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대2면 우리도 뒤지지 않아요.”황보용명이 덤덤하게 말했다.“맹주님, 아무래도 2대1 같은데요? 안 부장관이 이 진흙탕 싸움에 끼어들 생각이 있는지 먼저 물어보세요.”강동국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뭐라고요?”황보용명은 고개를 돌렸다. 안정양의 안색이 어둡고 한마디도 하지 않는 걸 보니 중도에 물러날 생각인 게 틀림없었다.안정양에게 선우희재 한 사람과 맞서 싸울 실력은 그래도 있었다. 하지만 강동국까지 합세한다면 그건 또 별개 문제다. 게다가 조씨 가문과의 친분도 그리 깊지 않아 굳이 자신의 앞날까지 희생하면서 도와줄 필요가 없었다.안정양의 침묵에 조씨 가문 사람들의 표정이 잿빛이 되었다. 안 부장관이 이대로 물러선다면 조씨 가문은 이 고비를 넘기기 어려워진다.“족장님, 오늘 족장님의 계획에 놀란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아직은 부족해요. 인제 어떡하실 생각인가요?”선우희재는 고개를 살짝 들고 조군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강동국이 힘을 보탠다면 황보용명 혼자서는 결코 조씨 가문을 구할 수 없다.조군수는 말없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고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오늘 정녕 선우 가문에 고개를 숙여야 한단 말인가?“호풍장군, 할 얘기 있으면 말로 해요.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 있나요?”상황이 뜻대로 돌아가지 않자 조군해가 나서서 수습하려 했다. 조금 전까지의 당당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더 이상 화를 입고 싶지 않으면 수그러드는 수밖에 없다.“말로 할 수는 있어요. 하지만 조건이 더 있어요.”선우희재가 덤덤하게 말했다.“무슨 조건이죠?”조군해가 물었다.“저 자식의 목숨을 가져갈 겁니다.”선우희재가 갑자기 유진우를 가리키며 생각지도 못한 말을 내뱉었다.‘천민 주제에 우리 선우 가문의 위엄에 도발했으니 대가를 치러야지. 오늘 저 녀석을 죽이는 걸로 다른 사람에게 경고를 할 거야!’“그건...”조군해의 표정이 굳어졌고 저도 모르게 옆에 있는 조군수의 눈치를 살폈다. 조군수는 당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무 말이 없었다.
“하 총독? 하 총독님이 오셨어?”“세상에나! 총독님까지 친히 오시다니, 하늘이라도 무너지려나?”“대체 누구야? 누가 총독님까지 모신 거야?”중년 남자의 등장에 현장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눈앞에 나타난 이 사람은 총독이자 남성 전체의 군정 대권을 쥔 인물이며 1품에 속한다. 그야말로 진정한 지방 수석 장관이다.발만 굴러도 서울을 뒤흔들 수 있는 존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강 장관이든 호풍장군이든 그의 앞에서는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총독님이 왜 오셨지? 설마 선우희재가 모신 거야?”“망했어, 망했어... 우리 조씨 가문 이젠 완전히 망했어.”“저분은 남성의 일인자신데 누가 감히 저분과 맞서 싸우겠어?”조씨 가문의 진영이 떠들썩해졌고 하나같이 절망적이고 겁에 질린 얼굴들이었다. 그들은 당연히 총독을 모실 재간이 없다. 그렇다면 선우희재의 지원군일 가능성밖에 없다.그런데 그 시각 조씨 가문 사람들만 충격에 빠진 게 아니라 선우희재도 경악한 얼굴이었고 영문을 알지 못했다. 사실 선우희재와 하 총독은 그렇다 할 친분이 딱히 없었다.“아니, 저분은...”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후 줄곧 덤덤하던 유진우의 표정도 살짝 흔들렸다. 그의 관직 때문에 놀란 게 아니라 전에 만난 적이 있는 지인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하지원의 아버지 하용만이었다.며칠 전 병원에서 만났을 때는 하용만의 신분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그가 총독이자 남성 전체를 거스르는 지방 수석 장관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어머, 총독님, 무슨 바람이 불었기에 총독님까지 친히 발걸음을 하셨어요?”잠깐 넋을 놓았다가 정신이 번쩍 든 강동국은 재빨리 활짝 웃으며 다가가 인사했다. 눈앞의 이분은 강동국의 가장 높은 상사였다.“강동국, 방금 내 사람들을 전부 내쫓겠다고 했어? 사실이야?”하용만이 담담하게 물었다.“오해입니다... 전부 오해예요.”강동국이 비굴하게 웃었다.“총독님의 근위병이라면 제가 맞이해도 모자랄 판에 내쫓는다니요.”“그래?”하용만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그럼 이렇게
“그래? 그런 일이 있었어?”하용만의 시선이 조군수에게 머물렀다.“예전에 혼약을 맺은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금 문제가 생겨서 다시 상의해야 해요.”조군수가 솔직하게 대답했다.“문제가 있으면 앉아서 천천히 의논하면 될 것을 왜 이렇게 분위기를 살벌하게 하고 그래?”하용만이 불만을 드러냈다.“제가 의논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조씨 가문에서 아예 체면을 세워주지 않아요.”선우희재가 말했다.“결혼은 남녀가 서로 원해서 하는 거죠. 병사까지 데리고 와서 결혼을 강요하는 건 강도질이나 다름없지 않아요?”조선미가 갑자기 목청을 높였다.“아주 맞는 말이네. 결혼은 남녀가 서로 동의해야지. 상대가 싫다고 하면 넌 강요할 자격이 없어.”하용만도 조선미의 말에 동의했다.그의 말에 선우희재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상대의 태도를 보니 조씨 가문의 편에 서겠다는 마음이 확고한 것 같다.“총독님, 조씨 가문이 대체 총독님께 뭘 주셨습니까? 제가 10배 드릴게요.”선우희재가 한마디 불쑥 던졌다.“무엄하다!”하용만의 낯빛이 어두워지더니 매섭게 호통쳤다.“선우희재, 너 날 대체 뭐로 본 거야? 탐관오리? 썩어 문드러진 간신?”“그럴 리가요. 희재 장군이 실수했나 봐요. 부디 화를 가라앉히세요, 총독님.”강동국이 상황을 수습하려 했다.“젊고 혈기 왕성해서 그런지 위아래도 모르는구나! 당장 네 사람들을 데리고 꺼져!”하용만이 무섭게 몰아붙였다. 원래는 상대의 체면을 남겨주려 했지만 호의도 모르고 나댈 줄은 생각지 못했다.“희재 장군, 오늘은 이만하고 무슨 일이 있으면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강동국이 선우희재에게 눈치를 줬다. 총독 앞에서 두 사람이 힘을 합쳐도 그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선우희재의 천부적인 재능이 뛰어나고 앞날이 창창한 건 사실이지만 하용만과 맞서 싸우기에는 아직 한참 부족했다.“총독님, 정말 조씨 가문을 도우실 겁니까?”선우희재가 실눈을 뜨고 물었다.“그래. 아무도 조씨 가문을 건드릴 수 없어. 불만이 있으면 언제든지
그 생각에 조군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고 재빨리 고개를 돌려 유진우를 쳐다보았다. 그의 표정은 한없이 덤덤하기만 했고 마치 아웃사이더 같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를 더 가늠할 수 없었다.자세히 생각해보면 유진우가 선우희재와 싸운 그 순간부터 조씨 가문의 상황이 역전하기 시작했다.그렇다면 지금까지 눈앞의 젊은이가 이런 상황을 만들었다는 말인가?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실로 무서운 사람이 아닐 수 없다.“족장님, 전 다른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하용만은 인사를 마친 후 자리를 떠났다. 유진우의 신분을 밝히지 않은 건 혹시라도 그에게 귀찮은 일이 생길까 걱정돼서였다.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되는 말은 아껴도 좋다.“더 싸울 일이 없는 것 같으니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황보용명은 유진우를 쳐다보고는 성큼성큼 자리를 떠났다.“족장님, 나중에 또 봐요.”안정양은 두 주먹을 가슴 앞에 맞잡고 예를 표한 후 따라나섰다.거물들이 다 떠나자 연회장 안이 더욱 떠들썩해졌다. 하객들은 이러쿵저러쿵 수군거렸고 조씨 가문 자제들도 이런저런 추측을 늘려놓았다.“아빠의 체면이 이렇게나 대단할 줄은 몰랐어요. 맹주님과 하 총독님까지 모셔오다니, 정말 대단해요!”조선미는 환하게 웃으며 다가갔다.두 거물이 뒷받침해주고 있으니 선우희재도 더는 결혼을 강요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도 드디어 한시름을 놓을 수 있게 되었다.“셋째야, 그동안 계속 숨기고 있었던 거야? 이 형이 이번에 제대로 한 수 배웠어.”그때 조군해 일행도 다가왔다. 하나같이 흥분한 얼굴로 어깨를 들먹였다.하 총독과 전 무림 맹주가 있는 한 조씨 가문은 앞으로 무슨 일이든 순조로워질 것이다.“큰형님, 저 아니에요. 제가 무슨 재간이 있어서 그분들을 모시겠어요.”조군수는 고개를 내저었고 전혀 우쭐거리지도 않았다.“너 아니면 누구야?”조군해는 어안이 벙벙했다.“저도 누군지 알고 싶어요...”조군수는 아래턱을 어루만지며 유진우를 쳐다보더니 의미심장하게 물었다.“진우 씨, 대체 누가 이런 엄청
조윤지가 쌀쌀맞게 말했다.“스스로 큰 재간이 없으니까 일명이 잘 되는 걸 질투하는 거지. 넌 정말 속이 좁아. 일명이의 실력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디 한번 말해봐. 여기 있는 조씨 가문의 자제들 중에 누가 그분들을 모실 수 있는지?”“그건...”조선미는 말을 잇지 못했다.관직을 놓고 보면 조일명은 조씨 가문의 젊은 세대 중에서 가장 훌륭한 건 사실이었다.“왜? 할 말이 없어? 일명이가 너보다 훌륭하다는 걸 인정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조윤지는 대놓고 조선미를 비웃었다.“선미야, 오늘 네가 화를 면할 수 있었던 건 다 내 덕이야. 그러니까 앞으로는 나에게 잘해.”조일명이 약을 올리자 조선미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조일명과 조윤지 둘이서 그녀를 몰아세웠다.“당신 덕이라고요? 볼 덕이라도 있어요?”조선미가 비웃음을 당하자 유진우가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그분은 1품 총독이지만 당신은 고작 6품 장교에 불과해요. 신분이 천지 차이인데 당신 때문에 왔다고 하는 건 대체 무슨 근거죠?”“흥! 나 때문이 아니면 너 때문이야?”조일명이 하찮다는 듯이 말했다.“맞아요. 내 체면을 봐서 온 거예요.”유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에 사람들은 잠깐 놀라는가 싶더니 마치 우스갯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크게 웃었다.“하하...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유진우, 네까짓 게 뭔데? 무슨 자격으로 총독님을 움직여?”“흥, 자기 주제도 모르고 나대는구나.”조씨 가문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유진우를 비웃었고 마치 멍청이를 쳐다보듯 했다.아무것도 없는 돌팔이 의사가, 여자에게 빌붙어 사는 기생오라비가 무슨 배짱으로 저런 막말을 내뱉는단 말인가?“진우 씨, 정말 하 총독님과 아는 사이예요?”조선미가 경악한 얼굴로 물었다.“며칠 전에 총독님 사모님의 목숨을 살려준 적이 있거든요. 그래서 총독님께서 신세 진 걸 갚으러 왔다고 한 거예요.”유진우가 사실대로 말했다.“너에게 신세 졌다고? 하하... 잘난 척하긴.
“다들 웃기 좋아하잖아요? 어디 한번 계속 웃어봐요.”유진우가 영패를 꺼내며 질문을 던졌다.조일명은 순간 얼어붙었고 조윤지도 두 눈이 휘둥그레졌으며 나동수 등 3인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충격에 빠졌다.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상 위에 놓인 은색 영패에 쏠렸다. 그들은 경악한 얼굴로 뚫어지게 쳐다보았고 얼굴에 웃음기라곤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황보 가문의 객경령은 수많은 사람들이 꿈에 그리는 보물과도 같은 존재다. 이 영패만 손에 쥐고 있으면 황보 가문이 뒷받침해주고 있다는 뜻이고 심지어 황보 가문의 여러 자원까지 동원하여 쓸 수 있다.이 객경령의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가치가 어마어마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문제는 이 귀한 보물이 왜 유진우의 손에 있냐는 것이다. 설마 진짜로 황보용명의 목숨을 구해줬단 말인가?그 생각에 유진우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눈빛이 사뭇 달라졌다.“말... 말도 안 돼요. 당신이 어떻게 황보 가문의 객경령을 갖고 있을 수 있죠?”조윤지는 도무지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다.“난 이미 정확하게 얘기했으니 더는 같은 말을 반복하고 싶지 않아요.”유진우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두 사람이 조선미를 조롱하지만 않았어도 영패를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조윤지, 어때? 아직도 내 남자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자신감이 생긴 후 이번에는 조선미가 그녀를 비난했다. 조금 전 비웃음을 당했던 걸 인제야 그대로 갚아줄 수 있게 되었다.“흥, 너무 우쭐거리지는 마. 객경령이 있다고 해도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해.”조윤지의 낯빛이 어두워졌다.“맞아!”조일명도 나서서 맞장구를 쳤다.“네 신분에 어떻게 황보 가문의 객경령을 얻을 수 있겠어? 이 객경령은 가짜인 게 틀림없어!”“가짜라고?”그의 말에 뭇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눈치만 보았다. 객경령은 황보 가문의 얼굴이나 다름없다. 그런 객경령을 위조한다는 건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다.“조일명, 헛소리 지껄이지 마!”조선미가 예쁜 두 눈을 부릅떴다.“이 영패 위에
“맞아요. 황보 가문의 객경령은 엄청 단단해서 절대 망가지지 않아요. 짝퉁이니까 이리 쉽게 망가지죠.”조윤지가 나서서 힘을 보탰다.그녀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결국 가짜였구나. 깜짝 놀랐네.”“정말 파렴치한 놈이야. 허세 한번 부리겠다고 객경령까지 위조하다니, 간덩이가 부어도 아주 단단히 부었어.”“흥, 일명 도련님이 통찰력이 있어서 저 자식의 본색을 까발렸기에 망정이지, 안 그러면 우리 다 속을 뻔했어.”유진우를 비난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졌다. 그들은 아무 존재감 없는 유진우보다 재벌 도련님인 조일명을 더욱 믿었다.한 사람이 성공하기 전에 아무리 옳은 소리를 해도 아무도 믿지 않지만 성공한 후에는 헛소리를 지껄여도 진리라고 받아들인다.“조일명 씨, 당신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객경령을 망가뜨렸어요. 결과가 어떨지 생각해봤어요?”유진우가 싸늘하게 말했다.“결과? 하하... 짝퉁으로 다른 사람을 속이려 한 주제에 되레 큰소리를 쳐? 난 그저 하늘을 대신하여 정의를 실행했을 뿐이야.”조일명이 또박또박 말했다.“맞아요! 당신에게 책임을 묻지 않은 것만 해도 고마워해야 할 판에 무슨 낯짝으로 큰소리를 쳐요?”조윤지가 씩씩거렸다.“두 사람 적당히 해!”조선미는 화가 슬슬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유진우의 말이라면 거의 백 퍼센트 믿었다. 하여 조일명의 조금 전 행동은 완전히 사실 왜곡이고 일부러 모함한 거라고 생각했다.“됐어, 다들 그만해. 가족끼리 여기서 언성을 높이면 어떡해?”조군해가 제때 나서서 말렸다. 수많은 하객 앞에서 젊은 세대들이 싸우기라도 한다면 조씨 가문의 체면이 뭐가 되겠는가?“유진우, 큰아버지의 체면을 봐서 더 따지지는 않겠어.”조일명은 앞으로 다가가 망가진 영패를 건네며 조롱 섞인 말투로 말했다.“자, 짝퉁은 돌려줄게.”“진짜인지 가짜인지 당신이 잘 알겠죠.”유진우가 덤덤하게 말했다.“하하...”조일명이 갑자기 웃더니 유진우의 귓가에 대고 두 사람만 들을
“일명아!”갑작스러운 상황에 사람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조금 전까지 박장대소하던 조일명이 순식간에 피를 토하며 쓰러질 줄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얼른 병원에 데려가!”조군수는 재빨리 판단을 내려 조일명을 병원에 데리고 가라고 분부했다.“이 자식아, 너 일명이에게 무슨 짓 했어?”나가려던 조군표는 뭔가 생각났는지 갑자기 고개를 돌리고 흉악스럽게 물었다.“그게 저와 무슨 상관이죠? 옛날에 다친 상처가 다시 재발한 거예요. 굳이 탓을 하고 싶다면 당신 아들을 때린 선우희재를 탓하세요.”유진우가 어깨를 들먹였다.“너...”조군표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뭔가 이상하긴 했지만 정확한 증거가 없어 뭐라 할 수도 없었다.“둘째 형님, 이러다 골든 타임을 놓치겠어요. 일단 사람부터 살려야죠.”조군수가 귀띔했다.“가자!”조군표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유진우를 매섭게 째려보고는 부랴부랴 병원으로 향했다. 조군해 부녀도 그의 뒤를 따랐다.조일명은 가족 중에서 가장 뛰어난 천재라 그의 안위가 조씨 가문의 앞날과도 직결된다. 족장인 조군수와 버금갈 정도로 중요한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여보, 아까 뭔 짓을 했어요?”조선미가 유진우에게 다가가 나지막이 물었다. 조일명이 갑자기 피를 토하며 쓰러진 게 누가 봐도 이상했다.“뭔 짓을 하다니요? 선우희재가 그런 거라니까요.”유진우가 진지하게 말했다.“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요?”조선미가 두 눈을 부릅떴다.“지금 옆에 아무도 없으니까 나에게만 솔직하게 얘기해요.”“알았어요. 아까 그냥 조일명의 상처에 소금 좀 뿌렸어요. 다친 데가 더 아프게.”유진우가 히죽 웃었다.전에 선우희재의 일격에 조일명은 이미 내상을 입었다. 그리고 유진우는 아까 조일명의 어깨를 두드릴 때 진기를 미친 듯이 불어넣었다. 그 바람에 안정을 되찾았던 내상이 다시금 폭발하게 된 것이었다.“생명에는 지장이 없겠죠?”조선미가 떠보듯이 물었다. 비록 조일명과 사이가 좋지 않지만 둘째 큰아버지의 유일한 아들이다. 어쨌
방금 황은아가 던진 검은 안개 폭탄은 그녀가 이전에 만든 하얀 안개보다 독성이 백 배 더 강했다.하얀 안개는 만성 독으로 중독되면 사지가 힘없이 늘어지고 의식을 잃고 쓰러지며 신속히 구출되면 살 가능성도 있다.하지만 검은 안개는 달랐다.강력한 부식성은 몇 초 만에 살아있는 사람을 피와 살이 뒤섞여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시체로 만들었다.“괴물 같은 여자네.”문관옥은 하늘에서 맴돌고 있는 황은아를 보며 이를 악물고 분노했다.독 안개 하나만으로 수백 미터를 뒤덮던 정예병들을 순식간에 몰살시켰으니 살상 능력은 그야말로 경악스러웠다.만약 황은아가 같은 폭탄을 몇 개 더 던진다면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어때? 내가 얼마나 대단한지 이제 좀 감이 와?”황은아는 거대한 독수리를 타고 상공에서 내려다보며 소리쳤다.“늙은이들! 상황 파악됐으면 얼른 꺼져! 아니면 폭탄 몇 개 더 던져서 여기를 너희들이 무덤으로 만들어주겠다.”그녀는 말하며 몇 개의 검은 구슬을 꺼내 흔들었다.명백한 위협이었다.지하의 병사들은 두려움에 떨며 흩어져 숨을 곳을 찾았다.하지만 이 황무지에 독 안개를 피할 만한 적당한 은신처는 없었다.피신처라 해봐야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이었다.“이제 어떡하죠? 일단 철수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한 총수가 땀범벅인 상태로 달려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유장혁만 상대할 때는 병력이 많아서 밀어붙일 수 있었지만 강력한 황은아의 독은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처참한 죽음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직접 키운 병사들이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을 더 이상 지켜보기는 힘들었다.“철수?”부규환이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상부의 명령은 그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유장혁을 죽이는 것이다. 이대로 탈영병이 되려는 것이냐?”“도망가려는 것이 아닙니다! 잠시 숨어서 해독 방법을 찾은 후 임무를 수행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합니다.”총수가 얼른 해명했다.“십만 대군이 어린애한테 쫓겨 도망친 일이
하늘 위에서 검은 독수리를 타고 맴돌던 황은아는 냉정한 눈빛으로 지상에 빼곡히 들어선 병사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부규환의 빠른 대처로 인해 이전에 퍼진 독 안개는 절반 정도의 병사들만 쓰러뜨리는 데 그쳤지만 그녀의 능력으로 남은 병사들도 쓰러뜨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주술교가 제일 두려워하지 않는 게 바로 인해전술이었다.“은아?”독수리를 타고 하늘을 나는 황은아를 보며 유진우는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자신에게 가장 먼저 도착한 이가 다른 누구도 아닌 제자라는 사실에 감탄이 나왔다.“아저씨! 괜찮으세요?”황은아가 멀리서 물었다.“괜찮다. 아직 버틸 수 있어.”유진우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그는 황은아에게 답하여 얼른 허리춤에서 단약 한 알을 꺼내 입에 털어 넣었다.계속된 전투로 인해 기력과 진기가 크게 소모된 상태였지만 몸에 항상 지니고 다니는 단약 덕분에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어린 계집아이가 어디서 감히 나서느냐? 정체를 밝혀라!”부규환이 고개를 들어 황은아를 바라보며 외쳤다.“내 입에서 정보를 빼내려는 거라면 헛수고야! 내가 그렇게 멍청해 보여?”황은아가 비웃으며 말을 이었다.“늙은이! 다시 한번 경고하지. 당장 사람들을 데리고 꺼져! 그렇지 않으면 독을 살포해 모두 황천길로 보내버릴 테니까!”“흥! 어린 것이 말은 호기롭구나! 우리가 누군지는 알고 하는 소리냐?”부규환이 차가운 얼굴로 응수했다.“네가 누구든 내 알 바 아니야! 또 지껄이면 네 입부터 독으로 봉해버릴 줄 알아!”황은아가 외쳤다.“건방진 계집이네!”부규환은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손바닥을 들어 허공을 향해 강하게 내리쳤다.웅!순식간에 금빛으로 빛나는 커다란 손바닥 모양의 기운이 허공을 가르며 황은아와 독수리를 향해 날아갔다.부규환의 공격이 황은아와 독수리에 닿기 직전 흰빛의 검기가 측면에서 날아들어 금빛 손바닥을 베어내며 폭발을 일으켰다.쾅! 하는 소리와 함께 검기과 기운이 서로 부딪히며 산산이 흩어졌다.검기를 날린 이는 다름 아
쿵! 쿵! 털썩!여 무사들이 쓰러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또다시 많은 무사가 잇따라 쓰러졌다.이 상황은 빠르게 확산하며 이제는 손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후방에 서 있던 가장 먼저 안개를 들이마신 병사들은 도미노처럼 차례로 쓰러지기 시작했다.열 명, 백 명, 천 명, 만 명...엄청난 수의 병사들이 중독 증상을 보이며 속수무책으로 쓰러져 갔다.안개가 지나간 자리마다 마치 강풍에 낙엽이 쓸리듯 몇 분 만에 십만 대군의 절반이 쓰러졌다.“이게 무슨 일이야! 왜 뒤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쓰러지는 거지?”여덟 명의 지휘관은 곧 이상함을 감지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독이다! 안개에 독이 섞여 있어! 모두 조심해!”한 교가 외쳤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중독되어 쓰러지는 병사들의 수는 계속 늘어났고 멈출 기미가 없었다.이대로 가다가는 전군이 괴멸할 위기였다.“어서! 해독제를 복용하라!”여덟 명의 지휘관이 연신 외쳤다.의무병들이 일부 해독제를 비축하긴 했지만 십만 대군 전체를 상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그러나 지금은 한 명이라도 구할 수 있다면 그조차도 다행인 상황이었다.“이게 무슨 일이야! 멀쩡하던 전장에 왜 갑자기 독 안개가 나타난 것이냐! 대체 누가 이런 짓을 꾸민 거지?”문관옥이 미간을 찌푸리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하지만 현장이 워낙 혼란스러웠던 탓에 단서를 찾기 어려웠다.“설마 유장혁에게 동료가 있는 건가?”눈을 가늘게 뜬 부규환의 얼굴에 음산한 기운이 스쳤다.안개의 독성은 미미했기에 무도 고수들에게는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하지만 무장한 병사들에게는 매우 치명적이었다.몇 분만 더 지나면 십만 병사 중 90%가 쓰러질 것이 분명했다.그렇게 되면 인해전술은 더 이상 펼칠 수 없을 것이다.“일어나라!”결국 부규환이 직접 움직이기 시작했다.그가 몸을 떨자 금빛 광채가 전신에서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그 금빛은 마치 생명력을 가진 듯 빠르게 형태를 갖추더니 눈 깜짝할 새에 거대한 금강 형상으로 변했다.“으아아!”
진산 기슭 아래, 포효와 함성 그리고 비명이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유진우는 한 자루의 검을 들고 십만 대군 속을 종횡무진하며 검 끝이 닿는 곳마다 무적의 기세를 보였다.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수십 명이 피 웅덩이 속에 쓰러졌다.그러나 유진우가 아무리 격렬히 싸우고 있다고 해도 주변의 병사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많아졌다.밀려오는 파도처럼 한 무리를 척살하면 또 다른 무리의 병사들이 덮쳐왔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병사들은 끝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십만 대군이 가만히 서서 목을 길게 빼고 죽기를 기다린다 해도 사흘 밤낮으로 베어야 할 것이다.하지만 십만 대군은 모두 정예병들이었다.갑옷을 입고 방패를 든 그들을 처단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유진우의 실력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혼자서 십만 대군을 도륙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사람은 기계가 아니니 고강도의 싸움을 계속 유지할 수는 없었다.유진우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조금씩 체력이 소모됐다.단시간 내에는 눈에 띄지 않겠지만 시간이 길어질수록 피로는 서서히 누적되고 기력은 점차 소진될 것이다.결국 유진우는 병사들의 인해전술에 의해 패배할 운명이었다.“흥! 죽여라!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지켜보겠다!”문관옥은 멀리서 전투를 관전하며 냉소를 지었다.어차피 죽는 건 자기 병사가 아니니 그는 조금의 안타까움도 느끼지 못했다.‘실력으로 보니 많아야 만 명 적도 죽이는 게 한계겠네.’체력이 고갈되면 유진우는 곧 도살될 양처럼 무력해질 것이다.“1년 사이에 실력이 이 정도로 향상되다니 역시 남겨두면 안 될 불씨야.”부규환이 중얼거리며 무표정한 얼굴로 유진우의 전투를 지켜보았다.유진우의 재능으로 볼 때 몇 년만 더 성장할 시간을 준다면 아무도 그를 막을 수 없게 될 것이다.“죽여라! 다 죽여라! 전진!”여덟 명의 지휘관이 병사들을 독려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 전진하도록 지시했다.상부의 명령을 받은 그들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임무를 완수해야 했다.
“죽여라!”500명의 정예병이 차량에서 뛰어내리며 앞으로 돌진했다.그때 대형 트럭의 측면 문이 열리며 빼곡히 들어있던 사람들이 드러났다.그들은 검은 전투복을 입은 채 가면을 쓰고 강철 검을 들고 있었다.하나같이 기운이 강대했는데 무도 고수가 분명했다.“돌격!”트럭 위의 가면을 쓴 남자가 장도를 휘두르자 트럭 안의 무사들은 주저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양측 병력은 곧바로 격렬한 혈투를 벌이기 시작했다.조무진의 병력이 더 많았다. 게다가 훈련도 잘되어 있어 공격과 방어가 일체화된 강력한 전력을 자랑했다.반면 가면을 쓴 암살자들은 다섯 명씩 조를 이루어 완벽한 호흡으로 협력하며 매우 맹렬하게 돌격했다.일순간 양측은 팽팽히 맞서며 승부를 가릴 수 없는 치열한 전투를 이어갔다.“진무사?”조무진은 자세히 살펴보다가 이내 단서를 발견했다.가면을 쓴 암살자들은 모두 정예 무사로 각별히 선발된 사람들이 분명했다.일반적인 무림 문파였다면 격전속에서 이토록 통일된 움직임을 보여줄 수 없었다.오직 공식적이고 엄격한 훈련을 받은 무사만이 이러한 수준에 도달할 수 있었다.연경 전체에서 봤을 때, 이 정도의 실력과 동기를 가진 집단은 진무사밖에 없었다.진무사까지 출동한 것을 보니 조무진은 사태는 예상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이때 500리 떨어진 한적한 산림 속.조홍연이 정예 병력 한 부대를 이끌고 산적 토벌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일부 저항이 있을 거라 예상했지만 산적들은 정예군을 보자마자 쥐가 고양이를 보듯이 산채를 버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그들은 이렇다 할 저항도 하지 않았다.조홍연은 단 한 명의 병력 손실도 없이 가볍게 임무를 완수했다.“홍연 님, 산적들은 이미 도망쳤고 저희는 무사히 산채를 점령했습니다. 현재 전리품 정리 중입니다.”조홍연의 측근 중 하나인 여자 장군 공요가 다가와 보고했다.조홍연은 산채의 나무 성벽 위에 서서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그녀의 얼굴에서 기쁨은 찾아볼 수 없었다.“홍연 님, 왜 그
홍군림이 백준을 막아서 검을 상대하고 있을 때, 다른 한편 동방의 진산에서 백 리 떨어진 곳에서 조무진이 정예병 500명을 이끌고 급히 진산으로 향하고 있었다.상황이 갑작스럽게 발생한 탓에 병력이 많지 않았지만 이 500명은 그의 직속 친위대로 구성된 강력한 전투력의 부대였다.안에는 적지 않은 무도 고수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만 명 규모의 일반 군사들과 맞서도 전혀 밀리지 않을 실력을 보유하고 있었다.“더 빨리! 더 속도를 내라! 반드시 최단 시간 안에 서하사에 도착해야 한다.”조무진은 차량에 앉아 연신 재촉하며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그의 이런 반응은 함께 차량에 타고 있던 두 명의 여자 부하에게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왔다.평소 조무진은 전쟁의 신으로 불리며 세상이 무너진다 해도 침착함을 잃지 않고 담담히 대응하던 사람이었다.‘그 어떤 위급한 상황에서도 냉철한 판단으로 대응해 온 그가 지금 이토록 다급한 모습을 보이다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조홍연 쪽은 어떠한가? 연락이 닿았느냐?”조무진이 갑자기 물었다.“아가씨는 가문 장로들에 의해 긴급 임무에 차출되어 현재로서는 연락이 닿지 않지 않아 일단 메시지를 남겨놓았습니다. 아가씨께서 돌아오시는 대로 즉시 지원하러 올 것입니다.”한 여자 부하가 답했다.“무슨 임무? 다 헛소리야! 늙은 놈들이 일부러 방해를 놓은 게 틀림없어!”조무진이 분을 참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었다.이 중요한 시점에 가장 강력한 전투력을 가진 조홍연을 멀리 차출보내는 건 조씨 가문에서 황가와의 충돌을 피하고자 유장혁이 죽는 것을 암묵적으로 허용하는 행위였다.“도련님, 유 도련님께서는 복이 많으신 분이니 분명히 무사하실 겁니다. 너무 염려 마세요.”여자 부하가 조심스럽게 위로를 건넸다.“상황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조무진의 얼굴은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지금 연경성은 이미 폭풍전야다. 황권 뒤에 숨은 세력들조차 움직이기 시작했어. 내 추측이 맞다면 10년 전의 그 비극적인 사건이 다시 벌어질
그의 옷자락은 바람에 나부끼며 속세를 벗어난 듯 초탈한 기운을 뿜어냈다.보통 사람이 이 광경을 봤다면 곧바로 무릎을 꿇고 선인을 외쳤을 것이다.슉!흰옷의 검객이 열심히 목적지를 향해 가던 중 갑자기 하얀 보검 하나가 땅에서 솟구쳐 오르며 그의 앞길을 가로막았다.그 검은 마치 도전장을 내미는 듯했다.“누가 내 길을 막는 것이냐!”흰옷의 검객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검선 선배님의 검술이 뛰어나다는 소문은 오래전부터 들어왔습니다. 하여 후배가 가르침을 청하러 왔습니다.”이때 웃통을 벗은 준수한 청년이 천천히 허공으로 떠올라 하얀 보검 위에 가볍게 발을 디뎠다.허공에 떠오른 청년과 검이 검선 백준과 마주 섰다.“네 놈은 누구냐?”백준이 청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후배 검종, 홍군림이라 합니다. 천 리 길을 달려와 검선 선배님께 몇 수 가르침을 청하고자 합니다.”준수한 청년 홍군림이 두 손을 모아 공손히 인사했다. 그의 태도는 비굴하지도 오만하지도 않았다.“홍군림? 검종에서 천하를 누비며 다니는 자?”백준은 눈을 가늘게 뜨며 약간 놀란 기색을 보였다.“검종에서 절세의 천재가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오늘 보니 과연 소문대로네. 어린 나이에 대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니... 유장혁 그 자식보다 낫구나.”“선배님, 과찬입니다.”홍군림의 얼굴에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홍군림, 오늘 중요한 일이 있으니 정말 가르침을 청하려 한다면 다음 기회로 미뤄라.”백준이 담담하게 말했다.“다음을 기약하기보다 어렵게 만났으니 이번 기회에 부디 선배님께서 가르침을 내려주시길 바랍니다.”홍군림은 물러서지 않았다.“네 말은 일부러 날 막고 있다는 거냐? 설마 검종이 호룡각이 부리는 개가 된 것은 아니겠지?”백준의 얼굴이 서서히 차가워졌다.“제 행동은 검종과도, 호룡각과도 무관합니다. 순전히 개인적인 흥미일 뿐입니다.”홍군림은 담담히 대답했다.“저는 세 살 때부터 검을 익혀 검도의 극한에 이르렀습니다. 선배님의 검이 빠를지 제 검이 빠를지
“뭐라고?”부규환의 말에 유진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유진우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유만수는 서경에 머물면서 막대한 병력을 쥐고 있을 뿐 아니라 주변에는 실력 있는 고수들이 많이 있다. 그런 사람을 상대로 너희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호룡각의 세력이 아무리 막강하다 해도 서경왕부 역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그렇지 않았다면 이토록 오랜 세월 동안 호룡각이 눈엣가시 같은 서경왕부의 존재를 참을 리가 없었다.호룡각이 움직이지 않았던 것은 서경왕부를 상대하기에 껄끄러웠기 때문이었다.다시 말해 유만수가 건재한 서경왕부의 세력은 절대 약화하지 않을 것이며 호룡각또한 함부로 손댈 수 없는 세력이라는 뜻이었다.그러나 부규환의 말투를 보니 지금은 상황이 이미 많이 바뀐 듯했다.“도련님, 이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부규환이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호룡각은 10년간 치밀하게 준비해 왔습니다. 언젠가 서경왕부를 제거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제 그날이 머지않았습니다.”“대체 뭘 하려고 하는 거야!”유진우가 외쳤다.“도련님,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어차피 오늘 살아서 나갈 수 없을 테니까요.”부규환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흥! 나를 죽이려고? 그렇게 쉽지는 않을 거야!”유진우가 냉정한 얼굴로 말했다.“아무리 숨겨둔 병력이 많다고 해도 나도 혼자 온 게 아니다! 지원군이 오고 있으니 누가 이길지는 두고 봐야겠지.”“도련님의 계획은 이미 호룡각에 간파되었습니다. 말씀하신 지원군은 아마 오늘 도착하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의 도련님은 저희 수중에 들어온 먹잇감에 불과합니다.”부규환이 담담하게 말했다.“하하하, 유장혁! 설마 이런 날이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겠지?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고 실력이 강하더라도 죽음은 피할 수 없겠구나!”문관옥이 참지 못하고 조소를 터트렸다.경천 랭킹 10위에 오른 강자가 직접 나섬과 더불어 10만 외성 군의 정예병을 내세웠으니 유장혁이 아무리 숨겨둔 비장의 수가 있다고 해도 마지막 발버둥
왜 무림에는 고수들이 넘쳐나고 강자가 끊임없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공무원과 정면으로 맞서지 못했는지를 사람들은 이제야 알았다.그 이유는 실력의 차이가 너무나도 크기 때문이다.수십만 대군이 밀고 들어오면 설령 하늘을 찌르는 능력을 갖췄다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어떤 문파라도 관군의 정예 병력과 대적하게 되면 결국 멸망의 길을 걷게 될 뿐이다.“포위하라!”명령과 함께 10만 대군이 안팎으로 유진우와 일행을 완전히 둘러쌌다.병사들은 각자 창과 칼을 들고 눈빛은 날카롭게 빛났으며 살기 가득한 기운이 사방을 압도했다.“나는 옥면 군신 무관옥이에요. 팔방제후는 어디 있어요?”그 순간 무관옥이 앞으로 나와 위세를 떨치기 시작했다.초품 군신의 위엄을 지닌 그는 이품 고급 장교에게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존재처럼 느껴졌다.팔방제후로 불리는 실권자들도 무관옥의 앞에서는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그러나 그의 질문은 대답 없이 공허하게 메아리쳤고 병사들은 오직 무표정하게 대형을 유지하며 무관옥을 무시했다.“이게 무슨 일이죠? 당신들의 고급 장교 어디 있는 거예요?”무관옥은 불만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무관옥은 30만의 백호랑을 연경으로 보낼 수 없지만, 군신으로서 어떠한 고급 장교도 그를 보고 정중하게 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군신님, 오늘 외성군의 지휘는 제가 맡고 있습니다.”그때 중앙 대열에서 하얀 옷을 입은 얼굴 창백하고 수염이 없는 노인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노인의 키는 훤칠하고 체격은 마른 편이며 날카로운 음성이 다소 섬뜩하게 들렸다.“부 내관님?”부 내관을 본 순간 무관옥의 눈동자가 급격히 수축하였다. 좀 전까지 드러냈던 거만한 태도는 순식간에 사라졌다.눈앞에 서 있는 사람은 비록 관직은 높지 않지만, 그 지위는 매우 특별한 존재였다.그는 천자의 측근이자 대내 제1고수로 꼽히는 인물이고 경천 랭킹 10위에 오른 절정 고수 부규환이었다.“군신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 문제는 이제 제가 처리하겠습니다.”부규환은 고개를 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