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점심쯤 되어서야 잠에서 깼고, 일어나 보니 배인호는 이미 방에 없었다.나는 눈을 비비며 일어나서는 옷을 갈아입고 아래로 내려갔다. 기선혜는 이미 점심 밥상을 다 차린 상태였고, 나를 보더니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일어나셨어요? 어서 와서 식사해요.”“인호 씨는요?”내가 물었다.“배인호 대표님 회사로 갔어요.”기선혜가 답했다.“저희에게 지영 씨 아주 힘들 거라면서, 깨우지 말라고 하셨어요.”말을 마친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더욱 짙어졌고, 나의 시선은 거실 소파를 향했다. 아침에 그 한바탕 전쟁으로 미처 정리하지 못했던 내 옷들은 이미 집사분들이 다 정리한 상태였다.그녀들은 아마 우리 사이에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 대충 짐작을 한 듯했고, 나는 너무 부끄러웠다.“그래요. 그러면 저 먼저 밥 먹을게요.”나는 식탁 쪽에 앉아 밥을 먹기 시작했다.요즘 우리 회사는 휴가 기간이었지만 배 씨 그룹은 아직 아니었다. 배인호는 요 며칠 아마 바빠서 집에 있을 시간도 없을듯하다.어제 내가 그 술집을 떠난 뒤, 배인호와 서란 사이에 어떤 일들이 발생했을까…나는 여러 가지 추측을 하기 시작했지만 더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이왕 배인호가 집에 돌아오기로 선택한 이상 서란과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듯하다.밥을 먹고 난 뒤, 나는 차로 운전해 엄마를 보러 갔다. 엄마는 비록 계속 혼수상태지만, 몸 상태는 안정적이었고, 간병인 이모님도 세심하게 엄마를 아주 잘 돌봐주셨다.나는 요 며칠 회사 일 때문에 병원에 자주 오지는 못했다. 병원에서는 엄마를 집에 모셔다가 간호해도 된다고 했고, 만약 깨어날 기미가 보이면 다시 병원에 데려와 검사받으면 된다고 했다.“엄마, 내가 집으로 모셔갈게. 하지만…”나는 엄마의 손을 꼭 잡으며 입으로 이런저런 말을 되뇌었다.만약 엄마를 청담동에 모셔간다면, 엄마가 깬 뒤 나와 배인호가 같이 있는 모습을 보면 아마 더 충격을 받을 것 같았다.결국 나는 한숨을 내쉬며 일단 이 계획을 뒤로 미루기로 했다.한참 뒤
그렇게 그날 저녁, 나는 배인호가 어디에 갔는지도 모른 채 있었고, 그는 전화조차 없었다. 나는 창밖의 흰 눈을 보며 불안함과 혼란 속에서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내 핸드폰이 울렸고 비몽사몽인 상태에서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건 이우범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지금 좀 만날 수 있어요?”이우범이 먼저 입을 열었고, 그의 목소리는 이미 갈라진 상태로, 아주 피곤해 보였다.“이우범 씨, 어머님이 돌아가셔서 많이 속상하죠?.”나는 이미 이우범에게 경각심이 생긴 상태였기에 말도 전보다 더 신경 써서 했다. 행여나 그를 추궁하고 싶어도 일단 지금은 참았다. 이우범은 몇초간 침묵하더니 계속하여 입을 열었다.“네, 저 지영 씨 한번 만나고 싶어요. 만나서 정확히 얘기할 거도 있고요,”나는 행여나 일이 더 커질 수도 있기에, 그와 만나고 싶지 않았다.“할 말 있으면 전화로 말해줘요.”“지영 씨도 알잖아요, 제가 지영 씨 한번 만나고 싶어 한다는 거.”이우범은 점점 강경한 태도로 말했다.“그날 서란과 배인호가 왜 그 방에서 나왔는지 알고 싶은 거 아니에요?”그렇다, 그 일은 내가 알고 싶어 하는 일이 맞다. 배인호의 말로는 이우범이 꾸민 거라고 하는데 진실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물론, 현재의 이우범도 나는 믿을 수 없었다. 나는 바로 답하지 않았고, 잠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러자 이우범이 다시 입을 열었다.“저와 도시아가 약혼식 올린 거 지영 씨는 뭐 때문인지 알잖아요? 이젠 엄마도 돌아가셨으니 저 파혼하려고요.”“뭐라고요?”나는 깜짝 놀랐고, 이우범이 이 정도로 파격적인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마자 파혼이라니…“이건 제가 원하는 생활이 아니에요. 전 단지 엄마가 떠나기 전 편하게 가셨으면 하는 바람이었고요. 지금은 엄마도 떠나셨으니, 저도 더는 뭐 꺼릴 게 없어요.”이우범은 결심을 내린 듯했다.“이우범 씨, 일단 진정해요. 지금 모든 사람이 당신과 도시아 씨가 약혼했
이윽고 거리는 점점 멀어졌고, 나도 서란과 우지훈의 대화를 더는 들을 수 없었다.나는 충격 속에 빠졌고,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이때 이모건이 전화로 나에게 말했다.“된 건가요?”“네, 됐어요. 진짜 고마워요.”나는 정신을 차린 뒤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설 지나고 세희도 같이 봐요. 제가 밥 살게요.”이모건이 웃으며 말했다.“너무 안 그러셔도 돼요.”그래도 서란이 이모건을 모르니 다행이지, 그게 아니면 나는 조금 전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그나저나 유정에게 약을 탄 사람이 우지훈이라니?!우지훈은 악독하게도 그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꾸미고 연기한 거였으며, 마지막에 그 책임을 전부 유정이에게 덮어씌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날 유정이가 날 밀친 걸 생각하면, 이건 하늘이 그녀에 대한 복수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그러나 유정은 서란에 대해 항상 진심이었고, 마치 서란 옆의 시녀처럼 행동했었다.서란은 본인의 이익때문에 우지훈과 손잡고 유정이를 총받이 삼은 것이었다.단지 사람들을 위층으로 끌어들여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배인호와 일부러 같은 방에서 나오다니…서란은 여전히 심성이 고약했다. 그녀는 자신한테 이익이 되는 사람이면 그게 누구든지 불문하고 그 사람을 잘해줬다.서란과 우지훈의 모습이 사라진 뒤에 나도 서서히 걸어 나왔다. 내가 여기 온 목적은 대체 누가 나를 인터넷으로 헐뜯는지 보려 했는데, 여기 오고 나서 더 헷갈리기 시작했다.도시아 인가? 아니면 서란? 우지훈?나는 그들 셋이 아마 같은 선에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렇게 하는 이유는 두 가지라고 본다. 하나는 나를 겨냥하기 위해서, 아니면 배인호를 겨냥하기 위해서…하지만 서란이 배인호를 겨냥할 리가 없다고 본다. 그 사진에서 그녀와 배인호는 마치 한 쌍의 커플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나는 현재 어느 한 안갯속에 빠져 방향을 잃은 것만 같았다. 문제는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나는 그 자리를 어떻게 떠났는지도 모른
“미안해요. 출근 시간에 전화 받으면 안 된다는 걸 아는데, 계속…”기선혜는 눈을 비비며 말했다. 그녀의 눈시울은 화가 난 나머지 새빨개졌다.“괜찮아요. 전 단지 그런 인간쓰레기랑 더 이상 말 섞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만약 부모님이 걱정되시는 거면, 설 지나고 여기로 모셔 와요. 그 인간 말종하고 완전히 멀리하고요.”나는 기선혜에게 핸드폰을 돌려주며 위로했다.기선혜는 끝끝내 참지 못하고 얼굴을 가린 채 울기 시작했고, 이때 배인호가 위층에서 내려왔다. 이 광경을 본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식탁으로 향했다.나는 기선혜를 잘 다독인 후에야 밥을 먹기 시작했다.나는 마음속에 풀리지 않는 일이 있는지라 말이 없었고, 워낙 냉담한 성격인 배인호는 더욱이 말이 없었다. 만약 예전 같은 경우라면, 나는 그에게 우지훈에 관한 일을 꼭 언급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내일 나와 병원 좀 가.”갑자기 배인호가 입을 열었고, 그는 나를 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병원이요? 왜요?”나는 깜짝 놀랐다.“가서 검사 좀 받아보려고.”배인호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고, 새까만 동공에는 은은한 광택과 함께 약간의 냉기가 돌았다.나는 속으로 조마조마했지만, 겉으로는 차분한척했다.“뭐 검사하려고요?”배인호의 시선은 아래로 향하더니 내 배를 보는 듯했다. 내 배는 단지 테이블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을 뿐이었고, 이어서 그는 다시금 나를 빤히 응시하며 나에게 말했다.“너 혹시 나몰래 피임약 먹어?”그 말을 듣고 난 뒤에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나는 내가 임신이 힘들다는 사실을 배인호가 알까 봐 두려웠고, 그 일에 대해 이우범 또한 배인호에게 말해주지 않은듯하다. 만약 말했다면, 나는 아마 그를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아니요.”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굳이 피임약 같은 걸 먹을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나 속이는 거 아니지?”배인호는 약간 불신하는 듯했다.“제가 미쳤다고 그거로 거짓말하겠어요
내 기분은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정신이 없었다.배인호의 아버지는 멍하니 있는 내 모습을 보고 허허 웃으시며 말씀하셨다.“우리도 어젯밤에 인호에게서 전화를 받고 오늘 아침 일찍 달려왔다. 많이 놀랐니?”“그래. 인호가 너와 여기서 설을 보낼 거라고 하길래 우리도 왔어. 시끌벅적하고 좋지.”배인호 어머니도 두 걸음 앞으로 나오시며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내려오렴, 조금 있다가 점심 먹자.”나는 재빨리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어색했지만 정중하게 미소를 지었다.“아저씨, 아주머니. 오셨어요.”“그래, 우리 가족도 2, 3년 동안 함께 모여서 설을 보낸 적이 없지?”배인호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이셨다.나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배인호 어머니가 언급한 가족에는 아마 내가 포함되지 않겠지?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배인호 어머니는 나의 손을 잡으려고 하다가 손을 거두셨다. 아마 내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걱정하시는 것 같았다.“제가 올해... 사정 때문에 여기서 설을 보내게 됐어요.”나는 조금 죄송한 마음에 설명하려고 했다.“괜찮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난 널 딸처럼 생각하고 있어. 배씨 가문도 너의 집이란다.”배인호 어머니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시며 말씀하셨다.이 말을 듣고 나는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당시 배인호의 부모님은 내게 잘해 주셨다. 전생에서는 내가 다가가지 않았기에 결국 배인호와 서란을 허락하셨지만, 이번 생에는 내게 민설아의 일을 숨기셨다.하지만 악독한 분들이 아니셨기에 나는 배인호의 부모님을 이해할 수 있었다.그래서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다 좋다고 했다.배인호가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묻지 않았다. 거실에 앉아서 배인호의 부모님과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 주제는 모두 무의식적으로 우리 집안의 상황이었다. 그리고 현재 나와 배인호의 사이를 떠보셨다.결국 두 분 모두 나와 배인호의 재결합을 바라셨다. 나는 부인도 승인도 하지 않고 그저 모호하게 넘어갔다.만약 두 분이 내가 다시 임신하기 어렵다
침실에 작은 약상자가 하나 있었고 배인호는 그것을 찾아 뚜껑을 열었다. 그러고는 바로 웃옷을 벗어 던졌다.아까 부딪힌 곳이 조금 심각했다. 등 뒤 허리 쪽이 이미 파랗게 멍 들어 있었다.“미안해요. 많이 아파요?”나는 안절부절못하며 물었다.“네가 보기에는 어떤데?”배인호는 침대에 엎드려 누웠다. 넓게 벌어진 어깨가 보기에도 안정감이 넘쳤다. 보기 좋게 자리 잡힌 등 근육과 역삼각형으로 뻗은 몸매가 건장한 남자의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나는 약상자에서 연고와 면봉을 꺼내고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조심스럽게 그에게 약을 발라 주었다.배인호는 가만히 있었지만, 나의 시선은 나도 모르게 자꾸 그의 등으로 향했다. 야한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몸에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은지 살폈다.만약 서란과... 그런 일이 있었다면 손톱자국이나 키스 마크가 남아 있을 것이다.하지만 배인호의 몸엔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실망해야 할지 아니면 만족해야 할지 몰랐다.“잘못 발랐어.”갑자기 배인호가 어깨를 들썩이더니 뒤로 손을 뻗어 나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 물었다.“무슨 생각해?”“아무것도 아니에요. 다 발랐어요.”나는 손목을 비틀었다. 방금 약을 잘못 바른 곳을 보니 옆구리 쪽이었다.배인호는 손을 풀어주지 않고 나의 손목을 잡고 일어나서 앉았다. 그는 지금 검은 바지 하나만 입고 있었기에 시각적 충격이 컸다.“당신 허리도 다쳤는데 이틀 동안 푹 쉬어요. 무리하지 말고요.”나는 침착하게 배인호의 두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이 정도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야.”배인호는 반대편의 손으로 내 손에 들려 있던 면봉을 가져가서 버렸다. 그러고는 거칠게 나를 침대에 눕혔다.“정말 내가 걱정되면 조금 있다가 적극적으로 해봐. 네가 위에서 하는 건 어때?”나는 그 장면이 상상되어 표정 관리가 되질 않았다. 한 번도 내가 적극적이었던 적은 없었다.배인호의 손바닥이 나의 옆구리에 닿았고 힘을 주어 허리 주위를 잡았다.“어젯밤에 나를 속
배인호는 한 번 서재에 올라가더니 저녁이 되어서야 내려왔다. 찌푸리고 있던 그의 미간은 아직도 풀리지 않았다.배인호 아버지는 그를 한편으로 불렀다. 나는 모른 척했다. 부자 사이에 나누는 대화를 내가 알 권리는 없었다.잠시 후 저녁 식사를 할 시간이 되었고 배인호와 그의 아버지는 다이닝룸으로 걸어왔다. 그의 어머니와 기선혜는 맛있는 음식을 준비했고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였다.편하고 화기애애해야 할 분위기가 그 서류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참지 못하고 배인호의 옆모습을 보며 무슨 일인지 눈치를 살폈다.내 시선을 느꼈는지 배인호는 가끔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나를 볼 때마다 그의 미간은 더욱 깊어졌다.난 왜 불안해지지? 설마 나에 관한 일인가?배인호의 행동으로 봐서는 그가 나에 대해 뭔가를 알아낸 것 같았다. 그래서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문제는 나는 그것이 어떤 일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배인호가 내게 화를 내고 불쾌해할 만한 일은 내가 그를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뿐이었다.모두 각자 생각하며 식사를 마쳤다. 설날을 기다리기 전에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다.“오늘 밤 난 서재에서 잘게.”침실로 돌아오니 배인호가 갑자기 내게 말했다.“그래요. 그럼.”나는 아무런 의견도 없이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봤다.배인호는 나를 쳐다보더니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나는 원래 배인호의 부모님이 오시면 설 연휴를 더 화목하고 여유롭게 보낼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배인호는 3일 동안 나와 각방을 썼다. 하지만 계속 나에게 무슨 일 때문인지 말해주지 않았다. 그의 성격으로 만약 내가 자기에게 잘 못한 일이 있다면 무조건 내게 먼저 물을 것이다.그래서 나는 그쪽으로는 더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배인호는 그의 일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은 듯했다.“지영아, 여기 와보거라. 나랑 얘기 좀 하자.”어느 날 아침, 배인호 어머니가 다소 무거운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아주머니, 무슨 일이에요?”거실
나는 배인호의 어머니가 아래층으로 내려가셔서 다시 배인호에게 전화를 걸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반 시간 정도 지나서 의사 선생님이 도착하셔서 엄마를 검진해 주셨다. 다른 큰 문제가 없음을 확인한 후 의사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엄마를 병원으로 옮겨 정밀 검진을 받게 했다.나는 병원으로 함께 떠났고 다른 사람들은 집에서 기다리기로 했다.병원에 도착하자 엄마는 검사실로 이동하고 나는 복도에 앉아 기다렸다. 마음이 나뭇잎이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처럼 초조하고 불안했다.“지영 씨.”갑자기 이우범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고 나는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역시 이우범은 병원으로 다시 출근했다. 다시 흰 가운을 입고 있었고 예전보다 더 마르고 피부는 더 하얗게 된 것 같았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두 눈에서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나는 그가 나를 속인 일이 떠올라 마음속으로 경계했다.나도 어느 날 내가 이우범을 경계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설 잘 보냈어요? 다시 출근하는 거예요?”나는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설 잘 보냈죠. 지영 씨는 왜 병원에 있어요?”이우범은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나는 웃으며 말했다.“엄마가 깨어난 것 같아서 병원에 모시고 왔어요. 지금 정밀검사 받는 중이에요.”이우범의 미간이 다시 펴지며 안도하며 물었다.“그래요? 다행이네요. 인호는 왜 같이 안 왔어요?”지금 배인호는 아마 서란과 함께 있을 것이다. 나는 묵묵히 속으로 생각했다. 비록 지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는 이미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나는 고개를 저었다.“바쁜가 봐요.”이우범은 나를 바라보며 내 말의 뜻을 알아차린 듯 가까이 다가와서 고개를 숙였다.“인호를 믿어요?”“이우범 씨, 난 이미 인호 씨와 재결합하기로 마음먹었어요. 당연히 믿어야죠.”나는 두 걸음 정도 뒤로 물러나 거리를 두었다.“그럼, 인호가 지영 씨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도 알아요?”이우범은 또 물었다.나는 대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