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술교의 벼룩가루? 꽤나 흥미진진하군요.” 유진우는 연 선생의 수법을 한 눈에 꿰뚫어보고 있었다. 연 선생이라고 불리는 사람은 딱 봐도 평범한 캐릭터가 아닌 주술교에서도 엘리트라고 불린 만큼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오? 우리 둘 다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요? 그래서 이 몸이 쓰는 주술도 알고 있는 거고?” 연 선생은 유진우를 아래위로 슥 훑어보더니 아까와는 달리 그를 조금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방금 한 기습공격은 보통의 무사들은 막을래야 막을 수도 없겠는데 유진우는 그저 짧은 호흡을 내쉬는 것만으로도 위기를 벗어났다. ‘역시 뭔가 심상치 않은 놈이었어.’ “아! 내 얼굴! 내 잘생긴 얼굴!” 해독을 다 마친 뒤 송영명은 만신창이가 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는 고통스러운 듯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연 선생님! 제발 저 놈 좀 죽여주세요. 꼭 갈기갈기 찢어주십시오.” “시끄럽네!” 연 선생은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송영명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다. “네 이놈! 보아하니 우리 둘 다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으니 만약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사과를 하고 나를 스승으로 모신다면 오늘 네 목숨은 살려주마. 어떠냐?” 연 선생이 유진우를 찔러보듯 물었다. 그의 자제 한명이 이미 세상을 떴으니 연 선생은 자신을 도울 도우미가 필요했고 자신을 대신해 사냥감을 찾아줄 사람이 필요했다. 연 선생이 보기에 유진우는 비록 나이가 어려보이지만 실력을 보니 자제로 삼기에 적당한 사람인 것 같았다. “스승으로 모시라고요? 고작 당신을?” 유진우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이어갔다. “거울 좀 보시고 자기 주제를 좀 아시죠? 이런 쓰레기 같은 짓을 하고도 그런 말이 나오십니까?” “네가 정말 죽고 싶은 거구나!” 유진우의 말에 연 선생은 노발대발했다. 그가 두 팔을 휙 내젓자 이내 검은 색의 쨍한 빛이 생겼다. 아마 유진우의 시력을 손상시키려는 의도인 것 같았다. 유진우는 한쪽 팔을 들어 좌우로 흔들더니 x자 모양으로
“뭐야?” 이 광경을 구석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송영명은 너무 놀라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는 꿈에서도 실력이 좋기로 소문이 난 연 선생이 유진우에게 상대가 안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했다. ‘어떻게 연 선생이?’ 연 선생은 주술교에서도 이름난 엘리트였기에 무도 마스터의 실력과 상당히 비슷했다. 이러한 강자가 유진우에게 패배를 하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는가? “오? 안 죽으셨네요?” 유진우는 아직 숨이 붙어있는 연 선생을 보며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 아까의 공격은 비록 힘을 조금 들이기는 했지만 마스터 아래 실력을 가진 사람들은 당해낼 수 없는 힘이었다. 당연하게도 연 선생이 차고 있던 몸 보호대가 충격을 조금 감당해주었기에 괜찮았지 아니었다면 연 선생의 가슴에 그대로 큰 구멍이 생길 뻔했다. “켁.” 연 선생은 또 다시 시뻘건 피를 토해냈고 몸의 뼈마디들은 다 으스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나 가슴, 가슴 쪽은 호심경의 보호를 받았다 하더라도 거대한 힘 때문에 오장육부에 다 강한 충격을 받았다. “너... 너 왜 이렇게 세? 설마 네가 무도 마스터라도 되는 거야?” 연 선생은 가슴을 움켜쥔 채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었다. 이미 연 선생은 반보 마스터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를 정면으로 패배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무도 마스터밖에 없었다. 하지만 유진우는 이제야 20대 초반인데 말이다. ‘저렇게 젊은데 어떻게 저런 강한 실력을 가질 수 있는 거지?’ ‘도대체 저 놈 정체가 뭐지?’ “아니, 틀렸습니다. 저는 무도 마스터가 아닙니다.” 유진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마스터가 아니라면 어떻게 나를 이기는 건가?” 연 선생이 물었다. “오해하셨나 본데 제 뜻은 마스터 앞에 한 글자를 더 붙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유진우가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한 글자?” 연 선생은 잠간 당황하는가싶더니 이내 귀신이라도 본 듯 몸을 벌벌 떨며 말했다. “너...너... 너 설마? 혹시 그
“멈춰라!” 유진우가 연 선생의 숨을 끊어버리기 직전, 갑자기 누군가 크게 외쳤다. 그와 동시에 어둠속에서 무언가가 마구 나타나더니 죽음의 검 마냥 유진우의 등 뒤를 찔러버렸다. “음?” 유진우는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뒤를 돌아보았고 두 손가락으로 자신에게 기습공격을 하는 “흉기”를 잡았다. 그제야 제대로 확인을 하니 그것은 검은 빛을 발산하고 있는 독 표창이었다. 표창에는 선명하게 “주”라는 글자가 새겨져있었는데 딱 봐도 주술교의 사람 중 한 명인 것 같았다. “네 정체가 무엇이냐? 감히 내 주술교의 자제한테 손을 대다니? 정말 간이 부었구나.” 이때, 검은 색의 긴 옷을 입은 조금 나이가 있어 보이는 할머니 한 명이 어둠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할머니는 몸도 왜소해 보이고 얼굴도 살점이 없어 그저 평범해 보이는 노인 같았지만 눈빛만큼은 몹시 날카로웠다. 마치 독을 한 가득 품은 독뱀마냥 사람을 소름이 끼치게 만들었다. “차 할머니! 할머니 살려주십시오.” 그 할머니를 발견한 연 선생은 마치 구세주라도 본 냥 앞으로 엉금엉금 기어나가며 도움을 청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연 선생은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앞에 있는 차 할머니는 주술교의 대선배로써 무도 마스터 급 실력을 지닌 강자였다. 게다가 보통의 무도 마스터와는 달리 차 할머니의 주술 실력은 너무도 뛰어나 사람을 흔적 없이 죽이기에도 능통했다. 8년 전, 세 명의 무도 마스터가 차 할머니를 죽이려고 작정을 했지만 차 할머니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세 명의 무도 마스터를 깔끔하게 처리했다. 그때로부터 차 할머니는 명성이 자자해졌고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런 쓸모없는 놈! 이런 젊은이 하나를 상대하지 못해서 이 지경까지 되었느냐? 정말 우리 주술교의 자존심을 다 무너뜨리는구나.” 온 몸이 피로 물든 연 선생을 본 차 할머니는 미간을 찌푸린 채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주술교는 천하 제일가는 사파이자 소문이 자자한 사파이니
부딪힌 차 할머니는 두 팔은 감전이라도 된 듯 저릿한 고통이 느껴졌고 체내에 있던 피들이 다 거꾸로 솟는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차 할머니는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덜덜 떨리는 자신의 팔을 보며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할머니는 비록 주술을 아주 능하게 다루는 사람이지만 무도의 실력 또한 남들보다 모자라지는 않았다. 그리고 지금 할머니는 마스터의 후기 기준에 도달하는 실력이 되었다. 할머니는 유진우에게 힘없이 당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어 홀로 중얼거렸다. “저 놈 도대체 얼마나 강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거지?” “어떻게... 이래도 저를 막으실 겁니까?” 유진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차 할머니에게 물었다.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유진우는 차 할머니를 죽일 생각은 없었고 그저 약간의 교훈만 줘서 할머니를 스스로 물러나게 하고 싶었다. “젊은이, 확실히 실력이 대단하기는 하구만. 인정할게.” 차 할머니는 깊은 한숨과 함께 자신의 기혈을 다시 꾹 누른 뒤,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 젊은이는 꼭 나한테 질 텐데. 손바닥을 봐, 이미 검게 변하지 않았나?” “당신의 독은 저한테 아무 효과도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유진우는 차 할머니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의 몸은 이미 어떠한 독에도 침범되지 않는 강한 육체를 얻었고 특히나 결계를 돌파한 뒤로부터는 더욱 더 단단해졌다. 천하를 내려다봐도 십대 기독을 제외하면 그 어떤 강한 독도 그를 다치게 할 수는 없었다. “효과가 없다고?” 차 할머니는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젊은이, 자기 자신을 너무 높게 평가하는 것 아닌가? 우리 주술교를 너무 얕보지는 마. 우리가 만들고 연구한 독은 무도 마스터도 쉽게 해독하지 못한다고.” “지금 젊은이는 이미 독이 몸에 가득 퍼져 곧 죽음을 맞이하게 될 거야.” “만약 지금 당장 항복하고 돌아간다면 경맥은 막아줄게. 그렇다면 목숨은 며칠 더 유지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계속
“은아?” 갑자기 나타난 하얀 머리의 여자를 본 유진우는 놀란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여자는 다른 사람도 아닌 유진우의 유일한 제자, 황은아였기 때문이다. 정말 오랜만에 두 사람이 이런 자리에서 만날 것이라고는 유진우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지금의 황은아는 전과는 달리 변화들이 꽤나 많아보였다. 얼굴도 더욱 아름다워졌고 기세 또한 강해져 황은아라는 사람이 아예 달라보이게 만들었다. 혈통을 각성 한 뒤 황은아는 제대로 자신의 실력을 발휘한 것 같았다. “아저씨, 어때요? 조금 놀랐나요?” 황은아가 옅은 미소를 띠며 물었다. “이렇게 불쑥 찾아올 거면 먼저 전화라도 하지 그랬어.” 유진우는 일부로 그녀가 반갑지 않은 듯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황은아가 아파하지 않을 정도로 그녀의 이마를 살짝 쳤다. 그의 행동은 주술교의 고위층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저 놈이 감히 성녀의 이마를 쳐? 정말 대담하군.’ 하지만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도도하던 성녀가 이마를 맞고도 화를 내지 않았고 오히려 유진우에게 애교를 부리듯 말했다. “아저씨, 저 계속 갇혀 있다가 며칠 전에 나왔어요. 그래서 너무 바빠서 제일 먼저 전화한다는 것도 잊어버렸지 뭐예요.” “...” 유진우의 앞에서는 그저 부끄럼쟁이가 돼버린 황은아를 본 주술교 고위층 사람들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들 서로 눈을 마주치며 눈앞의 광경이 믿지지 않는다는 듯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무슨 상황이지?’ ‘이게 그 사람을 죽일 때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던 잔인하고 매정한 성녀님 맞으신가?’ 성녀가 출관한 뒤, 어떤 수법으로 그녀를 깔보는 수많은 사람들을 물리쳤는지 그들은 다 알고 있었다. 게다가 아주 손 쉽게 주술교와 대치하고 있던 무림 문파도 바로 물리쳐버렸다. 그 뒤로 주술교 내부에 빗발치던 불만의 소리들이 순식간에 사라졌고 다들 성녀에 대해 존경심을 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렇게 대단한 성녀가 유진우의 앞에
“스승님?” 황은아의 말에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다 경악을 금치 못했다. 특히나 차 할머니와 연 선생, 그리고 송영명 이 세 사람은 황은아의 말에 넋이 나간 듯 멍해있었다. 그들은 꿈에서조차 유진우와 황은아가 사생지간이라는 사실을 예상하지 못했었다. 주술교 성녀의 스승이라는 신분이 세상에 노출되기라도 하면 세상이 발칵 뒤집히지 않겠는가? “설마! 그럴 리가 없어. 저 놈이 어떻게 주술교 성녀랑 사생관계겠어?” 송영명은 두려움에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유진우의 신분을 믿지 않으려했다. 안세리가 분명 유진우는 그저 평범하고 무명의 젊은 남자라고 알려줬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유진우에게 이렇게 거대한 배후와 실력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내 스승님을 죽이려 하는 것은 나를 죽이려하는 것과 다름없어.” 황은아는 세 사람의 앞에 천천히 다가가더니 냉랭한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 “주술교 성녀의 스승을 몰래 죽이려 하다니... 이게 얼마나 큰 죄인지는 알아?” “성녀님, 살려주십시오. 부디 살려만 주십시오.” 연 선생은 황은아의 말에 곧장 머리를 땅에 부딪히며 끝없이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성녀님! 제 잘못을 깊이 뉘우쳤습니다. 제발 부디 노하지 마시고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차 할머니도 연 선생의 모습을 따라하며 머리를 땅바닥에 조아렸다. 그녀의 머리에서는 피가 줄줄 흐리고 있었지만 차 할머니는 멈출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한편 송영명은 이미 너무 놀라 금방이라도 까무러칠 것 같았고 절망에 빠져 모든 것을 포기한 듯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살려달라고?” 황은아는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물었다. “사람을 죽이려하고 주술을 마음대로 부리고, 또 아무 죄 없는 여성들까지 해쳤으니 너같은 쓰레기는 이 세상에 살아있을 이유가 없어. 살아있어도 그저 공기만 낭비하겠지.” 말을 마친 황은아가 손가락을 한번 까닥거렸다. 탕! 눈 깜짝 할 사이에 검은 색 빛과도 같은 총알이 연 선생의 이마를 관통했고 총
“이 사람은 어떻게 할까요? 아저씨가 결정하세요.”황은아는 무릎을 꿇고 있는 송영명을 턱으로 가리키며 죽은 사람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말했다.그 순간, 송영명은 마치 꿈에서 깨어난 듯 정신이 번쩍 들어, 당황하며 말했다.“유... 유진우, 제발 날 죽이지 마. 내가 잘못했어. 앞으로 절대 너랑 맞서지 않을게. 한 번만 살려줘!”“살려달라고?”유진우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너희들은 나를 몇 번이나 속이고, 온갖 비열한 짓은 다 했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살려달라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송영명은 무릎을 꿇고 ‘텅텅’ 소리를 내며 유진우에게로 다가가 그의 바짓자락을 붙잡고 울며 말했다.“진우 형! 진우 도련님! 난 아무 잘못 없어요. 다 안세리 그 나쁜 년이 꾸민 일이에요. 난 그저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요. 그러니 너그러이 내 잘못을 용서해 주세요.”“안세리?”유진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말해봐, 이번에 나를 해친 건 복수 때문이야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거야?”송영명은 망설임 없이 바로 대답했다. “옥로고 사건 때문에 우리는 큰 손해를 봤어요. 그래서 안세리가 제안했죠. 도련님을 잡아다가 고문해서 다른 일품 처방을 알아낸다면 그 손해를 만회할 수 있을 거라고요.”“그 여자, 정말 악랄하군. 몇 번이나 도와주고, 목숨까지 구해줬는데 결국 이렇게 나를 몰아넣다니. 보통 사람 같았으면 벌써 죽었을 거야.”유진우가 차갑게 말했다.“맞아요! 그년은 정말 배은망덕하고 악독한 년이에요. 나도 진작부터 그 여자가 마음에 안 들었다니까요!”송영명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진우 도련님! 절 살려주면 앞으로 도련님의 충실한 개가 되어 안세리 그년이 마땅한 대가를 치를 수 있도록 처리해 드릴게요!”“안세리는 네 약혼녀인데 정말 손을 댈 수 있겠어?”유진우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약혼녀는 무슨! 그냥 집안끼리 정략결혼을 맺은 거예요. 우린 사적인 감정 같은 거 전혀 없어요. 더군다나, 누가 그런 악독한 여자를 좋아하겠어요?
“그래? 주술교의 고수들이 이렇게 많이 출동하다니, 이번 거래 만만치 않은가 보네.”유진우는 살짝 놀란 듯 말했다.황은아의 뒤엔 여러 무도 마스터가 있었고, 나머지는 반보 마스터거나 본투비 대원만 경지를 가진 자들이었다.이 정도의 세력은 정말 드물었고, 이 힘이면 4대 왕족과 맞먹을 만했다.“맞아요. 확실히 만만치 않아요. 왜냐하면 이번 일을 의뢰한 사람이...”황은아가 말을 잇기 전, 뒤에 있던 노인이 급히 가로막았다.“성녀님! 이건 주술교의 중요한 기밀이니 외부인에게 절대 발설해선 안 됩니다!”“어?”황은아가 고개를 돌려 노인을 쏘아보자, 노인은 겁에 질려 소름이 돋고 눈동자가 떨렸다.“다시 말하지만, 이분은 내 스승님이에요. 외부인이 아니니까 말조심해요.”“잘못했습니다.”노인은 바로 고개를 숙이며 두려움에 떨었다.“은아야, 그만해.”유진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기밀이라면 굳이 안 들어도 돼. 나는 귀찮은 걸 싫어하니까, 알면 더 부담스러워질 테니 차라리 모르는 게 좋아.”“흠... 알았어요.”황은아는 미소 지으며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사실 이 비밀을 말하면 유진우에게 위험이 닥칠 수도 있었다.“아저씨, 나 배고픈데, 나랑 야식 먹으러 가면 안 돼요?”황은아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너 연경에 처음 왔으니, 오늘 내가 제대로 환영식을 해줄게!”...다음 날, 아침.남부 병원의 VIP 병실 안.온몸에 붕대를 감은 채 송영명은 병상에서 여전히 의식이 없었다.어젯밤 가까스로 위험에서 벗어난 그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졌고, 급히 병원으로 옮겨져 응급치료를 받았다.“선생님, 제 아들은 괜찮나요? 위험한 건 아니겠죠?”수술실에서 나온 송영명을 보며 송덕해는 걱정스럽게 물었다.“걱정하지 마세요. 아드님은 외상뿐이라 이미 치료를 마쳤으니 큰 문제는 없습니다.”의사가 대답했다.“다행이군요.”송덕해는 한숨을 돌리며 다시 물었다.“근데, 아직도 왜 안 깨어나는 거죠?”“아드님은 어젯밤 큰 충격을 받
무거운 왕부 대문이 쿵쾅거리면서 진동했다.매번 쿵쾅거릴 때마다 마치 거대한 망치가 심장을 강타하는 듯 사람들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문 열어.”이의진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치면서 사람들에게 대문을 열라고 명령했다.그녀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대문을 부수고 들어오려던 병사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갈피를 잡지 못했다.‘이런 상황에서는 대문을 굳게 닫고 방어에 힘써야 하는 거 아니야? 근데 알아서 문을 열어? 어떻게 된 거지? 혹시 다른 함정이라도 있나?’“진승민, 노정한, 강윤기, 하원휘. 나와!”이의진이 칼을 든 채 꼿꼿이 서서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그녀의 강렬한 기세에 문밖의 병사들은 감히 다가가지 못했다.그녀가 부른 네 명은 북쪽 4대 제후이자 이번 반란의 주요 세력들이었다.“뭐야? 일을 저질러 놓고 이제 와서 숨으려고? 4대 제후라는 사람들이 모두 쥐새끼처럼 숨어다니는 졸개들이야?”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이의진이 다시 한번 목소리를 높였다. 목소리가 어찌나 우렁차고 힘찬지 왕부 안팎으로 울려 퍼졌다.잠시 후 왕부 앞에 있던 병사들이 갑자기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넓은 길을 터주었다.곧이어 갑옷을 입고 망토를 걸친 각기 다른 모습의 중년 남자 네 명이 나란히 걸어왔다. 그들이 바로 북쪽 4대 제후였다.“진승민, 왕비님께 문안드립니다.”“노정한, 왕비님께 문안드립니다.”“강윤기, 왕비님께 문안드립니다.”“하원휘, 왕비님께 문안드립니다.”네 사람은 문 앞으로 다가가더니 동시에 몸을 숙여 예를 올렸다.“흥, 너희들 눈에 내가 왕비로 보이긴 하느냐?”이의진이 싸늘하게 말했다.“왕비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하루 왕비는 영원한 왕비십니다.”진승민이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만약 너희들이 나를 왕비로 생각했다면 반란을 일으키지도 않았겠지.”이의진이 큰 소리로 말했다.“왕비님, 오해하셨습니다. 저희는 반란을 일으킨 게 아니라 왕실을 구원하러 온 것입니다.”진승민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맞습니다.”옆에 있던 노정한
깊은 밤, 서경왕부 대문 앞.수많은 무장병사들이 거대한 왕부를 물샐틈없이 에워쌌다. 멀리서 바라보면 검은 무리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는데 그 수가 자그마치 수만 명에 달했다.이들은 단지 선봉 부대일 뿐이었고 사실 왕성 밖에는 북쪽 4대 제후의 군대와 유태범의 친위대까지 위장한 채 주둔하고 있었다.그 시각 왕부 안.이의진은 상복을 입은 채 차가운 표정으로 살기등등하게 대문 앞에 서 있었다.손에 날카로운 검을 들고 있었는데 온몸에서 풍기는 위엄과 살기는 보는 이들을 압도했다.왕부의 생사가 위기에 처하자 왕비인 이의진은 망설임 없이 맨 앞에 나섰다. 그녀의 뒤에는 석태혁과 갑옷을 입은 유만군이 서 있었다.그 수는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왕부에서 가장 강력한 전력이었다.유만군의 뒤에는 왕부의 병사들과 식솔들이 서 있었다.병사들은 칼을 들었고 식솔들은 몽둥이를 들었다. 그들은 죽음을 각오한 듯 굳건한 자세로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그리고 뒤쪽 내원으로 들어가면 왕부의 노약자와 부녀자들이 상복을 입고 무기를 든 채 멀리 떨어진 대문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만약 유만군이 쓰러지고 병사들과 식솔들이 모두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그들 역시 망설임 없이 달려나가 왕부와 함께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아빠... 엄마... 무서워요...”열 살 남짓한 한 소년이 두 손에 칼을 들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온 소년이 언제 이런 끔찍한 상황을 겪어봤겠는가.왕부가 포위당하고 밖에 수만 명의 대군이 매복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소년은 왕부의 운명이 다했고 오늘 밤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걸 직감했다.“쓸모없는 녀석.”한 중년 남자가 뒤를 돌아보며 소년에게 호통쳤다.“우리 유씨 가문의 사나이는 전장을 누비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어. 겁쟁이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네가 오늘 한 발짝이라도 물러선다면 네놈을 먼저 베어버리는 수가 있어.”“아빠...”겁에 질린 소년은 덜덜 떨면서 눈물을 글썽거렸다.“울
“그건...”유진우는 망설이면서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세자 전하.”은성종이 갑자기 두 손을 맞잡고 예를 표하면서 말했다.“제가 재주는 부족하지만 세자 전하를 위해 가시밭길이라도 기꺼이 헤쳐나갈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만약 절 믿어주신다면 이 일은 저한테 맡겨주십시오. 제가 은밀히 충신들한테 연락하여 빠르게 힘을 모으겠습니다. 때가 되어 세자 전하께서 신호만 주신다면 반드시 성공하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제후님은 역시 의로운 분이시네요. 정말 진심으로 존경합니다.”유천우가 진심으로 감탄했다.“그렇다면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유진우도 두 손을 맞잡고 공손하게 인사했다.“세자 전하를 위해 일할 수 있는 건 저의 영광입니다.”은성종이 말했다.“제후님, 큰일 났습니다.”그때 한 병사가 문을 벌컥 열고 뛰어 들어와 당황한 기색으로 말했다.“방금 들어온 소식인데 서경왕부가 대군에 포위당해서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라고 합니다.”“뭐? 포위당했다고?”이 말을 들은 순간 유진우와 유천우의 표정이 급변했다. 그들이 떠난 지 이틀도 채 되지 않았는데 벌써 변고가 닥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대체 어떻게 된 거야? 자세히 말해봐.”유천우가 다급하게 물었다. 병사는 은성종의 눈치를 살피더니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북쪽의 4대 제후들이 정예 부대를 이끌고 어젯밤 몰래 왕성에 잠입했는데 왕성 호위대의 장교급 군관들이 모두 인질로 잡힌 바람에 군 전체가 마비 상태에 빠졌습니다. 이 틈에 북쪽의 4대 제후들이 왕실을 구원한다는 명분으로 왕부를 포위했어요. 겉으로는 간신배들을 처단하고 서경왕의 복수를 하겠다고 하지만 실상은 군사를 일으켜 권력을 빼앗으려는 겁니다.”쾅.유천우가 화를 내면서 상을 세게 내리쳤다. “이것들이 아주 제대로 미쳤구나. 감히 서경왕부를 포위해?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는 이상 절대 이럴 수가 없어.”그는 설령 4대 제후들이 반란을 일으키더라도 기껏해야 성문 앞에 병력을 주둔시켜서 압박을 가하는 정도일 것이라고
“아직 절 기억해주고 계셔서 감사합니다. 저 아직 살아있습니다.”유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은성종의 과거사를 몰랐던 터라 갑자기 흥분한 모습을 보니 조금 의아했다.“살아있었다니... 정말 다행입니다.”은성종은 놀라면서도 기뻐했다.“벌써 10년이나 지났어요. 그사이 세자 전하께서 이렇게 성장하시다니...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습니다.”“그러네요. 10년 동안 많은 게 변했습니다.”유진우는 감탄하며 말했다.10년 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10년 후에는 아버지가 암살당했다. 10년 사이에 부모님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는 게 참으로 안타까웠다.“제후님, 아까 제 형을 보면 서경왕부를 전폭적으로 도와주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지금 형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약속을 어기진 않으실 거죠?”유천우가 떠보듯 물었다.“만약 세자 전하께서 왕위를 이어받으시겠다고 한다면 난 목숨을 걸고서라도 세자 전하가 왕의 자리에 앉도록 도와줄 거야.”은성종이 진지하게 말했다.조금 전까지 냉정하고 덤덤했던 모습과는 달리 지금의 그는 투지가 넘쳤고 온몸에서 전에는 본 적 없는 강렬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좋습니다. 제후님은 역시 약속을 잘 지키시네요.”유천우는 웃어 보이고는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역시 형이 나서야 했어.’그가 아무리 애를 써도 은성종을 설득하지 못했는데 유진우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모든 게 쉽게 해결되었다.비록 10년이 흘렀지만 유씨 가문 천재라는 명성은 여전히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있었고 만인의 존경을 받았다.“제후님, 제가 서경에 돌아온 사실을 아직 외부에는 알리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잡을 때까지 비밀로 해줬으면 좋겠어요.”유진우가 당부했다.“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절대 입 밖에 꺼내지 않겠습니다.”은성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가 좋은 그는 당연히 유장혁의 의도를 잘 알고 있었다.위왕이 호룡각의 잔당들에게 살해당했고 유태범은 왕위를 빼앗으려 혈안이 되어있었다. 정말 여러 가지 문제가 끊이지 않았다
“왕위를 이을 생각이 없다면서 왜 싸우려는 건데?”은성종이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물었다.“전 서경왕이 될 자격이 부족하지만 자격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게다가 그 사람은 유태범보다 더 어울려요.”유천우가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그게 누군데?”은성종이 눈썹을 살짝 올렸다.“제 형님 유장혁입니다.”유천우가 큰 소리로 대답했다.“유장혁?”은성종은 실눈을 뜨더니 인정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세자 전하께서 서경왕이 되는 건 충분히 가능하겠지만 문제는 실종된 지 10년이 넘었고 감감무소식이라는 거야.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왕위를 이을 수 있겠어?”“제 형님은 죽지 않았고 이미 서경에 돌아왔습니다. 서경왕의 자리에 앉을 사람은 형님밖에 없습니다.”유천우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말로만 해서는 안 돼. 증거가 있어?”은성종이 물었다.만약 유장혁이 정말로 서경에 돌아왔다면 벌써 서경 전체에 소문이 퍼졌을 것이다. 하여 유천우가 단지 그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핑계를 대는 것이라 생각했다.“제후님, 증거를 드릴 수는 있는데 그 전에 물을 게 있어요. 만약 제 형님이 왕위를 물려받는다면 전폭적으로 지지해주실 겁니까?”유천우가 되물었다.“그건...”은성종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망설이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유천우가 하도 자신감이 넘쳐서 오히려 확신이 없어졌다.“제후님, 서경에는 좋은 왕이 필요합니다. 제 형님보다 더 서경왕에 적합한 사람은 없어요. 제후님도 잘 알고 계실 거라 믿습니다.”유천우가 말했다.“그래. 만약 내가 직접 세자 전하를 만난다면 널 도와줄게. 만나지 못하면 다른 사람한테 부탁해야 할 거야.”은성종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약속하는 겁니다.”유천우는 웃으면서 유진우를 돌아보았다.“형, 이젠 형이 나설 때가 됐어요.”유진우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무 말 없이 얼굴에 쓰고 있던 가면을 벗고 본모습을 드러냈다.“당신은...”은성종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믿을
은성종은 유천우의 말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 자신과 유천우에게 술 한 잔씩 따라 주었다. 그리고 잔을 가볍게 부딪친 후 술을 단숨에 마셨다.“좋은 술이군.”은성종은 혀를 차면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유천우도 다그치진 않고 술을 다 마신 다음 은성종을 바라보며 말하기를 기다렸다.“유태범이 나한테 손을 잡자고 하더라고. 엄청난 이익을 약속했지만 모두 거절했어.”이 말을 들은 유천우의 얼굴에 기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데 이어진 은성종의 말에 살짝 당황했다.“아직 너무 기뻐하진 마. 유태범의 제안을 거절하긴 했지만 너도 도울 생각은 없어.난 전쟁을 싫어해서 중립을 선택할 거야.”은성종이 솔직하게 말했다.“중립이라고요?”유천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면서 바로 설득했다.“제후님, 서경의 일원으로서 서경이 무너지는 걸 그냥 보고만 계실 겁니까?”“난 능력이 부족해서 아무것도 도와줄 수 없어.”은성종이 고개를 내저었다.“그리고 난 야심이 없어서 그저 편안하게 살고 싶어. 이런 권력 다툼에는 참여하고 싶지 않아. 내가 가진 작은 땅만 잘 지킬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해.”은성종이 잠깐 멈칫하다가 또 말을 이었다.“솔직히 말해서 너랑 표기 대장군 모두 유씨 가문의 핏줄이라 누가 서경왕이 되든 나한테는 아무런 차이가 없어. 말이 반란이지, 그저 왕위 다툼일 뿐이야.”“그건...”유천우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상대방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천우야, 난 성격이 솔직한 편이라 혹시 불쾌한 점이 있다면 부디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은성종이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제후님이 평화를 바라는 건 당연합니다. 하지만 전쟁이 시작되면 제후님도 무사하지 못해요.”유천우가 다시 설득했다.“태평은 변경의 작은 도시이고 가난하고 가진 게 없어서 전쟁이 일어난다 해도 여기까지 쳐들어올 일은 없어.”은성종이 담담하게 말했다.“게다가 이미 유태범과도 합의했어. 내가 싸움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태평에는 절대 쳐들어오지 않겠다고.”“제
“제후님께서 도련님이 오실 걸 알고 저더러 미리 나와 기다리라 하셨습니다.”늙은 집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내가 올 걸 알고 있었다고요?”유천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면서 옆에 있는 유진우를 쳐다봤다. 저도 모르게 불안감이 밀려왔다.은성종이 미리 알고 있었다는 건 두 가지 가능성밖에 없었다.제갈영군이 전화로 알렸거나 유태범의 사자가 먼저 와서 선수를 친 것이다.“도련님, 제후님께서 오랫동안 기다리셨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늙은 집사가 허리를 굽히면서 손짓으로 안내했다.유천우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여기까지 온 이상 중간에 물러설 수는 없었다. 아무리 위험한 곳이라고 해도 뚫고 나가야 했다.일행은 늙은 집사를 따라 앞으로 걸어갔다. 여러 시설을 지난 후 식당에 도착했다.식당 안에 푸짐한 음식과 술이 준비되어 있었다. 음식 냄새와 술 냄새가 뒤섞여 식욕을 돋우었다.유천우 일행은 하루 종일 이동하느라 식사할 시간도 없었다. 눈앞에 차려진 푸짐한 음식을 본 순간 저도 모르게 군침이 돌았고 배에서도 꼬르륵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도련님, 먼 길을 오느라 배고프실 텐데 식사부터 하시죠.”늙은 집사가 공손하게 말했다.“제후님은요?”유천우가 물었다.“곧 오실 것입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늙은 집사가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유천우는 웃으면서 손짓했다.“너희들, 얼른 와서 먹어.”“네.”근위병 몇 명은 대답을 마치자마자 바로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맛보기 시작했다.훈련을 잘 받은 근위병들은 3일 밤낮으로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괜찮았지만 이렇게 행동하는 건 음식에 독이 든 건 아닌지 유천우 대신 시험해보기 위한 것이었다.항상 방심해서는 안 되었다. 만약 은성종이 음식에 약을 넣었다면 그들이 바로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도련님, 아무 문제 없습니다.”모든 음식을 다 맛본 후에야 근위병들은 유천우에게 고개를 끄덕였다.유천우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더
해 질 무렵, 유천우와 유진우 일행은 변경 요새 도시인 태평에 도착했다.태평은 회음 제후 은성종의 영역이었고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낙후한 작은 마을에 불과했다.은성종의 통치 아래 짧은 10여 년 만에 서경에서 5위 안에 드는 도시가 되었다. 군사, 경제, 정치, 문화, 교육, 의료까지 모든 면에서 최고 수준을 자랑했다.태평이 오늘날의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건 은성종의 뛰어난 재능과 지식 덕이었다.만약 제갈영군이 난세의 영웅이라면 은성종은 세상을 다스린 명신이었다.그 시각 회음 제후 저택 밖.검은색 승합차 한 대가 길가에 천천히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자 유진우와 유천우 일행이 잇달아 내렸다.“형, 여기가 마지막 목적지예요.”유천우는 저택 간판을 바라보면서 감탄했다.“회음 제후 은성종은 아버지와 친분이 두터울 뿐만 아니라 마음이 따뜻하고 의협심도 강해요. 게다가 제갈영군의 편지까지 있으니 이번에는 문제없을 겁니다.”“섣불리 판단해선 안 돼.”유진우는 고개를 내저었다.“마지막 순간이 될수록 더욱 긴장을 늦추면 안 돼. 은성종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서 유만수조차도 은성종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지 못했어. 아무도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혹시 변수가 생길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유천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유태범이 이미 제갈영군과 연락했으니까 분명히 은성종과도 접촉했을 거야. 은성종이 유태범한테 설득당해서 유태범의 진영에 합류할까 봐 걱정돼.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가 지금 저택에 들어가는 건 죽음을 자초하는 거나 마찬가지야.”유진우가 분석했다.유태범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표기 대장군까지 오른 사람이라면 지혜와 용맹을 모두 갖추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건 유태범도 당연히 생각했을 것이다.유천우 일행이 사방에서 사람들을 모으고 있을 때 절대 가만히 보고만 있을 유태범이 아니었다.전에 제갈영군을 끌어들이려고 도시 두 개를 제시했다는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었다.남쪽 4대 제후 중에서 장범규는
제갈영군의 날카로운 눈빛과 창을 바라보면서도 유천우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제후님, 도시 두 개의 유혹이 매우 큰 건 사실입니다. 저였더라도 거절하지 못했을 거예요. 만약 제후님이 제 목숨으로 도시 두 개를 바꾸고 싶으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유천우는 두 손을 맞잡고 예를 표하면서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그래? 죽는 게 두렵지 않아?”제갈영군이 두 눈을 가늘게 뜨면서 말했다.“아니면 내가 감히 널 죽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죽는 건 당연히 두렵습니다. 살 수 있다면 죽음을 택하지 않아요.”유천우가 담담하게 말했다.“게다가 제후님은 여러 해 동안 전쟁을 치르시면서 앞길을 막는 자는 전부 다 죽였죠. 그런 분이 저의 목숨 따위 가져가는 건 순간일 것이고 힘을 들일 필요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죽는 게 두렵다면서 왜 이렇게 태연한 거지?”제갈영군은 조금 의아해했다.“죽는 걸 두려워하는 건 한 가지 일이고 죽음을 맞이할 용기가 있는 건 또 다른 일입니다. 저택에 들어온 순간부터 최악의 상황까지 대비했습니다.”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게다가 제후님이 정말로 저를 죽이려고 한다면 도망갈 수도 없어요. 차라리 깔끔하게 죽는 게 그나마 고통을 덜 수 있다고 생각해요.”“재밌는 녀석이군.”제갈영군은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더니 천천히 창을 내려놓았다.“피는 못 속인다더니 오늘 보니까 맞는 말 같군. 유씨 가문에는 쓸모없는 자식이 하나도 없어.”“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후님.”유천우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됐어. 농담 그만할게. 유태범의 부하들이 날 찾아온 건 맞지만 이미 내가 다 죽였어.”제갈영군이 손가락을 튕기자 곧바로 몇 명의 호위병이 시신을 끌고 와 유천우의 발밑에 던졌다.“자, 얘네들이 유태범이 보낸 사람들이야.”제갈영군은 발로 시신을 툭툭 치면서 경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제후님, 유태범이 주겠다는 도시 두 개를 포기하겠단 겁니까? 전 그렇게 좋은 걸 드릴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