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등 굽은 중년 남자의 등장에 용수현과 용씨 가문 넷째 어르신은 두피가 저렸고 소름이 돋았다.눈앞에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용국의 지존이자, 천자도 예의를 갖춰 대하는 대단한 존재인 위왕, 유만수였다. 유만수의 심기를 건드렸다가는 그들 모두 살아남지 못할 수도 있었다.“뭐야?”굽은 등의 중년 남자, 유만수를 본 유진우는 자기도 모르게 안색이 어두워졌고 눈에는 분노가 이글거렸다.“볼만한 구경거리가 생기겠는걸.”조무진은 입꼬리를 씰룩거리더니 이내 한쪽으로 물러서며 깨 고소해하는 표정을 지었다.만인의 주목을 받으며 굽은 등의 중년 남자가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위풍이나 기세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그저 보통 중년 남자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중년 남자가 지나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며 물러섰다. 그 중년 남자는 유진우 앞에 멈춰 섰다.“오랫동안 못 봤는데, 네놈이 이렇게 컸을 줄이야.”유만수는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큰 유진우를 보며 절로 씩 웃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드러난 이를 보니 조금 우스꽝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당신이 아직도 죽지 않았을 줄은 몰랐네요.”유진우는 눈빛에 칼을 품은듯했고 말투가 유난히 차가웠다. 그 말을 들은 용수현 등은 어안이 벙벙해졌다.‘이 녀석은 대체 정체가 뭐길래 이런 망언을 퍼붓는 것이야? 감히 위왕께 이런 말을 하다니?’“허허... 착하게 산 사람보다 죄악을 많이 지은 사람일수록 마음대로 죽지도 못한다더니, 내가 딱 그 꼴이 난 거지.”유만수는 오히려 호탕하게 웃어넘겼고 전혀 화난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그래요? 하지만 당신의 꼬락서니는 전혀 장수할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걸요.”유진우가 예의도 없이 차갑게 툭 던졌다.“이놈아! 너처럼 아비를 저주하는 아들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단 말이냐?”유만수가 또다시 호탕하게 웃으며 받아쳤다.“당신이 저랑 무슨 상관있다고 그래요? 쇼 좀 하지 마세요.”유진우가 가차 없이 쏘아붙였다.“네가
이 시각, 이씨 가문 별장 내에서 장경화는 한창 요란법석을 떨며 짐을 싸느라 여념이 없었고 순식간에 캐리어 두 개를 꽉 채워 끌고 나오며 말했다.“청아야! 서두르지 않고 뭐 하니... 돈이 될만한 명품 가방, 목걸이 등 보석들은 전부 찾아내! 더이상 강능에 머물 수는 없어, 서둘러 정리하고 당분간 해외로 떠나있자! 항공권은 이미 끊어뒀고 통장에 들어있던 여윳돈도 몇억 되니까 당분간 생활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거야.”장경화는 초조한 얼굴로 재촉했다. 모두가 지켜보는 와중에 용씨 가문과의 혼사를 엎어버린 것은 용씨 가문은 물론, 강북 이씨 가문까지 건드린 경우였다. 그 때문에 작은 강능뿐만 아니라, 용국 전체에 발 디딜 곳이 없게 되었다.“청아야! 뭐 하고 있어? 얼른 짐 싸라고 했잖아!”이청아가 자기 말대로 움직이지 않자, 장경화는 화가 치밀어올랐다.“엄마, 그러실 필요 없어요.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굳이 도망가듯 짐을 쌀 필요 없단 말이에요.”이청아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어휴! 내가 답답한 딸내미 때문에 속 터져 못살아! 아직도 이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거야?”장경화는 허벅지를 내리치며 안타까워했다.“용씨 가문이잖아! 중주의 재벌가, 권력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무서운 존재! 이렇게 모두가 지켜보는 상황에서 용씨 가문의 체면을 깎아내렸으니 용씨 가문은 절대로 가만있지 않을 거라고!”“저도 알아요. 하지만 진우 씨가 알아서 해결할 거라고 했으니, 기다려 볼래요.”이청아가 말했다.“너 제정신이야? 그 멍청한 녀석의 말만 믿고 기다리겠다고?”장경화가 뒷목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유진우가 뭔데, 무슨 재주로 용씨 가문을 상대한단 말이야? 게다가 그 녀석이 너의 혼사를 망친 것만 아니면 우리 이씨 가문이 이런 사태에 휘말릴 일은 없었을 거야! 그놈은 재수탱이야!”예정대로라면 이씨 가문은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진우 때문에 그들은 하늘이 내린 기회를 잃게 되었다. 그 때문에 유진우는 장경화
“데리고 나가!”이서우가 가볍게 손짓하며 강압적으로 이청아를 끌어내라고 했다.“누가 감히 움직여!”별안간 문밖에서 누군가의 근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유진우가 왕현을 데리고 기세등등하게 들어왔다.“함부로 경거망동한다면 가만두지 않겠어!”“진우 씨?”지금까지 굳어있던 이청아의 표정이 밝아졌다. 지금까지 마음졸이던 이청아는 그제야 걱정을 내려놓았고 유진우가 무사히 돌아올 거란 약속을 지켰다는 것에 안도감이 들었다. “너... 어떻게 아직 살아있는 거야?!”이서우는 눈을 부릅뜨고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그녀가 떠나기 전에 유진우는 이미 포위됐었는데 말이다. 아무리 대단한 실력자라고 해도 용씨 가문의 포위망을 뚫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했다.“그러게 말이야? 방금 그 말은 내가 죽기를 바라고 있었다는 것으로 이해해도 될까? 어쨌든 나는 네 어머니를 살려준 생명의 은인인데, 어떻게 조금의 고마움도 없을 수 있지?”유진우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흥! 딴소리하지 마! 어떻게 도망쳐 나왔는지는 몰라도 용씨 가문의 눈에 찍힌 이상, 당신들은 모두 살아남을 수 없을 거야!”이서우가 눈에 불을 켜고 말했다.“용씨 가문이 뭔 대수라고? 이렇게 멀쩡하게 나온 건 나도 해결책이 있었기 때문이야.”유진우가 담담하게 말했다.“해결책? 웃기고 있네... 어떻게 해결했는데? 의사 나부랭이 주제에 용씨 가문과 맞서기라도 했어? 죽고 싶어서 환장했구나!”이서우가 차갑게 웃었다.“모든 사람을 네 기준에서 보려고 하지 좀 마. 난 용씨 가문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용호걸이 직접 찾아와 무릎 꿇고 사과하게 할 수도 있으니까!”유진우가 강력하게 말했다.“무릎 꿇고 사과하게 해?”이서우는 흠칫하더니 껄껄 웃기 시작했다.“유진우, 제정신이야?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네가 무슨 자격으로 용씨 가문 도련님의 사과를 받아낸다는 거야?”“흥! 능력도 없는 놈이 입만 살아서! 내 딸이 너 같은 녀석을 좋아하는 게 이해가 안 될 따
“이청아 씨, 부디 용서해 주세요!”용호걸이 무릎을 꿇은 후, 한 무리의 용씨 가문 사람들이 우르르하고 동시에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어...”예상치 못한 장면에 이청아는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이서우도 마찬가지였고 울부짖던 장경화마저도 울음을 멈추고 한참 동안 멍하니 서서 상황을 파악하려고 했다.‘용씨 가문이 책임을 물으러 온 게 아니란 말인가? 먼저 무릎을 꿇고 사과하다니? 재벌가 자제이자 중주의 실세라고 불리는 용호걸이 왜 갑자기 이처럼 비굴한 신세가 된 걸까?’“이청아 씨! 죄송합니다! 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어 큰 잘못을 범했네요.부디 저를 용서해 주세요!”이청아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미친 듯이 자기 얼굴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이내 붉게 부어오른 그의 얼굴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30분 전 결혼식장에서 유진우의 정체를 알게 된 그는 그대로 놀라 주저앉았고 자신의 처지를 한순간에 깨닫게 되었다.심지어 큰아버지인 용수현은 이 일에 용씨 가문이 연루되지 않게 하려고 그를 집에서 내쫓았고 철저히 선을 그었다.하지만 뜻밖에도 유진우는 그를 풀어주었다. 물론 이청아에게 가서 직접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있었다.그 결과에 용호걸은 당연히 기쁠 수밖에 없었고, 즉시 이씨 가문의 별장으로 달려가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했다. 목숨만 건질 수 있다면, 존엄이 뭐가 중요할까 싶었다.“뭐 하세요?”퉁퉁 부어오른 얼굴을 한 용호걸을 보며 이청아는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고 잔뜩 당황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생사를 내세워 협박까지 해대던 용씨 가문 큰 도련님이 순식간에 자기 앞에 무릎을 꿇을 줄은 상상조차 못 해볼 일이었다. 이런 상황은 그녀로서 정말 이해하기 어려웠다.“내가 노안이라 잘못 본 거 아니겠지?”장경화는 계속해서 눈을 비비며, 좀처럼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용호걸은 권세를 손에 쥔 재벌가 도련님이잖아?’“도련님, 이게 무슨
이청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괴한 표정을 지었다.“도련님께서 더는 저희를 귀찮게 하지 않으신다고 약속하신다면 저희가 어찌 감히 도련님께 죄를 묻겠습니까?”“맞아요! 도련님, 빨리 일어나세요... 피를 이렇게 많이 흘렸으니, 제가 밴드라도 찾아드릴게요.”장경화는 급히 침실로 뛰어 들어가 약상자를 뒤졌다.‘밴드?’용호걸은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장난하나? 손가락 두 개가 잘려 나갔는데, 밴드가 무슨 소용이 있겠어?’“도련님, 우선 병원이라도 가보시죠? 피가 쉽게 멈출 것 같진 않아 보이네요.”이청아가 떠보는 듯 물었다.“이청아 씨, 그러면 저를 용서하신 건가요?”용호걸이 간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네, 앞으로 저를 귀찮게 하지 않으신다고 약속만 해주시면 됩니다.”이청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당연하죠! 지금 바로 꺼질게요. 그리고 다시는 당신의 눈앞에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용호걸은 너무 기쁜 나머지 싱글벙글 웃으며 이청아와 유진우를 향해 절을 하고 황급히 사람들을 데리고 도망쳤다.“저기요! 도련님! 밴드 갖고 가세요!”장경화는 한참 동안 찾은 밴드를 들고 끊임없이 흔들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머리 한 번 돌리지 않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이청아! 딱 기다려라. 오늘 일은 이렇게 쉽게 끝날 리가 없으니까!”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이서우도 서둘러 자리를 떴다.오늘 일어난 일은 정말 기이하다고 할 정도였다. 용씨 가문의 도련님이 이청아에게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다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그녀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자세히 조사해야겠다고 생각했다.“청아야, 용호걸이 자극받아서 머리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니겠지?”사람들이 떠난 후, 장경화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한마디 물었다. 그녀가 보기에 용호걸이 엄청난 충격을 받은 것이 아니고서는 이렇게 쉽게 그녀들에게 잘못을 인정할 리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자기 손가락까지 잘라가면서 성의를 표시하다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런 행
“어?”유만수를 보자마자 유진우의 얼굴에 있던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졌고 한없이 냉담해졌다.“여길 어디라고 들어와요, 나가요!”“오해하지 마, 내 며느리 보러 온 거니까 너랑은 상관없어.”유만수는 싱글벙글 웃으며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걸어왔다.“뭐야, 아는 분이야?”이청아는 두 사람을 번갈아보았고 두 눈에는 의아함이 가득했다.“네가 청아인가 보구나? 듣던 대로 미인이네!”유만수가 웃으며 말했다.“아차, 내 소개를 먼저 할게. 나는 유진우의 아버지 되는 사람이야, 네 시아버지다.”“아버님?”이청아는 흠칫 놀랐고 잠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유진우에게 큰 재능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외모는 아주 출중한 편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중년 남자는 유진우의 아버지라고 하기엔 두 사람에게서 닮은 구석을 찾기 힘들었다.“왜? 안 닮은 것 같아?”유만수는 머쓱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이 아이는 어려서부터 엄마를 꼭 빼닮았었어. 그것도 다행이지 뭐, 나를 닮았다면 청아처럼 예쁜 아내를 얻지 못했을 거야.”“아버님, 제발 그런 말씀 마세요. 아버님도 여전히 위엄이 있으십니다.”이청아는 본의 아니게 자기 생각이 읽힌 것 같아 민망해졌다.“유만수! 당신이 만나려고 했던 사람도 이미 만났으니, 이젠 나가주세요. 여기는 당신을 환영하지 않아요!”유진우가 불쑥 입을 열었다.“진우 씨! 왜 그래? 아버님께 무슨 말버릇이야!”이청아는 유진우를 힐끗 쳐다보고는 다시 유만수를 보며 민망한 듯한 미소를 지으면서 살갑게 말했다.“아버님, 진우 씨가 오늘 기분 나쁜 일이 있어서 평소답지 않게 날이 서 있네요,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자리에 앉으세요, 제가 차 한 잔 대접해 드릴게요.”“그래...”유만수는 싱글벙글했다.“흥! 우리 집에 빌붙을 인간이 또 한 명 늘었나 보다!”장경화는 유만수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나서 표정이 거만해졌다. 그녀는 상대방의 옷차림만 보고 바로 부잣집은 아니라고 단정 지었다.‘역시 그 아들에 그 아버지네, 쓸모없는 인
“식사 준비가 다 됐어요!”귀중한 선물을 받았던 터라 장경화는 눈 깜짝할 사이에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진수성찬을 차렸다. 다섯 가지 요리에 찌개도 빠지지 않았다. 유진우는 핑계라도 만들어 이 불편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시도했지만 이청아의 만류로 어쩔 수 없이 유만수와 같은 식탁에 앉아 밥을 먹게 되었다.이는 두 부자가 십 년 만에 같은 식탁에 마주 앉은 것이었다. 유만수는 그동안 오매불망 그리던 아들과의 식사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들의 용서를 받지는 못했지만 함께 밥 한 끼 먹는 것만으로도 유만수는 만족했고 감격스러웠다.아무도 유만수에게 이런 여린 모습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살인하고도 눈 한번 깜짝하지 않던 기세등등한 위왕이 아들과의 식사에 눈물을 보일 줄이야!식사가 끝난 뒤, 더 있다가는 아들놈이 틀림없이 성질을 부릴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기에 유만수는 눈치 있게 서둘러 작별 인사를 고하고 떠나려 했다. 별장을 나선 유만수는 그 어느 때보다 기분이 좋았다.“어르신, 어떻게 되셨어요?”차에 타자, 조수석에 앉아있던 홍복홍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하하하... 오늘 아들 녀석이랑 밥 한 끼 먹었다!”유만수는 입이 귀에 걸려있었는데 마치 원하던 것을 이룬 아이 같았다. 백미러로 그 모습을 본 기사는 그저 의아할 따름이었다.‘아들과 밥 한 끼 먹는 게 저 정도로 즐거워할 일인가? 위왕으로서의 위엄을 차리셔야지, 참!’“축하드립니다, 어르신! 성공적인 첫발을 내디디신 겁니다.”홍복홍도 보기 드물게 웃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홍복홍은 자신이 모시는 어르신에게 있어서 전쟁에서 열 번 승리를 거두는 것보다 도련님과 식사 한 끼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첫 시작은 좋지만 그 녀석의 성격으로는 더 이상 진전이 있기가 어려울 거야.”기쁨도 잠시, 유만수는 또다시 고뇌에 잠겼다.“어르신, 천천히 시간을 두고 가까워져도 괜찮아요. 언젠가 도련님도 어르신의 고충을 이해하실 날이 올 겁니다.”홍복홍이 위로했다.“그렇
그녀는 유진우의 과거가 매우 궁금했다. 요 며칠 동안 지켜본 결과, 그녀는 상대방의 속내를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건 말하려면 두서가 길어질 것 같아. 나중에 말해줄게.”유진우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그래, 말하고 싶어지면 언제든 괜찮으니, 그때 알려줘.”이청아가 싱긋 웃었다.“알겠어.”유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날씨가 선선해졌으니, 함께 백화점 좀 둘러보고 옷도 몇 벌 사자.”이청아가 불쑥 말했다.“그래, 그런데 미리 말하지만 난 돈 없어.”유진우가 어깨를 으쓱했다.“어휴, 저 인색한 꼴 좀 봐!”이청아가 유진우를 째려보며 말했다.“너한테 계산하라고 할 생각 없었어. 오늘은 사고 싶은 거 다 사도 좋아, 내가 계산할게!”“그러면 이 대표님께 미리 감사드릴게요.”유진우는 두말하지 않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3년의 결혼생활을 하면서 두 사람이 함께 쇼핑한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아이고! 이 반짝이는 사파이어 좀 봐! 오늘은 정말 운수 좋은 날이야!”두 사람이 외출하자, 장경화는 즉시 사파이어 보석을 꺼내 자세히 감상하기 시작했는데,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이모, 여기서 뭐 보고 있어요?”그때 단소홍이 불쑥하고 들어왔다.“소홍아! 마침 잘 왔어. 이모 손에 뭐가 들었나 한번 볼래?”장경화는 자랑하듯 손에 들고 있던 사파이어를 건넸다.“사파이어네요?!”단소홍은 사파이어를 보자마자 호흡이 가빠졌다.“이모님, 어디서 이렇게 큰 사파이어 하나를 얻으셨어요? 보기만 해도 엄청난 가치가 있을 것 같네요!”“하하, 믿을 수 없겠지만, 이 사파이어는 유진우의 아버지가 주신 거야.”장경화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네? 유진우의 아버지요?”단소홍은 어리둥절해하며 말을 이었다.“이모, 유진우는 가난한 집안 출신이라면서요? 그런데 유진우의 아버지가 어떻게 이런 보물을 선물할 능력이 되겠습니까?”“그 점은 나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어.”장경화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유진우의 평소 행실만 보고 우
그래야만 지금 앉아 있는 이 자리라도 지킬 수 있다.지금 왕위를 이어받을 자격과 능력을 갖춘 사람은 표기 대장군 유태범밖에 없었다.첫째로 유태범은 유씨 가문 사람이라 왕족에 속했기에 명분이 정당했다. 둘째로 표기 대장군으로서 서경의 절반에 달하는 군대를 거느리고 있어 권력이 하늘을 찔렀다. 셋째로 유태범은 오랜 시간 동안 힘을 키워왔다. 인맥, 위신, 공로 모두 왕위에 오르기에 충분했다.현재 유태범이 모든 사람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적지 않은 관원들은 애도를 표한 후 바로 대장군 저택으로 가서 유태범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주었다.이러한 움직임은 당연히 서경왕부의 감시망을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의진은 그들을 제압할 힘이 없었다.“어머니, 벌써 종일 여기 계셨어요. 들어가서 쉬세요. 이러다가 몸이 상하실까 걱정됩니다.”수심과 피곤이 가득한 어머니의 얼굴을 본 유천우가 참다못해 한마디 했다.“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는데 내가 어찌 편히 쉴 수 있겠어.”이의진이 고개를 내저었다.“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까 더 조심해야죠. 서경왕부가 흔들리고 있는 지금 왕비인 어머니가 버티셔야 합니다. 절대 쓰러져선 안 돼요.”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하지만...”이의진은 뭐라 더 얘기하고 싶었지만 유천우가 가로챘다.“어머니, 이번에는 제 말을 들어주세요. 먼저 들어가서 쉬고 내일 아침에 다시 아버지 곁을 지켜도 괜찮아요.”이의진이 대답하기도 전에 유천우는 도우미 두 명을 불러 명령을 내렸다.“너희 둘, 어머니를 방으로 모시고 잘 보살펴드려.”“알겠습니다.”두 도우미는 대답한 후 이의진을 부축했다. 무릎을 하도 오랜 시간 꿇고 있어 다리가 저린 나머지 제대로 서지도 못했다.“천우야, 너도 몸 잘 챙겨. 절대 방심해선 안 돼.”이의진이 당부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유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가 나가는 걸 본 후에야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렸다.“다들 돌아가. 여긴 나 혼자 지키면
그 시각 서경왕부 문 앞.유태범 등 3인은 한 무리의 근위병들을 이끌고 서둘러 걸어 나왔다.서경왕부를 떠난 후 조군영이 참다못해 물었다.“대장군님, 이의진 모자가 주제도 모르고 저렇게 날뛰는데 계속 가만히 내버려 둬야 합니까?”“당연히 내버려 둘 순 없지. 하지만 너무 대놓고 움직여서도 안 돼. 흑용군의 대부분 고급 장교들이 서경왕부에 충성해서 정말 싸우기라도 한다면 우리한테 좋을 게 없어.”유태범이 실눈을 뜨고 말했다.“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조군영이 또 물었다.“대놓고 움직일 수 없다면 몰래 압력을 가해야지.”유태범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서경에 내란이 일어서 서경왕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진정한 리더가 누구인지 알게 될 거야.”“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사람을 보내서 이간질시킬게요. 백성들의 원한이 커져서 서경왕부도 감당이 안 될 때 대장군님이 구세주처럼 등장하는 겁니다. 그때가 되면 서경의 백성들은 대장군님께 고마워할 것이고 새로운 서경왕으로 모시겠죠.”눈치가 참 빠른 조군영이었다.“맞아. 아주 영특하구나, 너. 나중에 내가 서경왕 자리에 앉으면 표기 대장군 자리는 네 것이 될 거야.”유태범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합니다, 대장군님.”조군영은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얼른 움직여. 빠를수록 좋아. 절대 그 어떤 흔적도 남겨선 안 된다는 거 명심해.”유태범이 신신당부했다.“알겠습니다. 제가 깔끔하게 처리하겠습니다.”조군영은 인사를 올린 후 자리를 떠났다.“대장군님, 일반적인 내란이라면 서경왕부의 뿌리를 흔드는 건 불가능할 거예요. 반드시 강력한 무언가가 있어야 해요.”고원이 귀띔했다.“그건 나도 알고 있어.”유태범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동안 난 내 사람을 몰래 키워왔어. 8대 제후 중에 절반이 내 사람이야. 내 명령 한마디면 주저하지 않고 날 도와줄 거야.”“진작 준비하고 계셨군요. 제가 괜한 걱정을 했네요.”고원이 웃으면서 말했다.“걱정하지 마. 내가 서경왕이 되면 절대 섭섭지 않게 해줄게.”
“유태범은 오랫동안 야심을 숨겨왔어요.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으니 이 기회에 무조건 권력을 빼앗으려고 할 겁니다. 이 일 아직 끝나려면 멀었어요.”유천우가 수심에 찬 얼굴로 말했다.“맞아. 대놓고 움직이진 못해도 뒤에서 온갖 수단을 동원할 거야. 앞으로 적지 않은 문제가 생길 게 분명해.”이의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위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절대 함부로 하지 못했을 것이다.“형이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유천우가 한탄하듯 말했다.“천우야, 네 능력도 네 형 못지않아. 네 형이 할 수 있는 일은 너도 할 수 있을 거라 믿어.”이의진이 그를 격려했다.“어머니, 제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고 있어요. 형님에 비하면 한참 부족합니다.”유천우가 고개를 내저었다.“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하지 마.”이의진이 엄격한 얼굴로 말했다.“네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났어. 장례식이 끝난 후에 폐하께 말씀드려서 너한테 왕위를 물려주게 할 거야. 앞으로 서경왕은 너고 그 중책을 맡아야 해.”“어머니, 왕위는 형 거예요. 전 그 자리를 물려받을 생각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서경왕은 형만이 물려받을 자격이 있다고요.”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천우야, 다른 일은 남한테 양보해도 이건 절대 안 돼!”이의진이 어두운 목소리로 호통쳤다.“그 자리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꿈에 그리는 자리인지 알아? 놓치면 평생을 후회할 거라고!”“전 제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요. 저한테 있어서 권력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아버지처럼 매일 애쓰고 힘들게 사는 것보다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유천우가 고개를 내저었다.‘왕이 되면 좋을 게 뭐가 있다고. 걱정거리만 태산일 텐데. 그럴 바엔 맨날 먹고 놀면서 편히 살겠어. 그게 더 좋은 거 아닌가?’“이 녀석아, 일이 네 생각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전에 자유롭게 살 수 있었던 건 다 네 아버지가 있어서야.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금 아무 권력도 손에 쥐지 않는다면 나중에 아주 처참한 결말을 맞이할 거란
“유장혁?”그 소리에 주변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한때 유씨 가문의 천재는 이름을 널리 떨쳤었다. 그런데 10년 전 자금성의 난이 터진 후 완전히 종적을 감추었고 현재까지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런 그의 이름을 갑자기 들으니 놀랄 만도 했다.“도련님,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세자 전하의 생사도 불투명한 데다가 어디 있는지도 아무도 몰라요. 그런 분한테 서경왕의 자리를 맡긴다는 건 너무 터무니없는 소리 아닌가요?”조군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두 손까지 펼쳐 보였다.“그러게요, 도련님. 제발 현실을 잘 알고 말씀하세요. 세자 전하께 기댈 바엔 차라리 대장군님께 기대는 게 더 낫죠.”고원도 나서서 맞장구를 쳤다.유천우가 자기 자신을 얘기할 줄 알았는데 실종된 지 10년이나 된 사람을 얘기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정말 이보다 더 터무니없는 얘기는 없었다.“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형도 꼭 돌아올 겁니다. 그때 가서 형이 왕위를 이어받아도 문제없죠.”유천우가 싸늘하게 말했다.“도련님, 제가 하는 말이 거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만약 세자 전하께서 이미 돌아가셨으면 어떡해요? 서경왕의 자리를 계속 비워둘 작정인가요?”조군영이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형님 죽지 않았고 멀쩡하게 살아있어요. 그러니까 조 장군님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유천우가 말했다.“살아있다면 지금 어디 계시는 거죠? 왜 나타나지 않는 겁니까?”조군영은 일부러 주변을 두리번거렸다.“형님한테 소식을 전했으니 꼭 올 겁니다.”유천우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도련님, 설마 지금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는 건 아니죠?”조군영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위왕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퍼지면 서경 전체가 크게 흔들릴 거예요. 기다릴 시간이 많지 않다고요. 지금 당장 그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맞아요, 도련님. 대국을 생각하셔야죠!”고원도 나서서 유천우를 설득했다.“형한테 자리를 물려주는 건 아버지의 유언이에요. 지금 명령을 거역하겠단 겁니까?”
사람들이 뒤돌아보니 거친 삼베옷을 입고 상복 모자를 쓴 젊은 남자가 차가운 얼굴로 걸어오고 있었다.남자는 위엄이 넘쳤고 온몸에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오랜 시간 전장을 누빈 조군영과 고원마저도 그를 보자마자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표정이 진지해졌다.그 남자는 다름 아닌 유만수의 작은 아들 유천우였다.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유천우는 온 집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하여 예전에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도 많이 저질렀었고 서경의 사고뭉치라 불리기도 했다.그런데 최근 2년 동안 유천우는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변한 듯 더는 빈둥빈둥 놀지 않고 군에 들어가 열심히 살기 시작했다.처음에 사람들은 유천우가 군대에서 3일도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어릴 적부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산 도련님이 군대의 혹독한 훈련을 버틴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그런데 뜻밖에도 유천우는 군대에서 자리를 잡았고 공까지 세웠다.짧은 2년 사이에 병사에서 흑용군의 부장으로 성장했다. 든든한 배경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무척이나 놀라운 성과였다.사람들은 그제야 유천우가 응석받이로 자란 도련님이 아니라 군사 천재라는 걸 알게 되었다.“천우야, 드디어 온 거야?”아들을 보자마자 이의진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겨우 가라앉았던 슬픔이 다시 저도 모르게 밀려왔다.“어머니, 소식 다 들었어요. 제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유천우는 어머니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군영과 고원에게 시선을 옮겼다.“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이렇게 몰아붙이는 겁니까?”“그게...”조군영은 고원의 눈치를 슬쩍 봤다가 어쩔 수 없이 말했다.“도련님, 오해하지 마세요. 저희도 대국을 위해서 이러는 겁니다. 현재 서경왕부에 리더가 없어서 누군가 나서서 이끌어가야 합니다. 안 그러면 많은 문제가 생길 거예요.”“맞아요, 도련님. 대국을 생각하셔야죠.”고원은 충성을 다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대국?”유천우는 코웃음을 치고는 더는 두 사람을 거들떠보지 않
“서경 대원수의 직위는 매우 중요합니다. 내부 투표를 거칠 뿐만 아니라 폐하께 보고하여 최종적으로는 폐하의 결정을 받아야 해요. 우리가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어요.” 이의진의 눈빛이 경계로 가득했다.유태범이 왔을 때 그녀는 처음에는 형제 간의 정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조군영과 고원의 몇 마디 말에 그녀는 갑자기 깨달았다. 일이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유태범은 흑용군에서 유만수 다음가는 위망을 가지고 있었다.표기대장군으로서 그는 많은 심복 장수들을 거느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절반의 병권도 장악하고 있었다.왕이 세상을 떠난 후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사람은 유태범이 분명했다.가장 중요한 것은 유태범이 지금 이미 자신의 야심을 드러냈다는 점이다.왕이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권력을 탈취하려 하다니, 그녀는 그의 불순한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심지어 유만수의 죽음이 이 자들과 호룡각 잔당들이 암묵적으로 결탁한 결과일지도 모른다!만약 유태범이 병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면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무시무시할 것이다.“마마, 급할 때는 권력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 이런 상황에서 어찌 폐하의 결정을 기다릴 시간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반드시 빨리 국면을 안정시켜야 합니다.” 조군영이 계속해서 말했다.“맞습니다!”고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장수가 밖에 있으면 군령도 받지 않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폐하는 상황을 전혀 모르니 결정을 내릴 수 없습니다. 반드시 우리가 스스로 결정해야 하며 그래야만 소인배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폐하에게 보고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내부 투표를 거쳐야 합니다. 그래야만 모두가 승복할 수 있어요.” 이의진이 다시 말했다.“투표라니요? 이게 투표할 일입니까? 전 서경을 둘러봐도 대장군님보다 원수 자리에 더 적합한 분이 누가 있습니까?” 조군영이 말했다.“그렇습니다, 왕비마마! 공적으로 보나, 위망으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무공으로 보나 어르신을 제외하고는
고원이 갑자기 큰 소리로 외치며 바로 땅에 무릎을 꿇고 세 번 크게 머리를 조아렸다.그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고 가까운 사람을 잃은 듯한 모습이었다.비록 똑같이 연기였지만 조군영보다는 훨씬 진실되어 보였다.“표기대장군 도착하셨습니다!”이때 문밖에서 우렁찬 외침이 울렸다.곧이어 금빛 갑옷을 입고 기상이 비범한 중년 남자가 급하게 걸어 들어왔다.이 사람이 바로 일품 표기대장군 유태범이었다!유태범은 표기대장군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유만수의 사촌 동생이기도 했다.유태범은 어릴 때부터 문무를 겸비하고 천부적 재능이 있어 모든 면에서 매우 뛰어났다.만약 유만수가 없었다면 분명 유씨 가문의 가장 빛나는 천재였을 것이다.하지만 안타깝게도 유만수라는 세상에 둘도 없는 영웅 앞에서는 아무리 대단한 천재라도 빛이 바랠 수밖에 없었다.“대장군께 인사드립니다!”유태범을 보자 조군영과 고원은 즉시 가식적인 표정을 거두고 공손히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그들 둘은 모두 유태범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진정한 측근 장수들이었다.마치 유만수와 석태혁의 관계처럼 영광도 함께 하고 손실도 함께했다.“형님!”유태범은 두 심복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영당에 들어서자마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땅에 무릎을 꿇었다.그의 두 눈은 붉게 충혈되었고 입술은 떨리며 얼굴에는 비통함과 분노의 빛이 어려 있었다.“어찌 이럴 수가? 우리 형님이 어찌 돌아가실 수가 있단 말입니까? 도대체 누가 한 짓입니까?!”유태범이 붉은 눈으로 연달아 분노의 외침을 터뜨렸다.“호룡각의 잔당들입니다. 그들이 자객을 부내에 잠입시켜 어젯밤 어르신을 암살했습니다.” 이의진의 얼굴이 흐리멍덩했다.“호룡각?”유태범이 이를 갈며 분노에 차 있다가 즉시 고함쳤다. “누구 없느냐! 즉시 군대를 집결시켜 전 성을 수색하라. 반드시 범인을 체포해야 한다!”“잠깐만요!”이의진이 갑자기 나서서 제지했다.“태범 씨, 매우 비통한 것을 알지만 지금은 아직 일을 크게 만들 수 없습니다.”“형님이 이미 돌아가셨는데 무
이 말이 나오자 조군영과 고원의 안색이 순간 변했다.두 사람이 오늘 온 것은 본래 기세를 과시하려는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이의진이 이렇게 강경한 태도를 보일 줄은 몰랐다.입을 열자마자 반역이라는 죄명을 들이대다니.이런 죄가 뒤집어씌워진다면 그들은 아마 왕부의 대문을 살아서 나가지 못할 것이다.“마마, 농담 마십시오. 반역은 사형감입니다. 저희가 아무리 대범하다 해도 그런 일은 감히 못 하지요!” 고원이 연달아 해명했다.“맞습니다. 저희는 왕께 항상 충성을 다해왔는데 어찌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조군영도 따라서 부인했다.비록 두 사람 모두 그런 야심이 조금은 있었지만 명백히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적어도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반역할 생각이 없다면 어째서 갑옷을 입고 부내에 들어오시는 것입니까? 규칙도 모르십니까?” 이의진이 조금도 봐주지 않고 꾸짖었다.그저 이품 장군일 뿐인데 군권이 조금 있다고 감히 왕부 안에서 눈깔을 찌푸리고 있다니.유만수가 살아있을 때 이 둘은 감히 이러지 못했다.“아이고! 제 정신 좀 보세요, 왕부의 규칙을 잊었네요. 마마께서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조군영이 헛웃음을 지었다.이어서 갑옷을 벗고 차고 있던 칼을 내려 왕부의 경비에게 건넸다.“저희가 급히 오느라 깊이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의도치 않은 행동이었으니 개의치마시지요.” 고원이 웃으며 말했고 즉시 갑옷과 칼을 벗었다.이 광경을 보고 이의진의 안색이 비로소 조금 누그러졌지만 어조는 여전히 차가웠다. “갑자기 찾아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왕께서 자객의 습격을 받아 위험한 상황이라는 소식을 듣고 저희 둘이 특별히 문안드리러 왔습니다.”고원이 가식적으로 말했다.“소식통이 꽤나 빠르군요. 하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이의진이 차갑게 말했다.“늦었다니요? 무슨 뜻입니까?” 두 사람이 의아한 척했다.이의진은 설명할 가치도 느끼지 못하고 몸을 돌려 영당으로 향했다.왕부 밖은 비록 동정이 없었지만 왕부 안에는 이미 흰 만장이 가득
“알겠습니다. 제가 경비병 신분을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들어가시기 전에 먼저 변장을 하셔야 합니다.” 손도운이 결국 타협했다.비록 위험이 있긴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다....정오 무렵, 서경 왕부 안.비록 유만수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봉쇄되었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관리들이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어떤 이들은 비통한 마음으로 조문을 왔고 또 어떤 이들은 다른 목적을 품고 있었다.“보국대장군 도착!”“운미대장군 도착!”왕부 문 앞에서 두 번의 외침이 들렸다.곧이어 갑옷을 입은 체격이 우람한 중년 남자 둘이 각각 친병들을 대동하고 걸어 들어왔다.이 친병들은 모두 허리에 장도를 차고 있었고 보기에도 험상궂었다.온 이들은 바로 이품 관직인 보국대장군 조군영과 운미대장군 고원이었다.“두 분, 왕부에 들어오시기 전에는 반드시 갑옷과 무기를 해제하셔야 합니다.”한 왕부 친위가 조군영과 고원을 막아서며 동시에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흥! 난 밖에 나올 때 갑옷을 벗지 않아. 꺼져!” 조군영이 노하여 꾸짖었다.“조 장군, 이건 왕부의 규칙입니다. 따라주시기 바랍니다.”왕부 친위가 말했다.“규칙? 나한테 감히 규칙을 운운한 건가?”조군영이 왕부 친위의 얼굴을 때리며 소리쳤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감히 규칙을 들먹이며 나를 압박하느냐? 죽고 싶나?”“조 장군, 소인도 명령을 받들어 행하는 것뿐입니다.” 왕부 친위는 동요하지 않았다.“헛소리 작작 하고 비켜. 그렇지 않으면 네 목을 벨 것이다!”조군영이 갑자기 칼을 뽑아 왕부 친위의 목에 겨누었고 그의 모습은 매우 포악하고 극도로 횡포했다.“제 머리를 베신다 해도 규칙은 지켜야 합니다.” 왕부 친위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이 개자식! 관짝을 보기 전에는 정신을 못 차리겠구나!”조군영은 마침내 화를 내며 칼을 거세게 들어 왕부 친위의 팔을 향해 내리쳤다.“멈추세요!”이때 한 소리의 여성의 호통이 울렸다.삼베 흰옷을 입은 이의진이 석태혁 일행을 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