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리야, 걱정하지 마. 그냥 장난으로 하는 거니까 뭘 어쩌진 않아.”송영명이 그녀를 위로했다.“흥. 그럼 다행이고.”안세리는 얼굴을 찌푸리다가 결국 참기로 했다. 괜히 충동적으로 움직여 유진우를 해치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곽훈 씨, 이 사람 지금 통제당한 거 맞죠?”한 여자가 물었다.“그럼요.”곽훈이 우쭐거리면서 웃었다.“지금은 그냥 산송장이에요. 아픔도 못 느끼고 기억도 없어서 내가 뭘 시키면 뭐든지 다 할 겁니다. 게다가 깨어나면 기억하지도 못해요.”“정말이에요? 그럼 자기 따귀를 때리라고 한번 해봐요.”여자가 기대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알았어요.”곽훈이 씩 웃으면서 유진우에게 명령했다.“지금 당신 손으로 자기 뺨을 때려요.”“곽훈 씨, 당신!”안세리가 말리려던 그때 유진우가 손을 들더니 사람들의 경악한 눈빛 속에서 곽훈의 뺨을 힘껏 후려갈겼다.짝!힘이 어찌나 센지 곽훈은 머리가 어지러워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비틀거렸고 코피가 흘러나왔다.“뭐야?”갑작스러운 상황에 사람들은 두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을 쩍 벌렸다.‘자기 뺨을 때리라고 하지 않았어? 왜 곽훈 씨 얼굴을 때린 거야?’곽훈은 따끔거리는 볼을 움켜잡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가 명령을 잘못 내린 건지, 아니면 유진우가 제대로 듣지 못했는지 의심마저 들었다.“저기요. 내 말 잘 들어요. 자기 따귀를 때리라고요!”체면이 조금 깎인 곽훈이 목청을 높여 명령했다.짝!유진우는 또 한 번 곽훈을 뺨을 후려갈겼다. 이번에도 머리가 어지러웠고 이까지 다 빠졌다.가뜩이나 살집이 많던 얼굴이 퉁퉁 부었고 다섯 손가락 자국이 무척이나 선명했다.안세리뿐만 아니라 송영명, 그리고 재벌가 자제들 모두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고 이 상황이 어리둥절하기만 했다.‘고분고분 말 잘 들을 거라며? 왜 제멋대로인 건데?’“X발, 이게 귀먹었나?”곽훈은 코피를 닦으면서 더는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네 뺨을 때리라고! 날 때리는 게 아니라.”짝!미처 피할 새도 없
“X발, 어떻게 된 거야? 저 자식이 미쳤어?”마가 들린 듯한 유진우의 모습에 송영명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고 표정도 굳어졌다. 하지만 따귀를 맞을까 봐 가까이하진 못했다.그때 송영명이 문득 뭔가 떠오른 듯 소리를 질렀다.“곽훈아, 저 자식 통제를 벗어났어. 얼른 주문을 풀어!”“주문... 삭제!”곽훈은 가까스로 고통을 참으며 유진우의 가슴팍에 붙어있는 부적을 뗐다.그러자 유진우가 온몸을 부르르 떨더니 움직임을 멈췄다. 사람들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드디어 멈췄어. X발 통제를 벗어나니까 힘이 완전히 소처럼 세잖아. 일반 사람은 아예 당해내지 못해.’“왜 그래요?”유진우는 숨을 몇 번 고른 후 천천히 눈을 뜨더니 막연한 표정으로 말했다.“방금 무슨 일 있었어요?”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다들... 얼굴이 왜 그래요?”얻어맞은 청년들은 이를 꽉 깨물었다. 분노가 끓어올랐지만 대놓고 화를 낼 수도 없어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다.“곽훈 씨, 왜 이렇게 다쳤어요?”고개를 숙인 유진우는 화들짝 놀라더니 얼굴이 퉁퉁 부은 곽훈을 일으켜 세우며 걱정스럽게 물었다.“누가 곽훈 씨를 이렇게 만들었어요?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잘생긴 얼굴이 다 망가졌잖아요. 정말 괘씸하네요!”곽훈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고 눈물이 저도 모르게 뚝뚝 떨어졌다. 이건 맞은 게 너무 아파서 흘린 눈물이었다.‘X발, 뭐라 말도 못 하고 답답해 죽겠어.’정상적인 사람이 그를 이 지경으로 때렸다면 진작 노발대발했을 것이다. 그런데 현술을 쓰고 난 다음이고 게다가 실수로 통제하지 못한 탓에 이런 상황이 벌어진 거라 어쩔 수가 없었다. 나쁘게 말하면 자업자득이었다. 이런 일이 생기면 그저 입을 꾹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곽훈 씨, 왜 울어요? 내가 눈물 닦아줄게요.”유진우는 휴지 두 장을 꺼내 아주 다정하게 곽훈의 눈물을 닦아주려 했다.“꺼져! 나한테서 멀리 떨어져!”곽훈은 놀란 나머지 얼굴을 움켜쥐고 뒷걸음질 쳤다. 조금 전 따귀를
“됐어. 이 일은 여기까지 해.”안세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송영명을 힐끗거리며 말했다.“나 이따가 진우 오빠랑 점심 먹어야 하니까 먼저 가볼게. 재밌게 놀아.”그러고는 유진우의 팔짱을 끼고 VIP 룸을 나갔다.사람들은 서로 얼굴만 멀뚱멀뚱 쳐다보았고 표정이 다 좋지 않았다. 조금 전 달아올랐던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듯 확 차가워졌다.“곽훈아, 괜찮아?”송영명이 곽훈의 상처를 살폈다. 얼굴이 다 비뚤어질 정도로 상태가 아주 심각했다. 가뜩이나 못생긴 이목구비가 더욱 볼품없게 되었다.“X발. 그 자식 힘이 장난이 아니에요. 지금까지 이런 굴욕을 당한 적이 없다고요.”곽훈은 몇 개 남은 이를 꽉 깨물고 분노를 터트렸다.“원래는 그 자식을 망신당하게 할 생각이었는데 되레 너만 당했잖아.”송영명이 고개를 내저었다.‘실력이 안 되면 잘난 척하지나 말지. 창피해서, 원.’“너무 이상해요. 평소에는 엄청 잘 먹혔었는데 오늘 왜 이런 실수가 생겼는지 모르겠어요.”곽훈이 잔뜩 찌푸린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혹시... 유진우라는 사람 일부러 연기한 거 아닐까요?”그때 소가희가 불쑥 한마디 했다.“연기?”그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향했다.“이상하잖아요. 통제를 벗어난 거라면 곽훈 씨 한 사람만 때린다는 게 말이 돼요?”소가희가 분석했다.“일리 있어.”송영명은 아래턱을 만지면서 생각에 잠긴 듯했다.“그 자식 겉으로 보기에는 예의 바른 것 같은데 사실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해. 아까 일부러 연기했을 가능성이 있어.”“설마요.”곽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사람을 통제하는 기술이 매번 잘 먹혔다고요. 장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어요. 상대도 현술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절대 막을 수 없다고 했어요.”“이 세상에 절대라는 건 없어. 그 자식 정말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몰라.”송영명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곽훈아, 자세히 생각해봐.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기꺼이 하겠다고 했겠어? 아까 그 자식 거절하지도 않고 바로 흔쾌히
“하하... 명의님. 아까 따귀 아주 찰지게 잘 때렸어요. 곽훈 걔 얼굴이 퉁퉁 부었다니까요? 웃겨 죽는 줄 알았어요.”황성 클럽을 나설 때 안세리의 얼굴에 드리워졌던 먹구름은 완전히 사라졌고 지금은 입이 귀에 걸렸다.원래는 유진우를 데려가서 주도권을 빼앗고 송영명의 화만 돋우려 했었는데 효과가 예상을 뛰어넘었다. 인간쓰레기 송영명의 화를 돋우었을 뿐만 아니라 송영명의 친구도 때렸다. 정말 제대로 화풀이했다.“다 저 사람들 자업자득이에요. 사람을 해칠 마음이 없었더라면 그렇게 얻어맞지도 않았죠.”유진우가 덤덤하게 웃어 보였다.“이런 게 바로 본전도 못 찾았다는 거죠.”안세리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조금 전 곽훈이 유진우를 괴롭히려고 일부러 그랬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실력이 부족하여 통제를 벗어나고 말았다. 결국 뜻대로 되지 않은 건 물론이고 되레 자신이 당하고 말았다. 이런 게 바로 인과응보였다.“아까 그 사람들 좋은 사람 아니니까 앞으로는 자주 만나지 말아요.”유진우가 귀띔했다. 곽훈 같은 부잣집 도령이 현술을 배웠다는 건 뒤에 다른 실력자가 있다는 뜻이었다. 안세리처럼 세상 물정을 모르는 재벌 집 딸은 당하기 일쑤였다.“걱정하지 말아요. 그 사람들 정도는 쉽게 해결할 수 있으니까.”안세리가 우쭐거리며 아래턱을 들었다.“명의님은 제 행운의 신 같아요. 전에도 절 살려줬고 이번에도 도와줬잖아요. 명의님과 함께 있으니까 운이 다 좋아진 것 같아요.”“저도 세리 씨 덕분에 용혈삼을 구했는걸요.”유진우가 웃으며 말했다.“히히... 그렇다면 우리 서로 도움이 됐네요? 아주 좋아요. 그럼 오늘부터 제 남사친해요.”안세리는 두 손을 허리춤에 올려놓고 선포하듯 말했다.“주인님, 주인님, 전화 왔습니다...”그때 안세리의 휴대전화가 갑자기 울렸다. 전화를 받은 그녀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네? 할아버지한테 일이 생겼다고요? 알았어요... 지금 당장 갈게요.”전화를 끊은 안세리는 부랴부랴 차에 올라탔다. 그러다가 문득 뭔가 떠
“윤아요.”왕현이 말했다.“술광 선배님이 떠난 후로 윤아 집에서 혼자 외로워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바깥 구경도 시켜줄 겸 데리고 나왔어요. 우리 연경에는 처음 오거든요. 듣건대 여기 인재가 많다고 하던데 한번 좀 보려고요.”“연경에 인재가 많긴 하지만 엄청 복잡해요. 두 사람이 어디 팔려가도 몰라요.”유진우가 쌀쌀맞게 말했다.“형님이 있잖아요. 우린 무서울 게 없어요.”왕현이 웃으며 말했다.“됐어요. 아부 좀 그만 해요. 지금 어디예요?”유진우가 물었다.“아, 우리 금방 기차에서 내렸고 지금 남역 쪽에 있어요.”왕현이 대답했다.“거기서 기다려요. 지금 바로 데리러 갈게요.”유진우는 전화를 끊자마자 택시 기사에게 차를 돌리라고 하고는 곧장 남역을 향해 달려갔다.한 시간 후, 차가 남역 대문 앞에 멈춰 섰다.“형님, 여기요, 여기...”유진우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왕현과 임윤아가 환하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두 사람 모두 짐을 바리바리 챙긴 걸 보면 놀러 온 게 아니라 거의 이사였다.“뭔 짐을 이렇게나 많이 가져왔어요?”유진우는 그 모습에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미리 준비해서 나쁠 게 없잖아요. 어차피 다 쓸 건데.”왕현이 웃으면서 말했다. 연경에 처음 온 거라 흥분되고 긴장하여 만반의 준비를 하고 왔다.“됐어요. 일단 머물 데 가서 짐 내려놓고 밥 먹으러 가요.”유진우가 임윤아의 짐을 들어주려 하자 임윤아가 고개를 저으면서 거절했다.“유 선생님은 신분이 귀하신 분이니까 이런 일은 제가 하겠습니다.”그러고는 끙끙거리면서 짐을 차에 실었다. 힘들어서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유진우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이 녀석 정말 하나도 변한 게 없네. 어릴 적부터 고생하며 자라서 일을 안 하면 오히려 더 불안해하는 것 같아.’차에 올라탄 후 유진우는 두 사람과 함께 그가 머무는 호텔로 향했다.5성급 호텔이었는데 연경의 남쪽 구역에서 그리 고급스러운 호텔은 아니었지만 가격이 어마어마했다.호텔로 들
유진우는 임윤아에게 5성급 호텔에 머무르라고 강요하지 않고 두 사람과 함께 외곽에 있는 별장으로 가서 별장을 사버렸다.2층짜리 별장이었는데 인테리어도 깔끔했고 정원도 딸려있었다. 돈만 내면 바로 살 수 있었다.아직 연경에 더 있어야 했기에 집을 맡거나 호텔에서 지내는 것도 불편할 것 같아 차라리 별장을 샀다. 어차피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니까.유진우가 산 별장에 들어오자 임윤아도 마음이 한결 놓인 듯한 모습이었다. 연경의 집값이 지금 오르는 추세라고 하니 투자 겸 집을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앞으로 집에서 밥도 할 수 있어서 더 절약할 수도 있었다. 이 생각만 하면 기분이 좋았다.모든 매매 절차를 마친 후 유진우는 두 사람과 함께 필요한 물건을 사러 갔고 주변 환경도 둘러보았다.할 일을 다 마쳤을 때 벌써 하늘이 어둑해진 뒤였다. 유진우와 왕현 두 사람은 뱃가죽이 다 등에 붙을 지경이었다.다행히 임윤아가 미리 장을 봐서 두 사람에게 풍성한 저녁을 차려주었다. 국 하나에 반찬 다섯 가지였는데 채소반찬과 고기반찬 모두 있었고 맛과 향도 아주 일품이었다.임윤아의 요리 솜씨가 대단한 건 정말 인정이었다. 간단한 식자재만으로도 아주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냈다. 적어도 요리 솜씨만큼은 유진우는 그녀를 따라가지 못했다.식사를 마친 후 임윤아는 두말없이 설거지했고 유진우와 왕현은 베란다에서 풍경을 감상하면서 얘기를 나누었다.따르릉...그때 휴대전화가 갑자기 울렸다. 유진우가 전화를 받자마자 익숙하면서도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바로 유성신이었다.“진우 씨, 지금 당장 골든 클럽으로 와요. 할 얘기 있어요.”“할 얘기 있으면 지금 전화로 해요. 나 바빠서 갔다 왔다 할 시간이 없어요.”유진우가 덤덤하게 말했다.“이 일 엄청 중요한 일이에요. 안 오면 후회할 거라고요!”유성신이 진지하게 말했다.“얘기 안 하면 이만 끊을게요.”유진우는 그녀와 쓸데없는 얘기를 섞고 싶지 않았다. 예전부터 참 호감이 가지 않는 그런 여자였다.“잠깐
룸 안에 각양각색의 테이블이 열몇 개 놓여있었고 VIP 손님들이 띄엄띄엄 앉아있었다.그리고 매 손님 옆에 미녀 종업원이 따르고 있었는데 도박 이외의 모든 일을 도맡아 했다. 그야말로 아주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VIP 룸에 들어오는 손님들은 전부 신분이 귀하고 돈이 많은 사람들이라 한 판을 놀아도 돈이 수억 원이 나들었다. 더 통쾌한 손님이 오면 수십억, 수백억씩 들이붓기도 했다.일반인에게는 그야말로 발도 들일 수 없는 그런 세상이었다.VIP 룸으로 들어가자마자 유진우는 가운데 테이블에 앉아있는 낯익은 두 사람을 발견했는데 바로 유강청과 유성신이었다.유성신의 신분이라면 VIP 룸에 들어올 수 없었다. 아무래도 유진우를 만나려는 사람이 유강청인 듯했다.“어머, 진우 씨 왔어요? 얼른 와요. 와서 두어 판 같이 놀아요.”유강청이 적극적으로 일어나 유진우에게 자리를 안내했다. 환하게 웃고 있긴 했지만 눈빛은 싸늘했다.“도련님, 날 부른 일로 부른 거죠?”유진우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급할 거 없어요. 두어 게임 하다가 이따가 얘기해요.”유강청은 웃으면서 옆에 있던 종업원에게 손가락을 튕겼다.“이분이 쓸 거 칩 10억 원어치 가져와. 내 이름에 달고.”“알겠습니다.”잠시 후 미녀 종업원이 크리스털 칩을 몇십 개 가져왔다.“진우 씨, 오늘 마음껏 놀아요. 이기면 진우 씨가 다 가져가고 지면 내가 낼게요.”유강청이 통쾌하게 웃으며 말했다.“난 도박을 싫어하고 빙빙 돌리는 것도 싫어합니다. 할 얘기 있으면 바로 하세요.”유진우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이곳은 도박꾼들의 천국이었지만 유진우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진우 씨는 역시 시원시원한 사람이라니까.”유강청이 멋쩍게 웃었다.“사실 진우 씨한테 엄청난 분을 소개해주려고 불렀어요. 그럼 앞으로 백도 생기니까 남쪽 구역에서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다녀도 돼요.”“그래요? 그분이 누군데요?”유진우가 물었다.“골든 클럽의 사장 하희관입니다.”유강청이 자랑스럽게 말했다.“미안
“그래?”하희관의 시선이 유강청이 가리키는 방향대로 움직였다가 결국 유진우에게 머물렀다. 그러고는 아래위로 꼼꼼히 살피면서 꿰뚫어 보듯 했다.“역시 젊고 유능한 인재군.”하희관이 웃으면서 말했다.“가만히 서 있지만 말고 얼른 앉아. 할 얘기 있어.”그러고는 소파에 털썩 앉더니 종업원이 건네는 와인 한잔을 받고 단숨에 들이켰다. 정말 카리스마가 장난이 아니었다.“진우 씨, 이분이 바로 명성이 자자한 하 사장님이십니다. 이따가 잘해요. 기회 놓치지 말고.”유강청이 웃을 듯 말 듯하며 말했다.“그러니까 날 불러낸 목적이 이 사람 때문이라는 거예요?”유진우가 덤덤하게 말했다.“젊은이, 내가 청강이더러 젊은이를 데려오라고 한 건 거래를 하고 싶어서야.”하희관이 시가를 한 모금 빨고 연기를 내뿜었다. 뿌연 연기가 유진우의 얼굴을 향해 날아갔다가 거의 닿을 무렵 갑자기 사라졌다.“거래요?”유진우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혹시 옥로고 레시피 때문에 그러는 겁니까?”“머리가 좋군. 난 머리가 좋은 사람과 얘기하길 좋아해.”하희관이 손가락을 튕기면서 말했다.“내가 원하는 거 알았으니까 가격 불러. 얼마 필요해? 부르는 대로 다 줄게.”“사장님, 옥로고 레시피를 사장님한테 팔 수 없어요.”유진우가 단칼에 거절했다.“왜? 내가 돈이 없을 것 같아?”하희관이 실눈을 뜨고 말했다.“진우 씨, 남쪽 구역 경제의 3분의 1이 하 사장님의 손에 있어요. 사장님은 진우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부자라고요.”유강청이 타이밍 맞게 나서서 거들었다.“젊은이, 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물건이 많지 않아. 나랑 조건을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아주 적다고. 이건 젊은이가 벼락부자가 될 기회니까 잘 잡아.”하희관은 웃으면서 말했지만 눈빛에는 경고의 뜻이 담겨있었다.“돈 문제가 아니라 옥로고의 레시피를 이미 다른 사람한테 팔았어요.”유진우가 말했다.“뭐라고요? 팔았다고요?”유강청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순식간에 흥분했다.“누구한테 팔았어요? 왜 진작
한바탕 공격이 지나간 후 연무장에는 제갈영군 혼자만 남았다.“실력이 점점 더 형편없어지는구나. 앞으로 더 열심히 훈련하도록 해. 알았어?”제갈영군이 호위병들에게 호통쳤다.“네.”호위병들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대답했다.“됐어. 모두 나가 봐.”제갈영군은 손을 휘둘러 호위병을 전부 내보낸 다음 돌아서서 유천우 일행을 쳐다보았다.“제후님의 창술은 정말 신이 내린 창술입니다. 서경 전체를 통틀어 적수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정말 존경합니다.”유천우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아무 일 없이 여기까지 올 리는 없을 테고. 무슨 일로 이 먼 곳까지 왔지?”제갈영군은 수건을 들고 땀을 닦기 시작했다.“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실례도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유천우가 두 손을 맞잡고 예를 표했다.“네 아버지 때문에 왔지?”제갈영군은 마치 예상한 듯 전혀 놀라지 않았다.“제후님께서도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유천우가 눈썹을 치켜올렸다.“서경왕이 암살당한 게 얼마나 큰일인데 내가 모를 수가 있겠어?”제갈영군은 차를 마시면서 혼자 자리에 앉았다.“그럼 북쪽 4대 제후가 반란을 일으킨 것도 알고 계십니까?”유천우가 다시 물었다.“소문은 들었어.”제갈영군이 고개를 끄덕였다.“제후님은 충의로운 분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부디 위기에 처한 서경왕부를 도와주십시오.”유천우는 두 손을 맞잡고 허리 굽혀 인사했다.“만약 네 아버지가 왔다면 난 당연히 도왔을 거야. 왜냐하면 난 그분을 존경하거든. 근데 넌... 아직 자격이 부족해.”제갈영군은 찻잔을 들어 한 번에 다 마셔버렸다. 내뱉는 말도 매정하기 그지없었다.유천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가 곧바로 평정을 되찾았다.그는 제갈영군이 오만하고 변덕이 심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저택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난처함을 겪을 준비를 마쳤다.“제후님, 아버지와 비교하면 전 정말 보잘것없고 제후님께 뭔가를 요구할 자격도 없다는 걸 알고 있어요.”유천우가 갑자기 화제를 바꾸었다.“하지만 전 유씨 가문 사람이
다음 날 오전, 남운.유진우와 유천우는 밤을 새워 가장 빠른 시간 안에 목적지인 남운에 도착했다.남운은 무릉 제후 제갈영군이 지키고 있었고 남쪽 4대 제후 중에서도 병력이 가장 많으며 경제력이 가장 강한 도시였다.하지만 제갈영군은 성격이 괴팍하고 변덕이 심해서 화를 내면 유만수의 체면조차 봐주지 않았다. 하여 유천우는 제갈영군을 설득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형, 무릉 제후 저택에 도착했어요.”차가 멈춘 후 유천우와 유진우 일행이 잇달아 차에서 내렸다.“벌써 둘째 날이야. 네가 제후 저택을 다니고 있다는 소식이 곧 알려질 테니 서둘러야 해.”유진우가 당부했다.“알고 있어요.”유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제갈영군은 다루기 힘든 사람이지만 또 함부로 배신하는 소인배는 아니에요. 충분한 대가를 제시하고 감정으로 호소하면 설득할 수 있을 거예요.”“그럼 좋고.”유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들어가자.”유천우는 옷을 정돈하고 얼굴을 매만져 정신을 차린 후 발걸음을 옮겨 저택 호위병에게 신분을 밝혔다.전과 마찬가지로 일행은 순조롭게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하지만 이번에 만난 장소는 저택의 거실이 아니라 제갈영군의 개인 연무장이었다.모두가 알다시피 제갈영군은 무술광이었다. 평소 직접 군대를 이끌고 훈련을 했기 때문에 그가 이끄는 장병들 모두 용맹하고 뛰어났다.“도련님, 제후님 지금 안에서 훈련 중이십니다. 들어가 보십시오.”호위병은 그들 일행을 연무장 문 앞까지 안내한 후 가버렸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연무장 가운데서 건장한 체격에 온몸이 근육질인 중년 남자가 수십 명의 정예 호위병과 함께 훈련하고 있었다.중년 남자는 창을 들고 위풍당당하게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양손으로 창을 휘두르자 창이 용이나 뱀처럼 움직였는데 민첩할 뿐만 아니라 파워도 넘쳤다.주변에 칼과 방패를 든 수십 명의 정예 호위병들은 속수무책으로 밀려났고 공격을 전혀 막아내지 못했다.이들은 제후 저택의 정예병으로서 혼자서 백 명을 거뜬히 상대할 수 있는 실력을 지녔다
“여봐라. 가서 펜과 종이를 가져와.”주한휘는 바로 부하에게 펜과 종이를 가져오라고 하고는 혼약을 맺을 준비를 했다.이런 기회는 좀처럼 얻기 힘든 좋은 기회였다. 딸이 서경왕부에 시집간다면 미래의 왕비가 될 것이다. 그러면 그의 외손자가 차기 서경왕이 될 가능성이 있다.이 내기는 어떻게 계산해도 이익밖에 없었다.“도련님, 잠깐만요. 인생의 중대사인데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해야죠.”유진우가 귀띔했다.“뭐?”주한휘가 얼굴을 찌푸리면서 불만을 드러냈다.‘호위병 주제에 어디서 지적질이야? 버르장머리 없이. 만약 내 부하였더라면 진작 매를 들었어.’“설득할 필요 없어. 난 이미 결정했어.”아직 유진우의 정체를 들켜선 안 되기에 유천우도 호위병을 대하듯 했다. 유천우는 유진우를 돌아보면서 웃었다.“제후님의 따님은 얼굴도 예쁘고 현명해서 그런 여자와 결혼하는 건 내 복이야. 복이 스스로 굴러들어왔는데 거절할 이유가 있겠어?”“역시 넌 사람 보는 눈이 있다니까.”주한휘는 기회를 놓칠세라 바로 추켜세웠다.“도련님...”유진우가 뭐라 얘기하려던 그때 주한휘가 호통쳤다.“건방진 놈! 감히 주인의 결정에 끼어들어? 버르장머리 없이.”유진우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분노를 터트리려 하자 유천우가 말렸다.“됐어. 난 이미 결정했으니까 더는 뭐라 하지 마.”그러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혼약서에 사인하고 지장을 찍었다.유진우는 마음 아픈 나머지 한숨을 내쉬었다.‘내 동생 많이 컸구나. 이젠 무슨 일을 하든 항상 대국을 생각하고.’이 점은 유진우마저도 따라갈 수 없었다.“제후님, 혼약도 정해졌으니 부디 약속을 지키시길 바랍니다.”유천우가 두 손을 맞잡고 인사했다.“걱정하지 마. 앞으로 우린 한 가족이야. 서경왕부에 무슨 어려움이 있든 발 벗고 도와줄게.”주한휘가 가슴을 툭툭 치면서 장담했다.“감사합니다, 제후님. 전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유천우는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인사했다.“내가 문 앞까지 배웅해줄게.”
유천우의 말은 강력한 힘과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다.만약 서경이 무너진다면 8대 제후, 각 지역의 고위급 관료, 수천만 명에 달하는 백성들 모두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다들 서경에 뿌리 박고 사는 사람들이라 애국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천우야, 맞는 말이긴 하지만 난 소심하고 겁도 많아서 항상 앞뒤를 생각하거든. 만약 반란을 진압하다가 군대를 다 잃으면 어떡해?”주한휘는 여전히 망설였다.“제후님, 혹시 손해를 보게 된다면 서경왕부에서 두 배로 갚아드리겠습니다.”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 주한휘가 이런 얘기를 했다는 건 실질적인 이득을 원한다는 뜻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어쨌거나 전 재산을 걸어야 하는 작전이기에 혹시라도 실패하면 큰 손실은 면할 수 없으니까.그의 행동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천우야, 내가 널 믿지 못해서 이러는 게 아니라 이런 일은 말로만 해선 안 돼.”주한휘가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원하는 게 있으시면 무엇이든지 얘기하세요. 제가 할 수 있는 거면 최대한 다 들어드리겠습니다.”유천우가 큰소리치며 장담했다. 이 정도면 성의를 충분하게 보여줬다고 생각했다.“알았어. 천우 네가 이렇게 얘기하니까 마음이 놓이네.”주한휘가 웃으면서 말했다.“사실 내가 원하는 건 돈이나 보물이 아니야. 지금 가장 걱정되는 게 내 딸인데 올해 25살이 됐는데도 어울리는 남자를 만나지 못했어. 만약 천우 너 같은 남자한테 시집간다면 참 좋을 텐데.”“저요?”유천우는 놀란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그래.”주한휘가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딸 해린이 절세미녀까진 아니더라도 그래도 얼굴도 나름 예쁘고 재능도 뛰어나. 만약 해린이를 아내로 들인다면 내조도 엄청 잘하는 현모양처가 될 거야.”현재 그에게는 돈과 인맥 모두 충분했다. 유일하게 부족한 게 바로 하늘보다 높은 권력이었다.서경왕이 죽은 지금 유천우가 왕위를 물려받을 가능성이 가장 컸다. 만약 딸이 유천우와 결혼한다면 나중에 서경의 왕비가 될 것이고 주한휘의 신
유천우의 계획은 간단했다. 먼저 예의를 갖춰서 설득하다가 안 되면 무력을 사용하여 제압하는 것이었다.만약 반란을 일으킨 4대 제후가 서경왕부에 굴복한다면 서경왕부는 과거의 잘못을 따지지 않고 권력도 그대로 유지하게 할 것이다. 하지만 굴복하지 않는다면 무력으로 진압하는 수밖에 없었다.그때가 되면 서경왕부는 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나머지 4대 제후와 서경의 많은 세력과 손을 잡고 반역자들을 몰살할 것이다.전쟁을 피할 수 없다면 속전속결로 끝내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유천우의 말을 들은 장범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진지하게 말했다.“내가 오늘날의 권력을 가질 수 있었던 건 다 네 아버지 덕이야. 반란을 진압하는 건 물론이고 목숨까지 바치라고 해도 기꺼이 바칠 수 있어.”“감사합니다. 제후님의 도움이 있다면 이번 어려움을 꼭 극복할 수 있을 거예요.”유천우가 말했다.“이건 내 제후령이야. 제후령만 있으면 가진의 병사를 언제든지 동원할 수 있어.”장범규는 갑자기 병부를 꺼내 유천우에게 건넸다. 백 마디 말보다 행동 하나로 보여주는 게 훨씬 설득력이 있었다.“이건...”되레 유천우가 망설였다. 장범규가 이토록 통쾌하게 병부를 내놓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 행동은 그의 충성심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사양하지 마. 비상시국이잖아. 이 제후령이 있으면 움직이기 훨씬 편할 거야.”장범규는 병부를 유천우의 손에 쥐여주었다.“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제후님!”유천우는 두 손을 맞잡고 인사를 올리면서 진지하게 말했다.“이번 어려움을 극복한 후에 꼭 찾아뵙고 인사드리겠습니다.”“됐어. 그런 얘기는 그만하고 시간도 없는데 얼른 가봐.”장범규가 손을 흔들었다.“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유천우는 허리 숙여 인사를 올린 다음 일행과 함께 저택을 나섰다.오늘 밤 첫 번째 목적지는 예상외로 순조로웠다. 30분도 채 안 되어 평양 제후 장범규의 지지를 얻었고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제후령마저 받았다.만약 이 속도대로 진행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텐
가진은 서경의 변방 도시이자 평양 제후 장범규의 영역이었다.무장 출신인 장범규는 서경왕 유만수와 함께 수년간 전장을 누볐고 세운 공만 해도 셀 수 없이 많았다. 나중에 평양 제후가 된 후 서경의 변방을 지켰다.수년 동안 장범규는 성실하게 직무에 임해왔다.그때 검은색 승합차 한 대가 갑자기 평양 제후 저택 앞에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자 유진우와 유천우 등 몇 명이 나란히 내렸다.“형, 여기가 바로 평양 제후 장범규네 저택이에요.”유천우가 간단하게 소개했다.“장범규는 그래도 충성스럽고 용맹한 사람이에요. 가진을 수년 동안 관리하면서 직무와 책임을 다했거든요.”“밖에 누구야?”저택 입구를 지키던 호위병 두 명이 수상한 움직임을 알아채고 큰소리로 호통쳤다.유천우는 그들에게 다가가 신분패를 보여주면서 덤덤하게 말했다.“서경왕의 둘째 아들 유천우다.”“도련님?”두 호위병은 유천우의 신분패를 보자마자 겁에 질린 나머지 바로 무릎을 꿇었다.“예의 차릴 필요 없으니까 일어나.”유천우가 신분패를 거두어들였다.“지금 아주 급한 일이 있어서 평양 제후님을 뵈러 왔어. 들어가서 보고 좀 올려줄래?”“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지금 당장 가서 제후님께 말씀드릴게요.”그중 한 호위병이 대답하고는 서둘러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잠시 후 화려한 옷차림에 배가 불룩하게 나온 중년 남자가 부하들과 함께 부랴부랴 나왔다. 그 사람이 바로 평양 제후 장범규였다.“안녕하세요, 제후님.”유천우가 먼저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 서경왕의 둘째 아들이긴 해도 눈앞의 장범규는 제후이기에 신분이 그보다 훨씬 높았다.장범규가 직접 마중을 나온 것만 해도 충분히 체면을 세워준 일이었다.“천우야, 이 늦은 밤에 무슨 일로 왔어?”장범규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제후님, 서경왕부에 변고가 생겨서 제후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변고가 생겼다고? 무슨 일인데?”장범규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유천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자,
“네 말은 누군가 4대 제후가 동시에 반란을 일으키게 조종하고 있단 말이야?”이의진이 얼굴을 찌푸렸다.“맞아요.”유천우가 수심에 찬 얼굴로 말했다.“지금 서경에서 4대 제후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사람이죠.”“유태범!”이의진은 깊게 고민하지도 않고 말했다.“작은아버지는 야심이 크고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이에요. 4대 제후의 손을 빌려서 우리가 병부를 내놓게 압박하고 있는 거예요.”유천우가 눈을 가늘게 뜨고 분석했다.“만약 우리가 따르지 않는다면 4대 제후는 반란을 일으켜 우리가 군대를 동원하게 압박한 다음 유태범이 중간에서 방해하면서 우리한테 불리하게 할 겁니다. 우리가 반란을 진압하는 데 실패하면 서경왕부의 위엄이 크게 손상될 거예요. 그러다가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해질 때 구세주처럼 나타나서 백성들을 구하고 4대 제후를 제압할 계획인 거죠. 그때가 되면 유태범은 만인의 지지를 받아 새로운 왕이 될 겁니다. 민심을 얻으면 천하를 얻는 것과 같다는 말도 있듯이 유태범이 아버지와 같은 자리에 서게 되면 새로운 서경왕이 되겠죠. 아주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세웠네요.”유천우의 표정이 눈에 띄게 심각해졌다. 유태범이 꾸민 건 음모가 아니라 공공연한 모의였다. 하지만 상대가 나쁜 짓을 꾸미고 있다는 걸 분명히 알고 있는데도 해결하기 어려웠다. 이게 바로 공공연한 모의의 무서운 점이다.“그렇다면 유태범이 진작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거네.”이의진이 얼굴을 찌푸렸다.“지금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해결해야 한다는 거야. 군대를 동원할 수도 없고 설득도 불가능하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해?”“나머지 4대 제후와 아버지의 옛 부하들과 손을 잡아야만 유태범과 겨룰 수 있을 겁니다.”유천우가 대답했다.“일리 있어.”이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지금 당장 사람을 보내서 나머지 4대 제후를 모셔오도록 할게. 같이 모여서 상의하는 게 좋겠어.”“어머니, 제가 직접 갈게요. 그래야 성의도 충분히 보여줄 수 있죠.”유천우가 직접 나섰다. 나머지 4대 제후
“형, 난 진짜 안 돼요. 왕위를 물려받을 사람은 형밖에 없어요.”유천우의 얼굴에 조급한 기색이 드러났다.“됐어. 왕위 얘기는 나중에 하자. 지금 안팎으로 불안이 끊이지 않아. 일단 문제부터 해결하는 게 급선무야.”유진우가 화제를 돌렸다.“형이 나서서 이끌어준다면 내가 최선을 다해 도와줄게요.”유천우가 진지하게 말했다.“난 지금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없어.”그러자 유진우가 고개를 내저었다.“유태범 일당이 아직 내가 서경으로 돌아온 걸 모르고 있어서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어. 내가 돌아온 걸 몰라야 유태범이 무슨 꿍꿍이라도 꾸민다면 제때 해결할 수 있지. 그리고 호룡각의 잔당들도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있어. 기회를 봐서 싹 다 일망타진할 거야.”“그런 거였군요.”유천우는 그제야 모든 걸 깨달았다.“알겠어요. 그럼 서경왕부에서 공개적으로 하는 일은 나한테 맡기고 형은 보이지 않는 음모들을 해결해주세요.”“그래. 그렇게 하자.”유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아 참. 그리고 이거.”유천우는 문득 뭔가 떠올랐는지 금색 영패 하나를 꺼내 유진우에게 건넸다.“이건 내 군령이에요. 이것만 있으면 내 결사대원 800명을 동원할 수 있고 필요한 순간에 꽤 도움이 될 겁니다.”그의 결사대원 800명은 모두 엄선해서 뽑은 고수들이었다.유천우가 태어난 순간부터 이의진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몰래 그들을 훈련시키면서 힘을 비축했다.20년이 지난 지금 결사대원 800명은 무서울 정도로 성장했다.“알았어. 영패는 일단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돌려줄게.”유진우도 거절하진 않았다.지금 이청성의 도움을 받고 있긴 했지만 호룡각의 잔당들에 비하면 아직 역부족이었다. 이젠 유천우의 결사대원 800명이 더해졌으니 싸울 힘이 생겼다.“천우야!”그때 문밖에서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조금 전 나갔던 이의진이 다시 다급하게 빈소로 들어왔다. 유진우는 재빨리 가면을 쓰고 근위병인 척 옆에 섰다.유천우와 마음을 털어놓고 얘기할 수 있었던 건 형제끼리의 믿음 때문이
“형?”유천우는 인피 가면을 벗은 남자를 보자마자 흠칫 놀라더니 이내 기쁨에 겨워했다. 그 남자는 다름 아닌 서경왕부에 위장 잠입한 유장혁이었다.“많이 컸구나, 천우야. 이젠 혼자서도 일을 척척 해내고.”유진우는 배다른 동생 유천우를 흐뭇하게 쳐다보았다.사실 조금 전 유천우와 이의진의 얘기를 전부 다 들었다. 유천우가 자신을 믿어준 것에 대해 무척이나 고마웠다. 물론 이의진이 걱정하는 마음도 충분히 이해는 되었다.지금까지 권력을 손에 넣으려고 형제끼리 물고 뜯고 부자끼리 서로 죽이는 걸 수두룩하게 봐왔다. 자기 아들을 걱정하는 건 당연했다.“형, 서경에는 언제 왔어요?”유천우가 물었다.“이틀 정도 됐어.”유진우가 대답했다.“아버지 돌아가신 거 알았어요?”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유진우는 빈소의 영정사진을 보고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부자는 1년 전 강능에서 만났다. 그런데 그 만남이 마지막이 될 줄은 생각지 못했다. 다시 만났을 때 유진우는 빈소에 서 있었고 유만수는 관 속에 누워있었다.‘이건 뭐 운명의 장난도 아니고...’유진우는 관 앞으로 걸어가 반쯤 열린 관뚜껑 사이로 그 안에 누워있는 유만수를 보았다. 얼굴이 평온한 걸 보니 고통 없이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았다.하지만 어찌 된 건지 그렇게 미워했던 유만수의 얼굴을 본 순간 슬픔이 밀려오기 시작했다.‘내가 만약 서경에 빨리 돌아왔더라면, 빨리 만났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까? 왜?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유진우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고 눈시울이 저도 모르게 붉어졌다.“형, 사실 최근 2년 사이 아버지 건강이 점점 나빠져서 특효약으로 연명하셨어요. 의사는 아버지가 천인오쇠라고 하면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어요. 천천히 쇠약해져서 죽는 것보다 이 결과가 아버지한테는 오히려 해방 같은 거라고 볼 수 있어요.”유천우가 울먹거리며 말했다.“범인은 잡았어?”유진우가 돌아서서 물었다.“홍복홍이 지금 조사하고 있어요.”유천우가 대답했다.“서경왕부에 숨은 스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