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추서윤의 제일 첫 계획은 온강호를 모함하여 인터뷰할 때 저를 성폭행했다고 주장할 참이었다. 그녀는 피해자라는 약자 타이틀을 가지고 있어 대다수 사람이 그녀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온강호가 강간범으로 낙인찍히면 그의 말은 자연스레 설득력을 잃게 되어 사람들이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된다. 게다가 추서윤을 모함하는 거라고 간주할 것이다.주먹으로 벽을 쾅, 내려친 부승민은 분노로 얼굴이 한껏 일그러진 채 이를 악물었다.“그런데 왜 다시 계획을 바꾼 거예요?”예전 납치 사건이 가져온 죄책감으로 부승민은 두 사람의 정분을 생각하며 추서윤을 항상 나쁜 쪽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 후 어떤 일은 그저 추서윤이 얕은꾀를 부리는 정도로 치부했다. 이제서야 그는 추서윤의 껍질 아래에 숨겨진 뱀처럼 교활하고 추악한 내면을 알았다. 이걸 어떻게 꾀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정말 음흉하고 지독한 인간 말종이나 다름없었다.부민재가 말했다.“아마도 누군가 알려줬던 것 같아.”그 후 추서윤은 계획을 바꿨다.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온강호는 업계에 많은 인맥을 가지고 있었고, 경찰서에도 손발이 맞는 지인이있었다. 단순한 모함만으로는 그를 어떻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그에게 역습당할 수도 있었다.이런 일을 처음으로 하는 추서윤은 스스로 자신을 다독였다. 아무도 그녀가 위로 올라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계획은 성공했다. 납치범은 해외로 도주하고 온강호는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아무도 교통사고와 납치 사건을 연관 짓지 않았다. 모든 게 완벽했다.만일 온하랑이 그 사진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이 두 가지 사건은 절대 밝혀지지 않았을 완전 범죄로 묻혔을 수도 있었다.자작극 납치 사건은 추서윤이 독단적으로 벌인 짓이었고, 부민재는 나중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추서윤은 자신이 꾸며낸 비참한 상황을 이용해 부승민의 의심을 지우려고 했다. 이것도 하나의 좋은 방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부민재는 납치범을 연기한 사람들을 해외로 도피시켰다. 심지어 민성주를 포함한 사람들이 해외에
추서윤은 남몰래 부민재를 여러 번 찾아갔지만, 여전히 요지부동으로 일관하자 급기야 그를 협박하기 시작했다. 만일 부민재가 그녀와 결혼하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해서 전부 부민재가 지시한 일이라고 자백하여 같이 끌어내릴 작정이었다.은행 계좌 거래 기록이 확실한 증거였다. 두 사람은 이제 한배를 탄 거나 마찬가지였고, 이제 부민재의 약점을 잡은 추서윤의 태도는 전처럼 비굴하지 않았다.추서윤이 정말 신고할까 봐 걱정되었던 부민재는 태도를 누그러트리고 추서윤을 달랬지만 소청하와 헤어질 마음이 없었고 시간만 끌 뿐이었다.그때 그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그럴싸한 방법을 찾아 추서윤에게 반격하여 제압하거나 아예 대담하게 맞서 싸워서 추서윤이 감히 경찰에 신고하지 못한다에 모험하는 거였다. 다른 하나는 소청하와 헤어지고 추서윤을 만나는 거였다. 그러나 그때의 그는 매우 우유부단했고 가장 어리석은 방법을 선택했다. 부민재가 계속 소청하와 이혼하지 않자 점차 인내심을 잃은 추서윤은 소청하에게 손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녀가 있는한 부민재와 소청하가 평화로울 수 없다는 인식을 심어줘서 부민재가 자신을 선택하게 할 의도였는데 생각 밖에 소청하는 임신 중이었고 몸의 상처는 심각하지 않았지만 배 속의 아이를 잃었다. 하루아침에 아이를 잃은 소청하는 큰 충격에 빠졌다. 부승민도 전에 병문안을 간 적이 있었다. 그 기간 소청하는 몹시 초췌해지고 심각한 우울증을 앓았다.부민재는 소청하가 아이를 유산한 이유가 추서윤 때문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눈물범벅이 된 아내의 얼굴을 보며 부민재는 그제야 비로소 자신이 얼마만큼 어리석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반드시 추서윤과 단호하게 끝내야 한다.추서윤은 절대 신고하지 못한다. 신고하는 순간 두 사람은 완전히 틀어지는 거나 다름없었다. 사건의 진실과 부민재의 신분 때문에 그에게 100퍼센트 피해를 준다는 보장도 없을뿐더러 추서윤은 무조건 80퍼센트의 손해를 입어야 한다. 게다가 추서윤 때문에 추씨 가문도 말려들어 부씨 가문에 미
주먹을 꽉 움켜쥔 부승민은 손가락 뼈마디가 하얗게 질리며 손등에 핏줄이 튀어나오고 눈가에는 적의가 번뜩였다.그는 부민재의 말을 믿었다. 두 사람은 함께 자랐고 부승민보다 부민재의 성격을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부민재는 온화하고 우유부단한 성격에 그럴 마음은 있어도 그럴 만한 배짱이 없었다.누군가 뒤에서 그를 밀어붙인 것이 분명했다. 추서윤 때문이 아니라면 두 형제는 오늘날, 이 상황까지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건의 계기는 부민재도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부승민은 부민재가 너무 한스러웠다.“얼마 전 형수님이 형이 다른 여자와 연락하고 있다고 하던데, 설마...”“추서윤이야.”부민재는 고개를 들며 말했다.“너의 사람들이 추서윤을 사방으로 찾아다니는 바람에 몰래 나한테 찾아와서 대판 싸웠어.”소청하가 봤던 부민재 목에 난 상처는 바로 추서윤에게 긁힌 자국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소청하가 고통에 시달리며 우울해하고 초췌해지는 모습을 그저 묵묵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제 부승민이 모든 것을 알게 되자 부민재는 마음이 한결 후련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드디어 마음을 졸이며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었다.부승민은 어이가 없어 입에서 허, 실소가 터져 나왔다.“할아버지까지 죽이고 또 무슨 낯짝으로 형을 찾아가...”그렇게 말하던 부승민은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유 설마...!” “그래, 할아버지는 너 때문에 돌아가신 게 아니야. 다 나 때문이야... 내가 할아버지를 실망하게 해서...”부민재는 고통스러운 듯 두 눈을 질끈 감았다.추서윤은 부승호 앞에서 모든 것을 까발렸다. 자신의 자작극 납치 사건과 온하랑 아버지의 죽음을 전부 부민재에게 떠넘겨 버렸다.부승호는 항상 마음이 따뜻하고 겸손하다고 생각했던 큰 손자가 한 사람의 죽음에 연루되어 있을 줄은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그것도 목숨을 잃은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온하랑의 아버지였다.부민재도 전
가늘고 긴 목에 뜨거운 숨결이 닿자, 온하랑은 피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려고 최선을 다했다.오랜 침묵 끝에 부승민은 깊은숨을 들이마시더니 눈을 감고 감정을 추스르며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야.”그는 천천히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온하랑을 놓아주었다. 온하랑은 그의 무겁게 가라앉은 마음을 예리하게 알아채고 눈을 들었다. 그녀는 가까이서 그의 붉고 퍼렇게 멍든 얼굴을 관찰했다.“누구랑 싸웠어?”“응.”부승민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온하랑은 당황함을 금치 못했다.“가서 구급상자 가져올 테니 먼저 앉아 있어.”회장실에는 구급상자가 있었는데 안에는 몇 가지 기본 약이 들어 있었다. 부승민은 아무 말도 없이 코트를 대충 소파 등받이에 올려놓고 소파에 앉았다.구급상자를 테이블에 올려놓은 온하랑은 뚜껑을 열어 연고를 찾으며 물었다.“무슨 일이야? 오빠가 어떻게 다른 사람과 싸울 수 있어? 운전기사가 없었어?”다시 말해, 누가 감히 부승민을 때리냐는 말이다.누가 감히 부승민을 이렇게 때렸단 말이지?부승민은 침묵했다. 한참 동안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온하랑은 그를 힐긋 쳐다보더니 연고를 열어 면봉에 짜냈다.“얼굴 내밀어.”그가 말하고 싶어 하지 않아 온하랑도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기꺼이 약을 발라주는 이유는 단지 그가 그녀를 위해 추서윤과 거래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부승민은 순순히 온하랑의 옆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온하랑이 면봉을 가져다가 누르자 시원한 촉감이 전해져왔다.온하랑은 그를 흘긋 쳐다보며 물었다.“아파?”“괜찮아.”부승민은 그윽한 눈빛으로 온하랑을 바라보았다. 눈동자에는 애틋함이 가득 담겨있었다. 온하랑은 심장이 두근대더니 등에 소름이 돋았다. 얼른 시선을 피하고 그에게 약을 발라주었다.“얼굴 빼고 다른 부위는 안 다쳤어?”“다쳤어.”온하랑은 반사적으로 부승민을 이리저리 살폈다. 부승민은 온하랑의 작은 손을 가슴에 가져다 누르며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여기, 여기에 상처가 났어. 너만 치료할
“부승민, 날 약 올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부승민은 웃다가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손을 들어 입가의 상처를 살며시 눌렀다.“내가 감히 어떻게?”온하랑은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곤란해하는 부승민의 모습은 처음이었다.부승민은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온하랑은 곧바로 웃음을 지우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레스토랑 이름을 말하더니 한마디를 덧붙였다.“여기 룸도 있어.”혹시나 그의 현재 이미지가 다른 사람한테 보이기가 민망할까 봐서 말이다.부승민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연민우에게 예약하라고 말했다.레스토랑 룸에 도착한 후 온하랑은 몇 가지 음식을 주문하고 테이블 건너편에 있는 부승민에게 메뉴판을 건넸다.“봐봐. 다른 거 뭐 더 주문할지.” 부승민은 메뉴판을 건네받아 대충 훑어보았다.“양고기스튜?”“좋아.”온하랑은 고개를 끄덕였다.“내가 먹을 테니 나중에 종업원더러 내 앞에 놓으라고 해.”“너 양고기 좋아해?”“응.”온하랑은 양고기를 즐겨 먹을 뿐만 아니라 양고기 수프를 마시는 것도 좋아했다. 아삭한 양파의 식감과 뽀얗고 진한 수프의 맛이 어우러져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그러나 부승민은 양고기 냄새를 좋아하지 않았기에 예전 양고기와 관련된 어떤 것도 집에 나타난 적이 없었다.부승민은 멈칫했다. 주문한 요리 대부분은 그가 좋아하는 음식이거나 현재 그의 위장 상태에 적합한 음식이었다.그녀는 그의 취향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가 주문할 수 있는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은 단 두 가지에 불과했다. 생선구이와 초코케이크를 빼면 아는 게 없었다. 게다가 이제 그녀는 초코케이크를 좋아하지 않는다.결혼 3년 내내, 이혼에 이르기까지 그는 그녀가 양고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처음 이 결혼 생활이 시작될 때부터 그의 정신은 온통 딴 데 팔렸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최선을 다했다. 단지 그가 그 기회를 잡지 못했을 뿐이었다. 부승민은 가슴이 시큰거리며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당연히 아니지.”부승민은 피식 웃었다.“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너 전에는 뭔가 알아내려고 일부러 민지훈과 사귀지 않았어? 그런데 지금은 왜 안 돼?”온하랑은 얼굴이 굳더니 눈빛이 흔들리며 급히 시선을 피했다.“그거야 다르지.”“뭐가 다른데?”부승민이 진지하게 물었다. 이 일만 생각하면 화가 나 속이 뒤집혔다. 마음에 찔리는 듯 온하랑은 눈을 내리깔고 입을 달싹였다.“...그건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잖아...”더욱 뻔뻔스럽게 말하자면 민지훈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이성적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그러나 부승민은 달랐다. 그녀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이른바 약점 때문에 부승민과 재결합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아버지 복수를 위해 어떤 요구든 들어줄 수 있단 말이야?! 하랑아, 하늘에 계신 장인어른도 너의 그런 모습은 원치 않으실 거야. 분명 네가 잘 살아가길 누구보다 바라실 거야.”온하랑은 토라진 어린아이 같았다.“...응.”“다행히 네가 정보를 일찍 알아내 순조롭게 민지훈과 헤어졌으니 망정이지,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지 생각해 봤어?”“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보면 되지...”온하랑의 목소리는 점점 기어들어 갔다. 살며시 눈을 들어 부승민의 시선을 마주했다. 마지막 몇 마디는 순식간에 모깃소리만큼 가늘어졌다.부승민은 얼굴빛이 푸르뎅뎅해서 말했다.“흠, 난 아직도 네가 어느 날 밤인가 민지훈이 잘생기고 해맑은 데다 진취적이라서 좋아한다며 널 귀찮게 하지 말라던 말이 기억 속에 생생한데?”눈을 깜박이던 온하랑은 대뜸 얼굴을 붉히며 둘러대느라 애썼다.“어... 그러니까... 그건 의심할까 봐 진짜처럼 연기했을 뿐이지...”“또 뭐랬더라. 내가 준 돈으로 민지훈을 먹여 살리겠다며 나 더라 주제넘게 행동하지 말라고 했었는데.”온하랑은 얼굴이 울긋불긋해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그거 다 농담이야... 농담...”“하, 너 분명히 정보를 알아냈으면서 새해 전날 내가 너더러 민지훈
이때 종업원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잇달아 음식을 테이블에 올렸다. 부승민은 젓가락을 들더니 화제를 바꿨다.“먹자.”테이블에는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가득했다. 양고기스튜는 온하랑의 앞에 놓았는데 여러 가지 음식의 냄새에 섞여 양고기 냄새가 선명하지 않았다.부승민은 온하랑이 수시로 양고기슈트를 향해 젓가락을 뻗는 것을 보며 호기심에 물었다.“정말 그렇게 맛있어?”“가능하면 한번 먹어볼래?”그러자 부승민은 젓가락을 뻗어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입에 가까이 가져가자마자 심한 양고기 특유의 누린내가 났다. 그는 억지로 한입 베어 물고는 한참을 꼭꼭 씹은 다음 눈을 감고 삼켰다.“어때?”온하랑은 그의 표정을 보며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다.“뭐 나쁘지 않네.”부승민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입에 안 맞으면 억지로 먹지 마.”온하랑이 말했다. 이 말은 어딘가 부승민의 예민한 신경을 건드린 듯했다. 그는 다시 한 조각을 집었다.식사하던 도중에 온하랑은 입술을 감쳐물더니 부승민을 바라보았다.“오빠.”“응?”부승민이 고개를 들었다.“고마워.”온하랑은 진심으로 말했다.“뭐가 고마운데?”“비록 오빠가 나서서 나와 추서윤의 거래를 막아 내가 알 권리를 박탈했지만, 그래도 감사해...”부승민은 멈칫하더니 눈을 내리깔았다. 그가 온하랑의 정체를 숨긴 건 그녀를 위해서였지만,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숨긴 데에는 나름의 사심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그녀가 그 사실을 떠올리고, 아이의 아버지가 마침 그녀가 좋아하는 남자의 아이여서 그를 떠나갈까 봐 두려웠다. 가능하다면 이 사실을 평생 숨기고 싶었다. 그녀가 이 사실을 안다면 아이가 행방불명인 채로 계속 밖에서 떠돌게 했다고 그를 비난할지도 모른다. 부승민은 그녀가 진짜 알게 되면 그때 다시 생각하기로 했다.“천만에.”부승민은 화제를 돌렸다.“너 아까는 그런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하지 않았어? 이제 또 믿는 거야?”“안 돼?”부승민은 온하랑의 뾰로통한 표정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돼.
온하랑은 뭔가 마음이 허무하기도 하고 흐뭇하기도 하면서 아주 복잡했다.수년간의 짝사랑이 마침내 확실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너무 늦어버렸고 이미 이혼했다...부승민은 항상 그녀와 재결합하고 싶어 했다.온하랑은 그날 연회에서 김시연이 그녀에게 했던 질문을 떠올렸다.‘아직도 부승민을 사랑해요?’아직도 사랑하는 걸까?온하랑은 눈을 뜨고 천장을 바라보며 대답할 수 없었다. 이혼한 지 꽤 오래지났지만, 그녀는 지금도 확실하게 대답할 수 없었다. 사실은 이미 답을 가지고 있었다.온하랑은 여전히 부승민을 좋아했다. 좋아하기 때문에 그의 도움을 마음 편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에게 가볍게 보이고 싶지 않았고, 그의 앞에서 당당하고 싶었다.다만 그 애정이 10대와 스무 살 때처럼 순수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을 뿐이다. 과거에 부승민은 그녀의 정신적 지주였고, 그녀는 그의 발걸음을 따라잡기 위해 공부하고 일했다.그러나 현재 그를 좋아하는 것은 그저 삶의 일부분일 뿐이고, 있어도 없어도 되는 그런 존재였다. 그녀에게는 다른 할 일이 생겼다. 아직 그녀는 재결합할 계획이 없었다. 그냥 자연의 순리에 맡기기로 했다.온하랑은 몸을 뒤척이며 눈을 감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정월 17일 아침 부승민의 운전기사가 7시 30분에 온하랑의 집 아래에 도착했다. 온하랑이 뒷좌석 문을 열자 부시아는 작은 책가방을 가운데로 옮기고 있었다.“숙모, 빨리 타요.”반대편에 앉아 노트북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문서를 보고 있던 부승민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온하랑을 바라보았다. 온하랑은 차 문을 닫았다.“시아야.”“네?”“강남에서의 첫 등원이라 긴장돼?”“아니요!”부시아는 작은 얼굴을 쳐들며 말했다.“그럼 됐어. 어린이집에 가면 친구들이랑 잘 지내야 해. 무슨 일이 생기면 삼촌과 고모한테 바로 전화해. 알았지?”“네, 숙모.”“물건은 다 챙겼어?”온하랑은 부시아의 작은 책가방을 보며 물었다. 온하랑을 흘긋거리던 부승민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지금 그녀가 부시아를 챙기는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