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실에서는 몇 분 간의 침묵이 이어졌다.“작은 아빠! 저 왔어요!”그 순간 앳된 목소리가 적막을 깼다.“쿵”하는 소리와 함께 부시아가 병실 문을 열고 뛰어들어왔다.하지만 병실에 부승민을 제외하고도 다른 사람이 더 있는 것을 발견한 아이는 바로 걸음을 멈추고 호기심 어린 큰 눈으로 추서윤을 보며 말했다.“아줌마, 안녕하세요?”추서윤이 고개를 돌려 눈을 크게 뜨고 부시아를 바라보았다.삐쩍 말라 광대가 튀어나오고 움푹 패인 눈꺼풀에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험상궂은 얼굴에 부시아가 깜짝 놀러 부승민의 품을 파고들며 작게 말했다.“작은 아빠, 무서워요.”부승민은 아이를 품에 안고 티 안 나게 테이블 위에 널려있던 온하랑의 사진을 치우며 고개를 들어 추서윤에게 말했다.“얼른 가봐, 광태가 밑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추서윤은 다시 한 번 부시아를 바라보고는 몸을 돌려 병실 밖을 나서다 온하랑과 정면으로 부딪혔다.추서윤의 동공이 흔들리더니 온하랑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섬세한 화장에 파운데이션은 부드럽고 하얀 피부에 밀착되어 갸름란 계란형 얼굴에 있던 흉터들을 모두 가려주었다.털 달린 갈색 겉옷에 옅은 색의 목도리, 체크무늬의 치마에 짧은 부츠를 신은 채 검은 긴생머리를 어깨까지 드리운 온하랑은 정말 밝고 패셔너블 해보였다.추서윤은 온하랑의 얼굴을 2초 정도 응시했다. 추상훈과 닮은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분명 여우 같은 그 엄마를 닮은 거겠지!자신의 앞에 읶는 여자를 마주한 온하랑은 순간적으로 멈칫하며 2초 가량을 뚫어져라 쳐다본 뒤에야 그 여인이 추서윤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할아버지를 죽인 추성뉴!온하랑의 눈빛에 분노가 치밀다가 이윽고 놀라움이 스쳤다.추서윤이 어쩌다가 이런 몰골이 된 걸까.부승민에 의해 보호 받던 거 아니었나?온하랑의 눈빛에 추서윤은 조금 전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음산한 눈빛으로 주먹을 꽉 쥔채 온하랑의 어깨를 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병실 밖을 나섰
온하랑이 입술을 짓씹으며 고개를 숙이고 그저 자신의 발끝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이미 온하랑은 진작에 부승민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다 거짓말로만 느껴졌다.부승민이 여태껏 계속 좋아한다고 얘기를 해도 온하랑은 단 한 번도 믿은 적이 없었다.하지만 지금 이렇게 얘기를 하니 부승민이 정말로 온하랑을 많이 좋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온하랑은 순간적으로 사고회로가 멎는 듯했다.부승민이 온하랑을 좋아한다. 그럼 결혼기념일에 있었던 일은 대체 뭐지?친구라고 대충 둘러댄 거로 모욕감을 주고, 온하랑이 심한 말로 경고를 했음에도 추서윤을 찾아간 것은 대체 뭐였을까.그날 밤, 온하랑을 뒤척이며 잠 못 들게 했던 그 짜증 나고 억울했던 감정들은 다 뭐가 된단 말인가?둘 사이에 아이가 생길 수 없는 건 또 어떻게 되는 것일까?만약 부승민이 온하랑을 정말로 좋아한다면 그저 좋아하는 것 그뿐이겠지.정말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시선부터 자연스레 그쪽으로 가게 돼 있다. 마음속으로도 자꾸 떠오르고 보기만 해도 기쁘고 그 사람이 상처받는 것은 보고 싶지 않고… 이러한 감정들을 온하랑은 부승민에게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추서윤 때문에 온하랑에게 상처를 받은 기억만 벌써 수십 수백 번이다.어쩌면 부승민의 습관일지도 몰랐다. 3년간의 결혼생활에 익숙해진 나머지 온하랑과 떨어지기 싫은 게 아닐까.“하랑아, 한 번만 기회를 줘, 제발…”부승민은 계속해서 침묵을 유지하고 있는 온하랑을 바라보며 혹시나 싶어 그녀의 손을 잡아보았다.정신을 차린 온하랑이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부승민이 멈칫하며 내밀었던 그의 손이 공중에 멈췄다. 그는 민망함을 무마하려는 듯 내밀었던 손으로 주먹을 쥔 채 천천히 내렸다.부승민은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미안, 내가 너무 성급했지.”온하랑이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안 믿는 게 아니야. 그냥 내가 아직 널 잘 몰라서 그래.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추서윤을 좋아하던 너였으니까… 방금 추서윤이
결혼 전, 부승민은 정말 많은 고객을 접대해왔다. 오죽했으면 할아버지까지 그 정도로 열심히 할 필요가 없다며 뜯어말렸을까. 부승민이 아직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회사 내부에서 그에게 불만을 품고 있은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그런 사람들에게 자신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라고 부승민은 두 배로 노력해야 했다. 자신을 그 자리에까지 올려준 할아버지의 체면을 지켜줘야 했다.결혼 후, 부승민의 접대는 그 전보다 현저히 줄어들었다. 퇴근하면 집으로 돌아와 온하랑과 함께 식사도 했다. 만약 부승민이 온하랑을 사랑하던 게 아니었다면 온하랑이 부승민을 설득할 수 있었을까?결혼 전, 회사 같은 스트레스만 쌓이는 업무 환경에서 부승민은 줄곧 실수를 저지른 직원에게 불같이 화를 내고는 했다. 하지만 온하랑의 영향으로 부승민은 어느 순간부터 직원에게 친절하고 따뜻한 리더가 되어있었다.부승민은 자신이 그렇게 온하랑에게 감화되었다는 것을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했다.뒤늦게 눈치챘지만 때는 이미 한참 늦어있었다.부승민의 진심이 담긴 말을 듣자 온하랑은 어떻게 반응해줘야 할지 순간적으로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기쁘냐고 묻는다면 기뻤다. 10년 가까이 부승민을 좋아해 왔던 시간이 사실은 짝사랑이 아니었으니까.슬프냐 묻는다면 역시나 슬펐다. 부승민이 지금 온하랑을 좋아하고 있다고 해도 추서윤을 위해 온하랑에게 상처를 줬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니까. 그날 입은 상처는 온하랑에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깊은 흉터로 남아있다.사실 제일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감정은 바로 감탄이었다. 만약 부승민이 조금만 더 일찍 자신의 감정을 깨달았다면 지금 두 사람의 결말이 조금이라도 달라지지 않았을까?하지만 이 세상에 만약이란 없다.부승민과의 결혼생활로 온하랑은 이미 지쳐버렸고 다시는 온 마음을 다해 부승민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지금의 온하랑은 마치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사람 같았다.“작은 아빠, 간호사 언니 왔어요!”부시아가 짧은 다리를 뽈뽈 거리
온하랑은 부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시아 정말 똑똑하네. 잘 그렸어, 예쁘다.”옆에서 링거가 꽂히지 않은 한쪽 손으로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던 부승민이 둘의 대화를 듣고 그곳으로 시선을 돌려 웃어 보였다.“시아야, 이 그림 작은 아빠 주면 안 돼?”“으응 그렇지만 저는 이거 남겨두고 싶은데요…”아이의 얼굴에 망설임의 감정이 잠시 맴돌았지만 결국 부승민의 말에 동의했다.“좋아요, 이거 작은 아빠 줄게요.”“시아가 맘에 든다 그러면 작은 아빠도 굳이 뺏을 생각 없어.”“시아는 이거 기념으로 남겨두고 싶어요. 돌아가도 이 그림 보면서 작은 엄마랑 작은 아빠 떠올리게.”보아하니 부시아는 아직 이곳에 오랫동안 머물 생각이 없는 듯했다.부승민이 답했다.“괜찮아, 시아 방학한 지 아직 얼마 안 됐잖아. 다른 생각 하지 말고 노는 데에만 집중하면 돼.”온하랑은 시간을 확인했다. 이미 오후가 다 되어있었다. 온하랑은 이미 부시아에게 접종한 상태였다.“시아야, 저녁에 작은 아빠랑 같이 병원에서 노는 거 어때? 작은 엄마가 좀 늦게 데리러 올 것 같은데.”부시아가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작은 엄마 혹시 지훈 오빠랑 같이 밥 먹으러 가요?”부시아의 말에 부승민의 시선도 온하랑에게로 옮겨졌다. 부승민의 눈빛이 이글거리고 있었다.왜인지 모르게 온하랑은 죄책감이 들어 의기소침 했다.“응, 거래처랑 거래가 성사됐나 봐. 작은 엄마 밥 사주고 싶대.”부승민은 민씨 가문의 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뒷말은 그저 온하랑이 부승민을 위해 한 말이었다.말을 마친 후에야 온하랑은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부승민에게 해명을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저도 작은 엄마랑 같이 가고 싶어요.”“미안해, 시아야. 이번에는 작은 엄마가 시아 못 데리고 갈 것 같아. 작은 아빠 옆에 있어 주는 게 어때? 작은 아빠가 몸이 저렇게 안 좋은 데도 일하고 있잖아. 혼자 병원에 있는데 얼마나 불쌍해?”부시아는 온하랑의 말에 놀란 듯 고개를 돌려 부승민을 바라보았다.
온하랑은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놀라움과 당황스러움 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호응에 동참하는 사람은 점점 많아졌다.꽃다발을 안고 있는 젊은 민지훈의 얼굴에는 온하랑을 향한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맑은 눈으로 온하랑을 눈에 담던 민지훈이 진지하게 말했다.“누나, 제 여자 친구가 되어 줄 수 있을까요?”온하랑은 간신히 표정 관리를 하고 머릿속으로 오만가지 핑계들을 떠올리며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그는 난감한 기색을 애써 감추고 완벽한 미소들 뽐내며 모든 사람을 앞에서 증명이라도 해 보이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좋아.”민지훈의 입꼬리가 예쁜 호선을 그리며 위로 올라갔다. 하얗고 정갈한 이빨을 보이며 예쁜 미소를 짓고 있는 민지훈의 얼굴에는 놀라우면서도 기쁜 기색이 역력했다.민지훈도 온하랑이 이렇게 바로 받아줄 줄은 몰랐다. 그의 상상 속에서 제일 긍정적인 경우가 기껏해야 거절 대신 생각 좀 해보겠다는 온하랑의 답변이었으니 말이다.“오오—”주위 사람들의 폭발적인 환호성이 들려왔다.모두의 시선 속에서 민지훈은 들고 있던 꽃다발을 온하랑의 품에 안겨주고는 살짝 붉어진 얼굴로 수줍게 웃으며 작게 속삭였다.“고마워요, 누나.”온하랑은 꽃다발을 받아들고 민지훈에게 해맑게 웃어 보였다.“나야말로.”주위 사람들은 두 사람의 행동을 바라보며 또다시 크게 호응하기 시작했다.앞쪽 테이블에 있던 한 남자가 큰소리로 외쳤다.“뽀뽀해! 뽀뽀해!”남자의 외침에 다른 손님들도 물타기로 함께 외치기 시작했다.“뽀뽀해! 뽀뽀해!”귀 끝이 새빨개진 민지훈의 눈은 촉촉하게 빛나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온하랑을 바라보던 그의 손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민지훈은 용기를 내어 온하랑에게 조심스레 물었다.“누나, 해도 돼요?”온하랑은 잠시 멈칫하더니 애써 입꼬리를 위로 올리며 두 눈을 내리깐 채 손을 들어 살며시 자신의 볼을 톡톡 두드렸다.“고마워요, 누나.”기쁨으로 가득한 눈동자의 민지훈이 고개를 숙였다. 뜨거운 민지훈의
하지만 지금 민지훈이 온하랑에 대한 감정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커진 모양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온하랑은 민지훈을 이용하는 데 자연스레 죄책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진실을 마주할 민지훈을 어떻게 봐야 할지 막막했다.“누나, 더 먹을래요?”민지훈은 이미 비어버린 온하랑의 앞접시를 보며 물었다.온하랑은 포크를 내려놓고 대답했다.“괜찮아요. 많이 먹으면 물려서요.”“그럼 이제 갈까요? 아직 시간도 이른데 한강에 가서 산책이나 하죠.”민지훈이 웃으며 물었다.온하랑은 민지훈이 지금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자신과 헤어지기 싫어한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온하랑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좋아요.”두 사람은 이내 주차장으로 향했다. 민지훈이 자연스레 운전석으로 몸을 옮겼다.“누나, 저 면허 땄어요. 운전은 제가 할게요.”온하랑은 차 키를 건네주며 조수석에 앉았다.히터를 틀자 차 내부는 이내 따뜻해졌다.온하랑은 카시트 등받이에 몸을 기대 창밖으로 휙휙 스쳐 가는 길거리의 풍경을 바라보았다.민지훈은 운전에 집중하고 있었다.조금 전, 사귀기로 한 사람들답지 않게 차를 타고 가는 내내 아무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마치 갑자기 좁혀진 둘 사이의 거리가 아직 적응되지 않는 모양이었다.한참이 지나 차가 신호등에 걸리고 나서야 민지훈이 별안간 입을 열어 물었다.“누나, 제 인스타에 우리 사귀는 거 공개해도 돼요?”온하랑은 잠시 진지하게 생각하더니 이내 공식 석상에서나 쓸법한 말투로 대답했다.“되긴 되는데 아저씨나 아주머니 같은 어르신분들에게는 안 보이게 해줄 수 있을까요? 우선 그분들한텐 알리고 싶지 않아요. 아, 그리고 인스타 팔로워들한테 우리 사이를 사이버 렉카들한테 몰래 알리지 말아 달라고 잘 얘기 해줬으면 좋겠어요. 난 내 사생활이 알려지는 게 싫거든요.”부승민의 전 아내로서 어느 정도의 사이버 영향력을 지니고 있던 온하랑이였기 하는 말이었다.온하랑은 일부 사이버 렉카들이 조회 수와 어그로를 위해 민지훈과의 관계를 폭로해 민성주
민지훈은 약속대로 부모님을 포함한 어른들에게 게시글을 숨겼다. 그들이 두 사람이 사귄다는 것을 알고 여기저기 떠드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까지는 굳이 숨기지 않았다. 숨기고 싶지도 않았다. 인스타 계정을 만들고 인스타 팔로워까지 만든 목적부터 친구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서였으니까.인스타 피드를 올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들, 동창들, 동기들 모두가 축하의 댓글을 달았다.그중에는 부현승의 댓글도 눈에 띄었다.“오랫동안 사귀길.”그 밑에 민지훈이 답글을 달았다.“감사합니다. 부 매니저님.”뒤이어 부현승은 민지훈의 인스타 피드 게시물을 캡처해 부승민에게 보내주었다.부승민은 서로 다른 두 손이 손깍지를 꼭 끼고 있는 휴대전화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초점을 잃은 심연 같은 검은 눈동자는 끝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공허했다.사진 속의 하얗고 가는 손은 누가 봐도 여자의 손이었다.온하랑과 무려 3년 동안의 결혼생활을 한 부승민인데 온하랑의 손을 못 알아볼 리 없었다.부현승은 친절하게도 밑에 자신이 단 댓글과 민지훈의 답글까지 함께 캡처해 부승민에게 보내주었다.인스타 피드에는 이모티콘 하나와 사진 한 장뿐이었지만 댓글 창에 있는 많은 축복의 말들과 민지훈의 반응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지금 공개연애를 암시하는 인스타 게시물이었다.휴대전화를 쥐고 있던 큰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손등에는 핏줄까지 울퉁불퉁 솟아있었다. 부승민의 평온한 표정과는 달리 눈빛에는 어둡고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몸속의 야수가 봉인에서 깨어나 미친 듯 포효하며 당장이라고 민지훈을 찢어 죽일 기세로 날뛰고 있었다.온하랑! 참 잘하는 짓이다!어제 온하랑은 이미 부승민의 고백에 응하며 더는 그와 일부러 멀어지지 않겠다 약속했다. 민지훈과 부승민의 공평한 경쟁을 허락한 것이다.하지만 오늘, 온하랑은 부승민이 추서윤을 대하는 방식에서 부승민이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그래놓고 오늘 밤, 온하랑은 민
온하랑은 그런 부시아를 차마 깨울 수 없었다.그녀는 손을 뻗어 부시아의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볼을 콕콕 질렀다. 아이의 볼은 마치 갓 태어난 갓난 아기의 엉덩이처럼 탱글탱글 했다.뻗었다 손을 거두자 온하랑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뒤에 있던 사람과 부딪혔다. 그녀는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언제 왔는지 모를 부승민이 온하랑의 뒤에 서서 눈도 깜빡 하지 않고 그녀를 쳐다 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한 방울 의 먹물이라도 흘러 나올 듯 새까맸다.둘의 시선이 공중에서 얽히자 온하랑은 귀신이라도 본 듯 등골이 오싹해져 무의식적으로 침을 꿀꺽 삼키며 간신히 평정심을 되찾았다.“부승민? 왜 이렇게 기척도 없이 와?”“네가 너무 집중해서 못 느꼈을 뿐이야.”“그래?”“응.”온하랑은 오늘 밤의 부승민에게 어딘가 모르게 음산한 기운이 감도는 것 같았다.하지만 온하랑은 별로 개의치 않고 그저 부시아를 빨리 깨워 이곳을 떠날 준비를 했다.“시…”입을 여는 순간, 온하랑은 순간적으로 목덜미에서 전해져오는 고통을 느끼고는 이내 머릿속이 하얘 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눈앞이 새까매지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부승민은 정신을 잃은 온하랑을 받아 안은 채 우아하고 매혹적인 그녀의 얼굴을 홀린 듯 멍하니 바라보았다.부승민은 천천히 몸을 숙여 온하랑의 눈썹 위로 가볍에 입을 맞추고는 작게 속삭였다.“하랑아, 내 탓 하지 마…”…더원파크힐.정원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엔진 소리에 집 안에 있던 아주머니가 밖으로 나왔다.“대표님, 병원에 계신 거 아니셨어요? 왜 지금 돌아오세요?”손자도 이미 상태가 많이 호전 된 상태였고 또한 부승민이 위 출혈로 입원해 수술을 받아야 하는 상황임 알고 있었던 아주머니였기에 일부러 이틀이나 일찍 돌아온 것이었다. 그녀는 내일 당장 병원을 찾아 부승민의 병문안을 가기로 계획하고 있었다. 부승민은 운전석 문을 닫고, 조수석으로 가 정신을 잃은 온하랑을 안고 나왔다.“시아는 뒷좌석에서 잠들어버렸어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