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강자는 어디를 가든, 어디에 있든 만인이 우러러보는 존재인데 왜 이리도 비굴하게 머리를 조아릴까?“위왕? 도련님?”강수원은 넋이 나간 얼굴로 유만수와 유진우를 번갈아 보았다. 그 순간 오금이 저리는 공포감이 그를 확 덮쳤다.지금 현시대에 위왕이라고 불리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바로 서경의 권력자이자 유씨 가문의 실권자, 그리고 용국의 지존인 유만수이다.‘저 평범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등 굽은 영감이 바로 하늘 같은 존재인 위왕이라고?’그 생각에 강수원은 간담이 서늘해졌고 낯빛도 창백해졌다.만약 등 굽은 영감이 위왕이라면 유진우가 바로 위왕의 아들이자 천재 유장혁이란 말인가?“털썩...”강수원은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낯빛은 창백해지다 못해 핏기라곤 없었고 절망이 가득했다.강수원 뿐만 아니라 전씨네 부자도 겁에 질린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특히 전세권은 바지에 지리기까지 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건드린 사람이 위왕의 아들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말이다.“부 내관, 그만 일어나. 사내가 이리 쉽게 무릎을 꿇어서야 하겠어? 아 참, 까먹을 뻔했군. 부 내관은 사내가 아니지.”유만수는 덤덤하게 웃으며 장난치듯 말했다.“감사합니다, 위왕님.”부규환은 잠깐 올려다보다가 이내 다시 시선을 늘어뜨렸다.“오늘 아주 타이밍 좋게 나타났어. 우리를 계속 따라다닌 거지?”유만수가 떠보듯 물었다.“주인님께서 위왕님의 안전이 걱정되신다면서 저더러 몰래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부디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부규환이 고개를 푹 숙였다.“지켜주는 건가? 아니면 감시하는 건가?”유만수가 웃을 듯 말 듯 한 얼굴로 말했다.“오해하지 마십시오, 위왕님. 위왕님은 하도 귀하신 몸이라 용국의 국운과 직결되어 있어요. 혹시라도 다치게 되면 그건 용국의 불행이란 말입니다.”부규환이 한껏 비굴한 태도로 굽신거렸다.“하하... 참으로 충실한 심복이구나!”유만수가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과찬이십니다.”부규환이 허리를 굽혀 말했다.
“윙!”유진우가 들고 있던 장검에서 갑자기 눈 부신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부규환의 가슴을 찌르려 했다.“둥!”그런데 반투명한 골든벨이 갑자기 하늘에서 내려와 부규환을 뒤덮으며 유진우의 검을 막았다. 날카로운 검 끝이 골든벨에 부딪히면서 여러 갈래의 물결이 일렁거렸다. 그 어떤 폭발음도 부딪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유진우가 내뿜은 기운이 골든벨에 전부 흡입되면서 부규환은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다.“도련님,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부규환의 표정은 여전히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죽이려고 그러는 거지!”유진우는 발을 힘껏 내디디며 다시 한번 힘을 내어 골든벨을 찌르려 했다.“둥!”골든벨은 다시 한번 대량의 물결이 일면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도련님, 전 그저 주인님의 명을 받고 왔을 뿐이에요. 지금 이러시는 건 좀 아니지 않나요?”부규환이 덤덤하게 말했다.유진우는 아무 말 없이 검으로 계속 찌르기만 했다. 그러자 골든벨이 점점 진동하기 시작하더니 일렁이던 물결이 더욱 촘촘해졌다. 그렇게 십여 번 찌르자 뚜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장검이 끊어지고 말았다. 일반 검은 유진우의 기운을 버티지 못했다.“그만해!”유진우가 계속 포기하지 않자 유만수가 결국 나서서 말렸다.“넌 쟤 상대가 아니야. 계속 싸워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어.”“상대가 되는지 안 되는지는 싸워봐야 알죠!”유진우가 싸늘하게 말했다.“개를 때려도 주인이 누군지 봐야지. 부 내관은 오늘 명을 받고 왔어. 여기서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긴다면 넌 절대 감당 못 해!”유만수가 경고했다.“그래서요? 살인범이 그냥 가는 걸 보고만 있으라는 거예요?”유진우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지금 이 순간 그는 마치 먹이에 굶주린 짐승 같았다.“장혁아, 제발 내 말 좀 들어. 아직은 때가 아니야.”유만수가 고개를 내저었다.부규환은 천자의 옆을 지키는 호위이다. 무슨 이유에서든 유씨 가문에서 죽는다면 엄청난 화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그는 자기 아들이 그때의 싸움에 휘말리는 걸 원치
평안 의원을 나선 흰옷 영감 부규환은 곧바로 차에 탑승했다.운전기사는 얼굴도 잘생기고 피부도 하얀 남자였는데 얼굴에 짙은 화장을 하고 있어 어딘가 괴이해 보였다.“부 내관님, 10년 동안 실종됐던 유장혁이 이런 작은 의원에 숨어있었을 줄은 정말 몰랐어요. 게다가 그때 일을 아직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것 같던데. 제가 기회를 봐서 처리할까요?”남자의 목소리는 날카로우면서도 차가웠다.“아직은 죽여선 안 돼.”부규환이 눈을 감고 담담하게 말했다.“유만수가 무너지지 않는 이상 누구도 유진우를 건드릴 수 없어.”“내관님, 사람이라면 나이 들어 언젠가는 죽기 마련이에요. 그 어떤 허점도 보이지 않게, 아주 자연스럽게 처리할 자신이 있어요.”남자가 웃으며 말했다.“그게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쉽지 않아.”부규환이 고개를 내저었다.“유만수가 왜 엄청난 공을 세우고 50만 대군을 이끌면서도 서경에서 주인님을 위해 일을 하는지 알아?”“그거야 당연히 주인님을 두려워해서 그렇겠죠.”남자가 오만한 기세로 대답했다.“두려워하는 건 맞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나쁜 놈을 벌하고 싶어도 무고한 사람들이 다칠까 봐 그러는 거야.”부규환이 담담하게 웃었다.“천재라고 불리는 아들이 살아있는 한 유만수는 욕심이 있어도 절대 함부로 하지 못해. 아무튼 아들이 죽으면 유만수는 두려울 게 없어져서 한 마리의 맹수로 변할 거야. 그때가 되면 용국의 하늘도 바뀌겠지.”10년 전, 서경의 왕비가 세상을 떠났을 때 유만수는 변방에서 군대를 움직인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결국 참았다.이유가 뭘까? 죽는 게 두려워서? 왕권이 두려워서?진짜 이유는 유장혁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쉽게 말해 유장혁은 위왕의 마지막 신념이자 버팀목이었다. 하여 유장혁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용국은 대란이 일게 될 것이다.“내관님, 유장혁이 서경으로 돌아와서 왕위를 이어받으면 우리한테는 엄청난 화가 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남자가 걱정스럽게 말했다.“하하, 천재라고 불려봤자 그냥 애
“진작 갔어야죠. 여기 남아있어봤자 해만 끼치는데.”유진우가 싸늘하게 말했다.“네 아버지가 가기 전에 나한테 너 좀 집에 돌아가게 설득해달라고 했어. 그런데 내가 거절했다.”술광이 의자에 앉아 찻잔에 차를 따랐다.“유씨 가문이 너무 위험한 곳이라 거기서 사람들과 암투를 벌일 바엔 밖에서 즐거운 인생을 사는 게 낫다고 했어. 그런데 놀랍게도 네 아버지가 동의하더라고. 유씨 가문은 너의 든든한 뒷받침이 되어줄 테니까 넌 그냥 즐겁게, 행복하게만 살면 된다고 했어. 네 아버지는 그냥 네가 시간 되면 집으로 가서 어머니한테 인사 좀 드리길 바라셔.”그의 말에 유진우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무언가가 가슴을 쿡 찌른 것처럼 아팠다.그는 어머니가 준 옥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며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언젠가는 돌아갈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제가 돌아가는 날이 바로 진범의 제삿날일 겁니다!”만약 진범의 머리를 자르지 못한다면 무슨 면목으로 집으로 돌아가 하늘에 계신 어머니에게 인사를 올리겠는가?“됐어, 할 얘기는 다 했어. 무슨 결정을 내리든 네가 알아서 해.”술광은 차 한 잔을 벌컥벌컥 들이마시고는 다시 잠을 청하러 위층으로 올라갔다. 유진우는 의자에 앉아 자신의 복수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무슨 생각해?”그때 이청아가 갑자기 걸어오더니 유진우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응? 언제 들어왔어?”유진우가 의외라는 듯 물었다.“이 큰 사람이 걸어들어오는 것도 못 봤어? 어느 여자 생각해? 나? 아니면 조선미 씨?”이청아가 의미심장하게 물었다.“다 아니야.”유진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직 불구덩이에 스스로 빠질 정도로 어리석진 않았다.“뭐야? 설마 또 다른 여자 있어?”이청아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당연히 아니지.”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상황에 유진우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아침부터 그런 얘기 하려고 온 건 아니지?”“흥!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으로 보여?”이청아가 두 눈을 부릅떴다.“좋은 소식 알려주려고 왔어.
이청아를 보며 유진우는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네, 네. 우리 대단하신 이 대표님은 여자지만 남자한테 절대 뒤지지 않죠. 앞으로는 기필코 재벌가의 여왕이 되실 겁니다!”그러고는 두 손을 맞잡아 가슴 앞에 올리며 예의를 갖췄다.“나 지금 진지하단 말이야! 내가 이씨 가문의 족장이 되면 조선미 씨보다도 지위가 더 높아. 그때가 되면 당신은 나만 믿으면 돼!”이청아는 턱을 살짝 들고 카리스마를 내뿜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의욕이 철철 넘쳤다.예전에는 자신의 출신이 조선미보다 뒤떨어진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젠 이씨 가문의 후계자라는 신분이 뒷받침해주고 있어 조선미와도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되었다.나중에 누가 이기고 유진우를 차지할 수 있을지는 각자의 재주에 달려있다.“주인님, 주인님, 전화 왔어요!”그때 앙증맞은 전화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청아가 전화를 받자마자 장경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딸, 지금 어디야? 당장 들어와. 본가의 셋째 사모님이 널 만나시겠대.”“셋째 사모님은 무슨 일로 오셨대요?”이청아가 떠보듯이 물었다.족장 이세훈은 혈기 왕성하던 젊은 시절 세 여자와 결혼했다. 인제 첫째 사모님은 70대, 둘째와 셋째 사모님은 60대가 되었다.“네가 후계자 자격을 얻었잖아. 셋째 사모님께서 너한테 힘을 보태주려고 그러는 거지. 우리 청아는 참 복도 많아!”장경화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알았어요. 지금 바로 갈게요.”이청아는 전화를 끊고 유진우와 함께 가려 했다.“왜? 나도 가야 해?”유진우가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물었다.“당신도 우리 가족인데 당연히 가야지.”이청아가 그를 째려보며 말했다.“하지만...”“됐어, 쓸데없는 소리 그만해! 이건 당신이 빌붙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야!”이청아는 다짜고짜 그를 끌고 차에 올라탔다.남자를 대할 때 가끔은 강하게 밀어붙여야 한다고 책에서 본 적이 있는 것 같다.30분 후, 두 사람이 탄 자동차가 이씨 가문 별장 문 앞에 멈춰 섰다.두 사람이 차에
사나운 눈초리를 한 오금란을 보며 이청아도 눈살을 찌푸렸고 낯빛이 어두워졌다.오금란이 차를 그녀의 얼굴에 뱉은 건 더 이상 예의범절의 문제가 아니라 이건 대놓고 모욕을 주는 것이었고 시작부터 아주 호된 맛을 보여주었다.“이청아! 뭐야 너! 차를 따르랬더니 펄펄 끓는 물을 따랐어? 우리 할머니를 다치게 하려고 일부러 그런 거지?”핑계를 찾은 이서우는 이때다 싶어 그녀를 비난하기 시작했다.“내가 보기엔 불만이 너무 많아서 일부러 저러는 거 같은데!”조국화도 맞장구를 쳤다.“아닙니다, 아니에요... 청아는 절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아까 마셔봤는데 데일 정도로 뜨겁지 않았어요.”장경화가 황급히 해명했다.“그럼 네 말은 내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야?”오금란의 표정이 얼음장같이 차가워졌다.“아... 아닙니다. 제가 착각했나 봐요. 제 입이 문제 있는 것 같아요.”장경화는 미안한 웃음을 지으며 감히 반박조차 하지 못했다.그녀의 태도에 세 사람은 몰래 우쭐거렸다. 이런 시골사람에게는 처음부터 호된 맛을 보여줘야 나중에 고분고분해진다고 생각했다.“청아야, 가만히 서서 뭐 해? 얼른 할머니께 다시 따라드려야지!”이서우가 손가락질하며 명령하듯 말했다. 그녀는 족장 할아버지가 왜 이청아를 후계자 후보에 올렸는지 도무지 이해되질 않았다. 이서우조차도 후계자 자격이 없는데 말이다. 그러니 화가 나고 질투 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알았어, 알았어. 내가 다시 따를게.”장경화는 한시라도 지체할세라 차 한잔을 따른 후 이청아에게 건네고는 다시 오금란에게 드리라고 눈짓했다.하지만 이청아는 찻잔을 받지 않았다. 그들이 일부러 그녀를 못살게 굴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왜? 불만 있어?”오금란이 그녀를 째려보며 쌀쌀맞게 말했다.“이 정도 예절도 지키지 못한다면 절대 큰 그릇이 못돼!”그러고는 서류 하나를 꺼내 티테이블 위에 툭 던졌다.“이게 뭔지 알아? 네 위임장이야. 남성에 자산이 2조 정도 되는 조경 그룹이 있는데 원래는
순간 그녀도 어디 한번 갈 데까지 가보자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세 번째 차를 따르고 건네려던 그때 누군가 갑자기 손을 내밀어 그녀를 말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낯빛이 얼음장같이 차가운 유진우였다.“이번에는 내가 할게.”“당신이?”이청아가 화들짝 놀랐다.‘진우 씨 성격에 절대 누구한테 고개를 숙일 사람이 아닌데. 설마 나 때문에?’“네까짓 게 뭔데? 무슨 자격으로 우리 할머니께 차를 올리는 건데?”이서우는 대놓고 그를 무시했다. 그녀가 모욕을 주려는 사람은 이청아였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유진우가 아니었다.“시골 사람들은 정말 예의도 없어. 개나 소나 다 나랑 말 섞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오금란은 고개를 쳐들고 불만을 드러냈다.“차 한잔일 뿐인데 누가 올리든 다 마찬가지 아닌가요? 오늘 제가 기분이 좋아서 직접 올릴게요.”유진우는 찻잔을 건네받고 오금란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차를 오금란의 머리에 그대로 부어버렸다.차에 찻잎이 섞여 있어 떨어진 찻잎이 그녀의 얼굴에 찰싹 달라붙었다.그 순간 현장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유진우의 간덩이가 이 정도로 부었을 줄은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눈앞의 이분은 이씨 가문에서 덕망이 높은 셋째 사모님이다. 평소 어딜 가든 사람들이 그녀를 추어올리기에 바빴고 아부는 늘 있는 일이었다. 그런 그녀가 언제 이런 수모를 당한 적이 있었겠는가?“유진우, 지금 뭐 하는 짓이야!”가장 먼저 사태를 파악한 이서우가 욕설을 퍼부었다.“감히 우리 할머니를 모욕해?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너, 너... 이 빌어먹을 놈 같으니라고! 천추에 용납 못 할 큰 죄를 지었구나!”오금란이 두 눈을 부릅뜨고 노발대발했다.재벌 출신인 그녀는 지위가 아주 높았다. 지금까지 남에게 모욕을 주는 건 늘 그녀였고 그녀를 모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아직도 화가 덜 풀렸네요? 한잔으로 모자라면 한잔 더 드릴게요.”유진우는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뜨거운 물을 한잔 따라 오금란의 얼굴에 냅다 뿌렸다
오목조목 틀린 부분을 짚어내며 지적하는 유진우를 보면서 장경화는 할 말을 잃어 입을 떡 벌린 채 멍하니 서 있었다.주변 모든 사람이 말문이 막힌 채로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둘을 바라보았다.이 많은 대중 앞에서 덕망 높은 3대 가문의 사모님을 훈계하다니, 어찌 감히...?“이...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어디서 나한테 이래라저래라야? 내 말 한마디면 네 집안은 바로 풍비박산이야. 알아?”오금란이 창피함에 뜨겁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리며 소리쳤다.노여움에 전의 점잖음을 모두 잃은 것 같았다.“해보시든가요.”유진우가 조금의 두려움도 보이지 않는 표정으로 대답했다.“그, 그래!” 오금란이 노발대발하더니 대뜸 깔깔 웃었다.“장경화, 이 배은망덕한 것! 내가 이리 고생하며 강능에 온 목적이 바로 너희 가족을 일으키기 위해서인데. 은혜를 모르는 건 둘째 치고, 감사함도 모르고 이리 날뛰는구나! 이 위임장을 보니 주인을 바꾸려는 것 같은데. 너희가 자산이 2조 되는 조경 그룹 회장의 자리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으니 당장 족장에게 알려야겠구나.”그녀가 폰을 꺼내어 전화하려 했다.이를 본 장경화가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무릎을 꿇고 빌었다.“사모님! 제발 멈춰주세요. 이 아이가 한 말은 저희와 아무 관계도 없어요. 저 애 때문에 우리를 탓해서는 안 돼요!”“할머니, 믿지 마세요. 유진우는 장경화의 사위예요!”이서우가 단호하게 말했다.“전 사위! 전 사위라고! 이미 내 딸과 이혼했어!”장경화가 다급히 정정하며 말했다.“흥! 당신네가 어떤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든 상관없어! 한번 결혼했으면 당신네 사람이지!”오금란이 음습한 얼굴로 말했다.“이제 당신들은 내가 만족하도록 제대로 된 설명을 해야 할 거야. 난 기회 준 거니까, 내 탓 하지 마.”“예예예... 바로 사과시키도록 하겠습니다.”장경화가 연거푸 고개를 끄덕이며 유진우를 향해 소리쳤다.“야, 너! 거기 서서 뭐 하는 거야? 빨리 머리 박고 사죄해!”“하겠으면 당신이나 하
그래야만 지금 앉아 있는 이 자리라도 지킬 수 있다.지금 왕위를 이어받을 자격과 능력을 갖춘 사람은 표기 대장군 유태범밖에 없었다.첫째로 유태범은 유씨 가문 사람이라 왕족에 속했기에 명분이 정당했다. 둘째로 표기 대장군으로서 서경의 절반에 달하는 군대를 거느리고 있어 권력이 하늘을 찔렀다. 셋째로 유태범은 오랜 시간 동안 힘을 키워왔다. 인맥, 위신, 공로 모두 왕위에 오르기에 충분했다.현재 유태범이 모든 사람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적지 않은 관원들은 애도를 표한 후 바로 대장군 저택으로 가서 유태범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주었다.이러한 움직임은 당연히 서경왕부의 감시망을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의진은 그들을 제압할 힘이 없었다.“어머니, 벌써 종일 여기 계셨어요. 들어가서 쉬세요. 이러다가 몸이 상하실까 걱정됩니다.”수심과 피곤이 가득한 어머니의 얼굴을 본 유천우가 참다못해 한마디 했다.“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는데 내가 어찌 편히 쉴 수 있겠어.”이의진이 고개를 내저었다.“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까 더 조심해야죠. 서경왕부가 흔들리고 있는 지금 왕비인 어머니가 버티셔야 합니다. 절대 쓰러져선 안 돼요.”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하지만...”이의진은 뭐라 더 얘기하고 싶었지만 유천우가 가로챘다.“어머니, 이번에는 제 말을 들어주세요. 먼저 들어가서 쉬고 내일 아침에 다시 아버지 곁을 지켜도 괜찮아요.”이의진이 대답하기도 전에 유천우는 도우미 두 명을 불러 명령을 내렸다.“너희 둘, 어머니를 방으로 모시고 잘 보살펴드려.”“알겠습니다.”두 도우미는 대답한 후 이의진을 부축했다. 무릎을 하도 오랜 시간 꿇고 있어 다리가 저린 나머지 제대로 서지도 못했다.“천우야, 너도 몸 잘 챙겨. 절대 방심해선 안 돼.”이의진이 당부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유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가 나가는 걸 본 후에야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렸다.“다들 돌아가. 여긴 나 혼자 지키면
그 시각 서경왕부 문 앞.유태범 등 3인은 한 무리의 근위병들을 이끌고 서둘러 걸어 나왔다.서경왕부를 떠난 후 조군영이 참다못해 물었다.“대장군님, 이의진 모자가 주제도 모르고 저렇게 날뛰는데 계속 가만히 내버려 둬야 합니까?”“당연히 내버려 둘 순 없지. 하지만 너무 대놓고 움직여서도 안 돼. 흑용군의 대부분 고급 장교들이 서경왕부에 충성해서 정말 싸우기라도 한다면 우리한테 좋을 게 없어.”유태범이 실눈을 뜨고 말했다.“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조군영이 또 물었다.“대놓고 움직일 수 없다면 몰래 압력을 가해야지.”유태범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서경에 내란이 일어서 서경왕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진정한 리더가 누구인지 알게 될 거야.”“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사람을 보내서 이간질시킬게요. 백성들의 원한이 커져서 서경왕부도 감당이 안 될 때 대장군님이 구세주처럼 등장하는 겁니다. 그때가 되면 서경의 백성들은 대장군님께 고마워할 것이고 새로운 서경왕으로 모시겠죠.”눈치가 참 빠른 조군영이었다.“맞아. 아주 영특하구나, 너. 나중에 내가 서경왕 자리에 앉으면 표기 대장군 자리는 네 것이 될 거야.”유태범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합니다, 대장군님.”조군영은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얼른 움직여. 빠를수록 좋아. 절대 그 어떤 흔적도 남겨선 안 된다는 거 명심해.”유태범이 신신당부했다.“알겠습니다. 제가 깔끔하게 처리하겠습니다.”조군영은 인사를 올린 후 자리를 떠났다.“대장군님, 일반적인 내란이라면 서경왕부의 뿌리를 흔드는 건 불가능할 거예요. 반드시 강력한 무언가가 있어야 해요.”고원이 귀띔했다.“그건 나도 알고 있어.”유태범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동안 난 내 사람을 몰래 키워왔어. 8대 제후 중에 절반이 내 사람이야. 내 명령 한마디면 주저하지 않고 날 도와줄 거야.”“진작 준비하고 계셨군요. 제가 괜한 걱정을 했네요.”고원이 웃으면서 말했다.“걱정하지 마. 내가 서경왕이 되면 절대 섭섭지 않게 해줄게.”
“유태범은 오랫동안 야심을 숨겨왔어요.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으니 이 기회에 무조건 권력을 빼앗으려고 할 겁니다. 이 일 아직 끝나려면 멀었어요.”유천우가 수심에 찬 얼굴로 말했다.“맞아. 대놓고 움직이진 못해도 뒤에서 온갖 수단을 동원할 거야. 앞으로 적지 않은 문제가 생길 게 분명해.”이의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위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절대 함부로 하지 못했을 것이다.“형이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유천우가 한탄하듯 말했다.“천우야, 네 능력도 네 형 못지않아. 네 형이 할 수 있는 일은 너도 할 수 있을 거라 믿어.”이의진이 그를 격려했다.“어머니, 제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어요. 형님에 비하면 한참 부족합니다.”유천우가 고개를 내저었다.“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하지 마.”이의진이 엄격한 얼굴로 말했다.“네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났어. 장례식이 끝난 후에 폐하께 말씀드려서 너한테 왕위를 물려주게 할 거야. 앞으로 서경왕은 너고 그 중책을 맡아야 해.”“어머니, 왕위는 형 거예요. 전 그 자리를 물려받을 생각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서경왕은 형만이 물려받을 자격이 있다고요.”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천우야, 다른 일은 남한테 양보해도 이건 절대 안 돼!”이의진이 어두운 목소리로 호통쳤다.“그 자리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꿈에 그리는 자리인지 알아? 놓치면 평생을 후회할 거라고!”“전 제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요. 저한테 있어서 권력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아버지처럼 매일 애쓰고 힘들게 사는 것보다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유천우가 고개를 내저었다.‘왕이 되면 좋을 게 뭐가 있다고. 걱정거리만 태산일 텐데. 그럴 바엔 맨날 먹고 놀면서 편히 살겠어. 그게 더 좋은 거 아닌가?’“이 녀석아, 일이 네 생각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전에 자유롭게 살 수 있었던 건 다 네 아버지가 있어서야.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금 아무 권력도 손에 쥐지 않는다면 나중에 아주 처참한 결말을 맞이할 거란
“유장혁?”그 소리에 주변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한때 유씨 가문의 천재는 이름을 널리 떨쳤었다. 그런데 10년 전 자금성의 난이 터진 후 완전히 종적을 감추었고 현재까지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런 그의 이름을 갑자기 들으니 놀랄 만도 했다.“도련님,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세자 전하의 생사도 불투명한 데다가 어디 있는지도 아무도 몰라요. 그런 분한테 서경왕의 자리를 맡긴다는 건 너무 터무니없는 소리 아닌가요?”조군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두 손까지 펼쳐 보였다.“그러게요, 도련님. 제발 현실을 잘 알고 말씀하세요. 세자 전하께 기댈 바엔 차라리 대장군님께 기대는 게 더 낫죠.”고원도 나서서 맞장구를 쳤다.유천우가 자기 자신을 얘기할 줄 알았는데 실종된 지 10년이나 된 사람을 얘기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정말 이보다 더 터무니없는 얘기는 없었다.“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형도 꼭 돌아올 겁니다. 그때 가서 형이 왕위를 이어받아도 문제없죠.”유천우가 싸늘하게 말했다.“도련님, 제가 하는 말이 거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만약 세자 전하께서 이미 돌아가셨으면 어떡해요? 서경왕의 자리를 계속 비워둘 작정인가요?”조군영이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형님 죽지 않았고 멀쩡하게 살아있어요. 그러니까 조 장군님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유천우가 말했다.“살아있다면 지금 어디 계시는 거죠? 왜 나타나지 않는 겁니까?”조군영은 일부러 주변을 두리번거렸다.“형님한테 소식을 전했으니 꼭 올 겁니다.”유천우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도련님, 설마 지금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는 건 아니죠?”조군영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위왕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퍼지면 서경 전체가 크게 흔들릴 거예요. 기다릴 시간이 많지 않다고요. 지금 당장 그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맞아요, 도련님. 대국을 생각하셔야죠!”고원도 나서서 유천우를 설득했다.“형한테 자리를 물려주는 건 아버지의 유언이에요. 지금 명령을 거역하겠단 겁니까?”
사람들이 뒤돌아보니 거친 삼베옷을 입고 상복 모자를 쓴 젊은 남자가 차가운 얼굴로 걸어오고 있었다.남자는 위엄이 넘쳤고 온몸에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오랜 시간 전장을 누빈 조군영과 고원마저도 그를 보자마자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표정이 진지해졌다.그 남자는 다름 아닌 유만수의 작은 아들 유천우였다.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유천우는 온 집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하여 예전에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도 많이 저질렀었고 서경의 사고뭉치라 불리기도 했다.그런데 최근 2년 동안 유천우는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변한 듯 더는 빈둥빈둥 놀지 않고 군에 들어가 열심히 살기 시작했다.처음에 사람들은 유천우가 군대에서 3일도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어릴 적부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산 도련님이 군대의 혹독한 훈련을 버틴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그런데 뜻밖에도 유천우는 군대에서 자리를 잡았고 공까지 세웠다.짧은 2년 사이에 병사에서 흑용군의 부장으로 성장했다. 든든한 배경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무척이나 놀라운 성과였다.사람들은 그제야 유천우가 응석받이로 자란 도련님이 아니라 군사 천재라는 걸 알게 되었다.“천우야, 드디어 온 거야?”아들을 보자마자 이의진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겨우 가라앉았던 슬픔이 다시 저도 모르게 밀려왔다.“어머니, 소식 다 들었어요. 제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유천우는 어머니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군영과 고원에게 시선을 옮겼다.“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이렇게 몰아붙이는 겁니까?”“그게...”조군영은 고원의 눈치를 슬쩍 봤다가 어쩔 수 없이 말했다.“도련님, 오해하지 마세요. 저희도 대국을 위해서 이러는 겁니다. 현재 서경왕부에 리더가 없어서 누군가 나서서 이끌어가야 합니다. 안 그러면 많은 문제가 생길 거예요.”“맞아요, 도련님. 대국을 생각하셔야죠.”고원은 충성을 다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대국?”유천우는 코웃음을 치고는 더는 두 사람을 거들떠보지 않
“서경 대원수의 직위는 매우 중요합니다. 내부 투표를 거칠 뿐만 아니라 폐하께 보고하여 최종적으로는 폐하의 결정을 받아야 해요. 우리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어요.” 이의진의 눈빛이 경계로 가득했다.유태범이 왔을 때 그녀는 처음에는 형제 간의 정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조군영과 고원의 몇 마디 말에 그녀는 갑자기 깨달았다. 일이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유태범은 흑용군에서 유만수 다음가는 위망을 가지고 있었다.표기대장군으로서 그는 많은 심복 장수들을 거느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절반의 병권도 장악하고 있었다.왕이 세상을 떠난 후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사람은 유태범이 분명했다.가장 중요한 것은 유태범이 지금 이미 자신의 야심을 드러냈다는 점이다.왕이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권력을 탈취하려 하다니, 그녀는 그의 불순한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심지어 유만수의 죽음이 이 자들과 호룡각 잔당들이 암묵적으로 결탁한 결과일지도 모른다!만약 유태범이 병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무시무시할 것이다.“마마, 급할 때는 권력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 이런 상황에서 어찌 폐하의 결정을 기다릴 시간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반드시 빨리 국면을 안정시켜야 합니다.” 조군영이 계속해서 말했다.“맞습니다!”고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장수가 밖에 있으면 군령도 받지 않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폐하는 상황을 전혀 모르니 결정을 내릴 수 없습니다. 반드시 우리가 스스로 결정해야 하며 그래야만 소인배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폐하에게 보고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내부 투표를 거쳐야 합니다. 그래야만 모두가 승복할 수 있어요.” 이의진이 다시 말했다.“투표라니요? 이게 투표할 일입니까? 전 서경을 둘러봐도 대장군님보다 원수 자리에 더 적합한 분이 누가 있습니까?” 조군영이 말했다.“그렇습니다, 왕비마마! 공적으로 보나, 위망으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무공으로 보나 어르신을 제외하고는
고원이 갑자기 큰 소리로 외치며 바로 땅에 무릎을 꿇고 세 번 크게 머리를 조아렸다.그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고 가까운 사람을 잃은 듯한 모습이었다.비록 똑같이 연기였지만 조군영보다는 훨씬 진실되어 보였다.“표기대장군 도착하셨습니다!”이때 문밖에서 우렁찬 외침이 울렸다.곧이어 금빛 갑옷을 입고 기상이 비범한 중년 남자가 급하게 걸어 들어왔다.이 사람이 바로 일품 표기대장군 유태범이었다!유태범은 표기대장군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유만수의 사촌 동생이기도 했다.유태범은 어릴 때부터 문무를 겸비하고 천부적 재능이 있어 모든 면에서 매우 뛰어났다.만약 유만수가 없었다면 분명 유씨 가문의 가장 빛나는 천재였을 것이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유만수라는 세상에 둘도 없는 영웅 앞에서는 아무리 대단한 천재라도 빛이 바랠 수밖에 없었다.“대장군께 인사드립니다!”유태범을 보자 조군영과 고원은 즉시 가식적인 표정을 거두고 공손히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그들 둘은 모두 유태범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진정한 측근 장수들이었다.마치 유만수와 석태혁의 관계처럼 영광도 함께 하고 손실도 함께했다.“형님!”유태범은 두 심복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영당에 들어서자마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땅에 무릎을 꿇었다.그의 두 눈은 붉게 충혈되었고 입술은 떨리며 얼굴에는 비통함과 분노의 빛이 어려 있었다.“어찌 이럴 수가? 우리 형님이 어찌 돌아가실 수가 있단 말입니까? 도대체 누가 한 짓입니까?!”유태범이 붉은 눈으로 연달아 분노의 외침을 터뜨렸다.“호룡각의 잔당들입니다. 그들이 자객을 부내에 잠입시켜 어젯밤 어르신을 암살했습니다.” 이의진의 얼굴이 흐리멍덩했다.“호룡각?”유태범이 이를 갈며 분노에 차 있다가 즉시 고함쳤다. “누구 없느냐! 즉시 군대를 집결시켜 전 성을 수색하라. 반드시 범인을 체포해야 한다!”“잠깐만요!”이의진이 갑자기 나서서 제지했다.“태범 씨, 매우 비통한 것을 알지만 지금은 아직 일을 크게 만들 수 없습니다.”“형님이 이미 돌아가셨는데 무
이 말이 나오자 조군영과 고원의 안색이 순간 변했다.두 사람이 오늘 온 것은 본래 기세를 과시하려는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이의진이 이렇게 강경한 태도를 보일 줄은 몰랐다.입을 열자마자 반역이라는 죄명을 들이대다니.이런 죄가 뒤집어씌워진다면 그들은 아마 왕부의 대문을 살아서 나가지 못할 것이다.“마마, 농담 마십시오. 반역은 사형감입니다. 저희가 아무리 대범하다 해도 그런 일은 감히 못 하지요!” 고원이 연달아 해명했다.“맞습니다. 저희는 왕께 항상 충성을 다해왔는데 어찌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조군영도 따라서 부인했다.비록 두 사람 모두 그런 야심이 조금은 있었지만 명백히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적어도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반역할 생각이 없다면 어째서 갑옷을 입고 부내에 들어오시는 것입니까? 규칙도 모르십니까?” 이의진이 조금도 봐주지 않고 꾸짖었다.그저 이품 장군일 뿐인데 군권이 조금 있다고 감히 왕부 안에서 눈깔을 찌푸리고 있다니.유만수가 살아있을 때 이 둘은 감히 이러지 못했다.“아이고! 제 정신 좀 보세요, 왕부의 규칙을 잊었네요. 마마께서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조군영이 헛웃음을 지었다.이어서 갑옷을 벗고 차고 있던 칼을 내려 왕부의 경비에게 건넸다.“저희가 급히 오느라 깊이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의도치 않은 행동이었으니 개의치마시지요.” 고원이 웃으며 말했고 즉시 갑옷과 칼을 벗었다.이 광경을 보고 이의진의 안색이 비로소 조금 누그러졌지만 어조는 여전히 차가웠다. “갑자기 찾아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왕께서 자객의 습격을 받아 위험한 상황이라는 소식을 듣고 저희 둘이 특별히 문안드리러 왔습니다.”고원이 가식적으로 말했다.“소식통이 꽤나 빠르군요. 하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이의진이 차갑게 말했다.“늦었다니요? 무슨 뜻입니까?” 두 사람이 의아한 척했다.이의진은 설명할 가치도 느끼지 못하고 몸을 돌려 영당으로 향했다.왕부 밖은 비록 동정이 없었지만 왕부 안에는 이미 흰 만장이 가득
“알겠습니다. 제가 경비병 신분을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들어가시기 전에 먼저 변장을 하셔야 합니다.” 손도운이 결국 타협했다.비록 위험이 있긴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다....정오 무렵, 서경 왕부 안.비록 유만수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봉쇄되었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관리들이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어떤 이들은 비통한 마음으로 조문을 왔고 또 어떤 이들은 다른 목적을 품고 있었다.“보국대장군 도착!”“운미대장군 도착!”왕부 문 앞에서 두 번의 외침이 들렸다.곧이어 갑옷을 입은 체격이 우람한 중년 남자 둘이 각각 친병들을 대동하고 걸어 들어왔다.이 친병들은 모두 허리에 장도를 차고 있었고 보기에도 험상궂었다.온 이들은 바로 이품 관직인 보국대장군 조군영과 운미대장군 고원이었다.“두 분, 왕부에 들어오시기 전에는 반드시 갑옷과 무기를 해제하셔야 합니다.”한 왕부 친위가 조군영과 고원을 막아서며 동시에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흥! 난 밖에 나올 때 갑옷을 벗지 않아. 꺼져!” 조군영이 노하여 꾸짖었다.“조 장군, 이건 왕부의 규칙입니다. 따라주시기 바랍니다.”왕부 친위가 말했다.“규칙? 나한테 감히 규칙을 운운한 건가?”조군영이 왕부 친위의 얼굴을 때리며 소리쳤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감히 규칙을 들먹이며 나를 압박하느냐? 죽고 싶나?”“조 장군, 소인도 명령을 받들어 행하는 것뿐입니다.” 왕부 친위는 동요하지 않았다.“헛소리 작작 하고 비켜. 그렇지 않으면 네 목을 벨 것이다!”조군영이 갑자기 칼을 뽑아 왕부 친위의 목에 겨누었고 그의 모습은 매우 포악하고 극도로 횡포했다.“제 머리를 베신다 해도 규칙은 지켜야 합니다.” 왕부 친위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이 개자식! 관짝을 보기 전에는 정신을 못 차리겠구나!”조군영은 마침내 화를 내며 칼을 거세게 들어 왕부 친위의 팔을 향해 내리쳤다.“멈추세요!”이때 한 소리의 여성의 호통이 울렸다.삼베 흰옷을 입은 이의진이 석태혁 일행을 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