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만요!”중년 남자가 가려고 하자 단소홍이 달려가 말했다.“장 매니저님, 저는 몰라도 사도현은 아실 거예요.”“사도현?”중년 남성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사도현과 무슨 사이지?”“사도현은 제 남자친구예요.”단소홍은 자랑스럽게 웃으며 계속 말했다.“장 매니저님, 저는 오빠가 이미 당신에게 미리 인사를 했다고 믿어요. 이제, 우리는 사무실에 들어갈 수 있겠죠?”“못 들어갑니다.”중년 남성은 냉담한 표정으로 말했다.“아까와 같습니다. 저를 만나려면 미리 예약을 해야 해요.”“네?”단소홍은 어리둥절해하며 깜짝 놀랐다.“장 매니저님, 방금 잘 못 들으셨나요? 전 사도현의 여자친구예요, 이번에 온 것은 당신과 사업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입니다.”“그게 뭐 어때서요?”중년 남자는 냉소하듯 말했다.“당신은 말할 것도 없고, 사도현이 직접 와도 미리 예약해야 해요!”“당신...”단소홍은 잠시 화가 치밀었다.단소홍은 상대방이 자기를 거절할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심지어 사도현의 체면도 주지 않는다.“단소홍, 사도현의 명성이 여기선 잘 안되는 것 같군.”유진우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단소홍은 눈꼬리를 실룩거리더니 안색이 좀 안 좋게 변했다.자신만만해서 왔는데,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단소홍은 중년 남자를 바라보며 여전히 단념하지 않았다.“장 매니저님, 같은 처마 밑에서 시도 때도 없이 보는데, 설마 도현 씨와 사이가 틀어질 생각이세요?”“사이가 틀어지면 뭐 어때요? 빨리 꺼지세요, 그렇지 않으면 제가 무례하다고 탓하지 마요.”중년 남자가 외쳤다.“다... 당신 정말 사람을 너무 업신여기네요!”단소홍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고 가슴이 심하게 출렁거렸다.“장봉원! 너 정말 위풍 잘 떠네!”그때 찬바람과 함께 사도현이 당당히 걸어 들어왔다.사도현을 보자 단소홍은 매우 기뻐서, 즉시 사도현 쪽으로 다가갔다.“오빠, 마침 잘 왔어, 이 사람이 방금 나를 업신여겼어.”“내가 다 봤어. 이제 나한테 맡겨.”
“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말... 말도 안 돼!”사도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비록 사도현은 아무런 업적이 없지만, 줄곧 실수한 적이 없었다. 게다가 빽이 있어 평소에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회사를 활보한다.그의 인맥으로는 감원하더라도 그가 해고당할 리는 없었다.도대체 무슨 상황이지?“오빠, 잘렸어?”표정이 달라진 사도현을 보며 단소홍도 놀란 표정이었다.‘이 사업 쉽게 해결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어? 왜 지금 사업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일자리를 잃어버렸지?”“문제가 생겼나 보다.”이청아는 생각에 잠긴 듯 얼굴을 찡그렸다.사도현이 도움을 줄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안되는 것 같다.“장봉원! 솔직히 말해, 네가 몰래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거 아니야?”사도현은 무섭게 고개를 들었고 눈빛은 무서웠다.“나는 너에게 아무런 원한도 없는데, 왜 너를 해치려 하겠어? 게다가, 나도 그럴만한 실력이 없으니, 너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아보는 게 좋을 거야.”장봉원은 담담하게 말했다.장봉원은 사도현 같이 제대로 하지 않고 눈치껏 하는 척만 하는 놈은 진작부터 눈에 거슬렸다.오늘날 해고된 것은 너무도 통쾌했다.“헛소리! 네가 아니면 누구겠어? 틀림없이 네가 고발했어!”사도현은 사납게 굴었다.재직 몇 년 동안 사도현은 확실히 적지 않은 돈을 삼켰으니, 아마도 약점을 잡혔을 것이다.“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도 어쩔 수 없어.”장봉원은 설명하기 귀찮았다.어차피 상대방은 회사 사람도 아니니 지금은 걱정할 게 없었다.“장봉원! 너 역시 독하네!”사도현은 좋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하지만 네가 이겼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야. 사실대로 말해줄게, 난 회사에 든든한 빽이 있어! 오늘 퇴사해도 내일 다시 나올 수 있어!”“어? 그래? 네 빽이 누군데?”장봉원이 되물었다.“흥! 말하면 네가 놀랄까 봐 걱정돼. 이 회사 대표가 내 친삼촌이야!”사도현이 거만하게 말했다.“어쩐지 너 같은 사람이 매니저가 되더라니, 이렇게 든든한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자기를 내세우니 역시나 체면이 섰다.딩동.그때 장봉원의 휴대전화에 문자 한 통이 떴다.장봉원은 고개를 숙여 보더니 순간 멍해졌다. 거듭된 확인 끝에 그는 비로소 웃음을 터뜨렸다.“왜 웃어?”사도현은 좋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사도현, 네 단꿈은 아마도 물거품이 되겠네. 방금 회사로부터 네 삼촌이 이미 해고되었다는 통지를 받았고, 지금 너와 삼촌 두 사람은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어.”장봉원이 말했다.“헛소리!”사도현이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우리 삼촌은 대표인데 누가 감히 우리 삼촌을 해고할 능력이 있겠어?”“그야 당연히 손 회장님이시지.”장봉원은 당당하게 말했다.“말도 안 되는 소리!”사도현은 전혀 믿지 않았다.“우리 삼촌은 손 회장님의 유능한 인재인데 멀쩡한 사람이 어떻게 해고될 수 있어?너 여기서 괜히 겁주지 마!”“믿거나 말거나.”장봉원은 쓸데없는 말을 하기 귀찮았다.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사도현의 빽도 이미 끝난 게 분명하다.“흥, 나랑 여기서 심술부리는 거지? 좋아! 삼촌한테 전화해서 잘 처리하라고 할게!”사도현이 휴대전화를 꺼내서 일러바치려 했다.“사도현!”그때 문 앞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곧이어 양복을 입은 남성이 기세등등하게 뛰어 들어왔다.“삼촌?”사도현은 눈을 반짝이며 냉소했다.“넌 죽었어! 우리 삼촌 이미 도착했어. 오늘 아무도 널 구할 수 없어!”“삼촌, 마침 잘 오셨습니다. 장 매니저가 겉과 속이 다르게 일부러 저를 모함했으니, 이번에는 반드시 저를 위해 나서주셔야 합니다.”“나서라고? 나서기는 개뿔!”남자는 화가 치밀어 올라 사도현의 뺨을 후려쳤다. 그 흉악한 모습은 마치 무슨 깊은 원한이 있는 듯했다.“삼촌, 왜 때려요?”사도현은 얼굴을 가린 채 어리둥절했다.단소홍 몇 사람도 서로 쳐다보면서 이유를 몰랐다.“왜 때리냐고? 난 때리다 못해 널 죽여버리고 싶다!”남자는 눈시울을 붉히며 욕설을 퍼부었다.“너 도대체 어떤 사람의 미움을 산 거니? 내
“어떻게 그럴 수 있지?”사도현은 주저앉아 모든 의욕을 상실했다.사도현은 자기가 함부로 욕한 사람이 정말 손기태이자 그의 직속 상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이제 사도현은 해고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삼촌도 따라서 재수가 없게 되었다. 삼촌과 조카 두 사람은 모두 끝장났다.“이놈아! 뭘 멍하니 서 있어? 나랑 같이 손 회장님께 사죄하러 가야지!”남자는 사도현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그대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폭력적으로 잡아당기며 빠른 걸음으로 문을 나섰다.사도현은 메추라기처럼 목을 움츠리며 감히 저항하지 못했다.이 장면을 보고 단소홍은 이미 놀라 말하지 못했다.방금까지 위세를 떨치던 사도현이 이렇게 낭패하게 된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렇게 미쳐 날뛰더니 언젠가 재수 없을 줄 알았다, 쌤통이다!”장봉원은 ‘흥’ 하고 돌아서서 사무실로 들어갔다.“보아하니 사도현도 제 코가 석자네.”유진우는 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이게 다 너 때문이야! 네가 아니었다면 도현 씨가 어떻게 해고당했을 수 있어?”단소홍은 화가 잔뜩 났다.“이것도 내 탓이냐? 너 정말 어처구니없다.”유진우는 고개를 저었다.사도현이 이렇게 된 것은 모두 스스로 화를 자초한 것이다.빽이 있다고 온갖 횡포를 부리며 아무도 안중에 두지 않았기에, 언젠간 재수 없게 될 것이 분명했다.“자, 두 사람 좀 작작 해, 지금 급선무는 어떻게 난관을 헤쳐 나가는 것이야.”이청아는 화제를 돌렸다.“언니, 지금 도현 씨가 해고되고 장 매니저도 체면을 주지 않으니, 우리는 돌아가서 다시 상의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단소홍은 한숨을 쉬었다.오늘은 정말 일이 순조롭지 않았다. 이중으로 손해를 보다니.“여기까지 왔는데 왜 돌아가?”유진우는 담담하게 말했다.“그냥 하나의 사업 아니야? 나한테 맡겨.”“너한테?”단소홍은 위아래로 힐끗 쳐다보더니 하찮다는 듯 말했다.“네가 뭔데? 우리 오빠도 못하는 일을 설마 네가 할 수 있다는 거야? 웃기지 마!”“사도현이
말이 끝나자마자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사장실 문이 갑자기 또다시 열렸다.뒤따라 장봉원이 몹시 초조해하며 달려 나왔다. 너무 급해서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혹시 어느 분이 유진우 씨입니까?”장봉원은 긴장한 얼굴로 두리번거렸다.“저예요.”유진우는 두 걸음 앞으로 나갔다.“유진우 씨, 정말 죄송합니다. 방금 제가 큰 사람을 알아보지 못해 대접이 소홀했습니다. 너그럽게 봐주세요.”장봉원은 빠른 걸음으로 달려가 방금전의 오만함을 떨치고 유진우에게 깊이 사과했다.“어?”이렇게 공손한 태도에 이청아와 단소홍은 모두 멍해졌다.방금 장봉원이 사도현의 체면도 살려 주지 않았는데, 어찌 눈 깜짝할 사이에 유진우에게 비굴하게 아첨하는 거지?이 상황 뭐지?“장 매니저님, 과찬입니다. 저희 바로 사업 얘기나 나눠요.”유진우는 직설적으로 말했다.“네네...”장봉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네.”유진우는 빙긋 웃더니 멍해 있는 이청아를 끌고 사무실로 들어갔다.장봉원은 먼저 유진우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에게 차 한 잔을 따라준 뒤 곧바로 비서에게 계약서를 인쇄하라고 지시했다. 감히 조금도 소홀히 하지 못했다.어쨌거나 손 회장님께서 눈앞의 유진우에게 시중을 잘 들라고 거듭 신신당부했기 때문이다.결국, 10분도 채 걸리지 않아 사업이 순조롭게 성사되었다.이청아가 계약서를 들고 사무실을 나왔을 때, 이청아 자신도 약간 믿기지 않았다.이청아는 일이 뜻밖에도 이렇게 순조로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쓸데없는 말도 없었고, 쓸데없는 인사치레도 없었다. 그저 이청아가 서명만 하면 천억 원어치의 계약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참으로 놀랄 만한 일이었다. 만약 직접 보지 않았다면, 이청아는 상대방이 조작했는지 의심했을 것이다.“진우 씨, 어떻게 한 거야?”이청아는 업적들을 보고 얼굴에 경악이 가득했다.“내가 방금 말했어, 손기태 회장님와 친분이 있다고. 그래서 장 매니저님이 내 체면을 좀 살려준 것 같아.”유진우는 담담한 표정을
그날 오후, 조씨 별장.유진우가 전화를 받고 현장에 도착했을 때 무장 군대가 조씨 별장 전체를 물샐틈없이 포위하고 있었다.백여 명의 조씨 가문 엘리트들이 문 앞에 선 채 무장 군대와 대치하고 있었고 그 어느 쪽도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조씨 가족들은 잘 들어라. 지금 당장 흉악범을 내놓지 않으면 전부 같은 죄로 처리하겠다!”맨 앞에 선 장교가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목소리가 어찌나 우렁차고 쩌렁쩌렁한지 메아리가 한참 울려 퍼졌다. 그의 뒤로 많은 병사들이 서 있었는데 저마다 싸늘한 표정으로 총을 들고 있었다. 장교의 명령 한마디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쏠 기세였다.“뭐야?”일촉즉발의 상황에 유진우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멀쩡한 조씨 가문이 왜 갑자기 군부대를 건드린 거지?’“장교님,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유진우가 다가와 물었다.“흉악범을 잡으라는 명을 받고 왔습니다. 연관이 없는 자들은 당장 물러가세요!”장교가 매섭게 호통쳤다.“유진우 씨, 왔어요? 얼른 안으로 들어오세요.”조씨 가문의 집사는 유진우를 단번에 알아보고 아랫사람더러 길을 내주라고 했다. 유진우가 안으로 들어온 후 다시 물샐틈없이 막아섰다.“안에 있는 자들은 잘 들어라. 계속 흉악범을 내놓지 않고 질질 끈다면 안으로 쳐들어가겠다!”장교의 마지막 경고에도 조씨 가문 엘리트 고수들은 전혀 물러서지 않았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진우 씨, 큰 아가씨는 회의실에 계십니다. 저 따라오세요.”조씨 가문 집사는 장교의 경고 따위 안중에도 두질 않고 앞장서서 길을 안내했다. 그의 뒤를 따르는 유진우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그 시각 회의실 안에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조씨 가문의 핵심 인물들이 한곳에 모여 귓속말로 뭐라 속삭였다.조군해는 걱정 어린 얼굴로 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고 조군표는 초조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회의실 안에서 안절부절못했다. 그리고 조선미 등 몇몇은 정신을 잃고 쓰러진 조군수의 옆을 지켰다.“선미 씨, 대체
“아빠, 술을 마신 것 외에 다른 일은 더 없었어요?”조선미가 계속하여 캐물었다.“그게 무슨 뜻이야?”조군수는 어안이 벙벙했다.“아빠, 기억을 잘 더듬어봐요. 그 어떤 것도 놓쳐서는 안 돼요.”조선미가 진지하게 말했다.“필름이 끊긴 것 같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 대체 왜 그래?”조군수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아빠, 어젯밤에 안 부장관님의 딸이 죽었어요.”조선미가 생각지도 못한 얘기를 내뱉었다.“뭐? 죽었다고?”조군수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어떻게 그런 일이...”“구체적인 상황은 아직 몰라요. 하지만 밖에서 아빠가 안 부장관님의 딸을 죽였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요.”조선미가 말했다.“내가 죽였다고?”조군수는 휘둥그레진 두 눈으로 연신 고개를 내저었다.“아니야, 말도 안 돼! 내가 아무리 술을 많이 마셔도 사람을 죽일 리는 없어!”조군수의 주량이 별로이긴 했지만 술버릇은 없었다. 평소 술에 취하면 바로 잠자리에 들곤 했다.“저도 믿지 않아요. 하지만 아빠가 사람을 죽였다고 증언한 목격자가 있어요. 지금 안 부장관님의 군대가 별장 문 앞을 포위하고 있는데 당장이라도 쳐들어올 기세예요. 진짜 그런 적 없는지, 한 번 더 잘 생각해봐요.”조선미가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부장관은 서울의 3인자다. 그의 명령 한마디면 조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진짜 기억이 안 나. 하지만 난 날 믿어. 난 절대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야.”조군수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아이고, 셋째야, 네가 널 믿어서 무슨 소용이야? 문제는 안 부장관님이 믿질 않잖아.”조군해가 고개를 내저었다.“셋째야, 넌 생일 연회에 가서 무슨 술을 필름이 끊길 정도로 마셔? 정말 자제력이라고는 하나도 없구나.”조군표는 한스러워하며 그를 꾸중했다. 가뜩이나 집에 처리해야 하는 일이 산더미라 골치가 아픈데 이런 사고까지 쳤으니 그야말로 설상가상이었다.“작은아버지, 정말로 작은아버지의 짓이라면 당장 가서 죄를 인정하세요. 가족들에게 피해를 주지
“쳐들어왔다고?”조선미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당장 막으라고 해!”진실이 드러나기 전에 절대로 그들이 아버지를 잡아가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잠깐.”조군수가 나가려는 집사를 갑자기 불렀다.“들어오라고 해. 아무도 막지 마!”“아빠,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조선미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내 결백을 증명해야지.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두려워할 필요가 있어?”조군수의 목소리는 아주 우렁찼다.“하지만...”“저들을 막는다면 내가 죽어도 누명을 벗지 못할거야.”조군수가 진지하게 말했다.안 부장관과 공개적으로 맞선다는 건 가볍게 말해서 체포하려는 그에게 저항하는 것이고 심각할 경우 반란을 일으키는 거나 다름없다.조씨 가문은 그런 죄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셋째 말이 맞아. 억지로 버티는 것도 답이 아니야. 조씨 가문 제자들에게 전부 물러서라고 전해!”조군표가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네!”집사는 그의 말대로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조선미 일행은 시름이 놓이지 않았지만 지금 이런 때일수록 불난 집에 부채질하면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진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조군수는 어디 있어?”그때 제복 차림의 장교가 수많은 무장 병사와 함께 위풍당당하게 회의실 앞까지 쳐들어왔다. 정규군들이 내뿜는 살기에 저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했다.“제가 조군수입니다. 장교님, 무슨 일로 절 찾으십니까?”조군수는 덤덤한 표정으로 한 무리의 사람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부장관님의 딸을 성폭행하고 무참하게 살해한 조군수 당신을 잡으러 왔다!”장교가 싸늘하게 말했다.“헛소리하지 말아요. 우리 아빠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어요. 당신들이 뭔가 잘못 안 거라고요!”조아영이 나서서 반항했다.“장교님, 우리 남편은 줄곧 품행이 단정하고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라 절대 그런 몹쓸 짓을 할 리가 없어요. 누군가 우리 남편을 모함한 게 틀림없어요.”진서현은 사리에 근거하여 힘껏 논쟁했다.“맞아요! 다른 사람이 족장님을 모함했어요.”조씨 가문 사람들도 너도나도
“네 말은 누군가 4대 제후가 동시에 반란을 일으키게 조종하고 있단 말이야?”이의진이 얼굴을 찌푸렸다.“맞아요.”유천우가 수심에 찬 얼굴로 말했다.“지금 서경에서 4대 제후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사람이죠.”“유태범!”이의진은 깊게 고민하지도 않고 말했다.“작은아버지는 야심이 크고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이에요. 4대 제후의 손을 빌려서 우리가 병부를 내놓게 압박하고 있는 거예요.”유천우가 눈을 가늘게 뜨고 분석했다.“만약 우리가 따르지 않는다면 4대 제후는 반란을 일으켜 우리가 군대를 동원하게 압박한 다음 유태범이 중간에서 방해하면서 우리한테 불리하게 할 겁니다. 우리가 반란을 진압하는 데 실패하면 서경왕부의 위엄이 크게 손상될 거예요. 그러다가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해질 때 구세주처럼 나타나서 백성들을 구하고 4대 제후를 제압할 계획인 거죠. 그때가 되면 유태범은 만인의 지지를 받아 새로운 왕이 될 겁니다. 민심을 얻으면 천하를 얻는 것과 같다는 말도 있듯이 유태범이 아버지와 같은 자리에 서게 되면 새로운 서경왕이 되겠죠. 아주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세웠네요.”유천우의 표정이 눈에 띄게 심각해졌다. 유태범이 꾸민 건 음모가 아니라 공공연한 모의였다. 하지만 상대가 나쁜 짓을 꾸미고 있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는데도 해결하기 어려웠다. 이게 바로 공공연한 모의의 무서운 점이다.“그렇다면 유태범이 진작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거네.”이의진이 얼굴을 찌푸렸다.“지금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해결해야 한다는 거야. 군대를 동원할 수도 없고 설득도 불가능하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해?”“나머지 4대 제후와 아버지의 옛 부하들과 손을 잡아야만 유태범과 겨룰 수 있을 겁니다.”유천우가 대답했다.“일리 있어.”이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지금 당장 사람을 보내서 나머지 4대 제후를 모셔오도록 할게. 같이 모여서 상의하는 게 좋겠어.”“어머니, 제가 직접 갈게요. 그래야 성의도 충분히 보여줄 수 있죠.”유천우가 직접 나섰다. 나머지 4대 제후
“형, 난 진짜 안 돼요. 왕위를 물려받을 사람은 형밖에 없어요.”유천우의 얼굴에 조급한 기색이 드러났다.“됐어. 왕위 얘기는 나중에 하자. 지금 안팎으로 불안이 끊이지 않아. 일단 문제부터 해결하는 게 급선무야.”유진우가 화제를 돌렸다.“형이 나서서 이끌어준다면 내가 최선을 다해 도와줄게요.”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난 지금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없어.”그러자 유진우가 고개를 내저었다.“유태범 일당이 아직 내가 서경으로 돌아온 걸 모르고 있어서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어. 내가 돌아온 걸 몰라야 유태범이 무슨 꿍꿍이라도 꾸민다면 제때 해결할 수 있지. 그리고 호룡각의 잔당들도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있어. 기회를 봐서 싹 다 일망타진할 거야.”“그런 거였군요.”유천우는 그제야 모든 걸 깨달았다.“알겠어요. 그럼 서경왕부에서 공개적으로 하는 일은 나한테 맡기고 형은 보이지 않는 음모들을 해결해주세요.”“그래. 그렇게 하자.”유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아 참. 그리고 이거.”유천우는 문득 뭔가 떠올랐는지 금색 영패 하나를 꺼내 유진우에게 건넸다.“이건 내 군령이에요. 이것만 있으면 내 결사대원 800명을 동원할 수 있고 필요한 순간에 꽤 도움이 될 겁니다.”그의 결사대원 800명은 모두 엄선해서 뽑은 고수들이었다.유천우가 태어난 순간부터 이의진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몰래 그들을 훈련시키면서 힘을 비축했다.20년이 지난 지금 결사대원 800명은 무서울 정도로 성장했다.“알았어. 영패는 일단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돌려줄게.”유진우도 거절하진 않았다.지금 이청성의 도움을 받고 있긴 했지만 호룡각의 잔당들에 비하면 아직 역부족이었다. 이젠 유천우의 결사대원 800명이 더해졌으니 싸울 힘이 생겼다.“천우야!”그때 문밖에서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조금 전 나갔던 이의진이 다시 다급하게 빈소로 들어왔다. 유진우는 재빨리 가면을 쓰고 근위병인 척 옆에 섰다.유천우와 마음을 털어놓고 얘기할 수 있었던 건 형제끼리의 믿음 때문이
“형?”유천우는 인피 가면을 벗은 남자를 보자마자 흠칫 놀라더니 이내 기쁨에 겨워했다. 그 남자는 다름 아닌 서경왕부에 위장 잠입한 유장혁이었다.“많이 컸구나, 천우야. 이젠 혼자서도 일을 척척 해내고.”유진우는 배다른 동생 유천우를 흐뭇하게 쳐다보았다.사실 조금 전 유천우와 이의진의 얘기를 전부 다 들었다. 유천우가 자신을 믿어준 것에 대해 무척이나 고마웠다. 물론 이의진이 걱정하는 마음도 충분히 이해는 되었다.지금까지 권력을 손에 넣으려고 형제끼리 물고 뜯고 부자끼리 서로 죽이는 걸 수두룩하게 봐왔다. 자기 아들을 걱정하는 건 당연했다.“형, 서경에는 언제 왔어요?”유천우가 물었다.“이틀 정도 됐어.”유진우가 대답했다.“아버지 돌아가신 거 알았어요?”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유진우는 빈소의 영정사진을 보고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부자는 1년 전 강능에서 만났다. 그런데 그 만남이 마지막이 될 줄은 생각지 못했다. 다시 만났을 때 유진우는 빈소에 서 있었고 유만수는 관 속에 누워있었다.‘이건 뭐 운명의 장난도 아니고...’유진우는 관 앞으로 걸어가 반쯤 열린 관뚜껑 사이로 그 안에 누워있는 유만수를 보았다. 얼굴이 평온한 걸 보니 고통 없이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았다.하지만 어찌 된 건지 그렇게 미워했던 유만수의 얼굴을 본 순간 슬픔이 밀려오기 시작했다.‘내가 만약 서경에 빨리 돌아왔더라면, 빨리 만났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까? 왜?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유진우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고 눈시울이 저도 모르게 붉어졌다.“형, 사실 최근 2년 사이 아버지 건강이 점점 나빠져서 특효약으로 연명하셨어요. 의사는 아버지가 천인오쇠라고 하면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어요. 천천히 쇠약해져서 죽는 것보다 이 결과가 아버지한테는 오히려 해방 같은 거라고 볼 수 있어요.”유천우가 울먹거리며 말했다.“범인은 잡았어?”유진우가 돌아서서 물었다.“홍복홍이 지금 조사하고 있어요.”유천우가 대답했다.“서경왕부에 숨은 스파
그래야만 지금 앉아 있는 이 자리라도 지킬 수 있다.지금 왕위를 이어받을 자격과 능력을 갖춘 사람은 표기 대장군 유태범밖에 없었다.첫째로 유태범은 유씨 가문 사람이라 왕족에 속했기에 명분이 정당했다. 둘째로 표기 대장군으로서 서경의 절반에 달하는 군대를 거느리고 있어 권력이 하늘을 찔렀다. 셋째로 유태범은 오랜 시간 동안 힘을 키워왔다. 인맥, 위신, 공로 모두 왕위에 오르기에 충분했다.현재 유태범이 모든 사람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적지 않은 관원들은 애도를 표한 후 바로 대장군 저택으로 가서 유태범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주었다.이러한 움직임은 당연히 서경왕부의 감시망을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의진은 그들을 제압할 힘이 없었다.“어머니, 벌써 종일 여기 계셨어요. 들어가서 쉬세요. 이러다가 몸이 상하실까 걱정됩니다.”수심과 피곤이 가득한 어머니의 얼굴을 본 유천우가 참다못해 한마디 했다.“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는데 내가 어찌 편히 쉴 수 있겠어.”이의진이 고개를 내저었다.“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까 더 조심해야죠. 서경왕부가 흔들리고 있는 지금 왕비인 어머니가 버티셔야 합니다. 절대 쓰러져선 안 돼요.”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하지만...”이의진은 뭐라 더 얘기하고 싶었지만 유천우가 가로챘다.“어머니, 이번에는 제 말을 들어주세요. 먼저 들어가서 쉬고 내일 아침에 다시 아버지 곁을 지켜도 괜찮아요.”이의진이 대답하기도 전에 유천우는 도우미 두 명을 불러 명령을 내렸다.“너희 둘, 어머니를 방으로 모시고 잘 보살펴드려.”“알겠습니다.”두 도우미는 대답한 후 이의진을 부축했다. 무릎을 하도 오랜 시간 꿇고 있어 다리가 저린 나머지 제대로 서지도 못했다.“천우야, 너도 몸 잘 챙겨. 절대 방심해선 안 돼.”이의진이 당부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유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가 나가는 걸 본 후에야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렸다.“다들 돌아가. 여긴 나 혼자 지키면
그 시각 서경왕부 문 앞.유태범 등 3인은 한 무리의 근위병들을 이끌고 서둘러 걸어 나왔다.서경왕부를 떠난 후 조군영이 참다못해 물었다.“대장군님, 이의진 모자가 주제도 모르고 저렇게 날뛰는데 계속 가만히 내버려 둬야 합니까?”“당연히 내버려 둘 순 없지. 하지만 너무 대놓고 움직여서도 안 돼. 흑용군의 대부분 고급 장교들이 서경왕부에 충성해서 정말 싸우기라도 한다면 우리한테 좋을 게 없어.”유태범이 실눈을 뜨고 말했다.“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조군영이 또 물었다.“대놓고 움직일 수 없다면 몰래 압력을 가해야지.”유태범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서경에 내란이 일어서 서경왕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진정한 리더가 누구인지 알게 될 거야.”“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사람을 보내서 이간질시킬게요. 백성들의 원한이 커져서 서경왕부도 감당이 안 될 때 대장군님이 구세주처럼 등장하는 겁니다. 그때가 되면 서경의 백성들은 대장군님께 고마워할 것이고 새로운 서경왕으로 모시겠죠.”눈치가 참 빠른 조군영이었다.“맞아. 아주 영특하구나, 너. 나중에 내가 서경왕 자리에 앉으면 표기 대장군 자리는 네 것이 될 거야.”유태범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합니다, 대장군님.”조군영은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얼른 움직여. 빠를수록 좋아. 절대 그 어떤 흔적도 남겨선 안 된다는 거 명심해.”유태범이 신신당부했다.“알겠습니다. 제가 깔끔하게 처리하겠습니다.”조군영은 인사를 올린 후 자리를 떠났다.“대장군님, 일반적인 내란이라면 서경왕부의 뿌리를 흔드는 건 불가능할 거예요. 반드시 강력한 무언가가 있어야 해요.”고원이 귀띔했다.“그건 나도 알고 있어.”유태범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동안 난 내 사람을 몰래 키워왔어. 8대 제후 중에 절반이 내 사람이야. 내 명령 한마디면 주저하지 않고 날 도와줄 거야.”“진작 준비하고 계셨군요. 제가 괜한 걱정을 했네요.”고원이 웃으면서 말했다.“걱정하지 마. 내가 서경왕이 되면 절대 섭섭지 않게 해줄게.”
“유태범은 오랫동안 야심을 숨겨왔어요.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으니 이 기회에 무조건 권력을 빼앗으려고 할 겁니다. 이 일 아직 끝나려면 멀었어요.”유천우가 수심에 찬 얼굴로 말했다.“맞아. 대놓고 움직이진 못해도 뒤에서 온갖 수단을 동원할 거야. 앞으로 적지 않은 문제가 생길 게 분명해.”이의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위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절대 함부로 하지 못했을 것이다.“형이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유천우가 한탄하듯 말했다.“천우야, 네 능력도 네 형 못지않아. 네 형이 할 수 있는 일은 너도 할 수 있을 거라 믿어.”이의진이 그를 격려했다.“어머니, 제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어요. 형님에 비하면 한참 부족합니다.”유천우가 고개를 내저었다.“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하지 마.”이의진이 엄격한 얼굴로 말했다.“네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났어. 장례식이 끝난 후에 폐하께 말씀드려서 너한테 왕위를 물려주게 할 거야. 앞으로 서경왕은 너고 그 중책을 맡아야 해.”“어머니, 왕위는 형 거예요. 전 그 자리를 물려받을 생각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서경왕은 형만이 물려받을 자격이 있다고요.”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천우야, 다른 일은 남한테 양보해도 이건 절대 안 돼!”이의진이 어두운 목소리로 호통쳤다.“그 자리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꿈에 그리는 자리인지 알아? 놓치면 평생을 후회할 거라고!”“전 제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요. 저한테 있어서 권력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아버지처럼 매일 애쓰고 힘들게 사는 것보다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유천우가 고개를 내저었다.‘왕이 되면 좋을 게 뭐가 있다고. 걱정거리만 태산일 텐데. 그럴 바엔 맨날 먹고 놀면서 편히 살겠어. 그게 더 좋은 거 아닌가?’“이 녀석아, 일이 네 생각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전에 자유롭게 살 수 있었던 건 다 네 아버지가 있어서야.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금 아무 권력도 손에 쥐지 않는다면 나중에 아주 처참한 결말을 맞이할 거란
“유장혁?”그 소리에 주변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한때 유씨 가문의 천재는 이름을 널리 떨쳤었다. 그런데 10년 전 자금성의 난이 터진 후 완전히 종적을 감추었고 현재까지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런 그의 이름을 갑자기 들으니 놀랄 만도 했다.“도련님,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세자 전하의 생사도 불투명한 데다가 어디 있는지도 아무도 몰라요. 그런 분한테 서경왕의 자리를 맡긴다는 건 너무 터무니없는 소리 아닌가요?”조군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두 손까지 펼쳐 보였다.“그러게요, 도련님. 제발 현실을 잘 알고 말씀하세요. 세자 전하께 기댈 바엔 차라리 대장군님께 기대는 게 더 낫죠.”고원도 나서서 맞장구를 쳤다.유천우가 자기 자신을 얘기할 줄 알았는데 실종된 지 10년이나 된 사람을 얘기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정말 이보다 더 터무니없는 얘기는 없었다.“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형도 꼭 돌아올 겁니다. 그때 가서 형이 왕위를 이어받아도 문제없죠.”유천우가 싸늘하게 말했다.“도련님, 제가 하는 말이 거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만약 세자 전하께서 이미 돌아가셨으면 어떡해요? 서경왕의 자리를 계속 비워둘 작정인가요?”조군영이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형님 죽지 않았고 멀쩡하게 살아있어요. 그러니까 조 장군님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유천우가 말했다.“살아있다면 지금 어디 계시는 거죠? 왜 나타나지 않는 겁니까?”조군영은 일부러 주변을 두리번거렸다.“형님한테 소식을 전했으니 꼭 올 겁니다.”유천우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도련님, 설마 지금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는 건 아니죠?”조군영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위왕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퍼지면 서경 전체가 크게 흔들릴 거예요. 기다릴 시간이 많지 않다고요. 지금 당장 그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맞아요, 도련님. 대국을 생각하셔야죠!”고원도 나서서 유천우를 설득했다.“형한테 자리를 물려주는 건 아버지의 유언이에요. 지금 명령을 거역하겠단 겁니까?”
사람들이 뒤돌아보니 거친 삼베옷을 입고 상복 모자를 쓴 젊은 남자가 차가운 얼굴로 걸어오고 있었다.남자는 위엄이 넘쳤고 온몸에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오랜 시간 전장을 누빈 조군영과 고원마저도 그를 보자마자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표정이 진지해졌다.그 남자는 다름 아닌 유만수의 작은 아들 유천우였다.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유천우는 온 집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하여 예전에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도 많이 저질렀었고 서경의 사고뭉치라 불리기도 했다.그런데 최근 2년 동안 유천우는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변한 듯 더는 빈둥빈둥 놀지 않고 군에 들어가 열심히 살기 시작했다.처음에 사람들은 유천우가 군대에서 3일도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어릴 적부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산 도련님이 군대의 혹독한 훈련을 버틴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그런데 뜻밖에도 유천우는 군대에서 자리를 잡았고 공까지 세웠다.짧은 2년 사이에 병사에서 흑용군의 부장으로 성장했다. 든든한 배경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무척이나 놀라운 성과였다.사람들은 그제야 유천우가 응석받이로 자란 도련님이 아니라 군사 천재라는 걸 알게 되었다.“천우야, 드디어 온 거야?”아들을 보자마자 이의진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겨우 가라앉았던 슬픔이 다시 저도 모르게 밀려왔다.“어머니, 소식 다 들었어요. 제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유천우는 어머니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군영과 고원에게 시선을 옮겼다.“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이렇게 몰아붙이는 겁니까?”“그게...”조군영은 고원의 눈치를 슬쩍 봤다가 어쩔 수 없이 말했다.“도련님, 오해하지 마세요. 저희도 대국을 위해서 이러는 겁니다. 현재 서경왕부에 리더가 없어서 누군가 나서서 이끌어가야 합니다. 안 그러면 많은 문제가 생길 거예요.”“맞아요, 도련님. 대국을 생각하셔야죠.”고원은 충성을 다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대국?”유천우는 코웃음을 치고는 더는 두 사람을 거들떠보지 않
“서경 대원수의 직위는 매우 중요합니다. 내부 투표를 거칠 뿐만 아니라 폐하께 보고하여 최종적으로는 폐하의 결정을 받아야 해요. 우리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어요.” 이의진의 눈빛이 경계로 가득했다.유태범이 왔을 때 그녀는 처음에는 형제 간의 정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조군영과 고원의 몇 마디 말에 그녀는 갑자기 깨달았다. 일이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유태범은 흑용군에서 유만수 다음가는 위망을 가지고 있었다.표기대장군으로서 그는 많은 심복 장수들을 거느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절반의 병권도 장악하고 있었다.왕이 세상을 떠난 후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사람은 유태범이 분명했다.가장 중요한 것은 유태범이 지금 이미 자신의 야심을 드러냈다는 점이다.왕이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권력을 탈취하려 하다니, 그녀는 그의 불순한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심지어 유만수의 죽음이 이 자들과 호룡각 잔당들이 암묵적으로 결탁한 결과일지도 모른다!만약 유태범이 병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무시무시할 것이다.“마마, 급할 때는 권력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 이런 상황에서 어찌 폐하의 결정을 기다릴 시간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반드시 빨리 국면을 안정시켜야 합니다.” 조군영이 계속해서 말했다.“맞습니다!”고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장수가 밖에 있으면 군령도 받지 않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폐하는 상황을 전혀 모르니 결정을 내릴 수 없습니다. 반드시 우리가 스스로 결정해야 하며 그래야만 소인배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폐하에게 보고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내부 투표를 거쳐야 합니다. 그래야만 모두가 승복할 수 있어요.” 이의진이 다시 말했다.“투표라니요? 이게 투표할 일입니까? 전 서경을 둘러봐도 대장군님보다 원수 자리에 더 적합한 분이 누가 있습니까?” 조군영이 말했다.“그렇습니다, 왕비마마! 공적으로 보나, 위망으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무공으로 보나 어르신을 제외하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