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됐어. 이 일은 여기까지 해.”안세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송영명을 힐끗거리며 말했다.“나 이따가 진우 오빠랑 점심 먹어야 하니까 먼저 가볼게. 재밌게 놀아.”그러고는 유진우의 팔짱을 끼고 VIP 룸을 나갔다.사람들은 서로 얼굴만 멀뚱멀뚱 쳐다보았고 표정이 다 좋지 않았다. 조금 전 달아올랐던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듯 확 차가워졌다.“곽훈아, 괜찮아?”송영명이 곽훈의 상처를 살폈다. 얼굴이 다 비뚤어질 정도로 상태가 아주 심각했다. 가뜩이나 못생긴 이목구비가 더욱 볼품없게 되었다.“X발. 그 자식 힘이 장난이 아니에요. 지금까지 이런 굴욕을 당한 적이 없다고요.”곽훈은 몇 개 남은 이를 꽉 깨물고 분노를 터트렸다.“원래는 그 자식을 망신당하게 할 생각이었는데 되레 너만 당했잖아.”송영명이 고개를 내저었다.‘실력이 안 되면 잘난 척하지나 말지. 창피해서, 원.’“너무 이상해요. 평소에는 엄청 잘 먹혔었는데 오늘 왜 이런 실수가 생겼는지 모르겠어요.”곽훈이 잔뜩 찌푸린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혹시... 유진우라는 사람 일부러 연기한 거 아닐까요?”그때 소가희가 불쑥 한마디 했다.“연기?”그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향했다.“이상하잖아요. 통제를 벗어난 거라면 곽훈 씨 한 사람만 때린다는 게 말이 돼요?”소가희가 분석했다.“일리 있어.”송영명은 아래턱을 만지면서 생각에 잠긴 듯했다.“그 자식 겉으로 보기에는 예의 바른 것 같은데 사실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해. 아까 일부러 연기했을 가능성이 있어.”“설마요.”곽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사람을 통제하는 기술이 매번 잘 먹혔다고요. 장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어요. 상대도 현술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절대 막을 수 없다고 했어요.”“이 세상에 절대라는 건 없어. 그 자식 정말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몰라.”송영명이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곽훈아, 자세히 생각해봐.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기꺼이 하겠다고 했겠어? 아까 그 자식 거절하지도 않고 바로 흔쾌히
“하하... 명의님. 아까 따귀 아주 찰지게 잘 때렸어요. 곽훈 걔 얼굴이 퉁퉁 부었다니까요? 웃겨 죽는 줄 알았어요.”황성 클럽을 나설 때 안세리의 얼굴에 드리워졌던 먹구름은 완전히 사라졌고 지금은 입이 귀에 걸렸다.원래는 유진우를 데려가서 주도권을 빼앗고 송영명의 화만 돋우려 했었는데 효과가 예상을 뛰어넘었다. 인간쓰레기 송영명의 화를 돋우었을 뿐만 아니라 송영명의 친구도 때렸다. 정말 제대로 화풀이했다.“다 저 사람들 자업자득이에요. 사람을 해칠 마음이 없었더라면 그렇게 얻어맞지도 않았죠.”유진우가 덤덤하게 웃어 보였다.“이런 게 바로 본전도 못 찾았다는 거죠.”안세리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조금 전 곽훈이 유진우를 괴롭히려고 일부러 그랬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실력이 부족하여 통제를 벗어나고 말았다. 결국 뜻대로 되지 않은 건 물론이고 되레 자신이 당하고 말았다. 이런 게 바로 인과응보였다.“아까 그 사람들 좋은 사람 아니니까 앞으로는 자주 만나지 말아요.”유진우가 귀띔했다. 곽훈 같은 부잣집 도령이 현술을 배웠다는 건 뒤에 다른 실력자가 있다는 뜻이었다. 안세리처럼 세상 물정을 모르는 재벌 집 딸은 당하기 일쑤였다.“걱정하지 말아요. 그 사람들 정도는 쉽게 해결할 수 있으니까.”안세리가 우쭐거리며 아래턱을 들었다.“명의님은 제 행운의 신 같아요. 전에도 절 살려줬고 이번에도 도와줬잖아요. 명의님과 함께 있으니까 운이 다 좋아진 것 같아요.”“저도 세리 씨 덕분에 용혈삼을 구했는걸요.”유진우가 웃으며 말했다.“히히... 그렇다면 우리 서로 도움이 됐네요? 아주 좋아요. 그럼 오늘부터 제 남사친해요.”안세리는 두 손을 허리춤에 올려놓고 선포하듯 말했다.“주인님, 주인님, 전화 왔습니다...”그때 안세리의 휴대전화가 갑자기 울렸다. 전화를 받은 그녀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네? 할아버지한테 일이 생겼다고요? 알았어요... 지금 당장 갈게요.”전화를 끊은 안세리는 부랴부랴 차에 올라탔다. 그러다가 문득 뭔가 떠
“윤아요.”왕현이 말했다.“술광 선배님이 떠난 후로 윤아 집에서 혼자 외로워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바깥 구경도 시켜줄 겸 데리고 나왔어요. 우리 연경에는 처음 오거든요. 듣건대 여기 인재가 많다고 하던데 한번 좀 보려고요.”“연경에 인재가 많긴 하지만 엄청 복잡해요. 두 사람이 어디 팔려가도 몰라요.”유진우가 쌀쌀맞게 말했다.“형님이 있잖아요. 우린 무서울 게 없어요.”왕현이 웃으며 말했다.“됐어요. 아부 좀 그만 해요. 지금 어디예요?”유진우가 물었다.“아, 우리 금방 기차에서 내렸고 지금 남역 쪽에 있어요.”왕현이 대답했다.“거기서 기다려요. 지금 바로 데리러 갈게요.”유진우는 전화를 끊자마자 택시 기사에게 차를 돌리라고 하고는 곧장 남역을 향해 달려갔다.한 시간 후, 차가 남역 대문 앞에 멈춰 섰다.“형님, 여기요, 여기...”유진우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왕현과 임윤아가 환하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두 사람 모두 짐을 바리바리 챙긴 걸 보면 놀러 온 게 아니라 거의 이사였다.“뭔 짐을 이렇게나 많이 가져왔어요?”유진우는 그 모습에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미리 준비해서 나쁠 게 없잖아요. 어차피 다 쓸 건데.”왕현이 웃으면서 말했다. 연경에 처음 온 거라 흥분되고 긴장하여 만반의 준비를 하고 왔다.“됐어요. 일단 머물 데 가서 짐 내려놓고 밥 먹으러 가요.”유진우가 임윤아의 짐을 들어주려 하자 임윤아가 고개를 저으면서 거절했다.“유 선생님은 신분이 귀하신 분이니까 이런 일은 제가 하겠습니다.”그러고는 끙끙거리면서 짐을 차에 실었다. 힘들어서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유진우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이 녀석 정말 하나도 변한 게 없네. 어릴 적부터 고생하며 자라서 일을 안 하면 오히려 더 불안해하는 것 같아.’차에 올라탄 후 유진우는 두 사람과 함께 그가 머무는 호텔로 향했다.5성급 호텔이었는데 연경의 남쪽 구역에서 그리 고급스러운 호텔은 아니었지만 가격이 어마어마했다.호텔로 들
유진우는 임윤아에게 5성급 호텔에 머무르라고 강요하지 않고 두 사람과 함께 외곽에 있는 별장으로 가서 별장을 사버렸다.2층짜리 별장이었는데 인테리어도 깔끔했고 정원도 딸려있었다. 돈만 내면 바로 살 수 있었다.아직 연경에 더 있어야 했기에 집을 맡거나 호텔에서 지내는 것도 불편할 것 같아 차라리 별장을 샀다. 어차피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니까.유진우가 산 별장에 들어오자 임윤아도 마음이 한결 놓인 듯한 모습이었다. 연경의 집값이 지금 오르는 추세라고 하니 투자 겸 집을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앞으로 집에서 밥도 할 수 있어서 더 절약할 수도 있었다. 이 생각만 하면 기분이 좋았다.모든 매매 절차를 마친 후 유진우는 두 사람과 함께 필요한 물건을 사러 갔고 주변 환경도 둘러보았다.할 일을 다 마쳤을 때 벌써 하늘이 어둑해진 뒤였다. 유진우와 왕현 두 사람은 뱃가죽이 다 등에 붙을 지경이었다.다행히 임윤아가 미리 장을 봐서 두 사람에게 풍성한 저녁을 차려주었다. 국 하나에 반찬 다섯 가지였는데 채소반찬과 고기반찬 모두 있었고 맛과 향도 아주 일품이었다.임윤아의 요리 솜씨가 대단한 건 정말 인정이었다. 간단한 식자재만으로도 아주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냈다. 적어도 요리 솜씨만큼은 유진우는 그녀를 따라가지 못했다.식사를 마친 후 임윤아는 두말없이 설거지했고 유진우와 왕현은 베란다에서 풍경을 감상하면서 얘기를 나누었다.따르릉...그때 휴대전화가 갑자기 울렸다. 유진우가 전화를 받자마자 익숙하면서도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바로 유성신이었다.“진우 씨, 지금 당장 골든 클럽으로 와요. 할 얘기 있어요.”“할 얘기 있으면 지금 전화로 해요. 나 바빠서 갔다 왔다 할 시간이 없어요.”유진우가 덤덤하게 말했다.“이 일 엄청 중요한 일이에요. 안 오면 후회할 거라고요!”유성신이 진지하게 말했다.“얘기 안 하면 이만 끊을게요.”유진우는 그녀와 쓸데없는 얘기를 섞고 싶지 않았다. 예전부터 참 호감이 가지 않는 그런 여자였다.“잠깐
룸 안에 각양각색의 테이블이 열몇 개 놓여있었고 VIP 손님들이 띄엄띄엄 앉아있었다.그리고 매 손님 옆에 미녀 종업원이 따르고 있었는데 도박 이외의 모든 일을 도맡아 했다. 그야말로 아주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VIP 룸에 들어오는 손님들은 전부 신분이 귀하고 돈이 많은 사람들이라 한 판을 놀아도 돈이 수억 원이 나들었다. 더 통쾌한 손님이 오면 수십억, 수백억씩 들이붓기도 했다.일반인에게는 그야말로 발도 들일 수 없는 그런 세상이었다.VIP 룸으로 들어가자마자 유진우는 가운데 테이블에 앉아있는 낯익은 두 사람을 발견했는데 바로 유강청과 유성신이었다.유성신의 신분이라면 VIP 룸에 들어올 수 없었다. 아무래도 유진우를 만나려는 사람이 유강청인 듯했다.“어머, 진우 씨 왔어요? 얼른 와요. 와서 두어 판 같이 놀아요.”유강청이 적극적으로 일어나 유진우에게 자리를 안내했다. 환하게 웃고 있긴 했지만 눈빛은 싸늘했다.“도련님, 날 부른 일로 부른 거죠?”유진우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급할 거 없어요. 두어 게임 하다가 이따가 얘기해요.”유강청은 웃으면서 옆에 있던 종업원에게 손가락을 튕겼다.“이분이 쓸 거 칩 10억 원어치 가져와. 내 이름에 달고.”“알겠습니다.”잠시 후 미녀 종업원이 크리스털 칩을 몇십 개 가져왔다.“진우 씨, 오늘 마음껏 놀아요. 이기면 진우 씨가 다 가져가고 지면 내가 낼게요.”유강청이 통쾌하게 웃으며 말했다.“난 도박을 싫어하고 빙빙 돌리는 것도 싫어합니다. 할 얘기 있으면 바로 하세요.”유진우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이곳은 도박꾼들의 천국이었지만 유진우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진우 씨는 역시 시원시원한 사람이라니까.”유강청이 멋쩍게 웃었다.“사실 진우 씨한테 엄청난 분을 소개해주려고 불렀어요. 그럼 앞으로 백도 생기니까 남쪽 구역에서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다녀도 돼요.”“그래요? 그분이 누군데요?”유진우가 물었다.“골든 클럽의 사장 하희관입니다.”유강청이 자랑스럽게 말했다.“미안
“그래?”하희관의 시선이 유강청이 가리키는 방향대로 움직였다가 결국 유진우에게 머물렀다. 그러고는 아래위로 꼼꼼히 살피면서 꿰뚫어 보듯 했다.“역시 젊고 유능한 인재군.”하희관이 웃으면서 말했다.“가만히 서 있지만 말고 얼른 앉아. 할 얘기 있어.”그러고는 소파에 털썩 앉더니 종업원이 건네는 와인 한잔을 받고 단숨에 들이켰다. 정말 카리스마가 장난이 아니었다.“진우 씨, 이분이 바로 명성이 자자한 하 사장님이십니다. 이따가 잘해요. 기회 놓치지 말고.”유강청이 웃을 듯 말 듯하며 말했다.“그러니까 날 불러낸 목적이 이 사람 때문이라는 거예요?”유진우가 덤덤하게 말했다.“젊은이, 내가 청강이더러 젊은이를 데려오라고 한 건 거래를 하고 싶어서야.”하희관이 시가를 한 모금 빨고 연기를 내뿜었다. 뿌연 연기가 유진우의 얼굴을 향해 날아갔다가 거의 닿을 무렵 갑자기 사라졌다.“거래요?”유진우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혹시 옥로고 레시피 때문에 그러는 겁니까?”“머리가 좋군. 난 머리가 좋은 사람과 얘기하길 좋아해.”하희관이 손가락을 튕기면서 말했다.“내가 원하는 거 알았으니까 가격 불러. 얼마 필요해? 부르는 대로 다 줄게.”“사장님, 옥로고 레시피를 사장님한테 팔 수 없어요.”유진우가 단칼에 거절했다.“왜? 내가 돈이 없을 것 같아?”하희관이 실눈을 뜨고 말했다.“진우 씨, 남쪽 구역 경제의 3분의 1이 하 사장님의 손에 있어요. 사장님은 진우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부자라고요.”유강청이 타이밍 맞게 나서서 거들었다.“젊은이, 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물건이 많지 않아. 나랑 조건을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아주 적다고. 이건 젊은이가 벼락부자가 될 기회니까 잘 잡아.”하희관은 웃으면서 말했지만 눈빛에는 경고의 뜻이 담겨있었다.“돈 문제가 아니라 옥로고의 레시피를 이미 다른 사람한테 팔았어요.”유진우가 말했다.“뭐라고요? 팔았다고요?”유강청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순식간에 흥분했다.“누구한테 팔았어요? 왜 진작
그 소리에 하희관의 웃음이 점점 굳어졌고 눈빛이 날카로워졌다.“젊은이, 난 남이 날 거절하는 거 제일 싫어해. 게다가 여러 번이나 거절했어. 내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으니까 실망하게 하지 마.”이건 협박이 담긴 말투였다.“진우 씨, 상황에 맞게 움직이는 사람이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이라고 하 사장님께서 진우 씨를 중히 여기는 걸 영광으로 알아야죠. 계속 이렇게 고집을 부렸다간 화를 입게 될지도 몰라요.”유강청이 경고했다.“됐어. 쓸데없는 말 그만해.”하희관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다.“옥로고 레시피를 오늘 꼭 내놓아야 할 거야. 고분고분 내놓으면 아무 일도 없고 돈도 챙길 수 있어.”“만약 내놓지 않겠다면요?”유진우가 되물었다.“내놓지 않겠다고? 흥.”하희관이 싸늘하게 웃더니 갑자기 손뼉을 쳤다.짝짝!손뼉 소리와 함께 VIP 룸 문이 갑자기 열렸다.곧이어 양복 차림에 우람한 체격의 싸움꾼들이 기세등등하게 들어왔다. 족히 사오십 명은 되었고 하나같이 흉악한 얼굴이었다.“인마, 여긴 내 구역이야. 내 한마디면 네 생사를 쥐고 흔들 수 있다고.”하희관이 천천히 일어서더니 내려다보면서 말했다.“오늘 레시피를 내놓지 않으면 이 방을 못 나가!”“사장님, 난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아요. 근데 사장님이 계속 이렇게 몰아붙인다면 골든 클럽을 부숴버리는 수가 있어요.”유진우가 싸늘하게 말했다.그의 말에 하희관은 잠깐 멈칫하다가 마치 우스갯소리라도 들은 듯 크게 웃었다.“X발, 저 자식 미친 거 아니야? 감히 하 사장님께 저런 식으로 말해?”“정말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구나.”룸에 있던 손님들은 도박까지 포기하고 상황을 구경했다.“흥! 제 주제도 모르는 것.”유강청은 차갑게 웃으면서 마치 바보를 쳐다보듯 했고 유성신은 팔짱을 낀 채 고소해하며 지켜보았다.“인마, 너 지금 누구랑 얘기하는지 알기나 알아?”하희관의 표정이 갑자기 차가워졌다.“널 이 자리에서 바로 총으로 쏴죽일 수도 있다고. 못 믿겠어?”그러더니 허리춤에서
“하 사장님, 다들 즐기러 골든 클럽에 왔는데 왜 그렇게 화를 내세요?”은도는 몸을 한들거리며 서서히 다가오더니 애교 섞인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녀는 등장하자마자 모든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비주얼과 몸매가 뛰어난 데다가 특유의 요염함까지 더해져 정말 여우가 사람이 된다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싶었다.“은도 씨, 난 아직 처리해야 하는 일이 있어. 게임 하고 싶으면 다른 테이블 만들어줄게.”하희관의 분노가 조금은 사그라들었지만 총은 여전히 내려놓지 않았다.“사장님,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이분이 제 친구거든요. 그러니까 절 봐서라도 이번은 넘어가 주세요.”은도가 웃으면서 다가오더니 유진우의 팔짱을 자연스럽게 꼈다. 누가 봐도 친밀하고 다정하기 그지없었다.유진우는 이상했지만 부정하진 않았다. 어쨌거나 좋은 마음으로 도와주는 건데 체면을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친구?”하희관은 좌우를 번갈아 보며 냉랭하게 말했다.“은도 씨 친구가 엄청 건방을 떨던데? 날 여러 번 거절한 것도 모자라 우리 골든 클럽까지 부숴버리겠다고 했어. 내 체면 따위는 아예 신경도 안 쓰더라고.”“네? 그래요?”은도는 고개를 들고 놀란 두 눈으로 유진우를 쳐다보았다.‘이 자식 간덩이가 제대로 부었구나. 감히 하 사장님한테 덤벼?’“사장님, 제 친구가 아직 젊어서 아무것도 몰라서 그런 거니까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부디 넓은 마음으로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은도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없던 일로 할 수는 있어. 하지만 레시피를 내놓아야 할 거야. 내놓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을지도 몰라.”하희관이 싸늘하게 말했다.“레시피요?”은도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아무래도 두 사람 사이에 그냥 말다툼이 아니라 돈이나 이익이 오간 것 같은데.’“난 여전히 그 한마디예요. 레시피를 사장님한테 팔 수 없어요.”유진우는 단칼에 거절했다. 하희관이 총을 꺼내든 순간부터 협상의 여지는 없었다.“은도 씨, 들었어? 이 사람 아직도 주제를 모르고 있다니까!”하희관의
“아니요. 그럴 필요 없어요. 그리고 제가 한 약속이니 제가 지켜야죠.”유진우가 꿀물을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그는 보물 황옥주를 가지고 있어 용원의 기를 찾는 데 성공할 확률이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높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한테는 그야말로 해변에서 바늘 찾는 격이었다.“그래. 그럼, 네 말대로 용원의 기는 네가 찾아봐. 그런데 문제는 그걸 찾고 난 다음에는 뭐 할래?”유만수는 되물었다.“그건 그때 가서 다시 얘기해요. 아직 그렇게 멀리까지 생각 안 해봤어요.”유진우는 고래를 저으며 말했다.“생각할 필요 없어. 내가 하라는 대로 해.”유만수는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약속을 지킨 뒤 두말 말고 다시 돌아와서 왕위를 이어받아. 뒷걱정 없이 모든 걸 다 준비해 놓을 테니까.”“말했잖아요. 저는 왕이 되고 싶지 않아요.”유천우는 단번에 거절했다.“내 아들인 네가 왕위를 이어받지 않으면 누가 이어받아? 설마 정말 천우에게 이 중책을 맡길 생각이야?”유만수는 퉁명스러운 어투로 말했다.“천우는 학문도 능하고 무술도 능한데 안 될 건 또 뭐예요?”유진우가 반박하며 물었다.“우수한 건 맞지만 천우는 대장군이 더 어울려. 서경의 왕은 아니야.”유만수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우리 서경이 세력이 크긴 하지만 내우외환이 끊지지 않고 있어. 만약 내가 죽게 된다면 많은 세력이 반드시 들고 일어날 거야. 그때가 되면 천우가 막아낼 수 있을 거 같아? 천우한테 왕위를 계승하는 건 그를 해치는 길이야.”“그럼, 저는 왜 막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는 거예요?”유진우가 물었다.“너는 팔자가 굳세고 대운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야. 이 세상에서 너보다 더 적합한 사람은 없어.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연경에 있는 분도 같은 생각이야. 네가 서경의 왕이 된다면 전체 국면을 안정시킬 수 있어. 나중에 서경에 무슨 문제가 생기더라도 너는 그만한 중책을 다 짊어질 수 있는 사람이야.”유만수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말했다.“듣다 보니까 결국 저는 정세
유태범은 분한 마음에 울화통이 터졌지만 그렇다고 감히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다.유진우와 유천우가 거절하며 왕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왕은 그 두 사람 중에서 나와야 한다는 걸 유태범도 잘 알고 있었다.조금이라도 허튼 생각을 한다면 그의 최후도 채원진과 똑같아질 것이 뻔했다.“그만! 그만! 이 녀석들이! 왕위를 계승하라는데 무슨 처벌을 받듯이 말하고 있어? 그게 그렇게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야?”두 아들의 태도에 화가 난 유만수는 욕을 퍼부었다.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왕위를 값이 없이 여기며 서로 안 한다고 싸우는 두 아들 때문에 유만수는 너무 창피했다.“저는 정말 생각이 없어요. 천우한테 물려 주세요.”유진우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저는 왕위를 감당할 재목이 아니에요. 무조건 형을 시키세요.”유천우는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둘 다 입 다물어!”유만수는 탁자를 세게 치며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이 일은 내가 결정해. 너희들이 제멋대로 이래라저래라할 일이 아니야! 그리고, 내가 몸만 괜찮았다면 너희들이 왕위를 이렇게 빨리 넘겨받을 수 있었을 거 같아?”유만수가 화를 내자 유천우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절대 못 하겠다는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자기 생각을 밝히고 있었고 유진우는 여전히 자신과 상관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유만수는 심호흡을 몇 번 한 후 겨우 감정을 가라앉히고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모두에게 말했다.“자식놈들이 모두에게 못 볼 꼴을 보여줬네요. 왕위 문제는 나중에 다시 얘기하고 오늘에는 모두 즐겁게 먹고 마시며 좋은 시간을 보냅시다.”“자자, 다들 마십시다.”장범규는 웃으면서 분위기를 풀었다. 그는 누가 왕위를 이어받든 상관없었다.결정은 순전히 유만수의 손에 달렸으니, 장범규는 누가 왕이 되었던 유만수의 결정을 따르고 지지할 생각이었다.방금까지 얼어있던 분위기는 금세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다만 아까와 달리 사람들은 세 부류로 나뉘어져 있었다.첫 번째 부류는 회음 제후 은성종을 필두로 유진우를
“뭐?”유진우의 말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서로를 쳐다보며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서경의 왕위는 수많은 사람이 바라지만 누구도 얻을 수 없는 자리였다.이렇게 존귀하고 최고의 권세를 누릴 수 있는 자리를 서로 마다하는 유진우와 유천우 때문에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예전에는 왕의 자리를 쟁취하기 위해 죽기 살기로 싸웠거늘, 유진우와 유천우는 완전히 반대였다.두 사람은 싸우기는커녕 오히려 서로 양보하며 왕위를 전혀 신경 쓰는 것 같지도 않았다.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이런 일은 처음이라 유진우를 지지하던 사람도 유천우를 지지하던 사람도 모두 입만 벌린 채 얼어있었다.당사자를 제외한 사람들은 서로 으르렁거리며 싸우고 있는데 정작 두 형제는 서로 양보하고 있으니, 사람들은 무슨 이런 일이 다 있나 싶었다.“형, 애초에 약속했잖아요. 형이 왕이 되고 내가 장군이 돼서 형을 보좌한다고. 왜 말을 바꿔요?”유천우는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언제? 난 그런 약속 한 적 없어.”유진우는 담담하게 말했다.“나는 게으르기도 하고 내 마음대로 하고 사는 것에 익숙해. 구속받는 것도 싫고 부담스러워서 싫어. 그리고 너를 지지하는 사람이 더 많아. 왕위는 네가 더 합당해.”“합당하기는 개뿔!”유천우는 퉁명스럽게 말했다.“내 능력이 어느 정도 인지 내가 제일 잘 알아요. 애당초 나는 왕이 될 재목이 아니에요. 하지만 형은 다르죠. 형은 모든 면에서 나보다 우수하고 형이야말로 아버지가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을 계승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후계자예요.”“천우야, 함부로 너 자신을 낮추지 마. 네가 나보다 부족한 건 아무것도 없어.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거야. 너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야.”유진우가 말했다.“난 몰라요! 아무튼 서경의 왕은 형이 하세요!”유천우는 화가 나서 책상을 두드리며 말했다.“익지 않은 참외를 억지로 비틀어 따봤자 그 참외는 달지 않아. 나는 큰 포부도 없고 남을 위하는 고상
유태범의 말 한마디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쳐다봤다. 지난날 표기대장군이었던 유태범은 인품 논란은 많았지만, 그의 능력에 대해서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유태범은 여러 차례 치열한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오늘 이 자리까지 오른 것이었다.그러니 유태범처럼 패기 있고 안목이 있는 사람조차 유진우가 왕이 되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고 말한다면, 그들은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했다.조금 전에 그들은 유진우를 지지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거로 생각해 유천우를 지지했지만 지금 보니 그건 아니었다.먼저 전쟁의 신 조무진이 힘을 보탰고 이어서 표기대장군 유태범이 지지했으니, 이 두 사람의 선택은 많은 사람들의 결정을 바꾸기에 충분했다.“셋째야, 왜 장혁을 선택하겠다는 건지 자세히 말해봐.”유만수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제가 장혁을 선택한 이유는 조무진과 비슷합니다. 저는 한 사람의 재능과 능력을 더 중시합니다.”유태범은 진지하게 말했다.“이번에 호룡각을 어떻게 소탕했는지 모두 잘 알 거로 생각합니다. 전부 장혁이 작전을 짜고 계략을 펼쳤기에 교활하기 여지없던 채원진을 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호룡각의 숨겨진 보물까지 전부 찾아냈죠. 이건 그야말로 아주 큰 공이 아닙니까? 종합해 보면 장혁의 용기와 지략은 왕위를 계승하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입니다. 천우는 대장군이 되기에는 손색이 없지만 왕의 자리에 오르기에는 조금 부족한 면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유태범의 말이 끝나자, 유만수가 입을 열기도 전에 주한휘는 흥분하며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허튼소리! 이번 호룡각을 소탕한 것은 유진우 한 사람만의 공이 아니잖아요. 유천우도 큰 공을 세웠습니다. 유천우의 도움이 없었다면 일이 이렇게 순조롭게 되었을 리가 있겠습니까? 재능과 능력으로 따지면 유천우는 유진우보다 못 한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더 젊고 더 많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어요.”“선평 제후, 뭘 그렇게 흥분하고 그러십니까? 저는 그냥 가족의 일원으로서 제 생각을 말했을 뿐이고 모든 권한은 저의 형님한테
“괜찮아. 오늘은 가족 연회야. 여기 있는 사람은 모두 식구와 마찬가지이니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걱정 말고 해봐.”유만수가 웃으며 말했다.“위왕 님께서 물어보셨으니 그럼, 사양하지 않고 말씀 올리겠습니다.”조무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두 손을 맞잡아 가슴에 올려 예의를 갖추고 말했다.“제 의견은 지극히 제 개인 생각일 뿐이니, 혹시 의견이 달라도 저를 원망하거나 탓하지 말아주십시오.”“전쟁의 신께서 별말씀을 다 하시네요. 당신은 나라의 기둥과 마찬가지인 사람이니 보는 눈이 분명 다를 거로 생각합니다.”“전쟁의 신께서는 누구를 지지하는 겁니까? 어서 말해보세요.”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용국의 전쟁의 신이자 왕족 조씨 가문의 후계자인 조문진의 영향력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만큼 모든 사람 중에서도 상위에 속하여 있었다.“자, 그럼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조무진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정중하게 말했다.“종합적인 능력과 현명함을 바탕으로 한다면 저는 유진우가 서경의 왕으로서 더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유진우에게는 많은 단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서경을 떠난 지 너무 오래되어 서경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고, 둘째는 토대가 없어 대중들을 설득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두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위왕 님께서 저 자리에 오르실 때도 똑같은 상황이었다는 겁니다. 그 당시 많은 세력이 위왕 님께 좋지 않은 눈총을 보냈었지만, 결과는 어떻습니까? 위왕 님은 뛰어난 개인 능력으로 서경의 영토를 넓히며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하여 지금의 지위와 영광을 얻었지요. 유진우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개인 능력으로 보면 위왕 님보다 전혀 뒤지지 않습니다. 서경뿐만 아니라 용국 전체에서도 유진우 같은 사람은 더 없을 겁니다. 저는 유진우에게 조금만 시간을 준다면 그는 반드시 훌륭한 서경 왕이 되어 여러분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킬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것이 제 생각입니다. 여러분께서 다른 의견이 있으시다면 마음껏 말씀하셔도 됩니다. 저는 여기까
은성종의 발언은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똑똑한 사람이라면 유천우의 지지자가 더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유천우를 선택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라는 걸 잘 알 텐데, 서경의 인재로서 어린 제갈량이라고 불리는 은성종이 왜 반대로 유진우를 지지하는지 모두 의아해했다.“회음 제후, 그건 아닌 거 같습니다.”주한휘가 반박했다.“유진우의 무도 재능은 서경 전체를 놓고 보면 확실히 따라올 사람이 없지만, 왕의 자리는 싸움을 잘한다고 맡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유천우는 학문과 무예를 골고루 겸비한 데다 지지자까지 많으며 무엇보다 전쟁에서 몇 년 동안 연마하여 모든 면에서 매우 훌륭합니다. 만약 유천우가 왕이 된다면 서경은 분명 더욱 빛날 것입니다!”유천우는 황제의 조카이자 주한휘의 미래 사위이고 양측은 이미 혼약까지 맺은 사이였다.그러니 주한휘는 유천우가 왕의 자리에 오르기만 하면 자기 딸은 왕비가 되는 것이고 본인도 자연히 신분이 상승할 테니 무조건 유천우를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저도 선평 제후의 견해에 동의합니다.”흑용군 주장 한 명이 말했다.“유진우가 우수하다는 건 물론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는 서경을 떠난 지 여러 해가 되었고 서경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일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유천우는 다르지요. 어릴 때부터 서경에서 자랐으니, 인맥도 넓고 군사 내막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유천우가 왕이 되는 것이 가장 적합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맞습니다. 유진우는 10년 동안 서경을 떠나 있었으니 그를 따르지 않을 자들이 많을 겁니다. 저도 유천우가 왕이 되는 것을 지지합니다.”이때 일부 군사의 고급 장교들이 모두 유천우를 지지하기 시작했다.유진우가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서경을 떠난 지 너무 오래되었기에 그들한테 유진우는 서먹서먹했지만, 유천우는 달랐다.유천우가 예전에는 믿음직하지 못했던 건 맞지만, 최근 몇 년 동안 뛰어난 성과를 보였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유천우의 성격상 왕이
한참 동안 사람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비록 유만수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몇 년은 더 버틸 수 있을 거로 생각했고 무엇보다 이제 겨우 내우외환을 해결했는데, 유만수가 자리를 넘겨준다고 하니 사람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여보, 너무 성급한 거 아닌가요?”옆에 있던 이의진이 권유했다.“그러니까요. 위왕 님, 아직 몸도 정정하시고 지금은 백세시대인데 어찌 이렇게 일찍 자리를 넘겨줄 생각을 하십니까?”장범규는 정직하고 솔직하게 물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묻고 싶었지만, 감히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만약 누군가 나서서 유만수를 설득한다면 새로운 위왕 님의 미움을 살 수도 있으니,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조용하게 상황을 살필 수밖에 없었다.“여러분, 제 몸은 제가 잘 압니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마침 여러분들이 모두 있는 자리에서 후사를 미리 안배하는 것도 제 소원을 이루는 셈입니다.”유만수는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여보...”이의진이 뭔가를 말하려는데 유만수가 손을 들어 제재하며 말했다.“그만. 난 이미 결정했으니 더 이상 설득할 필요 없어.”유만수는 다시 모든 사람을 향해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여러분, 저의 자리를 대신할 사람을 선정하는 건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그 사람의 손에 미래 서경의 흥망성쇠가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 이 일은 저 혼자 결정을 내릴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생각에는 누가 미래의 서경을 맡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까?”“그건...”유만수의 말에 사람들은 더욱 당황했다. 형세를 보아하니 유만수는 내부 투표를 통해 지지자가 많은 사람한테 서경을 맡길 생각인 것 같았다.그러니 문제는 유진우를 선택할 것인가 유천우를 선택한 것인가였다.재능과 능력 면에서 보면 당연히 유진우가 한 수 위이지만 집안 내력과 배후 세력으로 판단하면 유천우가 한 수 위였다.유천우는 최근 몇 년 동안 전쟁에서 매우 좋은 성과를 거두었고 미래가 기대된다는
보물 지도를 나눈 뒤 유진우는 사람을 안배해 호룡각의 기지를 다시 한번 정리했다. 이곳은 위치가 은밀하여 수비는 쉬우나 공격하기는 아주 어려웠고 또한 두 나라의 국경 지대에 놓여있었다.그러니 이곳을 군사 요새로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았다.만약 앞으로 서방 제국과 충돌이 생긴다면 이곳이 중요 군사 지점이 될 것이고 여기서 출병한다면 반드시 예상치 못한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지금 당장은 쓸모가 없겠지만 미리 준비해 둔다면 필요할 때가 있을 것이다.해당 건을 해결한 뒤 유진우는 사람들을 데리고 서경왕부로 돌아갔다.이번에 유진우가 서경의 복병을 해결하고 대승을 거두었기에 유만수는 서경의 왕으로서 특별히 부내에서 연회를 열어 많은 손님을 초대했다.이번 사건에 공로가 있는 사람들은 모두 초청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다.한동안 왕부 안팎은 매우 시끌벅적했다.유만수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한테 매우 기쁜 소식이었고 호룡각을 멸한 건 더욱 기쁜 일이니 축하할 이유가 충분했다.밤이 되자 왕부 안은 이미 많은 사람으로 가득 찼다. 서경에 있는 모든 사람이 거의 다 모인 것 같았다.각 고급 장교, 각 고위 간부, 그리고 각 방면의 거물들이 모두 왕부에 모여 술을 마시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눴다.“여러분, 후배인 제가 먼저 몇 마디 하겠습니다.”연회에서 유천우는 먼저 일어나 손에 잔을 들고 큰 소리로 말했다.“이번에 왕부가 위기를 맞았었지만, 여러분은 떠나지 않고 앞다투어 왕부의 근심과 어려움을 해결해 주어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자, 제가 먼저 여러분께 한 잔 올리겠습니다.”말을 마친 유천우는 고개를 번쩍 들고 잔에 든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도련님이 너무 겸손하네. 우리는 서경의 신하로서 당연히 왕부와 함께해야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지 별거 아니야.”평양 제후 장범규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맞는 말이야. 오랜 시간을 위왕 님과 함께 보냈고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늘 같이했으니, 왕부가 곤경에 처했다면 당연히 전폭적으로 도와야지. 나라를 위해서
“맞아요. 길이라는 건 한번 잘못 들어서면 다시 돌아오기 힘들죠. 사철수의 모든 행동은 좋은 결과를 맞이할 수가 없어요. 누구처럼 죄를 공으로 대처할 기회조차 없죠.”유천우는 유태범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며 말했다.만약 유태범이 셋째 삼촌이 아니고 아버지의 인자함이 없었다면, 그뿐만 아니라 형제의 상잔을 원하지 않았고 손실이 크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역모는 열 번 죽어도 모자란 죄였다.“흠 흠.”유천우의 눈빛에 유태범은 괜히 마음에 찔려 화제를 돌렸다.“장혁아, 세 개의 보물 창고를 모두 합치면 가치가 엄청날 텐데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야?”“당연히 전부 서경으로 가져가야죠. 설마 그 잡놈들한테 남겨두기라도 하겠다는 거예요?”유천우는 눈을 흘기며 말했다.“세 개의 보물 창고를 우리가 전부 독차지할 수는 없어.”유진우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우리만의 힘으로 호룡각을 멸망시킨 건 아니잖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야. 그러니 보물 창고도 공평하게 함께 나눠야지.”“공평하게 나눈다고? 장혁아, 장난이지?”유태범은 어리둥절해서 격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너도 방금 사철수의 말을 들었잖아. 호룡각의 보물 창고는 수십 년 동안 축적해 온 것들이고 그 수가 엄청날 텐데, 그걸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나눈다고?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이번에 호룡각을 소탕하는 데 유태범은 뛰어난 공을 세웠으니, 나중에 또 다른 표창을 받을 수도 있었다.다시 말해, 서경왕부가 더 많은 보물을 얻어야만 유태범의 이익도 더 많아지기 때문에 그는 당연히 보물을 나누고 싶지 않았다.“보물도 좋지만, 도의도 지켜야죠. 사람들이 멀리서 우리를 도와주러 왔는데, 우리가 보물을 독차지한다면 그건 배은망덕한 사람이죠.”유진우는 담담하게 말했다.“그건 그렇지만 굳이 똑같이 나눌 필요는 없잖아. 적당하게 성의를 보여주면 되는 거지.”유태범이 말했다.“저는 이미 마음먹었어요. 제 결정이 불만스럽다면 유만수에게 일러바쳐서 그가 어떤 선택을 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