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실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유정화는 온하랑과 부승민을 번갈아보며 눈치를 살폈다. 한 명은 핸드폰, 다른 한 명은 노트북. 서로에게 관심이 없는 듯 그 어떤 대화도 주고받지 않았다. 유정화가 병실에 들어온 이후로 부승민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두 분... 싸웠나?’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지만 나설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기에 침묵을 택했다. 따지고 보면 온하랑의 산후조리를 돌봐주기 위해 이곳에 왔고, 산후조리가 끝나는 동시에 계약도 종료이니 굳이 이런 일에 끼어들 필요가 없다. 유정화는 알지 못했다. 부승민의 노트북 화면은 온하랑과의 채팅창에 멈춰있다는 것을. [읽씹? 왜 갑자기 답장 안 해.] 답장할 생각이 없었던 온하랑은 실수로 메시지를 눌렀고 ‘1’이 사라지니 답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딱히 할 말이 없는데?] [맛볼 기회가 또 있을까?] [나중에 모유 짜내면 먹던가...] [그럼 그 맛이 안 날 텐데?] 콜록. 온하랑의 기침소리가 병실 안의 정적을 깨뜨렸다. 그녀는 목을 가다듬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부승민을 바라봤다. “시간도 늦었는데 얼른 들어가서 쉬어.” “응?” 부승민은 고개를 들고선 희미롭다는 듯이 온하랑을 바라봤다. “이제 몸도 많이 좋아졌고 아주머니가 항상 곁에 있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회사도 며칠이나 비웠잖아. 푹 쉬고 출근해서 일 봐야지.” ‘지금 날 쫓아내는 건가?’ “하랑아, 내일 토요일이야. 난 며칠 더 같이 있고 싶은데? 일은 여기서 해도 돼.” “평소 토요일에도 출근했잖아? 얼른 일해서 우리 아이 분유값 벌어야지. 그리고 겸사겸사 인테리어 공사가 잘되는지도 확인해 줘.” 이때 유정화가 입을 열었다. “대표님, 여긴 저한테 맡기시고 들어가세요.” 사실 유정화는 부승민이 병실에 있는 게 많이 불편했다. “알겠어요.” 부승민은 마지못해 한발 물러섰다. “퇴근하고 보러 올게.” “응.” 부승민은 대충 물건을 챙긴 뒤 노트북 가방을 들고 일어나며 아쉬운 눈빛을 보냈
“환자분은 천성적으로 자궁벽이 얇은 편이라 태아의 위치가 정상이 아닐 가능성이 커요. 평소에 식단 조절 잘하고 운동도 빼먹지 마시고 항상 조심하는 게 좋아요.”의사가 말하면서 처방전을 작성하고 건네주었다.“자, 약 가지고 가세요.”“네, 감사합니다. 선생님.”온하랑은 처방전을 건네받고 천천히 일어섰다.이때, 의사가 한 마디 더 보탰다.“진짜 조심해야 해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가 큰일 날지도 몰라요.”자궁벽이 얇으면 유산하기 쉬웠다. 게다가 한 번 유산하면 다시 임신하지 못하는 임산부들이 대다수였다.“선생님, 감사합니다. 꼭 유의할게요.”온하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결혼 3년 차, 그녀만큼 아이의 탄생을 고대하는 사람도 없었기에 아이를 꼭 잘 지키겠다고 다짐했다.약을 받은 다음 온하랑은 병원에서 나와 차로 돌아갔다.기사가 시동을 걸고 백미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사모님, 도련님께서 오후 3시 비행기로 돌아오시는데 아직 20분 남았어요. 바로 공항으로 가실까요?”“네.”20분 뒤에 그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온하랑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떠올랐고, 마음속은 기대로 가득 찼다.부승민이 한 달 가까이 출장 중이라 그가 너무 보고 싶었다.그녀는 공항으로 가는 내내 가방에서 임신 확인서를 꺼내 몇 번이고 들여다보고는 손으로 아랫배를 살짝 감쌌다.이곳에 그녀와 부승민의 아이가 있으며 8개월만 기다리면 곧 태어난다.지금은 당장 이 기쁜 소식을 부승민에게 알려주고 싶은 마음뿐이다.공항에 도착하자 기사는 눈에 잘 띄는 곳에 차를 세웠다.“사모님, 도련님께 연락 한번 해보실래요?”온하랑은 시간을 확인하더니 부승민이 이미 비행기에서 내렸을 것으로 추정하고 전화를 걸었지만, 휴대폰이 꺼져있다는 안내음만 흘러나왔다.“비행기가 연착된 것 같으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봐요.”온하랑이 말했다.한참이 지나도 부승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온하랑은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여전히 통하지 않았다.“더 기다려봅시다.”비행기 연착은 워낙 흔
“응.”“술 마셨어?”“친구랑 조금 마셨어.”욕실에서 샤워하는 소리가 들리자 온하랑은 찡그린 얼굴로 뒤척이며 편히 잠들지 못했다.이내 침대가 푹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커다란 손이 그녀의 허리에 닿더니 우아한 곡선을 따라 점점 아래로 내려가며 만지작거렸다.“음... 오늘은 안 돼...”온하랑은 눈을 감고 비몽사몽인 채로 그를 밀어냈다.행여나 아이가 다칠까 봐 무의식적으로 걱정했다.큰 손이 우뚝 멈추더니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얼른 자.”졸음이 쏟아지는 탓에 그녀는 금세 잠이 들었다.아침에 일어난 온하랑의 곁에는 이미 온기가 사라지고 없었다. 단지 살짝 구겨진 침대 시트를 통해 어젯밤에 누군가 옆에 누워 있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그녀는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대체 어제 왜 바로 잠이 들었냐는 말이다.물론 오늘 말해도 상관없었다.온하랑은 재빨리 씻고 옷장으로 걸어가서 부승민이 입을 흰색 슈트를 골라주었다. 그리고 어쨌거나 임신은 경사스러운 일이라 밝은 톤의 스프라이트 넥타이를 골라 침대맡에 놓았다.아침 조깅을 마친 부승민은 홈웨어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고개를 들어 계단에서 내려오는 온하랑을 바라보며 손에 든 서류를 내려놓고 말했다.“밥 먹자.”아침 식사를 마치고 온하랑은 심호흡하더니 행복과 기대가 엿보이는 얼굴로 먼저 입을 열었다.“오빠한테 할 말이 있어.”둘 사이에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아마 부승민도 기뻐하겠지?“나도 할 말 있어.”부승민의 어조로 사뭇 가라앉았다.“그럼 오빠 먼저 해.”온하랑의 해맑은 미소에는 수줍음이 살짝 묻어났다.“온하랑, 우리... 이혼하자.”부승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에 놓인 서류를 집어 들고 건네주었다.“이건 이혼 합의서야. 우선 읽어보고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 최선을 다해 만족시켜 줄 테니까.”온하랑의 심장이 털컥 내려앉았고,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부승민을 멍하니 바라봤다.이내 머릿속이 새하얘지면서 혹시 잘못 들은 건 아니냐는 의심마저 들었다.한참이
3년 동안 두 사람의 사이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여느 평범한 부부와 다를 바 없었다.매일 아침 온하랑은 그의 슈트와 넥타이를 고르고, 함께 집을 나서 사무실로 출근했다.저녁 약속이 있을 때면 미리 알려주고, 취침 전에 루틴대로 스트레칭하고 샤워도 같이했다. 그리고 하루도 빼먹지 않고 하는 굿나잇 키스도 있었다.결혼기념일이나 밸런타인데이, 생일 선물도 놓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그녀가 원하는 게 무엇이든 부승민은 전부 다 들어줬다.로맨틱함은 물론 이벤트까지 챙겨주지 않았는가?그는 완벽한 남편으로서 해야 할 일은 다 했다.심지어 앞으로 이렇게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는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하지만 추서윤이 돌아온 이상 모든 걸 끝내야 하는 시점이 다가왔다.그렇다면 어제 휴대폰에서 들려왔던 여자 목소리의 주인이 추서윤이라는 뜻인가?둘이 이미 연락을 주고받은 건가?설마 출장 간 한 달 동안 줄곧 함께 붙어 있었던 건 아니겠지?어제 같이 귀국해서 밤에 추서윤과 있다가 늦게 돌아왔단 말인가?이런저런 생각에 온하랑은 마음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부승민 때문에 심장을 후벼파는 고통이 느껴져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다.“온하랑, 걱정하지 마. 설령 이혼한다고 해도 우린 한 가족이야. 내가 제일 아끼는 여동생인 건 변함없어.”여동생이라니?3년의 결혼 생활 동안 같은 침대에 누워 함께 잠을 청했는데, 결국에는 여동생의 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운명인 건가?그녀는 결코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건 그때 가서 얘기해.”온하랑은 속으로 자조적인 웃음을 짓더니 고개를 숙이고 대충 얼버무렸다.부승민이 손을 뻗어 옷깃을 잡아당기더니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참, 아까 무슨 말 하고 싶었던 거야?”온하랑은 무심하게 손에 든 서류를 넘기며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아무것도 아니야. 다음 시즌 뉴컬렉션이 출시할 계획인데 아직 결정하지 못한 부분이 있어서 오빠랑 상의하고 싶었어. 하지만 지금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거든.”어떤 말
온하랑은 휴대폰을 손에 꼭 움켜쥐었다. 가슴이 아픈 나머지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부승민이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추서윤을 데리고 친구들을 만나러 갔다니.심지어 모두가 알고 있는 공공연한 사실이며 다들 두 사람을 축복해 주기 바빴지만, 오직 그녀만 감쪽같이 속았을 뿐이었다.지난 3년 동안 부승민이 결혼했다는 건 그의 가족밖에 몰랐다.여태껏 단 한 번도 친구들을 소개해 준 적이 없었던 건 물론이고, 가끔 마주치더라도 사람들은 지레 그녀가 부씨 일가의 양녀인 줄 알았다.“사모님?”차를 빼기 위해 차고를 찾은 기사는 온하랑의 차가 아직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온하랑은 재빨리 눈물을 닦으며 못 들은 척하더니 곧바로 시동을 걸어 출발했다.사적인 감정 때문에 업무에 지장 주는 게 제일 싫은 그녀였다.당장은 일에 매진하면서 주의력을 분산시킬 수밖에 없었다.부승민의 메일 주소를 클릭하고 첨부파일에 계획표를 업로드한 뒤 온하랑은 전송을 눌렀다.곧이어 부승민이 답장을 보냈는데 여느 때처럼 간결했다.「좋아. 앞으로 신경 좀 써 줘.」온하랑은 머뭇거리다가 ‘알겠어’라고 답장하고는 재빨리 업무를 배분했다.퇴근 시간이 되자 부승민이 문자를 보냈다.「저녁에 볼일이 있으니까 먼저 가.」입술을 질끈 깨문 그녀는 또다시 바늘로 심장을 콕콕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내 떨리는 손가락으로 ‘알겠어’라고 답장했다.어쨌거나 그녀도 BX그룹의 임원에 속하는지라 예전에는 저녁 약속이 생기면 부승민은 무슨 일인지, 어떤 사람을 만나는지 구체적으로 얘기해줬는데 요즘은 단지 볼 일 있다는 말로 대충 둘러댔다.볼 일이라는 게 아마도 추서윤을 만나러 가는 거겠지.이때, 부승민의 문자가 도작했다.「출장 끝나고 돌아오면서 선물을 챙겼는데 깜빡하고 못 줬어. 내 캐리어에 있으니까 직접 가져가.」온하랑이 대답했다.「알았어.」부승민은 휴대폰 화면 속 단답형 문자를 보다가 갑자기 짜증이 스멀스멀 치밀어 올랐다. 이내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손을 뻗어 미간을 문질
온하랑은 코끝이 찡하더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씁쓸함과 실망감에 마음이 괴로웠다.이렇게 다정한 부승민의 모습은 여태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결혼 3년 동안 시종일관 무심한 태도로 그녀를 대하지 않았는가?결국 원래 그런 사람이라며 늘 스스로 위로했고,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시간이 걸어지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철석같이 믿게 되었다.이제 그녀도 부승민이 부드러운 면이 있다는 사실을 직접 목격했다. 단지 다른 여자에게만 보여주는 모습에 불과했을 뿐이다.둘은 차 앞을 지나쳤고, 부승민은 그녀의 차라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한 듯싶었다.그런데 어찌 사람 자체를 신경 쓰겠는가?“사모님, 다녀오셨어요? 저녁에 뭘 드시...”도우미는 얼떨결에 온하랑의 눈에 맺힌 눈물을 발견했고, 말을 마치기도 전에 안방으로 들어가는 그녀를 보자 차마 더는 물어보지 못했다.온몸에 힘이 다 빠진 온하랑은 문에 등을 털썩 기대었고, 울컥한 나머지 목이 메어왔다.종일 참다가 드디어 폭발한 듯 눈물이 빠르게 차올랐고, 눈가에서 흘러넘쳐 볼을 타고 톡 떨어졌다.그녀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부모님이 일찍이 이혼하고 한부모 가정에서 고생을 너무 많이 한 나머지 그녀의 아이까지 똑같은 길을 걷게 하고 싶지 않았다.온하랑은 아이만큼은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이다.하지만 그녀에게 해법을 제시하는 사람은 대체 어디 있을까?한참이 지나서 도우미가 조심스레 안방 문을 두드렸다.“사모님, 식사하세요.”잠깐의 침묵을 끝으로 온하랑은 마지못해 대답하고 화장실에 가서 세수했다.방을 나서기 전 갑자기 부승민의 문자가 떠올랐고, 출장 가서 그녀에게 줄 선물을 챙겼다고 했었다.대체 무슨 선물이지?온하랑은 옷방에 가서 그의 캐리어를 찾아 열어보았다.주얼리나 액세서리 따위 아닌 그녀가 좋아하는 팝 아티스트의 친필 사인이 담긴 음반이었다.그녀는 음반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순간, 황폐한 사막 한가운데 새싹이 돋아나는 기분이 들었다.적어도 그녀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기억하고
임리안의 매니저 홍유라는 온하랑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대뜸 화부터 냈다.“전무님, 우리 리안이 BX 그룹과 일할 급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툭 까놓고 말해주지, 이 세상에 회사가 BX 그룹만 있어요? 다른 광고를 다 거절했더니 계약까지 파기하면서 모델을 교체하는 걸 대체 어떻게 받아 들어야 하죠? 지금 장난해요? 우리가 납득할 만한 해명을 부탁드릴게요.”온하랑이 말했다.“매니저님, 일단 전정해 보세요. 리안 씨 빼고 다른 모델이 없는데 교체가 웬 말이에요? ”“하! 아직 몰라요? BX 그룹 홍보팀 전무가 직접 연락이 와서 모델 교체하겠다고 했어요.”온하랑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매니저님, 제가 지금 바로 홍보팀 찾아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다시 연락드릴게요.”전화를 끊고 온하랑은 어두운 안색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홍보팀을 찾아갔고, 하이힐이 바닥과 부딪히면서 또각또각하는 소리가 났다.BX 그룹에 입사한 지난 3년 동안 오미연이 그녀에게 딴죽 건 적이 결코 한두 번이 아니었다.“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기겠네요.”직원들이 심상치 않은 기운을 내뿜으며 떠나가는 온하랑을 보자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렸다.“홍보팀 오 전무님과 우리 전무님은 늘 사이가 안 좋았죠.”온하랑은 곧바로 홍보팀 전무실로 찾아갔다.“오미연! 대체 왜 임리안을 교체하려는 건지 똑바로 설명해 봐.”자신을 찾아온 온하랑을 보자 오미연은 마치 예상이라도 한 듯 무덤덤한 얼굴로 팔짱을 낀 채 느긋하게 걸어갔다.“온 전무, 웬 화가 그렇게 났을까? 일단 앉아서 얘기해.”“모른 척하지 마! 대표님께서 이미 컨펌한 기획안이야. 네가 뭔데 MQ의 일에 참견하는 거지?!”오미연도 지지 않고 되받아쳤다.“참견한들 뭐 어떡하려고? 대체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큰 소리 떵떵거리는 거야? 일찍 돌아간 네 아빠의 덕분이 아니라면 부씨 일가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못했을 텐데, MQ 브랜드 디렉터의 자리가 가당키나 하겠어? 제 주제도 모르고 설치면 안 되지.”온하랑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
부승민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와 오미연을 번갈아 보더니 온몸으로 싸늘한 냉기를 뿜어냈다.“두 분 취미가 독특하네요. 무려 전무라는 사람들이 어떻게 직원이 지켜보는 앞에서 말다툼하며 싸울 수 있죠? 정녕 솔선수범이 무슨 뜻인지 몰라요? 회사가 장난 같습니까?”직원들은 황급히 목을 움츠리고 몰래 눈치만 살피기 바빴다.오미연이 당당하게 말했다.“대표님, 전 한창 일하고 있었는데 온 전무가 갑자기 찾아와서 소란을 피웠습니다. 심지어 다짜고짜 손찌검까지 하고, 이런 사람이 어찌 브랜드 디렉터로서 자격이 있겠어요?”부승민의 시선이 온하랑에게 머물렀고, 어조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사과해.”온하랑은 심호흡하더니 양옆에 늘어뜨린 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오 전무가 먼저 사과하면 저도 할게요.”무려 한 기업의 전무가 사내에서 손찌검했는데 잘못한 걸 뻔히 알면서도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니?결과를 감수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 상대방이 먼저 사과하는 것이었다.오미연은 억울한 얼굴로 부승민을 바라보았다.“대표님, 제가 대체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어요...”온하랑이 반박하려는 찰나 부승민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사과해!”단호한 목소리는 거절 따위 허락하지 않았다.온하랑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쌀쌀맞은 그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눈가가 시큰했다.이제 진실이 무엇인지조차 묻지 않는 건가?부승민의 목젖이 꿀렁거렸다.“다시 한번 말한다. 사과해.”온하랑의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었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이내 부루퉁한 얼굴로 오미연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오 전무, 미안해.”오미연이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다음엔 국물도 없을 줄 알아.”“다만 왜 모델을 바꿨는지 설명 좀 해줬으면 좋겠는데?”온하랑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오미연은 피식 웃으며 부승민을 바라보았다.“당연히 대표님의 지시 아니겠어?”온하랑은 깜짝 놀라며 당황한 표정으로 부승민을 바라봤다.부승민은 부인하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