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를 들면 김웅의 입가에 물집이 생겼는데 이게 다 회사에서 잘 돼가던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라든가 같은 주제로 대화를 시작했다.회사는 대형 식품공장과 협업해 직원들의 작업복을 제공해주기로 했지만 공장에 보낸 샘플이 화학 성분에서 기준 미달 판정을 받아 문제가 생겨버린 것이었다. 공장 측에서는 회사가 원가 절감을 위해 저급한 원단을 사용했다며 엄청난 불만을 표출하고는 협업을 중단하려고 들었다.계약 금액이 상당했던 만큼 이 엄청난 바이어를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던 김웅은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썼다.김웅은 거실에서 사위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숨을 푹 내쉬며 이 일을 언급했다.“혹시 C도에 있는 네츠인 식품공장인가요?”연도진이 물었다.“맞아, 거기야. 여러 브랜드가 그 공장이랑 협업 중이라 규모가 꽤 커.”그래서인지 위생 관련해서는 조건이 상당히 까다롭고 엄격했다.“거기 대표님 성씨가 주 씨였죠, 아마?”“맞아.”김웅의 눈빛이 반짝였다.“혹시 알아?”“그 대표님한테 주현우라고 하는 아들이 있거든요. 제 대학교 친구예요.”연도진이 말했다.“이렇게 하는 건 어때요? 내일 제가 그 친구랑 같이 밥이라도 먹으면서 어떤 말이라도 전해볼 수 있는지 알아볼까요?”“그래, 그래. 도진아. 부탁 좀 할게.”김웅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폈다. 연도진이 자신의 사위로 들어온 것이 더욱 만족스러웠다.“같이 나가만 준다면 그 모든 금액은 내가 책임질게.”“제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걸요.”김시연이 김연자와 함께 방에서 나오며 둘의 대화를 엿듣고 무심코 물었다.“무슨 일이야?”“그러니까 그게...”김웅이 김시연에게 간단히 설명해주며 연도진을 마치 친아들 대하듯 바라보며 말했다.“도진이 좀 봐라, 인맥 얼마나 좋니.”김시연이 눈썹을 들썩이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연도진을 바라보았다.이런 우연이 다 있다고?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연도진은 그저 옅은 미소만 짓고는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점심 식사를 마치자 김연자는 신혼부부인 두
김시연은 그를 바라보더니 정색하며 물었다.“남 보기 부끄러운 물건이 뭔데?”“그건 네가 더 잘 알겠지.”연도진은 안경을 벗으며 말을 이었다.“정교하고 디자인이 예쁜 상자인 걸 보니까 결혼 축하 선물인 것 같은데 이것만 별장으로 옮기지 않은 게 이상하단 말이야. 설마...”“설마 뭐?”김시영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설마 다른 남자가 준 선물인데 내가 볼까 봐 숨겼던 거야?”할 말을 잃은 김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도진을 째려봤다.“맞아. 다른 남자가 준 거야. 우리 둘만의 비밀이라서 넌 절대 보면 안 되거든.”연도진은 흥미롭다는 듯이 눈썹을 올렸다.“편지에 뭐라고 적혔어? 결혼한 걸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 연락하자는 그런 식상한 말이겠지? 그래도 눈치있는 남자네.”김시연은 헛웃음이 나왔다.“내 매력이 엄청난 걸 모르는구나? 결혼해도 연락 끊지 말자고 나한테 애원하는 편지야.”김시연은 옷을 정리하면서 말을 이었다.“평생 사람 눈에 띄지 않는 내연남으로 살아도 좋으니 한 달에 두 번만 만나달라고 하네? 그거면 더 이상 바라는 게 없다는데?”연도진이 아무 말 하지 않자 김시연은 개어 놓은 옷들을 트렁크에 넣고선 캐비넷 앞에 서서 도발하는 눈빛을 보냈다.그러자 연도진은 곧바로 다가와 그녀의 귓가에 뜨거운 숨결을 불어 넣으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한달에 두번? 그럼 남편은 한 달에 몇 번씩 만족시켜 줄 거야?”뼛속까지 파고드는 간지러움에 김시연은 저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다.“뭐라는 거야...”“한 달에 몇 번씩 할 거냐고 물어보잖아.”“우리 각방 쓰기로 약속했잖아... 나한테 접근하지 마...”김시연은 심장이 너무 뛰어 숨이 안 쉬어질 지경이었다.그러나 연도진은 결코 물러서지 않았고 김시연의 손목을 꽉 잡고선 입술을 그녀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유혹했다.“계약서에 관계를 가지면 안된다는 조건은 없었어. 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함부로 방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만 규정되어 있을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김시연은 한참 동안 머리를 굴리며 핑계를 생각했다.“그게... 방에 있는 이불도 잊지 말고 빨아달라고요. 시간 날 때마다 와서 잘 거예요.”“그걸 말이라고 하니?”“신혼집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직 모르죠? 그러지 말고 같이 별장에 들어가서 사실래요?”“그런 건 나중에 확인해도 늦지 않아. 그리고 신혼인데 둘만의 시간을 보내야지.”“뭐 어때요. 별장에 방이 엄청 많아요.”“아무튼 지금은 아니야. 너도 이제는 결혼했으니까 제멋대로 굴면 안 돼. 뭔가를 결정할 때는 도진이의 입장도 고려해 봐. 도진이는 분명히 너와 단둘이 살고 싶어 할 거야.”김시연은 죄책감에 시선을 돌렸다.그렇게 한참 동안 자질구레한 일을 캐물으며 시간을 끌다가 김연자가 귀찮은 듯 밖으로 내쫓자 마지못해 걸음을 옮겼다.방으로 돌아온 김시연은 조심스럽게 손잡이를 내리더니 고개를 빼꼼 들이밀었다.안쪽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으나 서재 문이 열려 있었다. 연도진은 의자에 앉아 등받이에 팔을 올린 채 웃으며 물었다.“뭐 하는 거야? 누가 보면 도둑인 줄 알겠어.”김시연은 대꾸조차 하지 않고 남은 옷마저 정리했다.오후 4시쯤 두 사람은 별장으로 돌아왔다.이것저것 정리하던 김시연은 친구 허윤진이 보내온 카톡을 받았는데 친구들이랑 클럽에서 만나자는 내용이 담겨있었다.허윤진이 바로 토끼와 당근세트를 선물해 준 신부 들러리중 한 명이었고 아버지 친구의 딸이라서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이다.저택에서 겪었던 일이 떠오른 김시연은 연도진이 또 함부로 할까 봐 걱정되어 별장에 머물고 싶지 않았고 말 한마디만 남기고선 클럽으로 향했다.클럽에 도착한 김시연은 허윤진의 집중 공격을 당했다.“시연이 왔네? 결혼 생활은 어때? 관계에는 문제없지? 아참, 내가 준 선물은 써봤어?”허윤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밝고 활기찬 허윤진은 평소 일에만 몰두하여 남자 친구를 사귈 틈이 없었다. 외로움을 느낄 때는 주로 파트너를 찾아서 해결했고 달마다 사람을 바꿔가며 만났기에 그쪽으로는 경험이 아주
허윤진도 입을 열었다.“에이, 말도 안 돼. 도진 씨 엄청 신사적인 사람으로 보이던데?”“밖에서는 다 그렇지. 시연이가 술에 취해 누워있는데 그걸 참을만한 남편이 어디 있냐.”친구 한 명이 의미심장하게 웃더니 손목에 찬 시계를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난 두 사람이 오늘 관계를 가진다에 시계를 건다.”유명 브랜드거나 한정판 시계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1억의 가치는 있었다.“난 오늘 밤 안한다에 가방을 걸게.”허윤진은 오늘 들고온 아기자기한 핸드백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난 잔다에 한 표.”또 누군가는 목걸이와 시계를 함께 걸었다.“난 안 잔다에 한 표.”그렇게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내기에 참여하게 되었다.그 시각 술 취한 척 소파에 누워있던 김시연은 모든 대화를 듣게 되었고 순간 귀를 의심했다.처음부터 작정하고 술이 먹이는 친구들의 모습에 차라리 취한척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지금껏 연기를 했던 것인데, 친구라는 인간들은 시답잖은 일로 내기를 하고 있으니 참 어이가 없었다.허윤진은 김시연이 듣고 있는 줄도 모르고 신이 나서 수다 떨며 술을 마쳤다.얼마 지나지 않아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연도진입니다. 들어가도 될까요?”“네. 들어오세요.”“그럼 실례하겠습니다.”연도진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허윤진은 피곤함에 찌든 연도진의 얼굴을 보고선 웃음이 나왔다.“죄송해요. 오랜만에 시연이를 만났더니 다들 기분이 좋은지 술을 많이 마셨어요.”“괜찮아요.”연도진은 소파에 누워있는 김시연에게 다가가더니 단숨에 그녀를 번쩍 안았다.“그럼 시연이랑 먼저 가보겠습니다.”“조심히 가세요.”그가 룸에 나서기 전에 두 사람이 오늘 밤 관계를 가진다에 한 표를 걸었던 친구가 입을 열었다.“아참, 시연이가 실수로 옷에 술을 쏟았어요. 많이 끈적일 텐데 이제 꼭 갈아입혀 주세요.”“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연도진이 답했다.‘이것들이 다음에 걸리기만 해봐...’김시연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친구들은
“밖에서는 다 그렇지. 시연이가 술에 취해 누워있는데 그걸 참을만한 남편이 어디 있냐.”“아참, 시연이가 실수로 옷에 술을 쏟았어요. 많이 끈적일 텐데 이제 꼭 갈아입혀 주세요.”김시연은 순간 연도진이 어떻게 행동할지 궁금했다.정말로 그가 신사적인 남자인지 아니면 보통 남자와 다를 바가 없는지 테스트해 보고 싶었다.이런 행동을 하면 안 된다는 걸 잘 알았지만 호기심이 이미 이성을 지배해버렸다.잠시 머뭇거리는 사이에 연도진은 어느새 그린 빌리지 지하 주차장에 차를 멈췄고 뒷좌석으로 다가와 그녀를 번쩍 안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김시연은 안방 침대 위에 눕혀졌고 곧이어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간거야? 윤진이의 말이 맞았네.’김시연은 실눈을 뜨고 재빨리 방안을 훑어보았다.‘정말 갔어?’서운함과 안도감의 동시에 밀려온 김시연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바로 그때 옷방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김시연은 귀를 쫑긋 세웠다.‘뭐지? 설마 옷 찾는 거야? 갈아입혀 주려는 건 아니겠지?’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발소리가 다가오자 재빨리 눈을 감았다.날씨가 쌀쌀해진 10월 중순. 김시연은 롱스커트와 코트를 입고 나갔고 아래에는 스타킹과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연도진은 잠옷을 옆에 내려놓더니 침대 끝에 앉아 그녀의 신발을 벗겼다.그 후 침대에 다리 한쪽을 걸치고선 김시연의 코트를 벗겨주었고 곧이어 스커트의 단추를 풀었다.김시연은 심란한 마음에 온몸이 경직되었고 불길한 예감이 밀려와 연도진의 행동에 호기심을 가진 과거의 자신을 원망했다.‘아니야... 분명히 나한테 옷 입혀줄 거야.’‘연도진, 얼른 입혀주지 않고 뭐 하는 거야!’김시연은 발가벗겨진 듯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연도진의 시선이 느껴졌다.아니, 정확히 말하면 전부 벗겨진 게 맞았다.지금 눈을 뜬다면 더욱 난처한 상황이기에 김시연은 계속 잠든 척 하기로 마음먹었다.연도진이 옷을 입혀주는 걸 기다리는수밖에...그런데 그때 쇄골에 뜨거운 숨결이 느껴지며
곧이어 연도진은 구멍 난 스타킹과 속옷을 벗겼다.김시연은 쿵쾅거리는 가슴과 함께 눈을 꼭 감은 채 조용히 연도진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그리고 그녀는 욕실로 향하는 연도진의 발소리를 들었고 바로 물소리도 들려왔다.‘생각보다 깨끗하네.’2분 후 물소리가 멎고 연도진이 욕실에서 나왔다.다시 숨을 죽인 김시연은 조마조마하면서도 마음속에는 일말의 기대가 있었다.문득 차가운 촉감이 하체에서 느껴졌고 예상못한 상황에 몸을 부들부들 떨던 김시연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뻔했다.뒤늦게 그녀는 연도진이 수건으로 자신을 닦아주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다 닦고 나니 옆에서 바스락거리는 인기척이 들렸다.‘드디어 옷을 벗는 건가?’기대와 달리 연도진은 깨끗한 속옷으로 갈아입힌 후 잠옷을 집어 들고 앞뒷면을 확인하고선 입혀주었다.그뿐만 아니라 조심스럽게 이불까지 덮어줬다.‘뭐야? 이게 끝이야? 뭘 기대했던 거지?’허무함과 분노가 뒤섞인 감정이 느껴지자 김시연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발가벗고 있는데도 그냥 간다고? 내 몸매가 그렇게 별로인가? 기분이 너무 불쾌하네. 설마 지금 날 갖고 노는 거야?’김시연은 화를 삭히지 못하고 씩씩거렸다.그 사이 욕실로 갔던 연도진은 클렌징 티슈를 들고나오더니 김시연의 화장을 지워줬다.그 시각 김시연은 이불 밑으로 침대 시트를 꽉 쥔 채 애써 분노를 삼켰다.화장을 지운 후 연도진은 그녀의 얼굴에 에센스를 발라주고선 조용히 안방을 나갔고 순간 방안은 조용해지며 정적이 흘렀다.그제야 실눈을 뜬 김시연은 연도진이 완전히 나간 걸 확인하고선 착잡한 심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몸을 뒤척이며 자세를 바꾸던 중 갑자기 방문이 다시 열렸다.김시연은 재빨리 자세를 바로잡고 눈을 감은 채 자는척했다.‘왜 또 들어온 거야.’발소리와 함께 침대 옆으로 다가온 그는 쿵 하며 침대 머리맡 탁자 위에 뭔가를 올려놓고 다시 나갔다.눈을 뜨고 보니 옆에는 텀블러가 놓여있었다.‘센스는 있네.’김시연도 마침 목이 말랐다.다음 날 아침 일찍
김웅은 연도진이 점점 더 마음에 들었다.며칠 뒤 회식 자리에서 네츠인 식품공장 담당자는 대표의 지시를 받았고 앞으로 계속 협력해도 문제없을 거라는 말을 전했다.그 소식을 듣고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던 김웅은 곧바로 연도진과 김시연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식사 전 김연자와 김시연은 방에서 수다를 떨다가 또 여행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다.“그럼 콘서트 일은 이제 다 끝난 거지? 너희는 언제 여행 갈 거야?”김시연은 곧바로 답했다.“도진이가 요즘에 많이 바빠요. 그래서 내년 봄쯤에 가기로 결정했어요.”“괜찮네.”거짓말이 들통날까 봐 걱정되었던 김시연은 기회를 엿봐서 연도진에게 말했다.“엄마가 물어보면 요즘 바쁘다고 답해. 내가 엄마한테 내년 봄쯤에 여행 갈 거라고 했으니까 너도 그렇게 말하고.”연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역시나 예상대로 식사 자리에서 김연자는 연도진의 일에 대해 물었다.“새로운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있어서 시간이 아예 없네요. 나중에 여유가 될 때 가야죠.”김시연은 연도진을 힐끗 쳐다보더니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이때 연도진이 다시 말을 이었다.“내일부터 일주일 동안 현지 답사하러 다움시로 출장 갈 거예요.”며칠 전에는 김시연이 콘서트 때문에 시간이 없었고 이제는 연도진이 또 출장을 간다고 하니 김연자는 부부가 함께 있는 시간이 별로 없는 게 답답했다.김연자는 기분이 언짢은 듯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시연이랑 같이 가는 건 별로야?”“안 그래도 얘기했는데 싫다고 하더라고요.”김시연은 테이블 밑으로 그의 다리를 세게 꼬집었다.‘언제 나한테 얘기했어!’김연자는 곧바로 김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너 요즘 스케줄도 없잖아. 왜 싫다고 했어?”신혼부부라면 같이 붙어있고 싶기 마련이다.“저... 며칠 뒤에 제의시로 출장 가요.”김시연은 머리를 쥐어짜 내 그럴듯한 변명을 얘기했다.“다움에서 바로 가도 되잖아?”“메이크업 박스랑 옷도 챙겨야 해서 번거로워요.”“어시스턴트랑 같이 가면 되겠네.”
온하랑은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그래? 생긴 게 비슷할 수도 있지.”부시아의 외삼촌 측 이엘리아의 오빠는 분명히 혼혈이다. 연도진은 코가 높고 눈망울이 깊어 외국인과 비슷한 느낌이었기에 두 사람의 눈매가 닮아있으니 부시아가 오해할 만도 하다.부시아는 외삼촌도 어차피 한국에 계시니 시간을 내어 다 같이 밥이라도 먹고 싶었다. 그러나 외삼촌이 온하랑을 싫어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고개를 저었다.“뭐가 비슷한데?”통화 중이던 부승민은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물었다.부시아는 그가 외삼촌을 만난 적 있고 김시연의 결혼식에 직접 갔으니 분명히 알 거라고 생각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아빠, 외삼촌이랑 시연 이모 남편분이 엄청 닮은 것 같지 않아요?”부승민은 그 말을 듣고 어리둥절했다.‘닮은 것 같다니? 그냥 연도진이잖아.’그는 온하랑과 부시아를 번갈아 봤다. 답을 기다리는 듯 나란히 앉아 눈을 반짝이는 두 사람의 표정이 너무 닮아있어 부승민은 부시아가 그들의 딸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아빠?”정신을 차린 부승민은 의자를 끌어당기며 온하랑의 옆에 앉았다.“많이 비슷해.”말하면서 그는 온하랑과 부시아의 표정을 관찰했다.혼자만의 착각인 줄 알았는데 부승민의 답을 듣자 확신이 생겼다.“전 같은 사람인 줄 알았어요.”온하랑은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생각에 차분한 표정이었다.두 사람은 김시연의 남편인 연도진이 이엘리아의 오빠인 카이사르와 동일 인물임을 모르고 있었다.온하랑은 ‘카이사르’를 만난 적이 없고 부시아는 ‘연도진’을 만난 적이 없다.그렇게 오해는 더 큰 오해를 불러봤다.‘설마 의도적으로 숨긴 건 아니겠지?’한참 동안 말없이 생각에 잠긴 부승민은 연도진이 일부러 숨겼을 거라고 확신했다.김시연의 성격상 이엘리아와 관련된 모든 사람을 싫어했을 텐데 그녀의 오빠와 결혼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다.순간 첫 만남에 연도진의 혼혈 여부를 의심했을 때 단호하게 아니라고 답하던 김시연의 모습이 떠올랐
방안은 어두웠고 쥐죽은 듯 조용했으며 가끔 바깥 거리에서 들려오는 기적 소리만 들렸다.설윤이 네 번째로 몸을 뒤척일 때 옆에서 최동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잠이 안 와요?”낮고 유혹적인 목소리가 깊은 밤의 정적을 뚫고 그녀의 고막을 가볍게 두드렸다.“... 네, 동철 씨도 잠이 안 와요?”“네.”최동철은 낮은 소리로 대답했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실내는 다시 조용해졌고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집안의 난방이 너무 커서인지 설윤은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다치지 않은 발목으로 이불을 걷어차며 팔을 이불 밖으로 내밀었는데 조심하지 않고 최동철이 밖에 놓은 팔과 부딪혔다.피부가 닿는 순간 설윤은 재빨리 팔을 비켰으나 뜻밖에도 최동철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떠나지 못하게 했다.그의 손은 매우 컸다. 뜨거운 온도가 그녀의 몸에 닿는 순간 그 뜨거운 열기가 서서히 얼굴에 퍼지며 설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설윤은 머뭇거리다가 그의 손에서 손목을 빼려고 힘을 썼지만 실패했다.“뭐 하는 거예요?”“보통 운동 후에 몸이 피곤해서 잠이 잘 오는데, 한 번 시도해 보겠어요?”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둠 속에서 그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설윤은 그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치 아침에 무엇을 먹을지 묻는 것 같았다.몇 초 동안 머뭇거리다가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네.”그 목소리는 깃털처럼 가벼워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았다.그녀의 대답은 마치 닫힌 문을 여는 열쇠처럼 들렸다. 최동철은 그녀의 팔을 풀어주었는데 그녀가 손을 거둘 때 신속히 이불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남자는 공격적인 기운을 풍기며 달려들어 순식간에 그녀를 덮쳤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또 겁이 났다.그녀는 숨을 죽이고 손끝을 그의 가슴에 떨어뜨린 채 천천히 위로 거슬러 올라가 어깨에 놓았다.“... 몸에 상처가 있는데 그럼...”“조심할게요.”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두 눈이 마주쳤다.서로의 눈 밑에는 빛을 볼 수
설윤이 차례로 밖에 씌워져 있는 랩과 붕대를 제거하니 몇 바늘 꿰맨 상처가 드러났다.그녀는 알코올로 주변을 부드럽게 닦은 후 다시 연고를 꺼내 면봉으로 고르게 발랐다.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드러난 옆모습은 매끄러운 얼굴 라인을 자랑했다. 아마 스무 살 어린 나이어서인지 볼에는 젖살이 있어 통통했고 피부는 희고 섬세해서 모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거즈를 몇 바퀴 두른 후 설윤은 나비 모양으로 매듭을 지었다.“다 됐어요.”“고마워요.”“별말씀을요.”설윤은 자신의 발목을 내려다보았다.“난 샤워하러 가고 싶어요. 욕실에 걸상 하나 놔줄 수 있어요?”최동철은 몸을 일으켜 동그란 걸상을 들고 화장실로 갔다. 다시 나오면서 그는 다치지 않은 팔을 내밀려 말했다.“부축해 줄게요.”설윤은 느릿느릿 침대로 옮겨 한 손을 그의 팔에 얹고는 다치지 않은 발을 먼저 땅에 대고는 절뚝거리며 화장실로 갔다.그녀를 안쪽 욕실로 데려다준 후 최동철은 샴푸 등을 욕실 벽에 있는 선반 위에 놓아주고는 밖으로 나가며 문을 닫아 주었다.설윤은 느릿느릿 옷을 벗었다. 속옷은 팬티는 이거 하나밖에 없었다. 빨면 곧 마를 수 있겠지만 마르기 전에는 그저...이틀 전에는 혼자 살아서 괜찮았지만 지금은 곁에 남자가 한 명 많아졌다.그러나 씻지 않으면 위생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두 장 더 사는 건데...’고민 끝에 설윤은 속옷을 빨았다. 다 빤 후 드라이어로 말리면 10분 정도면 다 마를 수 있었다.이때 설윤은 문득 최동철이 나왔을 때 머리를 말리지 않은 것이 떠올랐는데 보아하니 드라이어로 팬티를 말린 것 같았다.간단히 샤워를 마친 후 설윤은 팬티를 씻고 말린 후 간단히 머리도 말렸다. 그런후 속옷과 팬티를 입고 목욕 수건을 둘렀는데 다행히도 이 수건은 충분히 길어서 가슴부터 무릎까지 감쌀 수 있었다.이때 밖에서 문소리가 들렸다.“다 씻었어요?”“...네.”“그럼 제가 들어갈까요?”
그녀의 최근 행동을 보면 물질, 환경, 품질 등에 큰 요구가 없는 것 같다."물론이죠."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부잣집 도련님은 일반인에게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설윤은 회억에 잠겨 말했다.“제가 아주 어렸을 때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그때 이웃들이 그러는데 엄마 병은 고칠 수 있었지만 돈이 없어서 일찍 퇴원했기 때문에 병세를 끌어서 돌아갔다고 했어요.”엄마가 돌아간 후 집주인은 장례를 치러주고는 그녀를 보육원에 보냈다.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최동철은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미안해요.”그는 그녀의 신원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 문서에는 간단히 ‘6살 때 생모 병으로 사망’으로만 적혀있었다. 그녀의 입을 통해 들으니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괜찮아요. 다 지나갔어요.”설윤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혹시 동철 씨는 돈이 싫으세요?”최동철은 그녀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돈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왜 최국환과 임가희와 암투를 벌였을까?“돈은 나에게 있어 숫자일 뿐이죠. 어쩌면 우리가 다투는 것은 돈이 아니라 권력이에요. 더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권력이죠.”최동철이 덤덤하게 말했다.설윤은 아는 둥 마는 둥 고개를 끄덕였다. 호텔에서 최동철을 끌어들인 후 그는 주위를 살펴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처음으로 이렇게 허름한 곳에 왔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고 선택의 여지가 없어 참았을 뿐이다.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었을 뿐인데 겨울 날씨여서 그런지 금세 어두워졌다.저녁을 먹은 후 설윤은 또 얼음찜질하고 연고를 한 번 더 발랐다.발목 부기가 많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나는 것을 보아 최동철이 샤워를 하는 모양이다.며칠 동안 피해 살다가 드디어 안전하고 안정된 환경에 이르자 그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어깨에 부상이 났다고 설윤이 일깨워주었지만 최동철은 신경 쓰지 않고 랩으로 상처를 감싼 후 씻으러 갔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어젯밤에 본 화면이 떠올랐다.넓은 어깨와 가슴,
최동철은 잠시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그런데, 젊은이. 아내랑은 어떻게 알게 됐어? 정말 잘 어울리네.”둘 다 잘생기고 아름다웠으니까.“저희는... 대학 동기입니다.”“그래? 몰라보겠어. 아내는 참 어려 보이는데 벌써 스물여섯이라니.”최동철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네, 동안이라 자주 오해를 받습니다.”스물여섯은 설윤의 가짜 나이였다.집주인은 작은 양념병을 들고 나와 최동철에게 건넸고 우유 두 병도 함께 내주었다.돌아온 후, 최동철은 집주인 아주머니의 말을 설윤에게 전했다.설윤은 웃으며 말했다. “동철 씨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서로 잘 맞춰주니 완벽하네요.”최동철은 가볍게 웃으며 가스레인지의 밸브를 열었다.점심은 밥에 감자 볶음과 돼지고기였다.최동철의 요리 실력은 훌륭했다. 삼겹살을 바삭하게 볶아내 느끼함 없이 밥과 잘 어울렸다.다행히도 다친 쪽은 왼팔이라 오른손으로는 무리 없이 할 수 있었으나 속도는 다소 느렸다.식사 후, 설윤은 다시 한 번 발목에 냉찜질을 했다.냉찜질을 끝낸 후 최동철이 약을 가져오자 설윤이 말했다. “제가 할게요.”“그래요.” 최동철은 순순히 응했다. 한 손으로는 불편했으니까.바쁜 대도시의 일상에서 벗어나 외출할 수 없는 민박집 안, 두 사람은 갑자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설윤은 침대에 기대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고 최동철은 소파에 앉아 눈을 감은 채 잠시 멍하니 있었다.설윤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옆모습은 뚜렷한 이마선과 오똑한 콧대가 더해져 눈매가 깊어 보였고 날카로운 턱선이 또렷했다.정말 잘생겼다.그의 이목구비는 최국환과 약간 닮았다.하지만 나잇살이 들어 퉁퉁해진 최국환과는 달리 최동철은 참으로 젊었다. 눈빛 속에도 서른 살 남자의 단단함으로 가득했고 이는 세상 물정에 밝고 노련한 최국환과 완전 달랐다.잠시 머뭇거리던 설윤이 말했다. “동철 씨, 피곤하면 여기서 주무세요.”그의 키는 너무 커서 작은 소파에선 편히 쉴 수 없었다.설윤은 발목 부상
최동철은 약품이 담긴 봉지를 찾아 안에서 멍과 부기를 가라앉히는 연고를 꺼냈다. 고개를 돌리니, 설윤이 느릿느릿 신발을 벗고 있었다.그는 연고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그녀 앞에 쭈그려 앉았다. “내가 해줄게요.”신발과 양말을 벗자 뽀얗고 작은 발이 드러났다. 다섯 개의 발가락은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었고 동글동글 귀여웠다. 발톱은 깔끔한 곡선을 이루며 정리되어 있었으며 발등의 뼈선은 유려하게 흐르며 섬세한 곡선을 그렸다.발목 근처에는 큼직한 멍과 부기가 올라와 있었다.최동철은 그녀의 발바닥을 받쳐 들고 부은 부위를 살짝 눌러보았다.“앗...” 설윤이 숨을 들이마시며 얼굴을 찡그렸다.“아파요, 누르지 마세요.”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상태가 꽤 심각해 보이는데 내가 침대까지 옮겨줄 테니까 당분간은 움직이지 마요.”그렇게 말하며 일어나 그녀를 안으려 했다.“안 돼요!” 설윤은 급히 손으로 그를 막았다. “동철 씨도 팔 다쳤잖아요.”최동철은 몸을 숙여 다친 왼팔은 내리고 오른팔로 그녀의 다리 밑을 감싸 안았다. “두 손으로 내 목을 잡아요. 이쪽 팔은 힘을 쓰지 않을 거니까 안심해요.”한 손으로 안으려고?설윤은 그의 목에 양팔을 감고 조심스럽게 몸을 맡겼다.그는 오른팔로 그녀의 허벅지를 받치고 두 걸음 만에 침대 곁으로 가서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잠시만 기다려요. 집주인한테 얼음팩 좀 받아올게요.”“네.”최동철은 약 10분 뒤 얼음주머니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하나는 냉장고에 넣고 다른 하나는 그녀의 발목에 살며시 대주었다.얼음의 차가운 감촉에 설윤은 본능적으로 입술을 앙다물고 손으로 얼음주머니를 누르며 말했다.“너무 차가워요.”“20분은 찜질해야 해요. 하루에 세 번에서 네 번 정도로요.”설윤은 그에게 붕대를 가져와 얼음주머니와 발목을 단단히 감도록 했다.그녀는 침대 머리에 기대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우리 둘 다 밖에 나가지 말죠. 배달 앱으로 장을 보면 되니까요. 그런데 동철 씨,
의사는 최동철을 한번 쳐다보며 말했다. “젊은이, 앞으로는 아내 말 잘 들어요. 괜히 고집부리지 말고.”“여보, 들었지? 의사 선생님도 그러시잖아!”최동철은 잠시 입을 말없이 있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겠어.”봉합이 끝난 뒤, 의사는 약을 처방해주었다.병원을 나서며 설윤은 최동철을 바라보았다. “이제 어디로 갈 거예요? 누가 데리러 와요?”최동철은 그녀를 한번 쳐다보고 짧게 대답했다. “당분간은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설윤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왜요?”“그건 알 필요 없어요.”설윤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래요.”그녀는 두 걸음 앞서 걸으며 말했다.“이 작은 도시는 꽤 조용하네요. 며칠 더 머물 생각인데, 동철 씨도 안 간다니까 같이 지낼까요? 서로 보호도 되고.”최동철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호텔은 눈에 띄니까 단기 임대 민박을 찾는 게 더 안전하고 편리할 거예요.”“좋아요.”“근데 검색해 보니까 민박은 대부분 더블침대 방이더라고요. 괜찮으세요?”“설윤 씨가 괜찮다면 전 상관없어요.”“그럼 예약할게요.”최동철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온라인으로 예약할 거예요?”대부분의 예약 앱은 신분증 정보를 입력해야 해서, 한 번 사용하면 위치가 노출될 위험이 있었다.설윤은 그의 걱정을 알아채고 휴대폰을 흔들며 말했다.“걱정 마세요. 이 폰은 제 이름으로 등록된 게 아니에요. 추적 못 할 거예요.”최동철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준비가 철저하네요. 그런데 어떻게 임가희한테 이렇게 몰렸어요?”“임가희가 이렇게 빨리 제 존재를 눈치챌 줄 몰랐거든요. 그랬다면 좀 더 철저히 준비했을 텐데요.”최동철은 코끝을 만지작거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 먼 곳을 바라봤다. 마치 자신이 그녀의 정보를 넘긴 장본인이 아니라는 듯이.간단히 아침을 먹은 후, 두 사람은 예약한 민박으로 향했다.민박은 단일 방 구조로, 면적은 47㎡. 방에 들어서면 왼쪽에는 오픈형 주방이 있고 가스레인지
이튿날 아침, 최동철은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패딩 점퍼에 청바지, 스니커즈, 그리고 새로 정리한 헤어스타일까지 더해지니 몇 년은 젊어 보였다. 게다가 넉넉한 핏의 패딩은 그의 체형을 자연스럽게 감춰주었다.“자, 마스크도 잊지 말고 쓰세요.”“네.” 최동철은 대답하며 책상 위의 마스크를 집어 썼다.지금 이 모습이라면 자세히 보지 않는 한 그를 알아보긴 어려울 터였다.최동철은 설윤이 입고 있는 패딩 점퍼를 힐끗 바라보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설윤은 웃으며 설명했다. “작은 가게라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았어요. 그리고 커플룩이 신분을 숨기기에 더 좋아요.”“그렇군요.”“제가 먼저 내려가서 체크아웃하고 주변 상황을 살펴볼게요. 연락드리면 그때 내려오세요. 미리 택시도 불러놓을게요.”“알겠습니다.”“그럼 다녀오겠습니다.”“네.”설윤은 크고 작은 가방을 들고 나갔는데 가방 안에는 두 사람이 입었던 옷이 담겨 있었다. 이곳에 그냥 두면 흔적이 남을 수 있어 길 가다 버릴 생각이었다.복도에는 아무도 없었고 설윤은 무사히 로비에 도착해 체크아웃을 마쳤다. 거리로 나서며 핸드폰으로 택시를 부르면서도 그녀는 자연스럽게 주변을 살폈다.길 건너편 왼쪽, 작은 만두 가게에는 손님들로 북적였다. 가게 앞에는 접이식 테이블 두 개가 놓여 있었고 그중 한 테이블에는 건장한 남자가 앉아 가끔씩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그 자리는 아침을 먹으며 호텔을 감시하기에 딱 좋은 위치였다.설윤은 주변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는데 감시자는 그 남자 한 사람뿐인 듯했다.아마도 어젯밤 이들이 호텔 방마다 수색했지만 최동철의 흔적을 찾지 못해 속았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래서 한 명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주변을 수색하러 간 모양이었다.2분쯤 지나 설윤이 부른 택시가 호텔 앞에 도착했다.설윤은 최동철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차 문을 열며 짐을 싣다가 말했다. “기사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제 남편이 금방 내려올 거예요.”“네, 알겠습니다.”설윤은 다시 로비로 들어갔다.1분쯤
최동철이 말했다.“그럼 내일 병원에 다녀와야겠어요.”“제가 도와드릴게요.”약을 다 바른 뒤, 설윤은 그에게 거즈를 감아주며 말했다. “됐어요, 이제 좀 쉬세요. 전 잠깐 나갔다 올게요.”“어디 가려고요?” 최동철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임가희 쪽 사람들이랑 마주칠 수도 있으니 조심해요.”“필요한 물건을 좀 사야 하거든요. 걱정 마세요.” 설윤은 가볍게 비웃으며 말했다. “그 인간들 손아귀에서 도망쳐 나온 제가 다시 잡힐 것 같아요?”최동철은 그녀가 방금 주머니에 넣은 휴대폰을 힐끗 보며 물었다. “왜 아버지한테 연락해서 상황을 설명하지 않는 거예요?”“이미 기회를 놓쳤어요. 제가 뭐라 해도 믿지 않을걸요?”“그럼 이렇게 지내는 것도 괜찮아요?”“당연히 괜찮지 않죠. 하지만 지금은 방법이 없어요. 기회만 생기면 반드시 다시 돌아갈 거예요.”“성공하길 바라요.” 최동철이 씩 웃으며 말했다. “돈은 있어요? 부족하면 제 카드를 써요.”설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럼 조금만 써도 돼요?”돈이야 많을 수록 좋은 법이니까.최동철은 벽에 걸린 외투를 가리켰다. “지갑은 저기 외투 주머니에 있으니까 직접 꺼내요. 현금은 많지 않지만 블랙카드는 비밀번호가 필요 없어요. 사람이 적은 ATM에서 현금을 인출할 수 있을 거예요.”외투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니 고급 가죽의 촉감이 손에 닿았다.“얼마든지 뽑아도 괜찮아요?” 그녀가 돌아보며 물었다.“물론이죠.”“최 대표님, 참 후하시네요.”“제 목숨은 값으로 따질 수 없으니까요.”설윤은 밖으로 나갔다.최동철은 항생제를 먹고 씻은 뒤 침대에 누워 쉬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피곤했던지 스르르 잠이 들었다가 갑자기 깨어났다.시계를 보니 벌써 열한 시였다.설윤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나?최동철이 일어나 그녀를 찾으러 갈까 고민하던 찰나, 설윤이 돌아왔다. 그녀는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늦었네요. 위험한 일은 없었어요?”“없었어요.” 설윤은 고개를 저으며
최동철은 그 말을 듣고 샤워기를 틀었다.설윤은 간식이 담긴 비닐봉지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그 위에 놓인 칼을 가렸고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걸어가 문을 여니 예상대로 복도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그는 방 안을 힐끗거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키우는 햄스터가 실수로 도망쳤는데, 혹시 보셨나요?”설윤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방금 밖에 나갔다 와서요. 잘 모르겠네요. 남편한테 물어봐 드릴게요.”그녀는 욕실 쪽을 향해 소리쳤다. “여보, 혹시 햄스터가 들어오는 거 봤어?”샤워기에서 물 흐르는 소리만 들릴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설윤은 욕실 문을 살짝 열고 머리를 들이밀었다. “여보, 작은 햄스터가 들어온 거 못 봤어?”몇 초간 침묵이 흐른 후, 그녀는 머리를 빼고 남자에게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못 봤대요. 다른 곳도 한번 찾아보세요.”“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남자는 의심 없이 돌아섰다.최동철처럼 몸에 상처를 입은 사람을 숨겨줄 이는 남자일 수밖에 없었다.설윤은 차분히 문을 닫고 귀를 문에 붙여 조심스럽게 소리를 들었다. 남자가 정말로 떠났음을 확인한 후에야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욕실 문을 열며 말했다. “갔으니 나와요.”그리고 테이블로 가서 비닐봉지 안에서 약들을 꺼냈다. “자요, 여기 이 약들이 충분한지 확인해봐요.”최동철은 뒤에서 걸어나와 약의 종류와 양을 살펴봤다. “고마워요.”“별말씀을요.” 설윤은 생수를 주전자에 붓고 버튼을 눌렀다. “제가 약 발라줄까요?”“그럼 부탁할게요. 고마워요.”최동철은 잠시 망설였으나 곧 수락하고 천천히 겉옷을 벗기 시작했다.그가 왼팔을 제대로 쓰지 못하자 설윤이 다가가 도와주었다. 그녀는 그의 겉옷을 벗기고 벽걸이에 걸었다.안에는 짙은 회색 니트가 있었고 상처 부위는 터져 피로 얼룩져 있었다. 니트를 벗으려면 팔을 들어야 했기에 설윤은 그의 어깨 상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냥 잘라낼까요? 이 옷은 이미 알아본 사람들이 많으니까요.