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유만수를 보자마자 유진우의 얼굴에 있던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졌고 한없이 냉담해졌다.“여길 어디라고 들어와요, 나가요!”“오해하지 마, 내 며느리 보러 온 거니까 너랑은 상관없어.”유만수는 싱글벙글 웃으며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걸어왔다.“뭐야, 아는 분이야?”이청아는 두 사람을 번갈아보았고 두 눈에는 의아함이 가득했다.“네가 청아인가 보구나? 듣던 대로 미인이네!”유만수가 웃으며 말했다.“아차, 내 소개를 먼저 할게. 나는 유진우의 아버지 되는 사람이야, 네 시아버지다.”“아버님?”이청아는 흠칫 놀랐고 잠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유진우에게 큰 재능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외모는 아주 출중한 편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중년 남자는 유진우의 아버지라고 하기엔 두 사람에게서 닮은 구석을 찾기 힘들었다.“왜? 안 닮은 것 같아?”유만수는 머쓱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이 아이는 어려서부터 엄마를 꼭 빼닮았었어. 그것도 다행이지 뭐, 나를 닮았다면 청아처럼 예쁜 아내를 얻지 못했을 거야.”“아버님, 제발 그런 말씀 마세요. 아버님도 여전히 위엄이 있으십니다.”이청아는 본의 아니게 자기 생각이 읽힌 것 같아 민망해졌다.“유만수! 당신이 만나려고 했던 사람도 이미 만났으니, 이젠 나가주세요. 여기는 당신을 환영하지 않아요!”유진우가 불쑥 입을 열었다.“진우 씨! 왜 그래? 아버님께 무슨 말버릇이야!”이청아는 유진우를 힐끗 쳐다보고는 다시 유만수를 보며 민망한 듯한 미소를 지으면서 살갑게 말했다.“아버님, 진우 씨가 오늘 기분 나쁜 일이 있어서 평소답지 않게 날이 서 있네요,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자리에 앉으세요, 제가 차 한 잔 대접해 드릴게요.”“그래...”유만수는 싱글벙글했다.“흥! 우리 집에 빌붙을 인간이 또 한 명 늘었나 보다!”장경화는 유만수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나서 표정이 거만해졌다. 그녀는 상대방의 옷차림만 보고 바로 부잣집은 아니라고 단정 지었다.‘역시 그 아들에 그 아버지네, 쓸모없는 인
“식사 준비가 다 됐어요!”귀중한 선물을 받았던 터라 장경화는 눈 깜짝할 사이에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진수성찬을 차렸다. 다섯 가지 요리에 찌개도 빠지지 않았다. 유진우는 핑계라도 만들어 이 불편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시도했지만 이청아의 만류로 어쩔 수 없이 유만수와 같은 식탁에 앉아 밥을 먹게 되었다.이는 두 부자가 십 년 만에 같은 식탁에 마주 앉은 것이었다. 유만수는 그동안 오매불망 그리던 아들과의 식사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들의 용서를 받지는 못했지만 함께 밥 한 끼 먹는 것만으로도 유만수는 만족했고 감격스러웠다.아무도 유만수에게 이런 여린 모습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살인하고도 눈 한번 깜짝하지 않던 기세등등한 위왕이 아들과의 식사에 눈물을 보일 줄이야!식사가 끝난 뒤, 더 있다가는 아들놈이 틀림없이 성질을 부릴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기에 유만수는 눈치 있게 서둘러 작별 인사를 고하고 떠나려 했다. 별장을 나선 유만수는 그 어느 때보다 기분이 좋았다.“어르신, 어떻게 되셨어요?”차에 타자, 조수석에 앉아있던 홍복홍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하하하... 오늘 아들 녀석이랑 밥 한 끼 먹었다!”유만수는 입이 귀에 걸려있었는데 마치 원하던 것을 이룬 아이 같았다. 백미러로 그 모습을 본 기사는 그저 의아할 따름이었다.‘아들과 밥 한 끼 먹는 게 저 정도로 즐거워할 일인가? 위왕으로서의 위엄을 차리셔야지, 참!’“축하드립니다, 어르신! 성공적인 첫발을 내디디신 겁니다.”홍복홍도 보기 드물게 웃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홍복홍은 자신이 모시는 어르신에게 있어서 전쟁에서 열 번 승리를 거두는 것보다 도련님과 식사 한 끼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첫 시작은 좋지만 그 녀석의 성격으로는 더 이상 진전이 있기가 어려울 거야.”기쁨도 잠시, 유만수는 또다시 고뇌에 잠겼다.“어르신, 천천히 시간을 두고 가까워져도 괜찮아요. 언젠가 도련님도 어르신의 고충을 이해하실 날이 올 겁니다.”홍복홍이 위로했다.“그렇
그녀는 유진우의 과거가 매우 궁금했다. 요 며칠 동안 지켜본 결과, 그녀는 상대방의 속내를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건 말하려면 두서가 길어질 것 같아. 나중에 말해줄게.”유진우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그래, 말하고 싶어지면 언제든 괜찮으니, 그때 알려줘.”이청아가 싱긋 웃었다.“알겠어.”유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날씨가 선선해졌으니, 함께 백화점 좀 둘러보고 옷도 몇 벌 사자.”이청아가 불쑥 말했다.“그래, 그런데 미리 말하지만 난 돈 없어.”유진우가 어깨를 으쓱했다.“어휴, 저 인색한 꼴 좀 봐!”이청아가 유진우를 째려보며 말했다.“너한테 계산하라고 할 생각 없었어. 오늘은 사고 싶은 거 다 사도 좋아, 내가 계산할게!”“그러면 이 대표님께 미리 감사드릴게요.”유진우는 두말하지 않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3년의 결혼생활을 하면서 두 사람이 함께 쇼핑한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아이고! 이 반짝이는 사파이어 좀 봐! 오늘은 정말 운수 좋은 날이야!”두 사람이 외출하자, 장경화는 즉시 사파이어 보석을 꺼내 자세히 감상하기 시작했는데,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이모, 여기서 뭐 보고 있어요?”그때 단소홍이 불쑥하고 들어왔다.“소홍아! 마침 잘 왔어. 이모 손에 뭐가 들었나 한번 볼래?”장경화는 자랑하듯 손에 들고 있던 사파이어를 건넸다.“사파이어네요?!”단소홍은 사파이어를 보자마자 호흡이 가빠졌다.“이모님, 어디서 이렇게 큰 사파이어 하나를 얻으셨어요? 보기만 해도 엄청난 가치가 있을 것 같네요!”“하하, 믿을 수 없겠지만, 이 사파이어는 유진우의 아버지가 주신 거야.”장경화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네? 유진우의 아버지요?”단소홍은 어리둥절해하며 말을 이었다.“이모, 유진우는 가난한 집안 출신이라면서요? 그런데 유진우의 아버지가 어떻게 이런 보물을 선물할 능력이 되겠습니까?”“그 점은 나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어.”장경화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유진우의 평소 행실만 보고 우
황혼 무렵 평안 의원.조선미가 고급술을 들고 흥겨워하며 들어왔다.“진우 씨, 나 왔어요. 뭘 가져왔는지 알아요? 이건 아주 오래된 좋은 술이에요. 당신이 무조건 좋아할 거예요.”미소를 지으며 웃던 그녀가 갑자기 굳어버렸다.유진우가 아닌 낯선 할아버지 두 분이 계셨기 때문이다.평소 술에 취해 있던 주정뱅이 영감도 지금은 보기 드물게 심각한 표정으로 똑바로 앉아 있었다.“할아버지, 이 두 분은 누구세요?”조선미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선미 왔어? 소개해 줄게. 이분은 유진우의 아버지이고 이분은 나의 친구야.”주정뱅이 영감은 유만수와 홍복홍을 소개했다.“아버님?”조선미는 눈을 반짝이면서 말했다.“어머! 아버님 오셨네요. 제가 알아 뵙지 못했어요.”말하면서 그녀는 잽싸게 찻주전자를 들고 그들에게 차를 한 잔씩 따라주며 다정하게 웃었다.“아버님, 차 드세요!”“어? 아가씨는 누구?”유만수는 조선미의 열정적인 태도에 조금 당황했다.“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조선미라고 합니다. 진우 씨의 여자 친구이자 아버님의 예비 며느리입니다.”조선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며느리?”유만수는 살짝 놀라 하더니 문득 깨달은 듯 웃었다.“하하하... 좋아! 우리 아들은 복도 많아. 아가씨같이 예쁜 여자 친구를 찾았다니!”유씨 가문의 남자답게, 유진우가 찾은 두 명의 애인은 모두 절세미인이었다.여자 운 방면에서는 정말로 청출어람인 것 같아, 유만수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과찬이십니다. 진우 씨를 알게 된 건 제가 운이 좋았던 거죠. 진우 씨처럼 우수한 남자는 천하에 몇 명 안 되니까요.”조선미가 웃었다.“오호, 그래? 우리 진우가 그렇게 우수해?”유만수가 일부러 물었다.“당연하죠! 진우 씨는 문무에 모두 조예가 깊고 의술도 뛰어날 뿐만 아니라 제일 중요한 건 인품이 온화하고 배려심도 깊어요.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남자가 아니에요.”조선미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하하하... 역시 사람을 잘 알아보는 아가씨네!”아들에 대한 칭찬을 들으
“선미 씨, 저녁 식가 전이죠? 나가요, 맛있는 거 사줄게요.”유진우는 대답은 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그러고 보니 진짜 배고픈데요. 아버님도 같이 가세요.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조선미가 돌아서며 말했다.“그 사람들 신경 쓰지 말고 우리끼리 먹어요.”유진우가 단호하게 거절했다.“네?”조선미는 깜짝 놀랐다.예리한 그녀는 이내 그들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챘다.“선미야, 너희 둘 데이트에 우리 늙은이들은 끼지 않을 거니까, 어서 가봐.”유만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아버님, 그럼 저희가 돌아올 때 포장해서 가져올게요.”조선미는 억지를 부리지 않고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은 뒤 유진우를 따라 문밖으로 나갔다.차에서 침묵하던 조선미가 겨우 입을 열었다.“아버님이랑 갈등이 있어요?”“갈등? 그런 거라면 간단하겠죠.”유진우는 애써 웃었다.“그럼 무슨 일인데요? 얘기해줄 수 있어요?”조선미가 부드럽게 물었다.유진우의 이런 슬픈 표정은 처음이었다.“말해봐요. 한 남자가 아내와 아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면 그 사람을 남자라고 할 수 있겠어요?”유진우는 그녀의 말에 대답이 아닌 질문을 했다.“그 남자도 말할 수 없는 사연이 있는 거 아닐까요?”조선미가 말했다.“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분명히 뭐든 할 수 있었을 거예요. 말할 수 없는 사연? 그런 건 핑계일 뿐이에요.”유진우는 고개를 저었다.“제가 겪어보지 않은 일이여서 조언을 해줄 수는 없겠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모든 진실이 밝혀질 거예요.”“됐어요, 이 얘기는 그만하고 뭘 먹고 싶어요?”유진우는 다시 한번 말을 돌렸다.“클라우드 레스토랑으로 가요.”조선미가 웃었다.“그래요.”유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클라우드 호텔로 향했다.그런데 어느 코너를 지날 때 차가 무언가에 부딪힌 듯 갑자기 '쿵'하는 소리가 났다.“사람을 친 것 같아요!”조선미의 안색이 변했다.백미러를 통해 노파 한 분이 바닥에 쓰러져 통곡
“쿵...”바닥에 쓰러진 8대금강의 시체를 바라보던 노파는 곧바로 굳어버렸다.조금 전의 오만한 표정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공포로 가득 찼다.‘유명한 블랙 랭킹의 8대금강이 아니었던가? 지금까지 타깃이 아무리 막강하다고 해도 실패한 적이 한 번도 없는 천하무적이었기에 유진우를 쉽게 처리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오히려 순식간에 패배했다니?’도저히 믿기지 않았다.‘이 녀석은 대체 무슨 괴물인 거야?’“이게 당신이 말한 8대금강이야? 너무 약한데!”유진우는 고개를 저었다.‘본투비 레벨도 안 되면서 감히 나를 암살하겠다고?’“너 너 너... 무슨 수작을 부린 거야?”노파는 너무 겁이 나서 뒤로 물러섰고 얼굴에는 공포가 가득했다.“하나만 묻자. 몇 명 왔어?”유진우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몰라, 블랙 랭킹 킬러들은 각자 따로 싸우기에, 난...”“알았어, 이제 죽어도 되겠다.”유진우는 상대방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총을 쐈다.블랙 랭킹은 극도로 비밀스러운 암살 조직으로, 내부에 많은 실력자들이 있었기에 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결국 큰일 날 것 같았다.“띠리링...”이때 갑자기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왕현한테서 온 전화였다.“형님, 큰일 났어요. 현무문 사람들이 의원을 포위했어요!”“현무문?”유진우는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건당 사람들인가요?”“맞아요! 이번에는 건당의 엘리트들이 총출동해서 형님을 죽이겠다고 하니, 빨리 피하세요. 절대 여기로 돌아오시지 마세요.”왕현이 경고했다.유진우가 아무리 세다고 해도 두 주먹으로 건당 수많은 엘리트들을 당해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알았어요. 제가 알아서 할 거니까, 왕현 씨는 윤아를 데리고 의원에서 나와요.”유진우는 대답한 후, 전화를 끊었다.“무슨 일이에요?”옆에 있던 조선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별일 아니에요. 먼저 천향원으로 돌아가요. 저녁은 내일 사줄게요.”유진우가 웃으며 말했다.“알았어요, 조심해요.”조선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고수들의 대결에 일반 무사들은 절대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두 사람이 격렬하게 싸우는 동안, 의원 안에 있는 유만수, 주정뱅이 영감, 홍복홍 세 사람은 흐뭇해하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수많은 일을 겪었던 그들은 이런 작은 규모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하지만 임윤아는 침착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걱정하며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어 상황을 살폈다.‘유 선생님이 계시면 얼마나 좋을까?’그러더니 갑자기 고개를 저었다.‘안 돼! 이 사람들이 유 선생님을 찾아왔는데 여기 계시면 위험하실 거야!’“윤아야, 안 봐도 돼. 그놈 아무 일 없을 거야. 이리로 와서 술이나 따라줘!”주정뱅이 영감이 외쳤다.“네, 가요.”임윤아는 바로 술을 가지고 갔다.세 사람이 기분 좋게 술만 마시는 걸 보고 임윤아는 물었다.“할아버지, 걱정 안 되세요? 저 나쁜 놈들이 쳐들어오면 어떡해요?”“뭘 걱정해? 이 나이에 죽으면 죽는 거지.”주정뱅이 영감은 하나도 신경 쓰지 않았다.“퉤퉤퉤... 그런 불길한 말씀 하시면 안 돼요. 할아버지 꼭 오래오래 사셔야 해요. 위험하면 제가 꼭 지켜드릴 거예요.”임윤아는 말하면서 옆에 있는 대걸레를 집어 들고 결사적으로 의원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진지하게 보여주었다.그녀의 행동에 세 사람은 실소했다.“정말 재밌는 녀석이야.”유만수가 웃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 오늘 우리 아무도 죽지 않을 거야.”“정말요?”임윤아의 눈빛이 밝아졌다.“당연하지, 이런 일로 내가 거짓말할 것 같아?”유만수는 미소를 지으며 홍복홍을 가리켰다.“이 늙은이 아주 대단한 사람이야, 저런 똘마니들을 상대하는 건 식은 죽 먹기야.”“그래요?”임윤아는 작은 얼굴에 약간의 의심을 품은 채 홍복홍을 위아래로 쳐다보았다.‘60~70대로 보이는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싸움을 잘한다고? 바람이 조금만 세게 불어도 날아갈 것 같은데?’아무리 봐도 네 사람 중에서 제일 힘이 있어 보이는 사람은 자신뿐이었다.‘역시 나밖에 없어.’임윤아는 그런
“죽어!”왕현이 틈을 보이자 단철수는 기회를 잡았다는 듯 검을 휘둘렀다.결정적인 순간에 은침 하나가 사람들을 뚫고 단철수의 검을 찔렀다.“띵!”은은한 소리와 함께 장검이 꺾이는 소리가 났다.“누구야?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한 거야?!”단철수는 경계심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뒤로 물러섰다.바늘을 사용해서 장검을 날릴 수 있다는 것은 몰래 공격한 자의 내공이 깊다는 것을 증명하기에 충분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 사람을 괴롭히는 것도 모자라서 몰래 기습 공격까지 한다니, 현무문 사람들 다 그렇게 비열한가?”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모두가 뒤를 돌아보자, 어둠 속에서 잘 생기고 비범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 나와서 가로등 아래에 당당히 서 있었는데 다름 아닌 방금 도착한 유진우였다.“강 당주님! 저 자식이 바로 송호 조카를 죽인 유진우예요.”유진우를 본 전원중이 소리쳤다.“죽여! 빨리 죽여! 송호 형의 복수를 해!”전세권, 진경준이 뒤에서 소리쳤다.전원중이 오너 자리에서 내려온 후로 그들의 위치는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지금의 상황을 만든 장본인이 바로 유진우였기에 그들은 유진우를 뼛속까지 미워했다.“네가 나의 두 제자를 죽였어?!”강수원은 매우 불쾌한 표정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강준혁을 죽인 건 맞지만, 송호는 안 죽였어. 그냥 폐인으로 만들었을 뿐이야.”유진우는 무심하게 말했다.“헛소리! 송호 형도 당신이 죽였잖아!”전세권이 소리를 질렀다.“맞아! 당신이 송호 선배가 중상을 입은 틈을 타서 기습 공격을 해서 죽였잖아. 비열한 놈!”진경준도 동조했다.“내가 송호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링 위에서 죽였겠지. 못 믿겠다면 그냥 내가 죽인 걸로 하든지.”유진우는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오늘 싸움은 어차피 치러야 할 것이기에 힘들게 해명하고 싶지 않았다.“강 당주님, 들으셨죠? 이 자식이 이렇게 오만해요!”“저놈을 혼내주지 않는다면 우리 현무문의 체면이 뭐가 되겠어요.”전원중, 전세권, 진경준이 계속 선동했다.“이봐
지금 돌아보면 모든 게 교묘하게 짜인 계획이었던 셈이다.유태범은 이들의 동선과 의도를 이미 꿰뚫고 있었고, 애초부터 이들을 함정에 빠뜨리려 했다.그들이 하는 모든 행동은 유태범의 예상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그래서 미리 판을 짜 두고 기다리다가 마지막에 병부를 빼앗는 데 성공한 것이다.결국 이들이 스스로 늑대를 집 안에 들인 셈이 되어 병부를 잃고 말았다.서경의 표기대장군 자리에서 유태범이 한 사람 아래 수많은 사람 위를 차지했던 이유가 새삼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속내를 꿰뚫는 교활함에서 이들은 아직 조금 모자랐다.밤이 지나 아침이 밝았다.밤새 치른 전투의 흔적을 정리하면서 왕부 대문 앞에 쌓였던 시신들은 이미 수습됐지만 땅속으로 스며든 핏자국은 쉬이 지워지지 않았다.남은 세 제후가 이끌고 온 병력은 근처 성방영에 배치되어, 만약 사태가 급변하면 언제든 왕부를 도울 수 있도록 대기 중이었다.병부를 도난당한 탓에 왕부 안 사람들은 대부분 밤새 한숨도 못 잤다.석태혁이 이끌고 나간 유만군 역시 밤새 밖을 뒤졌지만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았다.아침 식사를 간단히 마친 뒤, 이의진은 다시 한번 주한휘, 은성종, 그리고 장범규를 불러들여 대책을 논의하고 정보를 모았다.하지만 병부가 어디로 갔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 뾰족한 방도가 떠오를 리 없었다.그때, 간밤에 사라졌던 석태혁이 마침내 돌아왔다.떠날 땐 부하들과 함께였는데 돌아올 땐 그 혼자뿐이었고 게다가 심각한 부상을 입은 모습이었다.의논 중이던 이들이 모여 있던 의회장으로 들어오자마자, 그는 쓰러지듯 무릎을 꿇더니 피를 토했다.“장군님! 어쩌다 이렇게 크게 다쳤습니까?”이의진이 크게 놀라 급히 사람들을 시켜 석태혁을 의자에 앉혔다.“장군님, 병부는 찾으셨나요?”주한휘는 석태혁의 상처보다도 병부의 행방이 더 급한 듯 보였다.“왕비님, 소장은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습니다. 제갈영군을 따라잡기는커녕 도중에 매복을 당해 함께 간 유만군 병력도 전멸됐습니다. 병부 역시 되찾지 못했으니 부
“뭐라고요? 서경을 떠나 도망치자고요? 그럼 왕위는 그대로 유태범한테 넘어가는 거잖아요.”유천우는 표정이 어두워졌다.“산만 남아 있으면 땔감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하지. 살기만 하면 우리는 아직 기회가 있어.”은성종이 조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왕위를 뺏기고 병부도 잃고 50만 흑용군까지 모조리 유태범이 호령하게 되면, 저희가 무슨 수로 다시 기회를 잡겠어요.”주한휘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그도 이 지경이 될 줄 알았다면 애초에 욕심내어 유씨 가문과 연을 맺진 않았을 것이다. 결국 아무 이득도 못 보고 오히려 그만 곤란한 처지에 빠졌으니 진퇴양난이었다.“은 제후님 말씀대로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대비책을 세워야 할 것 같아요.”이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솔직히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지금 상황은 그들에게 너무나 불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병부가 정말 유태범 손에 들어가면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을 터. 결국 서경을 떠날 수밖에 없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그녀는 용국의 장공주이니, 서경을 떠나 연경으로 가더라도 어떻게든 자리 하나 마련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아들에게 큰 고생을 시키고 싶지 않았으므로 마음 한구석으로는 그 길도 고려하고 있었다.“그래도 너무 낙담하진 마요. 석 장군의 실력도 제갈영군과 막상막하니까요, 혹시라도 병부를 되찾아 온다면 저희에게도 길이 열릴 거예요.”은성종이 나직이 덧붙여 말했다.“맞습니다. 아직 결판이 난 건 아니니 모두 기운 내세요.”장범규가 힘주어 말했다.“여러분,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유천우는 가볍게 몸을 숙여 예를 표한 뒤 뒤돌아서 편전을 나섰다. 머릿속이 복잡해지자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은 형 육진우였다.유천우는 도령 차림으로 변장한 육진우를 따로 불러 자신이 묵는 방으로 안내했고 시종들에게 단단히 지키라고 지시했다.“천우야, 아까 지붕 위에서 인기척이 스쳐 갔던데 무슨 일이 생긴 거야?”안전하다고 느낀 육진우가 먼저 물었다.“네, 제후님들께서 함께 계시던 편
은성종이 가장 먼저 상황을 파악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빨리! 병부를 쫓아!”이의진도 곧바로 지시했다.“쫓아가요!”석태혁은 번개처럼 칼을 뽑아 들고 유만군 부대 일부를 이끌고 제갈영군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갔다.“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유천우는 멍하니 서 있다가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설마 제갈영군이 병부를 빼앗아 도망칠 줄은 상상조차 못 했기에 전혀 대비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갈영군은 이미 시야에서 사라져 있었다.“천우야, 제갈영군은 원래부터 유태범 쪽이었나 봐. 전력을 다해 너를 지지하고 왕부를 돕는 척한 건, 우리 경계를 완전히 풀어놓기 위해서였던 거지. 때가 되면 병부를 빼앗아 우릴 궁지에 몰아넣을 속셈이었어.”은성종이 무겁게 말을 이었다.“제길... 제갈영군이 배신자였다니, 너무 괘씸하잖아요!”장범규가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그러게 말이에요. 흑용군 얘기를 그렇게나 강조하더니, 결국 병부를 훔쳐 달아날 빌미를 만든 거였네요. 정말 교활해요!”주한휘가 억울하다는 듯 씩씩거렸다.“만약 병부를 되찾지 못하고 유태범 손에 넘어가면... 저희는 완전히 끝나고 말 거예요.”이의진은 눈살을 찌푸린 채 심각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원수 병부가 흑용군의 지휘권을 결정한다는 건 다들 아는 사실이었다. 병부를 쥔 자가 흑용군을 움직일 수 있으니, 유태범이 지금껏 이런저런 명분을 내세워 부대를 끌어온 수고를 할 필요가 없어지는 셈이었다.병부만 있으면 그 즉시 전군을 호령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용없을 것이다. 50만 흑용군이 들이닥치면 서경은 물론 천하 어디라도 막아낼 재간이 없을 터였다.“어머니, 죄송합니다. 전부 제 탓이에요. 제가 좀 더 주의 깊었더라면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거예요.”유천우는 깊이 고개를 떨구었다. 병부가 자기 손에서 떨어져 나간 이상 변명의 여지조차 없다고 생각했다.“천우야,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제
왕부의 편전.네 명의 제후는 차례대로 자리에 앉아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 각기 다른 표정으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보였다.제갈영군은 한가롭게 차를 음미했고, 은성종은 눈을 감은 채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주한휘는 이리저리 둘러보며 왕부 편전의 장식을 구경했고, 장범규는 다소 초조한 기색으로 일어나 앉았다가 몇 걸음 왔다 갔다 하며 마음을 졸이는 모습이었다.한 차례 시간이 흘러, 이의진이 유천우와 석태혁을 데리고 마침내 편전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정교한 상자가 들려 있었다.“여러분, 병부를 가져왔어요.”이의진이 상자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열자, 그 안에는 금빛의 호부가 놓여 있었다. 호랑이 형상을 정교하게 조각해 위엄이 깃들어 보였다. 호부 한가운데에는 ‘병갑지부, 좌재왕, 우재경’이라는 금색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역시 병부군요!”호부를 본 장범규가 눈을 반짝였다.“이 병부만 손에 넣으면 흑용군을 동원할 수 있어요. 그러면 유태범의 음모도 허무하게 끝나겠죠.”“천우야, 지체할 시간 없어. 병부를 들고 흑용군 주둔지로 가서 그 장수들을 만나. 신분을 확실히 밝혀야 해. 유태범이 틈탈 구석이 없도록.”주한휘가 서둘러 재촉했다.“병부는 매우 중요한 물건이야. 유태범이 순순히 보고만 있진 않을 테니 가는 길은 결코 만만치 않을 거다. 철저히 준비해야 해.”은성종이 경고하듯 말했다.“알겠습니다, 제후님. 이미 어머니께도 상의드렸어요. 열 개 정찰팀을 꾸려 여러 갈래로 성을 나갈 거고, 저 역시 그중 한 무리에 섞여서 움직일 겁니다. 유태범이 대비하고 있어도 쉽게 제 위치를 알아내진 못하겠죠. 유태범이 위협을 눈치챌 무렵이면 저는 이미 흑용군 주둔지에 도착해 있을 거예요.”유천우가 굳은 얼굴로 답했다.“그거면 충분하겠군.”은성종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한번 당부했다.“천우야, 이번 행선지는 너랑 왕비님만 아는 걸로 해. 괜히 입 밖에 새면 사고가 터질 수 있어.”“명심하겠습니다, 제후님.”“자, 그럼 빨리 움직이자.
“안 돼요! 그건 너무 위험해요!”육진우가 모험을 강행하려 하자 유천우는 곧바로 제지하고 나섰다.유천우는 그가 강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유태범의 주변에는 정말 많은 고수가 몰려들어 있었다.두 주먹이 네 손을 이기지 못한다는 말처럼, 만약 암살에 실패라도 하면 수많은 고수들의 포위망에 걸려들 위험이 컸다. 장차 서경왕이 될 몸으로서, 유천우는 결코 함부로 유진우가 위험을 감수하도록 둘 수 없었다.“천우야, 때로는 위험을 감수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야. 지금 같은 중요한 시기에는 누군가 희생을 감내해야 하지. 게다가 호위는 하나일 뿐인데 그렇게까지 긴장할 필요가 있을까?”주한휘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안 된다면 안 되는 겁니다!”유천우는 거의 고함치듯 외쳤다.강한 기세가 순간 터져 나와 주한휘는 뒷걸음질 치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던 사람들까지 서로 눈길을 주고받으며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했다.아무도 유천우가 이렇게까지 격한 반응을 보이리라 예상하지 못했다.자신이 좀 과격했음을 깨달은 듯, 유천우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담담히 말을 이었다.“제후님, 호위의 목숨도 저희와 똑같이 소중해요. 괜히 헛된 희생을 치르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어떻게 모두를 납득시키겠어요?”“그래, 그래... 네 말도 일리가 있네.”주한휘는 어색하게 웃었다. 속으로는 그가 호위 하나 때문에 호들갑을 떤다고 생각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된다면, 저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설마 그냥 손 놓고 당하기만 할 생각은 아니겠죠?”장범규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사실 제게 좋은 방법이 하나 있긴 합니다.”제갈영군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오? 어떤 방법인데요?”이의진이 살짝 미간을 올리며 물었다.“유태범이 믿는 가장 큰 무기는 흑용군이에요. 우린 이 점을 공략하면 됩니다.”제갈영군은 신중하게 말을 이어갔다.“다들 아시다시피, 전쟁 시기가
석태혁의 발언은 순간적으로 모든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이의진은 무언가 말하려다가 머뭇거리며 술을 다물었다.석태혁은 왕부의 친위이자 그녀가 굳게 신뢰해 온 인물이기에 솔직히 그가 목숨을 걸고 위험에 뛰어들길 바라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보다 더 적합한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장군님께서는 워낙 강하시고 충성도 깊으니 유태범을 암살하러 간다면 가능성이 있겠죠.”장범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르신의 친위대장인 만큼 실력이나 충성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장군님, 제가 괜히 이런 말씀 드리는 건 아니지만 혼자 가시는 건 좀 무리가 있을 수도 있어요.”제갈영군이 갑작스레 말했다.“잠깐! 아직 그 전설 속의 인도가 있잖아요?”주한휘가 문득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인도란 이름은 모르는 사람이 없겠죠. 인도의 실력이라면 장군님 못지않을 텐데요?”“아니요, 홍복홍께서는 저보다 훨씬 뛰어나십니다.”석태혁이 차분하게 답했다.그가 친위대장이기는 해도 왕부의 진정한 비책은 사실 인도 홍복홍이다. 서경의 세 고수 중 검선은 세상을 떠났고, 주광은 행방이 묘연하다. 결국 남은 인도가 서경에서도 손꼽히는 고수다.대 마스터 급의 인도는 그가 견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와, 그럼 잘됐네요! 인도가 장군님보다 훨씬 강하시다면, 그분께 부탁드리는 게 훨씬 확실하지 않을까요?”주한휘가 기대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유감이지만, 홍복홍께서는 왕부를 떠나신 뒤로 지금까지 종적을 감추셨어요. 그분께 부탁드리긴 힘들 것 같네요.”석태혁이 고개를 저었다.“종적이 묘연하다니...”장범규가 미간을 찌푸렸다.“홍복홍이라는 분, 왕부가 이렇게 위태로운데 어디 가신 건지 모르겠군요.”“설마 상황이 안 좋아 보이니까 도망쳐 버린 건 아니겠죠?”주한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주 제후, 그런 말씀은 삼가주세요. 홍복홍께서는 나라와 백성을 위해 몸 바쳐 오신 분이에요. 도망칠 리가 없습니다.”석태혁의 얼굴이 굳어졌다.“아, 죄송해요.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주한
“방법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문제가 좀 있어요.”제갈영군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새 왕이 즉위하려면 폐하의 허가와 백관의 승인이 필요한데,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납득하기 어려워요. 게다가 폐하의 뜻을 받고 백관을 모시려면 앞뒤로 최소 사흘은 걸려요. 지금 우리 상황으로는 그렇게 오래 버틸 수 없죠.”“에이, 설마? 즉위가 그렇게나 복잡해요?”장범규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다들 천우가 어르신의 아들이라는 걸 알잖아요. 그럼 당연히 서경왕 자리를 잇는 게 맞지 않나요?”“맞아요! 급할 때는 융통성도 발휘해야 하는 거잖아요.”주한휘가 곁에서 맞장구쳤다.“두 분 다 서경왕위를 산적 두목 뽑듯 생각하시는 건가요? 깃발 하나 꽂고 술 몇 사발 마신 다음 큰소리 몇 마디로 끝낼 일이 아니에요. 농담하지 마세요.”제갈영군이 약간 어이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서경왕위는 서경 백성만이 아니라 천하 모든 사람의 안위와도 연결돼 있죠. 서경이 혼란스러워지면 천하가 뒤숭숭해지고, 서경이 안정되면 천하도 평안해져요. 과장이 아니라 서경왕위의 무게는 폐하의 황위에 전혀 뒤지지 않아요. 그런 중요한 자리를 함부로 정하고 아무나 앉을 수 있겠습니까?”“맞아요. 저도 천우가 빨리 왕위를 이어서 군심을 안정시키면 좋겠지만, 왕위 계승은 장난이 아니죠. 너무 서두르면 오히려 역효과만 날 거고 남들 입방아에 오르기 딱이니까요.”이의진이 고개를 저었다.규율과 절차 없이는 질서가 서기 어려운 법. 서경왕 자리의 무게는 그만큼 무겁다. 폐하의 명령과 문무백관의 증인이 없으면 공식적으로 인정받기 어렵다.“다들 너무 규칙만 따져서 이 좋은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고 있어요.”장범규가 못마땅한 듯 말했다.“지금 도련님이 왕위를 잇지 못하면 유태범의 대군이 쳐들어올 때 어쩌자는 겁니까?”주한휘가 난처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은 제후님, 혹시 다른 방도가 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냥 말씀 좀 해주세요. 더는 뜸 들이지 말고요.”제갈영군이 은성종을 바라봤다.“두
“뭐라고요? 목격자를 전부 없애버린다고요?”그 말을 듣자 장범규의 안색이 급변했다.“농담하는 거 아니죠? 북쪽 4대 제후는 모두 유태범의 사람인데 적과 아군을 구별하지 않고 전부 죽인다는 게 말이 돼요?”“큰일을 하는 자는 마음이 독해야 하는 법입니다. 오랫동안 전장을 누빈 사람한테 약간의 희생은 아무것도 아닙니다.”제갈영군이 덤덤하게 말했다.“물론 이건 마지막 계획이에요. 만약 북쪽 4대 제후가 무사히 왕위를 빼앗고 병부를 손에 넣는다면 유태범은 위험을 감수할 필요 없이 바로 왕위를 이어받으면 됩니다. 하지만 만약 북쪽 4대 제후가 실패하면 유태범은 큰일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거예요.”욕심이 많은 자일수록 더욱 광기 어린 행동을 보일 것이다.예전에 유태범은 위왕에게 억눌려 힘을 숨기고 기회를 기다렸다. 위왕이 세상을 떠난 지금 속박을 벗어난 유태범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그렇다면 정말 조심해야 할 것 같네요.”장범규는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흑용군은 서경에서 가장 강하고 세계 최강의 전투력을 지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흑용군을 장악한다면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것이다.만약 유태범이 표기 대장군이라는 신분을 이용하여 다시 왕실을 구원한다는 명분을 내세운다면 흑용군을 대량으로 동원할 가능성이 컸다.일단 싸움이 시작되면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었다. 오직 승자만이 왕이 되고 패자는 반역자가 될 뿐이니까.“제후님들은 모두 서경의 기둥입니다. 혹시 좋은 해결책이라도 있습니까?”이의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전 싸우는 것만 잘하지, 머리를 쓰는 건 절대 안 돼요.”장범규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저도 그렇습니다.”주한휘도 고개를 내저었다.“회음 제후님은 재능이 뛰어나니 뾰족한 수가 있으면 얘기해보시죠.”제갈영군의 시선이 은성종에게 향했다.그들이 성문 앞의 십만 대군을 설득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은성종의 회유책 덕분이었다.장교들의 가족과 친구를 이용하여 그들을 설득하고 항복하게 했다.많
지금 그들의 유일한 희망은 유태범이 흑용군을 이끌고 오는 것이었다.“너희 둘은 주모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조력자야. 사형은 면해도 처벌은 면치 못해.”이의진이 차갑게 말했다.“여봐라. 저 두 놈을 끌고 가서 감시하고 내 명령 없이는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거라.”“알겠습니다.”몇 명의 친위대가 재빨리 다가가 포박된 진승민과 강윤기를 강제로 끌고 갔다.“장군님, 항복한 병사들을 처리해 주십시오. 오늘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으니 더 이상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이의진이 석태혁을 보며 말했다.“알겠습니다.”석태혁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왕비님 자비에 진심으로 감탄했습니다.”그때 네 명이 군중 속에서 걸어 나왔다.그들이 지나가는 곳마다 병사들이 자동으로 길을 터주었는데 네 사람이 바로 남쪽 4대 제후였다.맨 왼쪽으로부터 제갈영군, 그다음은 은성종, 주한휘, 장범규가 나란히 서 있었다.“저희가 너무 늦게 온 바람에 왕비님께서 많이 놀라셨죠? 부디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은성종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맞잡고 겸손한 태도로 예를 표했다.“그런 말씀 마십시오. 만약 제때 와주시지 않았다면 왕부가 위험에 처했을 겁니다. 제후님들 모두 공신이십니다.”이의진은 재빨리 다가가 허리 굽힌 은성종을 일으켜 세웠다.사실 남쪽 4대 제후가 이렇게 빨리 군대를 보내 지원해 줄 거라는 건 그녀의 예상 밖이었다. 다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밤낮으로 달려왔다는 걸 보아낼 수 있었다.“왕부를 지키고 서경을 지키는 건 우리의 책임이고 당연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은성종이 환하게 웃어 보였다.“맞습니다. 만약 위왕님께서 저를 살려주지 않으셨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겁니다. 왕부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기꺼이 내놓을 수 있어요.”장범규가 호탕하게 말했다.남쪽 4대 제후 중에서 그는 가장 솔직하고 충성스러운 사람이었다.“왕비님, 앞으로 우리는 한 가족입니다. 왕부의 어려움은 곧 우리의 어려움이니 당연히 도와야죠.”주한휘가 웃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