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하... 안 부장관님이 오셨어. 우리 조씨 가문도 드디어 살 길이 생겼어.”“안 부장관님이 계시는데 선우희재가 계속 나댈 수 있는지 어디 한번 보자고!”안정양이 모습을 드러내자 조씨 가문 사람들은 정신이 번쩍 들었고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얼굴이었다.조금 전 선우희재에게 눌려 고개도 들지 못했는데 드디어 기를 펼 수 있게 되었다.호풍장군이면 또 어떤가? 고작 3품일 뿐인데.부장관은 종2품인데다가 병권까지 손에 쥐고 있어 웬만한 직급은 다 쥐락펴락할 수 있었다.안 부장관 앞에서 천재라 불리는 선우희재라 할지라도 고개를 숙여야 한다.“셋째야, 정말로 안 부장관님을 모셔왔구나. 역시 대단해.”조군해의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형님, 그건 아니죠. 안 부장관님께서는 어쩌면 우리 아들의 신분 때문에 오신 걸지도 모릅니다.”조군표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일리가 있어요. 일명이는 범표사 출신인데다가 뒤에 전쟁의 여제까지 있어 앞날이 아주 창창하죠. 안 부장관님은 인재를 아끼는 마음에 오신 게 틀림없어요.”조윤지가 맞장구를 쳤다.“그래그래... 일명이야말로 우리 조씨 가문에서 가장 훌륭한 천재지.”조군해가 크게 웃었다.조씨 가문의 힘만으로 안정양을 불러 선우희재와 맞선다는 건 확실히 어려웠다. 하지만 홍연 전쟁 여제라면 말이 또 달라진다.“흥, 선우희재가 오늘 얼마나 더 나댈 수 있는지 한번 보자고.”사람들이 치켜세우자 조일명의 어깨가 한껏 올라갔다. 그는 이 공로를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였고 조군수도 딱히 반박하지 않았다.이 상황을 해결할 수만 있다면 누가 모셔왔든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생일 연회에 호풍장군은 무슨 병사를 이리도 많이 데려왔어요?”안정양이 천천히 다가와 싸늘하게 물었다. 양측의 호위병들은 서로 대치하고 있었고 곧 폭발할 것 같은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돌았다.“안 부장관님과 상관이 없는 일이니 끼어들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선우희재가 덤덤하게 말했다. 상대의 관직이 그보다 높아도 선우희재는 전혀 두려워하지
“네가 아니면 누구야?”조씨 가문 사람들은 더욱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대체 누가 무슨 재주로 황보용명 어르신까지 모신 거죠?”조군수는 다시 한번 고개를 내저었다. 황보용명이 이 자리에 나타날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선우희재, 내가 너의 병사를 막을 수 없을 것 같아?”우뚝 서 있는 황보용명의 기세가 대단했다. 그냥 서 있기만 할 뿐인데도 마치 커다란 산이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아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특히 선우희재의 뒤에 서 있는 병사들은 총을 쥐고 있던 손을 저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었다. 무도 마스터의 위압감을 아무나 다 당해낼 수 있는 건 아니었다.“뭐야?”그 순간 줄곧 덤덤한 표정이던 선우희재가 눈살을 찌푸렸다.‘막을 수 있냐고? 당연히 있지.’무도 마스터 경지의 강자는 이미 인간을 넘어섰고 혼자서 만 명도 충분히 상대할만한 실력을 지녔다. 하여 그가 데려온 병사들을 아주 손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그리고 무엇보다 황보용명은 실력이 강할 뿐만 아니라 세간에서의 지위도 아주 높았다. 강남의 10만 무사들 중에 감히 그의 명령을 거역할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어르신, 이건 저와 조씨 가문의 개인적인 원한이에요. 어르신은 간섭하지 말았으면 합니다.”선우희재는 비굴하지도, 겁먹지도 않은 태도로 말했다.“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있으면 도와줘야지. 오지랖이 넓은 내가 오늘 마침 이런 일을 목격했는데 모른 척해서야 되겠어?”황보용명이 덤덤하게 말했다.“조씨 가문 때문에 우리 선우 가문과 등을 돌리겠다는 말씀입니까?”선우희재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3대 가문인 두 가문은 각자 장점이 있고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단지 그저 얼굴을 붉히고 싶지 않을 뿐이다.“내가 빚진 게 있어서 오늘 반드시 갚아야 하거든. 두 가문 사이에 무슨 원한이 있든 그건 나중에 다시 얘기하도록 해. 아무튼 지금은 여기서 소란을 피워선 안 돼.”황보용명이 경고했다.“어르신, 만약 제가 물러서지 않겠다면요?”선우희재가 되물었다. 오늘
“물러설 거야, 말 거야?”황보용명은 거만하게 서서 위압감을 뽐냈다.“선우희재 씨, 적당히 해요.”안정양은 앞으로 다가와 황보용명과 나란히 섰다.안정양 혼자였더라면 선우희재를 당해내기 어려웠겠지만 전 무림 맹주의 세력이 더해지면 선우희재에게 겁을 주기에는 충분했다.선우희재도 바보가 아닌 이상 물러서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선우희재가 밀리는데?”“두 거물이 손을 잡았는데 누가 버틸 수 있겠어?”“조씨 가문의 영향력이 이 정도로 대단할 줄은 몰랐어. 선우희재마저 진퇴양난에 빠지다니.”매섭게 몰아붙이는 두 사람을 보며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선우희재가 훌륭하고 배경도 어마어마하며 심지어 조씨 가문 족장의 생일 연회를 대놓고 망쳐도 나서서 뭐라 할 사람이 없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안정양과 황보용명이 힘을 합쳐 압력을 가한다면 아무리 어마어마하고 훌륭하다고 해도 고개를 숙이고 물러서야 한다.“두 분 오늘 저와 끝장을 볼 생각인가 봐요? 하지만 절 물러서게 하는 건 쉽지 않을 겁니다.”선우희재의 낯빛이 점점 싸늘해졌다. 젊은 나이에 높은 자리에 앉은 그가 인맥이 없을 리가 있겠는가?“상황의 흐름을 잘 알아야 뛰어난 인물이 될 수 있어요. 똑똑한 사람은 절대 무리하지 않죠.”안정양이 덤덤하게 말했다.“지금 세력을 믿고 몰아붙이겠다는 거죠? 좋습니다. 그럼 누가 누굴 제압하는지 한번 보죠.”선우희재는 갑자기 휴대 전화를 꺼내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냈다.잠시 후, 문밖에서 질서정연한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고 쿵쿵하는 소리가 사람의 가슴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곧이어 조씨 가문의 집사가 혼비백산한 얼굴로 헐레벌떡 뛰어오며 소리를 질렀다.“족장님, 큰일 났어요! 밖에 한 무리 사람들이 쳐들어왔어요.”“한 무리?”조군수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다급하게 물었다.“누가 이끌고 왔어?”“나야.”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장군복 차림에 우람한 체격의 중년 남자가 한 팀을 이끌고 위풍당당하게 걸어 들어왔다.남자를 본 순간 안정양의 표정이 살짝
“2대2면 우리도 뒤지지 않아요.”황보용명이 덤덤하게 말했다.“맹주님, 아무래도 2대1 같은데요? 안 부장관이 이 진흙탕 싸움에 끼어들 생각이 있는지 먼저 물어보세요.”강동국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뭐라고요?”황보용명은 고개를 돌렸다. 안정양의 안색이 어둡고 한마디도 하지 않는 걸 보니 중도에 물러날 생각인 게 틀림없었다.안정양에게 선우희재 한 사람과 맞서 싸울 실력은 그래도 있었다. 하지만 강동국까지 합세한다면 그건 또 별개 문제다. 게다가 조씨 가문과의 친분도 그리 깊지 않아 굳이 자신의 앞날까지 희생하면서 도와줄 필요가 없었다.안정양의 침묵에 조씨 가문 사람들의 표정이 잿빛이 되었다. 안 부장관이 이대로 물러선다면 조씨 가문은 이 고비를 넘기기 어려워진다.“족장님, 오늘 족장님의 계획에 놀란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아직은 부족해요. 인제 어떡하실 생각인가요?”선우희재는 고개를 살짝 들고 조군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강동국이 힘을 보탠다면 황보용명 혼자서는 결코 조씨 가문을 구할 수 없다.조군수는 말없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고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오늘 정녕 선우 가문에 고개를 숙여야 한단 말인가?“호풍장군, 할 얘기 있으면 말로 해요.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 있나요?”상황이 뜻대로 돌아가지 않자 조군해가 나서서 수습하려 했다. 조금 전까지의 당당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더 이상 화를 입고 싶지 않으면 수그러드는 수밖에 없다.“말로 할 수는 있어요. 하지만 조건이 더 있어요.”선우희재가 덤덤하게 말했다.“무슨 조건이죠?”조군해가 물었다.“저 자식의 목숨을 가져갈 겁니다.”선우희재가 갑자기 유진우를 가리키며 생각지도 못한 말을 내뱉었다.‘천민 주제에 우리 선우 가문의 위엄에 도발했으니 대가를 치러야지. 오늘 저 녀석을 죽이는 걸로 다른 사람에게 경고를 할 거야!’“그건...”조군해의 표정이 굳어졌고 저도 모르게 옆에 있는 조군수의 눈치를 살폈다. 조군수는 당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무 말이 없었다.
“하 총독? 하 총독님이 오셨어?”“세상에나! 총독님까지 친히 오시다니, 하늘이라도 무너지려나?”“대체 누구야? 누가 총독님까지 모신 거야?”중년 남자의 등장에 현장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눈앞에 나타난 이 사람은 총독이자 남성 전체의 군정 대권을 쥔 인물이며 1품에 속한다. 그야말로 진정한 지방 수석 장관이다.발만 굴러도 서울을 뒤흔들 수 있는 존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강 장관이든 호풍장군이든 그의 앞에서는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총독님이 왜 오셨지? 설마 선우희재가 모신 거야?”“망했어, 망했어... 우리 조씨 가문 이젠 완전히 망했어.”“저분은 남성의 일인자신데 누가 감히 저분과 맞서 싸우겠어?”조씨 가문의 진영이 떠들썩해졌고 하나같이 절망적이고 겁에 질린 얼굴들이었다. 그들은 당연히 총독을 모실 재간이 없다. 그렇다면 선우희재의 지원군일 가능성밖에 없다.그런데 그 시각 조씨 가문 사람들만 충격에 빠진 게 아니라 선우희재도 경악한 얼굴이었고 영문을 알지 못했다. 사실 선우희재와 하 총독은 그렇다 할 친분이 딱히 없었다.“아니, 저분은...”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후 줄곧 덤덤하던 유진우의 표정도 살짝 흔들렸다. 그의 관직 때문에 놀란 게 아니라 전에 만난 적이 있는 지인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하지원의 아버지 하용만이었다.며칠 전 병원에서 만났을 때는 하용만의 신분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그가 총독이자 남성 전체를 거스르는 지방 수석 장관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어머, 총독님, 무슨 바람이 불었기에 총독님까지 친히 발걸음을 하셨어요?”잠깐 넋을 놓았다가 정신이 번쩍 든 강동국은 재빨리 활짝 웃으며 다가가 인사했다. 눈앞의 이분은 강동국의 가장 높은 상사였다.“강동국, 방금 내 사람들을 전부 내쫓겠다고 했어? 사실이야?”하용만이 담담하게 물었다.“오해입니다... 전부 오해예요.”강동국이 비굴하게 웃었다.“총독님의 근위병이라면 제가 맞이해도 모자랄 판에 내쫓는다니요.”“그래?”하용만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그럼 이렇게
“그래? 그런 일이 있었어?”하용만의 시선이 조군수에게 머물렀다.“예전에 혼약을 맺은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금 문제가 생겨서 다시 상의해야 해요.”조군수가 솔직하게 대답했다.“문제가 있으면 앉아서 천천히 의논하면 될 것을 왜 이렇게 분위기를 살벌하게 하고 그래?”하용만이 불만을 드러냈다.“제가 의논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조씨 가문에서 아예 체면을 세워주지 않아요.”선우희재가 말했다.“결혼은 남녀가 서로 원해서 하는 거죠. 병사까지 데리고 와서 결혼을 강요하는 건 강도질이나 다름없지 않아요?”조선미가 갑자기 목청을 높였다.“아주 맞는 말이네. 결혼은 남녀가 서로 동의해야지. 상대가 싫다고 하면 넌 강요할 자격이 없어.”하용만도 조선미의 말에 동의했다.그의 말에 선우희재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상대의 태도를 보니 조씨 가문의 편에 서겠다는 마음이 확고한 것 같다.“총독님, 조씨 가문이 대체 총독님께 뭘 주셨습니까? 제가 10배 드릴게요.”선우희재가 한마디 불쑥 던졌다.“무엄하다!”하용만의 낯빛이 어두워지더니 매섭게 호통쳤다.“선우희재, 너 날 대체 뭐로 본 거야? 탐관오리? 썩어 문드러진 간신?”“그럴 리가요. 희재 장군이 실수했나 봐요. 부디 화를 가라앉히세요, 총독님.”강동국이 상황을 수습하려 했다.“젊고 혈기 왕성해서 그런지 위아래도 모르는구나! 당장 네 사람들을 데리고 꺼져!”하용만이 무섭게 몰아붙였다. 원래는 상대의 체면을 남겨주려 했지만 호의도 모르고 나댈 줄은 생각지 못했다.“희재 장군, 오늘은 이만하고 무슨 일이 있으면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강동국이 선우희재에게 눈치를 줬다. 총독 앞에서 두 사람이 힘을 합쳐도 그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선우희재의 천부적인 재능이 뛰어나고 앞날이 창창한 건 사실이지만 하용만과 맞서 싸우기에는 아직 한참 부족했다.“총독님, 정말 조씨 가문을 도우실 겁니까?”선우희재가 실눈을 뜨고 물었다.“그래. 아무도 조씨 가문을 건드릴 수 없어. 불만이 있으면 언제든지
그 생각에 조군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고 재빨리 고개를 돌려 유진우를 쳐다보았다. 그의 표정은 한없이 덤덤하기만 했고 마치 아웃사이더 같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를 더 가늠할 수 없었다.자세히 생각해보면 유진우가 선우희재와 싸운 그 순간부터 조씨 가문의 상황이 역전하기 시작했다.그렇다면 지금까지 눈앞의 젊은이가 이런 상황을 만들었다는 말인가?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실로 무서운 사람이 아닐 수 없다.“족장님, 전 다른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하용만은 인사를 마친 후 자리를 떠났다. 유진우의 신분을 밝히지 않은 건 혹시라도 그에게 귀찮은 일이 생길까 걱정돼서였다.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되는 말은 아껴도 좋다.“더 싸울 일이 없는 것 같으니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황보용명은 유진우를 쳐다보고는 성큼성큼 자리를 떠났다.“족장님, 나중에 또 봐요.”안정양은 두 주먹을 가슴 앞에 맞잡고 예를 표한 후 따라나섰다.거물들이 다 떠나자 연회장 안이 더욱 떠들썩해졌다. 하객들은 이러쿵저러쿵 수군거렸고 조씨 가문 자제들도 이런저런 추측을 늘려놓았다.“아빠의 체면이 이렇게나 대단할 줄은 몰랐어요. 맹주님과 하 총독님까지 모셔오다니, 정말 대단해요!”조선미는 환하게 웃으며 다가갔다.두 거물이 뒷받침해주고 있으니 선우희재도 더는 결혼을 강요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도 드디어 한시름을 놓을 수 있게 되었다.“셋째야, 그동안 계속 숨기고 있었던 거야? 이 형이 이번에 제대로 한 수 배웠어.”그때 조군해 일행도 다가왔다. 하나같이 흥분한 얼굴로 어깨를 들먹였다.하 총독과 전 무림 맹주가 있는 한 조씨 가문은 앞으로 무슨 일이든 순조로워질 것이다.“큰형님, 저 아니에요. 제가 무슨 재간이 있어서 그분들을 모시겠어요.”조군수는 고개를 내저었고 전혀 우쭐거리지도 않았다.“너 아니면 누구야?”조군해는 어안이 벙벙했다.“저도 누군지 알고 싶어요...”조군수는 아래턱을 어루만지며 유진우를 쳐다보더니 의미심장하게 물었다.“진우 씨, 대체 누가 이런 엄청
조윤지가 쌀쌀맞게 말했다.“스스로 큰 재간이 없으니까 일명이 잘 되는 걸 질투하는 거지. 넌 정말 속이 좁아. 일명이의 실력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디 한번 말해봐. 여기 있는 조씨 가문의 자제들 중에 누가 그분들을 모실 수 있는지?”“그건...”조선미는 말을 잇지 못했다.관직을 놓고 보면 조일명은 조씨 가문의 젊은 세대 중에서 가장 훌륭한 건 사실이었다.“왜? 할 말이 없어? 일명이가 너보다 훌륭하다는 걸 인정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조윤지는 대놓고 조선미를 비웃었다.“선미야, 오늘 네가 화를 면할 수 있었던 건 다 내 덕이야. 그러니까 앞으로는 나에게 잘해.”조일명이 약을 올리자 조선미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조일명과 조윤지 둘이서 그녀를 몰아세웠다.“당신 덕이라고요? 볼 덕이라도 있어요?”조선미가 비웃음을 당하자 유진우가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그분은 1품 총독이지만 당신은 고작 6품 장교에 불과해요. 신분이 천지 차이인데 당신 때문에 왔다고 하는 건 대체 무슨 근거죠?”“흥! 나 때문이 아니면 너 때문이야?”조일명이 하찮다는 듯이 말했다.“맞아요. 내 체면을 봐서 온 거예요.”유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에 사람들은 잠깐 놀라는가 싶더니 마치 우스갯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크게 웃었다.“하하...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유진우, 네까짓 게 뭔데? 무슨 자격으로 총독님을 움직여?”“흥, 자기 주제도 모르고 나대는구나.”조씨 가문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유진우를 비웃었고 마치 멍청이를 쳐다보듯 했다.아무것도 없는 돌팔이 의사가, 여자에게 빌붙어 사는 기생오라비가 무슨 배짱으로 저런 막말을 내뱉는단 말인가?“진우 씨, 정말 하 총독님과 아는 사이예요?”조선미가 경악한 얼굴로 물었다.“며칠 전에 총독님 사모님의 목숨을 살려준 적이 있거든요. 그래서 총독님께서 신세 진 걸 갚으러 왔다고 한 거예요.”유진우가 사실대로 말했다.“너에게 신세 졌다고? 하하... 잘난 척하긴.
“네 말은 누군가 4대 제후가 동시에 반란을 일으키게 조종하고 있단 말이야?”이의진이 얼굴을 찌푸렸다.“맞아요.”유천우가 수심에 찬 얼굴로 말했다.“지금 서경에서 4대 제후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사람이죠.”“유태범!”이의진은 깊게 고민하지도 않고 말했다.“작은아버지는 야심이 크고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이에요. 4대 제후의 손을 빌려서 우리가 병부를 내놓게 압박하고 있는 거예요.”유천우가 눈을 가늘게 뜨고 분석했다.“만약 우리가 따르지 않는다면 4대 제후는 반란을 일으켜 우리가 군대를 동원하게 압박한 다음 유태범이 중간에서 방해하면서 우리한테 불리하게 할 겁니다. 우리가 반란을 진압하는 데 실패하면 서경왕부의 위엄이 크게 손상될 거예요. 그러다가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해질 때 구세주처럼 나타나서 백성들을 구하고 4대 제후를 제압할 계획인 거죠. 그때가 되면 유태범은 만인의 지지를 받아 새로운 왕이 될 겁니다. 민심을 얻으면 천하를 얻는 것과 같다는 말도 있듯이 유태범이 아버지와 같은 자리에 서게 되면 새로운 서경왕이 되겠죠. 아주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세웠네요.”유천우의 표정이 눈에 띄게 심각해졌다. 유태범이 꾸민 건 음모가 아니라 공공연한 모의였다. 하지만 상대가 나쁜 짓을 꾸미고 있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는데도 해결하기 어려웠다. 이게 바로 공공연한 모의의 무서운 점이다.“그렇다면 유태범이 진작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거네.”이의진이 얼굴을 찌푸렸다.“지금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해결해야 한다는 거야. 군대를 동원할 수도 없고 설득도 불가능하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해?”“나머지 4대 제후와 아버지의 옛 부하들과 손을 잡아야만 유태범과 겨룰 수 있을 겁니다.”유천우가 대답했다.“일리 있어.”이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지금 당장 사람을 보내서 나머지 4대 제후를 모셔오도록 할게. 같이 모여서 상의하는 게 좋겠어.”“어머니, 제가 직접 갈게요. 그래야 성의도 충분히 보여줄 수 있죠.”유천우가 직접 나섰다. 나머지 4대 제후
“형, 난 진짜 안 돼요. 왕위를 물려받을 사람은 형밖에 없어요.”유천우의 얼굴에 조급한 기색이 드러났다.“됐어. 왕위 얘기는 나중에 하자. 지금 안팎으로 불안이 끊이지 않아. 일단 문제부터 해결하는 게 급선무야.”유진우가 화제를 돌렸다.“형이 나서서 이끌어준다면 내가 최선을 다해 도와줄게요.”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난 지금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없어.”그러자 유진우가 고개를 내저었다.“유태범 일당이 아직 내가 서경으로 돌아온 걸 모르고 있어서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어. 내가 돌아온 걸 몰라야 유태범이 무슨 꿍꿍이라도 꾸민다면 제때 해결할 수 있지. 그리고 호룡각의 잔당들도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있어. 기회를 봐서 싹 다 일망타진할 거야.”“그런 거였군요.”유천우는 그제야 모든 걸 깨달았다.“알겠어요. 그럼 서경왕부에서 공개적으로 하는 일은 나한테 맡기고 형은 보이지 않는 음모들을 해결해주세요.”“그래. 그렇게 하자.”유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아 참. 그리고 이거.”유천우는 문득 뭔가 떠올랐는지 금색 영패 하나를 꺼내 유진우에게 건넸다.“이건 내 군령이에요. 이것만 있으면 내 결사대원 800명을 동원할 수 있고 필요한 순간에 꽤 도움이 될 겁니다.”그의 결사대원 800명은 모두 엄선해서 뽑은 고수들이었다.유천우가 태어난 순간부터 이의진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몰래 그들을 훈련시키면서 힘을 비축했다.20년이 지난 지금 결사대원 800명은 무서울 정도로 성장했다.“알았어. 영패는 일단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돌려줄게.”유진우도 거절하진 않았다.지금 이청성의 도움을 받고 있긴 했지만 호룡각의 잔당들에 비하면 아직 역부족이었다. 이젠 유천우의 결사대원 800명이 더해졌으니 싸울 힘이 생겼다.“천우야!”그때 문밖에서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조금 전 나갔던 이의진이 다시 다급하게 빈소로 들어왔다. 유진우는 재빨리 가면을 쓰고 근위병인 척 옆에 섰다.유천우와 마음을 털어놓고 얘기할 수 있었던 건 형제끼리의 믿음 때문이
“형?”유천우는 인피 가면을 벗은 남자를 보자마자 흠칫 놀라더니 이내 기쁨에 겨워했다. 그 남자는 다름 아닌 서경왕부에 위장 잠입한 유장혁이었다.“많이 컸구나, 천우야. 이젠 혼자서도 일을 척척 해내고.”유진우는 배다른 동생 유천우를 흐뭇하게 쳐다보았다.사실 조금 전 유천우와 이의진의 얘기를 전부 다 들었다. 유천우가 자신을 믿어준 것에 대해 무척이나 고마웠다. 물론 이의진이 걱정하는 마음도 충분히 이해는 되었다.지금까지 권력을 손에 넣으려고 형제끼리 물고 뜯고 부자끼리 서로 죽이는 걸 수두룩하게 봐왔다. 자기 아들을 걱정하는 건 당연했다.“형, 서경에는 언제 왔어요?”유천우가 물었다.“이틀 정도 됐어.”유진우가 대답했다.“아버지 돌아가신 거 알았어요?”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유진우는 빈소의 영정사진을 보고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부자는 1년 전 강능에서 만났다. 그런데 그 만남이 마지막이 될 줄은 생각지 못했다. 다시 만났을 때 유진우는 빈소에 서 있었고 유만수는 관 속에 누워있었다.‘이건 뭐 운명의 장난도 아니고...’유진우는 관 앞으로 걸어가 반쯤 열린 관뚜껑 사이로 그 안에 누워있는 유만수를 보았다. 얼굴이 평온한 걸 보니 고통 없이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았다.하지만 어찌 된 건지 그렇게 미워했던 유만수의 얼굴을 본 순간 슬픔이 밀려오기 시작했다.‘내가 만약 서경에 빨리 돌아왔더라면, 빨리 만났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까? 왜?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유진우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고 눈시울이 저도 모르게 붉어졌다.“형, 사실 최근 2년 사이 아버지 건강이 점점 나빠져서 특효약으로 연명하셨어요. 의사는 아버지가 천인오쇠라고 하면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어요. 천천히 쇠약해져서 죽는 것보다 이 결과가 아버지한테는 오히려 해방 같은 거라고 볼 수 있어요.”유천우가 울먹거리며 말했다.“범인은 잡았어?”유진우가 돌아서서 물었다.“홍복홍이 지금 조사하고 있어요.”유천우가 대답했다.“서경왕부에 숨은 스파
그래야만 지금 앉아 있는 이 자리라도 지킬 수 있다.지금 왕위를 이어받을 자격과 능력을 갖춘 사람은 표기 대장군 유태범밖에 없었다.첫째로 유태범은 유씨 가문 사람이라 왕족에 속했기에 명분이 정당했다. 둘째로 표기 대장군으로서 서경의 절반에 달하는 군대를 거느리고 있어 권력이 하늘을 찔렀다. 셋째로 유태범은 오랜 시간 동안 힘을 키워왔다. 인맥, 위신, 공로 모두 왕위에 오르기에 충분했다.현재 유태범이 모든 사람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적지 않은 관원들은 애도를 표한 후 바로 대장군 저택으로 가서 유태범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주었다.이러한 움직임은 당연히 서경왕부의 감시망을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의진은 그들을 제압할 힘이 없었다.“어머니, 벌써 종일 여기 계셨어요. 들어가서 쉬세요. 이러다가 몸이 상하실까 걱정됩니다.”수심과 피곤이 가득한 어머니의 얼굴을 본 유천우가 참다못해 한마디 했다.“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는데 내가 어찌 편히 쉴 수 있겠어.”이의진이 고개를 내저었다.“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까 더 조심해야죠. 서경왕부가 흔들리고 있는 지금 왕비인 어머니가 버티셔야 합니다. 절대 쓰러져선 안 돼요.”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하지만...”이의진은 뭐라 더 얘기하고 싶었지만 유천우가 가로챘다.“어머니, 이번에는 제 말을 들어주세요. 먼저 들어가서 쉬고 내일 아침에 다시 아버지 곁을 지켜도 괜찮아요.”이의진이 대답하기도 전에 유천우는 도우미 두 명을 불러 명령을 내렸다.“너희 둘, 어머니를 방으로 모시고 잘 보살펴드려.”“알겠습니다.”두 도우미는 대답한 후 이의진을 부축했다. 무릎을 하도 오랜 시간 꿇고 있어 다리가 저린 나머지 제대로 서지도 못했다.“천우야, 너도 몸 잘 챙겨. 절대 방심해선 안 돼.”이의진이 당부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유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가 나가는 걸 본 후에야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렸다.“다들 돌아가. 여긴 나 혼자 지키면
그 시각 서경왕부 문 앞.유태범 등 3인은 한 무리의 근위병들을 이끌고 서둘러 걸어 나왔다.서경왕부를 떠난 후 조군영이 참다못해 물었다.“대장군님, 이의진 모자가 주제도 모르고 저렇게 날뛰는데 계속 가만히 내버려 둬야 합니까?”“당연히 내버려 둘 순 없지. 하지만 너무 대놓고 움직여서도 안 돼. 흑용군의 대부분 고급 장교들이 서경왕부에 충성해서 정말 싸우기라도 한다면 우리한테 좋을 게 없어.”유태범이 실눈을 뜨고 말했다.“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조군영이 또 물었다.“대놓고 움직일 수 없다면 몰래 압력을 가해야지.”유태범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서경에 내란이 일어서 서경왕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진정한 리더가 누구인지 알게 될 거야.”“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사람을 보내서 이간질시킬게요. 백성들의 원한이 커져서 서경왕부도 감당이 안 될 때 대장군님이 구세주처럼 등장하는 겁니다. 그때가 되면 서경의 백성들은 대장군님께 고마워할 것이고 새로운 서경왕으로 모시겠죠.”눈치가 참 빠른 조군영이었다.“맞아. 아주 영특하구나, 너. 나중에 내가 서경왕 자리에 앉으면 표기 대장군 자리는 네 것이 될 거야.”유태범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합니다, 대장군님.”조군영은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얼른 움직여. 빠를수록 좋아. 절대 그 어떤 흔적도 남겨선 안 된다는 거 명심해.”유태범이 신신당부했다.“알겠습니다. 제가 깔끔하게 처리하겠습니다.”조군영은 인사를 올린 후 자리를 떠났다.“대장군님, 일반적인 내란이라면 서경왕부의 뿌리를 흔드는 건 불가능할 거예요. 반드시 강력한 무언가가 있어야 해요.”고원이 귀띔했다.“그건 나도 알고 있어.”유태범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동안 난 내 사람을 몰래 키워왔어. 8대 제후 중에 절반이 내 사람이야. 내 명령 한마디면 주저하지 않고 날 도와줄 거야.”“진작 준비하고 계셨군요. 제가 괜한 걱정을 했네요.”고원이 웃으면서 말했다.“걱정하지 마. 내가 서경왕이 되면 절대 섭섭지 않게 해줄게.”
“유태범은 오랫동안 야심을 숨겨왔어요.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으니 이 기회에 무조건 권력을 빼앗으려고 할 겁니다. 이 일 아직 끝나려면 멀었어요.”유천우가 수심에 찬 얼굴로 말했다.“맞아. 대놓고 움직이진 못해도 뒤에서 온갖 수단을 동원할 거야. 앞으로 적지 않은 문제가 생길 게 분명해.”이의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위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절대 함부로 하지 못했을 것이다.“형이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유천우가 한탄하듯 말했다.“천우야, 네 능력도 네 형 못지않아. 네 형이 할 수 있는 일은 너도 할 수 있을 거라 믿어.”이의진이 그를 격려했다.“어머니, 제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어요. 형님에 비하면 한참 부족합니다.”유천우가 고개를 내저었다.“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하지 마.”이의진이 엄격한 얼굴로 말했다.“네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났어. 장례식이 끝난 후에 폐하께 말씀드려서 너한테 왕위를 물려주게 할 거야. 앞으로 서경왕은 너고 그 중책을 맡아야 해.”“어머니, 왕위는 형 거예요. 전 그 자리를 물려받을 생각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서경왕은 형만이 물려받을 자격이 있다고요.”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천우야, 다른 일은 남한테 양보해도 이건 절대 안 돼!”이의진이 어두운 목소리로 호통쳤다.“그 자리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꿈에 그리는 자리인지 알아? 놓치면 평생을 후회할 거라고!”“전 제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요. 저한테 있어서 권력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아버지처럼 매일 애쓰고 힘들게 사는 것보다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유천우가 고개를 내저었다.‘왕이 되면 좋을 게 뭐가 있다고. 걱정거리만 태산일 텐데. 그럴 바엔 맨날 먹고 놀면서 편히 살겠어. 그게 더 좋은 거 아닌가?’“이 녀석아, 일이 네 생각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전에 자유롭게 살 수 있었던 건 다 네 아버지가 있어서야.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금 아무 권력도 손에 쥐지 않는다면 나중에 아주 처참한 결말을 맞이할 거란
“유장혁?”그 소리에 주변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한때 유씨 가문의 천재는 이름을 널리 떨쳤었다. 그런데 10년 전 자금성의 난이 터진 후 완전히 종적을 감추었고 현재까지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런 그의 이름을 갑자기 들으니 놀랄 만도 했다.“도련님,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세자 전하의 생사도 불투명한 데다가 어디 있는지도 아무도 몰라요. 그런 분한테 서경왕의 자리를 맡긴다는 건 너무 터무니없는 소리 아닌가요?”조군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두 손까지 펼쳐 보였다.“그러게요, 도련님. 제발 현실을 잘 알고 말씀하세요. 세자 전하께 기댈 바엔 차라리 대장군님께 기대는 게 더 낫죠.”고원도 나서서 맞장구를 쳤다.유천우가 자기 자신을 얘기할 줄 알았는데 실종된 지 10년이나 된 사람을 얘기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정말 이보다 더 터무니없는 얘기는 없었다.“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형도 꼭 돌아올 겁니다. 그때 가서 형이 왕위를 이어받아도 문제없죠.”유천우가 싸늘하게 말했다.“도련님, 제가 하는 말이 거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만약 세자 전하께서 이미 돌아가셨으면 어떡해요? 서경왕의 자리를 계속 비워둘 작정인가요?”조군영이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형님 죽지 않았고 멀쩡하게 살아있어요. 그러니까 조 장군님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유천우가 말했다.“살아있다면 지금 어디 계시는 거죠? 왜 나타나지 않는 겁니까?”조군영은 일부러 주변을 두리번거렸다.“형님한테 소식을 전했으니 꼭 올 겁니다.”유천우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도련님, 설마 지금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는 건 아니죠?”조군영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위왕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퍼지면 서경 전체가 크게 흔들릴 거예요. 기다릴 시간이 많지 않다고요. 지금 당장 그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맞아요, 도련님. 대국을 생각하셔야죠!”고원도 나서서 유천우를 설득했다.“형한테 자리를 물려주는 건 아버지의 유언이에요. 지금 명령을 거역하겠단 겁니까?”
사람들이 뒤돌아보니 거친 삼베옷을 입고 상복 모자를 쓴 젊은 남자가 차가운 얼굴로 걸어오고 있었다.남자는 위엄이 넘쳤고 온몸에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오랜 시간 전장을 누빈 조군영과 고원마저도 그를 보자마자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표정이 진지해졌다.그 남자는 다름 아닌 유만수의 작은 아들 유천우였다.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유천우는 온 집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하여 예전에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도 많이 저질렀었고 서경의 사고뭉치라 불리기도 했다.그런데 최근 2년 동안 유천우는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변한 듯 더는 빈둥빈둥 놀지 않고 군에 들어가 열심히 살기 시작했다.처음에 사람들은 유천우가 군대에서 3일도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어릴 적부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산 도련님이 군대의 혹독한 훈련을 버틴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그런데 뜻밖에도 유천우는 군대에서 자리를 잡았고 공까지 세웠다.짧은 2년 사이에 병사에서 흑용군의 부장으로 성장했다. 든든한 배경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무척이나 놀라운 성과였다.사람들은 그제야 유천우가 응석받이로 자란 도련님이 아니라 군사 천재라는 걸 알게 되었다.“천우야, 드디어 온 거야?”아들을 보자마자 이의진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겨우 가라앉았던 슬픔이 다시 저도 모르게 밀려왔다.“어머니, 소식 다 들었어요. 제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유천우는 어머니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군영과 고원에게 시선을 옮겼다.“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이렇게 몰아붙이는 겁니까?”“그게...”조군영은 고원의 눈치를 슬쩍 봤다가 어쩔 수 없이 말했다.“도련님, 오해하지 마세요. 저희도 대국을 위해서 이러는 겁니다. 현재 서경왕부에 리더가 없어서 누군가 나서서 이끌어가야 합니다. 안 그러면 많은 문제가 생길 거예요.”“맞아요, 도련님. 대국을 생각하셔야죠.”고원은 충성을 다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대국?”유천우는 코웃음을 치고는 더는 두 사람을 거들떠보지 않
“서경 대원수의 직위는 매우 중요합니다. 내부 투표를 거칠 뿐만 아니라 폐하께 보고하여 최종적으로는 폐하의 결정을 받아야 해요. 우리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어요.” 이의진의 눈빛이 경계로 가득했다.유태범이 왔을 때 그녀는 처음에는 형제 간의 정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조군영과 고원의 몇 마디 말에 그녀는 갑자기 깨달았다. 일이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유태범은 흑용군에서 유만수 다음가는 위망을 가지고 있었다.표기대장군으로서 그는 많은 심복 장수들을 거느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절반의 병권도 장악하고 있었다.왕이 세상을 떠난 후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사람은 유태범이 분명했다.가장 중요한 것은 유태범이 지금 이미 자신의 야심을 드러냈다는 점이다.왕이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권력을 탈취하려 하다니, 그녀는 그의 불순한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심지어 유만수의 죽음이 이 자들과 호룡각 잔당들이 암묵적으로 결탁한 결과일지도 모른다!만약 유태범이 병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무시무시할 것이다.“마마, 급할 때는 권력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 이런 상황에서 어찌 폐하의 결정을 기다릴 시간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반드시 빨리 국면을 안정시켜야 합니다.” 조군영이 계속해서 말했다.“맞습니다!”고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장수가 밖에 있으면 군령도 받지 않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폐하는 상황을 전혀 모르니 결정을 내릴 수 없습니다. 반드시 우리가 스스로 결정해야 하며 그래야만 소인배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폐하에게 보고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내부 투표를 거쳐야 합니다. 그래야만 모두가 승복할 수 있어요.” 이의진이 다시 말했다.“투표라니요? 이게 투표할 일입니까? 전 서경을 둘러봐도 대장군님보다 원수 자리에 더 적합한 분이 누가 있습니까?” 조군영이 말했다.“그렇습니다, 왕비마마! 공적으로 보나, 위망으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무공으로 보나 어르신을 제외하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