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침밥은 말 그대로 너무나 불편한 식사시간이었다.비록 이우범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더는 그와 눈을 마주할 수 없었다.다행히 아침밥을 먹은 뒤 이우범은 다시 옆집으로 휴식하러 돌아갔다. 온 저녁 일하고 자지 않았으니, 그가 피곤할 만도 했다“언니, 저 점심 친구네로 가서 먹어요~”나는 간단히 꾸민 뒤 희선 언니를 향해 말했다.오늘 점심은 정아가 나와 아이들을 자기 집에 초대했다.밖에 나간 후, 나는 로아와 승현이를 베이비 전용 안전 시트에 태우고 차로 정아네집으로 운전해 갔다. 그녀의 집은 우리 집과 조금 거리가 있었으며, 차로 약 30분이 걸렸다.정아네 집에 도착한 타이밍에 때마침 노성민과 정아가 싸우고 있었다.“너 빡 대가리야? 내가 너 보고 하라는 일은 왜 매번 그따위로 하는 거야? 너 분명 오늘 내가 지영이 초대하는 거 알면서 그걸 배인호한테 알려줘?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정아가 분노에 차오른 큰 목소리로 노성민에게 밀어붙였다. 노성민도 화를 참으며 좋게 정아를 타일렀다.“아니야, 나 처음부터 인호 형이랑 오늘 점심 약속 잡았어. 인호 형뿐만 아니라 또 다른 두 명의 비즈니스 파트너도 있어. 그래서 네가 지영 씨 초대한 거 깜빡 잊은 거야. 그러니 화내지마, 여보. 만약 지영 씨랑 인호 형이 만날까 봐 걱정되는 거면, 여보랑 지영 씨가 만나는 시간 좀 고치면 안될까?”“안돼!”정아는 언제나 노성민 앞에서 공주처럼 행동했고, 그 어떠한 일이든 노성민이 그녀의 뜻대로 해주며 어르고 달랬다. 그 때문에 정아도 날이 가면 갈수록 제멋대로 행동하는 듯했다.그런 그녀가 나는 부럽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걱정되기도 했다.나는 그들 집 문 앞에 도착은 했지만 차마 들어갈 수 없었고, 유리 창문으로는 노성민의 굳은 얼굴이 비쳤다.정아는 계속하여 노성민을 뭐라 하였다. 내가 들어가서 정아를 말리려고 하던 찰나, 노성민이 참지 못하고 폭발하였다.“그만해!”그 순간 정아는 그 자리에 놀란 듯 멍하니 서 있었고, 나도 심장
“네 그 말은...”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설마 성민 씨와 다른 여자 사이에 뭔 관계라도 있다고 확신하는 거야?”정아는 잠시 멈칫하더니,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확신하는 건 아닌데, 그냥 그런 여자가 하나 있어. 내가 노성민 핸드폰에서 둘의 채팅 기록 봤거든.”그 소식은 나로 하여금 꿈을 꾸고 있는듯한 느낌을 주었다. 솔직히 말해 나는 노성민에게 이런 문제가 생길 줄 생각지도 못했다. 전에 노성민도 이미 놀 만큼 놀았으니 재미없다고 말했다. 나는 정아가 우리 중에서 가장 시집을 잘 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혼생활이란 겉으로 보기에는 행복해 보일 뿐이지 현실은 각종 일이 많다는걸 알게 되었다. 정아는 나에게 그 여자와의 채팅 기록 내용을 말해주었다. 정아의 말로는 채팅 기록으로 봤을 때 둘 사이에 별다른 썸씽은 없는 것 같았지만 왠지 모르게 찝찝하다고 했다. 게다가 저 어이가 없는 부분은, 그 여자의 나이가 정아보다도 몇 살 더 많고 이혼녀에 두 명의 애까지 가지고 있다고 했다... 나는 너무도 놀라 멍해졌다.“그 여자는 계속 그 프로젝트 팀인 거야?”나는 내 생각을 정리한 후 그제야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너 그 여자 본 적 있어?”“아니, 근데 이따가 아마 올 거야.”정아는 머리를 저었다.나는 그 자리에서 당장 폭발할 것만 같았다. 때마침 오늘 나도 정아네 집에 온 겸, 대체 그녀가 어떤 매력을 가졌는지 한번 확인하고 싶었다.이때 문 앞 유모차에 누워있던 로아와 승현이가 울기 시작했다. 그 울음소리로 들었을 때는, 아마 배가 고픈 듯했고, 나는 바로 우유를 타주러 나갔다.거실에서는 노성민이 가만히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고, 배인호는 문 앞 위치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 둘이 조금 전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배인호를 놓고 보면 그의 친구들도 그와 다 비슷하기에, 배인호 또한 노성민이 어디가 잘못됐는지를 모를 수도 있을 것이다.“도와줄까요?”내가 나온 걸 본 노성민은 나에게 다가오며 먼저 말을 건
최소연은 사실 그냥 평범하게 생긴 여자였고, 한눈에 봐도 노성민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다. 하지만 분위기는 있는 편이었고 아주 부드러운 느낌을 주었다. 그녀 옆에는 동료인듯한 또 다른 남자도 같이 서 있었다.최소연은 나를 보더니 깜짝 놀라며 물었다.“어머, 이분은 새 동료인가요?”노성민은 다소 어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조금 전까지 최소연의 일 때문에 불안해하더니, 이제는 그녀가 눈앞에 나타났으니 말이다.나는 그녀가 좋게 보이지 않았다.그녀가 노성민을 바라보는 그 눈빛은 일반 동료 사이를 떠나 아주 물처럼 부드러운 느낌이었다.“저 아닌데요.”내가 차갑게 답했다.“저는 이런 관계의 동료가 될 자신이 없거든요.”내 말에 노성민의 얼굴은 급격히 굳어졌다. 내가 명백히 말하지 않았다 해도 그는 내 말뜻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었다.다만, 이 최소연이라는 여자가 사람의 말귀를 잘 알아듣는지가 문제이다. 역시나 그녀는 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듯했고, 아무런 어색함 없이 오히려 웃어 보이며 내 유모차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 시각, 로아가 유모차에 누워있었다.“어머, 노 대표님. 아이가 두 명 더 늘었네요?”최소연은 손을 뻗어 로아를 만지려 하였다.“친구 집 아이예요.”노성민은 재빨리 그녀에게 설명해줬다.그러고는 바로 최소연에게 그의 가족을 소개했다.“여기는 제 와이프와 아이예요. 사진으로만 봤을 텐데 이제 실물로 보게 되네요.”정아는 조금 전의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최소연이 온 걸 보고는 바로 정신을 똑바로 차리며 얼굴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소연 언니죠? 가끔 남편한테서 많이 들었어요.”최소연은 깜짝 놀라며 노성민을 바라봤다.“노 대표, 진짜예요? 집에서 가끔 제 얘기도 해요? 진짜로 절 친구로 생각하나 보다.”나는 그녀의 그런 여우 짓에 참을 수 없었다. 결국은 이리저리 말 돌리며 본인이 노성민과의 사이가 좋다는 걸 과시하려는 뜻 아닌가?“그냥 가끔이요.”노성민이 재빨리 해명했다.“가끔 업무상의 일 때문에 말이
“그래요, 고마워요. 아이들이 인호 씨 아주 좋아하는 것 같아요.”나는 살짝 미소 지으며 어색하게 답했다.그러자 옆에 있던 최소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러게요. 애들이 배인호 대표님을 진짜 좋아하는 것 같아요. 우리 집 아들도 배인호 대표님 엄청나게 좋아해요. 한두 번만 봤는데도 배인호 대표님을 잊지 못하더라고요.”그러면서 최소연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배인호를 바라봤다.그녀는 그냥 남자를 볼 때면 이러한 눈빛으로 보는 듯했다. 나와 정아를 바라볼 때는 전혀 그런 눈빛이 아니었고 말이다.하지만 배인호의 반응은 노성민과 사뭇 달랐다. 그는 최소연의 그 칭찬을 아예 듣지 못한 듯 바로 몸을 돌려 거실로 나갔다.최소연은 더욱 어색한 상황에 놓였다. 조금 전에 내가 그녀한테 한 소리 했고, 이번에는 배인호한테 무시당했으니 어떻게 생각해도 쪽팔릴 것이다.나도 그녀를 무시한 채 로아와 승현이를 안고 안방 침대에 눕혔다.최소연도 눈치껏 그 자리를 떠났고, 진짜로 화장실을 찾으러 갔는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나는 문을 조용히 닫았다. 정아 품속의 아이도 서서히 잠이 들었고 정아도 아이를 눕힌 뒤, 갑자기 나에게 말했다.“지영아, 나 이혼하고 싶어.”“뭐?”나는 그 말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비록 노성민에게 지금 작은 문제가 있다 해도, 굳이 이혼까지 할 정도는 아니었으니 말이다.“나 이혼하고 싶다고. 나 도저히 이런 거 못 견디겠어.”정아는 잠이 든 아이를 바라보며 마음이 약해지는 듯하더니 다시금 마음을 굳게 먹은 듯 보였다.“너희들 평소에 내가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줄 알지? 사실 이렇게 의심하기 시작한 지 꽤 오래됐어. 나 지금 큰 감정 소모에 빠져서 너무 힘들어.”정아는 살짝 울먹이며 말했고, 나는 그 말에 마음 한쪽이 쑤시며 아파 났다.평소 정아의 성격이 호탕하고 직설적인 지라, 사람들은 그녀의 속마음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정아가 지금까지 우리한테 말해주지 않은 이유 또한 우리가 걱정할까 봐 말해주지 않은 듯했다.그러다 결
“알면 됐어요.”배인호는 핸드폰을 꺼내 들며 말했다.“은행 계좌로 돈 보냈어요. 난 그만할 겁니다.”최소연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돈을 받았다. 배인호는 바로 거실 밖으로 가서 담배를 피웠다.옆에서 지켜보던 노성민의 표정은 덤덤했지만 최소연의 시선이 그로 향하자 시선을 피하며 주방으로 갔다.정아의 행복을 위해 나는 결국 몸을 일으켰다. 거실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배인호를 찾아갔다. 그는 심플한 블랙 반팔 티를 입고 있었다. 너무 마르지도 두껍지도 않은 탄탄한 팔 근육 라인이 보기 좋게 드러나 있었다. 그는 점점 더 담배에 중독되어 가는지 시도 때도 없이 담배를 피웠다.내가 나오는 것을 보더니 배인호는 눈살을 찌푸리며 자리를 옮겼다.나는 계속 그를 따라갔다.“너 담배 냄새 안 좋아하잖아?”그는 내가 따라오는 것을 느끼고서는 놀라며 물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 비친 나의 모습은 조금 불쾌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나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바로 물었다.“물어볼 게 있어서요. 노성민하고 최소연 사이에 무슨 일 있었는지 알죠?”배인호는 그 말을 듣더니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거실 안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담배를 바닥에 던져 발로 비벼 껐다.“낌새가 조금 이상한 정도. 왜?”“두 사람 어디까지 갔어요?”나는 계속 추궁했다.“내가 말했잖아. 느낌이 조금 다른 것 같다고. 두 사람이 어디까지 갔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배인호는 어이없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허지영, 좀 부드러운 태도로 말할 순 없어?”정아 부부의 행복에 관한 문제라 조급한 마음에 내 말투가 별로 좋지 않았나 보다.배인호가 알려주니 나도 그제야 알아차렸다.“미안해요. 내가 너무 급했네요.”나는 말투를 조금 바꾸며 다시 말했다.“지금 성민 씨하고 인호 씨가 함께 파트너로 일하고 있잖아요.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시간이 많을 테니 물어본 거예요.”배인호는 퍽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분명 이미 서른이 넘은 남자인데 얼굴에 주름 하나 없었다. 오히려 나이가 들
그래도 양심은 남아 있는지 예전에 자기가 한 일부 행동들이 과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나는 지나간 일에 더 신경 쓰고 싶지 않아 그에게 기한을 정해주었다.“제일 늦어도 3일 이내에 최소연에 관한 정보를 봐야겠어요.”“내일 줄게.”배인호의 속도는 내 예상을 뛰어넘었다.“좋아요.”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먼저 들어갈게요. 핸드폰으로 보내주면 돼요.”“알겠어. 나도 요구 조건 생각나면 연락할 테니까 내 전화 거절하지 마. 못 본 척도 하지 말고.”배인호는 나에 대한 불신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말했다.“알겠어요.”나는 말을 마치고 들어갔다. 노성민은 이때 주방에서 그릇을 나르고 있었다. 정아와 결혼한 뒤 그는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되려고 요리를 연습했다. 오늘 점심도 그가 직접 요리했다. 최소연도 어느 순간 주방에서 돕고 있었다. 그녀는 생선찜 한 접시를 테이블에 가져다 놓더니 노성민에게 말했다.“노 대표님, 여기에 파채를 얹으면 플레이팅이 더 예쁠 것 같아요.”“나도 알아요. 근데 시간이 늦어서 하지 못했네요. 이대로 먹죠.”노성민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왜 날 안 불렀어요? 나도 음식 잘하는데. 내가 도울게요.”최소연은 말하면서 주방으로 가서 파채를 썰려고 했다. 그녀는 머리를 깔끔하게 묶은 뒤 앞치마를 가져와서 입으려 했다.두 개의 앞치마는 커플 아이템일 것이다. 비록 정아는 요리를 잘하지 못했지만 간단한 음식을 만드는 건 문제가 없었다.나는 얼른 달려가서 최소연이 손에 든 앞치마를 뺏어 들었다.“내가 할게요. 손님인데 가서 앉아 있어요.”“저... 지영 씨도 손님 아니세요?”최소연은 조금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물었다.“난 이 집 주인의 가장 친한 친구예요. 성민 씨하고도 잘 아는 사이인데 손님이라고 할 수 있나요. 그러니까 내가 할게요.”나는 냉랭하게 대답했다.노성민도 그제야 알아차린 듯 상황을 정리했다.“그렇게 해요, 지영 씨한테 부탁하면 돼요. 소연 씨는 가서 앉아 있어요.”최소연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아닌 척할 필요 없어요.”나는 일부러 배인호에게 말했다.“난 그냥 왜 당신이 이런 짓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요.”배인호는 침착하게 대답했다.“난 단지 네가 빨리 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아서.”“알겠어요.”나는 더 따지고 싶지 않았다. 만약 배인호가 일부러 그렇게 한 거라고 말한다면 도리어 내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돌아오는 길에 배인호의 핸드폰이 울렸다. 민설아에게서 전화가 왔다.그는 이어폰 없이 바로 전화를 받았다. 그래서 그들의 대화가 내게도 또렷하게 들렸다.“인호 씨, 성민 씨네 집에 있어요?”부드러운 민설아의 목소리가 들렸다.“어, 무슨 일이야?”배인호의 태도는 말로 표현할 순 없었지만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가끔 그가 진심으로 민설아를 사랑하는 것 같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거리감이 느껴졌다. 정말 그가 책임감 때문에 민설아와 함께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가끔 보는 민설아를 보는 그의 시선은 다른 사람을 대할 때와는 또 달랐다.나는 더 이상 알 수가 없었다.민설아는 병원 복도를 지나고 있는 것 같았다. 가끔 간호사가 목소리와 잡음들이 들렸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또렷하게 들렸다.“그럼, 저녁에는 집에 와서 밥 먹을 거예요? 빈이가 계속 당신하고 놀이공원 가고 싶다고 해서요. 오늘 밤에 거기서 이벤트가 있대요.”배인호가 대답하려는 데 나의 핸드폰이 울렸다. 엄마에게서 온 전화였다. 나는 먼저 거절을 누른 뒤 문자를 보냈다.하지만 민설아는 똑똑했다. 그녀는 잠깐 침묵하더니 물었다.“지영 씨가 왜 거기 있어요?”나와 배인호는 서로를 쳐다봤다. 민설아가 이어서 말했다.“괜찮아요. 오해 같은 거 안 했어요. 전에 지영 씨 핸드폰 벨 소리 들었던 기억이 나서요. 정아씨 하고도 친구인데 함께 식사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죠.”“알겠어. 저녁은 돌아가서 먹을게.”배인호는 민설아의 질문에 더 대답하지 않고 말을 바꿨다.“그래요. 빈이랑 기다리고 있을게요.”민설아는 말을 마치고
최소연이 끌려간 뒤 거실에는 나와 배인호 그리고 정아와 노성민만이 남아있었다.분위기는 많이 굳어졌다. 내가 먼저 입을 열어 노성민에게 물었다.“노성민 씨, 방금 최소연이 정아 물컵 쓰는 거 보고 있었어요?”노성민은 말이 없었다.정아가 대신 대답했다.“당연히 보고 있었지. 그저 막지 않았을 뿐이야. 이 사람 마음속에서 이건 별일 아닌거지. 근데 요즘 보면 나와 아이들도 별일 아닌 게 될 것 같더라. 그러니까 그 전에 우리 이혼해. 아이 셋은 내가 키울게. 다른 건 다 필요 없어.”정아는 말하면 할수록 감정이 올라와 울기 시작했다.정아에게 돈은 중요하지 않았다. 아이가 셋이라도 얼마든지 키워낼 수 있었다. 지금 그녀가 제일 마음 아파하는 것은 노성민이 전과 달리 자기에게 점점 소원해지는 것이었다. “난 동의하지 않을 거야.”노성민이 입을 열었다,“성민 씨가 동의하지 않는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정아와의 이혼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아니면 아이들의 부양권을 정아가 갖는 걸 반대하는 거예요?”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에게 물어봤다.노성민은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그의 이런 반응에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만약 그가 이혼을 반대하는 게 아니라면 빠르게 대답이 나와야 하는데 몇 초 동안 망설였다.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이 보였다. 여자가 더 이상 남자의 유일한 선택이 아니라는 것은 관계가 변질되었다는 것을 뜻한다.정아의 표정이 더 슬프게 변하더니 갑자기 몸을 일으켜 침실로 향했다.나는 바로 따라가서 그녀를 말렸다.“정아야, 잠깐만. 너 뭐 하려고 그래?”“나 아이 데리고 서울로 갈 거야. 내 집으로 돌아가야겠어.”정아는 더 울지 않았다. 하지만 목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냉정했다. 노성민은 상황을 보더니 다가왔다.정아가 아이를 안고 나오는 것을 보더니 노성민은 그녀를 막았다.나는 두 사람 사이에 혹시라도 충돌이 있을까 봐 걱정했다.“난 이혼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없어.”노성민은 조금 누그러진 말투로 매달렸다.“최소연 씨
허지영은 이우범이 진심으로 배인호에게 말하는 것을 들어서야 마음 깊이 있던 궁금증이 드디어 풀렸다.그녀는 이것이 배인호와 이우범이 화해하는 발판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역시 배인호의 얼굴은 점점 더 편안해져 갔다. 잠깐의 침묵이 있었던 뒤 배인호도 말했다.“그래, 우리도 영원한 친구야.” 그는 말을 끝낸 후에 허지영을 바라보았다. 허지영은 그의 행동이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인호는 이 순간이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손에 넣고 우정도 되찾은 진정한 승리자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전화를 끊은 후, 배인호는 두 팔을 벌렸고 허지영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품에 안겼다. 그들은 서로를 꽉 껴안았다. 빈이가 로아와 승현을 데리고 이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아빠한테 책 좀 읽어달라고 해줘요~”로아가 낮은 목소리로 빈이를 재촉하였다.세 사람은 잠을 오지 않아서 내려가 배인호더러 그들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하려고 했다.그런데 세 사람은 내려오자마자 아빠와 엄마가 행복하게 안고 있는 것을 보자 조금은 부끄러워졌다.로아와 승현 두 아이는 너무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을 감출 수 없었고 빈이는 어른이 다 되였기 때문에 괜찮았다.“유니콘, 유니콘!”승현는 유니콘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배인호가 유니콘의 이야기를 승현에게 들려준 후부터 승현은 노래를 들을 때도《유니콘》만 듣고 싶어 했다.두 어린이는 빈이를 양쪽에서 감쌌고 포동포동한 손으로 그의 소매를 잡으며 기대로 가득 찬 큰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로아와 승현은 나이는 어리지만 똑똑해서 아빠와 엄마가 포옹하고 있을 때는 방해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그들보다 많은 빈이는 방해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빈이가 주저하고 있을 때 로아의 간절한 눈빛에 빈이는 말했다.“내가 너희들에게 책을 읽어주면 어때?”“형은 못 해! 못 해!”승현이가 거절했다. 왜냐하면 형한테 유니콘을 불러달라 했을 때 음정이 하나도 맞지 않아서였다.로아도 그렇
허지영은 자기 앞에 무릎을 꿇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그녀가 오랫동안 사치하게 그리던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일을 겪은 후에야 이룰 수 있었다.그녀의 눈시울도 붉어졌고 마침내 그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요.”사람들은 열렬한 박수를 터뜨렸다. 모두 이 부부의 재결합을 기뻐했지만 아무도 인파 뒤에서 한 남자가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는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배인호가 반지를 허지영의 손가락에 끼우는 것을 보고 나서야 묵묵히 자리를 떠났다.그는 저택을 떠나 차에 올랐고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으며 차갑고 마른 얼굴을 드러냈다.이우범은 원래 해외에 있어야 했지만 참지 못하고 결국 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에 참석했고 오늘의 입장권도 박준이 그를 위해 비밀리로 얻어 주었다.이제 허지영이 행복을 찾았음을 직접 보았으니 이우범은 안심하고 떠날 수 있었다.이우범이 막 차를 몰고 떠나려고 할 때, 박준이 어느새 따라 나와 차 앞에 막아 섰다.“이우범, 왜 벌써 가려고?”다른 사람들은 이우범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박준은 그가 올때부터 알아 보았다.박준은 이우범이 아직 허지영을 놓지 못했고 분명히 그녀의 결혼식에 몰래 참석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넌 왜 나왔어?”이우범은 박준을 보고 조금 놀랐다.“내가 안 나오면, 너는 이렇게 가버릴 거잖아. 배인호는 안 보면 그만이지, 나와 노성민도 안 볼 거니?”박준은 화가 내면서 말했다.박준은 이우범이 지난 몇 년 동안 항상 해외에 머무르고 있어 국내 친구들과의 연락이 매우 뜸했고 이번에 어쩌다 한 번 돌아왔는데 그들과 밥 먹고 술 한 잔 안 하고 허지영만 보러 온 거에 서운해했다.“나 공항에 가봐야 해.”이우범은 약간의 미안함은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우범은 하루도 여기서 보낼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저녁에 같이 밥 먹고 가. 지금 떠나면 너랑 나 친구로 끝이야. 알겠어?”박준은 협박하듯 말했다.이우범은 어쩔 줄 몰
박정아의 말에 허지영, 오세희, 이민정은 적극 찬성했다.다른 사람과 또 식을 올린다면 쪽팔리겠지만 같은 사람과 두번 식을 올리는 건 무엇을 설명할까? 그들이야 말로 찐 사랑인 것이다.——두 달 뒤.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은 준비가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결혼식의 사치와 호화로움은 무수한 감탄과 부러움을 불러일으켰다. 허지영은 천만 원 가치의 수제 웨딩드레스를 입었을때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허지영은 처음 배인호한테 시집갈 때를 떠올렸다.그때 허지영은 자기가 직접 고른 웨딩드레스를 입었고 지금 사치스로운 드레스와 비교도 안 됐다. 그때의 배인호는 결혼식은 하나의 미션 수행처럼 모든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그 후 몇 년이 지나고 그들은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허지영은 웨딩 드레스 위에 박힌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가볍게 만졌고 그 순간 그녀는 찬란한 태양빛 처럼 화려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박정아를 포함한 친한 친구들은 연속 감탄했다.박정아는 허지영 주위를 돌면서 기쁨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말했다. “영아, 정말 예쁘다. 몇 년 동안 방황하더니 결국 네가 원하는 행복을 얻게 되었네.”“맞아, 나도 너의 용기에 감탄해. 다행히 배인호도 정말로 많이 변한 거 같애.”오세희도 연속 감탄했다. 이민정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개과천선했으니 앞으로도 쭉 그럴 거야. 너를 또 상처 입힐 일이 있으면 우리 몇 명이 가만두지 않을 거야!”이때, 허지영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다가왔다. 두 사람은 아름다운 딸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허지영은 그들이 가장 아끼는 보물같은 존재였고 그녀는 감정적인 고통을 겪은 후에야 재혼이라는 결정을 내렀다. 처음에 부모님은 반대했지만 지금 받아들이기까지 수많은 과정이 있었다.하지만 이 순간, 허지영이 행복해 보이자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아빠, 엄마.”허지영은 부모님이 오자 이상하게 코가 찡해진 듯했다. 아마도 그들의 힘든 모습을 보다가 이렇게 뿌듯해하는 모습을
허지영은 배인호와 다른 여자의 스캔들을 폭로한 댓글을 보니 마음이 철렁 거렸다. 허지영은 일어서서 배인호와 아버지 쪽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은 바둑을 두고 있었고 경기는 아주 치열했다. 허지영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배인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허지영도 따라서 웃었다. 허지영은 스캔들에 대해 바로 묻지 않고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아 조용히 두 사람이 바둑을 두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핸드폰 화면에는 배인호와 한 여자 연예인 간의 스캔들이 적힌 댓글이 고스란히 써져 있었다. 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와 바둑 한 판을 두고 난 뒤, 눈길은 자연스럽게 허지영의 핸드폰이 자기의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을 보았고 화면이 꺼지려 하면 허지영이 화면을 다시 켜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화면에 적힌 그 말은 무슨 뜻이지?’배인호는 허지영의 휴대전화를 가져와 댓글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순간, 바둑을 계속 두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그와 허지영의 재혼을 많은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았으며 이미 준비 중인 결혼식도 성사되지 못할 것이라는 의심이 가득하였다.‘결혼식이 엄청 화려해서 준비시간이 조금 오래 걸린 것 뿐인데 이게 무슨... 그리고 나와 한 여자 연예인이 하룻밤을 같이 보낸 스캔들이라고?’그날 밤에는 최소 일곱-여덟 명의 사람이 있었고 남자 여자 다 있었다. 주로 투자에 관한 이야기하다가 여자들이 떠나고 남은 몇 명의 남자들이 룸에서 잠을 잔 것이다. ‘언론은 이렇게 근거 없이 아무렇게나 사건의 앞뒤도 맞지 않는 헛소리를 늘어놓다니...’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 좀 이따 다시 바둑을 둬도 괜찮을까요? 지금 급하게 좀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겼어요.”허지영의 아버지는 자초지종을 모르고 배인호의 말에 급한 일이겠거니 생각하고 동의했다. 그러고 나서 허지영의 아버지는 허지영의 어머니를 도와주러 주방으로 향했다.허지영의 아버지가 나가자마자 배인호는 바로 허지영의 손을 붙잡았다. 얼굴에는 억울함이 가득
거절당한 후, 배인호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마치 모든 욕망을 내뱉으려는 듯했다.허지영은 이불을 감싸안고, 배인호와 사이에 안전한 구역을 만든 다음, 다시 잠을 이루려 했다.“여보, 벌써 자정이 넘었어.”겨우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약간 쉰 듯한 배인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허지영이 방금 잠에서 깨어나려는 찰나, 어느새 안전 구역을 넘어온 손이 허지영을 강하게 끌어당겨, 뜨거운 품에 꼭 안았다.“뭐 하는 거예요? 배인호 씨, 당신...”허지영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입술이 막혔다. 겨우 의식을 회복했지만 뜨거운 키스 때문에 다시 정신이 흐릿해졌다. 허지영은 저항을 포기했다. 오늘 밤은 편하게 지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야, 허지영은 온몸이 녹아내린 듯한 느낌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주변을 돌아보자 배인호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샤워를 한 후, 허지영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배인호를 발견했다.그리고 노성민과 박성아는 언제 왔는지 모르게 도착해, 세 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 시간에 노 씨 집에 세 아이는 허지영의 세 아이와 노는 중이어서, 거실은 매우 활기찼다.박성아가 머리를 들어 계단에서 내려오는 허지영을 보고 말했다. “아이고, 지영아, 너 드디어 내려왔네. 재결합해서 기쁜 건 알겠지만, 몸조심해야 해!”허지영은 박성아를 쏘아보며, 얼굴에 부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옷깃을 조금 더 높이 당겼다. 그렇지 않으면 어젯밤 남은 흔적이 들킬 수 있다.그들은 다 같이 식사했다. 식사 도중, 박성아가 민설아의 일을 언급했다. “그래, 민설아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매우 뛰어난 변호사를 고용했어. 이 여자 정말 죽을 쑤고 있어, 지금도 판을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자신이 감옥에 안 가고 바로 무죄로 풀려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민설아의 이름을 듣고, 허지영은 본능적으로 배인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배인호는 로아와 승현, 두 아이에게 옥수수알을 까주는 데 집중하고 있어, 박성아의 말은 아예 듣
허지영은 병원으로 옮겨진 후 응급처치를 했다.허지영의 부모님은 거듭 의사에게 수술의 가능 여부 혹은 새로운 치료 방법으로 딸의 이 짧은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는지 묻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이 얻은 대답은 모두 절망적인 것이었다.병상 앞에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부모님은 마치 하룻밤 사이에 10살이나 더 늙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병상에 누워있는 딸을 보며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졌다.“영아, 우리 놀라게 하지 말아줘. 빨리 깨어나, 강하게 버텨줘..”“우리는 다 널 응원할 거야. 네가 끈질기게 살아남을 거라고 했잖아... 버텨줘. 우리 같이 여행 가자. 응?”“넌 삼촌과 이모의 유일한 희망이야, 그들을 위해서라도 버텨야 해!”“영아, 우리 딸... 흑흑흑...”온갖 소리가 허지영의 귀에 들어왔다. 허지영은 몸에 아무런 힘도 없는 것이 느껴졌고, 눈앞은 어렴풋한 빛에 휩싸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부모님의 얼굴과 친구들이 슬퍼하는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몹시 의외인 것은 이우범도 거기에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가장자리에 서있었지만, 키가 커서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이우범이 왜 여기에 있지?’허지영은 입을 벌려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고 온몸이 아프기만 하였다.“영아, 너 어떻게 우리를 버리고 떠날 수가 있어... 나랑 네 아빠는 어쩌고...” 어머니는 허지영이 깨어났지만 기뻐하기는커녕 더욱 슬프게 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기 딸에게서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부모님은 허지영이 왜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전혀 모른다.“아빠, 엄마, 제가 불효자예요... 미안해요... 다음 생이 있다면 제가 그때 효도할게요...”허지영은 허약하게 몇 마디 하려고 노력했지만, 부모님을 더 슬프게 할 뿐이였다.극심한 슬픔에 부모님은 뒤돌아 병실을 나왔다. 자기 딸에게 이토록 처참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박정아는 바로 앞장서서 허지영의 손을 꼭 잡았다.“영아, 너도 날 꼭 기억해야 해. 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 나를 찾아줘.
허지영은 어린 시절부터 자기는 타고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가문에 서로 사랑하는 부모님, 좋은 성적,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랑 결혼까지 했다. 그러나 서른도 안 되는 나이에 가정이 풍비박산나고 삶의 끝에 이르렀다.허지영은 부모님이 자신의 눈앞에서 눈물범벅이 된 모습을 지켜보고는 마음이 아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를 속일 수가 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고집스럽게 배인호를 그리워하고 있었다.‘배인호는 내가 유방암 말기라는 사실을 알면 보러 올까? 마음이 약해질까?’‘왜 지금 이때까지도 나는 그 잔인한 남자를 그리워하는 걸까?’허지영은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현재 상태에서는 수술할 필요도 없고 방사선 치료와 안전하고 보수적인 치료 외에는 손쓸 방법이 없었다.허지영은 어떻게든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가고 나서 가장 먼저 배인호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늘 그렇듯 또다시 거절당했다.허지영은 다시 배인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나 유방암 걸렸는데 말기래요. 당신이랑 얘기 좀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이번에는 배인호가 답장을 했다.“병 걸렸으면 제대로 치료받아. 나는 의사가 아니야. 널 치료 해줄 수 없어.”이토록 차갑고 매정한 답장을 보면서 허지영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배인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왜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배인호는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걸까?“영아, 더 이상 배인호 생각은 안 하면 안될까?” 박정아와 친구들이 토끼처럼 눈이 붉어져서 허지영의 집으로 찾아왔다.“우리랑 여행 가자. 우리랑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풍경도 맘껏 즐기면서 몇몇 쓰레기 같은 사람들은 깔끔하게 잊는 거야. 더는 그 쓰레기들에게 상처받지마. 응? ”허지영의 병을 알게 된 이후로 허지영의 부모를 제외하고 가장 슬퍼했던 건 박정아와 3명의 친구들이였다. 거의 매일 슬픔에 잠겨 허지영의 만날 때마다 울음을 참지 못했다.친구들은 더이상 허지영이 고통받는 걸 지켜보기 싫어했다. 그들은 허지영의 좋은 친
배인호는 식탁 위의 아침밥을 흘깃 보고선 한마디 대답도 없이 넥타이를 묶으며 거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허지영은 뒤따라가 한 번 더 묻고 싶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배인호가 차에 올라타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모습뿐이었다.허지영은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배인호는 크나큰 빙산이고 허지영은 작디작은 불씨였다. 허지영은 자신의 불씨로 빙산을 녹이려고 하였지만, 결국 그 작은 불씨는 빙산에 의해 꺼져버렸다.“허지영, 우리 이혼하자.”배인호는 어느날 드디어 허지영에게 처음으로 이혼을 얘기했다.허지영은 배인호가 간만에 집에 돌아왔다는 기쁨에 사로잡혀있었다. 허지영은 자신이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옷을 입고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지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혼합의서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배씨 그룹 지분의 3%면 충분해?”“이혼이요?”허지영은 마치 날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배인호가 갑자기 이혼을 꺼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둘은 결혼 이후 함께 지낸 시간은 적었지만, 허지영은 결코 배인호의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않고 절대적인 자유를 주었다. 이것만으로도 모자라는가?허지영은 그 수많은 스캔들을 꿋꿋이 참아오면서 작은 꼼수를 부리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려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배인호는 이혼을 원하는 걸까.“맞아. 난 널 전혀 사랑하지 않아. 난 지금 지키고 싶은 여자가 생겼어.”배인호는 이 말을 할 때 차갑기 그지없었다. 마치 배인호와 5년 동안이나 결혼 생활을 해온 허지영이 생명이 없는 장난감일 뿐이며 그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기며 아픔도 슬픔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허지영의 목소리를 떨면서 말했다.“누굴 사랑하게 된 건데요? 누구예요?”하지만 배인호가 허지영에게 이런 일들을 얘기해줄 리가 없었다. 그는 차갑게 소매를 털며 말했다.“이혼 합의서 잘 살펴보고 괜찮은 것 같으면 사인해. 별로라면 나한테 연락해. 다시 얘기하자.”허지영이 말도 꺼내기 전에 배인호는
“인호 씨.”허지영은 먼저 배인호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오는 것은 상대방의 서늘하기에 그지없는 눈빛뿐이었다.그 순간 허지영은 그녀가 새신부가 아니라 철천지원수인 것만 같았다.허지영은 그 눈빛에 놀라 흠칫했다. 아마 배인호의 어머님이 때마침 나타나지 않았다면 계속 계단에 서서 멍만 때렸을 것이다.“지영아, 내려와서 아침밥 먹어야지.”배인호의 어머님이 인사를 건넸다.그제야 허지영은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식당으로 걸어갔다.배인호는 처음부터 끝까지 허지영의 존재를 무시했고, 밤새 잠을 자지 않은 듯 턱에는 푸릇푸릇한 수염이 자랐고 눈은 약간 충혈되어 매우 피곤하고 짜증이 난 것같은 모습이었다.하지만 허지영은 감히 더 물어볼 수 없었고 물어보아도 대답도 안 해줄 것을 알고 있었다.그날부터 허지영은 배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었고 철저한 장식품이 되었다. 배인호는 심지어 결혼전 보다도 더 차갑게 굴었으며 종종 집에 오지 않았다.허지영은 신혼집 인테리어에 모든 심혈을 기울였고 청담동이라는 곳에 있는 별장이 바로 그녀와 배인호의 신혼집이었다. 기초 공사는 거의 끝마쳤지만 가구와 같은 인테리어도 천천히 골라야 했다.허지영은 6개월이라는 시간을 들여 청담동 별장을 꿈의 신혼집 모습으로 장식해 놓았다. 그녀는 배인호가 돌아오리라 생각했지만, 이 아름다운 집은 결국 그녀의 외로운 결혼의 무덤이 되어버렸다.“결혼한 지 얼마 됐다고 벌써 5명이나 스캔들이 생겨? 영아, 너 진짜 잘 참는다!”박정아의 전화 10통 중 9통은 배인호의 뒷담화였다.“그거 다 보여주기식일 거야.”허지영은 사실 배인호가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마치 자기의 가련한 자존감을 지키려는 듯 배인호의 편을 들어주었다.인정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아서 허지영은 끝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하루 또 하루, 한 해 또 한 해가 지나면서 허지영은 혼자 청담동에서 망부석이 된 것만 같았다. 마치 웃음거리인 것처럼 다들 그녀에 대한 기억은 점점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