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우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그는 일반적으로 여자와 실랑이를 벌이지 않는다. 하지만 상대가 만약 막돼먹은 여자라면 굳이 호의를 베풀지도 않는다.“어...”따귀를 맞는 봉연주의 모습에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저놈 미친 건가?봉씨 집안 경호원을 때린 것도 모자라 아가씨의 몸에까지 손을 댄다고?자그마치 명문가 큰따님이다!연경의 최고 명문가인 봉씨 가문 말이다!정말 죽음이 두렵지 않은 건가?“감히 날 때려?”봉연주는 시뻘게진 얼굴을 감싸쥐고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유진우를 쳐다보았다.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맞아본 적이 없다. 더욱이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 앞에서 따귀를 맞았으니 수치심에 고개도 들 수 없었다.“당신들은 레퍼토리가 그것밖에 없어? 좀 신선한 거로 바꾸면 안 돼?”유진우도 참지 못하고 비아냥거렸다.“너... 죽여버릴 거야!”봉연주는 꽥 소리를 지르고는 유진우를 향해 달려갔다.“연주야! 침착해! 침착해!”깜짝 놀란 배수현이 다급히 그녀를 껴안았다.이렇게 다짜고짜 덤비는 건 그녀만 손해 보는 일이다.“됐어요!”그때, 문밖에서 돌연 수려한 미모의 여자가 들어왔다.그 몸매 또한 완벽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고, 몸에서 풍기는 은은한 차가운 분위기는 뜨거운 여름날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만큼이나 편안했다.“이청아?”여자를 본 유진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이곳에서 그녀를 볼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뒤에 서 있던 조선미가 못마땅한 듯 코를 슥슥 문질렀다.지금까지 팔짱을 끼고 이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던 그녀는 이청아가 나타나자 곧바로 진지해지기 시작했다.인생 가장 큰 연적인 그녀를 신중히 대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말이다.만에 하나 빈틈이라도 내어주었다간 큰 낭패를 볼 수도 있다.“이청아 씨,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조선미가 앞으로 걸어 나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이청아를 응시했다.두 경국지색의 여자가 한 공간에 나란히 서 있으니 그야말로 완벽한 풍경이
“두 사람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예요?”입꼬리를 실룩거리면서도 연신 한숨을 내뱉는 조선미를 본 이청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저 여자 미친 건가?“아니에요. 제가 사람을 잘못 봤어요. 죄송해요.”조선미는 씩 웃으며 먼저 사과했다.기억상실증 환자와 시시콜콜 따져서 뭣 하겠는가.“이상하네.”이청아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분명 모르는 사람인데 왜 이렇게 눈에 거슬리지?조선미를 스치고 지나가, 그녀의 시선이 유진우에게로 향했다.“잠시만요. 당신은 낯이 익은데... 우리 혹시 만난 적 있나요?”“네?”간단한 그 한마디의 말이 다시 조선미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기억상실증이라며? 왜 기억하고 있어?지금 나랑 장난하는 건가?“날 기억해요?”유진우는 화들짝 놀랐다.“아, 기억났어요. 그때 그 보험 설계사 맞죠?”곰곰이 생각해 보던 이청아가 그제야 생각난 듯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얼마 전 저 사람은 병원에서 보험 마케팅 일을 하고 있었었다.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에 의해 쫓겨나 버렸다.“네, 맞아요.”유진우는 부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보아하니 정말 예전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았다.깔끔하게 각자의 길을 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난 또 무슨 대단한 인물이라도 되는 줄 알았잖아. 고작 보험이나 팔고 다니는 작자였어?”“사회 가장 밑바닥에서 구르고 있으면서 감히 봉씨 집안 아가씨와 맞서? 자멸의 불길에 몸을 던져넣은 거지!”“몸값 수십억인 나도 이곳에선 목소리를 높이지 못하는데 보험 설계사 따위가 저토록 날뛰었다니. 말도 안 돼!”유진우의 직업을 들은 사람들 사이에서 또다시 한바탕 토론이 벌어졌다.특히 배수현, 최숙자, 장 원장은 멍청이를 보는 듯 멸시가 가득 담긴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그들은 유진우의 뒷배가 꽤 든든한 줄로 여겼었다. 아니면 무슨 배짱으로 봉씨 가문 아가씨를 때리기까지 했겠는가?이제 보니 그저 허풍을 떨었던 것에 불과하다.“청아 언니, 저 사람에 대해 잘 알아요?”“한
그녀는 지금 중재자로 나서고 있다. 이 기회에 못 이기는 척 사과한다면 목숨이라도 부지할 수 있을 텐데.왜 아직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단 말인가?목숨보다 이 세상에 중요한 것이 뭐가 있다고.대체 무슨 생각이지?“당신 말은 잘 알아들었어요. 하지만 당신들은 한 가지 사실을 잘못 알고 있어요. 난 봉씨 가문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반대로 봉씨 가문이 날 두려워해야 하죠.”유진우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그 말에 많은 사람들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봉씨 가문이 널 무서워해야 한다고? 하하하... 약이라도 잘못 먹었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해?”“보험 설계사 따위가 감히 저런 망언을 내뱉다니. 정말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놈이야.”“어리석은 놈! 아직도 자신이 누구를 건드렸는지 인지하지 못하고 있네요.”사람들은 모두 멍청이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유진우를 쳐다보며 혀를 끌끌 찼다.“너무 멍청해.”이청아가 고개를 저었다.“난 이미 당신에게 기회를 줬어요. 그 기회를 소중히 여기지 않으니 그만할게요.”평소의 그녀라면 이런 일에 오지랖을 부리지 않았을 텐데 오늘은 어떻게 된 일인지 자꾸 끼어들게 되었다.“제가 몇 마디 할게요. 첫째, 제 남자는 당신이 주는 기회 따위 필요 없어요. 둘째, 지금 유리한 위치에 있는 건 우리예요. 설사 궁지에 몰리더라도 뚫고 나가면 돼요!”조선미가 가슴을 내밀고 당당히 말했다.미모로 논한다면 우열을 가릴 수 없겠으나, 기세를 논한다면 조선미가 한 수 위인 듯했다.“청아 언니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에요? 이분이 누군지 알아요?”봉연주가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문 어르신의 수양딸이라는 신분이 드러난다면 천하가 들썩일 것이다.“됐어요. 이제 당신들의 일에 관여하지 않을게요.”이청아는 더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나서기 좋아하는 사람도 아닐뿐더러 이런 사소한 일로 사람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으니 말이다.“그래요. 관여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그러다 다칠 수도 있으니까요.”조선미가 배시
집에 돌아가는 길에 유진우는 차를 몰고, 조선미는 조수석에 앉고 김정아와 홍소현은 뒷좌석에 앉아있었다.“소현아, 앞으로 누가 널 괴롭히면 곧바로 이모한테 말해. 이모가 대신 혼내줄게. 알겠지?”조선미는 물티슈로 소현이의 얼굴에 묻은 얼룩을 닦아주며 말했다.“네. 알겠어요.”홍소현이 고개를 끄덕였다.“소현아, 내일부터 아저씨가 싸움 가르쳐줄까?”유진우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누가 괴롭히면 너도 맞받아쳐. 그리고 누굴 혼내고 싶으면 때려!”“무슨 막말을 하는 거예요?”조선미가 얼굴을 찌푸렸다.“그 힘든 걸 왜 우리 소현이한테 시키려고 해요? 그리고 어떤 여자아이가 맨날 싸움만 하고 다닌대요? 피아노나 그림, 이런 걸 배우면 얼마나 좋아요.”“할 줄 아는 게 너무 많은 것도 피곤해요. 격투기가 좋을 것 같은데, 위험에 처하면 자신을 보호할 수도 있고.”유진우가 설명했다.싸움 기술은 어릴 때부터 익혀야 한다.힘들긴 하겠지만 앞으로 큰 도움이 될 것이다.“소현아, 네 생각은 어때?”조선미가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무엇보다 수양딸의 의견을 묻는 게 제일 중요하다.“전 이모 말 들을 거예요.”소현이가 영리하게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하하하... 알았어. 네가 조금만 더 크면 이모가 다 알아봐 줄게.”조선미는 사랑이 가득 담긴 얼굴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화기애애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그들의 모습에 김정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지금까지 유진우와 조선미가 어떻게 행동했는지 그녀는 모두 눈에 담았다. 어찌 됐든 이렇듯 훌륭한 양부모가 생겼으니, 앞으로 수현이의 미래는 분명 밝을 것이다.“여보, 이왕 나왔는데 외식하고 들어갈까요?”조선미가 소현에게도 물었다.“소현아, 뭐 먹고 싶어?”“음... 감자튀김과 햄버거가 먹고 싶어요. 먹어도 돼요?”홍소현이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며 물었다.“당연하지. 오늘 이모가 배불리 먹게 해줄게.”조선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앗싸! 감자튀김 햄버거 먹는다!”홍소현은 너무 신나 환호를
김정아는 얼굴이 피투성이 된 채 손발 여러 곳이 골절되었고 심하게 부딪힌 배는 양수가 터져 시뻘건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형수님! 소현아!”유진우는 목이 터지라 울부짖었지만 이미 의식을 잃은 두 사람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망설임 없이 차에서 내린 그는 ‘쾅’ 소리와 함께 찌그러진 문을 잡아당기더니 곧바로 김정아와 홍소현을 끌어안았다.심각한 부상을 입은 두 사람을 보며 유진우는 목숨이라도 살려야겠다는 생각에 재빨리 은침을 꺼내 응급조치를 시작했다.“대표님!”이때 강린파 사람들이 부랴부랴 달려왔다.그들은 유진우가 조선미를 위해 마련한 경호원으로 지금껏 비밀리에 그녀를 보호해 왔기에 교통사고 현장을 목격한 뒤 곧바로 차에서 내렸다.“빨리! 지금 당장 병원으로 이송해!”상황을 진정시킨 후, 그는 김정아와 홍소현을 차에 태웠고 강린파 사람들에게 얼른 두 사람을 병원으로 보내 치료를 받도록 지시했다.그리고 반대편 문을 열어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멍해 있는 조선미를 끌어안았다.“소현이... 소현이는 괜찮아요?”조선미는 허약한 목소리로 물었다.“조금 다치긴 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유진우는 은침을 놓으며 그녀를 위로했다.“괜찮으면 됐어요. 다행이네요.”그녀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대표님! 운전기사 잡았습니다. 바로 이 사람이에요.”이때 강린파에서 대머리 운전기사를 끌면서 다가왔다.“대표님, 선미 씨, 정말 죄송해요. 브레이크가 갑자기 고장 나는 바람에 제어가 안 됐네요. 저도 어쩔 수가 없었어요.”대머리 운전기사는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푸념을 늘어놓았다.“브레이크가 고장 났다고요?”조선미는 표정이 점점 굳어지더니 곧바로 손을 들어 운전기사의 뺨을 내리쳤다.“브레이크가 고장 났다면서 가속 페달은 왜 밟은 거죠? 누가 봐도 우릴 치려고 일부러 밟은 거잖아요!”“선미 씨, 말씀이 참 지나치시네요.”대머리 운전기사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만지며 야비한 웃음을 지었다.“사람은 위급한 상황에 처하면
그날 밤, 동강 병원의 어느 병실 안.유진우와 조선미는 조용히 침대 옆에 서서 잠든 홍소현을 바라봤고 왠지 모르게 가슴이 미어졌다.다행히 수술로 골절된 부위는 다시 이어졌지만, 몸 곳곳에는 붕대가 칭칭 감겨있었다.체내의 어혈도 유진우의 은침 덕분에 체외로 배출되었다.비록 위험에서 벗어났지만, 교통사고로 인한 공포감과 충격은 다섯 살짜리 아이에게 여전히 큰 상처로 남아 있을 것이다.“걱정하지 말아요. 소현이 괜찮을 거예요.”유진우는 조선미의 손을 잡으며 위로했다.“아이한테까지 손을 대다니... 정말 짐승만도 못한 놈들이네요.”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조선미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이 일은 제가 끝까지 파헤칠 생각이에요. 배후에 누가 있든 절대 넘어가지 않을 거니까 걱정하지 말아요.”유진우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조선미와 홍소현의 부상은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본능을 건드렸고 주제를 망각한 채 선을 넘는 상대에게는 자비를 베풀 생각조차 없었다.“선미야!”“언니!”이때 조군수와 조아영이 부랴부랴 달려왔다.두 사람은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는 조선미를 보더니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재빨리 상황을 물었다.“아빠, 저 괜찮아요. 피부가 조금 까졌을 뿐이에요.”조선미는 일부러 여유로운 척 웃으며 답했다.“괜찮으면 됐어. 그러면 된 거지.”조군수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교통사고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니? 별일 없으니 망정이지. 정말 다행이야.”“언니,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게 말이 돼? 설마 음주 운전 한 건 아니지?”조아영은 은근슬쩍 떠보며 물었다.“우리 문제가 아니라 누군가 일부러 계획하고 저지른 일이야.”조선미는 숨기지 않고 간단히 경위를 말했다.이를 들은 조군수와 조아영은 하나같이 눈살을 찌푸렸다.“대낮에 사람을 해칠 생각을 하다니 정말 미쳤구나. 누구인지는 알아냈어?”“지금 조사중이에요. 내일이면 결과가 나올 수 있어요.”유진우가 답했다.“누가 됐든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해요.”조군수
“보물 지도 관련해서는 네 아버지랑 큰아버지께도 설명드렸다. 이미 몇 년 전에 도둑맞아서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도 몰라.”조군수가 답했다.“삼촌, 이러시면 곤란해요.”조일명은 옆에 놓인 바나나 한 개를 쥐더니 천천히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삼촌이 보물 지도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긴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인데 그걸 잃어버렸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설마 비밀리에 숨겨놓고 독식하려는 건 아니죠?”“아무 증거도 없이 날 의심하는 거니?”“들키고 싶지 않은 일은 처음부터 저지르면 안 돼요. 진실은 언젠가 드러나기 마련이니까요.”미간이 잔뜩 찌푸려진 조군수와 달리 조일명은 여유롭게 바나나를 깨물며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그간의 정이 있어서 충고하는데... 순순히 내놓는 게 좋을 거예요. 오늘 같은 일 두 번당하고 싶지는 않잖아요?”이 말이 나오자마자 여러 사람의 표정이 바뀌었다.특히 조선미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올라 망설일 틈도 없이 달려가서 그의 멱살을 잡았다.“방금 뭐라고 했어? 오늘 교통사고, 설마 네가 한 짓이야?”“장난 좀 친 건데 왜 이렇게 흥분했어?”조일명은 야비한 웃음을 지으며 태연하게 바나나를 먹었다.“이 짐승만도 못한 인간아! 선미는 네 동생이잖아. 어떻게 동생한테 그런 짓을 저지를 수가 있니?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야?”조군수는 화를 버럭 내며 말했다.“삼촌, 농담이에요. 그냥 장난친 건데 다들 왜 이렇게 예민해요?”줄곧 웃으며 말을 이어가던 조일명은 순간 표정이 돌변하더니 정색했다.“물론 보물 지도를 내놓지 않는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죠?”“지금 날 협박하는 거니?”조군수는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제가 어떻게 감히 그러겠어요. 그냥 충고라고 생각해 주시면 좋겠네요.”조일명은 입을 씰룩이며 말했다.“삼촌, 그동안 많은 사람의 원수가 된 건 아시죠? 조씨 가문이라는 큰 버팀목이 없어졌으니, 앞으로 사는 게 훨씬 힘들어질 거예요. 그걸 감안해서 잘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어요.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말을 마친
유진우를 포함한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서둘러 수술실을 향해 달려갔다.마침 혼수상태인 김정아가 실려 나왔고 그녀의 옆에는 흰 천으로 가려진 무언가도 함께 있었다.유진우는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흰 천을 젖혀보았고 아니나 다를까 안에는 아기의 시신이 들어있었다.두 눈이 빨갛게 충혈된 유진우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분노가 가슴속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며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김정아와 홍소현을 지켜주겠다고 홍길수와 약속했다.그러나 교통사고로 인해 모녀가 크게 다쳐 병원에 입원한 것도 모자라 배 속에 있던 아이까지 잃었으니 그 충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죄책감을 밀려왔지만 분노가 모든 걸 덮어버렸다.“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올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잖아요? 말도 안 돼...”조선미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은 듯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현실을 부정했다.임신 9개월이면 태아도 자리를 잡아 곧 출산을 앞둔 상태였다.금방이라도 울부짖으며 세상의 빛을 맞이할 작은 생명체가 이렇게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다니?“죄송합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의사 한 명이 안타까워하며 입을 열었다.“태아는 교통사고 당시에 활력징후를 잃은 거로 보입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정아 씨의 목숨을 지킨 것만으로도 천운입니다.”“내 아이... 우리 아가...”어느새 눈을 뜬 김정아는 의사의 말에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몸이 너무 허약해져 울 힘조차 없었고 고통과 절망으로 가득 찬 그녀의 모습은 보기만 해도 가슴이 미어졌다.“미안해요... 괜히 저희 때문에...”조선미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이 교통사고는 조선미를 겨냥한 게 틀림없었기에 김정아와 홍소현은 억울하게 연루된 것이다.그러니 그녀는 아이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있다.“소현... 소현이는요?”순간 정신을 차린 김정아는 조선미의 손을 힘껏 잡으며 물었다.“소현이는 괜찮아요. 며칠 뒤면 퇴원해도 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위로의 말을 듣고서야 김정아는 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