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괜찮아요.”나는 머릿속에 스쳐 가는 생각을 잠시 멈췄다. 아직 이런 붉은색 잠수복을 다른 사람도 입었는지 정확히 몰랐다. 바다에 우리 두 커플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큰 문제는 없었지만 손바닥에 난 상처를 치료해야 했다. 요트에 구급상자가 있었기에 이우범이 조심스럽게 상처를 치료해 주고 붕대도 감아주었다.모든 일을 마치고 점심을 먹을 시간이 되었을 때 민설아가 먼저 제안했다.“인호 씨, 우리 여기서 지영 씨네하고 같이 점심 준비해서 먹는 건 어때요?”그녀와 배인호가 잡은 해산물은 신선하고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이때 그녀는 모든 걸 우리 요트로 가져왔다.“됐어. 우리는 호텔에 돌아가서 먹을 거야.”이우범은 거절했지만 나는 그러자고 했다.“그래요. 그럼 같이 준비해요. 내가 손을 다쳐서 많이 돕진 못하겠지만 맛있게 먹을 순 있어요.”민설아는 태연하게 웃었다.“괜찮아요. 요리는 내가 할게요. 다들 내 요리 솜씨 기대해요.”우리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녀는 먼저 옷을 바꿔 입으로 갔다. 그다음 점심 식재료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나는 한편에 앉아서 바삐 움직이는 민설아를 조용히 지켜보았다.요트에 하늘이 보이는 주방이 있었다. 각종 요리 도구들과 조미료로 가득했다. 민설아의 솜씨는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해산물을 손질하는 자세가 꽤 익숙해 보였다.아마도 예전부터 자주 요리해 본 것 같았다.아이에 대한 그녀의 사랑으로 봐서는 해외에서 아이와 단둘이 지내며 직접 요리해서 아이를 먹였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하나도 놀랍지 않았다.“인호 씨, 생강 좀 씻어 줄래요?”민설아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배인호에게 물었다.“그래.”배인호는 자연스럽게 거절하지 않았다. 그는 이때까지 손가락에 물 한번 묻혀 본 적이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주방에 들어가 본 적도 없었을 것이다. 아마 우리 집에 왔을 때 처음으로 들어갔다가 주방을 폭발시킬 뻔했다.오늘 보니 민설아를 도와주는 그의 모습이 꽤 익숙해 보였다. 단지 말없이 야채를 씻으며
증거는 없었지만 이런 생각이 한 번 떠오르니 억누를 수 없었다.만약 민설아가 내가 위험에 처한 상황을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면 나는 그저 그녀를 냉혈한 인간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일부러 밧줄을 나의 발목에 감았다면 그건 의미가 달랐다. 이건 계획 살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인호 씨, 내 가방에서 물티슈 좀 가져다줘요. 기름기 때문에.”민설아가 자기 손에 묻은 기름을 보며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민설아의 가방은 나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배인호가 대답했다.“알겠어. 잠깐만.”내가 먼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내가 가져다줄게요.’내가 가방으로 향하자 민설아의 표정이 변하더니 바로 달려왔다.“괜찮아요. 내가 꺼낼게요. 뭐 이미 더러워진 가방인데요.”그런 다음 그녀는 가방을 손에 넣더니 내가 볼 수 없는 거리까지 간 뒤에야 가방 안에서 물티슈를 꺼냈다.그 행동에 나는 너무 수상했다. 가방 안에 내가 보면 안 되는 물건이라도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단순하게 내가 보는 것이 싫은 것일까?“왜 그래요?”내가 멍하니 있는 모습을 보고 이우범은 낮은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나는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저었다.잠시 후 민설아와 배인호는 점심 식사 준비를 마쳤다. 전부 해산물 요리였다. 호텔에서 제공하는 와인까지 꽤나 풍성했다.나와 이우범은 한편에 나란히 앉았고 배인호와 민설아가 우리 맞은편에 앉았다.민설아는 자기가 만든 요리에 만족하며 미소를 지었다.“지영 씨, 우범 씨, 어서 맛이 어떤지 먹어 봐요.”“아주 맛있을 것 같네요.”나는 먹기도 전에 먼저 칭찬했다.“그럼 많이 먹어요.”민설아가 이우범에게 눈짓했다.“우범 선배, 와이프가 손을 다쳤는데 이럴 때 부지런히 움직여야죠? 지영 씨한테 많이 짚어줘요. 아니면 먹여줘도 괜찮고요.”배인호가 차갑게 말했다.“왼손잡이도 아닌데 무슨.”내가 다친 손은 왼손이었다. 하지만 난 오른손잡이였기에 일상생활에 영향이 없었다.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는 정도는 문제 될 것도
나는 민설아의 가방에 왜 그런 밧줄이 들어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호텔 매니저에게 연락했다.연락 후 사진을 한 장 보내줬다. 그 사진에는 호텔에서 해산물을 묶을 때 쓰는 밧줄이 있었는데 역시나 민설아 가방에 있던 것과 같은 것이었다.나는 조금 알 것 같았다. 만약 내가 그 밧줄을 증거로 삼아 그녀를 범인으로 몬다면 그녀는 그것을 이용해 나를 반박할 것이다. 결국 내가 그녀를 모함한 것으로 상황은 반전되었을 것이다. 어차피 호텔에서 나오는 쓰레기가 조심하지 않아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었다.“이번 일은 더 언급하지 말아야겠어요. 우리에겐 증거가 없어요.”나는 이우범에게 말하며 이유를 설명했다.“네, 알겠어요.”이우범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당부했다.“이제부터 민설아를 멀리해요. 난 걔 성격이 어떤지 잘 알아요. 서란 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로 덜하진 않아요.”이건 이우범이 내게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할 것이다. 민설아를 처음 본 것도 아니었다. 난 그녀가 이전에 한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나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오후에는 계속 잠만 잤다. 어두워질 때가 되어서야 이우범과 나가서 밥을 먹었다.호텔 레스토랑은 꼭대기 층에 있었다. 원형 유리 지붕으로 되어 있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바다가 훤히 보였다.밤에는 바다 풍경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밤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화려한 조명이 꽤 멋있었다.나는 입맛이 없었기에 간단하게 먹을 것을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한편으로 야경을 보며 식사했다. 이우범은 나의 옆에 앉아서 견과류를 내게 까 주었다.“먹어요.”“저녁에 이걸 다 먹으면 살찌는 거 아니에요?”나는 웃으며 물었다.“지영 씨는 더 쪄도 괜찮아요.”이우범은 나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너무 마르면 보는 내 마음이 아파요.”사실 지금 난 많이 좋아진 것이었다. 예전에 말랐을 때 여자는 아이를 낳으면 살이 찐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었다. 그러면서 나에게 그때 가면 뚱뚱하지도 마르지도 않은 몸매를 가지게 될 거라고 했었다
“울어도 소용없어. 어서 사과해.”놀랍게도 배인호가 입을 열었다. 방금 나에게 사과를 요구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태도였다. 그는 빈이를 나의 앞으로 데려왔다.“마미가 네 잘못이라고 했으면 사과해야지. 아까는 내가 오해했어.”그의 행동에 민설아도 어안이벙벙한지 멍하니 배인호를 바라보았다.빈이는 울음을 터트리며 내 앞에 와서 섰다. 지금 엄마와 아빠 모두 자기에게 사과하라고 하니 기댈 곳도 없는데 어떻게 계속 고집을 부릴 수 있을까?“아줌마 죄송해요. 내, 내가 마음대로 먹을 것을 가져갔어요. 내가 잘 못했어요. 우아아아...”빈이는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말까지 더듬는 모습이 보기에도 안타까웠다.어린아이가 모르는 것이 많은 건 부모가 잘 가르치지 못한 결과다. 그러니 빈이가 이렇게 된 건 민설아의 책임이다.나는 빈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그래. 아줌마가 용서해 줄게. 다음부터 먹고 싶은 건 먼저 예의 있게 물은 다음에 먹는 거야. 알겠지?”빈이는 울음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뒤로 돌아 배인호와 민설아를 바라보았다. 부모님이 말하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민설아는 힘겹게 미소를 지으며 빈이에게 손을 흔들었다.“착하지. 이리 와.”빈이는 뛰어가서 다시 민설아의 등 뒤에 숨었다. 배인호는 아무 말도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그럼, 식사 마저 해요.”나는 배인호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돌려 이우범에게 말했다.“우린 가요.”이때 민설아가 또 입을 열었다.“지영 씨, 잠깐 할 얘기 있어요.”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나와 그녀가 더 무슨 할 말이 있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이우범은 그걸 보더니 내 팔을 잡고 데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배인호가 나의 반대쪽 팔을 잡았다.“잠깐만, 못 들었어?”원래 나는 민설아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려고 했다. 어차피 얽혔는데 그녀가 어떤 연기를 펼치는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배인호의 거친 행동에 짜증이 났다.나는 바로 그의 손을 쳐냈다.“난 듣고 싶지 않네요.”말을 마치고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나는 담담하게 대답한 뒤 정아와 함께 온천으로 들어갔다.그 사이 정아는 불쾌한 듯 계속 민설아를 언급했다.그녀는 예전에 서란을 싫어했었다. 지금은 서란이 감옥에 갇혔는데 또 민설아가 나타났다. 애초에 서란은 민설아를 닮은 외모에 민설아의 심장을 이식받았다는 이유로 배인호와 얽히게 된 것이었다.정아는 내게 지금은 서란 보다 민설아가 더 꼴 보기 싫다고 말했다.“민설아 얘긴 그만하고 네 얘기 들어보자.”정아가 갑자기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이우범과 이번에 같이 놀러 온 소감이 어때? 부부 사이의 감정에 도움이 됐어?”“그럭저럭.”나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이우범은 내게 잘해주었다. 그는 세심하고 다정한 사람이었지만 지금 나는 그를 좋아할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가끔 흔들리긴 했지만 모두 아이들 때문이었다. 정아는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아이고, 나도 알아. 네가 지금 이우범한테 아무 감정도 없다는걸. 애들 때문에 같이 있는 거겠지. 하지만 난 네가 이렇게 세게 나올 줄은 몰랐어. 언론에서는 네가 다시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떠들어 대고 있었는데 네가 이우범하고 아이를 둘이나 낳았다는 소식을 알렸으니. 정말 대단했어. 아주 제대로 한 방 먹여줬지.”나는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일에 대해 나는 더 말하고 싶지 않았다. 이우범과 나는 애초에 아무 사이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두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승현이가 배인호를 닮았다고 느끼면서도 입 밖으로 말하진 못했다.온천을 마친 뒤 정아가 옷 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이럴 때면 왜 베프가 좋다고들 하는지 알 수 있었다.그녀는 노성민에게서 온 전화를 받았다.“여보, 아들이 배고프대.”“알았어. 금방 갈게.”정아는 큰아들이 배고프다는 소리를 듣더니 바로 급해졌다. 전화를 끊은 뒤 제일 빠른 속도로 옷을 입으며 내게 말했다.“지영아, 나 먼저 올라갈게. 너 아까 야식 먹겠다고 했지? 같이 못 먹겠어.”“그래. 너 빨리 가봐.”나는 서둘러
저 사람은 심한 폐질환을 앓고 있다고 했는데 왜 담배를 피우지? 질문이 입 밖으로 나오려는 걸 다시 삼켰다. “그래요. 타세요.”이우범은 나를 한 번 보더니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두 사람은 차에 오른 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계속 고개를 숙인 채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내고 있었다.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었지만 두 사람은 많이 피곤해 보였다. 목적지에 도착할 동안 차 안에서 그들은 배려도 없이 계속 담배를 피웠다.내가 그들이 담배를 피우는 것을 막지 않으니 끊임없이 피워댔다. 그 모습에 나는 더 이상하다고 느꼈다.이우범에게 먼저 두 사람의 목적지에 데려다주자고 했다. 목적지에 도착하니 두 사람은 고맙다는 인사도 없었고 돈을 줄 생각은 더욱 없어 보였다. 어차피 내가 돈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내게 주는 느낌이 너무 좋지 않았다.백미러로 멀어지는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봤다.“로아야, 승현아.”집에 오자마자 나는 두 아이를 빨리 만나고 싶어 달려갔다. 부모님은 내가 온 것을 보시더니 얼른 아이들을 데리고 나오셨다.“아이고, 엄마 왔네. 로아 승현이 엄마가 돌아왔네.”엄마는 로아를 내게 넘겨주며 허허 웃으셨다.“어땠어? 이틀 동안 재밌게 놀았니?”엄마는 내가 거기서 배인호와 민설아를 만났다는 것을 모르고 계셨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질문을 하실 리가 없었다.엄마가 걱정하시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재밌었어요. 애들이 너무 보고 싶어서 먼저 왔어요.”이때 이우범이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못 보던 핸드폰이 들려있었다.“이거 아까 그 두 사람이 실수로 두고 간 핸드폰이에요.”두 사람이 차에서 내릴 때 조금 급해 보이더니 핸드폰을 차에 떨어트린 것도 몰랐나 보다.나는 로아를 다시 엄마에게 안겨준 뒤 핸드폰을 건네받았다. 브랜드도 없는 낡아 보이는 핸드폰이었지만 두 사람에게 중요한지는 알 수 없었다.나는 핸드폰을 열어 통화목록을 보려고 했다. 화면을 터치하니 비밀번호도 잠겨있지 않아 바로 열렸다. 바로 문자
“응애!”배인호가 아기용 침대를 잡긴 했지만 큰 움직임 때문에 승현이 울음을 터트렸다. 나는 마음이 조여와 바로 로아를 엄마에게 건네주고 다급하게 승현이를 안아서 달래기 시작했다. 정원은 난장판이었지만 나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고 그저 놀란 아이만 달랠 뿐이었다.빈이는 자기가 잘못을 저지른 걸 알고 몸을 움츠린 채 민설아의 뒤로 숨었다. 지금 이 자리에 배인호만 없었다면 나는 민설아가 무조건 “빈이는 아직 어리다”는 말을 늘어놓으며 두둔했을 것이라 믿었다.하지만 오늘 하필이면 배인호도 같이 있었고 빈이가 일부러 침대를 흔든 걸 다들 똑똑히 보았기에 민설아는 망설임 없이 빈이를 앞으로 끌어내더니 엄격하게 말했다.“빈아, 빨리 아줌마한테 사과해.”“나, 나는 그냥 베이비가 너무 귀엽게 생겨서 같이 놀고 싶어서 그런 건데…”민설아에 의해 나온 빈이는 조금 긴장한 듯 보였다. 배인호를 자꾸만 힐끔힐끔 보면서 그가 자기편을 들어주기를 바랐다.“같이 놀고 싶어도 그렇게 흔들면 안 되지.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떡할 거야?”나는 조급한 마음에 말투도 조금 엄격했다. 아까 그 행동은 내 아이의 안전을 위협하는 일이라 아무리 빈이가 같이 놀고 싶어서 그랬다고 해도 침착할 수가 없었다.나는 배인호의 기운이 나와 안 맞는 게 아닌지 의심됐다. 전에는 아무 문제 없던 아이들이 민설아와 배인호가 이쪽으로 건너오고 난 뒤 사고가 날뻔한 상황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엄마도 놀란 가슴이 아직 진정되지 않았는지 배인호에게 화를 냈다.“아들 관리 좀 잘해. 귀염둥이 우리 손주 다치기라도 하면 너희 가만 안 둘 거야!”“가자, 가자. 더는 이 사람들과 입씨름할 거 없어.”이렇게 말하며 엄마는 거실로 걸어갔다.다행히 아빠는 오늘 시장에 묘목을 사러 갔기에 더 큰 충돌을 막을 수 있었다.이우범의 성격은 아빠보다는 좋았기에 마음이 급하다 해서 매질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우범의 안색도 좋지 않았다. 그도 승현이와 로아를 진심으로 예뻐하는지라 그들이 울면 마음 아파했
배건호와 김미애는 나를 보더니 표정이 경악스러움에서 기쁨으로 변했다.하지만 내 뒤에 서 있는 배인호를 보고는 착잡한 기색을 드러냈다.“지영아, 너…”김미애는 앞으로 다가와 내 손을 잡으며 부드럽고 자애로운 말투로 말했다.“너도 이쪽에 건너왔니?”“네, 저 이쪽에 자리 잡았어요.”나는 배인호가 나와 같은 도시에 있다는 걸 부모님에게 알려주지 않았을 줄은 몰랐다.“인호가 너 우범이랑 다시 만난다고, 아이도 둘이나 낳았다고 하는 건 들었어. 근데 이쪽으로 왔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너무 잘됐다. 정말 오랜만이야.”김미애는 진심으로 기뻐했고 나는 그 눈에서 부드러움을 읽어낼 수 있었다.내가 참지 못하고 나선 원인도 김미애가 나에 대한 이런 정 때문이었다. 내가 이우범과 만나고 있고 아이를 낳은 것도 알면서 나를 만나면 기뻐했다나는 배건호와 김미애가 나에게 잘해준 건 부정한 적이 없다. 좋은 시부모인 건 맞지만 그 관계를 계속 유지할 만큼 인연이 깊지 못했을 뿐이다.“저 부모님과 이쪽으로 이사 왔어요. 우범 씨도 이쪽에서 일자리 구했고요.”나는 간단하게 대답하고는 바닥에 앉아 있는 남자를 힐끔 쳐다봤다.“아주머니, 저 사람 돈 주면 안 돼요. 치이지도 않았는데 다칠 리가 없잖아요.”“뭐라는 거예요?”빌붙으려던 남자가 흥분하기 시작했다.“차에 치여 죽을 뻔했는데 헛소리 지껄이지 마요.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이만 빠져요.”나는 핸드폰을 꺼내 아까 찍은 로아의 영상을 틀었다. 마침 그 영상에 사고가 났을 때의 경과가 찍혀 있었다. 차가 그 남자를 치지도 않았는데 그는 치인 척 바닥에 주저앉는 장면이 보였다.나는 영상의 재생속도를 줄이고 남자에게 보여주자, 그 남자는 바로 입을 닫았다. 그러더니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를 노려보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배건호와 김미애도 한시름 놓고는 나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지영아, 덕분에 잘 해결할 수 있었다. 자해공갈 하는 사람들 보면 정말 상대하기 귀찮아서 돈을 주고 빨리 해결해야 한다고 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