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찔리는 일을 하지 않은 한 말이다...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유는 그녀와 부승민 때문이 아니라 부민재 때문이었다. 그래서 부민재에게 불리한 유언을 남기고 그녀에게 보상의 의미로 많은 재산을 남긴 거였다...부승민은 침묵했다. 커다란 손을 온하랑의 어깨에 얹고 가볍게 두드리며 그녀를 위로했다.온하랑은 갑자기 그의 팔을 뿌리치고 싶은 생각이 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몇 걸음 떨어져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만지지 마!”부승민의 손은 허공에서 얼어붙었다. 그는 지금 온하랑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근본 원인은 형제 간의 허점이 다른 사람에게 악용되었다는 사실에 있었다.그에게도 피할 수 없는 책임이 있었으니, 그녀가 그에게 가차 없이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하랑아, 지금 네가 힘들다는 거 알아. 나를 때리고 싶으면 때리고, 욕하고 싶으면 욕해. 억지로 참으려고 하지 마.”온하랑은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주먹을 꽉 그러쥐고 눈을 감고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이를 악물고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꺼져!”온하랑은 뒤돌아서서 청장 사무실을 나갔다.“하랑아...”부승민은 얼른 큰 보폭으로 얼른 그녀를 쫓아갔다. 발걸음을 멈춘 온하랑은 뒤돌아보지 않고 말했다.“따라오지 마. 혼자 있게 내버려둬.”“알았어...”부승민은 입술을 꽉 다물고 힘겹게 눈을 감은 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그녀는 지금 그가 미치도록 증오스러울 것이다...예전 추서윤을 위해 여러 번이나 온하랑에게 상처를 준 일은 전부 우스운 일이 되어버렸다.차에 돌아와 앉은 온하랑은 등받이에 힘없이 기대고 눈을 감았다. 사건의 진실을 듣는 순간 부승민을 향한 분노가 최대치에 달했다.이성적으로는 그녀도 부승민 역시 속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감정적으로는 그를 비난하지 않을 수 없었다...왜 그는 분명 추서윤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받아줬단 말인가? 왜 그는 추서윤의 거짓말과 목적을 꿰뚫어 보지 못했을까? 왜 그는 추서윤에게 그토록
주얼리샵에서 나올 때 낯익은 모습이 부선월의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돌려 살펴보니 그 모습은 이미 얼마 떨어지지 않은 한 가게의 입구에서 사라진 뒤였다. 눈을 들어 가게 간판을 보니 술집이었다.온하랑이 저 바에 간 건가?부선월은 몇 걸음 앞으로 다가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온하랑의 차를 발견했다. 설핏 어두운 빛이 눈동자에 스치더니 부선월은 휴대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했다.대낮이라 바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몇 명의 직원이 상자를 나르며 물건을 채우느라 바삐 돌아쳤다. 바에 있던 젊은 남자 바텐더는 재료를 보충하고 있었다.술을 몇 병 주문한 온하랑은 자리를 찾아 앉아 병뚜껑을 따서 술을 잔에 따른 후 고개를 젖히고 쭉 들이켰다.씁쓸하고 매콤한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체내에 흘러 들어갔다. 온하랑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마음 깊은 곳의 우울함과 고통은 전혀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온하랑은 몇 잔을 더 따라 마셨다.아버지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익숙하면서도 아득하게 느껴지며 온하랑의 눈에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가득 찼다. 마침내 아버지의 복수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진실은 그녀가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강직하고 고상한 아버지는 자본가의 손에 살해당한 게 아니라 자신과 아무 관련이 없는 음모에 연루되어 사망했다. 부씨 가문의 권력 싸움, 야심으로 가득 찬 추서윤의 자작극 납치 사건에 휘말려 ‘피해자’에게 도움을 주려다가 살해당했다.온하랑은 차라리 아버지가 부도덕한 자본가들에게 살해당하는 한 이렇게 헛되이 죽는 건 바라지 않았다. 도무지 마음속에서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술잔을 들고 몇 잔을 연달아 마셨다. 시야가 흐릿해지며 부승민의 그림자가 눈앞에 비친 것 같았다. 술잔을 들고 눈썹을 찡그린 채 손을 흔들며 그림자를 흩뜨렸다.부승민은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던가? 어떻게 추서윤의 거짓말도 눈치채지 못했을까?어이없게도 추서윤에게 오랜 세월 속아왔다. 온하랑은 한심하고 불쌍하게 느껴졌다. 버젓한 BX 그룹의 회
상황을 보고 다가온 한 웨이터가 세 양아치를 몇 번 쳐다보더니 온하랑에게 물었다.“여성분, 무슨 일이세요?”“계산하고 싶은데 이 사람들이 저를 못 가게 해요.”웨이터가 말했다.“형님들, 비켜 주세요. 다른 분 힘들게 하지 마시고...”“꺼져. 그쪽이 상관할 일이 아니야!”밤톨 머리를 한 양아치가 고개를 돌려 웨이터의 말을 자르며 흉악한 눈빛으로 경고했다.“형님, 진정하세요...”“누가 네 형님이야?”밤톨 머리의 남자가 말했다.“괜히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지 마!” “저기요. 계속 이렇게 소란 피울 거면 여기서 나가 주시죠.”밤톨 머리의 남자는 눈썹을 치켜들고 거들먹거렸다.“왜? 날 쫓아내려고? 어디서 감히!”왼쪽에 있던 남자가 씩씩대며 앞으로 걸어가 웨이터에게 손가락질하며 말했다.“이 자식이 감히 어디서 용수 형님한테 이딴 태도로 말해? 당장 매니저 불러와!”오른쪽에 있던 남자도 말했다.“너 새로 온 놈이야? 용수 형님을 몰라?!”다른 웨이터가 상황을 무마하려고 나섰지만 세 명의 양아치는 여전히 으르렁거렸다. 온하랑은 그들이 비킨 틈을 타 얼른 발걸음을 옮겼다. 금방 두 걸음을 내디뎠는데 밤톨 머리의 양아치가 돌아서서 온하랑의 손목을 붙잡았다.“이쁜이, 어딜 그리 급하게 가!”“손 놔!”온하랑은 벗어나려고 애 썼지만 도무지 벗어날 수 없었다. 반쯤 추한 상태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나랑 몇 잔 마시면 놔 줄게.”“꿈 깨!”밤톨머리 남자는 얼굴에 웃음기가 가셨다.“오냐오냐하니까 이년이!”그가 힘껏 잡아당기자, 하늘이 핑글핑글 돌며 온하랑은 머리가 어지러워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남자는 재빨리 술 한 잔을 따르더니 온하랑의 앞에 강압적으로 내밀었다.“마셔!”온하랑은 고개를 들어 남자를 보며 입술을 꾹 다물고 말하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분위기가 삽시에 싸해졌다.“이게 무슨 일이야?”갑자기 멀지 않은 곳에서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일제히
온하랑이 유학 중일 때 최동철은 확실히 그녀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를 특별히 신경 써줄 이유가 없었다.온하랑은 최동철의 취미가 사진 찍기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최동철 또한 온하랑이 이 분야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녀에게 촬영을 배울 생각이 없는지 물어봤지만, 그녀는 거절했다.나중에 무슨 이유에서인지 온하랑은 그를 멀리했고, 그가 소개해 준 아파트에서 이사했다. 그 후 온하랑은 귀국하여 그의 연락처를 모두 삭제하고 두 사람은 그렇게 연락이 끊겼다.그 약간의 호감은 최동철이 그녀를 따라 귀국하기에는 너무나 보잘것없었고 온하랑은 점점 최동철의 기억 속에서 지워져 갔다.그러던 어느 날 퇴근 후 최동철은 단톡방을 열었고 우연히 익숙한 계정을 보았다. 그녀의 프로필 사진과 닉네임이 그대로였다.사실 풍경 사진 공모전 최초 창시자 중 한 사람이 최동철이었으며 그는 수년 동안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이기도 했다.최동철은 두 사람이 사진 덕분에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더구나 온하랑이 자신의 사진 수업에 등록할 줄은 더더욱 예상하지 못했다.그제야 그는 그녀가 기억을 잃고 그해의 유학 생활을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때 최동철은 조금 씁쓸했다. 함께 풍경 사진을 찍자고 초대했을 때만 해도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하지만 그녀가 이복동생 부승민의 전처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바뀌었다. 최동철의 시선이 온하랑의 얼굴에 옮겨졌다. 그녀의 뺨은 약간 붉게 물들고, 두 눈은 촉촉하고 짙었으며 눈꼬리가 빨개져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요염함이 묻어났다.“가자, 데려다줄게.”“싫어, 더 마실 거야.”온하랑은 그녀 앞에 놓인 술잔을 집어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최동철은 자리에서 일어나 한 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잡고 액체가 반쯤 남은 잔을 빼앗으며 말했다.“마시지 마!”온하랑은 그를 흘겨보더니 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 놓인 술병을 집어 들었다.“더 마실 거라고!”빌어먹을 부승민! 몇 분간의 용서는 이제 없던 일이야
온하랑은 검은 까마귀 털 같은 속눈썹을 깜빡거리더니 눈물이 테이블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아무 일도 없던 최동철의 마음을 갑자기 뭔가가 쿡 찌르는 것 같았다.그녀는 부승민을 정말 사랑했다.부승민이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온하랑은 눈가를 닦으며 잔에 담긴 술을 한 번에 다 마셨다.최동철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가 술을 더 마시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어느새 술에 취한 채 테이블에 엎드려 계속 술을 마실 거라며 주사를 부리고 있었다.그는 온하랑 손에 들린 컵을 빼앗은 뒤 계산을 마쳤다. 그러고는 온하랑을 안아 들고 바에서 나와 차 뒷좌석에 태웠다.온하랑은 이미 술에 취해 인사불성인 상태로 뒷좌석에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누워 있었다.최동철은 차를 돌아 조수석에 올라탔다.“대표님, 어디로 모실까요?”“호텔로 가주세요.”기사는 시동을 걸고 최동철이 지내고 있는 호텔로 향했다.가는 도중에 최동철의 핸드폰이 울렸다. 비서의 전화였다.최동철이 전화를 받자마자 비서가 말했다.“대표님, 사모님께서 임씨 아가씨와 함께 강남시에 오셨다고 합니다. 지금 인더숲 호텔에서 묵고 계시는데 대표님을 뵙겠다고 하십니다.”사모님은 최동철의 아버지 최국환이 둘째 부인이자 최동림의 친엄마 그리고 최동철의 새엄마였다.“저녁에 보자고 그래.”“사모님께서 지금 대표님을 뵙겠다고 하시는데요. 급한 일이 있다고 합니다.”최동철은 멈칫했다.“내가 조금 있다가 갈 테니까. 기다리라고 해.”“알겠습니다. 참 대표님 부민재가 자수했습니다.”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조용히 눈을 감고 잠이 든 온하랑을 바라보았다.“알겠어.”비서는 더 말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최동철은 핸드폰을 주머니 안에 넣으며 손가락을 튕겼다.부하가 장국호를 잡은 다음에 가장 먼저 그때의 일을 신문했기에 최동철은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 알고 있었다.하지만 장국호는 아직 강남시에 도착하지 않았다.지금 생각해 보니 오늘 온하랑이 이렇게 슬퍼하는 이유가 부승민과 부민재를 통해 진실을 알게 되었
그는 소파에 앉아 앞에 노트북을 두고 일을 하는 듯했다.온하랑은 놀라서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더니 주변을 둘러보았다.이 방은 확실히 생활의 흔적 뚜렷했고 새로 체크인한 방처럼은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궁금해서 물었다.“제가 왜 여기에 있어요?”최동철은 입꼬리를 씰룩이며 말했다.“네 생각에는 왜 여기 있을 것 같은데?”온하랑은 진지하게 생각하더니 말했다.“오빠가 절 바에서 데려온 거예요?”그렇다면 그녀를 도와준 사람은 부승민이 아니라 최동철이었다. 그럼 그녀는 술을 마시고 사람을 잘못 본 것일까?최동철은 눈썹을 치켜뜨며 부정하지 않았다.“동철 오빠 어제 그 남자들한테서 구해줘서 고마워요.”온하랑은 미안한 듯 웃더니 머뭇거리며 물었다.“나 어제 좀 많이 마셨는데 혹시 실수한 건 없죠?”예를 들어 그를 부승민이라고 불렀다든가 하는 일은 없길 바랐다.비록 술김에 사람을 잘못 봤지만 이름을 잘못 불린 사람에게는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상대는 최동철이었다.최동철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니.”온하랑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실수 안 했으면 다행이에요.”“근데 너 나한테 토했어.”최동철이 바로 말했다.“네?”온하랑의 턱은 바닥에 떨어질 것 같았다.“네긴 뭐가 네야? 네 다운 재킷에도 토가 묻어서 내가 버렸어.”온하랑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이불을 들고 침대에서 내려왔다.“미안해요. 그 오빠 옷값은 제가 드릴게요.”“그건 됐어. 옷이 없는 것도 아니고.”최동철에게 옷 한 벌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온하랑은 고민하다가 말했다.“그럼 저녁에 제가 밥 사드릴까요?”최동철은 그녀를 도와 장국호도 잡아주었고 또 바에서 그녀를 구해줬으니 그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최동철은 고개를 들더니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래.”그는 손가락으로 소파에 놓인 쇼핑백을 가리키며 말했다.“내가 사람 시켜서 네가 입을 다운 재킷 사 오라고 했어. 맞는지 봐봐? 마음에 들어?”“동철 오빠 눈썰미면 당연히 괜찮겠죠.”
온하랑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그녀는 아직도 부승민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고민하던 온하랑은 핸드폰을 다시 열어 부승민에게 문자를 남겼다.[안전해요. 그러니까 방해하지 마요.]문자를 보 뒤 온하랑은 다시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최동철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최동철의 눈빛이 의미심장하게 번쩍였다.“왜 안 받아?”“중요한 전화는 아니에요.”온하랑은 대충 둘러댔다.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핸드폰이 또다시 울렸다. 다시 확인해 보니 또 부승민이었다.“그러지 말고 받아 봐. 중요한 일일 수도 있잖아.”최동철이 말했다.“오늘 오후에 장국호가 강남시에 도착했어. 심문이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네.”오전에 있었던 알게 된 진실이 떠올라 온하랑은 입술을 깨물며 전화를 끊었다.“괜찮아요. 안 받아도.”최동철은 눈빛이 빛나더니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식사를 마치고 나니 거의 7시가 되었다.“가자. 어디서 지내? 데려다줄게.”최동철이 말했다.온하랑은 아파트 이름을 말했고 최동철은 그녀를 태우고 아파트 입구까지 데려다주었다.온하랑은 차 문을 열며 최동철에게 손을 흔들었다.“고마워요 동철 오빠. 다음에 올라와서 커피 한잔하고 가요. 안녕.”“그래 다음에 봐.”온하랑에 집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최동철은 차를 몰고 떠났다.그녀는 핸드폰을 켜며 집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부재중 전화가 쏟아졌고 전부 부승민의 전화였다.엘리베이터 앞에서 누군가 기다리고 있었다. 온하랑은 손을 들어 버튼을 누르고서는 고개를 숙여 핸드폰에 뜬 전화번호를 바라보며 고민했다. 그래도 부승민에게 전화를 해줘야 할 것 같아 그녀는 다시 그의 전화번호를 눌렀다.몇 초 뒤 옆에서 익숙한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온하랑은 2초 정도 멍하니 있더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부승민의 깊은 시선과 마주치고서는 깜짝 놀랐다.“승민 오빠? 오빠가 왜... 근데 왜 날 안 불렀어요?”그녀는 옆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그저 같은 건물에 사
부승민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온하랑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서는 고개를 돌려 그르 바라보았다.“오빠 왜 이래요?”부승민은 불타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너 설마.”‘설마 최동철하고 같이 있은 건 아니겠지?’말을 하다 말고 그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 뒤에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은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는 표정에서 다 드러났다.그녀는 혼자 있고 싶다고 말했지만 그는 그녀가 이해하지 못하고 혼자 끙끙 앓을까 봐 그녀를 찾아가려고 했다.하지만 도중에 부선월로부터 전화를 받았다.부선월은 허약한 목소리로 차 사고를 당했는데 수술 동의서에 사인해 줄 친인척이 필요하다고 했다.부승민은 의심도 없이 바로 차를 돌려 병원으로 달려갔고 오랫동안 부선월에게 잡혀있었다.병원에서 나온 부승민은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계속 걸어도 전화기는 꺼져있었다.그 뒤로 그는 호텔 문 앞에서 그녀의 차를 발견했고 들어가서 직원에게 물었다. 직원은 그녀가 술에 만취된 상태로 어떤 남자와 함께 떠났다고 얘기했다.그는 미친 듯이 온갖 곳을 돌아다니며 그녀를 찾았다.하지만 이때 그는 사진들을 받았다.처음 두 장은 온하랑이 최동철에게 업혀 차에 탄 뒤 호텔에 들어가는 사진이었다.세 번째 사진은 최동철의 비서가 여자 옷을 들고 호텔로 들어가는 사진이었고 네 번째 사진은 저녁쯤 온하랑이 최동철과 함께 퓨전 레스토랑에서 나오는 사진이었다.그 사진들에서 최동철의 옷은 호텔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달랐고 온하랑도 옷이 바뀐 채 회장은 지워졌고 머리는 풀어 헤치고 있었다.두 사람은 호텔 방에서 몇 시간을 함께 보낸 것이었다.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 수 있었다.이 사진들을 봤을 때 부승민은 심장이 마치 날카로운 칼에 찔려 피가 뚝뚝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가슴이 아파 미칠 것 같았다.바로 그때 온하랑에게 전화는 통했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고 안전하니 방해하지 말라는 문자만 한 통 와 있었다.그가 한걱정에 비해 너무나 인색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