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실에서는 몇 분 간의 침묵이 이어졌다.“작은 아빠! 저 왔어요!”그 순간 앳된 목소리가 적막을 깼다.“쿵”하는 소리와 함께 부시아가 병실 문을 열고 뛰어들어왔다.하지만 병실에 부승민을 제외하고도 다른 사람이 더 있는 것을 발견한 아이는 바로 걸음을 멈추고 호기심 어린 큰 눈으로 추서윤을 보며 말했다.“아줌마, 안녕하세요?”추서윤이 고개를 돌려 눈을 크게 뜨고 부시아를 바라보았다.삐쩍 말라 광대가 튀어나오고 움푹 패인 눈꺼풀에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험상궂은 얼굴에 부시아가 깜짝 놀러 부승민의 품을 파고들며 작게 말했다.“작은 아빠, 무서워요.”부승민은 아이를 품에 안고 티 안 나게 테이블 위에 널려있던 온하랑의 사진을 치우며 고개를 들어 추서윤에게 말했다.“얼른 가봐, 광태가 밑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추서윤은 다시 한 번 부시아를 바라보고는 몸을 돌려 병실 밖을 나서다 온하랑과 정면으로 부딪혔다.추서윤의 동공이 흔들리더니 온하랑의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섬세한 화장에 파운데이션은 부드럽고 하얀 피부에 밀착되어 갸름란 계란형 얼굴에 있던 흉터들을 모두 가려주었다.털 달린 갈색 겉옷에 옅은 색의 목도리, 체크무늬의 치마에 짧은 부츠를 신은 채 검은 긴생머리를 어깨까지 드리운 온하랑은 정말 밝고 패셔너블 해보였다.추서윤은 온하랑의 얼굴을 2초 정도 응시했다. 추상훈과 닮은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분명 여우 같은 그 엄마를 닮은 거겠지!자신의 앞에 읶는 여자를 마주한 온하랑은 순간적으로 멈칫하며 2초 가량을 뚫어져라 쳐다본 뒤에야 그 여인이 추서윤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할아버지를 죽인 추성뉴!온하랑의 눈빛에 분노가 치밀다가 이윽고 놀라움이 스쳤다.추서윤이 어쩌다가 이런 몰골이 된 걸까.부승민에 의해 보호 받던 거 아니었나?온하랑의 눈빛에 추서윤은 조금 전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음산한 눈빛으로 주먹을 꽉 쥔채 온하랑의 어깨를 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병실 밖을 나섰
온하랑이 입술을 짓씹으며 고개를 숙이고 그저 자신의 발끝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이미 온하랑은 진작에 부승민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다 거짓말로만 느껴졌다.부승민이 여태껏 계속 좋아한다고 얘기를 해도 온하랑은 단 한 번도 믿은 적이 없었다.하지만 지금 이렇게 얘기를 하니 부승민이 정말로 온하랑을 많이 좋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온하랑은 순간적으로 사고회로가 멎는 듯했다.부승민이 온하랑을 좋아한다. 그럼 결혼기념일에 있었던 일은 대체 뭐지?친구라고 대충 둘러댄 거로 모욕감을 주고, 온하랑이 심한 말로 경고를 했음에도 추서윤을 찾아간 것은 대체 뭐였을까.그날 밤, 온하랑을 뒤척이며 잠 못 들게 했던 그 짜증 나고 억울했던 감정들은 다 뭐가 된단 말인가?둘 사이에 아이가 생길 수 없는 건 또 어떻게 되는 것일까?만약 부승민이 온하랑을 정말로 좋아한다면 그저 좋아하는 것 그뿐이겠지.정말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시선부터 자연스레 그쪽으로 가게 돼 있다. 마음속으로도 자꾸 떠오르고 보기만 해도 기쁘고 그 사람이 상처받는 것은 보고 싶지 않고… 이러한 감정들을 온하랑은 부승민에게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추서윤 때문에 온하랑에게 상처를 받은 기억만 벌써 수십 수백 번이다.어쩌면 부승민의 습관일지도 몰랐다. 3년간의 결혼생활에 익숙해진 나머지 온하랑과 떨어지기 싫은 게 아닐까.“하랑아, 한 번만 기회를 줘, 제발…”부승민은 계속해서 침묵을 유지하고 있는 온하랑을 바라보며 혹시나 싶어 그녀의 손을 잡아보았다.정신을 차린 온하랑이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부승민이 멈칫하며 내밀었던 그의 손이 공중에 멈췄다. 그는 민망함을 무마하려는 듯 내밀었던 손으로 주먹을 쥔 채 천천히 내렸다.부승민은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미안, 내가 너무 성급했지.”온하랑이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안 믿는 게 아니야. 그냥 내가 아직 널 잘 몰라서 그래.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추서윤을 좋아하던 너였으니까… 방금 추서윤이
결혼 전, 부승민은 정말 많은 고객을 접대해왔다. 오죽했으면 할아버지까지 그 정도로 열심히 할 필요가 없다며 뜯어말렸을까. 부승민이 아직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회사 내부에서 그에게 불만을 품고 있은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그런 사람들에게 자신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라고 부승민은 두 배로 노력해야 했다. 자신을 그 자리에까지 올려준 할아버지의 체면을 지켜줘야 했다.결혼 후, 부승민의 접대는 그 전보다 현저히 줄어들었다. 퇴근하면 집으로 돌아와 온하랑과 함께 식사도 했다. 만약 부승민이 온하랑을 사랑하던 게 아니었다면 온하랑이 부승민을 설득할 수 있었을까?결혼 전, 회사 같은 스트레스만 쌓이는 업무 환경에서 부승민은 줄곧 실수를 저지른 직원에게 불같이 화를 내고는 했다. 하지만 온하랑의 영향으로 부승민은 어느 순간부터 직원에게 친절하고 따뜻한 리더가 되어있었다.부승민은 자신이 그렇게 온하랑에게 감화되었다는 것을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했다.뒤늦게 눈치챘지만 때는 이미 한참 늦어있었다.부승민의 진심이 담긴 말을 듣자 온하랑은 어떻게 반응해줘야 할지 순간적으로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기쁘냐고 묻는다면 기뻤다. 10년 가까이 부승민을 좋아해 왔던 시간이 사실은 짝사랑이 아니었으니까.슬프냐 묻는다면 역시나 슬펐다. 부승민이 지금 온하랑을 좋아하고 있다고 해도 추서윤을 위해 온하랑에게 상처를 줬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니까. 그날 입은 상처는 온하랑에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깊은 흉터로 남아있다.사실 제일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감정은 바로 감탄이었다. 만약 부승민이 조금만 더 일찍 자신의 감정을 깨달았다면 지금 두 사람의 결말이 조금이라도 달라지지 않았을까?하지만 이 세상에 만약이란 없다.부승민과의 결혼생활로 온하랑은 이미 지쳐버렸고 다시는 온 마음을 다해 부승민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지금의 온하랑은 마치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사람 같았다.“작은 아빠, 간호사 언니 왔어요!”부시아가 짧은 다리를 뽈뽈 거리
온하랑은 부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시아 정말 똑똑하네. 잘 그렸어, 예쁘다.”옆에서 링거가 꽂히지 않은 한쪽 손으로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던 부승민이 둘의 대화를 듣고 그곳으로 시선을 돌려 웃어 보였다.“시아야, 이 그림 작은 아빠 주면 안 돼?”“으응 그렇지만 저는 이거 남겨두고 싶은데요…”아이의 얼굴에 망설임의 감정이 잠시 맴돌았지만 결국 부승민의 말에 동의했다.“좋아요, 이거 작은 아빠 줄게요.”“시아가 맘에 든다 그러면 작은 아빠도 굳이 뺏을 생각 없어.”“시아는 이거 기념으로 남겨두고 싶어요. 돌아가도 이 그림 보면서 작은 엄마랑 작은 아빠 떠올리게.”보아하니 부시아는 아직 이곳에 오랫동안 머물 생각이 없는 듯했다.부승민이 답했다.“괜찮아, 시아 방학한 지 아직 얼마 안 됐잖아. 다른 생각 하지 말고 노는 데에만 집중하면 돼.”온하랑은 시간을 확인했다. 이미 오후가 다 되어있었다. 온하랑은 이미 부시아에게 접종한 상태였다.“시아야, 저녁에 작은 아빠랑 같이 병원에서 노는 거 어때? 작은 엄마가 좀 늦게 데리러 올 것 같은데.”부시아가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작은 엄마 혹시 지훈 오빠랑 같이 밥 먹으러 가요?”부시아의 말에 부승민의 시선도 온하랑에게로 옮겨졌다. 부승민의 눈빛이 이글거리고 있었다.왜인지 모르게 온하랑은 죄책감이 들어 의기소침 했다.“응, 거래처랑 거래가 성사됐나 봐. 작은 엄마 밥 사주고 싶대.”부승민은 민씨 가문의 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뒷말은 그저 온하랑이 부승민을 위해 한 말이었다.말을 마친 후에야 온하랑은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부승민에게 해명을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저도 작은 엄마랑 같이 가고 싶어요.”“미안해, 시아야. 이번에는 작은 엄마가 시아 못 데리고 갈 것 같아. 작은 아빠 옆에 있어 주는 게 어때? 작은 아빠가 몸이 저렇게 안 좋은 데도 일하고 있잖아. 혼자 병원에 있는데 얼마나 불쌍해?”부시아는 온하랑의 말에 놀란 듯 고개를 돌려 부승민을 바라보았다.
온하랑은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놀라움과 당황스러움 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호응에 동참하는 사람은 점점 많아졌다.꽃다발을 안고 있는 젊은 민지훈의 얼굴에는 온하랑을 향한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맑은 눈으로 온하랑을 눈에 담던 민지훈이 진지하게 말했다.“누나, 제 여자 친구가 되어 줄 수 있을까요?”온하랑은 간신히 표정 관리를 하고 머릿속으로 오만가지 핑계들을 떠올리며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그는 난감한 기색을 애써 감추고 완벽한 미소들 뽐내며 모든 사람을 앞에서 증명이라도 해 보이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좋아.”민지훈의 입꼬리가 예쁜 호선을 그리며 위로 올라갔다. 하얗고 정갈한 이빨을 보이며 예쁜 미소를 짓고 있는 민지훈의 얼굴에는 놀라우면서도 기쁜 기색이 역력했다.민지훈도 온하랑이 이렇게 바로 받아줄 줄은 몰랐다. 그의 상상 속에서 제일 긍정적인 경우가 기껏해야 거절 대신 생각 좀 해보겠다는 온하랑의 답변이었으니 말이다.“오오—”주위 사람들의 폭발적인 환호성이 들려왔다.모두의 시선 속에서 민지훈은 들고 있던 꽃다발을 온하랑의 품에 안겨주고는 살짝 붉어진 얼굴로 수줍게 웃으며 작게 속삭였다.“고마워요, 누나.”온하랑은 꽃다발을 받아들고 민지훈에게 해맑게 웃어 보였다.“나야말로.”주위 사람들은 두 사람의 행동을 바라보며 또다시 크게 호응하기 시작했다.앞쪽 테이블에 있던 한 남자가 큰소리로 외쳤다.“뽀뽀해! 뽀뽀해!”남자의 외침에 다른 손님들도 물타기로 함께 외치기 시작했다.“뽀뽀해! 뽀뽀해!”귀 끝이 새빨개진 민지훈의 눈은 촉촉하게 빛나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온하랑을 바라보던 그의 손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민지훈은 용기를 내어 온하랑에게 조심스레 물었다.“누나, 해도 돼요?”온하랑은 잠시 멈칫하더니 애써 입꼬리를 위로 올리며 두 눈을 내리깐 채 손을 들어 살며시 자신의 볼을 톡톡 두드렸다.“고마워요, 누나.”기쁨으로 가득한 눈동자의 민지훈이 고개를 숙였다. 뜨거운 민지훈의
하지만 지금 민지훈이 온하랑에 대한 감정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커진 모양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온하랑은 민지훈을 이용하는 데 자연스레 죄책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진실을 마주할 민지훈을 어떻게 봐야 할지 막막했다.“누나, 더 먹을래요?”민지훈은 이미 비어버린 온하랑의 앞접시를 보며 물었다.온하랑은 포크를 내려놓고 대답했다.“괜찮아요. 많이 먹으면 물려서요.”“그럼 이제 갈까요? 아직 시간도 이른데 한강에 가서 산책이나 하죠.”민지훈이 웃으며 물었다.온하랑은 민지훈이 지금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자신과 헤어지기 싫어한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온하랑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좋아요.”두 사람은 이내 주차장으로 향했다. 민지훈이 자연스레 운전석으로 몸을 옮겼다.“누나, 저 면허 땄어요. 운전은 제가 할게요.”온하랑은 차 키를 건네주며 조수석에 앉았다.히터를 틀자 차 내부는 이내 따뜻해졌다.온하랑은 카시트 등받이에 몸을 기대 창밖으로 휙휙 스쳐 가는 길거리의 풍경을 바라보았다.민지훈은 운전에 집중하고 있었다.조금 전, 사귀기로 한 사람들답지 않게 차를 타고 가는 내내 아무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마치 갑자기 좁혀진 둘 사이의 거리가 아직 적응되지 않는 모양이었다.한참이 지나 차가 신호등에 걸리고 나서야 민지훈이 별안간 입을 열어 물었다.“누나, 제 인스타에 우리 사귀는 거 공개해도 돼요?”온하랑은 잠시 진지하게 생각하더니 이내 공식 석상에서나 쓸법한 말투로 대답했다.“되긴 되는데 아저씨나 아주머니 같은 어르신분들에게는 안 보이게 해줄 수 있을까요? 우선 그분들한텐 알리고 싶지 않아요. 아, 그리고 인스타 팔로워들한테 우리 사이를 사이버 렉카들한테 몰래 알리지 말아 달라고 잘 얘기 해줬으면 좋겠어요. 난 내 사생활이 알려지는 게 싫거든요.”부승민의 전 아내로서 어느 정도의 사이버 영향력을 지니고 있던 온하랑이였기 하는 말이었다.온하랑은 일부 사이버 렉카들이 조회 수와 어그로를 위해 민지훈과의 관계를 폭로해 민성주
민지훈은 약속대로 부모님을 포함한 어른들에게 게시글을 숨겼다. 그들이 두 사람이 사귄다는 것을 알고 여기저기 떠드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까지는 굳이 숨기지 않았다. 숨기고 싶지도 않았다. 인스타 계정을 만들고 인스타 팔로워까지 만든 목적부터 친구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서였으니까.인스타 피드를 올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들, 동창들, 동기들 모두가 축하의 댓글을 달았다.그중에는 부현승의 댓글도 눈에 띄었다.“오랫동안 사귀길.”그 밑에 민지훈이 답글을 달았다.“감사합니다. 부 매니저님.”뒤이어 부현승은 민지훈의 인스타 피드 게시물을 캡처해 부승민에게 보내주었다.부승민은 서로 다른 두 손이 손깍지를 꼭 끼고 있는 휴대전화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초점을 잃은 심연 같은 검은 눈동자는 끝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공허했다.사진 속의 하얗고 가는 손은 누가 봐도 여자의 손이었다.온하랑과 무려 3년 동안의 결혼생활을 한 부승민인데 온하랑의 손을 못 알아볼 리 없었다.부현승은 친절하게도 밑에 자신이 단 댓글과 민지훈의 답글까지 함께 캡처해 부승민에게 보내주었다.인스타 피드에는 이모티콘 하나와 사진 한 장뿐이었지만 댓글 창에 있는 많은 축복의 말들과 민지훈의 반응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건 지금 공개연애를 암시하는 인스타 게시물이었다.휴대전화를 쥐고 있던 큰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손등에는 핏줄까지 울퉁불퉁 솟아있었다. 부승민의 평온한 표정과는 달리 눈빛에는 어둡고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몸속의 야수가 봉인에서 깨어나 미친 듯 포효하며 당장이라고 민지훈을 찢어 죽일 기세로 날뛰고 있었다.온하랑! 참 잘하는 짓이다!어제 온하랑은 이미 부승민의 고백에 응하며 더는 그와 일부러 멀어지지 않겠다 약속했다. 민지훈과 부승민의 공평한 경쟁을 허락한 것이다.하지만 오늘, 온하랑은 부승민이 추서윤을 대하는 방식에서 부승민이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그래놓고 오늘 밤, 온하랑은 민
온하랑은 그런 부시아를 차마 깨울 수 없었다.그녀는 손을 뻗어 부시아의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볼을 콕콕 질렀다. 아이의 볼은 마치 갓 태어난 갓난 아기의 엉덩이처럼 탱글탱글 했다.뻗었다 손을 거두자 온하랑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뒤에 있던 사람과 부딪혔다. 그녀는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언제 왔는지 모를 부승민이 온하랑의 뒤에 서서 눈도 깜빡 하지 않고 그녀를 쳐다 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한 방울 의 먹물이라도 흘러 나올 듯 새까맸다.둘의 시선이 공중에서 얽히자 온하랑은 귀신이라도 본 듯 등골이 오싹해져 무의식적으로 침을 꿀꺽 삼키며 간신히 평정심을 되찾았다.“부승민? 왜 이렇게 기척도 없이 와?”“네가 너무 집중해서 못 느꼈을 뿐이야.”“그래?”“응.”온하랑은 오늘 밤의 부승민에게 어딘가 모르게 음산한 기운이 감도는 것 같았다.하지만 온하랑은 별로 개의치 않고 그저 부시아를 빨리 깨워 이곳을 떠날 준비를 했다.“시…”입을 여는 순간, 온하랑은 순간적으로 목덜미에서 전해져오는 고통을 느끼고는 이내 머릿속이 하얘 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눈앞이 새까매지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부승민은 정신을 잃은 온하랑을 받아 안은 채 우아하고 매혹적인 그녀의 얼굴을 홀린 듯 멍하니 바라보았다.부승민은 천천히 몸을 숙여 온하랑의 눈썹 위로 가볍에 입을 맞추고는 작게 속삭였다.“하랑아, 내 탓 하지 마…”…더원파크힐.정원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엔진 소리에 집 안에 있던 아주머니가 밖으로 나왔다.“대표님, 병원에 계신 거 아니셨어요? 왜 지금 돌아오세요?”손자도 이미 상태가 많이 호전 된 상태였고 또한 부승민이 위 출혈로 입원해 수술을 받아야 하는 상황임 알고 있었던 아주머니였기에 일부러 이틀이나 일찍 돌아온 것이었다. 그녀는 내일 당장 병원을 찾아 부승민의 병문안을 가기로 계획하고 있었다. 부승민은 운전석 문을 닫고, 조수석으로 가 정신을 잃은 온하랑을 안고 나왔다.“시아는 뒷좌석에서 잠들어버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