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술을 마신 것 외에 다른 일은 더 없었어요?”조선미가 계속하여 캐물었다.“그게 무슨 뜻이야?”조군수는 어안이 벙벙했다.“아빠, 기억을 잘 더듬어봐요. 그 어떤 것도 놓쳐서는 안 돼요.”조선미가 진지하게 말했다.“필름이 끊긴 것 같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 대체 왜 그래?”조군수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아빠, 어젯밤에 안 부장관님의 딸이 죽었어요.”조선미가 생각지도 못한 얘기를 내뱉었다.“뭐? 죽었다고?”조군수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어떻게 그런 일이...”“구체적인 상황은 아직 몰라요. 하지만 밖에서 아빠가 안 부장관님의 딸을 죽였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요.”조선미가 말했다.“내가 죽였다고?”조군수는 휘둥그레진 두 눈으로 연신 고개를 내저었다.“아니야, 말도 안 돼! 내가 아무리 술을 많이 마셔도 사람을 죽일 리는 없어!”조군수의 주량이 별로이긴 했지만 술버릇은 없었다. 평소 술에 취하면 바로 잠자리에 들곤 했다.“저도 믿지 않아요. 하지만 아빠가 사람을 죽였다고 증언한 목격자가 있어요. 지금 안 부장관님의 군대가 별장 문 앞을 포위하고 있는데 당장이라도 쳐들어올 기세예요. 진짜 그런 적 없는지, 한 번 더 잘 생각해봐요.”조선미가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부장관은 서울의 3인자다. 그의 명령 한마디면 조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진짜 기억이 안 나. 하지만 난 날 믿어. 난 절대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야.”조군수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아이고, 셋째야, 네가 널 믿어서 무슨 소용이야? 문제는 안 부장관님이 믿질 않잖아.”조군해가 고개를 내저었다.“셋째야, 넌 생일 연회에 가서 무슨 술을 필름이 끊길 정도로 마셔? 정말 자제력이라고는 하나도 없구나.”조군표는 한스러워하며 그를 꾸중했다. 가뜩이나 집에 처리해야 하는 일이 산더미라 골치가 아픈데 이런 사고까지 쳤으니 그야말로 설상가상이었다.“작은아버지, 정말로 작은아버지의 짓이라면 당장 가서 죄를 인정하세요. 가족들에게 피해를 주지
“쳐들어왔다고?”조선미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당장 막으라고 해!”진실이 드러나기 전에 절대로 그들이 아버지를 잡아가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잠깐.”조군수가 나가려는 집사를 갑자기 불렀다.“들어오라고 해. 아무도 막지 마!”“아빠,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조선미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내 결백을 증명해야지.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두려워할 필요가 있어?”조군수의 목소리는 아주 우렁찼다.“하지만...”“저들을 막는다면 내가 죽어도 누명을 벗지 못할거야.”조군수가 진지하게 말했다.안 부장관과 공개적으로 맞선다는 건 가볍게 말해서 체포하려는 그에게 저항하는 것이고 심각할 경우 반란을 일으키는 거나 다름없다.조씨 가문은 그런 죄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셋째 말이 맞아. 억지로 버티는 것도 답이 아니야. 조씨 가문 제자들에게 전부 물러서라고 전해!”조군표가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네!”집사는 그의 말대로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조선미 일행은 시름이 놓이지 않았지만 지금 이런 때일수록 불난 집에 부채질하면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진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조군수는 어디 있어?”그때 제복 차림의 장교가 수많은 무장 병사와 함께 위풍당당하게 회의실 앞까지 쳐들어왔다. 정규군들이 내뿜는 살기에 저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했다.“제가 조군수입니다. 장교님, 무슨 일로 절 찾으십니까?”조군수는 덤덤한 표정으로 한 무리의 사람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부장관님의 딸을 성폭행하고 무참하게 살해한 조군수 당신을 잡으러 왔다!”장교가 싸늘하게 말했다.“헛소리하지 말아요. 우리 아빠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어요. 당신들이 뭔가 잘못 안 거라고요!”조아영이 나서서 반항했다.“장교님, 우리 남편은 줄곧 품행이 단정하고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라 절대 그런 몹쓸 짓을 할 리가 없어요. 누군가 우리 남편을 모함한 게 틀림없어요.”진서현은 사리에 근거하여 힘껏 논쟁했다.“맞아요! 다른 사람이 족장님을 모함했어요.”조씨 가문 사람들도 너도나도
남편에 대한 믿음이 누구보다 두터웠지만 눈 앞에 펼쳐진 결과는 그녀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셋째야, 이게 다 무슨 일이냐!”조군해는 한스러워하며 노발대발했다.“이... 이 짐승만도 못한 놈아! 넌 족장 자리에 앉아있을 자격도 없어!”조군표는 분노를 터트리며 조군수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그의 몹쓸 짓 때문에 가문의 명성이 한순간에 밑바닥까지 떨어졌다.“아빠...”조선미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처음에 그녀는 아버지가 모함을 당했을 것으로 아주 확신했다. 하지만 증인과 물증이 떡하니 놓여있는 지금은 변명조차 할 수가 없었다.그 시각 조군수도 경악하긴 마찬가지였다. 영상 속의 얼굴이 누가 봐도 자신이였고 옷차림도 완전히 똑같았다.‘내가 진짜 술 먹고 사람을 죽였다고?’“풉!”조군수는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시뻘건 피를 토해냈다. 그의 얼굴에 핏기라고는 전혀 없이 창백했다.“아빠.”조선미가 본능적으로 부축하려 하자 조군수가 손을 들어 말렸다.“선미야, 미안하다. 나 때문에 너희들까지 피해를 보게 했어. 이런 몹쓸 짓을 저질렀으니 더는 살아서 너희들을 볼 면목이 없구나.”그러더니 장교의 총을 빼앗아 자신의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는 죽음으로나마 속죄할 생각이었다.“아빠!”“족장님!”화들짝 놀란 사람들이 제지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탕!”총소리와 함께 총알이 조군수의 두피를 스쳐 지나면서 피가 살짝 흘렀다.사람들이 고개를 돌려보니 유진우가 발 빠르게 조군수의 총을 빼앗았던 것이었다.“아저씨, 아직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이러시는 건 너무 섣부르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유진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조군수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다행히 유진우가 반응이 빨랐기에 망정이지, 안 그러면 진작 숨을 거두었을 것이다.“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죠. 이런 극악무도한 죄는 목숨 정도는 내놓아야 속죄할 수 있다고요.”조군수는 그들을 볼 면목이 없었다. 평생 부끄
조군수가 체포된 후 조씨 가문이 발칵 뒤집혔다. 다들 조군수의 죄명을 벗기기 위해 인맥과 관계를 전부 동원했다.조군수는 족장으로서 조씨 가문의 체면을 대표한다. 강간 살인죄라는 게 사실로 밝혀진다면 조군수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건 물론이고 조씨 가문 전체도 비난의 대상이 된다.조선미는 명령을 내린 후 믿을만한 몇몇 가족과 함께 그녀의 방에서 대책을 세웠다. 조씨 가문 전체가 한마음 한뜻이 아니었다. 첫째와 둘째 큰아버지는 서로 다른 생각을 품고 있어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이 일에 대해 다들 어떻게 생각해요?”조선미는 양쪽을 번갈아 보며 그들의 의견을 물었다.“아빠가 진짜 술에 취해서 그런 건... 아니겠죠?”조아영은 거의 울먹이듯 말했다. 영상을 보기 전까지 그녀는 아버지의 인품을 누구보다 굳게 믿었었다. 하지만 증거가 눈앞에 놓여있으니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네 아빠는 평소 주량껏 마시는데 왜 이번에는 필름이 끊길 정도로 마셨을까?”진서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큰아가씨,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어떻게 족장님을 빼내오냐는 거예요.”조 집사가 근심 어린 얼굴로 말했다. 아무리 봐도 죄명을 벗기는 건 불가능했기에 목숨부터 살리는 게 급선무였다.“진우 씨는 어떻게 생각해요?”조선미의 시선이 그에게 머물렀다.“하필 지금 이 시기에 이런 일이 생겼다는 건 절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누군가 아저씨를 모함한 게 틀림없어요.”유진우는 생각에 잠긴 듯했다.“우리도 그러길 바라요. 하지만 물증과 증인 모두 명백하게 있어서 아무도 믿지 않을 거예요.”조아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닐 수 있어요. 어떤 건 겉면만 봐서는 안 되거든요.”유진우가 고개를 내저었다.“뭔가 이상한 점이라도 발견했어요?”조선미가 떠보듯 물었다.“역용술이라고 얼굴을 바꾸는 변장술이 있는데 누군가 역용술로 선미 씨 아버님의 얼굴로 변장하여 일부러 살인을 저지른 것 같아요.”유진우가 충격적인 말을 내뱉었다.“역용술이요?”사람들은 경악한 나
“연홍?”조선미가 눈썹을 치켜올렸다.“이 여자를 알아요?”“내 추측이 맞다면 이 여자가 바로 선미 씨 큰어머니로 변장했던 그 여자예요.”유진우는 생각에 잠긴 듯했다. 은비녀에서 그 여자의 향기와 똑같은 향기가 풍겼기 때문이다.“그 여자라고요?”조선미는 눈살을 찌푸렸다.“그럼 설마 이 일도 그 여자의 짓일까요?”“정확히 무슨 상황인지는 저녁에 만나보면 알겠죠.”유진우가 실눈을 뜨고 말했다. 먼저 만남을 청한다는 건 뭔가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독에 능하고 교활한 여자라 함정이면 어떡하죠?”조선미가 걱정 어린 얼굴로 말했다.“걱정하지 말아요.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날 어쩌진 못할 거예요.”유진우가 덤덤하게 웃어 보였다.“그래도 안 돼요. 혼자 보내기에는 위험하니까 호위무사도 함께 보낼게요.”조선미가 진지하게 말했다. 블랙지존의 제자는 결코 만만한 사람이 아니기에 유진우를 위험에 빠뜨리게 할 수는 없었다.“그래요 그럼.”조선미가 고집을 꺾을 기미가 보이지 않자 유진우도 딱히 거절하지 않았다....저녁 8시, 려화루.평소에는 사람들로 북적이던 복고풍의 술집이 오늘따라 유달리 썰렁한 것 같았다.유진우는 차에서 내려 술집으로 들어갔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손님이 하나도 없었다.창가 자리에 앉은 유진우는 홀로 차를 마시면서 조용히 기다렸다.“바로 저 안에 있어! 당장 잡아들여!”그때 술집 밖에 승합차 몇 대가 도착했다. 차 문이 열리자 검은 옷에 얼굴까지 가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손에 칼을 들고 살기등등하게 쳐들어왔다.우두머리로 돼 보이는 남자는 유진우를 보자마자 쿵 하고 칼로 테이블을 쪼개더니 흉악한 얼굴로 말했다.“네놈이 바로 유진우야?”“날 30분이나 따라왔으면서 내가 누군지 몰라?”유진우는 무덤덤하게 찻잔을 들었다. 조씨 저택 대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누군가 자신을 따라오고 있다는 걸 바로 알아챘다. 하지만 대체 누구의 짓인지 알아보려고 끝까지 모른 척했다.“하하, 그래도 꽤 배짱이 있는 놈이구나. 이렇게나
“몸매 아주 죽여주는데? 저런 완벽한 여자는 처음 봤어.”“얼굴 볼 필요도 없이 하얀 긴 다리만 봐도 1년은 즐길 수 있겠어.”“나 못 참겠어. 너무 섹시하잖아!”베일을 쓴 여자의 등장에 싸움꾼들은 타오르는 욕구를 억제하기 힘들 정도였다.섹시한 몸매가 어찌나 완벽한지 흠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특히 길고 하얀 다리는 적당히 살집도 있어 보기 딱 좋았다. 다리에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남자들의 환상을 완벽하게 채워주었다.“당신이 이 술집의 사장이야?”우두머리 남자는 턱을 어루만지며 욕망을 드러냈다.“맞아요. 뭘 주문하시겠어요?”베일을 쓴 여자는 요염하게 웃으며 그들에게 다가갔다.“음... 향도 너무 좋아.”그녀의 향기에 도취한 남자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녀에게서 풍기는 향기가 가슴을 간지럽혔다.“하하, 당신을 먹어도 돼?”우두머리 남자가 음흉하게 웃었다.“날 먹겠다고요?”베일을 쓴 여자가 씩 웃었다.“난 온몸에 가시가 돋쳐서 먹을 수가 있겠어요?”“괜찮아. 난 가시 돋친 장미를 좋아해.”우두머리 남자가 입맛을 다셨다.“그래요? 그럼 버틸 수 있는지 어디 한번 봐야겠어요.”베일을 쓴 여자가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였다.우두머리 남자는 굶주린 듯 옷을 꽉 잡았다. 부하들은 크게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우리 형님은 그야말로 상남자시거든. 오늘 밤 아주 제대로 즐기겠군.”“당신 남자친구는 당신을 만족시킬 수 없나 봐? 하지만 괜찮아. 우리가 제대로 놀아줄게.”남자들은 음흉하게 웃으며 베일을 쓴 여자를 둘러쌌다.“난 당신들보다 저기 저 잘생긴 오빠가 더 마음에 드는데요?”베일을 쓴 여자는 씩 웃으며 유진우를 가리켰다.“흥, 저런 기생오라비가 뭐가 좋다고.”“그러게 말이야. 팔다리도 가는 게 어디 힘이나 쓰겠어?”사람들은 저마다 코웃음을 치며 비웃었다.“오빠, 나랑 놀래요?”베일을 쓴 여자가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왔다.“관심 없어요. 그냥 쟤네들과 놀아요.”유진우는 흔들림 없이 계속 차만 마셨다.“들었어? 저 자
“너...”우두머리 남자는 검은 피를 토해내며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고작 3분 사이에 모든 싸움꾼들이 죽음을 맞이했다.“명의님, 방해하는 자들은 다 죽었고 인제 우리 둘만 남았어요.”베일을 쓴 여자는 요염하게 웃으며 다가오더니 유진우의 옆에 찰싹 붙어 앉았다.“방금 귀찮은 일을 대신 해결해줬는데 고맙다는 인사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저들 정도면 귀찮은 것도 아니죠.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요. 대체 무슨 속셈으로 날 여기로 불렀어요?”유진우가 직설적으로 물었다.“연약한 여자가 무슨 속셈이 있겠어요? 날 그렇게 나쁜 사람으로 몰아가지 말아요.”연홍의 눈빛에 원망이 다소 섞여 있었다.“속셈이 없다면 대체 누가 조군수를 모함했는지, 진범은 또 어디 있는지 알려줘요.”유진우가 말했다.“이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죠. 알고 싶으면 뭔가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겠어요?”연홍은 손가락으로 유진우의 턱을 들어 올렸다.“원하는 게 뭐예요?”유진우는 그녀의 손을 확 뿌리쳤다.“당신을 원해도 돼요?”연홍이 요염하게 웃어 보였다.“난 당신에게 관심이 없어요.”유진우는 단칼에 거절했다.“하하... 참 재미있는 남자란 말이지. 나의 유혹을 뿌리치는 남자는 거의 없는데.”연홍이 입을 가리고 가볍게 웃었다.“알았어요. 농담하지 않을게요. 당신에게 내 병을 고쳐달라고 부탁하려고 불렀어요. 당신 의술이 아주 대단하다는 거 알고 있어요.”“보기에는 멀쩡해 보이는데요?”유진우는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안색이 좋은 게 아주 건강해 보였다.“솔직하게 얘기할게요. 우리 사부님이 내 몸에 독충을 넣었어요. 매일 한밤중이 되면 고통스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제발 이 독충 좀 꺼내줘요.”연홍은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았다.“사부가 제자의 몸에 독충을 넣었다고요? 그것 참 희한한 일이네요.”유진우도 살짝 놀란 눈치였다.“사부님은 의심이 많으셔서 누구도 믿지 않고 자기 자신만 믿거든요. 제자들 전부 독충으로 통제하고 있어요.”연홍이
“그게 무슨 헛소리예요?”유진우가 손에 힘을 주자 연홍의 안색이 검붉게 변하면서 호흡도 더욱 가빠졌다. 하지만 연홍은 전혀 겁먹지 않았고 여전히 미소를 띤 채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죽으면 진범을 잡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조선미도 살지 못해요. 그러니까 잘 생각해요.”“지금 날 협박하는 거예요?”유진우의 두 눈에 살기가 스쳐 지나갔다.“제가 어찌 감히 명의님을 협박하겠어요. 그냥 충고일 뿐이죠.”연홍이 웃으며 말했다.“대체 뭐 하려는 겁니까?”유진우의 표정이 얼음장같이 차가웠다.연홍은 아무 말 없이 그저 자신의 목을 가리켰다. 그녀의 뜻은 명확했다. 유진우는 눈살을 찌푸렸다가 결국 어쩔 수 없이 손을 내려놓았다.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연홍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명의님, 농담한 것 가지고 이렇게까지 할 필요 있어요? 너무 아프잖아요.”연홍이 원망 섞인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난 당신과 농담할 시간이 없어요. 아는 게 있으면 전부 다 얘기해요.”유진우의 눈빛이 매우 서늘했다.“알았어요, 알았어요... 그렇게 알고 싶다면 알려줄게요.”연홍은 옷을 툭툭 털고 일어나 느긋하게 그의 옆에 앉고는 유진우의 차를 마시면서 목을 축였다.“사실 당신 추측이 맞아요. 조군수는 모함을 당했고 이 함정을 판 건 바로 선우 가문이에요.”“선우 가문?”유진우가 눈썹을 치켜올렸다.“증거는요? 거짓말인지 아닌지 내가 어떻게 믿죠?”하도 변덕스러운 여자라 전혀 믿음이 가질 않았다.“내가 왜 당신을 속이겠어요?”연홍이 두 눈을 희번덕거렸다.“당신은 이유도 없이 다른 사람을 속이잖아요.”유진우가 싸늘하게 말했다.“하하... 날 잘 아는군요.”연홍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하지만 이번에는 거짓말이 아니에요. 사실 진범이 지금 어디 있는지도 알아냈거든요.”“어디 있는데요?”유진우가 캐물었다.“아주 은밀한 은신처예요.”연홍은 쪽지 한 장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여기에 자세한 주소를 적었어요.”“네?”유진우는 쪽지를 보며
“아니에요?”유장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용호산은 여태껏 무림인의 세계에서 일어난 일에 무관심했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무림대회를 개최한다는 건 다른 의도가 있는 게 분명해.”서태양이 말했다.인재를 선발해 위상을 높이려고 진무사가 나섰다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었다.하지만 용호산은 전혀 관계가 없지 않은가?“그럼 무슨 의도인데요?”유장미가 되물었다.“내가 어떻게 알아? 나도 궁금하거든?”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는 서태양은 어깨를 으쓱했다.“보혁 씨는 내막에 훤하니까 화두를 꺼낸 거겠죠?”유이슬이 시선을 돌렸다.“내막까지는 아니지만 주워들은 소식이 몇 가지 있긴 해요.”염보혁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제가 알기로는 용호산 뒷산의 금지구역에 최근 신비로운 보물이 나타났는데 향후 100년 동안 무림인들의 흥망성쇠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나라의 운명과도 관련이 있다고 해요.”“무슨 보물이 그렇게 대단해요?”유장미가 깜짝 놀랐다.유이슬과 서태양도 예상치 못한 듯 충격을 금치 못했다.무림인들의 흥망성쇠와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건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만약 제 추측이 맞는다면 용원의 기와 관련된 보물일 거예요.”염보혁이 목소리를 낮추었다.순간, 유진우는 눈썹을 추켜세웠지만 이내 포커페이스로 돌아왔다.“용원의 기? 그게 뭔데요?”유장미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용맥의 정수이기도 하죠.”유이슬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며칠 전 호룡각이 와해하면서 지하 용맥이 다섯 개의 용원의 기로 변해 세상에 뿔뿔이 흩어졌어. 소문에 의하면 용원의 기를 얻는 자는 천하무적이 되어 승승장구한다고 해.”호룡각이 무너지고 용맥이 파괴된 일이 워낙 큰 이슈였기에 자연스럽게 그녀의 귀에도 흘러 들어갔다.“진짜요? 그렇게 대단한 물건이 있어요?”유장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고서에서 관련된 기록을 본 적이 있는데 용원의 기를 얻은 자들은 세상을 주름잡는 수장이거나 천하를 다스리는 왕이었어.”유이슬이 한마디 보탰다.“맞아요.”염보혁이 대
유진우는 옆에 있는 염보혁을 흘깃 쳐다보았고, 속으로 상대방이 아무리 예뻐도 남자를 좋아할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쿨럭!”염보혁은 사레가 들린 나머지 연신 기침하며 쓴웃음을 지었다.“이슬 씨, 지금 절 칭찬하는 건지 비꼬는 건지 모르겠네요.”“당연히 칭찬하는 거죠. 그런 얼굴을 보고도 어떤 남자가 마음이 흔들리지 않겠어요?”유이슬이 정색하며 말했다.“네?”염보혁은 말문이 막혔다.설령 사실일지언정 어찌 면전에서 대놓고 말할 수 있지?왠지 모르게 기분이 이상했다.“정 믿기 어려우면 태양한테 물어봐요.”유이슬이 문득 말했다.한편, 서태양은 염보혁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이름이 언급되는 순간 흠칫 놀라더니 서둘러 시선을 돌렸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은 도둑이 제 발 저린 듯싶었다.“제가요?”서태양은 난감한 얼굴로 대답했다.“선배, 장난하지 마세요. 저랑 무슨 상관이죠?”“뭔가 냄새가 나는데요?”유장미가 눈썹을 까딱하더니 눈알을 굴리며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설마 보혁 씨한테 진짜 반한 건 아니죠?”“이... 계집애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서태양이 펄쩍 뛰면서 얼굴이 벌게진 채 고래고래 외쳤다.“남자끼리 엮일 리가 없잖아.”“침착해요. 단지 농담했을 뿐이에요.”유장미가 키득거리며 말했다.“게다가 남남 커플이 진짜 사랑이죠. 어차피 안 될 건 없잖아요. 만약 사귈 생각이 있다면 진심으로 축복해줄게요. 하하하!”“입만 열면 헛소리 하네.”서태양은 짐짓 화가 난 듯 혼내려는 액션을 취했다.유장미는 잽싸게 유이슬의 등 뒤로 숨어 웃음을 터뜨렸다.갑자기 산으로 흘러가는 대화에 당사자인 염보혁은 말문을 잃었다.더욱이 유장미와 투닥거리는 와중에도 그를 흘끔거리는 서태양 때문에 어이가 없었다.단순히 농담으로 치부할 수 있었지만 몰래 훔쳐보는 탓에 괜히 기분이 세했다.“진우 씨, 이슬 씨, 다들 용호산은 처음이죠? 제가 구경 좀 시켜드릴까요? 주변에 뭐 있는지 소개해줄게요.”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염
술이 몇 잔 오가자 서서히 편하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이슬 씨, 방금 검종의 제자라고 하시던데 무림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용호산에 오른 건가요?”염보혁이 넌지시 물었다.“그런 셈이죠.”유이슬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성격이 무심한 편이라 말주변이 딱히 없었다.“사실 저희는 스승님의 명을 받고 찾아왔어요.”상대적으로 외향적인 유장미가 웃으며 말을 보탰다.“노천사가 용호산에서 무림대회를 개최한다는 소식에 세상이 발칵 뒤집혔거든요. 검종 뿐만 아니라 천하회, 주술교를 포함한 파벌에서 최정예 제자들을 파견해 출전할 예정이에요.”“그럼 검종에서는 세 분이 참석하는 건가요?”염보혁이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아니요.”유장미가 고개를 저었다.“저희는 단지 구경하러 왔을 뿐, 경기에 참여하는 선수는 따로 있어요.”그녀와 서태양은 선천 후기에 속했고, 유이슬은 실력이 뛰어나긴 했으나 반보 마스터에 불과했다.어찌 됐든 천교에 비하면 열세에 처하는지라 검종을 대표해서 출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따로 있다니? 설마 홍군림이에요?”염보혁의 눈썹이 까닥했다.“그건 저도 잘 몰라요.”유장미가 생긋 웃었다.“워낙 제멋대로에 신출귀몰하는 사람이라 이번 무림대회에 참가할지 아무도 몰라요. 만약 홍 선배가 진짜 출전한다면 우승은 우리 검종이 차지할 거예요.”홍군림은 천교 랭킹의 1위에 올랐을뿐더러 어린 나이에 경천 랭킹에 진입한 검종의 천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다만 성격이 까칠하고 독불장군이라 종주를 제외하고 아무도 안중에 두지 않았다.“장미야, 그건 네 생각이고.”이때 유이슬이 입을 열었다.“홍 선배가 실력이 뛰어나고 검종의 천재로서 일반 무사들이 함부로 넘볼 수 없는 존재인 건 사실이지만 너도 알다시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능력자가 한 명 더 있잖아.”“누구요?”유장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유장혁.”유이슬이 무덤덤하게 말했다.“그 사람이 홍 선배보다 실력이 더 뛰어나요?”유장미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막상막하야. 천교
“네?”염보혁의 한 마디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 넋을 잃었다.특히 잘 보이기 급급했던 서태양은 굳은 얼굴로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허공에 손을 들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이럴 수가?방금 목숨 걸고 구하려던 사람이 남자였다니?“남자...? 농담이죠?”붉은 옷 소녀가 염보혁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경국지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미인이 대체 어디를 봐서 남자란 말인가?푸른 옷 여인은 입만 벙긋했을 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흡혈파 망나니들이 여자가 아닌 남자한테 집적거렸다니?취향 한번 독특했다.“아니요. 진짜 남자예요.”염보혁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밖에 나가면 여자로 오해받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하지만 아무리 봐도...”붉은 옷 소녀가 말을 아꼈다.“외모 때문에 어쩔 수 없어요.”염보혁이 어깨를 으쓱하며 해탈한 듯 말했다.“아쉽네요.”붉은 옷 소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본인이 이렇게 예쁜 얼굴을 가졌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선배? 왜 그래요? 괜찮아요?”그녀는 아직도 넋을 잃은 서태양을 발견하고 손을 뻗어 어깨를 툭 쳤다.“응? 아, 괜찮아. 단지 조금 놀랐을 뿐이야.”서태양은 꿈에서 깨어난 듯 금세 정신을 차렸다.다만 눈빛만큼은 남자한테서 떠나지 않았다.이렇게 요염한 얼굴이 사내란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그야말로 재능 낭비이지 않은가?“저는 염보혁입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염보혁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유이슬이에요.”푸른 옷 여인이 대답했다.“저는 유장미라고 해요.”붉은 옷 소녀가 활짝 웃었다.비록 남자이지만 미모에 저절로 눈이 갔다.“서태양입니다.”서태양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방금 일어난 일에 대해 찝찝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다 같이 술이나 한잔 하시죠?”염보혁은 손을 내밀더니 소개를 이어갔다.“이쪽은 유진우 씨, 그리고 두 분은 호위무사인...”“춘화와 추월이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수염 난 사내의 몸에 피투성이 상처가 생겼다.눈 깜짝할 사이에 연신 검에 찔린 탓에 저항할 힘조차 없었다.비록 수염 난 사내가 힘은 더 셌지만 기교에서는 한참 못 미쳤다.여자의 화려한 검술은 감탄을 자아냈고 입이 떡 벌어질 정도였다.“악!”수염 난 사내가 처참한 비명을 질렀다.사지가 부러진 채 바닥에 널브러진 모습은 마치 좀비를 연상케 했다.온몸은 피가 흥건했고 상처로 가득했다. 비록 목숨에 지장은 없지만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다.“형님!”패배한 우두머리를 보자 흡혈파 제자들이 충격과 분노를 금치 못했다.항상 위풍당당하고 기세등등했던 수장이 이런 몰골을 보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젠장! 감히 우리 형님을 다치게 해? 죽고 싶어 환장했어?”“저년을 없애버려!”흡혈파 제자들이 고래고래 외치며 검을 빼 들고 무시무시한 기세로 여자를 덮쳤다.“무용지물이야.”푸른 옷 여인은 콧방귀를 뀌더니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사람들 틈으로 뛰어들었다.얼마 안 되어 흡혈파 제자들은 하나같이 처참한 비명과 함께 바닥에 나뒹굴었다.팔이나 다리가 부러진 채 선혈이 낭자했다.“역시 대단하세요!”눈앞의 광경에 붉은 옷 소녀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망나니 따위가 감히 검종에게 대들다니? 제 주제도 모르고 말이야.”서태양이 바닥에 침을 뱉었다.“뭐... 뭐라고? 너희들이 검종 제자였어?”흡혈파 제자들은 안색이 돌변하더니 두려운 기색이 역력했다.검종은 무림인들의 세계에서 3대 문파 중 하나로 천하회와 주술교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비록 제자들이 많지 않았지만 뛰어난 인재들밖에 없다.특히 검종의 홍군림은 어린 나이에 천교 랭킹 1위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경천 랭킹에 진입하여 세계 10위의 강자가 되었다.경천 랭킹 10위권에 검종 제자가 무려 2명이나 있는데 압도적인 실력으로 3대 파벌의 수장 자리를 거머쥐었다.여기서 검종의 제자들을 만나게 될 줄은 예상치도 못했다.이럴 줄 알았더라면 애초에 무모한 짓을 벌이지 않았을 텐데.“이제야
“윽!”서태양은 이를 악물고 이마에 핏줄이 튀어나온 채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이내 양손으로 검을 쥐고 온 힘을 다해 어깨를 짓누른 흡혈검을 떼어내려고 했다.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상대방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오히려 힘이 점점 더 가해졌고 무릎이 닿은 바닥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고작 이런 실력으로 감히 우리 흡혈파한테 덤비다니? 제 주제도 모르고 말이야.”수염 난 사내가 냉소를 지었다.“형님! 멋져요.”“역시 대단하세요.”부하들이 질세라 감탄했다.북쪽에서 흡혈파라고 하면 꽤 이름 있는 큰 파벌인지라 애송이 같은 놈이 도발할 만한 게 아니었다.“감히 내 앞에서 영웅 행세해? 넌 오늘 인생에서 가장 잘못된 결정을 내린 거야. 교훈 삼아 사지를 부러뜨려줄게!”수염 난 사내가 비열한 미소를 짓더니 흡혈검을 들어 올려 서태양의 손목을 향해 휘둘렀다.챙!검이 닿기 직전 청색 보검이 불쑥 나타나 허공에서 공격을 막아냈다.“응?”수염 난 사내가 눈살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푸른 옷 여인이 보검을 들고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선배?”서태양의 표정이 밝아지더니 그제야 한숨 돌렸다.조금만 늦었더라도 오른손을 잃어버렸을 텐데 그나마 선배가 제때 도움을 줘서 천만다행이었다.“괜히 참견하지 마.”수염 난 사내가 음흉하게 웃었다.“우리 후배한테 손을 대는 순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여자가 싸늘하게 말했다.“맞아! 너희들 같은 망나니는 벌을 받아 마땅하지.”이때, 붉은 옷 소녀가 검을 빼 들고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언니, 제가 도와줄게요.”“아니야. 넌 태양이랑 지켜보고 있어. 이런 놈들은 나 혼자서도 충분하니까.”푸른 옷 여인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지?”수염 난 사내가 히죽 웃었다.“그런 왜소한 몸으로 오빠의 검을 어찌 막으려고? 차라리 무기는 내려놓고 침대에서 겨뤄보는 건 어때?”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부하들이 폭소를 터뜨렸다.곧이어 음흉한 시선으로 여자를 훑으며 멋대로 평가하
서태양이 움직이자 수염 난 사내의 뒤에서 덩치가 산만 한 남자 두 명이 튀어나왔다.두 사람은 무기로 길쭉한 검을 들고 있었다.몸체는 강한 피비린내와 함께 은은한 살기가 감돌았다. 이는 칼날이 오랫동안 선혈에 노출된 결과였다.무림인들의 세계에서는 흡혈검이라고 불렀다.다만 아쉽게도 그들이 지닌 검은 아직 미성숙 단계였고 기세가 한창 부족했다.챙! 챙!서태양이 먼저 검을 빼 들고 혼자서 두 명의 사내와 대결을 벌였다.그들은 기세등등하게 맞서 싸웠지만 힘만 강했을 뿐 행동이 굼뜬 편이었다.공격할 때마다 동작이 다소 어설펐다.반면, 서태양은 누가 봐도 고수의 가르침을 받았고 실전 경험도 풍부했다.스피드, 힘, 기술 등 모든 면에서 높은 수준에 도달했으며 어느 하나 뒤처진 데 없었다.세 사람이 공격을 주고받는 순간 실력 차이가 현저했고, 서태양은 눈 깜짝할 사이에 두 사내를 쓰러뜨렸다.그리고 응징할 겸 각자의 다리에 검을 관통했다.“흥! 고작 이런 실력으로 우쭐거려? 제 주제도 모르고.”서태양은 장검을 비스듬히 겨누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죽기 싫으면 당장 꺼져.”“좋아! 잘했어!”승리를 거머쥔 서태양을 보자 구경하던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비록 나서서 싸울 용기는 없었지만 응원의 박수를 보내는 것쯤은 충분히 가능했다.“그래도 실력은 꽤 있나 보네? 어쩐지 참견하더라니.”수염 난 사내가 눈을 가늘게 뜬 채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천천히 뽑아 들고 음침한 목소리로 협박했다.“하지만 오늘 임자를 만났지. 흡혈파를 마주친 이상 살아남을 방법은 없어.”“흡혈파는 무슨, 들어보지도 못했구먼.”서태양의 표정은 기고만장했다.“하! 괜찮아. 네 피를 전부 흡수하고 나면 우리가 왜 흡혈파라고 불리는지 알 거야.”수염 난 사내가 이죽거리더니 두말없이 공격을 개시했다.그가 발을 내딛자마자 맹렬한 기세가 솟구쳤고, 손에 든 흡혈검은 핏빛을 뿜어내며 곧장 서태양을 덮쳤다.앞서 상대했던 부하들과 달리 수염 난 사내의 흡혈검은 살기로 가득했다
아름다운 얼굴은 쉽게 화를 부르는 법이다.염보혁은 남자였지만 여자보다도 더 아름다운 요염한 얼굴을 지녔다.길을 나서면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도리가 없었고 지금처럼 깡패 무리와 마주할 때면 번번이 시비에 휘말리기 일쑤였다.유진우는 모른 척하며 조용히 술잔을 기울였다.“어이, 이쁜이. 저런 나약한 놈이랑 술 마셔서 뭐 하겠어? 차라리 우리랑 한잔하지, 아주 즐겁게 해줄 테니 말이야!”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사내가 염보혁의 턱을 손가락으로 건드리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이 손 치우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 후회하게 될 테니까.”염보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어여쁜 외모 탓에 남녀를 불문하고 다가오는 사람이 많았지만 이처럼 대놓고 희롱하는 경우는 드물었다.“오, 이쁜이가 화를 내네?”수염 난 사내는 턱을 문지르며 비웃었다.“솔직히 말해서 화난 얼굴이 더 매력적인데?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더욱 감탄스럽군.”그의 말에 뒤따르던 무리들이 일제히 폭소를 터뜨렸다.유진우는 피식 웃으며 술잔을 내려놓았다. 눈앞의 이 사내는 제법 능숙하게 수작을 부렸다.염보혁이 남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셋을 센다. 그 안에 사라지지 않으면 내가 직접 손봐주지.”염보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손 본다고? 하하하!”수염 난 사내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이거 제법 앙칼진데?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위층으로 올라가서 천천히 우리를 손 봐줘, 어때?”“맞아, 맞아! 방도 넉넉하니 차례대로 너랑 놀아줄 수 있다고!”그의 동료들도 시시덕거리며 말을 보탰다.“셋.”염보혁은 더 이상 말을 섞을 필요도 없다는 듯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이쁜이, 괜히 버티지 말고 그냥 올라가자. 내가 아주 다정하게 대해줄 테니 말이야.”수염 난 사내는 입을 커다랗게 벌려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낄낄댔다.“둘.”염보혁은 여전히 냉랭한 표정을 유지했다.“싫다면 어쩔 수 없지. 내가 직접 안아 올라가는 수밖에.”그가 손을
유진우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혁 씨가 이렇게까지 많은 걸 알고 있을 줄은 몰랐군요. 제 생각엔 장일청과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는 것 같은데요.”용호산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염보혁이 이렇게나 많이 알고 있다니, 이건 그가 평범한 인물이 아님을 증명하는 셈이었다.“진우 씨께서 과찬해 주시는군요. 저는 그저 사람들 사이에 끼어 듣는 걸 좋아해서 호기심에 이런저런 소문을 알아본 것뿐입니다. 사실 별다른 능력은 없어요.”염보혁은 겸손하게 웃으며 덧붙였다.“하지만 만약 진우 씨께서 무림대회에 참가하신다면 전 온 힘을 다해 진우 씨가 우승할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보혁 씨,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시는군요.”유진우는 담담하게 말했다.“전 그저 세상 구경이나 해볼 겸 참가하는 것뿐입니다. 우승 같은 건 감히 꿈도 꾸지 않아요. 애초에 제 실력으로 어떻게 그 내로라하는 강자들과 겨룰 수 있겠습니까?”“진우 씨는 너무 겸손하시군요. 저는 사람을 보는 눈이 정확합니다.”염보혁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진우 씨는 외모도 준수하고 기품 또한 비범하시죠. 멀리서 봐도 강렬한 기세가 느껴졌습니다. 비록 진우 씨의 신분은 알 수 없지만 이것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진우 씨는 절대 범상한 인물이 아닙니다!”“보혁 씨께서 저를 이렇게까지 칭찬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유진우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저는 평범한 출신에 보잘것없는 실력을 갖췄을 뿐입니다. 아마 실망할 겁니다.”“하하, 괜찮습니다. 커다란 황금 잉어가 어찌 작은 연못에서만 머물겠습니까? 바람과 구름을 만나면 반드시 용이 되어 날아오를 것입니다. 지금 진우 씨의 명성이 미미할지라도 저는 믿습니다. 언젠가 반드시 하늘 높이 날아오를 날이 올 거라고!”염보혁은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말했다. 그 눈빛은 절대적인 믿음을 담고 있는 듯했다.유진우는 겉으로는 태연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이 사람, 도대체 뭐지? 분명 오늘 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