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각, 다른 입원실. 이 어르신은 정신을 잃고 창백한 얼굴로 누워있었다. 장경화는 이씨 집안 사람들과 함께 삼삼오오 모여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다.“이상하네, 정정하시던 어르신이 갑자기 쓰러지시다니요?”“그러게 말입니다! 평소에는 건강하시던 분도 나이 앞에서는 안 되는 모양입니다.”다들 한숨을 푹 내쉬며 안타까움을 표했다.“할아버지는 어때요?”이때, 이청아가 하이힐을 신고 또각거리며 들어왔다.조금 전까지 회사에서 회의하던 그녀는 할아버지의 병세가 엄중하다는 소식에 바로 달려왔다. “청아야, 의사 선생 말로는 어르신이 버티지 못할 거라고 한다...”장경화가 고개를 저었다.“뭐라고요?”이청아의 낯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할아버지 어제까지만 해도 괜찮으셨잖아요.”“나도 믿을 수 없어. 운명이란 게 이런 것인가 보다.”장경화가 한숨을 내쉬었다.“의사는요? 의사 불러줘요!”이청아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쓸데없어. 한의사도 불러봤는데 병세가 이상하다고 하더라. 이유를 알 수가 없대. 이렇게 가다가는 돌아가실 거래.”“안...안 돼!”이청아는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평소에 자기를 끔찍이 아끼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간다는 게 상상도 되지 않았다.“청아야, 내가 명의를 아는데 그분이 도와주실지도 몰라.”옆의 여호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명의? 누구요? 제 할아버지를 살려줄 수 있어요?”이청아는 정신을 차렸다.“설 의사라고 서울에서 온 의사인데 의술 실력도 뛰어나고 어떤 난치병이든 탕약만으로도 고칠 수 있대. 게다가 강보현 신의의 뛰어난 제자래!”여호준이 얘기했다.“강보현 신의의 제자?!”그 말에 사람들이 술렁였다.강보현은 신의로 남성에서 유명한 사람이니 다들 그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게다가 약왕이라고 불릴 만큼 의약계에서 유명한 사람이었다.그의 의술은 이미 신격화될 정도였다.그런 강보현의 제자라니, 설 의사도 보통이 아닐 것이 분명했다.“진짜 설 의사를 불러와 주실 수 있
“내가 못 한다고? 그래... 그럼 누가 할아버지를 살릴 수 있는데?”유진우가 물었다. 인제 와서 발견한 것이 있다면 여자와는 논리적인 대화를 이어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지금 할아버지를 살릴 수 있는 건 의술이 훌륭한 설 의사뿐이야!”이청아는 한층 진지해진 표정으로 얘기했다.“그래! 호준이가 이미 설 의사를 데려오는 길이야. 그가 나선다면 이 어르신도 곧 깨어날 거야. 너 같은 게 나대는게 아니라.”“설 의사? 그건 또 누구야.”유진우가 물었다.“흥! 너와는 다르게 설 의사는 강보현 신의의 제자야! 각종 난치병을 치료하시지. 너보다 100배는 대단하시지.”장경화가 우쭐대며 얘기했다.말이 끝나게 무섭게 두 사람이 들어섰다.앞에 선 사람은 여호준이었다.그 뒤는 30대로 보이는 남자였다.남자는 긴 외투에 안경을 끼고 있었는데 오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호준아, 어때? 설 의사를 청해왔니?”장경화가 재빨리 호준에게 다가섰다.“당연하죠.”여호준이 웃으며 안경 쓴 남자를 가리켰다.“이분이 바로 설 의사입니다.”“설 의사셨군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설 의사는 외모도 수려하군요! 젊은 나이에 강보현 신의의 제자라니, 대단합니다!”“그러게요! 설 의사께서 오셨으니 이 어르신의 희망이 보입니다!”다들 아부하기 바빴다. 아무래도 강보현의 제자이다 보니 잘 보이고 싶은 듯했다.이후에 일이 있더라도 설 의사를 청할 수 있게끔.“솔직히 여호준 씨가 부탁한 것이 아니라면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한테 병을 보이려는 사람은 항상 줄을 서 있으니까요.”안경을 낀 설 의사는 고개를 쳐들고 그들을 깔보았다.“암요, 암요! 여기에 오신 것만으로도 저희의 영광입니다.”장경화를 비롯한 사람들이 허리를 숙이며 그를 떠받들자 그는 더욱 우쭐해졌다.“되었습니다. 전 매우 바쁘니 시간을 낭비할 수 없습니다. 빨리 치료하고 끝냅시다. 환자는 어디 있습니까?”“여기요!”장경화는 그를 끌고 이 어르신의 옆에 왔다.“음...”설 의사는 고개를 끄덕이
차가운 이청아의 태도와 주위 사람들의 분노에 유진우는 할 말이 없었다.잠시 굳어버린 그는 그대로 나가버렸다.그가 뭐라고 하던 이곳의 사람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흥! 진작 나갔어야지. 방해꾼 같으니라고.”“그러게! 제 분수도 모르는 주제에.”나가는 유진우를 보며 사람들은 욕을 퍼부으며 비웃었다.“설 의사, 눈치 없는 놈은 이미 쫓아냈습니다. 그만 화 푸세요.”장경화가 웃으며 얘기했다.“설 의사, 제 체면을 봐서라도 화 풀어주십쇼. 그래도 병을 치료하는 것이 우선이 아니겠습니까. 일이 해결되면 꼭 보답하겠습니다!”여호준도 입을 열었다.“여호준 씨도 그렇게 얘기하니, 어쩔 수 없군요. 이번 한 번만입니다.”설 의사가 경고했다.“네! 무조건입니다!”사람들은 다 고개를 끄덕이며 여호준에게 감격의 눈빛을 보냈다.비교해 보니 유진우는 더욱 쓰레기 같았다. 진짜 도움을 주는 것은 여호준이었는데 말이다.“됐습니다. 일단 약을 가져오세요.”설 의사는 처방이 적힌 종이를 장경화에게 던져주었다.장경화는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했다.다행히 병원이라서 탕약을 달여오는 것은 간단했다.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따뜻한 탕약이 올라왔다.“조금 전에 저를 의심하던 사람이 있었죠? 오늘 제대로 보여드리죠.”설 의사는 호언장담하더니 모든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어르신의 입으로 탕약을 부었다.뜨거운 탕약이 뱃속에 들어가자 어르신의 낯에 생기가 돌기 시작하고 차갑던 사지도 정상으로 회복되었다. 숨소리도 건강한 사람과 같았다.그 모습에 사람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효과가 있습니다! 어르신의 낯빛이 좋아졌어요!”“과연 설 의사 십니다! 탕약 한 그릇으로 병을 치료하다니, 참으로 신기합니다!”“역시 강 신의의 제자십니다! 청출어람의 의술 실력입니다!”다들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설 의사를 떠받들었다.“제 스승보다는 못하지만 스승님 실력의 80퍼센트 정도는 되니 불치병만 아니라면 다 제가 해결할 수 있습니다!”설 의사는 오만한 표정으로 얘기했다.“암요, 암
설 의사가 다시 진단했다. 현재 그의 맥박은 이상하게 뛰고 있었다. 놀란 설 의사의 눈꺼풀 근육이 튀었다.전혀 방법이 없었다.“이상합니다.”설 의사는 한숨을 쉬며 얘기했다.“환자가 원래 허약하다 보니 근본적인 치료는 어렵습니다. 보아하니... 마음의 준비를 해두십쇼.”“뭐요?”그 말에 모든 사람이 얼어붙었다.반나절을 치료하고는 마음의 준비를 하라니?“설 의사! 제발 제 할아버지를 살려주세요. 얼마가 들든지 돈은 필요하신 대로 드릴 수 있습니다!”이청아가 정신을 겨우 붙잡고 얘기했다.“전...”그가 뭐라고 얘기하려고 하자 문이 쾅 하고 열렸다. 그리고 유진우가 심각한 얼굴로 걸어 들어왔다.그는 다른 말을 하지 않고 은침을 꺼내 빠른 속도로 이 어르신의 가슴에 꽂아 넣었다.윙~은침이 미친 듯이 진동하며 회전했다.투명한 기류가 이 어르신 몸속으로 들어가더니 심장을 붙들었다.“야! 너 뭐 하는 거야!”그 모습에 놀란 설 의사가 소리쳤다.“당신이 치료하지 못한다면 내가 합니다.”유진우가 차갑게 얘기했다.“누, 누가 치료하지 못한대?!”설 의사가 머리를 짜내어 변명했다.“이미 병을 치료할 방법을 생각해 냈는데 네가 끼어드는 바람에 수포로 되었어! 병을 악화시켰다고!”“그러면 제 탓이라는 겁니까?”유진우가 차갑게 웃었다.“당연히 네 탓이지! 무슨 일이 생기면 다 네 책임이야!”설 의사가 소리쳤다.어찌해야 할지 탈출구를 찾고 있었는데 유진우가 직접 제 발로 들어와 희생양이 되어주니 감사할 따름이었다.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싶은 지경이었다.그의 명예도 지켰으니 다행이었다.“다른 건 못하면서 책임을 떠미는 것은 1등이네요. 강보현이 왜 당신을 제자로 받았는지 모르겠네요.”유진우가 작게 코웃음 쳤다.“너 이 자식, 뭐라는 거야! 죽고 싶어?”설 의사는 수치가 화로 되어 얼굴을 붉혔다.“당신이야말로 죽고 싶으면 어디 한번 덤벼봐요.”유진우는 슬쩍 그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설 의사는 굳어버린 채 공포심이 들었다.“유진우
“진... 진짜 깨셨어?”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놀라서 그대로 얼어붙었다.그저 뜨거운 물이 이 어르신을 치료하다니. 모든 사람들이 놀랐다.너무도 신기했다.“설마? 유진우가 진짜 이 어르신의 병을 치료했다고?”“신기하네. 설 의사도 하지 못한 일을 저 자식이?”얼굴에 생기가 돌고 호흡도 정상으로 돌아온 이 어르신을 보며 모든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며 경악했다.그 순간 유진우를 향한 시선마저 달라졌음을 느꼈다.그들은 이 어르신을 치료한 것이 설 의사가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유진우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할아버지, 몸은 어떠세요?”이청아가 먼저 물었다.“이상하네. 몸이 춥다가도 덥더니 지금은 괜찮아.”이 어르신은 자기의 몸을 만져보며 신기하다는 듯 얘기했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곧 죽을 목숨인 줄 알았다.하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회춘한 느낌이었다.“어르신, 진짜... 괜찮으세요?”장경화는 믿을 수 없었다.“당연하지. 지금 정신도 말짱하고 힘도 넘치는 상태다.”이 어르신은 웃으며 대답했다.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한숨을 돌렸다.그리고 의문스러워졌다.언제부터 유진우가 병을 치료할 줄 알게 되었지?“아니, 그럴 리가 없어! 환자는 이미 죽을 목숨이었는데 어떻게 살린 거야?!”그제야 반응한 설 의사가 놀라면서 물었다.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설 의사는 이 어르신의 맥박을 짚어보았기에 그의 상태를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놈이 어떻게?‘설마 나보다 더 강한 건가?’하지만 그는 강보현의 제자였다!“당신이 못한다고 해서 나도 못하는 게 아니거든요. 돌아가서 스승한테서 많이 배우시길. 스승의 명성에 먹칠하지 말고.”유진우가 차갑게 얘기하자 설 의사가 분에 차서 소리쳤다.“너 이 새끼! 아까 그 약이 뭐야! 도대체 무슨 수단을 쓴 거야!”그냥 물로는 병을 치료할 수 없으니 그 약과 관련된 것이 분명했다.“강보현의 제자라면서 해독환도 모르다니.”유진우가 한쪽 입꼬리만 올리며 씩 웃었다.“뭐? 방금 그게 해독환이라고?”설
“스승님! 여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강보현을 본 설 의사는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앞으로 다가갔다.그의 표정은 약간 비굴해 보였다.“스승?”“설마... 이분이 그 유명한 강 신의?”신분을 알게 되자 이씨 가문의 사람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다 모여들었다.“강 신의가 오시다니! 영광입니다!”“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이번 생에 만나뵐 수 있게 되다니!”다들 아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눈앞의 이 사람은 남북을 뒤흔드는 신의였다.의술이 훌륭할 뿐만 아니라 인맥도 넓어 영향력이 막대했다.한마디면 다른 사람의 인생을 바꿔줄 수 있었다.“스승님, 폐관수련 중이지 않으셨습니까? 여긴 어쩐 일로...”설 의사가 궁금해서 물었다.“내 친구가 연락하기를 네가 진단을 마구잡이로 한다던데, 진짜냐?”강보현의 말투는 전혀 부드럽지 않았다. 얼마 전 그는 자기의 은인한테서 연락을 받았다. 그래서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바로 달려온 것이었다.“친구?”다들 서로를 바라보다가 결국 여호준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그들 눈에 강 신의의 친구라는 사람은 귀한 인물이기에 여호준일수 밖에 없었다.“강 신의님, 처음 뵙겠습니다!”이때 여호준이 갑자기 앞으로 나서면서 자기소개를 했다.“저는 여씨 성에 이름 호준으로 서울에서 올라왔습니다. 제 아버님과 일면식이 있을 겁니다.”“오...”강보현은 그저 가볍게 대답했다.여호준을 무시하고 사처를 돌아보며 무엇을 찾고 있는 듯 했다.그 차가운 태도에 여호준은 어색함을 숨기지 못했다.“스승님, 혹시나 해서 여쭙는 것인데 혹시 요즘 물건을 잃어버리지 않으셨습니까?”설 의사가 넌지시 물었다.“물건을 잃어버려? 무슨 뜻이냐.”강보현이 미간을 찌푸렸다.“조금 전 누가 스승님의 해독환을 훔친 것을 발견했습니다! 제가 발견했으니 다행이죠, 그렇지 않으면 얼마나 큰 손해입니까!”설 의사는 공을 세운 것에 기쁨을 숨기지 못하고 얘기했다.해독환은 스승님의 보물이었다. 잃어버린 보물을 찾아주면 호감을 얻을 게 분명했다.“누가
강보현의 행동에 입원실 내부의 모든 사람들이 놀랐다.“설, 설마? 유진우가 강 신의를 안다고? 그게 가능해?”“미친... 유진우 이 새끼 도대체 뭐 하는 놈이야! 강 신의가 사죄하다니.”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이는 유진우를 보고 다시 그와 반대되는 강보현을 보았다.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경악만 했다.게으름뱅이인 줄 알았던 사람이 강보현과 같은 인물과 관계가 있다니.“내, 내가 잘못 본거지?”장경화는 믿을 수 없었다.강보현은 명실상부한 의약계의 1인자였다. 그의 말 한마디면 죽을 시늉이라도 할 사람이 수두룩했다.그런 강보현이 유진우에게 사죄하다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설마... 유진우의 해독환이 진짜 강 신의가 선물한 거라고?”이청아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솔직히 이혼한 후부터 이청아는 유진우가 알 수 없는 사람 같았다.“걸림돌 같으니라고.”여호준이 눈을 가늘게 뜨고 어두운 표정을 띠었다.강보현의 등장으로 그의 계획이 흐트러졌다.“스, 스승님. 진짜 이 자식이랑 아는 사이입니까?”설 의사는 부은 얼굴을 안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아는 사이일 뿐만이 아니라 유 선생은 나의 은인이다. 그런데 네가 감히 유 선생의 명성을 더럽혀? 얼른 꿇고 사죄하거라!”강보현은 말하며 또 뺨을 두 번 쳤다. 그러자 설 의사가 정신을 차렸다.“죄, 죄송합니다. 제가 유 선생님을 몰라보고... 용서해 주십쇼!”설 의사는 매를 맞고는 바로 바닥에 꿇어앉았다. 아까의 오만함은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유 선생, 제자가 아무것도 몰라서 그런 것이니 한 번만 용서해 주십쇼. 하지만 화가 풀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셔도 괜찮습니다. 때려죽여도 괜찮습니다!”강보현은 흐트러짐 없이 얘기하고 있었지만 옆의 설 의사는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었다.스승님의 표정만 보면 알다시피 오늘 사람을 잘못 건드렸다.유진우가 그를 용서해 주지 않는다면 끝장이었다.“때려죽이는 건 되었고 그저 강 신의가 이후에 더 엄하게 교육했으면 합니다.
“유진우! 뭘 잘난 척이야! 그저 운이 좋아서 어르신을 살린 것뿐이잖아. 우쭐대기는!”장경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얘기했다.제 딸의 심기를 건드리다니, 뭐라도 된 줄 아나?“난 적어도 할아버지를 구했지만 당신들은요? 되려 사람을 죽일 뻔했어요.”유진우가 차갑게 대답했다.“너... 그게 무슨 태도야!”장경화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됐다. 한 가족이면서 매일 싸우기만 하니, 체통을 지켜라!”이때 이 어르신이 갑자기 호통을 쳤다.“경화, 너희도 다 나가라. 진우와 할 얘기가 있다.”“흥!”장경화는 불만이 가득했지만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밖으로 나온 사람들은 또 쑥덕거리기 시작했다.“어르신이 유진우한테 유산을 남겨주시려고 그러는 걸까?”“진짜 그럴지도 몰라. 유진우가 어르신 비위를 잘 맞춰주잖아. 하여튼 그 자식을 조심해야 해.”“진짜 이해가 안 되네. 이현이야말로 친손자인데 어르신은 그 손녀사위를 좋아하시니. 무슨 약이라도 드셨나?”다들 유진우에 대한 불만을 안고 소곤거렸다.“아, 이현이는요? 할아버지가 아프신데 아직도 안 왔어요?”이청아는 주변을 돌아보며 이현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친구랑 술집에 가서 술 마시는 것 같아. 폰도 연락이 안 되는 걸 보면 폰을 꺼둔 것 같아.”장경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흥! 매일 술만 마시고. 진짜 아무것도 못 하는 애군요.”이청아는 차가운 표정으로 얘기했다.친손자가 이러고 있으니 손녀사위에게 마음이 가는 것도 당연했다.“이 대표님, 큰일 났습니다!”이때 정장을 입은 장 비서가 급하게 달려들어왔다.“무슨 일이야?”이청아가 물었다.“방금 소식을 들었는데 동생분이 술집에서 다른 사람한테 시비를 걸었다가 싸우고 있답니다.”장 비서의 말에 이청아는 깜짝 놀랐다.“뭐? 감히 누가 내 아들을 괴롭혀?!”장경화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자기 아들이 먼저 시비를 걸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렸다.“자세한 건 잘 모르지만 상대방이 사람이 더 많아서 이현 씨가 밀리고 있는 상황
문을 닫은 유진우는 이제 막 침상에 올라 명상하려던 참이었다. 유진우는 자신의 방 안에 낯선 여인이 들어와 있는 걸 발견했다.그녀는 베일 달린 모자를 쓴 탓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사이로 드러난 눈동자는 맑고 생기가 넘쳤다.몸 전체에 풍기는 고귀하고도 우아한 기운은 그 자체로도 사람의 시선을 빼앗을 만큼 압도적이었다.그 여인은 다름 아닌 이청성이었다.“어? 언제 들어온 거예요?”유진우는 잠시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방금 전까지 장은경과 실랑이를 벌이느라 정신이 없던 그는 이청성의 존재를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진우 씨, 저 밤에 혼자 있으려니 외롭고 무서워서 그런데 조금만 같이 있어 줄 수 있을까요?”이청성은 방금 전 장은경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하던 말을 흉내 내며 장난을 쳤다.“청성 씨, 그래도 한 나라의 공주인데 좀 정상적으로 굴 수는 없어요?”유진우는 눈을 흘기며 퉁명스럽게 말했다.“하하하... 진우 씨, 이렇게 인기가 많을 줄은 몰랐네요. 미인이 먼저 안기려 들다니 말이에요.”이청성은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 내 웃더니 말했다.“저였으면 그냥 그 흐름대로 받아줬을 거예요. 저쪽에서 적극적으로 나오는데 굳이 마다할 필요 있나? 괜히 이상한 취향이 있다고 오해받는 것보단 낫잖아요.”“하하... 제가 그렇게 쉬운 남잔 줄 알아요?”유진우는 마지못해 웃으며 냉소적으로 대꾸했다. 그러면서 차를 두 잔 따르더니 첫 잔을 이청성에게 건넸다.“그래서요, 밤늦게 무슨 일로 찾아온 거예요?”“별건 아니고요, 그냥 조심하라고 알려주러 왔어요. 우리, 누군가에게 찍힌 것 같아요.”이청성은 따뜻한 찻잔을 들고 조심스럽게 불어 식히며 말했다.“왕 아저씨가 순찰 돌다가 우리가 묵는 여관 근처에서 수상한 자들이 어슬렁거리는 걸 봤대요. 누가 봐도 이상한 수작 부릴 게 분명해 보였대요.”“그래요?”유진우는 창가로 다가가 커튼 한 귀퉁이를 살짝 들어 밖을 내다보았다. 과연 몇몇 그림자가 여관 주위를 배회하고 있었다.감시
장은경은 말을 하며 천천히 다가오더니 가냘픈 손으로 자연스럽게 유진우의 단단한 가슴팍을 어루만졌다.그녀의 촉촉한 눈동자는 은은한 빛을 뿜어내며 매혹적인 느낌을 자아냈다. 그 시선은 마치 사람의 영혼까지 삼켜버릴 듯이 치명적이었다.평범한 무사라면 그녀와 눈을 마주친 순간 금세 정신을 빼앗기고 헤어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이것이 바로 원앙문의 간판 매혹술, 홍안취였다.원앙문이 서남 지역에서 오래 세력을 유지하며 점점 더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이 홍안취라는 매혹술의 공이 컸다.얼굴이 아름다울수록 이 매혹술을 깊이 수련할 수 있게 되고 그만큼 남자에게 끼치는 유혹의 힘도 강해졌다.장은경은 어릴 적부터 홍안취를 익혀온 터라 벌써 십수 년의 세월 동안 그 기술을 연마해 완성의 경지에 이르렀다.게다가 그녀는 외모와 몸매 모두 뛰어나 그녀의 유혹을 버텨낼 수 있는 남자는 드물었다.금도문의 서지석도 이 매혹술에 빠져 그녀에게 완전히 정신을 빼앗긴 적이 있었다.그래서 그녀는 자신만만했다. 유진우가 조금이라도 흔들리고 욕망의 틈을 보이기만 하면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마음의 방어선을 무너뜨려 그를 손에 넣겠다고 결심했다.“저기요, 적당히 하세요. 할 만큼 했으면 얼른 돌아가 쉬세요. 저도 자야 하니까요.”장은경이 요염하게 몸을 흔들며 농염한 눈빛으로 다가갔지만 유진우는 여전히 무심한 얼굴로 차갑게 응했다. 그의 얼굴에는 오히려 불쾌함이 어렸다.“뭐라고요?”장은경의 미소가 한 순간에 굳어졌다. 그녀는 잠시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듯 멍하니 서 있었다.자신의 매혹술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아무리 의지가 강한 사내라도 그녀가 유혹하면 반드시 흔들리는 법이었다.하지만 유진우는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고 욕망의 기색은커녕 오히려 불쾌한 눈빛을 보이고 있었다.이런 경우는 그녀에게 처음이었다.“진우 씨, 저 오늘 밤 혼자라서 너무 외롭고 무서워요. 진우 씨가 저 좀 위로해 주면 안 돼요?”장은경은 연약하고 애처로운 모습으로 태도를 바꿨다.방금
어둠은 빠르게 내려앉았다.여관에서 이청성의 경호팀 팀원들은 저녁을 먹은 뒤 일찌감치 방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다.단 두 조의 인원만 남겨 교대로 순찰과 경계를 서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죽음의 사막에서 지내는 동안 그들은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이제야 비로소 그곳을 벗어났으니 오늘 밤만큼은 제대로 된 잠을 잘 수 있게 되었다.한편, 2층의 한 객실 안에서는 유진우가 따뜻한 물로 기분 좋은 샤워를 마친 뒤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는 침대에 앉아 두 눈을 감고 고생한 몸을 풀기 시작했다.이번 임무는 그야말로 완벽했다.보물이라 불리는 것들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기에 그는 그저 영액 한 병만 가지고 돌아왔다.이런 걸 마시는 건 처음이라 그저 간단하게 맛이나 보자는 생각이었다.유진우 정도의 실력이면 사실 영액으로 얻을 수 있는 상승효과도 그다지 크지 않았다.게다가 그의 손에는 무림의 최고 보물이라 불리는 천영 구슬이 있었다. 그 덕에 수련 속도는 비약적일 것이다.그러니 영액 같은 건 딱히 필요하지 않았다.그리고 사실상 영액을 과하게 마시면 몸에 상당한 부담이 쌓이게 되고 한편으로는 체력과 잠재력을 미리 소모하는 셈이었다.물론 영액은 단기간 내에 실력을 끌어올리고 경계를 돌파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그러나 그렇게 급하게 돌파한 경지는 제대로 다듬어지지 않아 매우 불안정하고 한편으론 쉽게 흐트러져 정신이 붕괴되는 위험이 따르기도 했다. 또한 자신의 힘으로 노력해 경지를 돌파한 무사보다는 약할 수밖에 없었다.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런 단점은 무시해도 될 정도로 영액의 효능은 엄청났다.단지 수련의 경지를 올리고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람들은 열광했다.대부분의 무사들에게 한 단계 높은 경지는 평생 뛰어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과도 같다는 건 잔인한 현실이었다.그런 그들에게 영액으로 경지를 돌파하고 실력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건 꿈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똑똑...유진우가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고 있을 때 문득 문을
“뭐라고? 영액이라고?”그 말을 들은 원앙문의 사람들은 모두 충격에 휩싸인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영액은 무사에게 있어 수련의 보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충분한 양의 영액만 있다면 평범한 무사도 엄청난 속도로 성장해 꿈으로만 바라던 마스터의 경지를 돌파할 수 있게 된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영액은 너무나도 희귀하고 귀한 보물이었다. 대개 자연의 천연적인 약재 속에 소량 존재하며 이를 추출하고 정제해 얻는 데는 큰 정성과 시간이 소요된다.한 방울의 영액은 천금의 가치를 지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은 병 하나의 영액만으로도 피바람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그러나 만약 장은경이 가져온 물주머니가 죄다 영액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 가치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네, 맞습니다. 이 물주머니 안에 든 건 영액이에요. 게다가 이 한 주머니가 끝이 아닙니다. 무려 여덟 자루나 가져왔어요.”장은경의 말은 다시 한번 모두를 놀라게 했다.“여... 여덟 자루의 영액이라고?”도미숙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손마저 덜덜 떨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 역시 믿을 수 없다는 듯 얼이 빠진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그 순간 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만약 정말 그 물주머니가 전부 영액으로 가득 찼다면 원앙문에는 지금껏 없었던 하늘이 내린 기회가 찾아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이렇게 많은 영액이 있다면 원앙문은 단번에 일류 파벌로 올라설 수 있을 것이다.“좋다! 정말 잘 됐다!”“이 영액만 있다면 우리 원앙문도 일떠설 수 있어!”“은경아! 넌 정말 우리 원앙문의 복덩어리야!”“지금 당장 선언하마. 오늘부터 넌 원앙문의 차기 오너로 임명된다. 장로들과 같은 대우를 받을 것이야!”도미숙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벅찬 감정으로 직접 장은경을 차기 오너의 자리에 앉혔다.이에 대해 장로들이나 호법들 모두 의견이 없었다.장은경은 원앙문에서 가장 뛰어난 재능을 지닌 제자였고 언젠가는 오너 자리를 물려받을 인물이었다. 이번 공로로 인해
“후배들은... 모두 목숨을 잃었어요!”장은경의 눈가엔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그녀는 슬픔이 가득한 얼굴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간략하게 설명했다.“그러니까 환해맹이 보물을 노리고 너희를 매복했다고?”이야기를 들은 도미숙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맞아요! 그들은 미쳐버린 거나 다름없어요. 탐욕에 눈이 멀어 머릿수에만 의존한 채 우리 후배들을 모두 잔혹하게 죽였어요.”말을 마친 순간 장은경은 결국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썩을 놈의 자식들! 감히 우리 원앙문 제자들을 죽이다니... 반드시 피의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도미숙은 이를 악물고 분노가 가득 찬 얼굴로 말했다.그녀가 수련을 위해 밖으로 보낸 제자들은 모두 원앙문의 정예병들이었고 그들이 거의 전멸했다는 사실은 그녀의 마음을 송두리째 찢어놓았다.“이번에 지석 씨와 그쪽의 사람들이 나서주지 않으셨다면 저는 이미 저승길에 올랐을 거예요...”장은경은 흐느끼며 말했다.“서지석, 내 제자를 구해줘서 고맙네. 우리 원앙문은 금도문에게 큰 빚을 졌어.”도미숙은 고개를 숙이며 깊은 감사를 표했다.“오너님, 괜찮습니다. 금도문과 원앙문은 원래부터 가까운 사이였고 저와 은경 씨는 약혼한 사이입니다. 그녀가 위험에 처했는데 돕는 건 당연하지요.”서지석은 손을 모아 공손히 예를 갖췄다.“훌륭하군! 자네를 선택하기 잘했어!”도미숙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가 문득 무언가 떠올랐는지 말했다.“아, 맞다. 오늘 아침 자네 사부께서 사람들을 데리고 막 이곳에 도착했어. 지금 마을 끝 쪽에 머무르고 계시니 어서 가보게나.”“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저희는 먼저 실례하겠습니다.”서지석은 깊이 허리 숙여 인사한 뒤 곧바로 몇 사람을 이끌고 마을 끝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그들은 귀중한 보물을 많이 지니고 있었고 파벌의 고수들과 합류해야만 비로소 완전히 안전해질 수 있었다.“은경아, 너희가 죽음의 사막에 들어갔다 온 지도 꽤 됐는데 수확은 있었느냐?”이때, 백발의 노부인이 입을 열었다
“흥,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도도한 척은.”멀어져 가는 유진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진이수는 참지 못하고 낮은 목소리로 툴툴거렸다.저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먼저 품에 안기겠다는데 남자라면 누구든 거절할 이유가 없을 터였다.진이수의 눈에 비친 유진우는 그저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일 뿐이었다.겉으론 고상한 체하지만 속내는 따로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하지만 이런 불만은 속으로만 품을 뿐 현실적으론 힘의 격차가 너무 컸기에 함부로 나설 엄두는 내지 못했다.그렇게 몇 마디 중얼거린 그는 블랙스콜피온 팀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이번 죽음의 사막 원정에서 그의 팀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다행히 보물도 꽤 많이 거둬들였다.이 보물들을 잘 처분하면 평생 호화롭게 살아도 남을 만큼의 부를 손에 넣을 수 있을 터였다.“선배님, 괜한 정을 나누어 줬군요. 진우 씨는 애초에 선배님을 눈에 두지도 않았어요.”한 금도문의 제자가 비웃으며 말했다.장은경은 외모 하나는 출중했지만 사람 됨됨이가 좋지 못했다. 마음이 사악하고 꿍꿍이가 많은 사람 그 자체였다.저런 사람과 엮였다간 어느 순간 자신이 팔려나갈지도 모를 일이었다.“흥.”장은경의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졌고 고운 얼굴에 한기가 내려앉았다.지금껏 수없이 써온 미인계는 늘 성공을 거뒀다. 그런데 유독 유진우 앞에선 번번이 실패했다.이 사실이 그녀를 분노케 했고 동시에 쉽게 물러서고 싶지 않다는 오기가 생겼다.자기한테 넘어오지 않는 남자가 있다는 걸 받아들이기 어려웠다.“은경 씨, 제가 보기엔 진우 씨 이미 마음을 둔 사람이 있는 듯해요. 그리고 재능과 실력을 겸비한 그는 유룡종도 눈에 두지 않았습니다. 우리 같은 파벌은 기회조차도 없을 겁니다.”서지석이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그는 5년 전 장은경에게 첫눈에 반했고 그 뒤로 줄곧 그녀를 마음에 품어왔다. 마침내 체면을 무릅쓰고 사부님에게 간청해 원앙문에 혼인을 청했으며 상당한 대가를 치른 끝에 겨우 혼약을 맺을 수 있었다.그런 그였기에 장은경이 유진우를 마음
그리고 마침 이청성의 집사 왕 아저씨가 마침 많은 보급품을 실어 도착했다.간단히 휴식을 취한 후 그들은 다시 길을 떠났다.그렇게 꼬박 사흘을 걸은 끝에 셋째 날 오후가 되던 때 그들은 죽음의 사막에서 벗어나 예전에 잠시 머물렀던 마을에 도착했다.사흘 내내 모두가 바짝 긴장한 채 지냈다. 길 위에서 무슨 위험을 마주할까 마음을 놓지 못해 밤에도 눈을 붙이지 못했다.이제야 겨우 발을 들인 마을에서 그들은 드디어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벌써 날이 저물고 있군요. 오늘 밤은 여기서 쉬어가죠. 급히 떠나야 하는 분은 편히 가보셔도 됩니다. 그럼 오늘 저는 이만.”마을 입구에서 이청성이 가볍게 인사를 건넨 뒤 자신의 경호팀과 함께 전에 투숙했던 여관으로 향했다.임무는 이미 끝났고 임시로 결성된 이 팀 역시 해산할 때가 됐다.누구 하나 손해를 본 사람 없이 각자 모두 원하는 보물을 손에 넣게 되었다. 이제부터는 다시 각자의 길로 돌아갈 시간이었다.“진우 씨, 드릴 말씀이 있어요. 잠시 시간 괜찮으신가요?”막 떠나려던 유진우를 장은경이 불러 세웠다.장은경은 왠지 머뭇거리며 수줍은 듯한 모습을 보였다. 눈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단박에 눈치챌 수 있는 분위기였다.“피곤하군요. 할 말 있으면 여기서 하시죠.” 유진우는 차갑게 말했다.유진우는 그녀에게 호감이 없었다.“그렇다면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장은경은 상냥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진우 씨는 타고난 재능에 실력도 출중하세요. 저희 원앙문은 바로 진우 씨 같은 인재를 필요로 해요. 혹시 저희 파벌에 들어올 생각은 없으신가요? 진우 씨께서 고개만 끄덕이신다면 진우 씨는 저희 파벌에서 가장 귀하게 모셔질 분이 될 거라고 제가 보장할게요. 혜택과 대우는 원하시는 대로 맞춰드릴 수 있어요!”“죄송하지만 그쪽으로는 관심이 없네요.”유진우는 단칼에 거절했다.그러고는 몸을 돌려 떠날 준비를 했다.“잠깐만요!”장은경은 다급해진 듯 그의 앞을 막아섰고 애써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진우 씨,
“오너님에게 체면을 세워주자고, 절반 남기고 나머지만 가져가자.”이청성이 단호하게 말하자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보물을 담을 자는 보물을, 영액을 담을 자는 영액을 챙겼다. 겉으로는 절반을 남긴다 했지만 사실은 누구랄 것 없이 조금씩 몰래 더 숨겼다.강도현은 이미 그 꼼수를 눈치챘지만 그냥 못 본 척 눈을 감았다.유진우가 드러낸 힘은 이미 모든 이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고 그 누구도 감히 무리수를 둘 수 없었다.정면으로 맞섰다가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몰락할 수도 있었다.게다가 이 수중궁전 근처엔 보물을 눈독 들이는 세력들이 아직 많이 숨어 있었다.만에 하나 큰 싸움을 하고 상처만 입은 채 보물을 남에게 뺏기는 일이 생긴다면 그것이야말로 남 좋은 일을 대신 해준 셈이었다.그렇게 이청성을 비롯한 일행은 크고 작은 꾸러미를 잔뜩 챙겨 주저 없이 수중궁전을 빠져나왔다.유룡종과 비설파의 고수들은 여전히 날 선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았지만 아무도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강도현이 목숨 걸고 나서지 않는 한 그 누구도 유진우를 상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이렇게 쉽게 빠져나올 줄이야, 그것도 이렇게 많은 보물을 챙기고 말이야. 정말 불행 중 다행인 것 같아!”궁전을 벗어난 후에도 서지석은 아직 긴장이 풀리지 않은 듯 두려움이 남아 있는 얼굴로 굳어있었다.아무래도 방금까지 그들이 상대했던 이는 유룡종과 비설파의 정예 고수들이었고 그 중엔 서남 제일의 고수인 강도현까지 자리하고 있었으니 말이다.그런 거대한 세력은 그야말로 일대를 쓸어버릴 만한 힘이었다.금도문의 모든 병력이 총동원되어도 정면 승부는 최대한 피하는 방법밖에 없을 것이다.그랬기에 애초에 서지석은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다. 목숨이라도 건지면 다행이라 여겼을 뿐이었다.하지만 결과는 모든 이의 예상을 뒤엎었다.그들은 아무 탈 없이 무사히 빠져나왔고 영액과 보물도 대부분 지켜냈다. 이건 그야말로 뜻밖의 횡재였다.“우리가 이렇게 순조롭게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진우 씨 덕분
이 소문이 퍼지기라도 하면 온 세상이 떠들썩해지지 않겠는가?“좋아요! 나이스!”장은경은 환호성을 질렀다. 기쁨에 들뜬 눈동자가 반짝이며 빛났다.얼굴도 잘생기고 젊은 나이에 실력까지 뛰어난 데다 미래까지 창창한 인재라니, 이런 청년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그녀는 반드시 이 기회를 잡아야 했다. 설령 서지석과의 약혼을 파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유진우의 눈에 들고야 말겠다고 마음먹었다.“젠장! 또 저 자식이 잘난 척할 기회를 내줘버렸어!”진이수의 얼굴은 어둡게 굳어버렸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질투로 가득 차 있었다.유진우의 위력이 커질수록 진이수의 존재감은 점점 작아질 게 분명했다.진이수는 이제 거의 반 포기 상태였다.이제는 그저 유진우가 자신에게 괜한 시비를 걸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세 수를 받아보겠다고 했는데 고작 한 번도 버티지 못했군요. 보아하니 비설파의 오너라는 자도 별 볼 일 없군요.”유진우는 조소가 서린 말투로 담담하게 말했다.그러자 비설파의 고수들은 목덜미까지 붉히며 분노로 치를 떨었지만 감히 반박하지 못했다.오너조차 유진우한테 패한 마당에 그들 따위가 나서서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이제 그들의 유일한 희망은 강도현뿐이었다.서남 제일 고수라 불리는 강도현이라면 유진우를 이길 가능성이 있었다. “오너님! 저놈은 너무나도 오만방자합니다. 제발 그에게 본때를 보여주십시오. 우리 비설파의 자존심을 지켜주셔야 합니다!”“그래요, 오너님! 방금 저자는 기습 공격으로 겨우 이긴 겁니다. 오너님께서 나서신다면 틀림없이 쉽게 이기실 수 있을 겁니다!”“오너님! 본때를 제대로 보여주십시오!”비설파의 제자들이 앞다투어 강도현에게 부탁했다.모두의 간절한 시선을 받은 강도현은 난처함을 느꼈다.그는 유진우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기에 승산이 없는 싸움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만에 하나 패하기라도 하면 평생 쌓아온 명성은 한순간에 무너질 것이다.마찬가지로 서남 제일 고수라는 칭호도 물거품이 될 터였다.문제는 이렇게 수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