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승민은 부끄러워하는 온하랑의 모습에 피식 웃고 말았다.“일단 물 마셔. 가스가 나오면 아주머니한테 말씀드리고.”온하랑이 황은숙이 준비해 두었던 미지근한 물을 마시고 있을 때, 부승민은 병원 사이트에 들어가서 인큐베이터 동영상을 찾아보았다.“하량아, 이거 봐봐.”화면 속 모습은 사진 속 모습처럼 손을 들고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화면에서는 시간도 볼 수 있었고, 아이가 숨을 쉬고 있는지 수시로 확인할 수 있었다.“좋네요.’온하랑은 화면 속 작은 몸집에 작은 손발, 포동포동한 팔다리를 하고 있는 녀석의 모습에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 느낌이었다.“계속 보고있어도 돼. 몸을 뒤집거나 우유 마시는 모습도 볼 수 있을 거야.”“아이패드 가져왔어요? 아이패드로 보게요.”부승민은 가방에서 아이패드를 꺼내 병원 사이트로 들어가서 다시 동영상을 켜놓았다.녀석이 아직 움직이지도 않는데 보고만 있어도 힐링 되는 느낌이었다.몇 분 뒤, 녀석이 입을 오므리더니 고양이처럼 기지개를 켜는 것이다.“이거 봐봐요. 얼마나 귀여워요.”온하랑은 마음이 사르륵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귀엽네.”온하랑은 고개돌려 부승민을 쳐다보았다.“어제 잘 못 잔 거 아니에요? 좀 자다 올래요?”“아니. 여기서 함께 있을 거야.”“그래도 좀 쉬어요. 저녁이면 아주머니랑 바통 터치해야죠.”부승민은 잠깐 고민하더니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 장 비서. 베이비시터 좀 알아봐. 경험이 풍부하고 인성이 좋은 분으로. 월급은 상관없어. 최대한 빨리. 오후면 바로 오실 수 있게.”부승민은 전화를 끊자마자 온하랑을 쳐다보았다.“이러면 됐지?”온하랑은 할 말을 잃었다.“이거 무슨 냄새에요?”온하랑은 코를 킁킁거리면서 어디서 나는 냄새인지 물었다.“아주머니, 지금 뭘 끓이고 계세요?”“어죽이요...”아주머니는 뚜껑을 열어 휘젓고 있었다.“식사하실 수 있을 때 바로 드시게 미리 끓여놓는 거예요. 어죽이 몸에 좋아요.”“참 생각이 깊으시네요.”“그럼요.”황은숙이 뿌듯해
“잘 모르겠어요.”온하랑은 망설이고 있었다.“열 달을 채워서 출산할 줄 알고 모유 수유하지 않으려고 했는데...”“아이가 일찍 태어날 줄 몰랐죠?”“네.”온하랑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면 아이 면역력이 좋아질 수 있도록 첫 달은 모유 수유하는 것을 추천해 드려요. 어차피 산후 조리하셔야 하잖아요. 일에도 지장이 없으니 한 달 후에 단유하시는 것을 추천해 드려요.”온하랑은 잠깐 고민해 보더니 황은숙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어죽을 다 마시고 온하랑은 또 CCTV를 쳐다보았다.8시 반쯤, 의사 선생님이 간호사와 함께 회진을 돌면서 온하랑의 상처를 소독해 주고 거즈를 붙여주었다.의사 선생님과 간호사가 떠나고, 온하랑은 부승민과 황은숙을 쳐다보더니 말했다.“저... 화장실 가고 싶어요.”온하랑은 생각이 많아지기 시작했다.‘아직 수술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침대에서 내려갈 수 없는데 어떡하지? 성인 기저귀를 하고 그냥 침대에서 해결할까? 아니면 카테터를?’어떤 방법으로든 창피하기만 했다.똑같이 이런 상황은 처음인 부승민은 침묵 끝에 이렇게 말했다.“아니면... 내가 화장실까지 안아줄까?”“그럴 필요 없어요.”황은숙이 말했다.“자, 사모님. 제가 부축해 드릴 테니 천천히 걸어보세요.”“그래도 돼요?”“괜찮아요. 자.”황은숙은 한 손으로 온하랑의 어깨를 부축하고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저를 따라 천천히 돌아누우세요...”부승민도 옆에서 온하랑이 일서날 수 있게 등을 받쳐주었다.온하랑은 천천히 발을 바닥에 내려놓고 황은숙과 부승민의 부축하에 천천히 일어섰다.일어서니 훨씬 상쾌한 느낌이었다.온하랑은 천천히 걸어서 화장실로 향했다.부승민은 화장실 문 앞까지 함께했고, 온하랑은 황은숙과 함께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닫고는 천천히 변기에 앉았다.창피할 것도 없이 후다닥 해결하고는 아줌마와 함께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그래도 큰 신호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쓸 힘도 없었을 것이다.황은숙과 부승민은 다시 온하
[뭘 이렇게 많이 줘.][요 며칠 바빠서 그러는데 시간 나면 우리 양딸 보러 갈게.][나는 안 보고?][못생긴 사람은 안 봐.]점심 식사 시간, 온하랑은 그릇에 담겨있는 죽을 보더니 입을 삐쭉 내밀었다.이때 부승민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두 날만 참아. 나중에 아주머니가 맛있는 걸 해주실 거야.”“오빠 밥은 맛있어 보이네요?”“켁...”사레에 들린 부승민은 황은숙을 힐끔 보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생각해 봐. 이걸 먹으면 소화하고 나서...”온하랑은 바로 그의 입을 막았다.“그만 해요! 죽 먹으면 될 거 아니에요!”오후. 장 비서가 베이비시터 한 명을 보내왔다. 자기 와이프가 출산할 때 모셨던 베이비시터라면서 책임감도 넘치고 경험도 있으신 분이라고 했다. 마침 시간이 돼서 소개받고 온 것이다.부승민은 베이비시터 유정화와 어느정도 이야기를 해보고는 계약하기로 했다. 이제부터 황은숙과 유정화가 번걸아 가면서 온하랑을 돌보기로 했다.온하랑은 심심했는지 또 아이패드를 쳐다보았다.잠에서 깨어난 녀석은 기지개를 켜더니 배고픈지 울기 시작했다.온하랑은 마음이 찢기는 듯했다.“왜 우는 거예요? 배고파서 우는 거예요?”부승민은 그녀의 옆에서 함께 아이패드를 쳐다보고 있었다.“걱정하지 마. 간호사분이 잘 돌봐주실 거야.”말이 끝나자마자 화면 속에 간호사분이 나타났다.녀석이 배고파서 우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예 분유를 타왔다. 한 손으로는 녀석의 목을 받쳐주고 한 손으로는 젖병을 입에 물렸다.눈을 감고 있던 녀석은 분유 냄새를 맡고 본능적으로 울음을 멈추고 젖병을 빨기 시작했다. 두 손은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온하랑은 또 한 번 마음이 사르륵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유정화도 CCTV 속 아이 울음소리를 듣고 웃으면서 말했다.“아이 울음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는 것이 그래도 발육이 잘됐나 봐요.”온하랑은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그런데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는지 진지하게 말했다.“오빠.”“응?”“우리 애가 나중에 크면
뒤따라 들어온 안문희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사모님이 출산했다는 소식을 듣고 어찌나 오고 싶어 하던지. 하원하자마자 이쪽으로 왔어요.” 부시아는 주위를 둘러보며 부승민에게 인사를 하고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빠, 숙모, 동생은요?” 부승민은 손을 뻗어 아이패드를 건네주며 말했다. “동생 여기 있어. 이쪽으로 와봐.” “엄청 작아요.” 부시아는 침대에 기대며 아이패드 화면을 쳐다봤다. “그런데 왜 상자 안에 있어요?” “동생이 너무 빨리 태어나서 지금 잠깐 상자 속에 있는 거야. 여기에 있어야 더 잘 자랄 수 있거든.” 부시아는 알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언제 나와요?” “두 달 정도 있어야 돼.” “네? 그렇게 오래요?” 부시아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시간 금방 지나갈 거야. 시아 아직 밥 안 먹었지? 이따가 아빠랑 같이 밥 먹자.” “네.” 부시아는 가방을 소파에 내려놓고 짧은 다리로 침대 옆으로 달려가 작은 얼굴을 삐쭉 내밀었다. “숙모, 약 드시는 거예요?” “아니. 이건 어탕이야. 시아도 먹어볼래?” “네.” 부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 맛있을 것 같아요.” “아주머니한테 한 그릇 떠달라고 해.” “알겠습니다.” 병실에 주방용품이 많지 않아 부승민과 베이비시터는 배달 음식을 시켰다. 저녁을 먹은 후, 부시아는 가기 싫은지 아쉬운 표정을 짓더니 마지못해 안문희를 따라 떠났다. 황은숙도 퇴근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정화가 출근했다. 수술 둘째 날, 주현이 선물을 한가득 가지고 온하랑 보러 찾아왔다. 셋째 날, 온하랑의 몸과 정신이 눈에 띄게 회복되었다. 부승민이 이미 조산 소식을 할머니와 둘째 이모에게 알린 터라 그들도 온하랑을 만나러 부랴부랴 병원으로 달려왔다. 수다를 한참 떨다가 모니터를 통해 아이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점차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었던 온하랑은 최대한 많이 걸어 다녔고 저녁 식사 후에는 부승민의 부축을 받으며 복도를 산책했다. 병실로 돌아온 후, 부승민
2분 뒤 부승민이 수건을 들고 화장실에서 나왔다. 온하랑과 눈이 마주친 그는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마사지하기 전에 온찜질을 하는 게 좋대.” “생각보다 능숙한데?” 부승민은 가볍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수건을 온하랑에게 건네주고선 큰 손을 뻗어 천천히 그녀의 잠옷 단추를 풀었다. 그 후 따뜻한 수건으로 찜질했고 잠깐 사이에 온하랑은 가슴이 부어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부승민이 지켜보고 있으니 기분도 묘했다. “얼마동안 해야 돼?” “십분.” 그 말을 끝으로 부승민은 다시 화장실로 가서 따뜻한 수건 하나를 더 가지고 나왔다. 그렇게 두 수건을 맞바꾸며 찜질을 했다. 10분 후, 수건을 거두었다. 뭉친 열기가 순식간에 사라지자 으슬으슬한 서늘함이 찾아왔다. “조금 춥네? 이불 덮을래.” 온하랑은 이불을 끌어당기며 태연하게 말했다. “이러면 마사지가 잘 안돼.” 부승민은 푹신한 담요를 두 번 접어 온하랑에게 덮어주었다. “그럼... 시작할게.” “응...” 그는 담요 밑으로 손을 뻗어 엄지손가락을 위로 세운뒤 네 손가락으로 가볍게 주물 었다. “아주머니가 가장자리부터 시작해서 적당한 힘으로 천천히 눌러야 된다고 했어.” 부승민의 움직임에 따라 담요도 오르락내리락했다. 시선이 마주치자 모호한 분위기가 병실 안을 가득 채웠다. “말하지 마.” “아주머니가 이렇게 열 번 반복하면 된대. 하루에는 적어도 두세 번은 해야 한다고...” “말하지 말고 그냥 해.” “느낌이 어때?” “조금 이상해.” “어떻게 이상한데?” “부어오르는 느낌이랄까?” 온하랑은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맞아. 그런 느낌이래. 금방 나오겠는데? 이번이 열 번째야. 됐어.” “끝난 거야?” “그리고...” 부승민은 손가락을 살살 비틀며 말했다. “이렇게 유방을 자극하면 모유가 훨씬 더 많이 나온댔어.” “그게... 사실이야? 네가 지어낸 건 아니지?” 온하랑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못 믿겠으면 직접 아주머니한테
부승민은 젖병을 손에 들고 생각에 잠겼다. “손바닥만 한 애가 이걸 다 마실 수 있을까?” 온하랑은 그 질문에 헛웃음이 나왔다. “남기면 간호사가 따로 보관하니까 이상한 걱정 좀 하지 마.” 부승민은 웃으며 답했다. “보통은 아이가 분유에 적응할 수 있게 간호사들이 모유랑 번갈아 가면서 먹이잖아. 그럼 너무 낭비 아닌가?” 온하랑은 눈살을 찌푸렸다. “모유를 냉장 보관하면 3,4개월까지 가능해.”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온하랑은 단번에 알아챘다. “아... 그렇구나.” 부승민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쉽네.” “부승민!” “알았어. 지금 바로 주고 올게.” 얼마 지나지 않아 부승민은 병실로 돌아왔고 온하랑은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놀고 있었다. 이를 본 부승민은 노트북을 꺼내 소파에 앉아 업무를 보았다. 그러던 중 노트북 바로 옆에 놓인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부승민은 화면을 한번 들여다보고는 침대에 있는 온하랑을 바라봤다. 그 시각 온하랑은 두 손으로 핸드폰을 쥔 채 초집중했는데 반응만 봤을 땐 카톡을 보낸 사람이 온하랑은 아닌듯했다. ‘바로 앞에 있는데 그냥 말하면 될걸 왜 카톡을 보내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 모습은 뭔가 재밌는 내용을 공유한 것 같지도 않았다. 부승민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핸드폰을 들어 카톡을 클릭했다. 아니나 다를까 온하랑이 보내온 메시지였는데 고작 세 글자가 담겨있었다. [맛있어?] 앞뒤 주어를 잘랐지만 부승민은 그녀가 무엇을 묻고 있는지 알았다. [응. 또 먹고 싶어.] 메시지를 전송한 후 부승민은 고개를 들어 온하랑을 바라봤다. 여전히 핸드폰 화면만 응시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귀는 점점 빨개졌다. 온하랑은 타이핑을 하는 듯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 행동에 부승민은 다시 핸드폰을 바라봤고 곧이어 카톡 알림 창이 떠올랐다. [내가 인터넷을 찾아봤는데 비릿한 맛이래.] [살짝 비리긴 한데 맛있어.] 부승민은 그 맛을 다시 한번 되뇌었다. 카톡
병실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유정화는 온하랑과 부승민을 번갈아보며 눈치를 살폈다. 한 명은 핸드폰, 다른 한 명은 노트북. 서로에게 관심이 없는 듯 그 어떤 대화도 주고받지 않았다. 유정화가 병실에 들어온 이후로 부승민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두 분... 싸웠나?’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지만 나설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기에 침묵을 택했다. 따지고 보면 온하랑의 산후조리를 돌봐주기 위해 이곳에 왔고, 산후조리가 끝나는 동시에 계약도 종료이니 굳이 이런 일에 끼어들 필요가 없다. 유정화는 알지 못했다. 부승민의 노트북 화면은 온하랑과의 채팅창에 멈춰있다는 것을. [읽씹? 왜 갑자기 답장 안 해.] 답장할 생각이 없었던 온하랑은 실수로 메시지를 눌렀고 ‘1’이 사라지니 답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딱히 할 말이 없는데?] [맛볼 기회가 또 있을까?] [나중에 모유 짜내면 먹던가...] [그럼 그 맛이 안 날 텐데?] 콜록. 온하랑의 기침소리가 병실 안의 정적을 깨뜨렸다. 그녀는 목을 가다듬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부승민을 바라봤다. “시간도 늦었는데 얼른 들어가서 쉬어.” “응?” 부승민은 고개를 들고선 희미롭다는 듯이 온하랑을 바라봤다. “이제 몸도 많이 좋아졌고 아주머니가 항상 곁에 있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회사도 며칠이나 비웠잖아. 푹 쉬고 출근해서 일 봐야지.” ‘지금 날 쫓아내는 건가?’ “하랑아, 내일 토요일이야. 난 며칠 더 같이 있고 싶은데? 일은 여기서 해도 돼.” “평소 토요일에도 출근했잖아? 얼른 일해서 우리 아이 분유값 벌어야지. 그리고 겸사겸사 인테리어 공사가 잘되는지도 확인해 줘.” 이때 유정화가 입을 열었다. “대표님, 여긴 저한테 맡기시고 들어가세요.” 사실 유정화는 부승민이 병실에 있는 게 많이 불편했다. “알겠어요.” 부승민은 마지못해 한발 물러섰다. “퇴근하고 보러 올게.” “응.” 부승민은 대충 물건을 챙긴 뒤 노트북 가방을 들고 일어나며 아쉬운 눈빛을 보냈
부승민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렇게 몇 초간의 침묵이 흐른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아이랑 얘기는 해봤어? 성격은 어때?” “얘기를 해보려고 했는데... 경계심이 너무 심해서 아예 입을 열지 않습니다.” “양부모랑 협의해서 아이 데리고 와.” 온하랑과 약속한 게 있으니 절대 어길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후 핸드폰은 내려놓은 부승민은 착잡함에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한참을 고민한 뒤 차에 시동을 걸었다. 19층, 부시아는 거실에서 그림 숙제를 하고 있었다. 부승민이 안으로 들어오자 부시아는 활짝 웃으며 달려갔다. “아빠, 갑자기 왜 왔어요?” “내일 출근해야 돼서 일찍 들어왔어.” “토요일에도 출근을 하다니, 너무 불쌍하네요. 그럼 시아가 내일 병원에 가서 숙모랑 놀게요.” “그래.” “아빠, 어때요? 그림 엄청 잘 그렸죠?” 부시아는 펜을 내려놓고 칭찬해 달라는 표정으로 부승민에게 도화지를 내밀었다. 부승민은 그 모습이 귀여운지 웃으며 부시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호박을 그린 거야? 시아 엄청 대단하네.” “아빠... 이건 사과예요.” 부시아는 서운한 듯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렇게 못생겼어요?” “아니야... 아빠가 피곤해서 잘 안 보였어.” 부승민은 목을 가다듬고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시아야, 며칠 후에 남동생 한 명이 올 거야.” “여동생 아니에요?” “병원에는 있는 동생 말고, 시아랑 비슷한 나잇대의 남자아이가 올 거야.” 시아는 5월생이다. 온하랑의 기억에 따르면 그 아이는 6월 말에 태어났으니 부시아 보다 한 달 정도 어린 셈이다. 고작 한 달 차이밖에 나지 않았지만 사진 속의 모습을 봤을 땐 심각한 영양실조로 말라있어 적어도 한두 살은 어려 보였다. 부시아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누군데요?” “숙모의 아이인데 예전에 좀 힘들게 지내서 데려오기로 했어. 남동생이랑 잘 지낼 수 있지?” ‘숙모의 아이라면 아빠의 아이가 아니라는 뜻인가?’ ‘그럼 나랑 똑같네? 난
온하랑은 쪼그리고 앉아 메이슨을 똑바로 바라보았다.“메이슨은 경주에 집이 있기에 낯선 강남시에 가고 싶지 않은 거잖아? 마찬가지로 엄마에게도 이곳은 낯선 곳이야, 엄마의 집은 강남시에 있어.”슬퍼하는 메이슨을 온하랑은 계속 달래주었다.“앞으로 엄마가 메이슨 보러 자주 올게. 메이슨도 엄마가 보고 싶으면 강남시에 찾아와도 돼.”그녀가 조산을 앞두고 있을 당시 부승민이 보낸 사람들이 한발 늦은 탓에 먼저 메이슨을 데려간 최동철이 각종 절차를 밟아 양육권을 가졌고 그 사이 메이슨도 이미 이곳에 적응해 버렸다.최동철은 온갖 정성을 쏟아서 메이슨을 돌봤으며 마음이 예민하고 내성적이었던 그는생활환경을 자주 바꿀 수 없으므로 여기에 머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메이슨은 의기소침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온하랑은 그의 주의력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이모가 만들었던 쿠키를 기억해? 엄마가 메이슨이 도움이 필요한데 함께 만들 수 있을까? 아빠가 돌아오시면 메이슨의 솜씨가 어떤지 맛보라고 하자.”기분이 언짢았던 메이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쿠키를 만들기 시작하자 곰돌이 모양의 틀로 반죽을 찍던 그는 천천히 빠져들기 시작했다.쿠키를 만들던 중 온하랑은 부승민의 전화를 받았다.그가 물었다.“출발했어?”“아니, 깜빡했어. 아까 최 회장님 다녀가셨는데 동철 오빠의 소식이 있다고 하셨어.이틀 더 머물다 그가 돌아오면 돌아갈게.”부승민은 몇 초간 침묵을 이어갔다.그가 기분이 언짢다고만 생각한 온하랑은 웃으면서 말했다.“며칠인데 못 기다리겠어?”“아니.”부승민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혹시 우현 씨 핸드폰을 훔쳤던 사람을 기억하고 있어?”“응, 기억해.”바로 서우현이 그 남자를 찾았고 그의 입에서 메이슨의 신분을 알게 되었다.온하랑은 식탁에서 쿠키를 열심히 만들고 있는 메이슨을 바라보았다.“그가 왜?”“줄곧 그가 나타난 것이 좀 이상하다고 의심하고 있었던 터라 사적으로 사람을 시켜 그를 찾으라고 했는데 며칠 전 그를 찾아서 잡고 심문하니 진
최국환의 말을 들은 온하랑은 멈칫했다.“최 회장님, 약속드릴 수 없습니다. 메이슨은 상황이 특별하기에 반드시 진심으로 그를 아껴주고 사랑해 주는 가족이 옆에서 보살펴 주어야 합니다.”‘동철 씨와 줄곧 사이가 좋지 않았던 최 회장님은 정성껏 메이슨을 보살필 수 있을까?’게다가 최씨 가문에는 임가희가 있기 때문에 온하랑은 그녀가 메이슨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최동림의 후계자 계승을 위하여 걸림돌인 그를 해칠 수 있다고 예측했다.메이슨은 최동림보다 두세 살 어렸다.“동철이가 현재 실종되었기에 나의 손자인 메이슨을 내가 반드시 잘 돌볼 거야. 이미 결정된 일이야. 하랑이 너랑 상의하려고 온 거 아니야.”최국환의 목소리는 무거웠다.온하랑이 엄마라는 점을 고려해 그가 직접 온 것이었다. 아니면 경호원더러 메이슨을 데려오라고 했을 것이다.온하랑은 최국환이 끝까지 막으면 그와 메이슨은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그렇다면 최 회장님께서 메이슨을 위하여 저의 몇 가지 조건을 들어주셨으면 합니다.”“말해봐.”“첫째, 제가 떠난 후 메이슨을 최씨 가문에 데려가서 아줌마와 미아 선생님이 계속 돌보게 해주세요. 최 회장님께서는 매일 시간을 내셔서 메이슨의 학습 상황을 물어봐 주세요.”온하랑이 없는 상황에서 최국환은 메이슨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언젠가 임가희는 메이슨의 존재를 알게 될 것이기에 최국환의 옆에 둔다면 그녀는 자신의 명성을 위해서 섣불리 나서지 못할 것이다.메이슨이 계속 별장에 머물면 아줌마와 미아 선생님은 권력과 힘이 없기에 마음대로 할 수가 없을 것이며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그를 노릴 기회를 줄 수 있다.온하랑의 말을 들은 최국환은 머리를 끄덕였다.그는 메이슨을 옆에 두고 잘 가르칠 생각이었다. 만약 좋은 후계자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고 반대로 그가 자질이 평범해도 최국환은 그를 키울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잠시 후 최국환의 핸드폰이 울렸다.“잠깐만. 먼저 통화 좀 할게.”“네, 최 회장님. 편안한 대로 하세요.”통화 중
설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그를 바라보았다.“...네.”설윤의 쓸쓸한 모습을 본 최동철은 그녀에게 물었다.“함께 갈래요?”설윤은 돈을 좋아하기에 그도 그녀에게 많은 돈을 줄 수 있었다.그러나 설윤은 고개를 흔들었다.“아니요, 저 여기 더 있고 싶어요.”최동철은 눈살을 찌푸렸다.“그럼, 나중에는?”“나중에? 그때 다시 얘기해요.”설윤은 덤덤하게 말했다.“어차피 저 혼자예요. 저만 신경 쓰면 돼요.”최동철은 평온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최동철이 떠난 후 자신을 구해준 설윤에게 보답의 의미로 많은 금액의 돈을 송금해 주었다....회사에 처리할 일이 많았던 부승민은 첨단 연구소에서 스카우트한 사람들과 함께 강남시로 돌아갔다.경주에 며칠 더 머무른 온하랑은 여전히 최동철의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그녀는 최동철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오랫동안 경주에 머물렀던 온하랑은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 메이슨을 데리고 강남시로 돌아가려고 했다.만약 최동철이 돌아온다면 온하랑은 메이슨을 다시 데려오면 되고 그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그녀가 메이슨의 유일한 보호자이다.아줌마에게 메이슨의 짐을 정리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하던 중 별장에 불청객이 찾아왔다.거실에서 아줌마가 짐 정리하는 것을 지켜보던 메이슨은 최국환이 사람을 데리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바로 온하랑의 뒤로 숨어버렸다.“최 회장님, 어떻게 오셨어요?”최국환을 본 온하랑도 깜짝 놀랐다.“하랑아, 미리 약속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 미안해.”최국환은 온하랑 뒤에 숨은 메이슨과 땅에 놓인 캐리어를 보고 물었다.“메이슨을 데리고 강남시로 돌아간다고?”그는 오래전부터 메이슨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네, 맞아요. 동철 오빠가 돌아오기 전에 제가 메이슨을 강남시로 데려가 돌보려고 해요.”온하랑이 대답했다.“승민이는 동의한 거야?”온하랑은 머리를 끄덕였다.“혹시 어떤 일로 찾아오셨어요?”그녀는 눈길로 아줌마에게 먼저 메이슨을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가
“설윤 씨, 일어났어요?”최동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소리에 따라 고개를 돌린 설윤은 최동철과 눈이 마주쳤다.최동철은 웃으면서 말했다.“일어났으면 와서 아침을 먹어요.”최동철은 이미 건조된 설윤의 옷을 가져왔다.“네.”설윤은 베갯머리에 두었던 핸드폰을 보고 열 시가 넘었음을 확인했다.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그녀는 이불로 가슴을 가리고 이불 밑에서 속옷을 찾아 천천히 입었다.최동철은 쓰레기통을 옆으로 걷어차고 설윤에게 칫솔 컵과 치약을 묻힌 칫솔을 건네주고는 그녀가 이를 닦은 후 따뜻한 수건도 건네주었다.서로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던 두 사람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 누구도 어젯밤 일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다.아침을 먹은 후 발목 찜질을 한 설윤은 이곳에서 며칠 더 머무를 수 있다는 생각에 쿠팡에서 옷을 구매하려고 했다. 집 앞까지 다음날 배송될 수가 있기에 아주 편리했다.옷을 몇 벌 고른 설윤은 소파에 앉아 있던 최동철을 보며 물었다.“최 대표님, 제가 쿠팡에서 옷을 구매하면 내일 도착하는데, 혹시 대표님도 필요하신가요?”조건이 우월한 최동철과 같은 귀공자는 사람을 시켜 필요한 물건을 살 수 있었기에 온라인으로 쇼핑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그녀의 말을 들은 최동철은 머리를 끄덕였다.“갈아입을 옷 두 벌만 골라주세요, 부탁드려요.”구체적인 요구는 없었다.“네, 알았어요.”머리를 끄덕인 설윤은 남성 의상을 검색하며 물었다.“사이즈는 얼마 입어요?”“신장은 185, 몸무게는 75킬로로예요.”“네.”설윤은 최동철이 말한 사이즈에 따라 내의 한 벌과 니트 및 팬티 두 벌을 고르고는 그에게 말해주었다.최동철은 설윤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말을 마친 후 방안은 조용하기만 했다.오후쯤 부하의 전화를 받은 최동철은 통화 중 계획 하나를 언급했으나 설윤은 이해하지 못했고 자신과 관련이 없기에 신경 쓰지도 않았다.저녁이 되자 설윤은 샤워 후 침대에 누웠다.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눈을 뜬 그녀는 최동철이 그의
방안은 어두웠고 쥐죽은 듯 조용했으며 가끔 바깥 거리에서 들려오는 기적 소리만 들렸다.설윤이 네 번째로 몸을 뒤척일 때 옆에서 최동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잠이 안 와요?”낮고 유혹적인 목소리가 깊은 밤의 정적을 뚫고 그녀의 고막을 가볍게 두드렸다.“... 네, 동철 씨도 잠이 안 와요?”“네.”최동철은 낮은 소리로 대답했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실내는 다시 조용해졌고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집안의 난방이 너무 커서인지 설윤은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다치지 않은 발목으로 이불을 걷어차며 팔을 이불 밖으로 내밀었는데 조심하지 않고 최동철이 밖에 놓은 팔과 부딪혔다.피부가 닿는 순간 설윤은 재빨리 팔을 비켰으나 뜻밖에도 최동철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떠나지 못하게 했다.그의 손은 매우 컸다. 뜨거운 온도가 그녀의 몸에 닿는 순간 그 뜨거운 열기가 서서히 얼굴에 퍼지며 설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설윤은 머뭇거리다가 그의 손에서 손목을 빼려고 힘을 썼지만 실패했다.“뭐 하는 거예요?”“보통 운동 후에 몸이 피곤해서 잠이 잘 오는데, 한 번 시도해 보겠어요?”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둠 속에서 그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설윤은 그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치 아침에 무엇을 먹을지 묻는 것 같았다.몇 초 동안 머뭇거리다가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네.”그 목소리는 깃털처럼 가벼워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았다.그녀의 대답은 마치 닫힌 문을 여는 열쇠처럼 들렸다. 최동철은 그녀의 팔을 풀어주었는데 그녀가 손을 거둘 때 신속히 이불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남자는 공격적인 기운을 풍기며 달려들어 순식간에 그녀를 덮쳤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또 겁이 났다.그녀는 숨을 죽이고 손끝을 그의 가슴에 떨어뜨린 채 천천히 위로 거슬러 올라가 어깨에 놓았다.“... 몸에 상처가 있는데 그럼...”“조심할게요.”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두 눈이 마주쳤다.서로의 눈 밑에는 빛을 볼 수
설윤이 차례로 밖에 씌워져 있는 랩과 붕대를 제거하니 몇 바늘 꿰맨 상처가 드러났다.그녀는 알코올로 주변을 부드럽게 닦은 후 다시 연고를 꺼내 면봉으로 고르게 발랐다.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드러난 옆모습은 매끄러운 얼굴 라인을 자랑했다. 아마 스무 살 어린 나이어서인지 볼에는 젖살이 있어 통통했고 피부는 희고 섬세해서 모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거즈를 몇 바퀴 두른 후 설윤은 나비 모양으로 매듭을 지었다.“다 됐어요.”“고마워요.”“별말씀을요.”설윤은 자신의 발목을 내려다보았다.“난 샤워하러 가고 싶어요. 욕실에 걸상 하나 놔줄 수 있어요?”최동철은 몸을 일으켜 동그란 걸상을 들고 화장실로 갔다. 다시 나오면서 그는 다치지 않은 팔을 내밀려 말했다.“부축해 줄게요.”설윤은 느릿느릿 침대로 옮겨 한 손을 그의 팔에 얹고는 다치지 않은 발을 먼저 땅에 대고는 절뚝거리며 화장실로 갔다.그녀를 안쪽 욕실로 데려다준 후 최동철은 샴푸 등을 욕실 벽에 있는 선반 위에 놓아주고는 밖으로 나가며 문을 닫아 주었다.설윤은 느릿느릿 옷을 벗었다. 속옷은 팬티는 이거 하나밖에 없었다. 빨면 곧 마를 수 있겠지만 마르기 전에는 그저...이틀 전에는 혼자 살아서 괜찮았지만 지금은 곁에 남자가 한 명 많아졌다.그러나 씻지 않으면 위생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두 장 더 사는 건데...’고민 끝에 설윤은 속옷을 빨았다. 다 빤 후 드라이어로 말리면 10분 정도면 다 마를 수 있었다.이때 설윤은 문득 최동철이 나왔을 때 머리를 말리지 않은 것이 떠올랐는데 보아하니 드라이어로 팬티를 말린 것 같았다.간단히 샤워를 마친 후 설윤은 팬티를 씻고 말린 후 간단히 머리도 말렸다. 그런후 속옷과 팬티를 입고 목욕 수건을 둘렀는데 다행히도 이 수건은 충분히 길어서 가슴부터 무릎까지 감쌀 수 있었다.이때 밖에서 문소리가 들렸다.“다 씻었어요?”“...네.”“그럼 제가 들어갈까요?”
그녀의 최근 행동을 보면 물질, 환경, 품질 등에 큰 요구가 없는 것 같다."물론이죠."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부잣집 도련님은 일반인에게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설윤은 회억에 잠겨 말했다.“제가 아주 어렸을 때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그때 이웃들이 그러는데 엄마 병은 고칠 수 있었지만 돈이 없어서 일찍 퇴원했기 때문에 병세를 끌어서 돌아갔다고 했어요.”엄마가 돌아간 후 집주인은 장례를 치러주고는 그녀를 보육원에 보냈다.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최동철은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미안해요.”그는 그녀의 신원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 문서에는 간단히 ‘6살 때 생모 병으로 사망’으로만 적혀있었다. 그녀의 입을 통해 들으니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괜찮아요. 다 지나갔어요.”설윤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혹시 동철 씨는 돈이 싫으세요?”최동철은 그녀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돈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왜 최국환과 임가희와 암투를 벌였을까?“돈은 나에게 있어 숫자일 뿐이죠. 어쩌면 우리가 다투는 것은 돈이 아니라 권력이에요. 더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권력이죠.”최동철이 덤덤하게 말했다.설윤은 아는 둥 마는 둥 고개를 끄덕였다. 호텔에서 최동철을 끌어들인 후 그는 주위를 살펴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처음으로 이렇게 허름한 곳에 왔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고 선택의 여지가 없어 참았을 뿐이다.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었을 뿐인데 겨울 날씨여서 그런지 금세 어두워졌다.저녁을 먹은 후 설윤은 또 얼음찜질하고 연고를 한 번 더 발랐다.발목 부기가 많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나는 것을 보아 최동철이 샤워를 하는 모양이다.며칠 동안 피해 살다가 드디어 안전하고 안정된 환경에 이르자 그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어깨에 부상이 났다고 설윤이 일깨워주었지만 최동철은 신경 쓰지 않고 랩으로 상처를 감싼 후 씻으러 갔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어젯밤에 본 화면이 떠올랐다.넓은 어깨와 가슴,
최동철은 잠시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그런데, 젊은이. 아내랑은 어떻게 알게 됐어? 정말 잘 어울리네.”둘 다 잘생기고 아름다웠으니까.“저희는... 대학 동기입니다.”“그래? 몰라보겠어. 아내는 참 어려 보이는데 벌써 스물여섯이라니.”최동철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네, 동안이라 자주 오해를 받습니다.”스물여섯은 설윤의 가짜 나이였다.집주인은 작은 양념병을 들고 나와 최동철에게 건넸고 우유 두 병도 함께 내주었다.돌아온 후, 최동철은 집주인 아주머니의 말을 설윤에게 전했다.설윤은 웃으며 말했다. “동철 씨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서로 잘 맞춰주니 완벽하네요.”최동철은 가볍게 웃으며 가스레인지의 밸브를 열었다.점심은 밥에 감자 볶음과 돼지고기였다.최동철의 요리 실력은 훌륭했다. 삼겹살을 바삭하게 볶아내 느끼함 없이 밥과 잘 어울렸다.다행히도 다친 쪽은 왼팔이라 오른손으로는 무리 없이 할 수 있었으나 속도는 다소 느렸다.식사 후, 설윤은 다시 한 번 발목에 냉찜질을 했다.냉찜질을 끝낸 후 최동철이 약을 가져오자 설윤이 말했다. “제가 할게요.”“그래요.” 최동철은 순순히 응했다. 한 손으로는 불편했으니까.바쁜 대도시의 일상에서 벗어나 외출할 수 없는 민박집 안, 두 사람은 갑자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설윤은 침대에 기대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고 최동철은 소파에 앉아 눈을 감은 채 잠시 멍하니 있었다.설윤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옆모습은 뚜렷한 이마선과 오똑한 콧대가 더해져 눈매가 깊어 보였고 날카로운 턱선이 또렷했다.정말 잘생겼다.그의 이목구비는 최국환과 약간 닮았다.하지만 나잇살이 들어 퉁퉁해진 최국환과는 달리 최동철은 참으로 젊었다. 눈빛 속에도 서른 살 남자의 단단함으로 가득했고 이는 세상 물정에 밝고 노련한 최국환과 완전 달랐다.잠시 머뭇거리던 설윤이 말했다. “동철 씨, 피곤하면 여기서 주무세요.”그의 키는 너무 커서 작은 소파에선 편히 쉴 수 없었다.설윤은 발목 부상
최동철은 약품이 담긴 봉지를 찾아 안에서 멍과 부기를 가라앉히는 연고를 꺼냈다. 고개를 돌리니, 설윤이 느릿느릿 신발을 벗고 있었다.그는 연고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그녀 앞에 쭈그려 앉았다. “내가 해줄게요.”신발과 양말을 벗자 뽀얗고 작은 발이 드러났다. 다섯 개의 발가락은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었고 동글동글 귀여웠다. 발톱은 깔끔한 곡선을 이루며 정리되어 있었으며 발등의 뼈선은 유려하게 흐르며 섬세한 곡선을 그렸다.발목 근처에는 큼직한 멍과 부기가 올라와 있었다.최동철은 그녀의 발바닥을 받쳐 들고 부은 부위를 살짝 눌러보았다.“앗...” 설윤이 숨을 들이마시며 얼굴을 찡그렸다.“아파요, 누르지 마세요.”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상태가 꽤 심각해 보이는데 내가 침대까지 옮겨줄 테니까 당분간은 움직이지 마요.”그렇게 말하며 일어나 그녀를 안으려 했다.“안 돼요!” 설윤은 급히 손으로 그를 막았다. “동철 씨도 팔 다쳤잖아요.”최동철은 몸을 숙여 다친 왼팔은 내리고 오른팔로 그녀의 다리 밑을 감싸 안았다. “두 손으로 내 목을 잡아요. 이쪽 팔은 힘을 쓰지 않을 거니까 안심해요.”한 손으로 안으려고?설윤은 그의 목에 양팔을 감고 조심스럽게 몸을 맡겼다.그는 오른팔로 그녀의 허벅지를 받치고 두 걸음 만에 침대 곁으로 가서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잠시만 기다려요. 집주인한테 얼음팩 좀 받아올게요.”“네.”최동철은 약 10분 뒤 얼음주머니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하나는 냉장고에 넣고 다른 하나는 그녀의 발목에 살며시 대주었다.얼음의 차가운 감촉에 설윤은 본능적으로 입술을 앙다물고 손으로 얼음주머니를 누르며 말했다.“너무 차가워요.”“20분은 찜질해야 해요. 하루에 세 번에서 네 번 정도로요.”설윤은 그에게 붕대를 가져와 얼음주머니와 발목을 단단히 감도록 했다.그녀는 침대 머리에 기대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우리 둘 다 밖에 나가지 말죠. 배달 앱으로 장을 보면 되니까요. 그런데 동철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