대단해! 예전보다 실력이 많이 늘었어.” 상혁은 겸손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할아버지 기백이 여전히 넘치시니 제가 아직 배울 점이 많습니다.” 최동신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탄식했다. “늙었지. 이제는 예전 같지 않다.” 그러나 그는 곧 말을 돌려 흑돌을 손에 들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하지만 지금부터 자네도 조심해야겠어.” 최동신은 그 말을 하며 흑돌을 바둑판 위에 툭 하고 내려놓았다. 그 돌이 놓인 자리로 인해 한순간 바둑판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두 사람의 시선이 바둑판 위에 집중되었다. 상혁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손을 멈췄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우위를 점하고 있던 상황이 단 한 수로 인해 역전이 된 것이다. “할아버지의 바둑 실력은 늘 감탄할 따름입니다. 제가 이 점을 간과하고 놓치고 있었네요.” 상혁은 차분하게 패배를 인정하며 판세를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다. 최동신은 손에 들고 있던 바둑알을 다시 주우며 훈계하듯 말했다. “그렇지. 이길 수 있는 상황도 한 수의 실수로 모두 망쳐버릴 수 있는 법이다.” 상혁은 최동신의 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잠시 마주쳤다. 최동신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들리는 말에 DL그룹의 실질적인 권한은 이제 자네가 잡았고, 자네 동생은 동남아 지사로 발령이 났다고 들었네.” “겉으로 보기엔 좋은 상황 같아 보이지만, 상혁이, 네가 한 수라도 실수하는 날엔 모든 걸 망칠 수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이 말은 단순한 충고 이상의 뜻을 담고 있었다
“이렇게 빨리?” 남준은 무심코 말을 뱉었다. 그의 음성엔 조급함이 묻어 있었다. 남준은 방 안을 계속해서 왔다 갔다 하며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연말 이후로 예정되어 있지 않았나? 어떻게 앞당겨진 거지?” 연지는 침착하게 보고했다. “들리는 말로는 이번 사건이 중대한 만큼 생각보다 빠르게 처리되면서 연말 전에 재판이 열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남준은 발걸음을 멈추고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경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부상혁이 나를 궁지로 몰아넣고, 정규인의 입을 열어 내 약점을 찾아내려는 것이겠지.” 그는 잠시 멈칫하다가, 비웃는 듯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하지만 부상혁도 모르는 게 있지. 정규인의 입은 결코 열리지 않을 거란 사실을 말이야.” 연지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상무님, 그 말은 혹시...” 그러나 그녀의 말은 남준의 강렬한 눈빛으로 끊겼다. 서로의 눈이 마주친 순간, 연지는 남준의 의도를 즉각 이해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 정규인의 사건은 법원에서 열렸고, 법정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경찰들이 구치소에서 정규인을 호송해 나오자, 멀리서 그의 초췌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정규인의 기운 없는 모습에서 예전의 당당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법정 방청석을 둘러보다가, 맨 끝자락에서 누군가를 발견했다. 순간, 정규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는 갑작스럽게 방청석을 향해 달려들며 미친 듯이 외쳤다. “여기 왜 왔어! 당장 나가! 나가란 말이야!” 경찰들이 급히 정규인을 제지하려 했으나, 그의 필사적인 몸부림에 저지당했다. “진정해!” 경찰은 엄중히 경고했지만, 그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그러다 결국, 경찰봉이 그의 등을 강하게 내려쳤다. 퍽! 정규인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고, 그의 몸은 앞으로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방청석의 허징인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
“이모...” 하연은 조진숙을 꽉 끌어안으며 말문이 막혔다. 지금은 어떤 말도 조진숙에게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떻게 되든 간에, 이모 곁엔 항상 저희가 있어요.” 조진숙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하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고맙다.” ... 한적한 교외에 위치한 독채 빌라. 고급스러운 소형 승용차 한 대가 천천히 차고로 들어섰다. 황연지는 휴대폰으로 위치를 확인한 뒤, 차 문을 열고 내렸다. 빌라는 꽤 외진 곳에 있었고, 오랜 기간 비어 있었던 듯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연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상무님? 계신가요?”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텅 빈 집안의 메아리뿐이었다. 연지는 2층으로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용기를 냈다. 계단 끝에 닫혀 있는 문 하나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상무님, 안에 계신가요?” 그녀는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잠시 망설이던 연지는 문을 조심스레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코를 찌르는 강렬한 술 냄새가 그녀를 덮쳤다. 연지는 본능적으로 코를 막고 안으로 더 들어갔는데, 방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낯익은 실루엣을 발견했다. “상무님?” 이사회 이후 부남준은 자취를 감췄고, 외부에서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없단다. 그렇게 된 지가 삼 일째였다. 연지는 재빨리 그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 “상무님, 괜찮으세요?” 남준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비록 지금의 그는 어딘가 지쳐 보였지만, 그 매서운 매의 눈은 여전히 날카로운 빛을 띄고 있었다. 그는 황연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입가에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너였구나?” 연지는 아침에 급히 소식을 듣고 서둘러 이곳으로 달려왔다. “상무님, 사라지신 며칠 동안 정다영 씨가 상무님을 계속 찾고 있었습니다.” 정다영은 남준을 찾기 위해 거의 미쳐버린 상태였고, 부남준을 찾을 수 있는 곳은 모조리 뒤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